2014. 7. 15. 14:10ㆍ독서후기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 송복 지음
0 경남 남해 생.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신문 대학원(문학),
0 하와이 대학 정치학 박사, 연세대 교수
0 저서 : 조직과 권력, 한국 사회의 갈등구조, 동양적 가치란 무엇인가.
열린사회와 보수, 일류의 논리 등
0 편저, 역서, 논문 등 80여 편
■ 서문 : 징비(懲毖)하지 않는 자에게 역사는 자비롭지 않았다
* 징비 :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삼감
온 몸을 바쳐 이 땅을 지켜낸 위인의 리더십 연구 일환으로 ‘서애 류성룡 위대한 만남’을 낸지 여섯 해가 지나고 또 여섯 달이 됐다. 그 다음으로 우암 송시열을 주목해 그의 방대한 송자대전을 읽었지만, 그의 상소문과 시국책은 시대의 변화, 나라의 장래와는 오로지 거꾸로만 가는 수구 그 자체였다. 천하가 완전히 바뀌었는데도 왜 바뀌었는지,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바뀜이 장차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의문도 물음도 없었다. 찾는 것은 오로지 죽어 없어진 명나라였다.
리더로서는 역사 안목이 너무 빈약했고 통찰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은 역사상 더할 수 없는 ‘문화권력’을 누렸다. 문화가 권력화하면 곧바로 사멸한다는 것을 이보다 명백히 보여준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같은 시대의 일본 도쿠가와 막부에 비하면 조선은 경제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너무 후진이었다. 그 후진은 사실상 그의 문화권력으로 시작됐고 그것은 그의 사후 200년 넘게 지속되어 마침내 나라를 통째 일본에 고스란히 넘겨주는 결과가 됐다.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의 원말은 국가재조지운(國家再造之運 나라를 다시 만들 운이 돌아 왔나이다)에서 차용했다. 이 말은 이순신이 한산대첩을 거두자 류성룡이 무릎을 치며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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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구절이다. 류성룡이 얼마나 감격하고 흥분했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 기가 막히는 일이다
류성룡과 이순신, 이들은 마치 일란성 쌍생아처럼 시대성 쌍생아다. 동시대에 어떻게 이 두 위인이 함께 태어날 수 있었을까. 나이는 4살 차이지만 (이순신이 아래) 완전히 같은 생각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자신의 안위는 뒷전이며 오로지 지극정성의 일념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온몸을 던진 이들이 있어 임진왜란이란 그 지독한 전쟁에서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웃의 중국은 너무 크고 일본은 너무 강했다. 중국이나 일본은 ‘가치(價値)국가가 아닌 패권(覇權)국가’로서 최근까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의 지향을 외면한 나라들이었다. 근래에 와서 미국의 힘으로 가치국가로 개조되었던 일본이 다시 군국주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으며 중국은 여전히 가치국가를 외면하고 있다.
그 속에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을까.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류성룡이 있었고 이순신이 있었다. 나라를 잃은 백척간두의 순간에 연합군이 승리하여 2차 대전이 끝나 우리는 독립국이 될 수 있었다. 그것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국가로 말이다. 참으로 운 좋은 나라다. 이 운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과거의 운이 미래에도 계속되리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더 좋은 운, 더 소망스런 나라를 만드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임진왜란의 끔찍한 경험을 하고도 ‘징비’하지 않은 우리에게 역사는 자비롭지 않았다. 병자호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모두가 하나같이 우리의 지독한 급망증과 한심한 의존성에 기인하여 생겨난 것이었다. 국민은 자신을 바치는 리더에게 감동하는 법이다. 그런 리더가 이끄는 나라는 강해지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통일된 미래도 우리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 시대가 다시 류성룡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2014. 5월 송복
■ 머리말 : 왜 류성룡인가
나는 왜 이 책을 쓰는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한반도의 분할은 언제부터 시도 되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그 분할 획책을 누가 어떻게 막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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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가’이다. 앞의 것은 한반도 분할의 원류를 캐는 것이고, 뒤의 것은 그 분할획책을 최후까지 막아낸 인물의 능력과 리더십을 오늘날 본보기로 삼기 위함이다.
현재의 한반도 분단은 2차 대전의 종언과 함께 시작되지만, 그 원류를 더듬어 가면 1592년의 임진왜란에 가 닿는다. 임진왜란은 왜의 입장에서 보나 명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분할 전쟁’이었다. 왜는 조선 남쪽 4도를 내놓으라는 그들 말로 ‘조선할지 전쟁’이었고, 명은 그런 왜의 침략을 한강 이남에서 막아 북쪽 4도를 지킴으로써 그 반쪽 조선을 요동방어의 울타리로 삼는, 그들 말로 ‘번리지전(藩籬之戰)’ 바로 ‘조선 울타리 방어전쟁’이었다.
이 글은 전체적으로는 임진왜란사인 동시에, 하나하나의 장은 있는 힘을 다해 전쟁을 치르고 분할획책을 저지하는 류성룡이란 인물의 리더십에 대한 연구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6년 7개월 중 만 5년을 정무 군무 겸직의 전시수상(영의정)과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 직을 맡아 두 가지 전쟁을 모두 치러 낸다. 하나는 명·왜의 4년에 걸친 물밑 강화협상을 통한 조선분할획책을 막아내는 ‘분할저지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으로 식량이 안전히 고갈된 나라에서 식량을 모아 명군과 조선군에 식량을 대는 ‘군량전쟁’이었다.
율곡(栗谷)이 말한 대로 조선이란 나라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의 가장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상소문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지적한 대로, 조선은 날로 심하게 썩어 하루가 다르게 붕괴되어가는 한 채의 큰 집이었다. 기둥을 바꾸면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을 고치면 벽이 무너지는, 어느 대목도 손을 댈 수 없는 집이라고 했다. 그러나 율곡도 하루가 다르게 썩어 내려앉는 그 집을 고치는 방법을 내놓지는 못했다. 조선조 여느 학자들처럼 비판은 그지없이 날카로운데, 방법론이 없었다. 실체는 아는데 응용을 몰랐던 셈이다. 그의 대표적 건의 중의 하나가 군사 수를 줄이라는 것이었다.
“군졸이 부족해서 근무에 응할 수 없음이 걱정된다면 상번(복무)군인수를 줄이시고, 그래도 부족하면 일이 한가한 곳의 군인을 줄이시고, 그래도 부족하면 남방에서 겨울 동안 방비하는 군인 수를 줄이시고, 그래도 부족하면 보병의 대역포를 바치는 자의 수를 그 반으로 줄여 방위의 부족함을 보충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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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 상소문에 보면 ‘그 수를 줄인다’는 양감기수(量減其數)가 계속되고, 그래도 부족하면 또 줄인다는 유부족(猶不足)이 계속 이어져 나온다. ‘군인 수를 줄이는 방법외에 다른 어떤 방법도 찾지 못했다면, 이야말로 가장 체념적인 방법론이다. 그런데 어떻게 오늘날 율곡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10만 양병설‘이 나올 수 있었을까. 율곡의 그 어느 글에도 없고, 오직 율곡 사후 수십 년 뒤 그의 제자가 쓴 비문에만 있는 그 ’10만 양병론‘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이 상소문 하나로도 명백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조선은 그런 나라였다.
- 의명파 : 명에 의존해서 나라를 유지해 가자는 사람들로 왕과 대다수의 신하들.
- 자강파 : 스스로 힘을 길러 적과 싸우자는 사람들로 류성룡, 이순신, 그리 고 의병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자강파는 내몰림을 당하고 의명파만 득세해서 의명의 각질은 더 굳어지고 폐쇄된 숭명파(崇明派)로 바뀐다.
그렇게 사대에 의존한 조선은 일로 쇠망의 길로 치달아서 300년 전(1900년대 초 기준) 임진왜란 때 겨우 살려놓은 나라를, 이젠 전쟁 한 번 없이 통째로 300년 전의 그 왜에게로 넘겨주고 만다.
임진왜란 때는 바다에는 이순신이 있었고, 육지에는 류성룡이 있었다. 임진왜란은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전쟁’이었고, 육지에서는 ‘류성룡의 전쟁’이었다. 어찌 그 두 사람만 있었으랴. 그러나 이 두 사람만 있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전쟁은 전적으로 이 두 사람에 의존해 있었다.
바다에서 이순신의 재해권이 조선으로서는 보루인 호남을 보전케 했고, 명으로서는 왜 수군으로부터 금주, 복주, 천진 등의 요동연안이 보호돼 명군의 육로이동과 보급수송을 가능케 했다. 육지에서 류성룡이 치른 군량전쟁과 분할저지전쟁, 이 두 전쟁은 역사상 최고의 악전이며 고전이었다. 그 악전과 고전에서 조선은 마침내 살아났고. 그리고 존속되었다.
조선을 보전케 한 이순신의 수군, 왜를 제압해서 명실공히 최고의 수군으로 우뚝 서게 한 그 이순신, 그 이순신을 ‘역사의 인물’로 만든 사람은 류성룡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류성룡이 이순신을 육군이 아닌 수군장수로 발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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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이다. 그것도 정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당상관 전라좌수사로, 7단계나 뛰어 넘어 발탁한 것이다.
류성룡과 이순신, 그래서 그 만남은 조선으로서는 숙명이었고, 모든 시대를 뛰어 넘는 가장 ‘위대한 만남’이었다. 류성룡이 없는 이순신이 있을 수 없고, 이순신을 생각지 않은 류성룡이 있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만남이야말로 조선으로서는 행운이었다. 율곡의 말대로 조선이 비록 나라가 아니었어도 인물은 있었다. 인물이 있어 인물을 알아보았기에 사직은 이민족이 아닌 제 민족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확실히 류성룡은 조선조 500년을 대표하고도 남음이 있는 정치 리더십의 소지자였다. 그는 걸출한 정치인은 아니었다. 특출했다. 그는 강직한 정치인도 아니었다. 온유했다. 그 따뜻하고 부드러움으로 그 횡포한 명군 장수들을 꺾었다. 부드러움이 굳은 것을 제압하는 유능제강(柔能制剛)의 리더였다. 그는 최고의 권좌에 있으면서도 권력을 이념화하지도 가치화하지도 않았다. 대신 실용화했다. 정치리더로서는 ‘권력의지’가 아주 약했다. 자꾸 물러나려고만 했다. 그것이 정치 리더로서는 결함이었다.
이 책은 온몸을 바쳐 이 땅을 지켜낸 역사 속 위인의 리더십 연구의 일환으로 쓴 것이다. 그 첫 번째 인물로 류성룡을 택한 것은 나에게는 영광이요, 이 시대를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이다. 내 나이 70을 넘겼으니 얼마나 더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북한산 기슭에 살아 아직은 건강이 유지되고, 그 북한산 달빛이 유난해서 아직은 가슴이 뛰는 감동이 있다. 그 감동이 있는 한, 그 시대 그 ‘역사의 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신을 만날 수 있는 한 리더십의 연구는 계속될 것이다.
2007년 10월 송복
제1부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
Ⅰ. ‘징비록 ’속에 모든 것이 있었다
1. 조선은 나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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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나라인가. 조선이 나라라면 어떤 나라인가. 율곡의 상소문을 읽으면 조선은 나라가 아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9년 전과, 10년 전에 쓴, 구폐책의 상소문 내용이다
- 200년 역사의 나라가 지금 2년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진시폐소 중에서)
- 지금 국가의 저축은 1년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이야말로 진실로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육조계 중에서)
그로부터 10년,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겪고 막은 서애 류성룡도 율곡 이이와 똑같은 말을 한다. 그 말은 방대한 ‘서애전서’ 속에 자주 등장한다.
“이 필시 하늘이 우리를 도운 것입니다.”
“이러고도 우리가 오늘날 있는 것은 하늘이 도운 까닭입니다.”
“하늘이 도와서 국가를 다시 만들 수 있겠습니다.”
이 ‘하늘이 도와서’라고 한 말에는 모두 조선은 ‘인력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나라’라는 강한 의미가 들어 있다.
2. 역사의 조작 ‘10만 양병론’
이런 조선, 이런 임진왜란을 두고 많은 역사학자들에겐 허구가 있다. 특히 국수주의,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에게 이 허구는 깊이 박혀 있다. 어떤 허구든 그 생산과정은 존일(全一)하다. 근거가 없거나 미약하다. 어떤 현실성도 실현 가능성도 없는 데서 허구는 만들어진다.
이른바 허구의 조작성이다. 이 조작된 허구는 진실처럼 생각되고, 진실처럼 받아들여지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허구적일수록 주창은 드세지고, 주장은 더 고집스러워진다.
대표적인 허구가 율곡의 ‘10만 양병론’이다.
- 율곡의 글 어디에도 10만 양병론은 없다.
- 명종 말 ~ 선조 14년(1581) 까지 16년간의 경연일기에도 없다.
임진왜란의 실제 체험적 고통은 바다에서의 이순신, 육지에서의 류성룡만큼 치열히 겪은 사람은 없다. 그 고통의 기록을 적나라하게, 가장 소상히 적은 류성룡의 어느 글에도 율곡의 10만 양병론은 없다. 임진왜란 전후 40여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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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걸쳐 쓴 서간문을 포함한 그의 다른 글에서도 율곡의 그 같은 논의는 찾아볼 수 없다.
10만 양병론은 오직 율곡 제자들이 쓴 ‘율곡비문’에만 있고, 또 그의 제자가 편찬했다는 ‘율곡연보’에만 있다. 다른 기록에는 없고, 단지 비문과 연보에만 있다는 것은 이 양병론이 바로 정치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다른 말로 특정 당파의 사상적 규범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권력적 지배적 우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10만 양병론은 많은 역사교과서에 올라 있고, 임진왜란을 말할 때는 의레 회자하는, 실현되지 못한 가장 ‘안타까운 양병책’이 되어 있다.
조작이 아니라 사실로, 허구가 아니라 진실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3. 10만 양병론의 진위
1) 이병도 교수의 강의
1958년, 나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3학년생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원로사학자 이병도 교수의 국사 강의를 듣고 있었다. 선생은 임진왜란사에서 율곡의 10만 양병론을 먼저 거론했다.
“임진왜란의 두 위인은 이순신과 율곡 이이다. 율곡은 선조에게 군사 10만을 양성할 것을 건의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10년을 넘지 못해 나라가 완전히 무너지는 토붕(土崩)의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이다. 장래를 투시하는 그의 선견지명이 얼마나 뛰어났던가를 가히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어 “이 빼어난 양책에 대해 선조는 전혀 반응이 없었고, 신하들도 이에 찬동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신하들 중에 가장 식견이 높다는 류성룡까지도 반대했으니, 당시의 신하들이 얼마나 타성에 젖어 있었던가를 간단히 추측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난 뒤에야 류성룡이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면서 율곡은 참으로 성인이었다고 까지 했으니 율곡이야말로 이순신과 함께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천재이지 않은가”라고 극찬했다. 이 강의 내용은 6년 후인 1964년에 출간한 그의 ‘한국사대관’에 그대로 나왔다.
* 이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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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이순신이 위대하다는 것은 그의 승전으로 모두 인정하지만 율곡이 10년 전에 10만 양병론을 주장했다고 위대하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모든 신하가 10만 양병을 반대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닌가?
② 율곡의 10만 양병 보다는 40년 전에 나온 이언적의 상소문 ‘일강십목소’에 나오는 다섯 가지 조목의 군정개혁과 양병책이 훨씬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이 아닌가?
③ 10만 양병이라면 엄청난 숫자인데 당시 조선의 인구는 얼마였는가. 그리고 10만을 양병하기 위한 군량미와 세수는?
④ 일본이 15만 대군을 끌고 왔는데 당시 일본의 인구는 어떠했는가?
학생들의 이 같은 질문에 대해 이병도 교수는 아무런 대답을 못했다.
2) 실상 : 인구와 세입
(1)인구 : 10만 양병은 인구구성상 불가능
미국의 유명한 동양사학자 페어뱅크, 라이샤워, 크레이그, 3인의 공저인 ‘동양문화사’에는 1590년대 일본의 인구는 3200만 이고, 조선의 인구는 500만명 이하로 추정
*조선 인구에 대한 추정
- 임란이 끝난 60년 후인 1657년(효종8년)의 호구조사결과 : 인구 229만 83명. 호수는 62만 8771호
- 그 60년 전인 임란당시로 환산하면 조선의 당시 인구는 180만 ~ 190만 명 정도
- 호구조사에 참여하지 않은 수를 감안하더라도 400만을 넘기 힘들다.
* 율곡의 10만 양병책이 성립하려면
- 230만 명 중 남자는 115만 명, 군병이 될 수 있는 20~30대는 18만 정도. 그중 양반과 병약자를 제외하면 20~30대가 모두 군인이 되어야 함
(2) 세입(歲入) : 10만 양병은 세입상 불가능
10만 양병이 당시 인구구성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면 당시 국가 전체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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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적 능력으로는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조선의 생산가능 토지면적 : 170만 결(1결은 600평)
- 1결 당 3석을 생산한다면 곡물 총 생산량은 500만석
- 이 중 국가 세입은 1결당 평균 4두로 합계 60만 석
- 이 60만 석으로 정부 운영, 관리 녹봉, 군대 양성 등
* 10만 양병을 할 경우 연간 군량은?
- 임란 당시 류성룡이 쓴 진사록에 군병 1만 명 당 한 달 식량이 6400석, 1년에 76800석. 이를 10만으로 하면 최소한 76만석의 군량미가 소요
세수를 몽땅 군량미로 써도 불가능
그래서 평시에는 생산하고 전시에는 동원 가능한 병농 일치의 둔전병제(屯田兵制)와 더불어 농민은 병역대신 납포(納布)하며 농사짓고, 정부가 그 돈으로 따로 병정을 고용하는 고립제(雇立制)가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가장 실현 가능한 가장 현실적인 방책이었기 때문이다.
율곡의 10만 양병론을 제자들이 그의 비문에 올린 의도는 누가 읽어도 명백하다. 율곡을 성인으로 추앙하는 반면 류성룡은 속류 정치인으로 떨어뜨리는 데 있음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비문을 쓰고 연보를 편찬한 제자들, 그것을 또 ‘선조수정실록’에 그대로 베껴놓은 사람들은 그만큼 나라의 실상을 모르고 시무를 모르는 정치인들임을 스스로 밝힌 것이 된다.
결과적으로 율곡은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했음에도 실상과 방법론을 전혀모르는 정치인으로 격하되고, 반대로 특별히 꼬집어 폄하한 류성룡은 본질, 본체도 알고 방법론도 아는 가장 현명한 정치인으로 추켜세운 것이 된다.
실상을 모르고 시무를 모르는 정치인들이 류성룡 이후 계속 그같이 요직을 차지하며 국정을 전단하고 있었으니, 그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이며 어떻게 될 나라이겠는가.
(3) 율곡의 무서운 비유 : 조선은 고칠 수 없는 썩은 집
정말 조선은 어떤 나라인가. 율곡의 상소문대로 ‘1년을 버틸 식량이 없는 나라가 진실로 나라인가. 율곡의 무서운 비유를 보자.
“오늘의 나라 형세는 마치 오랫동안 고치지 않고 방치해둔 만간대하(萬間大廈 여러 간의 큰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크게는 대들보에서 작게는 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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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에 이르기까지 썩지 않는 것이 없어, 근근이 날만 넘기며 지탱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동쪽을 수리하면 서쪽이 따라 기울고, 남쪽을 뜯어 고치면 북쪽이 휘어 넘어져서 어떤 장인도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오직 날로 더 썩어 붕괴할 날만 기다리는 그 집과 오늘의 나라꼴이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율곡은 조선을 마치 썩어 내려앉는 집에 비유했다. 어떤 장인도 고칠 수 없어 손을 놓고 마는, 그래서 붕괴할 날만 기다리는 집과 오늘의 나라 형세가 뭐가 다르냐고 선조에게 들이대듯 말한다. 정말 아찔한 소리며 무서운 비유다. 보통 신하들 같으면 열 번을 귀양 가고도 남을 소리이다. 이런 나라에 병농 분리의 양병을 생각할 수 있고, 더구나 10만 양병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꿈엔들 가당한 소리겠는가.
율곡은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어떤 계책을 내 놓았는가. 그 또한 다른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유교사회에서 수학한 사람이면 누구나 하는 소리 그것밖에 없다. 율곡의 ‘만언봉사’의 일부이다.
첫째로 수기위강(修己爲鋼), 몸을 닦는 벼리 4가지
① 분발하라 ② 학문을 많이 하고 정심(正心)하라 ③ 사사로움 멀리하고 공평한 도량을 넓히라 ④ 어진 선비를 가까이하라
둘째로 안민위강(安民爲綱)하는 벼리 다섯가지
① 밑 사람의 충성을 얻어야 ② 횡포하게 긁어모으는 폐해 제거 ③ 절제와 검소, 사치 폐풍 고치기 ④ 노비법 개선 ⑤ 군정(軍政)을 고쳐 안팎의 방비를 굳게 해야 한다.
여기에 이어 각 조목에 대한 설명이 길게 붙여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훈고학적 뜻풀이와 동어반복의 부연설명이고, 고치자는 절규뿐이다. 어떤 방법, 어떤 과정, 어떤 순사를 밟아가며 혁파하자는 구체성은 어디서고 찾아볼 수 없다. 말하자면 체(體)는 있는데 용(用)이 없는 것이다. 이는 율곡만이 아니라 당시 산하들이 내는 상소문이 거의 다 그랬다. 방법론을 알고 그 방법에 정통한 사람이 너무나 드물었다. 당시 신하든 학자든 거의 모두가 당위론자들이었다. ‘어떻게 되어야만 한다’는 윤리적 주장만 있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객관적 분석이 없다. 율곡도 그런 당위론자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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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들끼리의 나라
거기에 국왕은 어떤 존재인가 그야말로 절대 군주다. 그는 무엇보다 구중궁궐에서 태어나고 그 궁궐의 울타리 안에서만 자란다. 백성들이 사는 세상과는 확연히 다르고 너무 격리되어 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도 같은 푸르름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다.
군주는 백성의 왕이 아니라 신하들의 왕, 궁 속에 같이 사는 나인들의 왕, 종친들의 왕으로 살았다.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끼리의 나라’를 만드는, 그들만을 위한 왕이다. 왕이 되는 훈련과정도 왕이 되기 전에는 세자시강원에서 왕이 된 후에는 경연에서 지식 습득하는 것이 고작이다. 세상사에 대한 이해는 신하들의 진언과 차자, 계사(간청하는 보고서)등 상소문과 서장(書狀)등을 통해 이뤄진다. 그것이 어느 군주든 군주로서 연마하는 과정이며 군주가 된 후의 역할 숙지의 전부였다.
유교 사회에서 ‘오직 백성이 근본’이라는 민유방본(民惟邦本) 사상은 어느 군주나 어릴 때부터 배운다. 그러나 어느 군주도 ‘백성이 근본이고,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도 안정되고 튼튼해진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① 백성과 너무 동떨어져 살아 그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사는지 실감할 수 없고, ② 왜 민본이고, 왜 민본이 아니면 안 되는지를 깨우쳐 주는 스승도, 친구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주는 예외 없이 ‘민심이 가장 위험한 것’임을 모른다.
그 군주 밑의 신하는 어떤 존재인가. 무엇보다 어떤 신하가 살아남는가. 살아남는 신하의 공통된 가치, 태도와 자세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예외 없이 절대 권력에 순종하는 것이다. 절대자의 마음을 읽고, 그 마음에 맞춰 ‘임금님이시여, 이렇게 해야 합니다. 저러시면 아니됩니다’ 라고 말하되, 그 이상, 그 이외의 소리를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신하로서의 사고와 행동범위는 그만큼 좁고 그만큼 얕다. 신하로서 기능할 수 있는 한계는 너무 명백하고 너무 사실적이다. 백성에게서 명재상으로 칭송되기는 더욱 어렵고, 신하들 사이에서 시기와 질투, 지탄과 질책을 당하지 않는 리더가 되기는 더더욱 어렵다.
4. 당대의 조선과 류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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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이 살았던 그 시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첫째로 조선은 어떤 나라였는가. 국가로서 기능하고 있었고 기능할 수 있는 나라였는가.
둘째로 지배자인 조정 관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무엇보다 그들의 국가개념은 어떤 것이었는가. 인민을 살게 해 주고 평안히 해주는 치국안민의 국가 개념이었는가. 아니면 왕의 나라로서 오로지 왕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오로지 왕에게 신명을 바치는 사직보전(社稷保全)의 국가개념이었는가.
셋째로 국왕으로서의 선조는 어떤 군주였는가. 백성의 삶을 보다 앞서 생각하는 군주였는가 아닌가.
넷째로 임진왜란은 어떤 전쟁이었고, 이 전쟁을 일으킨 왜는 어떤 나라였는가. 당시 왜와 조선의 국력 차이는 얼마나 되었는가. 임진왜란의 직접적 피해자는 조선이었지만, 사실상 전쟁의 상대자는 명나라와 왜였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있어 조왜(朝倭) 전쟁이었지만 육지에서는 전투력을 거의 상실한 조선이 제외된 명왜(明倭) 전쟁이었다. 내 나라에서 일어난 남의 나라 전쟁, 그래서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치욕적인 전쟁이 1592년에서 1598년까지 이어졌다.
다섯째로 이 전쟁에서 명나라는 어떤 나라였는가. 명이 중원을 차지했다 해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대국이었는가. 왜 명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는가. 명은 정망 조선을 지키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는가. 왜가 조선을 황폐화 시킨 것 못지않게 명 또한 조선을 짓밟지 않았는가. 그들 군대에 의해 조선 백성이 당한 고통은 왜군에 의해 당한 고통과 얼마나 차이가 있었는가.
5. 왜 ‘징비록’을 읽지 않았는가
임진왜란 7년의 기간 중 5년을 전시 수상으로, 전쟁의 한가운데서 하루도 빠짐없이 그 전쟁의 고역을 치른 재상 류성룡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사 바로 그 자체다.
전쟁이 끝나고 재상에서 어이없이 파직되고 공교롭게도 같은 날 이순신도 전사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안식의 해를 어떻게 보냈는가. 이 전쟁을 후손에게는 ‘경계의 교훈’으로, 동시대인에게는 ‘경계의 채찍’으로 글을 남기는 데 심혈을 쏟는다. 그의 붓끝에 펼쳐진 전쟁의 실상은 한 편의 파노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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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니, 그 이상으로 사실적이고 긴장도 높게 전개된다. 그의 생생한 필치는 엄청난 생명력과 강한 펀치력으로, 읽는 이의 가슴을 때린다.
왜 우리는 그토록 힘이 없었는가.
왜 우리는 그토록 짓밟혀야 했는가.
왜 우리는 그토록 한(恨)에 차야했는가.
왜 우리는 그토록 극한 상황을 겪어야 했는가. 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왜 우리는 그토록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왜 우리는 그토록 짓밟는 자들에게
왜 우리는 그토록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는가.
왜 우리는 그토록 분노할 수도 없었는가.
그의 징비록을 읽고, 가슴 치며 울분을 토하며 눈물을 삼키지 않는 사람은 조선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읽으려하지 않았고, 읽어도 몰랐고, 알아도 감동이 없었다. 그러고는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를 들먹이며, 이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라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내 나라라는 개념이 없고 내 나라라는 의식이 없었다.
인조 이후 효종 연간을 지나면서 오직 망한 명만 그리워하고 숭모하는 등 제 나라 망각증은 깊을 대로 깊었다. 류성룡도 잊고 이순신도 잊었다. 우리 역사를 만들고 지켜온 인물들의 기록과 글을 읽고 그들의 경험을 지난날의 교훈과 미래의 징표로 삼아 발돋움해서 우리를 지키고 키울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오로지 아느니 중국 인물이고, 읽느니 중국 역사였다. 그것이 조선의 사대부였고, 조선의 지식인이었다.
중국 사서들을 읽고 그들 인물을 숭앙하는 노력의 10분의 1만큼의 노력으로 우리 역사를 학습했다면, 적어도 류성룡의 징비록을 읽고 치욕과 분노와 가슴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함께하는 수고가 있었다면, 조선은 결코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 나라를 잊고, 자기 나라의 산 체험이 주는 교훈을 잊고, 오로지 남의 나라만 지향하고 공부하는 그런 나라가 어찌 제 나라를 온전히 존속시키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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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조선은 내 땅이 아니다
1. 전쟁터가 되어버린 나라
임진왜란은 어느 나라들의 전쟁인가. 어느 나라간의 싸움인가.
1) 오히려 걸림돌 조정
‘징비록’의 ‘징비’는 미리 징계하여 후손에게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지난 잘못을 경계하고 삼가라는 일종의 경고다. ‘징비록’의 요체는 모든 것은 내탓이고 ‘적은 내 안에 있다’이다. 하늘과 인간이 함께 분노하는 왜군의 만행도, 그에 버금가는 명군의 행패도 모두 ‘내 탓’이다.
침략자를 질타하기엔 자책이 앞서고, 자핵(自劾)이 강하다. 그 자책, 자해의 마음이 400년을 지난 지금 우리를 더 징비한다.
류성룡이 임금에게 올리는 각종 보고서를 포함한 하부 기관에 내리는 공문서 549건을 상세히 읽고 세밀히 해부해보면, 임진왜란은 왜와 명의 전쟁이다. 그럼 조선이라는 나라는 무엇이었는가. 전쟁터, 즉 전쟁마당이었을 뿐이다. 독자적으로 침략군에 맞설 힘이 없는 나라. 그래서 가장 피동적으로 전쟁터가 되어버린 나라, 그것이 조선이었다. 조선에서의 전쟁이었지만 그 당사자는 조선이 아닌 왜와 명나라였다. 자기네 나라 자기네 백성이 사는 자기네 영토 안에서가 아니라 남의 나라 남의 백성을 죽이고 괴롭히며 하는 전쟁이 임진왜란이었다.
오직 바다에서만 왜와 조선의 전쟁이었다. 그것도 실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아니라 더 정확히는 왜와 이순신의 전쟁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붙이기에는 조선의 조정이 정부 기능을 전혀 못했다. 이순신을 지원하고 이순신에게 힘을 주는 정부가 아니라 이순신의 전쟁수행에 오직 방해만 되는 ‘걸림돌 정부’였다. 이런 조정만 아니었어도 이순신이 거둔 업적은 역사 기록의 그것보다 훨씬 더 혁혁했을 것이다.
2) 이순신의 외로운 싸움, 류성룡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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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순신의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오면 갑자기 조선이라는 나라는 간데 없고, 명군 · 왜군이 득실거리는 명왜 전쟁으로 돌변한다. 왜 우리 땅에서 우리가 없는 명과 왜의 전쟁이었는가. 왜 우리는 우리 땅에서 전쟁의 주체가 되지 못했는가. 그것은 첫째로 전쟁발단의 원인에서 그러했고, 둘째로 조선의 통치 능력과 전쟁수행 능력에서 그러했고, 셋째로 류성룡의 전쟁 전략에서 그러했다. 임진왜란은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외로운 싸움’이었고, 육지에서는 ‘류성룡의 분골쇄신’이었다.
이순신의 전략이 조선과 왜의 싸움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면, 류성룡의 전략은 명과 왜의 싸움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왜 그래야만 했는가. 오직 조선이라는 나라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명군을 불러와 명왜전쟁으로 만들지 않는 한, 조선은 완전히 왜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조선은 왜를 막을 길도, 저항할 힘도 없다. 왜가 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가장 무력한 나라, 가장 쇠약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로부터 300년 후의 한일합병 때나 다름없이 나라를 지탱하기 어려운, 더는 버틸 여력도, 더 추락할 밑바닥도 없는 상태였다. 이런 조선이라는 나라의 실낱같은 명맥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은 바로 명왜전쟁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전략 이상의 절체절명이었다.
2. 압록강을 건너지 마라
결과적으로 명왜전쟁이 조선의 명맥을 지켰다. 선조 25년(1592년) 4월 14일 왜군의 1진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불과 2개월 사이에 조선 삼도(三都)인 한양과 개성, 평양이 모두 함락되었다. 왜군이 한양에 들어온 것이 5월 3일, 한 나라의 수도가 점령되는 데 걸린 기간은 20일도 채 도지 않는 짧디 짧은 시간이었다.
1) 단 60일 만에 평양까지
그들이 처음 부산을 출발해서 한양으로 밀려들 때, 우리 측 최후의 방어지는 문경의 새재였다. 잔도(棧道)에 까지 비유되던 그 가장 믿었던 험준한 조령의 지세도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내어주었고, 이름난 장수였던 신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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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조정의 기대와는 딴판으로 아무도 국가 간 전투라고 말할 수 없는 초라한 전투를 반나절도 채 못하고 죽었다. 그것이 당시 조선 주력군이 벌이는 전쟁이었다. 왜군의 입장에서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전쟁놀이’였다.
조선군은 왜군을 보기가 무섭게 활 한 대 쏘지 않고 도망갔다. 뒤에 명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조선군을 적만 보면 도망가는 ‘도망군’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조선은 정예한 군대가 없었다. 군대도 없었지만 정보체계는 더 엉망이었다.
‘징비록’에 의하면 부산이 함락되고 난 나흘 뒤인 4월 17일에야 임금이 겨우 왜군 침입을 보고 받았다니, 역참 사이로 국가 공문을 급히 나르는 파발마(擺撥馬)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 서울에서 군대를 모집하는데 겨우 300명
- 순변사 이일을 먼저 내려 보내고 뒤따라 별장을 시켜 몇 안 되는 군사를 보냄, 신립도 적이 10리 밖에 당도한 정보를 모르고 있었다 함
뒷날 이여송이 적을 추격해 조령을 지나다가 험준함을 보고 탄식하며 ‘신립은 참으로 무모한 사람이다’라고 말한 데서도 당시 조선 장수들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장수가 병법을 모르고 주략(전략)도 세우지 못하면 적에게 나라를 내준다’는 옛말처럼 정예한 군대도 없고, 병법에 정통한 장수 하나 없었으니, 류성룡의 ‘징비록’ 기록 그대로 그 상황에서 ‘그 무엇을 후회한들 무슨 소용에 닿았으랴.’
왜군이 피 한 방울 쏟지 않고 한양으로 들어오고 개성과 평양으로 들어간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 왜군 제1진 지휘자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평양에 들어가 6개월 후 물러날 때까지 그대로 머문 이유가 임진왜란 최대의 미스터리
- 제2진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부대는 회령까지 진군, 임해군 순화군 등을 포로로 함
2) 어디로 갈 것인가
그때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평양에 머물지 않고 그대로 나서서 걸어가기만 해도 5,6일이면 조선왕이 있는 데까지 간다. 왕의 행궁을 지키는 조선 군대는 왜군 일지대(一支隊)보다 수가 적다. 더 비참한 것은 조선군이 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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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무기였다. 왜군의 무기와 처음부터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들의 만행 또한 고려시대의 몽고병을 능가했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의주에 간신히 피신해 있는 조선 조정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명군을 불러 오는 것이다. 그러나 명군은 언제 올지 모른다. 그 구원병에 앞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의주에 당도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압록강을 건널 것인가. 건너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물음은 훨씬 앞서 도성을 떠나면서부터 4월 30일 이미 시작됐다. 선조의 절규하듯 쏟아낸 물음은 불안과 공포를 넘어선 절망 그 자체였다. 그 절망은 왕의 행차가 5월 1일 임진 나루에 이르러 배를 타면서 통곡으로 터져 나왔다. 그날 왕은 개성 못 미친 동파에서 이산해, 류성룡, 윤두수, 이항복 등 중신들을 불러 놓고 난국 타계의 방안을 물었다.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도시 어디로 갈 것인가.”
왕은 가슴을 치면서 대신들에게 말했다.
(1) 명으로
이항복은 이때의 일을 그의 수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대답해 아뢰기를 ‘의주’로 가서 머물고 계시다가 만약 팔로가 다 함락되면 명나라로 가서 명조에 내부(內附)를 호소하는 것이 가할 줄 아옵니다.”
‘선조 수정실록’에 보면 윤두수는 왕의 같은 질문에 두만강 쪽의 함경도로 향할 것을 주장한다.
이어서 왕은 류성룡에게 묻는다. 여기서 류성룡은 훗날 조선의 운명이 좌우되는 결정적인 말을 한다. 그 말은 난국타개의 방안으로 조선의 명맥을 지키는 전략이 된다.
“불가합니다. 임금께서 우리 땅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신다면, 그때부터 조선은 우리 소유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 왕은 “명나라에 내부하는 것이 내 본래의 뜻”이라 했고 류성룡은 한편으로 왕에게 희망을 주면서 다른 한편 단호히 말한다.
“지금 동북의 여러 도는 예전과 같이 건재합니다. 그리고 호남도 건재합니다. 이 지방의 충의지사들이 며칠 안으로 벌떼처럼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어찌 경솔히 나라를 버리고 압록강을 건넌다는 말을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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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함경도로
류성룡은 함경도행에 대해서도 철저히 불가론을 편다.
“함경도로 깊이 들어가면 중간에 적병이 차단해서 격리됩니다. 그러면 명나라와도 연락이 끊어집니다. 더 큰 불행은 그 후 적병이 북으로 침입해 오면 그 때의 위태로움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너무 큰 것이 되어버립니다.
3.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당시 선조와 조정의 의견은 하나가 함흥, 경성의 함경도행이라면, 다른 하나는 압록강을 건너가 중국에 내부하자는 것이었다.
만약에 류성룡이 끝까지 왕을 막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독립국가로서, 정체성을 가진 문화국가로서 오늘날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1) 함경도행의 결과
첫째는 압록강행이 아닌 두만강 쪽의 함경도행이다. 선조가 압록강 쪽의 의주로 가지 않고 많은 신하들의 바람대로 함경도행으로 결정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에 그랬더라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선조 역시 왜의 제2군 지휘자인 가토 기요마사에게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처럼 생포되었을 것이며, 중신들도 모두 생포되었을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 기요마사의 포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선조가 숙천에 당도해서 다음 어디로 갈 것인가를 논의하는 그 순간,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철령을 넘어 함경도를 향해 무인지경으로 진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당시 조정의 정보력
- 가토 기요마사의 함경도 진군에 대한 정보가 없었음
- 조령에서의 이일, 충주에서의 신립처럼 10리 안의 적도 모를 만큼 정보력이 어두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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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가토 기요마사의 포로가 되면, 정부의 모든 기능은 순식간에 가토 기요마사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 경우 가토 기요마사가 왕과 왕자, 조정 신하들을 포로 상태로 그대로 둘 것인지 죽일 것인지, 아니면 일본으로 모두 데리고 갈 것인지 그 어느 것을 취하든 조선조의 명맥은 끝나고 만다.
(2) 빛바랜 의병과 백성
물론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왕이라는 구심점이 존재하고 있을 때 열렬하게 일어난다. 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의병은 간헐적이고, 무엇보다 힘이 없고 결집력이 약하다.
그럼 일반 백성들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때의 백성은 현대의 국민과는 현저히 다른 사람들이다. 현대의 국민과 달리 국가공동체 의식이 있을 수 없고, 오늘날 국민들에게 보이는 애국심이나 충성심이 솟아날 수가 없다. 왜군이 오래 주둔한 한양 도성에서 우리 백성들이 왜군과 마찰, 갈등 없이 지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협력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경복궁 등 3궐을 불 지르고 장례원 등 국가 기관을 불태워버린 것도 왜군이 아니라 우리 백성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서경’에 나오는 그대로 ‘백성의 마음은 무상한 것’이다.
적이든 아니든, 그 누구에 관계없이 은혜를 베푸는 사람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백성들의 마음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중국 최고 역사경전의 하나인 ‘서경’의 백성진단이다. 백성은 유교국가에서 항상 말하는 대로 나라의 근본이다. 그 근본이 적과 충분히 동침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왕이 포로가 된 상태에서 백성들이 모두 궐기해서 그 나라를 일으키고, 그 왕을 다시 추대해서 왕조를 계속 이어가게 할 것이란 기대는 누구도 할 수 없다.
(3) 명의 포기
왕이 포로가 된 상태에선 이여송의 4만 5천 군대가 아니라 그 몇 배가 넘는 병력을 동원해도 당시 왜를 격퇴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냥 전투만으로도 벽제관 전투나 울산전투에서 경험했듯이, 명군이 왜군을 제압할 정도의강군은 결코 못되었다. 우선 명군 기마병의 짧은 칼은 왜군 보병의 긴 칼과 창, 그리고 총에 대적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명은 아직도 북쪽의 몽고와 싸우고 있었고, 만주에서는 여진족의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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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하치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뒤의 일이지만 명이 임진왜란 당시 소모한 전비로 국가 재정이 파산 상태로 들어간 결과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명은 임진왜란을 포기할 지도 모른다.
2) 명나라행의 결과
둘째로는 압록강을 건너가 명에 내부하자는 것이다. 국왕인 선조부터 ‘원래 그것이 내 뜻’이라 했고, 이항복을 비롯한 상당수 신하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내부하자는 것은 공간적으로는 내 나라를 떠나 남의 나라에 들어가 붙어산다는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나중 그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고구려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손자 헌성이 당나라에 내부해서 고구려를 망치고 당나라에 귀속해 당나라 사람이 된 것과 같다.
(1) 주권을 포기한 ‘내부’
당시 조선이 생각했던 명은 왜에 비교되지 않는 강대국이다. 조선 왕과 신하는 명이 출병만 하면 왜군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바다 건너로 쫓겨 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사대관계에서 보아 틀림없이 구원병을 보낼 것이고, 그것도 왜가 처음부터 명을 노린다는 전쟁 발단의 원인에서 미뤄 구원병이 곧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군이 곧 밀어닥친다 해도 명으로 피난을 생각하지, 어떻게 내부를 생각했을까이다. 피난과 내부는 하늘과 땅 차이다. 피난을 일시성이고, 내부는 영속성이다. 피난은 의지의 독립성이고, 내부는 의지의 귀속성이다. 피난은 자기 나라가 있는 것이고, 내부는 자기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다.
당시 조선은 중국과 분리된 ‘내나라’ 개념, ‘내 나라’의식을 갖고 있지 못했다. 중국의 내정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국가로서 유지는 했지만, 주권국가로서의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2) 정체성 없는 소중화 지향
더 큰 것은 문화적으로 정체성 개념을 갖지 못한 것이다. 내부하자는 의식에는 문화적 요인이 정치적 요인보다 더 크다 할 수 있다. 당시 지식인들의 지식연마의 최고 목표는 중국 사람과 다른 조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중국 사람과 같은 중국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 나라 조선 사람 지향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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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대국인 지향이다. 사서삼경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닦는 이유는 오직 소중화가 되느냐에 있었다.
* 독립문을 통해서 본 내 나라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
- 독립협회가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 그런데..... 형태는 프랑스 개선문,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 기사가 설계하고 노역은 중국인 노무자들이.......
- 독립문을 세우는데 모양도 설계도 사람도 조선은 없었다.
- 서재필, 이승만 등 당시 최고 지식인들이 주도해서 세웠다는데 우리나라 문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의 조선조 지식인들에겐 명이 바로 세계였다. 명이 바로 하늘이었다. 그래서 명 조정을 늘 천조(天朝)라 불렀고, 명군을 천군(天軍)이라 불렀다. 명을 오직 세계로 알고, 그 세계를 오직 하늘로 알던 사람들에게 왜 조선을 버리고 내부하자고 했느냐고 묻는다면 그 물음은 참 어리석은 것이 아니었겠는가.
3)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니다’라는 의미
앞서 본 류성룡의 선조 앞에서의 강경발언 “조선 땅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니다”에서 보듯이 류성룡은 처음부터 압록강 행을 주장하면서 압록강을 최후의 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압록강을 건너가 중국에 내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로 해서 다른 신하들과 많은 격론이 있었다. 이때의 일을 이항복의 수기에서 보면
‘이 일로하여, 나는 수십 차 공(류성룡)과 격론을 벌였으나 기꺼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공은 임금에게 아뢴 그대로 격렬한 음성으로 호남 등 각지역이 아직도 예전같이 살아있고 충의지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마당에 어찌 이런 중대사를 졸지에 결정할 수 있느냐고 했다. 만일 명으로(내부) 간다는 말이 알려지는 날에는 민심은 완전히 무너져버릴 것이다. 누가 그것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했다. 그때 나는 공의 말을 자세히 알아듣지 못했다.
어가가 영변에 이르자 왕이 명으로 간다는 그 말이 잘못 퍼져 평안도의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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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이 수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때 나는 비로소 공의 앞을 내다보는 슬기에 감복하였다. 뒤에 나는 사석에서 공을 찾아보고 ‘창졸지간에 잘 못 생각해서 대세를 그르칠 뻔하여 부끄럽기 한량없습니다.’라고 사과하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도 당시 밝게 설명하지 못하고 다만 불가하다고만 했으니 내게도 잘못됨이 없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1) 막아선 류성룡의 두 가지 주장
첫째로 조선 땅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면 조선은 그날로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조선을 떠나는 그날로 조선은 조선의 것이 아닌, 더 직설적으로는 다른 나라 사람의 것이 된다는 말이다.
조선이 누구의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은 더 따지지 않아도 명백하다. 그것은 앞서 함경도행에서처럼 왜의 영토가 될 가능성이 절대적이고,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기껏해야 명과의 영토분할이다.
둘째로 조선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는 그날, 앞 이항복의 수기에서 보듯 민심이 완전히 궤멸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왕이 압록강을 넘어가려 한다는 잘못된 소문만으로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평안도의 민심은 무너졌고, 그것은 왕이 더는 앞으로 어가를 이동할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달했다. 왕이 심지어는 조선 땅 안에 있음에도 그러했다면 한 발자국이라도 조선 땅 밖으로 나갔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더 물어볼 여지가 없다.
당시 조선은 조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만큼 내부를 깊게 사려한 사람은 어느 기록에도 없다.
(2) 이순신, “죽더라도 우리 땅을 떠나면 안 된다”
예외가 있다면 충무공 이순신의 조카 분(芬)이 찬술한 ‘충무공행록’이다. 이 기록에서 보면 이순신이 정미 500석을 따로 저장해서 최악의 경우 해상정부를 만들어 왜에 대적한다는 것이다. 이순신도 류성룡과 마찬가지로 조정이 끝까지 우리 땅에 버티고 있어야만 왜군을 격퇴시키고 국토를 수복할 수 잇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순신의 강렬한 표현은 기록된 대로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설사 불행한 처지에 이르게 된다 해도 임금과 신하들이 우리나라 땅에서 다 함께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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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직 하늘의 도움으로
결과적으로 역사적 가정과는 전혀 다르게 조선은 엄청난 고통을 겪기는 했지만 살아남았다. 그렇게 된 데는 류성룡의 공적이 절대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니시 유키나가의 공 또한 적지 않다. 류성룡의 공이 급박한 상황에서 왕과 신하들을 설득해 압록강을 미리 건너가지 못하게 막은 공이라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공은 이상하게도 평양에 그대로 주저앉아 준 공이다. 이 평양 주둔의 미스터리가 희한하게도 조선을 마지막으로 구해준 것이다. 그 미스터리는 나중 다시 보기로 하고, 아침 아니면 저녁에 의주로 쳐들어 올 것 같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평양에 들어와서는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류성룡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적이 평양에 들어와서는 다행히 수개월이 지나도록 성안에 자취를 감추고 순안, 영유 같은 평양 지척에 잇는 고을조차 침범하지 않았다. 이로써 민심이 차차 안정되고 흩어진 군사도 점점 수습하고, 명나라 구원병도 맞아들여, 마침내 나라를 회복하게 되었다. 이는 참으로 하늘의 도움이다.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은 아니다.
제2부 아! 조선, 그리고 류성룡의 대설계
Ⅱ. 전쟁은 군량이다
1. 군량전쟁의 주역을 맡다
1) 조선의 빈곤은 인물의 빈곤
오늘날로 말하면 한·중·일, 당시로는 조·명·왜다. 이 조명왜의 전쟁을 명왜의 전쟁으로 바꿔놓는 전쟁은 확실히 주효했다. 그 전략의 주역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류성룡이었다. 그렇다면 류성룡 외에 다른 중신은 없었는가. 조선조의 취약점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율곡의 말대로 ‘정말 나라인가’할 정도로 조선이 빈곤했던 것은 바로 인물의 빈곤이었다. 인물의 동원력이 신라와는 아예 비교가 되지 않았고, 고려와도 비교되지 않았다. 5천만 인구의 대당(大唐)과 전쟁을 치러 이겨내는 신라는 그 인물의 풍부함 덕분이었다. 거란의 요와 겨루고 몽고와도 수십 년 싸움을 벌였던 고려에도 많은 인물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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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이 ‘백성 동원령’이 앞 선대 왕조보다 훨씬 못하다고 여러 번 개탄했지만, 엄청난 전쟁이 벌어졌는데도 병졸을 지휘할 장군이라곤 신립, 이일 등 두 세 사람이 고작이고, 정이품 이상의 중신이래야 이양원, 이원익, 윤두수, 윤근수, 정철 이항복, 이덕형 그리고 류성룡 등 10명이 되지 않았다.
2) 국부가 곧 군량
전쟁하는 나라에서는 국부가 곧 군량이라는 등식관계가 이루어진다. 이 등식을 임진왜란 때의 조선으로 옮겨와 보면, 군량면에서 조선은 너무 비참한 나라가 된다. 같은 시기의 명, 왜와는 아예 비교도 할 수 없는 군량과의 전쟁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적국 군대와의 전쟁 이전에 우리 안에서 군량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의 군량전쟁이 임진왜란 7년의 모두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조선의 군량은 일차적으로 명군의 식량이 되고, 이차적으로 우리 군대의 식량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일 수도 없이 들에서 거리에서 산속에서 굶어 죽어가는 우리 백성의 식량이 되었다. 명군에 보급하고 남은 식량 가운데는 태반이 썩었다. 할 만큼 상한 곡식이 많았다. 물론 거기에는 정부나 민간에 의한 관리 소홀이 주된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비를 맞고, 쥐가 먹고, 벌레가 파먹어서 상해버린 곡식의 양은 당시 저장 기술로 보아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멀쩡한 곡식은 명군에게 다 보급하고 썩고 상한 곡식이 우리 군대와 백성에게로 돌아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만큼 확보할 수 있는 곡식의 양이 부족했던 것이다.
3) 누가 믿을 수 있는가
누가 이 비참한 군량전쟁의 주역을 맡을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주역이 되어야 조선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군량전쟁의 주역은 군량확보 외에 또 다른 큰 역할이 있었다. 명군에 군량을 보급하면서 명군 장수들을 제어하고 또 그들과 원만하고 유연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장군들은 조선 임금도 눈 아래로 봤다. 조선의 장군들을 병졸 다루듯 하고, 조선의 정승까지도 그들 말에 무릎을 꿇게 했다. 누가 그들을 조선의 국익에 맞게, 조선의 의도에 순응하도록 조절하며 조정해 갈 수 있을 것인가.
- 정철 : 성격이 너무 과격
- 이산해 : 어릴 때 신동 소리, 당파의 영수 노릇, 영의정이라는 높은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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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존경받지 못하고 아랫사람들이 따르지 않음
- 이원익, 이성중 : 성실 군자, 그러나 능수능란치 못함
- 정탁 : 나이가 많음
- 이항복, 이덕형 : 나이가 어림
4) 선조의 지인지감
선조는 왕으로서 리더십도 턱없이 부족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선조의 나이는 40세, 지도력도 판단력도 충분히 갖출 수 있는 불혹의 나이다. 임금 자리에 앉은 지도 25년이 지났다. 천성은 어둡지 않았다. 다른 임금들에 비하면 훨씬 명민한 편에 속했다. 그래서 역대 어느 군주보다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었다. 그러나, 군왕으로 다음과 같은 결점이 있었다.
- 일관성 결여, 주견이 두렷하지 못함, 확신이 없음, 초지일관 밀고 나가지 못함, 사람에 대한 의심이 많음,
5) 버팀목 류성룡
지인지감은 있으면서 늘 의혹에 차 있는 임금과 서로 간의 알력이 심했던 신하들, 그들 중 누가 군량전쟁의 주역을 맡을 것인가 서애 류성룡, 그만이 주역을 담당할 수 있다는 데에는 다른 신하들도 이견이 없었다. 그만큼 그는 발군(拔群)이었다. 이 발군이라는 말에 저항감을 갖는 역사학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책을 맡을 사람은 몇 명이고 찾을 수 있지만 그를 대신할 적격자는 찾아낼 수 없다.
- 1592. 4. 14. 전쟁 발발, 5.1 피난 길 개성에서 영의정 임명, 다른 신하들의 전쟁 책임론(전쟁 발발 당시 좌의정)으로 하루만에 영의정에서 파면
- 직책 없이 백의종군
그로부터 전쟁이 끝나기 까지의 7년 동안 류성룡은 군량전쟁의 주역을 맡는다. 전시수상(이듬해 10월부터)으로서, 또 군민정(軍民政) 총괄의 도체찰사로서의 역할 수행이 서애 류성룡에게 부과된 가장 첫 번째 임무며 가장 큰 과제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끝난 후 선조는 그렇게 의뢰했던 버팀목을 차갑게 버린다. 그것은 오히려 류성룡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선조는 이내 그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려 애를 쓰지만 류성룡은 다시는 조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업적을 기려 충훈부에서 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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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그리려 보낸 화사까지도 사절하며 돌려보낸다. 물러난 후 그는 엄청난 저술을 남긴다.
2. 곡식이 정병을 만든다
1) 군량, 그 필요량이 얼마인가
(1) 류성룡에게 군무겸직이 맡겨지다
1592년 7월, 선조와 신하들은 모두 의주 행궁에 있고, 류성룡 홀로 안주로 내려온다. 구원병으로 장차 들어올 명군에게 보급할 군량조달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두 달 후인 9월에는 군사에 관한 임무까지 겸하라는 선조의 고지를 받는다.
군량임무에 도원수(都元帥) 임무까지 함께 하라는 것이다. 오늘 날로 말하면 군수보급 임무를 띤 병참 사령관에 전쟁전투 임무를 띤 군사령관을 겸하는 것이었다. 안주는 평양에서 하룻길이다.
류성룡이 이런 안주에 진을 친 것은 이 중지에서 왜군과 운명을 걸고 승부를 겨루려는 결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지리에 밝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일반 신하들과는 달리, 그리고 유학에 전념해 온 여느 유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전국 각 지역과 지리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식은 훗날 명제독 이여송이 손뼉을 치며 좋아할 만큼 빛나게 드러난다.
류성룡은 안주를 요충지로 삼은 후 안주와는 지척거리인 바닷길에 가까운 정주를 이용해서 일차적으로 명군에 지급할 양식을 모으기 시작한다. 1592년 7월 13일, 류성룡은 5천 명의 군사가 6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조달했다고 선조에게 보고서를 올린다.
(2) 힘겨운 군량전쟁
명군 일인당 하루 군량지급량은 반드시 3되이어야 했는데, ‘1인 1일 3되’를 기준으로 계산된 1만 명의 1일 양식 지급량은 300석이 되고, 1달 지급량은 9천 석이 된다. 이 9천석은 앞 7월 13일자 보고서의 6천 400석과는 무려 2천 600석의 차이가 난다. 이 차이는 아마도 조선군에 지급하는 곡식의 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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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에 지급하는 곡식의 양을 차별화해서 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나중 ‘1인 1일 3되’를 줄이라는 소리도 나오지만, 얼마 안 가 그 반도 제대로 지급할 능력을 갖지 못함으로써 무의미하게 된다. 1593년 1월에 나온 이여송 군대 4만 5천명의 1년 치 군량만 해도 무려 48만 6천석이 된다. 농사를 제대로 짓는 평상시의 조선조 세입이 60만 석이었던 데 비하면 이 군량은 엄청난 수치다.
따라서 우리 군과 우리 백성들은 명군에게 주고 남은 곡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앞서 말한 대로 태반은 썩고 상한 곡식이었다니, 무슨 수로 우리 군을 기르고 훈련해서 정병을 만들 수 있었겠는가. 명군의 3분의 2 정도 지급하는 우리 군의 군량을 계산해도 1만 명의 1년 치 양식은 7만 6천 800석이 된다. 그럼에도 류성룡이 안주에서 군량을 조달하는데, 그 단위는 대개 천 단위가 아닌 백 단위였다.
2) 군량, 얼마나 공급할 수 있었는가
(1) 군량조달에 조선의 미래가 달려 있다
임진왜란의 큰 싸움들을 모두 명왜전쟁으로 돌리려면 명군에게 얼마나 군량을 잘 조달할 수 있느냐가 조선 측의 일차적 임무가 된다. 이 임무 담당자인 류성룡은 거의 정기적으로 되풀이해서 절망에 빠진다. 그러나 의주 행궁에 앉은 조정 신하들은 실체를 알지 못하고, 아는 신하가 있다 해도 나서서 뾰족한 방법을 강구할 수가 없다. 오직 선조만이 초조히, 그래서 더욱 다급히 군량조달을 재촉한다. 그것은 절체절명이고, 조선이라는 왕조의 명맥을 잇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류성룡이 선조에게 같은 달 올린 보고서에 너무 절실하고 뚜렷하게 명시돼 있다.
‘장차 명군이 얼마나 올지 그 많음과 적음을 아무도 점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명군이 많이 와서 우리 힘으로 그 군량을 다 조달할 수 없다 해도, 우리 힘을 넘어서까지도 군량을 갖춰내라 명군이 요구하면, 아무도 그 요구를 제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능력이 못 미쳐서 요구하는 군량을 제때에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면, 그때 우리가 당면하기 될 낭패는 글과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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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이 처음 조선으로 나와 왜군을 공격한 것은 그 해(1592년) 7월 17일이었다. 지휘자는 요동 총병 조승훈이었고, 1차 구원병으로 끌고 나온 병력은 5천 명이었다. 이 5천 명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평양성을 단번에 무찌를 듯이 공격했지만 조승훈은 가장 아끼던 유격장군 사유를 잃고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있었다면 왜병의 조총이 얼마나 위력적인가 실감하는 정도였다. 선조는 군량 걱정에 명군이 물러나자마자 류성룡에게 서장을 보낸다.
‘이번 명나라 장수가 나왔을 때에 이미 소비한 곡식이 얼마나 되며, 남은 쌀과 콩으로 다음 두 번째 나올 명나라 군대의 식량을 지탱할 수 있겠는가. 경은 현재 있는 곡식 양을 모두 총괄 관리해서 의당 세밀히 조치하고, 결과를 급히 서면으로 보고하라.’
류성룡이 선조에게 올리는 보고서 또한 선조의 불안, 초조 이상으로 처절하기까지 하다.
‘지금 명군이 나아갈 길에 저축해 놓은 군량은 귀성에서 정주로 옮겨온 300~400석과 아산창에서 온 전세미 500석, 그리고 안주에 있는 아산 세미 700석, 모두 해서 1천 600석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이들 고을 외에 저축되어 있는 곡식은 겨우 하루 아니면 이틀 정도 지탱하기도 어렵습니다. 이제 명군이 주둔할 곳 역시 정주 아니면 안주일 것이온데, 안주는 난민들이 들고 일어나 난리를 일으킨 탓에 기구가 모조리 없어져, 임시로 명군이 거처할 집도 지금 명령하고 독려해서 만들고 있지만, 이 또한 뜻대로 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2) 군량조달에 관한 생생한 현장기록
이 명군은 평양에서 지금 패하고 돌아오는 조승훈의 군대로, 이들 패잔병에게 군량과 숙소를 제공해야 하는데, 현재 보유한 식량 1천 600석은 보름 정도의 식량일 뿐이고, 그밖에 다른 고을에서 아무리 긁어모아도 이틀 분 식량을 만들기 조차 어려운 상태라고 보고한다. 그런데 선조는 다음 나올 명군의 식량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나를 묻고, 시급히 대처하라고 재촉한다. 코앞에 있는 명군에게 먹일 식량조차도 그 재고를 며칠 분으로 따지는데 장차 나올 명군의 군량을 지금 당장 조처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니 기가 막힐 일이다.
당시 조선의 공급 능력은 현지에 나가서 있는 힘을 다해 식량을 긁어모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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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는 류성룡의 보고서에 의거해서 알 수밖에 없다. 그 외에 어떤 기록(실록, 연려실기술, 그때 신하들의 문집 등)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 호조판서 이성중 : 류성룡을 도와 현지에서 군량을 모음, 이듬해 사망, 남긴 기록 없음
- 한준겸 : 류성룡의 종사관, 기록을 남기지 않음
- 이원익 : 4도 체찰사까지 역임, 군량 조달에 관한 기록은 남기지 않음
조선의 군량조달 능력은 류성룡의 앞선 보고서에서도 잘 드러나 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4개월 후가 되는 1592년 8월 9일 이후의 보고서에서 보다 구체적인 숫자로서 그 실상이 파악된다. 이 보고서는 1차로 나온 조승훈 군대의 군량조달(5천 명 분)이 얼마나 어려웠으며, 이를 미뤄 다음에 나올 군량조달은 아예 대책에 서지 않고 계산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마침내 류성룡은 명에서 구원병으로 조선에 내보낼 군마의 조정을 선조에게 건의하고 서장을 올린다. 이때는 우리 군사는 이미 굶주리고 피곤해서 군사로서 전혀 기능할 수 없는 데 반해, 왜병은 언제든지 파죽지세로 북쪽으로 치고 올라올 수 있는 가장 충만한 기세에 있는 시점이었다. 위급함이 눈앞에 바로 닥쳐 있었다. 그럼에도 명의 구원병 수효 조정을 왕에게 건의하고 있다는 것은 군량조달(군마의 사료 포함)이 그만큼 어렵고 심각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같은 날짜 서장에 앞으로 올 명나라 군사에게 지급하는 양식도 줄여야 한다고 하고 있다. 애당초 명군을 너무 우대하여 ‘1인 1일 3되’를 지급했는데, 이를 2되로 줄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래야만 최소한 명군에게 양식을 끊이지 않고 보급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군에도 그보다 적은 분량이나마 군량을 계속 지급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명군은 한 사람이 하루 3되를 다 먹지 못해 남긴 쌀로 다른 물건과 바꾸고 있음이 조승훈 군대에서 이미 드러나 류성룡으로서는 간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당시 조선의 군량공급 능력은 1만 명분이 고작이고, 그것도 수송사정의 어려움으로 5일분 지속이 능력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나중에 가면 류성룡이 ‘아, 곡식 1만 석만 있다면, 적게나마 수천 석이라도 있다면, 참으로 오늘의 걱정은 군사 없는 데 있지 않고 식량 없는데 있다.’는 군량전쟁의 비명을 수없이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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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같은 비명은 사실상 다음해(1593)부터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고, 아직까지는 명군이 나오기 전(2차 명군) 준비단계임에도 고작 1만 명분의 군량준비를 에워싸고도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해낸 것이 학전(學田 : 성균관과 4학 그리고 향교에 지급된 전지)), 서원전(書院田), 사위전(寺位田)과 여러 궁에서 절수(折受:임금에게서 자기 몫의 땅을 떼어 받는 일)하는 혜택전 등에서 곡식을 거둬들이는 것이다.
(3) 군마도 굶어 죽다
임진왜란은 군량전쟁일 뿐 아니라 군마전쟁이라 해도 결코 과장되지 않는다. 군사에 대한 군량공급도 지난했지만 군마의 사료공급 도한 그에 못지 않게 어려웠다는 의미다. 물론 이는 명이나 왜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조선의 입장에서 그러하고, 전장에서의 군민 업무를 총괄하는 도체찰사로서의 류성룡 입장에서 더욱더 그러하다. 일본은 보병이 주였지만 명은 기병이 주축을 이뤘다. 특히 몽고 등 유목민을 상대로 싸웠던 이여송의 요동병은 기마병이 주력이었다.
따라서 군량만큼 말먹이도 함께 준비해야했다. 문제는 양이다. 여름철에는 풀이 있어 필요한 곡식의 양이 경감되기도 하지만 여하튼 여름에도 말먹이는 필요하고, 명군이 조선으로 오는 늦가을 이후의 겨울철에는 더 많은 양이 필요하다. 이때 말 한 마리 당 사료로 들어가는 곡식양은 하루 한 말로 책정되어 있어, 조선 병사에게 지급되는 곡식양의 거의 10배였다.
병사에게 지급할 벼, 보리, 말 등의 소곡을 제쳐두고 말먹이 공급에 따로이 온 정성을 쏟을 수도 없는, 그 답답하고 절박한 심정을 류성룡은 선조에게 보고한다. 그러고는 말 사료의 현재 보유량이 3만 3천 ~ 4천 석에 이를 것이라는 보고도 함께 곁들인다.
말먹이콩이라고 해서 콩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수, 조, 기장 등 잡곡도 많이 포함되는데, 말먹이로 이정도의 곡식을 평안도 한 곳에서 모을 수 있는 것은 산지가 많은 지역 특성상 밭곡식이 많은 덕분이다. 그러나 이 밭곡식은 잡곡이라 해도 사람이 먹기 위해 생산한 것이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이를 말먹이로 제공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렇게 모은 말먹이도 말 1만 마리의 한 달분 먹이밖에 충당할 수 없으니 류성룡의 걱정,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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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 애태움이 극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번연하다. 군량이 없어 흩어진 군사들은 초근목피로 근근히 연명할 수 있다. 그러나 말들은 먹이가 떨어지면 죽는다. 1593년 명군이 오고, 평양성을 탈환한지 며칠 되지도 않아 말먹이는 떨어지기 시작한다. 벽제관전투에서 패한 이여송 군대가 파주, 동파에서 개성으로 물러나 주둔하려고 할 때의 정경을 류성룡은 선조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이렇게 적고 있다.
‘마초가 완전히 없어져 공급될 수 없고, 길옆 들판은 왜병들이 모두 불을 질러 사방의 산이 깡그리 불타 한 치의 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파주 경내가 더욱 심하여 100리 안에는 촌락이 없습니다. 그 참혹함을 눈뜨고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명나라 대군이 행군 중인데도 군량과 마초는 모두 떨어졌습니다. 말은 죽어 길에 널려 있고 살아남은 말들도 너무 야위어서 전쟁터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신은 가슴을 치고 답답해 울부짖어도, 달리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형편입니다.
한편 이여송은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이래 왜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있었고, 류성룡, 이덕형 등이 왜군 공격을 강력히 건의 했으나 지지부진하며 군량과 마초를 더 많이 요구했다.
(4) 운송이 더 큰 문제
군량이 모아지고 말먹이가 준비되었다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공급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시기, 요구되는 장소로 운송해야 한다. 문제는 이 운송의 지난함이다. 사람이나 소, 말 같은 가축을 이용해야 한다는 데 첫째로 어려움이 있고, 평지보다 산지 운송이 더 많다는 데 둘째로 어려움이 가중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그해 8월 9일 류성룡이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에 보면 각 고을 여기저기서 운반한 곡식이 1천 석이고, 그것을 귀성에서 정주까지 운반 하는데 그 거리가 비록 하룻길이라 하더라도 길이 너무 험해서 인력이 소진되었다고 한다. 잇달아서 더 많은 곡식을 운반하기는 도저히 불가하다고 했다. 곡식 1천석을 운반하는데 동원된 사람들 힘이 다 없어졌다고 한다면, 국가의 백성 동원력과 길의 원시성이 큰 문제였다.
마침내 선조는 1593년 1월, ‘수송 총동원령’ 과도 같은 전지를 류성룡에게 내린다. 그 전지의 핵심 내용은 그나마 몇 안 되는 궁중 호위군, 동궁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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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영변 호위군 까지 군량 수송에 동원하라는 것이었다.
군량운송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의주 행궁을 호위하는 호위병을 차출해야 했으며, 장차 북으로 치고 올라올지도 모를 평양 주둔 왜군을 막기 위해 영변을 지키고 있는 호위군까지 동원시켜야 했느냐이다. 그러고도 정부가 낼 수 있는 관군은 보병, 기병 합쳐서 1천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이때 선조는 류성룡에게 내리는 서장에서 ‘백 번을 생각해도 계책이 서지 않는다’고 했다. 이 모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0개월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 이로부터 임진왜란이 완전히 끝나는 1598년 11월 18일까지의 나머지 5년 10개월, 그 사이 조선이 어떤 전쟁을 치르고 있었는지 그 고난의 과정은 어떠했는지 누구든 유리창 안을 투시하듯 명백히 알 수 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국가’로서의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한 나라였다. 율곡 이이의 말대로 ‘나라인가’, 서애 류성룡이 부르짖던 ‘하늘이 돕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나라였다. 왜군의 점령이라 해도 조선 전 지역으로 보면 점 3개이며 그 점을 잇는 외가닥 길 점령이었다. 역사상 어느 점령군도 점 3개, 길 하나 점령하고, 점령군 행세를 한 예는 드물다. 조선이 바로 그 드물고 드문 예의 하나였다.
3) 군량조달, 그 명백한 한계
(1) 전통적 방법 세 가지
① 전세(田稅) :조선조 공식적인 세수 중 가장 큰 것, 밭에서 생산되는 곡물에 매겨진 세금, 풍년 흉년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거의 일정하고 예측 가능성이 높은 국가수입
- 조선조 전세는 전문군대 1만 명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없을 만큼 빈약
② 작미(作米) : 공물작미(貢物作米)의 준말로 공물을 쌀로 바꾸어 내는 세금, 그 지방의 특산물(포, 견 등)울 받지 않고 쌀로 받는 것
-노비신공미 : 노비가 몸으로 부역하는 대신 쌀을 바치는 것
- 조예번가미 : 관노들이 번을 서는 대신 바치는 쌀
- 병사자원납비 : 변방을 지키는 병역 대신 쌀을 바치는 것
* 류성룡의 보고에 의하면 당시 작미의 량은 10여만 석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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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둔전(屯田) : 둔전은 백성들이 농사짓는 민농이 아니고, 관이 농사짓는 관농이다. 군졸, 서리, 관노비, 경우에 따라 평민에게 간지를 개척하여 경작 하게 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확물을 군량과 지방관청의 경비 및 기타 국가 경비에 쓰도록 함
- 둔전의 곡식량은 1667년 기준으로 1만 4천 ~ 1만 8천 석, 5천 명 군사의 6개월 분 군량에 불과 했음
- 고려와 조선에서의 둔전은 주, 부, 군, 현등 지방관청의 경비에 쓰도록 한 관둔전과, 주둔 군대의 경비에 쓰게 한 군둔전,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임진왜란 후 이 둔전은 크게 넓혀져 임진왜란 70년 후인 현종 8년(1667년) 둔전의 총 면적은 4천 496결로 되어있다.
한 국가로서 조선이 군량조달의 공식적인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위 세 가지뿐이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방법으로는 군량의 수요에 도저히 미칠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근간이 되는 전세는 임진왜란이 나던 바로 그해부터 급격히 줄어들었다. 첫 해는 호남과 평안북도 지역을 제외한 거의 전역이 반 이상, 그중에서도 영남지역은 3분의 2 이상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부터는 영남을 제외한 전 지역이 평년 수준에는 미칠 수 없다 해도, 먹고 살 만큼은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오직 영남 지역만이 임진왜란 7년 동안 폐해가 너무 커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고, 특히 1593년 6월의 류성룡 보고서에 의하면 기근과 전염병이 영남지역에 한꺼번에 밀어닥쳐 백성들이 너무 많이 죽어나가 ‘문경 이남에서 밀양까지 수백 리 사이 민가에선 연기가 끊어지고 텅 빈 땅이 되었다’고 까지 했다.
3. 군량조달 해결책을 내다
1) 군량조달이 최후 보루, 호남
오로지 호남지역만이 건재해서 군량조달의 최후 보루가 되어 있었다. 이순신의 군량도 오직 호남에 의존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이순신의 전승도 이 호남에서의 군량확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순신의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는 명구도 군량조달지로서의 호남확보가 절체절명이라는 데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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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전후해 나온 것으로 생각되는 김성일과 김천일의 진주성 방어론도 그 목적은 호남 방어, 호남에서의 군량 확보에 있었다. “진주는 호남에 밀접해 있다. 실로 순치의 관계다. 진주가 없으면 호남도 없다.” 이는 1593년 2월 진주성을 마지막까지 방어하다 전사한 김천일의 외침이다. “진주가 호남의 보장이다. 진주가 있음으로써 호남은 지켜진다. 진주가 없으면 호남이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는 의지할 곳이 없다.” 이 또한 진주 사수를 부르짖다 순직한 김성일의 주장이다.
진주와 호남과 국가의 이 같은 연결고리는 모두 국가 물적 토대, 군량 최후 보루, 최고 조달지로서의 호남을 핵으로 이어진다. 호남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보루이고 보장이며 명맥이었다. 이후에도 계속 ‘조선조 조세의 거의 반’이 호남에서 나왔지만 군량의 수요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했다. 바다에서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군병으로 싸우는 ‘이순신의 군량’으로는 상당 정도 가능했지만, 육지에서 더 많은 군대, 더구나 명군에게까지 지급해야 하는 류성룡의 군량으로는 부족하기 그지없었다.
2) 류성룡, 백성이 즐겁게 따르도록 하다
그렇다면 앞의 공식적인 세 가지 방법 외에 어떤 방법으로 군량을 조달했는가. 여기에 전략가, 경세가, 정치가로서의 류성룡의 진면목이 있다. 그는 확실히 남다르고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끝나도록 영의정으로 도체찰사로서 선조가 놓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역사에서 늘 보는 방법을 절대로 쓰지 않았다.
군량이 턱없이 부족할 경우 군량을 메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약탈하는 것이다. 권력자나 실권자 모두 아무런 거리낌이나 주저 없이 군사를 풀어 가가호호 색출해서 백성의 식량을 뺏어갔다. 그것이 전쟁의 역사이고, 백성의 수난사다. 류성룡의 위대함은 비열하고 비인간적이지만 널리 쓰였던 이 방법을 절대로 쓰지 않았다는 데 있다.
(1) 모속(募粟)
그는 먼저 모속이라는 방법을 썼다. 모속은 민간에서 군량용 곡식을 자원해서 국가에 바치는 것이다. 물론 이는 평시가 아니고 전시에 있는 일이다. 문제는 끼니도 잇기 어려운 처지에 누가 남는 식량이 있어 자진해 곡식을 내놓겠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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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성, 특히 전시에 있어 자발성이 어렵다면, 류성룡의 모속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는 무엇보다 모속의 대상을 일반 백성이 아닌 중인으로 삼았다. 중인은 양반과 상민의 중간 계급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모두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전문행정직인 아전을 비롯해 의관(醫官), 율관(律官), 역관(譯官), 산관(算官) 등이 모두 중인이다. 그들은 과거를 보아 문무반 벼슬을 할 수는 없었지만, 전문직인 만큼 양반보다 훨씬 부유했다. 노비도 양반보다 많이 가지고 있었고 토지도 양반들에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이 소유했다.
류성룡 모속의 요체는 실행함에 수량을 많이 바라서는 아니 되고, 꾸준히 준비하도록 한 다음에 자원해서 내도록 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강제성을 띠어서는 아니 되며, 무엇보다 백성들의 원성이 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백성들이 자원해서 곡식을 낼 때에는 내는 수량에 따라 즉각 상을 주어서 보상해야 하고, 백성들에게 신의 잃는 일을 가장 두려워해야 하고, 언제나 백성들에게 시종여일한 믿음을 주어 백성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류성룡의 모속이다. 이 모속을 호조에 명하여 다른 지역에서도 그렇게 시행하도록 선조에게 간청한 것이다.
류성룡의 전 생애를 돌아보면 백성에 관한 한 ‘강제’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백성들에게 관이 갖는 위압이나 위세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일을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는 군량을 모을 때는 근처 민가까지 갈 겨를이 없어 풀더미 위에 자면서도 일을 보았다. 신분사회에서 보통 영의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그에겐 있었다. 그래서 원성이 일지 않는 모속, 그중에서도 재력 가진 중인들이 기탄없이 내는 모속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그 모속으로 얼마나 군량을 거뒀는지의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2) 공명첩(空名帖)
- 공명첩 : 곡식을 내고 사는 실직이 없는 벼슬, 합법적으로 조장되는 매관매직의 방법, 첨사(종3품 무관), 만호(종4품 무관), 권관(종9품) 등
- 공명첩의 역사적 기록 ; 숙종 3년(1697) 기근이 들어 진휼책으로 발행, 영조 때는 백성 구제를 위해 여러 번 행함, 순조 때도 공명첩 다량 발행
- 조선만이 아닌 다른 전통 사회에서도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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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의 공명첩은 류성룡이 여러 번 요청하는 계사를 올리는데 그 중 1596년 1월 8일과 2월 2일에 쓴 것이 대표적이다.
‘전쟁이 발생한 이후 각 도의 병기는 흩어지고 잃어져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비록 군사를 뽑아 훈련을 시켜도 모두가 빈손이니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경기도와 황해도에서 도회지를 정하여 병기를 만들려고 합니다만 장인의 급료와 식량을 갖추어낼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해당 관서로 하여금 다음 각 항의 공명첩과 허통(許通), 면역(免役), 면천(免賤), 승인도첩(僧人度帖) 500장을 만들어 나눠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각기 장수는 이러합니다. 봉사 100장, 참봉 150장, 노직 50장, 면천 50장, 금군 50장, 승인도첩 50장, 허통 20장, 면역 30장.’
선조가 비답하기를 계사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 같은 해 2월2일에도 공명첩 500장을 더 만들어 달라고 요청함
* 참고
봉사(종8품), 참봉(종9품), 노직(늙은이를 우대하는 관직), 면천(천인 신분을 면함), 금군(궁중의 군대로 인기가 있었음), 승인도첩(중 허가증), 허통(사대부의 서자에게 벼슬을 주는 것) 등.
중요한 것은 이 공명첩으로 얼마나 많은 군량을 모을 수 있었는지가 아니라 전시의 약탈을 얼마나 줄일 수 있었는지 이다. 비록 공명첩이 비규범적 매관매직이며, 비정상적 신분 상승의 수단이라 해도, 전시의 비인간적 약탈로 백성들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그 부정성은 충분히 상쇄되고도 남는다. 더구나 자원해서 곡식을 내는 쪽에선 신분 이동이고, 국가로서는 군량수요의 충당이며, 백성들로서는 전시 고통의 완화이다. 그런 면에서 공명첩은 3중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고, 이 기능의 담당자인 류성룡은 전시 약탈을 방지하는 최고의 실천자이며 리더라 할 수 있다.
(3) 무속(貿粟)
무속은 무역으로 곡식을 사들여 군량을 조달하는 방법이다. 이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명과의 국외 무역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 다른 지방과의 지방 무역이다. 지방무역은 소금을 곡식과 바꾸는 무역으로 비단 정치가로서의 류성룡뿐만 아니라, 경세가 류성룡의 면모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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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같은 소금 무역은 이로부터 19세기 말까지 계속 성행한다.
명과의 무역은 주로 은을 생산해서 팔고 곡식을 들여오는 것이었는데 양도 적고 따라서 생산비를 빼면 이익이 너무 적었다.
그럼에도 류성룡이 무역으로 곡식을 사들여야 한다고 강조함은 국가가 가지고 있는 은을 그대로 사장시키지 말고 최대한 이용해 보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이 역시 류성룡의 전시 약탈 방지의 일환으로 설명할 수 있다.
3) 사방을 둘러봐도 곡식 나올 곳이 없다
물론 앞서 말한 여러 가지 군량 조달방법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상대적으로 나아지긴 했다. 하지만 그 나아짐 또한 어지까지나 정도의 차이다. 군량이 가장 부족했던 임진왜란 이듬해인 계사년(1593년)에 비해 조금 나아졌을 뿐이었다. 그러면 계사년 궁핍은 어느 정도였는가. 그것은 비명으로 터져 나온 류성룡의 상소문에서 잘 알 수 있다.
‘우리 군사는 거의 모두가 굶주리고 지쳐서 군대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만약 1만 석의 곡식만 얻을 수 있다면, 당장에 정병 수천을 모을 수 있겠습니다.
그 정병만으로도 적병을 토벌하는 효과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량을 변통해 낼 계책이 전혀 서지 않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선조에게 올리는 류성룡의 이 같은 글은 계사년 한 해에 여러 번 나온다.
‘식량이 없는 까닭으로 군사가 모일 수 없고, 군사가 모일 수 없는 까닭으로 이길 만한 기회가 있어도 계책을 세울 수 없습니다. 명군에게 지급할 군량 외에 우리 군사에게 줄 수 있는 나머지 수천 석만 있어도, 가히 일을 도모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군량을 변통해 낼 곳이 없습니다. 진실로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전란 때문만은 아니다. 아무리 비참한 전란을 치루더라도 수천 명의 정병을 기를 여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국가의 기본이다. 그런데 조선은 왜 예외인가. 조선은 왜 그럴 능력이 없는가. 그 의문은 다음 보고서에서 더 깊어진다.
‘무릇 오늘의 걱정은 식량이 없는 데 있고, 군사가 없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식량만 있으면 수천 명의 군사도 며칠 동안에 불러 모을 수 있습니다. 먼 도 까지 가서 군사를 징집하지 않아도 가히 적군을 제압할 수 있는 군대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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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수 있습니다. 지금 적병이 있는 곳은 오직 한양과 이 한양으로 통하는 한 길 뿐입니다. 그 나머지 지역은 모두 우리의 소유입니다.’
1593년 3월 말 현재, 류성룡의 보고서에서처럼 왜병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은 한양과 영남 해안지역, 그리고 이 지역과 한양에 이르는 한 가닥 길이 전부다. 그 나머지는 모두 조선의 관할 지역이고, 조정의 관리가 다스리고 있는 지역이다. 전란 이전과 결코 같을 수는 없다 해도, 최소한 수만 석의 군량은 확보할 수 있고, 그에 상응한 군대도 기를 수 있다. 그런데 왜 그토록 궁핍 상태에 처해 있었을까. 절망하리만큼 온 사방을 둘러봐도 곡식 나올 곳은 그토록 없었을까. 후일 류성룡은 이렇게 말한다.
‘조선이 나라인가. 그 나라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천찬(天贊)이다. 하늘의 도움이다. 하늘이 돕지 않고서는 살아날 길이 없었다.’
Ⅱ.조선군, 그 총체적 난맥상
1. 기이한 조선군
1) 모든 조직은 피라미드
모든 조직은 피라미드다. 특히 군 조직은 피라미드의 전형이자 상징이다.
첫째로 집단 성원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최적의 기구가 피라미드형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정보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흐름이 방해받지 않고 왜곡되지 않도록 가장 잘 관리할 수 있는 최적의 기구가 피라미드형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명령 하달과 명령 복종의 최적기구가 피라미드형이기 때문이다. 집단은 살아남기 위해, 혹은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늘 새로운 의사결정을 한다. 국가의 경우 새로운 정책 결정을 한다, 그 새로운 정책결정이 집단 구성원 전체에게 하달되면, 각 구성원은 주어진 임무에 따라 그 의사를 실현해야 한다.
2) 조선군, 역피라미드 편제
그런데 기이하게도 조선군은 이 피라미드형에서 벗어나 있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바로 선 정 피라미드형이 아닌 거꾸로 선 역 피라미드형의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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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편제를 하고 있었다. 1592년 12월 4일 류성룡이 도체찰사로 임명장을 받고 곧바로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를 보면 조선군의 역피라미드 편제가 드러나 있다.
‘군중에는 이미 순변사도 있고, 순찰사도 있고, 도원수도 있습니다. 지금 부족한 것은 명령을 내리는 장수가 아닙니다. 우환이 되는 것은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오면 도리어 해가 되는데도, 신처럼 어리석고 허망한 사람을 그 사이에 또 끼워 넣어 명령을 내리게 하면, 그야말로 명령은 엇갈리고 뒤섞입니다. 역(易)에 이르기를 군을 주관하는 사람이 여럿이면 패전한다 했습니다. 이 경계를 어기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류성룡이 임진왜란이 끝나기 2년 전 각 도의 수령과 장수들에게 내린 공문에서 더 역력히 나타난다.
‘요즈음 각 도의 군사들이 각기 다르게 나누어져 소속되어 있다. 그로 말미암아 순찰사의 군사가 따로 있고, 병사, 수사의 군사가 따로 있고, 방어사, 조방장, 수령의 군사가 모두 따로 있다. 이들이 서로 군사를 더 많이 차지하려고 다투어서 군정이 심히 문란해지고 있다. 군사를 징발할 때마다 공문이 여러 곳에서 뒤섞여 나와 어디를 따라야 할지 알 수 없다. 받들어 시행하기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다. 이것이 오늘날의 가장 큰 폐단이다.’
이는 군의 편제나 조직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자리의 높낮이가 확연히 구별되거나 차별화 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다. 즉 최고 결정자의 명령 하달과 복종의 최적기구인 피라미드형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도원수, 순변사, 순찰사, 병사, 수사, 심지어 조방장, 수령까지 같은 등급이면 모두가 도원수 노릇을 하게 된다. 실제로 도원수는 그 이름과 달리 오늘날로 말하면 제도화 되어 있지 않고, 오직 전시에만 군대를 통찰하는 임시직 무관으로, 그것도 전문 무관이 아닌 문관이 맡는다. 따라서 나이도 지위도 같거나 비슷한 상관들을 그 누구도 통섭할 재간이 없어, 일처리가 지난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3) 10마리 양에 목동이 9명인 셈
역피라미드화는 위아래 구분 없이 조선 군 조직 전반에 걸쳐 일어났다.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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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사령관 뿐만 아니라 중대장급인 초관, 소대장급인 기총, 분대장 급인 대총의 경우도 역피라미드형이다.
중대장은 있는데 소대장이 없고, 소대장은 있는데 분대장이 없으며, 분대장은 있는데 군사가 없다는 소리다.
4) 명령이 여러 갈래에서 나오다
이런 역피라미드형 조직은 군사행동의 필수인 명령의 일원화를 파괴시킨다. 그래서 전쟁을 하면서 전투는 하지 않는다. 전투가 벌어질 만하면 모두 그 전투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이유는 따질 것도 없다. 역피라미드형인 만큼 군중에는 계통이 서지 않고, 계통이 서지 않는 만큼 명령도 제멋대로다. 방어사, 병사, 순변사, 순찰사, 도원수 등이 각각 권한을 장악해서 제각각 결단과 명령을 내리기 때문이다. 서로를 견제하고, 서로를 의지하며 따를 줄 모른다. 오직 태만하고 안일한 생각만 되풀이해서, 전진하고 싶으면 전진하고 퇴각하고 싶으면 제 마음대로 퇴각해버린다. 기회를 만들어 미리 시일을 정하고 만나기로 약정해도 제 날짜를 지키지 않고, 핑계는 반드시 다른 장수들에게 갖다 댄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장수들이 힘을 합치지 못하고, 오로지 각자가 흩어져 피해 달아나는 것을 좋은 계책으로 삼는다. 진격할 때도 함께 진격하지 못하고, 패해서 물러갈 때에도 서로 구원해 주지 않는다. 거기에다 다른 사람들이 공을 이룰까 시기해서 견제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해서 일찍이 한 번도 적병의 기세를 꺾는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오직 군량만 헛되이 소비하고, 적을 만나면 피란만 하는 군대일 뿐 나라를 회복하려는 계책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그 까닭은 군졸들의 두려움과 나약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장수들의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와 군대의 힘이 하나로 모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군령이 엄중하지 못하고 민심이 방종해지는 폐단 역시 명령계통이 한결같지 못하여 여러 곳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류성룡이 선조에게 올린 이 보고서는 조선군에 대한 정문의 일침이다. 그 누구도 파악하지 못한 조선군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가장 명민하고 정확하게 간파한 것이다. 조선 군조직의 약점을 그토록 적나라하게 밝혀낸 글은 전무후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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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녹봉 없는 장수
1) 임오군란은 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조선은 급속도로 망해갔다. 그렇다면 임오군란은 왜 일어났는가. 이유는 일어선 군인들의 목표 대상이 정권도 국가도 백성도 아닌, 봉급미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돈으로 봉급을 주는 현금 급부 방식이 아니라, 쌀이나 보리, 혹은 베로 봉급을 주는 현물 급부 방식이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매달 지급하는 봉급미가 13개월 동안이나 밀려 있었다. 더군다나 13개월 만에 지급하는 봉급미 수량은 턱없이 부족했고, 그마저 절반은 모래였다. ‘모래나 먹으라’식의 담당 관리들의 부패가 군란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것이다.
2) 병졸이 장군의 생활 수단
그러나 이는 조선군에선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지방이나 일선에 나가 있는 무관들에게 봉급미란 처음부터 없었다. 이는 선조에게 올리는 율곡의 상소문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나라 법제에는 빠진 것이 많습니다. 병사·수사·첨사·권관 등 벼슬만 설치만 했을 뿐, 이들의 생활을 보장하는 녹봉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생활 준비를 병졸들에게 거둬들여 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곡의 상소문대로 장수가 녹봉이 없어 병졸들에 의존해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면, 그 장수와 병졸의 외적 상호관계는 어떤 유형이었을까. 이는 더 물어볼 것도 없이 두 가지 유형의 ‘수탈형태’를 자행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병사들로 하여금 양민을 수탈하게 하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장수가 자기 병사를 직접 수탈하는 행태이다. 후자의 수탈은 국가가 녹봉을 지급하지 않는 만큼 ‘합법적’으로 용인된다.
3) 녹봉 없는 장수 자리가 오히려 인기
병사에 대한 장수의 이 같은 수탈은 반대로 ‘녹봉 없는 장수’가 최고 인기를 얻는 기현상을 야기한다. 채수(債帥)가 공공연히 행해지는데, 체수는 실력으로 장수가 된 것이 아니라 돈으로 장수 자리를 사서 장수가 된 사람을 말한다. 장수자리, 그것도 ‘녹봉 없는 장수’ 자리를 사기 위해 권문세가에 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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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니 어떻게 이런 괴이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다시 율곡의 상소문을 살펴보면
‘법제가 점점 풀어져서 관리와 장수들의 탐욕과 포악함이 더욱 성해졌습니다. 더구나 인재를 뽑고 등용하는 것이 더 불공정해져서 채수가 연달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젠 공공연히 말하기를 ’아무 진의 장수의 값은 얼마요, 아무 보의 벼슬은 얼마다‘ 하고 정해 놓았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군졸들을 토색하여 입신할 줄만 압니다. 그들이 어찌 그 이외의 일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채수’한 자가 나라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로 말하면 ‘국가안보’라는 것을 염두에 둘 수 있겠는가. 그들의 안중에 백성의 곤궁과 고통이 보이겠는가. 백성이 어떻게 시달리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꿈엔들 생각함이 있었을까. 그들에게 자리를 파는 조정 대신들은 또 그들과 무엇이 달랐을까. 그 조정 대신들에게 ‘나라’의 개념과 ‘백성이 근본’이라는 유교 의식이 촌치라도 남아 있었을까.
사실 이 ‘채수’관행은 조선이 망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매관 매직은 채수 관행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조선은 제도적으로 수탈이 용인된 나라다.
관(官)이 민(民)을 마음대로 수탈할 수 있도록 국가제도가 만들어져 있었고, 이를 막는 장치가 없었다. 언로(言路)기 틔어서 선비들이 아무리 규탄하고 상소해도 수탈제도는 유지되었다. ‘녹봉 없는 장수’도 그 하나일 뿐이다. 율곡도 혁파를 수없이 부르짖지만 부르짖는 것으로 끝났다. 이유는 명백하다, 율곡 역시 제도에 관한 지식이 없어 어떻게 제도를 고쳐야하는지 몰랐다.
조선은 도리만 강조하면 나라는 저절로 굴러간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제도, 시대에 맞는 제도, 백성의 요구에 부응하는 적절한 제도를 만들 줄 몰랐다. 이런 무지의 틈새로 탐관이 황행했고, 오리(汚吏)가 판쳤다.
백성들을 향한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공공연히 자행되었고, 제도라 할 수 없는 ‘제도’가 이를 용인했다.
마침내 다산 정약용은 그의 감사론(監司論)에서 ‘큰 도적이 없어지지 않는 한 백성은 모두 다 죽어 살아남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절규했다. 다산이 말하는 도적은 관리들로 계급이 오를수록 큰 도적이 되었으니, 큰 도적 떼가 온 나라를 지배하는 격이었다. 그에 비하면 ‘녹봉 없는 장수’는 한갓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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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에 불과했다. 마침내 전쟁이 터졌을 때 이런 ‘녹봉 없는 장수’로 나라를 지키려 했으니, 그 결과가 어떠했겠는가.
3. 무기 없는 병졸
1) 도망 잘 치는 군대
“너희 나라 군대는 병기가 전혀 없다.” 임지왜란이 일어나던 해 7월 1차로 조선에 출병한 명군 장수들은 병기 없는 조선의 군대를 몹시 괴이하게 여기며 탄식했다는 상소문이 있다. 병사에게 무기가 없다면 병사라고 할 수 없다. 무기가 없다면 전투를 할 수 없고, 전투를 할 수 없다면 군인일 수 없다. ‘군인일 수 없는 군대’가 바로 조선군이다.
조선군의 모습은 선조가 류성룡에게 내린 전지에 잘 나타나 있다.
“오늘 제독 이여송을 만나 보았는데, 우리 군병들이 도망을 잘 친다는 것을 깊이 경계했다. 그는 말하기를 ‘조선 군병들이 비록 나가서 싸우는 일은 못하더라도 파수라도 제대로 해준다면, 명나라 대군이 그 형세에 힘입어 분발해서 적병을 강하게 내몰 수가 있는데, 조선 군병은 파수는커녕 적이 오기만 하면 번번이 먼저 피해 달아납니다’라고 하였다.”
군편제가 분명하지 못하고 명령체계가 하나로 통일 되지 못하였으며, 평소 군사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다, 장수가 군사를 한 번도 위무해주는 일이 없는 것 또한 큰 이유다. 거기에다 병사들은 늘 굶주림과 피곤에 지쳐있었다.
이 이유만으로도 조선군이 적을 만나기 무섭게 도망가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무기 없는 병졸’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그러하니 선조는 명나라 장수에게 군율을 어기고 달아난 우리 장수와 군사를 처단하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다.
2) 병기를 마련해줄 능력이 없는 조선
(1) 주무기는 몽둥이와 죽창
군인에게 병기가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군인에게 병기 없이 전장에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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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은 마치 농부더러 맨손으로 흙을 파서 농사지으라는 것과 매한가지다. 아니 그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소리다. 농부가 맨손으로 흙을 판다고 죽지는 않지만 병기 없이 전장에 나가는 군인은 죽게 마련이다. 죽지 않으려면 도망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군율로 다스려도 안 되고, 본보기로 병사들의 목을 베서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도망을 잘 가는 병사’라 해도 일단 전장에 나가는 군인은 무슨 병기든 손에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전쟁터로 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손에 드는 병기는 누가 마련해 주는가. 정상적으로는 국가가 마련해 준다. 그러나 조선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병사 스스로 마련하는 무기는 기껏해야 몽둥이 아니면 대나무창, 혹은 곡괭이, 쇠스랑 등의 농기구일 것이다. 그러니 명나라 장수들의 입에서 절로 “너희 나라 군대는 병기가 전혀 없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실정을 류셩룡이 올린 보고서에서 보면,
‘우리 군가는 평소 늘 훈련해서 길러낸 병사가 아닙니다. 자기 양식도 매양 스스로 장만해서 싸가지고 다니게 합니다. 병기 또한 스스로 마련해서 늘 지니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 병기는 모두 무디어서 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용감하게 싸우는 군사도 양식을 싸가지고 다니는 만큼 굶주리고 피곤하고 근심에 차고, 무딘 병기를 지니고 다니는 만큼 재주도 능력도 힘껏 발휘해 싸울 수가 없습니다.’
이 보고서가 쓰인 시점은 임진왜란이 끝나는 해(1598년) 정월이다. 그렇다면 조선군은 임진왜란이 시작돼서 끝나기까지, 한 번도 제대로 훈련해서 양성한 전문군이 아닌, 병농일치의 ‘미숙련 농사꾼 병사’들인 것이다. 거기에다 그들은 양식까지 스스로 마련하고, 더 기막힌 것은 병기마저 스스로 마련해서 싸워야 했다.
(2) 활은 조총의 상대가 안 돼 (내용 생략)
3) 허수뿐인 군사 수
조선은 등록된 군사 수와 복무하고 있는 군사 수가 전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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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부상의 군인 4만 명, 그러나
임진왜란이 나고 2년 후인 선조 27년(1594년) 4월 류성룡이 선조에게 올린 ‘진시무차’에 당시 병력현황이 잘 기록돼 있다. ‘진시무차’는 그때 꼭 해야 할 가장 시급힌 일을 임금에게 아뢰는 상소문을 말한다. 이 ‘진시무차’에 의하면 평상시 상번(복무)할 수 있는 기병의 수는 2만 3천 7백 명이고, 보병의 수는 1만 6천 2백 명으로 모두 4만 명 정도다.
- 상번 : 군인으로 실제 복무하고 있는 군인
- 보조군(보 혹은 봉족) : 16 ~ 60세에 이르는 사람으로 12만 명에 이르지만, 실제 군인으로 동원될 수 있는 수는 극히 제한적
(2) 실제 수는 허수
그렇다면 봉족을 제외하고 실전에 동원할 수 있는 군사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정상적으로 본다면, 평상시 상번 명단에 올라 있는 기병, 보병 4만 명은 최소한 다 동원되어야 한다. 그때의 실상은 임진왜란이 나던 해 8월 5일자의 류성룡 보고서에 잘 밝혀져 있다.
‘순안의 총대장이 거느린 군사가 수천 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과반수는 쓸모없는 병사들입니다. 도원수가 머물고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민병 100~200명이 고작입니다. 달리 뒤를 이어 성원하고 세력을 도우며 응원해 줄 수 있는 군사도 없습니다. 만약 적병이 떼 지어 몰려온다면 지탱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형세입니다.’
대체 조선군은 어디에 다 있는가. 기막힌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군대의 정원으로 기록된 수만 있을 뿐이지, 실제 동원된 수는 전혀 없다고 할 만큼 적다. 예컨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4년이 되는 1596년 2월의 수원을 보면 정원으로 기록된 군사의 수는 1만 7천 명인데 ‘지금은 겨우 1천 명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전쟁과 관계없이, 전투를 치르지도 않고 군사가 없어진 것이다.
같은 해 4월의 평안도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평안도의 평상시 정원으로 기록된 군사의 수는 1만 명이며, 봉족까지 합치면 2만 명이 넘는다. 그런데 ‘지금은 공천(관노)과 사천(사노비)에 잡류(떠돌아다니는 사람)까지 합쳐 뽑아도 500명밖에 되지 않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는 게 류성룡이 평안도 순찰사와 병사에게 내린 공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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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정원으로 기록된 군사의 수는 수원이나 평안도나 모두 허수에 지나지 않는다.
(3) 아전이 군인을 뽑는 나라
조선은 무인이 아닌 색리가 군사를 뽑는 전담자였다. 색리는 감영이나 군, 현 등에서 사무를 전담하던 아전들로 군과 국방에 대한 개념이나 의식이 전혀 없었다. 이들 존재는 모든 비리와 병리의 온상으로 부정, 부패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이 나서서 군사를 뽑는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더 물어 볼 것도 없이 정원으로 기록된 군사 수는 오로지 기록상의 숫자일 뿐, 실제로 동원되는 군사 수는 모두 허수가 되고 만다. 아전이 군사를 모으는 담당자로 있는 한, 류성룡의 ‘진시무차’에 나오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가 없다.
‘부유한 자는 재물을 바치고 징집 면제를 도모하고, 건장한 자는 놀란듯이 흩어져서 다른 곳으로 가버립니다. 결국 전장에 나가서 조금이라도 싸울 만한 능력이 있는 자는 모두 빠져나가고, 면제 받지 못한 가난한 백성들이 구차스러이 그 모자라는 수효를 채우게 됩니다. 그러나 그마저 징집한 경내를 빠져나가기 무섭게 잇따라 도망쳐서 군영 문전에 이르게 될 때는 한 사람도 남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일입니다.’
4. 전쟁은 누가 맡는가
1) 율곡 이이의 체념
군사 수가 허수라는 류성룡의 ‘진시무차’보다 22년이나 앞서 쓰인 이이의 ‘만언봉사’에도 나온다. 원래 조선은 6년마다 군적을 다시 만들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기를 넘어서면서 사실상 폐지되었다가 명종 8년(1553년)에 다시 시행한다. 이때의 일을 율곡은 상소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6년마다 군적을 만드는 법이 이미 오래전에 폐지되어 시행되지 않다가 계축년 (1553년)에 다시 시작하니, 전국 각지의 주와 현이 그저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구차스레 이 수를 채워야만 후환을 없앤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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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걸인도 수에 넣고, 닭과 개의 이름까지도 기록에 넣으니 1~2년이 못되어 태반이 빈 장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무슨 강구책이든 대책을 내놓아야 할 율곡은 막연하기만 합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하자는 식의 체념을 내비칩니다.
‘군졸이 부족해서 여러 곳의 근무에 응할 수 없음이 걱정된다면, 상번의 군사 중에서 그 수를 줄이시고, 그래도 부족하면 일이 한가한 곳의 군사를 줄이시고, 그래도 부족하면 남방에서 겨울 동안 방비하는 군사의 수를 줄이시고, 그래도 부족하면 보병의 대역포를 바치는 자의 수를 그 반으로 줄여 방위의 부족을 보충하게 할 것입니다.’
상소문(만언봉사) 안에는 ‘그 수를 줄인다’는 양감기수와 ‘그래도 부족하면 또 줄인다’는 유뷰족의 건의가 이어진다. 이에 앞서 ‘6년마다 한 번씩 군적을 정리해야 한다’는 이전 제도의 복원과, ‘그렇게 해서 군졸이 생기는 대로 부족분을 정리해야 한다’는 건의가 있지만, ‘그래도 부족하면 근무하는 군사의 수를 줄일 수밖에 없다’는 게 상소문의 요지다. 체념 바로 그 자체다. 당시 율곡의 나이 38세이고, 후에 병조판서를 맡는다.
2) 방법론이 없다
율곡은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고 신하들 중에서도 이론과 실제에 가장 밝았던 지식인이었다. 그는 조선의 실정을 가장 소상히 알고 개혁을 강력히 부르짖으며 바른 말을 서슴지 않았던 유학자다. 청렴하고 맑은 인격을 지녔던 그는 파벌에 휘둘리거나, 주견에 치우치지도 않는 최고의 신하였다. 그의 대표적 상소문 ‘만언봉사’에는 몇 세기가 지난 지금 읽어도 모골이 송연한 구절이 한 둘 아니다. 그래서 그에 경도되어 따르는 제자들이 율곡이 이미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양책(良策)을 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율곡이 이 상소문을 올리던 1570년대는 그로부터 20년이 채 못돼 일어나는 임진왜란에 대비하는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이때부터 군적을 똑바로 정리해서 전문군을 양성하고, 주요 산성을 수리해서 전략적 요충지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율곡은 많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론을 확립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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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선조의 신하들은 율곡을 포함해서 대다수가 훌륭한 신하들이었다. 그런데 나라는 왜 그 모양이었는가.
방법론을 가진 신하가 드물었고, 그 중 가장 뛰어났다는 율곡 역시 ‘이런 방책으로 해야 한다’는 방법론이 없었다. 이것이 율곡과 류성룡의 결정적 차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율곡이 장수에게 녹봉을 줘야 한다고 올린 상소문에는 어떤 방법으로 세수를 증대시켜 변방의 장수들에게 녹봉을 주고. 그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방책은 없다. 그저 주어야 한다고만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전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율곡이 ‘만언봉사’ 소를 올릴 당시 선조는 겨우 22세 였다.
조선을 건국한지 거의 200년, 율곡이 중신으로 가장 크게 활동하던 1570년대부터 1580년대 초(임진왜란이 일어나기 8년 전) 까지는 조선으로서는 다시 일어나느냐 주저앉느냐의 결정적 시기였다. 존폐의 기로에서 조선조 500년을 통틀어 최고의 인재로 추앙받는 율곡이 조선의 중흥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면, 그 조선은 장차 어떤 식으로 존속해 갈 것인가. 그 미래는 캄캄할 수밖에 없다.
3) 원군에게 전쟁을 맡기다
(1) 굶주린 민병 300명이 도성을 지킨 나라
1570년대와 1580년대를 놓친 조선은 마침내 내 영토 안에서 남이 각축하는 남들의 전쟁터가 되었다. 율곡의 건의대로 군사의 수를 줄이고 줄여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한양에 상번하는 군사는 민병(民兵)이었다. 전혀 훈련 받지 않은 일반 백성에 병자를 붙여서 빈병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바로 이들이 한양을 지키기 위해 번(番)을 서고 있었다.
‘지난날 조정에서는 군정을 정돈하지 못한 채, 다만 수천 명의 민병을 한양에 상번시켰습니다. 이들은 모두 농촌에서 농사짓던 백성들이라 전장에서 싸우는 것이 무슨 일인 줄 알지를 못했습니다. 한 번도 군사 훈련을 받은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사변을 당하게 되자 모두 오합지졸이 되었습니다. 고삐 풀린 말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다시 모아들일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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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여러 번 인용한 류성룡의 1594년 ‘진시무차’에 나오는 상소문이다.
왜란 2년 후인 1594년에는 도성수비를 하기 위해 훈련도감이라는 병영을 따로 설치했다. 이 도감의 군인이 되고 싶어 하는 건장한 정정들이 많아서 모집에 적극 응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그러나 문제는 식량이었다. 이들을 먹일 식량이 없어 결국은 모집 인원을 극히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면 사람을 모을 수 없고, 사람을 모으지 못하면 병사를 훈련할 수가 없다.
마침내 훈련도감 역시 ‘무익한 것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지금 국고가 텅 비었으므로 병사를 훈련시켜 적을 방어하려 해도 어디 한 군데 계책이 나올 데가 없습니다.’ 라는 절망이나 진배없는 한탄이 쏟아졌다. 새로운 방어기구를 만들어도 오직 시작만 있을 뿐, 지속할 능력이 없다. 무력과 군사기구에 관한 한 조선만큼 방법을 찾지 못하는 나라는 역사상 유래가 없다 할 것이다.
(2) 마침내 명군이 전쟁을 맡다
전쟁을 하러 조선에 쳐들어온 왜는 당시 세계 최강 군사대국의 하나였다. 전쟁으로 한 세기(16세기)를 꼬박 지새던 유럽 열강들과 겨루어도, 적어도 육전에서는 이기고도 남을 나라였다. 정반대로 조선은 군사적으로 가장 무기력한 나라, 군량도 없고 병기도 없고, 군사는 굶주려서 힘을 전혀 쓰지 못하는 나라, 군의 명령은 여러 갈래로 나와서 통솔이 전혀 되지 않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무슨 힘으로 강적을 상대로 싸울 수 있을 것인가.
전쟁은 원군으로 온 다른 나라 군대에 전적으로 맡기고, 정작 침략을 당한 나라 사람들은 모두 손을 놓고 있다.
전쟁을 명군에게 맡긴 것은 처음부터 그러했다. 조선군은 오직 명군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한양에서 개성으로, 개성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의주로 싸우는 시늉만 하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여차하면 압록강을 건너자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고는 남의 나라 군대를 그 나라 이름(명군)을 붙여 부르지 않고 ‘천병(天兵)’이라 했다. 하늘이 보내준 군대, 하늘에서 내려온 군대로 생각할 만큼 그 남의 나라 군대를 간절히 기원했다.
설혹 그렇다 해도 전쟁 이듬해 한양이 수복되고 왕이 의주에서 한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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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왔다면, 이제 다시 일어나 보자는 의지가 있어야 했고, 나라를 다시 수습해 정상으로 되돌려야겠다는 각오와 결단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무망(無望)한 목숨’들처럼 조금도 달라짐이 없었다. 아무리 당하고 짓밟혀도 처음 그대로였다.
(3) 임진왜란 그리고 300년 후
정말 무망한 조정이고, 무망한 신하들이었다. 거기에 백성들은 모두 희망을 잃고 산다. 정부는 있는데 기능이 없고, 벼슬아치는 있는데 역할이 없다, 아니, 기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으면 안 되는 역기능만 있었다. 역할 또한 없는 것이 아니라 있으면 모두를 죽이는 오도된 역할 만 있었다. 그러니 백성은 모두 지치고 굶주려서 힘이 다할 수밖에 없다. 그 백성이 나라를 제대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원군으로 온 남의 나라 군대가 전쟁의 주군(主軍)이 되고, 조선 백성은 자기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승패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어 있다.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고, 어떤 조치도 취할 의사가 없다.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 적과 맞닿아 진을 치고 있는 장수와 사졸들 모두가 전쟁의 성패를 명나라 조정의 차지에 맡겨두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묵인하고 있다. 선조도 일찌감치 우리 군과 신하들의 생사여탈권을 명군 장수에게 넘겨주었다.
비록 300년이란 유예 기간을 두고 19세기 말 적들이 다시 쳐들어와 조선을 먹는 것이, 16세기 임진왜란 때와 무엇이 달랐는가. 오히려 더 쉽지 않았는가. 바다에서고 육지에서고 임진왜란 때만큼의 저항도 없지 않았는가. 역사는 스스로 자기 역사를 주재하지 못하는 자에겐 언제나 불행이 되풀이 된다는 것을 하나같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2014. 7. 9.
* 다음에 제2부, 제Ⅲ장부터 제 3,4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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