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

2014. 6. 17. 11:22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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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

- 나는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보는 사람입니다 -

■ 노선영

0 1987 선천성 청각장애인으로 출생

- 듣고 말할 수 없는 암흑 속에서 보낸 학창시절을 가족의 사랑으로 극복

0 충북대 생활과학부 입학, 수화동아리 활동, 농인의 정체성에 눈뜸

0 장애인의 한계 극복을 위해 통일대장정과 아테네 국제마라톤 도전

- 혼자서 중국여행

0 농인 최초로 세계지식포럼 참가

0 지식나눔 공동체 북포럼에서 강연시작

0 CBS 강연 프로그램 ‘세상을 바꾸는 15분에 출연

0 현재 서울 대기업에서 근무하며 칼럼니스트 및 작가로 활약

■ 프롤로그 : 마음을 기울이면 보이는 소리

“만일 소리가 없는 세상이 있다면 여러분은 살아갈 수 있나요?”

이 책을 접한 독자들에게 드리고 싶은 첫 번째 질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각장애인을 떠올리면 귀가 들리지 않으니까 일상생활이 매우 불편할 것 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 역시 스스로에게 던진 최초의 질문이 ‘나는 왜 귀가 안 들릴까?’였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났는지 여러 번 자문해도 결국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누구보다 용감한 여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들리지 않는 고통을 다른 에너지에 쏟아내 내 삶의 다른 해방구를 찾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이 세상의 아름다운 소리를 글에 담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기적이란 먼 곳에서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있던 것들을 내면의 소리로 듣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 기적입니다. 이제 제가 만난 기적의 순간들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10년 전, 제가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선택했다면 지금처럼 가치 있는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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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지 못했겠지요. 소리 없는 세상이 끔찍하게도 힘들었지만 가슴 속에 뜨거운 열정의 메시지가 있었기에 그 힘든 시간을 뚫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소리로 전달되는 말보다 몸짓과 눈빛 그리고 표정이 더 많은 것을 말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리적 관점에서 치료의 대상으로 보는 ‘청각장애인’이 아닌, ‘수화’라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적 소수집단으로서의 ‘농인’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농인이 청인과 달리 들을 수 없는 것은 특징일 뿐 장애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책 속에 농인과 청각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섞어 쓴 것은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이 농인의 삶을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2014년 봄 노선영

제1부 소리 없는 세상

◉ 0.1 퍼센트의 특별함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압구정동에 위치한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섰다. 스튜디오 안에는 농인뿐 아니라 청인들도 방청객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호기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마침내 김영서 PD의 ‘시작!’이라는 제스처가 허공위에 조용히 던져졌다. 드디어 방송 촬영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수화와 어린 시절부터 익혀온 구화로 강연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의 이름은 노선영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는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들리지 않는 고통을 다른 에너지에 쏟고자 합니다. 여러분과 달리 듣지 못하지만,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음으로 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느리지만 하나하나의 단어에 진심을 싣기 위해 노력했다.

청인 방청객들을 화면을 가득 채운 슬라이드 속 자막과 나를 번갈아 보며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중간중간 박수를 쳐주거나 눈물을 훔치는 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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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도 있었다. 스튜디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지만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앞좌석에 있는 김영서 PD가 스태프에게 수화로 ‘슬라이드 다음’이라고 지시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이날 강연은 지식나눔공통체 북포럼(Book Forum)의 한 코너인 ‘톡스(톡쏘는 스토리)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2006년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30분 마다 열리고 있는 북포럼은 온·오프 라인으로 진행되는 생방송 토크쇼로, 유명 저자 등을 초청해 책과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지식방송이다.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이 눈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진정 살아 있는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농인과 청인이 하나가 되어 내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어주던 그 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감동,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날 기쁨과 벅찬 감동이 있기까지, 나는 칠흑같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와야 했다.

■ 청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다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한창 세상이 시끄럽다. 여기에 단란한 가정이 있다. ‘앵두 아가씨’로 소문날 정도로 고왔던 엄마, 믿음직하고 성실한 아빠 그리고 두 명의 귀여운 딸아이가 이루는 가정은 늘 화목했다. 늘 서로를 위하고 배려하는 남부럽지 않은 평범한 가정이었다. 딸아이의 재롱도 넘쳐나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딸랑! 딸랑! 똑딱!’

엄마는 아이에게 사물의 소리를 접하게 해주고자 장난감 소리를 들러주었다. 그런데 아이는 천장만 멀End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엄마는 초조한 마음에 ‘짝짝’하면서 손뼉을 쳐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이번에는 양은냄비와 숟가락을 가지고 와서 두드려 보았다. 그럼에도 아이는 계속 소리에 반응이 없었다.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병원을 찾아갔다.

“ 몇 가지 검사를 해보았는데, 따님들은 모두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정확히 말해 감각신경성 청각장애이며 100데시벨 이상의 심도 난청입니다.”

“내 아이가 전혀 듣지 못한다고요? 그럴 리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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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벽력 같은 이야기 앞에 엄마는 울부짖었다. 세계 신생아의 0.1% 정도라는 선천성 청각장애를 두 딸 모두 가지고 태어났으니 충격이 더 컸을 것이다. 더군다나 보이지 않는 장애이다 보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듣지 못하면 언어 및 지적 장애까지 왔다. 의사소통의 기본이 되는 언어를 배우는 것은 청각 기관을 통해 소리를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선천성 청각장애는 소리를 듣는 것에 제한이 있었고 말을 배우려면 수천시간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이 사회에서 저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 까’ 엄마는 더욱 좌절했다.

편견과 차별 속에서 장애아를 키우는 것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몇 배의 정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엄마는 강한 모성애를 발휘하며 이 현실과 마주하는 것을 또 하나의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차츰 세상 밖으로 나아갔다.

■ 특수학교에 들어가다

엄마는 먼저 청각장애 아동교육 전문가를 만나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 함께 머리를 싸맸다. 엄마는 바로 일반학교에 보내면 언니와 내가 받을 충격을 우려했다. 그래서 먼저 특수학교에 가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해 학교 근처까지 이사하겠다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서울로 온 후 엄마는 서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청각장애 특수학교 에 우리를 입학 시키는 데 성공했다.

언니와 내가 엄마의 손을 잡고 들어간 곳은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설립한 서울 애화학교였다. 애화학교 정문 오른쪽에는 덤불에 어수선하게 덮인 작은 놀이터가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말없이 노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친구가 곁에 오면 모래를 살짝 던지며 인사를 건네곤 했다. 수업 때가 되면 검은 수도복을 입은 수녀님이 놀이터 앞에 나왔다. 수녀님은 내 주의를 끌기 위해 팔을 톡톡 두드리거나 발을 굴러 진동을 전했지만, 나는 계속 모르는 척하고 되도록 빽빽해 보이는 덤불 안에 숨어들었다.

학교 서쪽 별관에는 청음과 구화, 심리상담 연구 등을 위한 낡은 건물이 있었는데, 여름이 되면 푸른 담쟁이넝쿨로 뒤덮이곤 했다.

건물의 작은 방 안에는 거울과 단어 카드가 있었고 탁자 위에는 특수보청기와 헤드셋 그리고 마이크가 있었다. 그 중에 혀를 누르는 기구 같은 생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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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물건들도 있었다. 청각장애아는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언어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없기 때문에 일반 아동들이 생활 속에서 저절로 습득하는 사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배워야 했다. 그래서 그 도구를 통해 입술을 읽는 방법과 말하기를 배워야 했는데,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는 소통의 제한으로 쉽게 흥분했고 자기중심적이라 말을 가르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선생님이 말을 할 때 입 모양을 볼 수 있도록 시선을 똑바로 맞춰야 했는데 나는 수업 때마다 늘 수치심과 좌절감을 느꼈다. 어느 날부터인가 말을 하기 싫을 때 고집스런 표정으로 손가락을 빠는 습관이 생겼다. “입에서 손가락을 빼렴”하고 선생님이 또박또박 말했다.

애화유치원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흰줄무늬가 있는 빨간 방석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마침 그날은 학부모 참관 수업이어서 엄마도 교실에 와 있었다. 나는 대여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작은 이동형 칠판 앞에서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이 북을 치다가 소리가 나는 방향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나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보다 못한 엄마는 내 손을 잡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엄마가 내 손을 잡고 걸어간 곳은 다름 아닌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에는 차가운 냉기가 가득했다. 나는 온몸을 잔뜩 움츠린 채 부르르 떨었다. 엄마는 비장한 표정으로 낡은 세면대 앞에 섰다.

엄마는 물을 가득 담아서 들이켜더니 ‘가글가글’하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나는 바라보았다.

“자, 엄마 따라 해봐, 가글가글…….”

엄마는 컵을 내 앞에 내밀었다. 하지만 난 그저 물만 삼키다가 뱉을 뿐이었다. 엄마는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히 시도했지만 나는 계속 실패를 거듭했다.

결국 컵을 놓고 주저앉아버린 엄마는 설움에 북받쳐 눈물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저 아이가 말을 할 수 있을까?’ 엄마는 절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의지는 강했다.

그날 엄마의 흐느끼는 어깨를 응시하며 난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창문 틈새로 쏟아지던 눈부신 햇살도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그때는 엄마가 왜 그토록 슬퍼하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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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눈물로 빚어낸 ‘말’

1991년 서울, 햇볕이 쨍쨍한 여름날이었다. 가로수의 이파리들마저 축축 늘어져 있을 정도로 무더운 날씨였다. 엄마는 그날도 어김없이 언니와 나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발음교습소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곳을 가려면 미아리 고개를 넘어 왕복 4시간이나 걸리는 산을 넘어야 했다. 산을 넘어갈수록 땀이 비 오듯 했다. ‘엄마, 나 가기 싫어’하는 눈빛을 보내며 힘든 기색을 표현해도 엄마는 냉정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와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다가 문득 엄마를 올려다보면 기미로 얼룩진 뺨에 땀과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엄마의 눈물을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쓰라렸다. 그날 엄마에게 처음으로 연민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일어나 결어야 했다.

우탕탕! 고도의 훈련이 계속되면 나는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 말 대신 과격한 몸짓으로 의사표현을 하기도 했다. 주위에서 이제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엄마를 설득하며 말렸다. 하지만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언젠가는 이 아이가 꼭 말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헛된 노력이 아니라 이 아이를 살리는 일이에요.”

엄마는 내게 캐스터네츠나 트라이앵글 같은 음악도구를 통해 진동에 반응하도록 했다. ‘아빠’라는 말을 가르칠 때는 먼저 ‘아’라는 발성을 외울 수 있도록 목에서 울려 나오는 진동을 통해 하루 종일 가르쳤다. ‘빠’를 할 때는 휴지를 찢어서 이마에 붙이고 바람이 나올 때까지 연습을 시켜서 성대가 발달하도록 했다. 그러던 어느 마침내 나는 있는 힘껏 소리를 뱉어냈다.

“아빠…….”

부모님은 깜짝 놀라며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하셨다. 평소 웃지도 않고 말을 잘 하지 못했던 아이였으니 그 기쁨이 더 컸으리라. 나는 그렇게 다섯 살이 되어서야 한 가지의 낱말을 떼기 시작했다. 엄마는 이렇게 불굴의 의지로 나는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접어버린 날개를 펴게 하셨다.

■ 어둠 속에서

내가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자각하게 된 사건이 있다. 그날 나는 방 안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서늘한 기운에 문득 눈을 뜨게 되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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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데 불이 꺼져 있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 빛 한 줄기도 없는 상태에서 다가온 고요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보이지 않고, 소리도 없는 철저한 암흑이 나를 집어 삼킨 것이다.

탕탕! 탕탕! 더듬더듬 겨우 벽을 찾아서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그러나 제대로 소리가 나는 지 알 수 없었다. 목이 터져라 울부짖어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시각과 빛이 전부인 내게 다가온 첫 시련이었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는 방구석에 엎드려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울지 마라, 우리 아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어.”

엄마는 나를 껴안고 오랫동안 흐느꼈다.

이 사건은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한 최초의 기억이다. 그런 일이 있고난 뒤, 엄마는 내게 희미하나마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보청기를 착용해 주기 시작했다. 당시 보청기 기술이 매우 열악해서 허리에 띠를 둘러야 하는 박스형 보청기였다.

■ 애화학교의 엄마들

나는 애화학교에서 모녀간의 정을 쌓을 수 있었다. 엄마는 가끔 애화학교에서 급식 봉사를 하기도 했는데. 엄마를 보면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집에서 보는 엄마와 밖에서 보는 엄마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나는 엄마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손바닥에 글을 썼다. “물을 더 주세요.” 같은 간단한 말은 수화로 소통했다. 나는 엄마에게 언제나 깊은 정서적 유대를 느낄 수 있었다.

애화학교는 그야말로 내 집처럼 익숙했다. 애화학교의 구성원은 한 가족 같은 느낌이 들었고 끈끈한 공동체와도 같았다. 애화의 엄마들은 서로 의지하며 종종 모임을 가졌다. 탄탄한 관계로 맺어진 그들만의 공간 안에서 엄마들은 서로를 위로했다. 애화의 엄마들은 내게 수화를 쓰며 입 모양을 또박또박 해주려고 노력했다. 자기 자식처럼 아낌없이 사랑해주었기에 우리 엄마와 다름없는 신뢰를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행동이나 방식을 배웠다기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수화를 습득했다. 수화를 할 때 내 양손이 생명을 얻어 스스로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었고 억지로 말을 해야 하는 얽매임에서 자유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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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서로 눈을 쳐다보며 나누는 손가락과 입술의 움직임에서 저절로 소통이 울려 나오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이 하도 기묘해서 무언가에 홀린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 이유 불문하고 수화는 내게 있어 가장 근접한 언어가 아니었을까. 지금도 생각해 본다.

■ 첫 우정이 깨진 날

어릴 적 내가 살던 미아리 동네는 거리에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아이들은 골목에 삼삼오오 모여 소꿉놀이를 했다. 또래 아이들은 내 장애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같은 놀이에 참여해도 어렵지 않았다. 나는 땅거미가 질 무렵까지 롤러스케이트나 자전거를 타면서 동네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마냥 즐거웠던 건 아니었다. 그는 ‘난 네가 정말 좋아.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어!’라는 눈빛을 보내면 알아들었다는 듯 미소를 지르며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였다. 빨간 볼에는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다녀서 인형처럼 귀여웠다. 하지만 부모들이 맞벌이를 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외로워하던 아이. 나는 그 아이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

어느 날 부터인가 집에도 자주 놀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친구에게 가끔 ‘괜찮아’, ‘놀아줘’, ‘고마워’, 라는 수화를 가르쳤다. 친구는 처음 접하는 수화를 하나의 소꿉놀이라고 생각하는 듯했고 집으로 가는 길에 혼자 손가락으로 흉내 내면서 반복하곤 했다.

다시 만났을 때 내가 그 수화를 알아보면 웃음을 터트리면서 즐거워했다. 그럴수록 친구는 마치 비밀이라도 캐는 것처럼 하나라도 더 알려달라며 졸라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늘 내게 상냥하고 생글생글 웃기만 하던 친구가 나를 점점 피하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우연히 친구와 마주쳤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더니 친구는 긴 우산으로 땅을 짚으며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니?”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친구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우리 엄마가……너랑 놀지 말래. 너 귀머거리라고. 며칠 전에도 우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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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집에 찾아가서 아줌마에게 뭐라고 하셨대. 그래서 너희 엄마가 우셨다고…….” 아주머니는 딸이 나와 수화로 대화했다는 걸 전해 듣고 동네 망신을 당했다며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나는 머리에 돌을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나는 그때 친구가 말한 ‘귀머거리’ 그리고 ‘수화’가 좋지 않은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 전 친구의 집 계단을 내려오면서 우연히 마주친 아주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매서운 눈매에 차가운 얼굴이 꿈에 나타날까 무서울 정도여서 나는 줄행랑을 쳤었다. ‘왜 나와는 놀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난 그저 좋은 친구가 되어 주고 싶을 뿐인데.’ 아주머니로 인해 친구와의 우정은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친구가 또 혼날까 걱정스러워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스케치북에 그려진 내 초상화를 보면 유독 귀가 크게 그려져 있다. ‘내 귀가 들리게 되면 예전처럼 다정한 친구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봤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한국 사회는 장애인과 어울리면 안 된다는 인식이 강했다. 왜 그런 인식이 생겨난 것일까?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도,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 좌절의 나날

“앞으로 네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될까봐 걱정되는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엄마의 근심은 깊어졌다. 그러더니 나를 다른 세계로 편입시킬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특수학교에서 일반학교로의 ‘전학’이었다.

새로운 학교생활에 대한 기대와 불안은 오히려 나보다 부모가 더 심했을지 모른다. 특히 나 같은 장애아를 둔 부모의 경우는 기대보다는 불안한 마음이 훨씬 컸으리라. ‘새 학교에서 장애가 있는 학생을 받아줄까? 만일 받아준다 해도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면 어쩌지?’하는 고민이 앞서는 것이다. 엄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엄마는 내가 일반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장애인에 대한 한국사회의 두터운 벽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나의 애화학교 시절은 전성기였고, 매일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면 운동장에서 수화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친구들이 보였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고, 그런 풍경이 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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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늘 따뜻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더 이상 그 수화를 보지 못했다. 애화 시절을 마감하고 다른 세계로 발을 내디뎌야 했기 때문이다. 1997년 가을, 내가 만 10살이 되던 해였다.

■ 칠흑 같이 어두운 언어의 감옥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칠판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갑자기 달라진 환경이었다. 수업도 학생들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는 주입식 교육이었다. 선생님은 도무지 읽기 힘든 입모양으로 내가 배운 적도 없는 용어를 섞어가며 수업을 했다. 두리번거리면서 옆자리에 앉은 친구의 노트를 힐끔거리기만 했으니 선생님 눈에는 그저 산만한 학생으로 보였을 것이다.

처음 보는 일반 과정 교과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교과서는 언제나 깨끗했고 듣기 시험은 늘 빵점이었다. 안내방송을 듣지 못해서 복도를 헤매기도 했다. 친구들은 나를 외딴 섬에서 온 아이쯤으로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곳에서는 매일같이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했다. 나는 과제가 무엇인지 듣지 못해서 해오지 못할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면 손바닥과 다리에 두꺼운 나무로 매를 맞았다. 소통할 수 없는 학교는 내게 두려움과 고립의 장소였다.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지독한 고립감이 내 가슴을 마구 할퀴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세계에 편입되지 못하고 떨려났다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더 끔찍한 건,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취급당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언어의 철저한 암흑 속에 있어야 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그들의 언어는, 갑자기 깜깜한 곳으로 떠밀려 들어갔을 때 느끼는 극한의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수화는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끈이었지만 다른 세계로 온 뒤로 그 끈이 끊어졌던 것이다. 일반학교에서의 어떠한 정체성과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으니 애화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애화가 그리웠다.

◉ 세상에서 가장 슬픈 생일

내 인생에 가장 따뜻하고 행복했던 생일은 애화학교 시절 때다. 엄마는 내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어 애화의 온 가족과 함께 성대한 생일 파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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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 주었다. 손재주가 좋았던 언니는 나를 위해 꼬박 밤을 새우며 수많은 종이 별을 접고 실로 꿴 왕관, 목걸이, 팔찌를 선물했다. 나는 초록빛 치마에 자주색 한복 저고리를 입고 언니가 준 종이 별을 액세서리로 착용했다. 그리고 문을 열어젖히며 짠 하고 등장하니 모두 놀라며 즐거워했다. 마침내 케이크 촛불을 끄자 수녀님이 나를 번쩍 안아 주시며 수화로 이야기 하셨다.

“나의 첫 제자, 선영아. 생일 축하한다!”

수녀님의 생일 선물은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노란색 작은 책이었다. 나는 그 선물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손에 꼽을 만큼 행복한 생일이었다.

이듬해 봄, 결코 잊을 수 없는 또 한 번의 생일이 있다. 1998년의 내 생일……. 당시 일반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나는 의사소통이 어려웠던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 생일이 돌아오자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애화 시절의 행복했던 생일파티를 재현하고 싶었다.

나는 40장 남짓의 초대장을 직접 만들기로 마음먹고 당시 파격적이었던 ‘3차원 카드’ 디자인을 구상하고 만들기 시작했다.

시간은 벌써 자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엄마의 만류에도 초대장 만들기는 계속되었다. 그렇게 사흘 내내 만든 초대장이 마침내 완성되어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직접 만든 초대장이니까 내 정성을 알아줄 거야.’ 나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내 모습을 상상했다. 드디어 손꼽아 기다리던 내 생일이 되었다.

“엄마 맛있는 음식 많이 해 주세요! 저 다녀올게요!”

평소와 달리 기분 좋은 온화한 봄날의 아침이었다. 4월의 라일락은 아름다운 빛깔을 드러내어 내 가슴에 한 아름 안겼다. 하지만 교실에 들어서자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날 하교시간 쉴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나는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친구를 한 명도 못 데리고 왔던 것이다.

그리고 푸짐한 생일상 앞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엄마 품에서 서럽게 울었다. 엄마의 눈물도 내 얼굴에 뚝뚝 떨어졌다. 나는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엄마의 심장의 움직임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곧 눈 가를 닦고 말씀하셨다.

“괜찮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 딸,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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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에서 얻은 마음의 언어

2002년,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뜨겁던 시절에 나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고 있었다. 다가오는 친구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책상만 부여잡기 바빴다. 수업시간이 늘 고역이었기에 구석에서 혼자 공부했지만, 누구에게 잊힌 존재가 된다는 것을 슬픈 일이었다. 엄마는 그런 내게 ‘숲 속’에 가보라고 했다. 숲 속에 들어가면 들리지 않는 나이기에 느낄 수 있는 ‘무언의 언어’가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엄마 말만 믿고 혼자 그곳에 가기로 했다. 내가 간 곳은 동두천 근처에 있는 소요산이었다. 비록 산세가 웅장하지는 않으나 포근하게 감싸주는 느낌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외지에서 온 등산객들이 왁자지껄하게 서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나는 쓸쓸한 외톨이였다. 시간은 무심하게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몇 시간을 걸었을까. 어느새 혼자 숲 속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혼자 있는 숲 속의 풍경은 전과 달리 내게 더욱 가까이 다가와 있는 듯했고, 무척 따스했다. 그러자 마음의 귀가 환하게 열리는 듯했다.

은은한 햇빛으로 따스함을 전하며 포근하게 안아주는 태양, 더없이 부드러운 푸르른 바람, 작지만 화사하게 웃으며 나를 반가워하고 있는 노란빛 꽃……. 그것은 순수한 자연의 언어였다. 구름의, 하늘의 무한한 세계의 언어였다. 그들은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제 삶을 살아갔다. 그제야 느꼈다. 들리지 않는 나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언어가 있다는 것을.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마음의 언어가 있다. 자연의 움직임 속에서 느껴지는 숭고한 언어 그것은 친절, 사랑, 미소와 같다. 마음의 언어가 없으면 들어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 들린다 해도 말음이 없으면 아마도 그것은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핀 꽃, 친절과 사랑, 미소의 언어가 있다면 나는 들을 수 있다.

산을 내려오면서 엄마가 왜 숲 속에 가보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날 자연이 가르쳐 준 마음의 언어는 내 삶의 토양이 되어줄 것이고, 밑거름이 되어 열매를 맺게 도와줄 것이다.

◉ 어둠 속 한 줄기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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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덧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 무렵 자연 속에 머물고자 하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작은 시골 마을로 보금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집 마당에는 작은 연못과 커다란 돌탑이 있었다. 잔디밭에는 사과나무와 감나무, 포도나무가 아름다운 자태로 서 있었고, 작은 단층집은 등나무와 장미꽃 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보금자리를 옮기자 학교도 옮기게 되었다. 한 학년에 반이 고작 2개인 작고 허름한 중학교였다. 청각장애인을 처음 접하는 친구가 대부분이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새 출발하는 설렘이 앞섰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와 함께 전학 수속을 밟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선생님을 다라 교실에 들어갔다.

“자 모두 들으렴. 오늘부터 새로운 친구가 왔단다. 청각 장애가 있는 학생이니 다들 유념하도록. 이제 자기 소개해보겠니?”

“안녕?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노선영이라고 해!”

나는 또박또박 말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이들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뭐야, 저 아이. 발음이 왜 저렇게 이상한 거지?’ 내가 말을 끝내게도 전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장애인이 왜 여기에 전학 왔지?’ ‘귀머거리가 왜 여기에 온 거야?’하고 생각하는 듯 했다.

■ 제 귀를 열어주세요

어느 날, 6교시 쉬는 시간이었다. 졸려서 잠깐 눈 좀 붙여야겠다, 하고 엎드렸는데 그만 깊이 잠이 들고 말았다. 잠에서 깼을 땐 이미 깜깜한 저녁이었다.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업 시작 종소리도, 마치는 종소리도 듣지 못한 채 엎드려 자던 나를 아무도 깨워주지 않고 모두 집으로 가버린 것이다. 깜깜한 교실 안에 홀로 남겨진 기분은 참담했다. 교실 안이 더없이 스산하고 으슥하게 느껴졌다. 창밖을 내다보니 운동장은 텅 비어 있고 낙엽들만 바람이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숨막히는 공포가 말려와 가방도 챙기지 못한 채 교실을 뛰쳐 나갔다. 하지만 복도에도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나는 어둠을 벗어나기 위해 미치도록 뛰었다.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와 겨우 출입구를 찾았지만 자물쇠가 단단히 잠겨 있었다.

“문 열어주세요!”

나는 차가운 쇠로 된 손잡이를 붙잡고 처절하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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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 귀도 열어주세요!’ 간절히 기도했다.

한참 후에야 빛 한 줄기가 희미하게 비쳐들었다. 수위 아저씨가 손전등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렇게 나는 간신히 학교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때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는 장애에 대한 교육조차 없었고 수업에 대한 지원도 없어 나의 열악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 베다니 할머니를 만나다

중학교 졸업을 반 학기 앞 둔 어느 날이었다. 나는 화장실 창문에 걸터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그날 학교는 스산했다.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고 운동장엔 흙먼지가 심하게 날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과 세상에 대한 분노가 밀려들었다.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던 친구들이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나를 다르게 보는 시선이 두려웠고 앞으로도 그런 삶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어느새 충동적으로 뛰어내리려고 하는 나 자신을 직시하게 되었다.

‘뛰어내릴까? 내가 이렇게 죽게 되면 들리지 않는 이 모든 고통이 끝나겠지.’ 하지만 내 몸이 떨어질 그 땅 위에 엄마의 얼굴이 그려졌다. 내가 청각장애인의 삶이 고단하다며 눈물을 흘릴 때, 나보다 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하던 엄마였다.

나의 자살 시도는 그렇게 끝났지만 고민까지 함께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학 오기 전 학교의 담임선생님께 받은 편지를 다시 읽게 되었다.

친구가 없어 세상이 싫다던 너의 글이 선생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어떻게 무엇 하나 도와줄 수 없어 미안하다. 하지만 너의 마음속의 힘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평화와 인권을 위해 노래한 가수 존 바에즈는 이렇게 말했지.

“우리는 언제 어떻게 죽을지를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선택권은 오로지 네게 있다.

얼마 후 나는 한 교회의 양로원을 찾아가 목산님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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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로서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나의 뜻을 알겠다며 내 손을 잡아주었다. 목사님은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정원이 딸린 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그곳에서 짧은 백발의 할머니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할머니는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 위에 평온하게 누워있었다. 나는 교회 이름을 따서 베다니 할머니라고 불렀다. 그날 이후로 하교하자마자 바로 베다니 할머니를 찾아갔다.

베다니 할머니는 언어기능이 마비되어 말을 잘하지 못했다. 할머니도 나도 처지가 비슷했으므로 눈짓 손짓으로 말벗이 되어 드렸다. 서로 말을 하지 못하는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금세 친밀감을 느꼈다 그러자 내 마음에도 변화가 왔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고 긍정의 마음으로 바라보니 분노가 가라앉고 고운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힘든 일을 겪으면 할머니에게 울면서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면 베다니 할머니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나는 할머니의 눈빛만으로 금세 마음이 풀려버렸다. 어느 날 할머니는 삐뚤삐뚤한 글을 써서 내게 보여주셨다.

“세상이 나를 버렸지만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셨고, 작은 천사를 보내주었기에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선생님이 엽서에서 말씀해 주신 ‘마음속의 힘’이 무엇인지, 베다니 할머니를 만난 뒤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훗날 나는 대학생이 되어 오랜만에 베다니 할머니를 보기 위해 교회를 찾아갔다. 그리고 사모님으로부터 할머니의 부음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분은 이미 하늘나라로 가셨단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누구보다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으니 하나님 곁에서 행복하게 계실 거다. 할머니는 임종하기 전까지 말씀하셨단다. 오직 선영이 너를 그리워했노라고.”

나는 하늘을 향해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곁에서 말 못하는 고통을 나눠주신 할머니를 만나서 행복했어요. 할머니, 하늘나라에서 작은 천사들과 함께 행복하게 잘 계시죠? 고맙습니다. 나의 베다니 할머니!’

◉ 소리 없는 세상의 노래

2006년, 나는 인문계 여고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청각을 제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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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감각이 뛰어나 여러 방면에서 상을 탈 정도로 그 재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음악을 이기지는 못했다.

들을 수 없는 음악은 내게 ‘철저한 고독을 느껴야 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음악 수행평가 때,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 일이 있었다. 박자, 발성이 모두 엉망이라 친구들이 음악실이 떠나갈 듯 웃어댔다.

얼마 후 가을에 학반 대항 합창대회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구들은 아니겠지만 나는 합창 대회에 함께 하고 싶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생님은 나를 포함해 반 전체 학생들을 불러 모아 합창 연습을 시켰다. 처음에는 가사를 읽고 입 모양을 따라 해서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나로 인해 불협화음은 계속 되었다. 어느 날은 분위기를 망칠까봐 입을 굳게 다물기도 했다.

- 집에 와서도 연습 계속

- 라디오에 손을 대고 진동을 느끼고, 엄마가 노래부르는 목에 손을 대고 진동을 체득하도록 노력했다.

그런데 대회가 가까워진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내 어깨를 툭툭 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노선영 학생, 미안하지만 대회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어. 박자와 음정이 자꾸 틀려서 말이다. 미안하구나…….”

선생님은 말끝을 흐렸다. 그 순간, 모든 세상이 멈춘 것만 같았다. 나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 새내기 음악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신 분이었다. 나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일부러 음악실에 가지 않았다. 음악 선생님은 처음에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역시 나를 포기하신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부르셨다.

“선생님은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해서 노래에 익숙하지만 네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어. 하지만 청각장애가 있다고 해서 음악을 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은 미리 한계선을 긋는 것과 같아. 음악으로 너 자신을 극복해보도록 하는 게 어떠니?”

나는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 합창대회 때보다 더욱 피나는 연습을 했다.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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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수행평가 시간이 다가왔다. 비록 내 목소리를 내기가 힘겨웠지만 혼을 담아 불렀다. 노래를 마무리하고 자리에 돌아오자 친구들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말했다.

“너 노래 진짜 잘하더라. 비록 박자는 조금 틀렸지만 그래도 멋졌어 선영

아!” 음악선생님도 나를 바라보며 찡긋 하며 웃으셨다.

드디어 최종 기말고사 시험 결과가 나왔다. 나 같은 경우는 아무리 음악 이론을 공부해도 수행평가에서 점수를 깎아 먹기 때문에 60점 대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나는 큰 기대 없이 우르르 몰려가는 친구들 틈에 끼여 내 점수를 확인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노선영 음악 92점’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선명하게 보이는 92점 실패한 합창대회, 피나는 연습, 그리고 다시 도전한 소리 없는 세상의 노래.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나는 그렇게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도전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 내 인생을 바꾼 글쓰기

학창시절에는 친구들이 노트를 쉽게 빌려주지 않았다. 내가 시험 점수가 더 잘 나오면 빌려주는 것을 더욱 꺼려했다. 수업이 끝나면 오늘은 노트를 빌릴 수 있을까 하며 마음을 졸이던 나날이었다. 수업의 내용을 알고 싶은 지적 욕구가 커져만 갔다.

나는 부지런히 연필을 움직이는 친구의 모습을 지켜보며 부럽기도 학고 걱정되기도 했다. 마음껏 필기할 수 있어서 좋겠다.

“가만히 보면 넌 우리들보다 수업 듣는데 지장이 많고 공부하기도 어려운 부분이 많을 텐데 성적이 더 잘 나오는 거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만약 나였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야.”

당시 내 짝꿍이었던 친구가 내게 해 준 말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내가 수업시간마다 속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선생님은 가끔 수업 중간중간에 농담을 던지곤 했다. 그럴 때면 반 아이들 전체가 교실이 떠나가라 박장대소를 했다.

“선생님 너무 웃겨요. 또 다른 이야기도 해 주세요!”

책상을 두드리는 진동이 크게 느껴질 정도로 아우성을 치는 친구들 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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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보면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 들었다.

교실 안에서 섬처럼 떠 있으면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는 척하며 엎드려 울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들의 즐거움이 ‘나’라는 존재가 부재하는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왜 웃는지 알고 싶었고, 함께 하고 싶었다.

그 당시 소외감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매달릴수록 내 에너지만 빠져 나갔다. 다른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때 내 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글’이었다. 글은 교실 공기에 억눌려 있는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선영이의 엽서를 받고 무척 기뻤어. 선영이는 글 솜씨가 좋아서 멋진 작가가 될 것 같아. 글을 잘 쓰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고 너의 모든 마음을 전달할 수 있어. 오직 너만의 희망이란다.”

애화학교 다닐 때 수녀님이 해 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나는 ‘글’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소리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글이었다. 그래서 글을 쓰면 가슴이 뛰었다. 특히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보다는 아무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글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

내가 말하지 못하는 부분을 글이 해결해주었다. 나는 글을 통해서 점차 나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글은 내게 혼과 같았다. 그것은 평범한 혼이 아니라 장애에서 오는 결핍을 채우기 위한 절박함이 담겨 있는 혼이었다.

서로의 가슴에 가시 돋은 말을 쉽게 내뱉는 세상이지만, 나는 그것들을 들을 수 없고 말로 할 수도 없다. 나는 세상의 소음이 없는 따뜻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답장하지 않는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편지를 썼다.

나눔은 꼭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않다. 내 진심과 에너지를 담아 편지를 쓰고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이 진정 가치 있는 ‘나눔’이었다. 그 메아리는 진정으로 끝이 없었다. 지금도 그 편지들뿐만 아니라 쪽지까지 보관하고 있는데, 수백 통이나 될 정도로 많다. 비록 문장이 서툴긴 했지만 편지를 쓰면서 글을 쓰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귀가 들리지 않아도 열정을 가지고 무언가를 시도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것도 나는 수화나 문자통역 또 눈빛이 있기에 놓치지 않고 기록할 수 있었다. 들리지 않기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기록하고 또 기록해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지금도 누군가가 왜 그리 열심히 기록하느냐고 물어보면 나는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내 결핍을 채워준 것이 바로 글이었습니다.”

제2부 다시 시작된 열정

◉ 치유의 캠퍼스 생활

나는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 여러 대학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한 곳에만 입시 원서를 넣었다. 집에서 가까운 국립거점대학이었고 장애인지원센터, 그리고 무엇보다 수화동아리가 있다는 조건이 꽤 마음에 들었다.

수능을 보기 전 면접을 보러 학교로 갔다 학교 안을 둘러보니 고풍스러운 건물이 눈에 띄었고, 하트 모양의 연못에 오리가 헤엄치고 있는 모습도 정겨웠다. 울창한 나무사이로 바보계단이라 불리는 긴 계단이 뻗어 있는 것도 보였다. 나는 첫눈에 캠퍼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생애 처음 면접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나이 지긋한 면접관이 교양지식을 물었다. 나는 미리 질문지를 받았지만 조리 있게 대답하지 못하고 주제에 맞지 않는 말들만 늘어놓았다.

얼마 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했다. 놀랍게도 합격이었다. 부모님도 주무시다가 일어나서 나보다 더 기뻐하셨다. 그렇게 나는 2006년, 충북대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청각장애인이 되었다.

대학에 와서 수화통역과 노트북 대필을 배치받게 되었는데, 청각 장애로 인해 포기해야 했던 권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기뻤다. 실시간 필기도 할 수 있어서 지적 욕구도 해소되었다. 무엇보다 교수님의 농담을 다른 학생들과 즐길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벚꽃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운 2006년의 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 기숙사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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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가까웠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생활도 해보고 싶어 기숙사인 ‘계영원’으로 들어갔다. 한눈에 봐도 기숙사생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 같았다. 짐을 들고 낑낑거리며 배정받은 방을 찾아 갔는데 룸메이트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옷장을 정리하고 있던 룸메이트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환영해 주었다. 연예인 신애라와 닮은 이국적인 얼굴에 구릿빛 피부, 큰 키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당차고 시원시원한 호탕함이 매력적이었다. 그동안 보지 못한 상당히 독특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인생에 영향을 주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그날 편지를 써서 룸메이트 책상위에 올려두었다. 샤워를 마치고 온 룸메이트는 편지를 다 읽은 뒤 내게 다가왔다.

“편지 다 읽었어. 그게 어때서?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살아도 불편함은 같아. 그런 난 너와 다르지 않아. 걱정 마!”

그녀는 내 편지를 읽고 불쾌해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그때 나는 알았다. 장애를 부끄러워하고 감추는 것보다 솔직하게 나 자신을 공유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룸메이트의 이름은 김승미였고 나보다 한 살 위인 언니였다. 나는 이름 대신에 조로 코끼리 언니‘라고 불렀다. 허리는 잘룩한데 코끼리 다리처럼 허벅지가 튼실해서 붙인 별명이었다.

그날 이후 대학생활 내내 코끼리 언니와 같이 살면서 축제와 다름없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억압되어 있던 나를 조금씩 꺼내 놓을 수 있었다. 코끼리 언니의 제안으로 스타일을 바꿔보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으로 촌스럽게 화장을 했으며 파마도 하고 레깅스에 짧은 치마를 입고 다녔다. 그러자 기숙사생도들이 나를 ‘계영원 패션리더’라고 불렀다. 그때는 완전한 자유를 느꼈는데, 지금은 사진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민망하다. 코끼리 언니 덕분에 같은 기숙사에 살고 있던 같은 학부 동기 시내와 은혜와도 삼총사처럼 다닐 수 있었다.

■ 수화동아리에 가입하다

대학교 입학했을 때 가장 기대되었던 것이 20년 전통의 수화동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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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 이름은 ‘보이는 소리’라고 했다. 입학한 지 한 달이 지나 날씨가 따뜻해질 무렵, 학교 도서관 앞 광장에서 동아리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나는 ‘보이는 소리’부스에 들러 수화로 “선배님들,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회원가입신청서를 작성했다.

‘생활과학부 노선영. 수화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어 기뻐요. 아! 저는 청각장애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신청서를 받아든 한 선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본교 학생 청각장애인이 동아리에 가입한 것도 내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20기 신입생 환영회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선배들과 애화학교 시절에 배운 수화로 소통할 수 있었다. 나는 수화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행복했던 애화학교 시절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보이는 소리’는 1988년 3월에 탄생했다. 수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모여 더 큰 사랑을 나누기 위해 만들어진 동아리였다. 그들의 언어는 수화였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까닥이고 얼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수화가 언어학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생각으로 ‘보이는 소리’라는 공동체를 이끌며, 수화발표제를 하고 사랑의 수화교실을 열어 수화를 보급했다. 길거리에 나가 수화 공연도 했다. 수화는 손의 움직임에서 나오는 공감각 이미지였고 예술로 승화시키는 몸짓이기도 했다.

사실 내성적인 성격에 부모님 곁을 떠나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보이는 소리를 만나 치유의 캠퍼스 생활을 함으로써 움츠리기만 했던 내가 마침내 기지개를 켤 수 있었다. 인생의 기나긴 겨울이 끝나가는 것 같았다. 동아리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햇살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내가 보이는 소리를 만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내 가슴 속에 또 다른 봄이 찾아들고 있었다.

◉ 스무 살의 통일대장정

행복한 캠퍼스 생활이 계속되었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꿈틀거렸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스무 살! 안일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내 청춘에 죄를 짓는 것과 같았다. 그땐 치열했지 하면서 슬며시 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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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청춘이고 싶었다. 스무 살, 내가 선택한 도전은 전국 대학생들과 함께 금강산을 찍고 목포로 내려와서 임진각까지 행군하는 통일대장정이었다. 북한에서 남한까지 한 발 한 발 밟으며 통일을 염원하는 대장정은 내게 무척 의미 있는 일이었다. 2006년 그해 여름. 나는 대장정을 떠났다.

■ 벌써 그리운 엄마

대장정을 하다보면 대원들에게 물은 생명과도 같다. 그러나 하루 종일 힘들게 걸어 도착한 곳에는 마실 물도 씻을 물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대장정 시작 첫날 밤, 텐트와 침낭을 실은 트럭마저 다음날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할 수 있을 거야’라는 믿음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땀 냄새에 모기떼도 극성이었다. 퉁퉁 부은 팔과 다리를 부여잡으며 텐트도 없이 돗자리 위에서 자야하다니……. 눈물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자리에 누웠는데, 세상에! 내 생애 가장 많은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굉장한 광경이었다. 나는 무수한 별 중에서 가장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별에게 약속했다. ‘꼭 끝까지 완주할게.’ 별들이 앞으로의 여정을 응원해 주는 듯 더욱 반짝였다.

그러자 애화학교 시절에 자주 부르던 ‘반짝반짝 작은 별’이라는 수화 동요가 생각났다. 나는 갑자기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별을 올려다보며 노래를 떠올리니 엄마가 무척 그리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아, 눈물자국이 채 마르기도 전에 새벽이 밝았고 우리는 또 대장정을 떠날 채비를 해야 했다.

■ 함께 걷자 우리 이 길을

자기 자신과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뜨거운 태양아래, 불덩어리 지옥 같은 아스팔트 위를 걷고 또 걸었다.

휴식시간에 오줌 지린내가 나는 개집 옆에서 부모님께 엽서를 쓰고 있는데. ‘아, 정말 집 나오니 개고생이다. 저 개는 내 맘도 모르고 꼬리를 흔들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도 대원들이 서로 챙겨주고 함께 고생하고 있기 때문에 힘이 났다. 대원들은 내게 말을 할 때 입 모양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불끈 손을 잡아주며 용기를 불어넣어주기도 했다. 나의 단짝인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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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는 손수건에 물을 적셔 건네주며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덕분에 하루하루 무사히 소화할 수 있었다.

내가 속한 소대 이름은 ‘푸른 꿈을 가진 대학생’이었다. 우리는 푸른 꿈을 가슴에 품고 뜨거운 태양을 어깨에 짊어지고 행군했다.

서천에 있는 춘장대 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때는 미션이 주어졌다. 전국 대학생이 모여서 무언 연극을 하는 미션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오로지 몸짓과 표정으로 하나의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했다. 우리 소대는 ‘대장정을 완주한 모습’이라는 주제로 시나리오를 짰다. 나는 이런 것에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에 대원들의 표정을 섬세하게 고칠 수 있었고 다양한 몸짓과 표정을 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시나리오는 탄탄했고 창의적인 표현도 돋보였다. 결국 우리 소대가 8개 지역 소대 중에 1등을 차지했다. 서로 얼싸안을 정도로 눈물 나게 기뻤다. 그 상으로 하루 빨래방 이용권을 받을 수 있었다. 늘 땀에 젖어 있던 옷이 뽀송뽀송한 옷으로 내 손에 다시 들어왔을 때, 온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 대장정이 내게 준 선물

이글이글한 폭염으로 어느 때보다 힘든 하루였다. 나는 그냥 쓰러지고 싶을 정도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대원 누군가가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했다며 신난 걸음으로 달려갔다.

“엄마 목소리 들으니까 어때?”

나는 통화를 끝내고 온 대원에게 슬쩍 물었다.

“말도 마! 진짜 힘이 되는 것 같아.”

문득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나도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그 대원처럼 나도 엄마 목소리를 듣고 힘을 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는 나 자신이 한없이 가여웠다. 눈물이 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묵묵히 견뎌온 대장정을 포기하고 싶었다. 결국 나는 대장정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런데 불현듯 엄마가 당부한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의 인생에 가장 신중해야 할 것은 ‘포기’란다. 포기한다면 다음 일도 또 포기하기 쉬우니까. 스무 살의 완주가 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거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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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화 통화를 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에 울리던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목소리가 나를 다시 대장정에 도전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대장정을 하면서 나 자신과 대화를 많이 했다. 스스로와의 대화는 모기떼, 오르막, 더위와 먼지, 뜨거운 아스팔트, 타오르는 목구멍 등의 장애물과 끝까지 싸우는 힘을 얻게 했다.

목포부터 시작해 드디어 경기도 오산 공설운동장, 그리고 서울. 서울이 가장 괴로운 것은 맛있는 음식점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신호등으로 도저히 속도가 나지 않았다.

지옥의 서울을 벗어나 이제 임진각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 ‘제7회 전국대학생 통일대장정 완주’라고 쓰인 테이프가 보였다. 우리는 모두 손을 잡고 함께 호흡하면서 달려갔다. 평화로운 통일이 이루어질 것만 같은 설렘이 가득했다. 그렇게 나는 스무 살 여름,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던 임진각에서 아름다운 완주를 완성했다.

첫날 밤에 영롱하게 빛나는 별을 보면서 약속했던 완주! 결국 해냈다. 그날의 완주는 내가 도전하는 열정을 키울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 만약 내가 대장정에 도전하지 못했더라면, 스무 살이라는 소중한 시기에 진정으로 가치 있는 걸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 이것은 내 인생의 기초가 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 톱스타 깁태희가 나를 찾는다고?

대장정 이후, 나는 되도록 다양한 경험을 해서 내 삶의 스케일을 점점 넓혀야 겠다고 생각했다.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으로 삼는 발상의 전환도 필요했다.

2008년 어느 날, ‘세계위생의 해’ 기념으로 충북 청남대 유니세프 후원의 밤이 열렸다. 그때 안드레 김 특별패션쇼의 스태프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잘할 수 있을까 고민도 되었지만 무조건 부딪혀 보기로 했다.

“귀가 들리지 않지만, 몸으로 때우는 거라면 무조건 할 수 있습니다.”

스태프는 의사소통이 필수지만, 진심이 통했는지 마지막 순번으로 선발되어 앙드레 김 패션쇼 스태프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번 메인 모델이 김태희, 송승헌이라고 하는데 그들을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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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뭇 궁금하기도 했지만 주위 말로는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해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드디어 쉬는 시간이 왔다. 스태프 전원이 한숨 돌리며 쉬고 있었지만, 김태희 씨를 만날 기회가 지금밖에 없으니 뭐라도 준비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덥석 편지를 썼다.

편지는 청각장애를 가진 내게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곧바로 거대한 드레스 틈에 숨어서 진솔함을 담아 편지를 썼다. 내용의 핵심은 유니세프 후원에 나서서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고맙다는 이야기였다.

편지를 다 쓰고 주변을 돌아보는데 스태프들이 온통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어디로 갔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런데 입구로 다가간 순간! 오른쪽에 광명이 비추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예감에 고개를 돌리니 글쎄, 대한민국 톱스타 김태희씨가 바로 내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나보다 놀란 건 경호원들이었다. ‘이 스태프는 언제 들어 온 거지?’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두 번째 액션을 발휘해야 할 그 찰나를 놓칠 수 없었다. 나는 마침내 다 쓴 편지를 김태희 씨에게 바로 건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스태프들이 다 사라진 이유는 경호원이 당분간 밖에 나가 있으라는 지시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청각 장애로 경호원의 안내 소리를 듣지 못했고 그 자리에서 계속 편지를 쓴 것이다. 절묘한 타이밍이지만 운도 좋았다.

그날 밤, 피날레 리허설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정신없이 일을 하던 중에 체격이 건장한 경호원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서 문자로 ‘노선영 씨 맞으세요?’라는 내용을 보여 주었다.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경호원이 미소를 짓더니 ‘잠시 후에 김태희 씨가 뵙고 싶다고 하네요. 카메라를 챙겨 주세요. 10분 후에 뵙겠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경호원, 아니 김태희 씨의 뜻밖의 제안을 놓고 놀랐다. 나는 그 10분 동안 카메라뿐만 아니라 종이와 펜까지 준비하는 세 번째 액션을 발휘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김태희 씨를 만날 수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진도 같이 찍고 대화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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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낼 수 있었다. 정말 꿈같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내 진심을 확인해 주고 초대까지 해준 김태희 씨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리고 싶다.

■ 용기와 진심은 새로운 인연을 만든다

김태희 씨와의 만남을 계기로 진심이 담긴 액션을 보여준다면 좋은 기회가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경험이 토대가 되어 강연에 참가 할 때면 공감하는 눈빛을 보내고 고개를 자주 끄덕이며 용기 있게 질문하는 액션으로 존재를 각인시켰다. 그리고 강연이 끝나면 반드시 직접 찾아갔다. 만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정성을 담은 메일을 보냈다. 그러면서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그분들이 가진 장점을 배워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내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슴에 품고 지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이화여대에서 열린 ‘차세데 리더 아카데미’에서 우연히 고정욱 작가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고정욱 작가님은 소아미비라는 장애를 가졌지만 ‘아주 특별한 우리 형’, ‘가방을 들어주는 아이’, ‘안내견 탄실이’라는 베스트셀러 동화를 썼으며 주변에 어려운 분들을 위해 인세를 기부하는 선행을 베풀어 왔다. 나는 그분의 강연에서 꿈을 알리고 질문을 하며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인상 깊었는지 그 후로 인연을 맺게 되어 메일을 자주 주고받았다.

나는 고정욱 작가님을 비롯해 나에게 조언과 도움을 준 분들을 잊지 않고, 그 도움이 반드시 선순환되도록 노력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얻은 조언을 나를 찾아오는 청각장애 후배와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후배는 김원정이라는 청각장애 후배다.

지금 그녀는 한 대기업에 정식 취직이 되어 나보다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당부했다.

“내가 너의 성장을 도와준 것처럼 다른 후배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줘.”

그녀는 분명 다른 후배에게 좋은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주변에서 아무리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말해도 나는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자신의 액션을 믿으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세상은 액션을 하는 자를 알아봐주었고 내 편을 들어주었다. 용기 있는 자의 액션이 놀라운 리액션을 만들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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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도가니>를 찍다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는 청각장애 특수학교에서 성폭행을 당한 아이들의 사건을 그린 이야기다. 이 책이 영화화되어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나는 몇 년 전, 한국농아대학생연합과 함께 영화 ‘도가니’에 4일 동안 엑스트라로 출연한 일이 있다.

나는 엑스트라로 참가했지만, 촬영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피해자 역할을 맡은 아역배우의 두려움에 떠는 연기를 보면서 성폭행의 2차적 피해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법정에서 끔찍한 기억을 다시 떠올릴 것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2005년 MBC PD수첩을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진 ‘도가니’의 실제 사건은 광주 인화학교에서 발생한 장애아동 성폭행 사건으로, 인면수심의 교장 및 교직원이 벌인 일이었다.

- 인화학교는 초등학교 인가를 받고, 중등부 고등부를 만들어 가짜 졸업장 수여

- 기숙사에서 발견된 간질약은 ‘얌전해지는 약’이라 속이고 투약

- 세탁기에 얼굴 쑤셔넣기, 칸막이 없는 화장실, 오래된 칫솔 쓰기 등

이 사건은 PD수첩과 공지영 작가의 책으로도 세상에 알려졌지만 결정적인 것은 2011년 제작된 영화 ‘도가니’였다. 분노한 여론으로 경찰의 재조사까지 받게 되었으니 영화의 힘이 대단하다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했다. 왜 진작 철저한 조사와 처벌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인가!

영화 ‘도가니’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나는 한글 자막 시사회에 초대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솔직히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애화학교에 대한 따뜻한 추억이 남아 있는데, 영화 속에는 특수학교가 음울하고 나쁘게 그려져 있었고, 농인이 힘없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사회의 부조리 앞에 힘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도가니 같은 사건이 계속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나자 엔딩 크레딧에 내 이름 석 자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나는 사명감이 들었다. 그것은 장애인에 대한 무관심과 차별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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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떠난 중국여행

관상어 코이(Koi)는 어항에서 자라면 8Cm밖에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연못에서 자라면 25Cm, 큰 강물에서 자라면 120Cm까지 성장한다. 만일 한 마리의 코이가 ‘내게 장애가 있기 때문에’라는 꼬리표에 묶여 지내왔더라면, 작은 틀 안에서 스스로를 작게 만들어 성장했을 것이다.

중국 여행을 선택한 이유는 큰 강물에서 자라는 120Cm의 코이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나의 장애가 뛰어남을 수 없는 장애물인지 시험하고도 싶었다.

그동안 착실하게 모은 돈으로 비행기 티킷이며 비자를 발급받고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면서 나의 마음은 위태위태했다. ‘시작이 반이라지만 과연 잘 하는 걸까?’

드디어 중국으로 떠나는 날,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기 싫은 알량한 마음에 여행사를 통해 간다고 둘러댔다. 사실 엄마는 내 선택을 지지할 거라는 생각에 살짝 마음을 놓을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대전 엑스포 등 복잡한 관광지, 또는 집에서도 가끔 나를 멀리 심부름을 보내곤 했다. 잘못하면 길거리에서 미아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오늘의 자녀 교육법 관점으로 보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불안감과 걱정을 감춰두고 결단력 있게 심부름을 보내셨다. 나는 엄마의 뜻에 보답하고자 낯선 곳에서 혼자 길을 헤매면서 책임감과 길을 찾는 방법을 익혔다. 그러면서 자유와 스릴 넘치는 위험이 얼마나 짜릿한지도 알게 되었다. 심부름을 완수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잘했다며 맛있는 것을 요리해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설명하기 힘든 벅찬 감정을 느꼈다.

■ 나 혼자 난리 블루스

막상 비행기에 오르니 두려움이 밀려왔다. 내가 탄 비행기 안에는 승객은커녕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옆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아니. 비행기를 통째로 빌린 것 같구만, 전세기를 타는 거랑 다를 바 없잖아. 이게 웬 호강이래? 호호’ 하며 신나 했을 텐데, 불행히 아무도 없었다. 마치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은하철도 999를 탄 기분이었다. 활주로를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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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실상은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그나마 승무원들 서너 명이 복도를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위안이 되었다.

“나는 두려움, 특히 변화의 두려움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심장의 두근거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 에리카 종 -

나는 이 명언을 되새기며 두려움을 달랬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중국에 도착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도시가 손바닥만 하게 보였다. 중국의 첫 인상은 우중충한 날씨 탓인지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북경 외곽에 있는 숙소를 찾아가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지금 우리나라에는 없는 버스안내양이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한 여자가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조선족으로 이름이 순실이라고 했다. 순실이는 숙소에서 여행객의 잡다한 것을 보살피는 역할도 했지만,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도 하고 있었다. 순실이의 도움으로 숙소를 등록하고 저녁을 먹은 뒤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는 욕실에 들어가 샤워부터 했다.

그날 저녁 중국에서는 신년맞이 불꽃 축제가 있었다. 나는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잊고 북경의 불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혼자 대륙까지 건너온 나를 자축하기로 했다. 그렇게 북경의 첫날 밤이 저물어 갔다.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했다. 나는 후퉁 거리 근처에 가서 천 년 전의 베이징 골목을 탐험하고 저녁에는 베이징 최대의 야시장인 왕푸징 거리를 돌아다녔다. 중국인이 지나가는 나를 붙잡고 음식을 권했는데 불가사리, 전갈, 지네, 펼친 도마뱀 등 각종 기상천외한 꼬치가 대부분이었다. ‘중국에 왔으니 한 번 도전해봐?’ 하지만 결국 손에 쥔 꼬치는 비교적 안전한(?) 딸기 꼬치였다. 나는 인파속에서 딸기꼬치를 우적거리며 북경의 밤을 보냈다.

■ 조선족 순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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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에서 왔다는 조선족 순실이가 어떻게 내 친구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 혼자 중국에 왔고 나이대도 비슷하니 쉽게 친해지지 않았을까. 나는 순실이의 억양을 알아듣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늘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한국어와 중국어를 섞은 필담으로 대화를 나눴다. 사실 나는 중국에 오기 전까지 조선족에 대한 약간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순실이를 만나고 난 뒤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순수하고 소박한 인품을 가진 그녀가 내게 열린 마음으로 진실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나는 인심 좋은 그녀가 점점 좋아졌고 조선족이라는 벽을 넘어 하나의 인격체임을 느꼈다 덕분에 우리는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 조선족은 한국을 좋아해서 한국말을 열심히 공부하지만 한국인은 조선족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아서 가슴 아파함

- 나의 귀머거리, 벙어리의 서름과 순실이의 서름이 함께 연관되어 가슴이 아픔

북경을 떠나기 전날 밤, 나는 평소 외출이 거의 없는 순실이에게 휴식이라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 주인에게 뻔뻔하게(?) 같이 가고 싶다고 조르니 마지 못해 허락해주었다. 한껏 신난 순실이와 함께 놀러 가자니 나도 모르게 순실이를 구출해낸 기분이 들었다. 내가 순실이와 함께 간 곳은 중국에서 ‘베이따’라고 부르는 북경대학교였다. 북경대 도서관은 지붕에 기와를 얹어 고풍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계단 양쪽에는 돌사자 두 마리가 지키고 있었다. 연휴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의 불빛은 여전히 빛났다. 시끄러운 한국의 대학가와 확연한 차이가 느껴졌다.

순실이와 헤어지고 북경을 떠나기 전 자금성을 방문하고 북경에서 쑤저우행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북경역으로 향했다.

북경역은 서울역보다 거대했지만 중국인들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연휴라 침대표가 매진되었지만 다행히 가장 낮은 등급의 3등석 열차 딱 한 자리가 남았다고 했다. 무려 22시간이나 걸리는데 딱딱한 의자에 앉아 가야하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 22시간의 기차 여행

낡은 기차 안에는 고향에 가는 서민들이 대부분이어서 시끌시끌했다. 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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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찾아간 자리는 최악중의 최악이었다. 화장실 바로 옆에 붙은 좌석이었던 것이다. 딱딱한 자리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하는 동안 출발한다는 신호가 울렸다.

다행히 몇 시간 동안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햇살이 드는 오후에는 모든 게 여유로웠고 아이가 팽이를 치면서 놀기라도 하면 기차 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사랑스러운 눈길로 지켜보았다. 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사발면도 먹고 붉을 깃발이 듬성듬성 나부끼는 중국 시골의 경치도 구경했다.

한 참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볼 일이 급해졌다. 나는 좌석 옆에 있는 간이화장실로 가서 문을 열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일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좁디좁은 공간에 쇠로 된 변기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변기 아래에 구멍이 뚫려 있는 거였다. 선로가 훤히 보일 정도여서 아찔했다. 덜덜 떨면서 볼일을 봤다.

한숨을 돌리고 간신히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땐 이미 기차 안이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화장실 냄새까지 오묘하게 섞여 코를 찔렀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내 표정을 보고 깨소금 맛이라는 듯 키득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 앞으로 19시간을 견뎌야 하는데……. 이건 아니야.’ 나는 고개를 강하게 흔들며 현실을 부정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어쨌든 22시간의 길고도 긴 여행이 끝나고 드디어 쑤저우 역에 도착! 탈옥해서 해방감을 만끽하는 기분이었다.‘야호~!’

■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가다

나는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을 방문하기 위해 상해에 있는 루쉰공원으로 향했다. 중국 문학의 거장 루쉰, 그의 혼이 공원을 보듬어주기라도 하는 듯 무척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루쉰 공원 정문에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사내대장부는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공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丈夫出家生不還)’ 라는 비장한 글을 써놓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알려진 바와 같이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홍커우 공원(지금의 루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상해 점령 전승 경축식에 수통형 폭탄을 투척해 일본의 수뇌부를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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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안에는 윤봉길 의사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자료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현장을 직접 밟고 기념관을 돌아보니 손끝이 절로 떨렸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2층에 있는 현판에는 윤봉길 의사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한층 강의(剛毅 의지가 굳음)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 비와 이슬, 은혜, 은택)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1930. 10. 18

한 아내의 남편이자 두 아들의 아버지였던 윤봉길,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조국에 바쳤던 그, 그가 얼마나 어려운 결정을 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서일까, 감동이 두 배로 더 진해졌다. 처형당할 때 결박당했던 나무 기둥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쳤다.

■ 여행이 남긴 것들

아름다운 여행이 끝났다.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배낭과 지도를 들고 낯선 곳을 찾아다니다 보면 어느 새 길 위에 추억이 자랐다. 여행지에서 만난 저마다의 새로운 열정들은 나를 설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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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만류에도 할 수 있다는 내 안의 목소리를 듣고 시작한 중국여행은, 항상 같은 곳에만 머물러 있다면 내가 원하는 곳에 결코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깨달음을 주었으며 더 많은 세상을 만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무엇보다 열정만 있다면 어떤 일에도 도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해 주었다. 20대에 모험이 가득한 추억이 있다면 그만큼 행복하지 않을까? 중국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보란 듯이 당당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더니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내가 졌다 졌어. 두 손 두 발 다 들었네.

◉ 아테네 국제 마라톤에 도전하다

중국 여행을 마치고 졸업할 때가 다가오자 취직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나는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내 가치를 극대화하는 일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내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한국장애인재활협회와 에스오일(S-Oil) 기업에서 전액 지원해 주는 아테네국제마라톤대회 프로젝트였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한테 혹독한 등산 훈련을 받은 덕분인지 오래달리기에서 늘 1위나 2위를 하곤 해서 운동에 자신이 있었다. 비록 마라톤 기록과 트레이닝 일기 등 까다로운 조건을 걸고 있었지만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연습을 위해 보라매에서 하는 국내 마라톤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좀 더 체계적인 훈련을 위해 수화통역사와 함께 동네 헬스장을 찾았다.

저녁 늦게 헬스가 끝나면 더 연습하고 싶어 텅 빈 학교 운동장을 뛰었다. 내게 맞는 식이요법도 만들고 마라톤 이론을 공부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관련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면서 마라톤은 체력도 중요하지만 기술로 뛰는 거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라톤 심사를 받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마라톤은 고통스러운 체험이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의 내면에 동기를 부여하여 신체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강인한 에너지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행복의 사명감을 가지고 마라톤을 완주하고, 성취감을 즐기고, 장벽을 넘어 완주하는 것이 목표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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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기 위해 철저한 자기분석과 계획이 실행으로 이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아테네에서 장애 청년 대표로 나가 스스로의 한계를 돌파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싶습니다.”

며칠 후 한국장애인재활협회 측에서 합격 통보가 날아왔다. 고작 아홉 명만 뽑는 치열한 경쟁을 뚫은 결과였다. 열정이 소리 없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 꿈에 그리던 곳에 서다

이스탄불 공항을 거쳐 드디어 마라톤의 꿈의 무대인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했다. 먼저 고대 아테네인의 유적지가 밀집해 있는 아크로폴리스를 비롯해 그리스 문명의 흔적들을 관람했다.

■ 한계에 도전하다

드디어 대회 날,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를 했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보슬비가 내렸다. 나는 유니폼위에 붙은 태극마크를 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경기장에 도착한 나는 체조로 워밍업을 했다. 출발시간이 다가오자 점점 긴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탕!’ 드디어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온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뛰어 나갔다. 나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이 너무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기 때문이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꽤 빠른 템포로 뛰어 나갔다. 연습할 때의 페이스를 잃고 초반에 빨리 뛰었더니 몇 백 미터도 못가 숨이 차기 시작했다. 나는 일부러 속도를 늦춰 오버페이스가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반환점을 돌기 시작하자 숨이 더 가빠졌다. 빗길을 뛰느라 체력이 더 소모되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고비가 빨리 찾아왔다. 나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봐!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날 보면서 응원하고 있어.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힘들고 조심스럽게 훈련해 왔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잖아.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났고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그러자 다시 의욕이 생기고 도전의식도 커졌다. 저 멀리 파르테논 신전도 나를 응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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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스(안녕하세요)! 사가뽀(사랑합니다)!”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그리스어로 인사했다.

마침내 오감이 깨어나고 봄빛의 아드레날린이 마구 샘솟는 것 같았다. 점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마침내 고대올림픽경기장에 골인한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역전의 드라마였다. 포기하지 않은 대가로 완주 메달과 월계관을 쓰는 영광을 누렸다. 내 인생에서 아주 근사한 순간이었다.

마라톤은 인생과 같다. 인생에는 기쁘게 걸을 수 있는 꽃길도 있지만 가시덤불을 헤쳐가야 하는 시련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간다면 그 길이 바로 멋있는 코스가 될 것이다.

마라톤은 소리가 필요하지 않은 고요의 운동이며 바람, 먼지, 더위, 어둠, 도시, 교통, 색깔, 빛과 교감할 수 있는 운동이다. 고통의 단계를 지나면 영혼이 다시 순수하게 가다듬어지고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지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나는 마라톤을 통해 ‘고요’라는 선물을 받았다. 그 고요를 즐기며 남보다 다른 몸으로 세상에 우뚝 서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열정의 닻을 다시 올리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 취업전선에 뛰어들다

대학 시절부터 참으로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본 것 같다. 들리지 않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몸으로 뛰는 아르바이트가 대부분 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인형 탈 아르바이트였다. 말은 하지 않고 오직 움직임만을 보여주는 일이었기에 내게 안성맞춤이었다. 내 손짓과 몸짓으로 아이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계속 아르바이트만 할 수 없어 그만두고 정식 취직을 준비해야 했다. 사실 청각장애인이 직장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직장 내에서 회의나 전화 대응이 필요하기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고용자들이 청각장애인을 고용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다보니 현실적으로 청각장애인의 직업 영역이 제한되어 있어 저임금의 생산직, 단순노무직과 같은 일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취업을 준비하고 있을 때 마침 롯데 그룹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채용을 공고했다. 대학에서 유통과 마케팅을 배웠기 때문에 롯데 그룹 채용에 관심이 갔다. 운이 좋게도 1차 서류심사가 통과되어 면접을 보러갔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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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한계를 넘어선 열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드디어 면접 날, ‘본인을 소개하시오’라는 질문이 던져졌다. 나는 ‘이때다!’하고 가져온 스케치북을 넘기며 열변을 토했다. 지금 생각해도 낯 뜨거울 정도다. 나는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합격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함께 간 수화 통역사가 면접실을 나올 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최고의 면접이었어요. 선영씨는 붙을 수 있을 거예요!”

드디어 발표 날. 차마 결과를 볼 수 없어서 아버지께 확인을 부탁드렸다.

한참 후, “명단에 없다.”

나는 아버지가 방을 빠져 나가자마자 엉엉 울고 말았다. 한참을 울다가 퉁퉁 부은 눈으로 화장실을 갔더니 아버지가 불꺼진 거실 한가운데 앉아 계셨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아버지의 굽은 등과 축 처진 어깨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어렸을 때 그렇게 넓고 당당하시던 어깨 였는데…….

그날 밤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다.

■ 도전만이 살 길이다

나는 다른 계열사에도 도전했으나 면접에서부터 탈락했다.

이제 세 번째 도전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자격증을 따는 것보다 나만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는 이력을 쌓고 싶었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으며 방안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것보다 직접 밖으로 나가 발품을 파는 것이 생생한 구직활동이라고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힘은 때론 강한 법이니까. 나는 도서관에 가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 중에 ‘삼성과 연애하고 롯데와 결혼하다’라는 책을 읽고 저자인 롯데카드 손영호 팀장님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제 발로 찾아온 독자가 놀랍게도 내가 두 번째라고 했다. 저자를 찾아오는 일이 생각보다 흔치 않은 것이다. 그분은 바쁜 시간을 쪼개 근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사주며 취업 노하우와 기업 문화를 필담으로 상세히 알려주셨다. 덕분에 책이나 인터넷에서 얻을 수 없는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한 뒤에 다시 취업에 도전했다. 내가 도전한 곳은 그룹내에서 정보기술(IT)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기업인 ‘롯데정보통신’이었다. 그곳에 지원한 이유는 온라인 업무가 많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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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면접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인상이 푸근한 면접관 한 분이 호의적으로 이끌어주어 면접을 편하게 볼 수 있었다. 그분은 이력서 내용 중에 자격증보다 ‘아테네국제마라톤’ 대해 관심을 보였다. 나는 마라톤 대회에 어떻게 지원했으며 어떤 것을 느끼고 왔는지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스토리를 전했다. 발음을 천천히 해서 초조함이 앞서지 않도록 애를 썼다. 면접관은 열정적인 내 모습에 감동을 받은 듯 했다. 면접을 마친 뒤 며칠이 지나 합격통보가 날아왔다. 놀랍게도 그분이 현재 내 이사님이시다.

■ 힘이 되어주는 한마디

아버지가 일찍 출근하는 데다가 나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대화할 시간이 많이 줄었다. 새벽에 일터로 나가는 아버지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페이스북 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셨다. 웬일일까 싶었는데 온라인에서도 내 소식을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짬이 나는 대로 하나하나 가르쳐 드렸다.

그날도 기운 없이 핸드폰을 보던 중이었는데 페이스북에 새 소식 알림 표시가 떴다. 별 생각 없이 확인해 보니 아버지의 ‘첫 댓글’이었다.

“우리 딸 항상 새로워져. 힘들어도 열심히 하는 네가 가장 아름다워. 건강 챙기고 힘내. 아빠가 항상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게.”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이 글에 그만 폭풍눈물이 터졌다. 이렇게 몰래 깜짝 선물을 준비하시다니. 나는 아버지의 응원에 다시 한 번 힘을 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몇 시에 퇴근하든 지하철역 앞에 항상 마중 나와 주시는 분이었다. 평소에는 차 안에서 기다리곤 했는데 그 날은 일부러 밖에 나와서 “딸내미, 오늘 수고했어, 밥은 먹었니? 먹고 싶은 것 없어?” 하시며 어깨동무를 하셨다. 그때 말은 안 했지만 아버지의 지상함으로 모든 피로가 싹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어느 날 아침 출근 시간 나는 여느 때처럼 빌딩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경비 아저씨가 웃는 얼굴로 “오늘 일 잘해요.”라고 수화로 인사를 건네는 게 아닌가. 어디서 수화를 배우셨는지 정말 감동적이었다. 이런 분이 세상에 존재해서 행복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사님은 가끔 수화를 배워서 먼저 인사를 건네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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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는 회사 내에서 실시하는 공모전에 도전해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롯데시네마 엑스트라 배우에도 도전해 보았다. 사보에도 정기적으로 글을 게재하고 있다. 회사에서도 내가 어떤 일을 하든 늘 응원해 주었고 나 역시 회사를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

힘들었던 취업활동, 그리고 혹독한 적응기를 거쳐야 했던 첫 직장생활을 통해 또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연이은 실패와 시련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모습으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면 언젠가 열린다는 사실!

2014. 6. 16

* 다음에 제3부부터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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