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16. 14:58ㆍ독서후기
백년을 살아보니
■ 김형석 지음
0 1920년 평남 대동출생 (97세)
0 일본 조치(上智)대학 철학과 졸. 30여 년간 연세대 철학과 교수
0 미국 시카고대, 하버드대 연구교수
0 대한민국 철학계 1세대 교육자
0 현재 연세대 명예교수로 97세의 나이에도 저서 활동과 강의 활동
0 저서 : 현대인의 철학.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예수 등
- 고독이라는 병. 영원과 사랑의 대화 외 다수의 베스트셀러(수필집) 집필
■ 프롤로그
이 책에서는 장년기와 노년기를 맞고 보내며 인생과 사회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더 늦기 전에 스스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과제들을 모아 정리해 보기로 했다.
문제를 먼저 제시하고 이론적 설명을 찾기보다는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지혜롭게 판단하고 처리하는 삶의 지혜를 추구해 보고 싶었다.
늙어서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고 후배와 후손들의 존경을 받아야 할 의무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100세까지 스스로의 행복을 지니고 싶고, 주변 사람들의 고마움과 존경스러움을 받으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만족스럽지는 못하나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
나는 세계 여러 지역과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이 선진국가가 되고 세계를 영도해 가고 있는가. 그 나라의 국민들 80% 이상은 100년 이상에 걸쳐 독서를 한 나라들이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러시아 등은 그 과정을 밟지 못했다. 아프리카는 물론 동남아시아나 중남미에 가도 독서를 즐기는 국민적 현상을 볼 수가 없다.
- 1 -
나는 우리 50대 이상의 어른들이 독서를 즐기는 모습을 후대에게 보여주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시급하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우리들 자신의 행복인 동시에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진입 유지하는 애국의 길이라고 확신한다. 나이 들어 느끼는 하나의 소원이기도 하다.
2016년 여름 저자
1. 똑같은 행복은 없다
- 행복론 -
■ 성공하면 행복할까
다른 모든 것은 원하는 사람도 있고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행복은 누구나 원한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그러나 행복은 어떤 것인가, 라고 물으면 같은 대답이 없다. 행복은 모든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이며, 같은 내용이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행불행이 달라질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은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돈 때문에 행복해지는 사람도 있으나 같은 돈 때문에 불행해 지는 사람도 있다.
■ 시간의 빈 그릇 속에 담아 넣고 싶은 것들
그래서 우리가 행복을 얘기할 때는 삶의 일상적이며 정상적인 내용과 연결되는 행복을 뜻한다.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빈 그릇 속에 담아 넣고 싶은 것들의 대명사와 같은 것이다. 그 대명사의 내용에는 꼭 같은 것은 없어도 서로 비슷한 것들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몇 가지 유형중의 하나 또는 둘을 택해 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이며 가시적인 것들을 소유함으로써 주어지는 만족감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정치로 대표되는 권력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지배하고 싶은 본능, 강자가 되려고 하는 의욕, 야망을 채우고 싶은 삶의 욕망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소유에 해당하기 때문에 상실했을 때는 고통과 불행으
- 2 -
로 바뀌게 된다. 이런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소유의 노예가 되어 정신적 행복은 누리지 못한다. 예로부터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이 진리같이 전해지고 있다.
■ 행복에도 차원이 있다
예술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와 비교할 수가 없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가치는 어떤 이탈리아의 기업가나 재벌이 남겨주는 경제적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인류를 행복하게 만드는 정신적 가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몇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관광 수입만도 막대하다.
1947년은 독일의 자랑스러운 시인 괴테의 탄신 200주년이 되는 해
- 전후 독일은 기념행사를 개최할 여력이 없었음
- 전쟁의 적대국이었던 미국이 세계적인 기념 축전을 개최
- 괴테의 정신적 영향력은 전쟁의 파괴력 보다 높이 평가 받음
20세기를 끝내면서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1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사람은 아인슈타인 - 정치가도 재벌도 아닌 과학자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은 한 줄의 역사적 기록에 그쳤다. 반면 대왕의 가정교사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2300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 그의 정신적 유산과 혜택이 현대인의 감사와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래서 정신적 가치를 깨닫는 사람들은 인류가 남긴 업적의 혜택을 누리는 일에 동참함으로써 행복을 누린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기쁨도 있어야 하나 음악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필수적이다. 또 이런 정신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창작의 기쁨과 행복은 고급 자가용을 타고 좋아하는 사람들보다 높은 차원의 행복을 갖는다.
영국의 작가 키플링이 쓴 <숲 지킴이>라는 작품의 이야기이다.
직장을 구하던 사람이 예상 못했던 취직을 하게 된다. 넓은 숲에서 산불을
- 3 -
예방하거나 서식하는 동물을 보호해 주는 일이다.
낮에는 숲속에서 작업복 차림으로 지내고 저녁이면 혼자 사는 산속 오두막에 와서 신사복 차림을 하고 밖에 나왔다가 다시 문을 노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여러 해 동안 숲속에서 혼자 살다가 후일에 인간 사회로 나가게 되면 인간의 자격을 상실할 것 같았다. 내가 인간 사회에서 살 때 언제 가장 행복했는가 하고 찾아보았더니, 귀한 손님으로 초대받아 갔던 때였다는 생각이 났다. 저녁 시간만이라도 인간답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습관을 창안해 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우리 모두는 사회 속에 태어났다가 사회를 떠나가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는 물론 행복과 불행도 내가 소속되어 있는 인간적 공동체 속에서 태어나고 주어지는 것이다.
동양의 오랜 스승인 공자의 교훈도 한마디로 말하면,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에서 행복을 찾아 누리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그것을 어진 마음을 갖고 예절을 지키라는 정신으로 압축했다.
선하고 건설적인 인간관계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진 특전이다. 닫힌 마음, 즉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정신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그것은 후진사회와 선진시회를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며 많은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을 가늠하는 사회원칙이기도 하다.
■ 행복과 성공의 함수관계
성공과 실패의 객관적 기준은 있다. 나에게 주어진 재능과 가능성을 유감없이 달성한 사람은 행복하며 성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주어진 유사성과 가능성을 다 발휘하지 못한 사람은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가 없다.
정성들여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실패가 없으나 게으른 사람에게는 성공이 없는 법이다. 성공과 행복의 함수관계도 그렇게 보아야 할 것이다.
■ 인격 수준과 재산의 관계
중학교 2학년쯤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는 톨스토이의 동화를 읽었다.
- 4 -
가난한 소작인 농부가 있었다. 평생소원이 남처럼 내 땅을 갖고 마음대로 농사를 지어보는 것이었다. 어느 날 뜻밖의 소문을 들었다. 러시아의 한 귀족이 원하는 사람이게는 돈을 받지 않고 농토를 나누어준다는 것이다. 농부는 그 귀족을 찾아가 사실이냐고 물었다. 귀족은 “얼마나 많은 땅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농부는 아침에 해가 뜰 때 출발해서 해가 지기 전까지 밟고 돌아오는 모든 땅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청했다. 귀족은 내일 아침 해뜨기 전에 저 언덕 위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농부는 해가 동쪽 언덕위로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제부터 뛰기 시작할 것입니다.”라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귀족은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와야 하네.” 라고 대답해 주었다. 농부는 뛰고 또 뛰었다.
너무 멀리 온 것 같다고 생각한 농부는 발걸음을 돌렸다. 농부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농부는 죽을힘을 다해 언덕에 올라서면서 “아직은 해가 조금 남아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그길로 숨을 거두었다.
귀족은 종을 불러 거기에 땅을 파고 묻어 주라고 지시하면서 “이 사람아, 사람은 다섯 자 땅에 묻히면 그만일세. 그리고 그 정도 땅은 누구나 갖도록 되어 있는데 공연히 애태우다가 죽었구먼…….”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미 해는 지고 땅거미가 드리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동화를 읽고 80년의 세월이 지났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 농부만이 아니다, 나 자신도 때로는 그렇게 살았다.
■ 더 많이 남의 것까지 다 가지라는 유혹
사람은 돈과 재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부한 국가는 가난한 국가의 것까지 빼앗아 간다. 더 많은 재산을 갖기 위해 재벌 집안의 형제끼리 싸운다. 부자간이나 모자 사이에도 원수지는 일들을 자주 본다.
내가 항상 가족들이나 제자들에게 권하는 교훈이 있다. “경제는 중산층에 머물면서 정신적으로는 상위층에 속하는 사람이 행복하며, 사회에도 기여하게 된다.”는 충고이다.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행복을 더 많이 누리도록 되어 있다.
- 5 -
그렇다면 사람은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갖고 사는 것이 좋은가. 그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다. 그의 인격의 수준만큼 재산을 갖는 것이 원칙이다. 인격의 성장이 70이라면 70의 재물을 소유하면 된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해서 90의 재산을 갖게 되면 그 분에 넘치는 재산 때문에 인격의 손실을 받게 되며, 지지 않아야 할 짐을 지고 사는 것 같은 고통과 불행을 겪는다.
■ 차라리 그 재산이 없었다면
서울 서북쪽에 가면 S대학이 있다. 그 대학과 중·고등학교를 설립한 B여사를 오래 전에 만난 일이 있었다. 그분도 내게 비슷한 얘기를 했다. 구한말 때 물려받은 부동산이 있었는데 그것을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면 마침내는 남는 바 없이 사라지겠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재산을 나누어 주고는 육영 사업에 투신하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M씨의 경우는 좀 달랐다. 왕실에서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다. 자신도 어느 정도 유능했기 때문에 명문 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나 그 재산을 지키고 관리해야 했기 때문에 직업도 가져 보지 못했다. 67세가 되었을 때 나에게 하는 고백이었다. 차라리 그 재산이 없었다면 떳떳한 사회인으로 보람있게 살았겠는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기 인생을 다 낭비하고 말았다는 후회였다.
역시, 사람은 어느 정도의 재산이 필요한가라고 ane는다면 그의 인격 수준만큼의 재산이 있어야 한다, 그 이하도 문제지만, 그 이상의 재산은 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재산보다 귀한 것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가난은 죄도 아니며 부끄러운 짐도 아니다. 그러나 남을 도와주는 사람도 많은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산다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나는 가난하면서도 애들 여섯을 키웠다. 내가 고생하는 것을 본 모친은 “사람은 정직하고 열심히 일하면 모두 제 먹을 것은 주어지는 법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모친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나에게 주는 위로의 충고였던 것이다.
■ 일을 하는 이유
- 6 -
록펠러센터나 어떤 기업체가 한두 개인의 명의로 등록되었다고 해서 그 시설이나 기관들이 그 개인의 소유는 아니다.
록펠러는 체이스맨해튼은행의 주식 5%를 갖는다. 법에 의해서 그 이상은 갖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대신 록펠러는 은행에서 발생하는 수익금에 대한 투자와 사용권을 행사한다. 중요한 것은 소유권이 아니고 경영권이며, 더 소중한 것은 그 잉여자산의 사용권이다.
다시 말하면 정치가는 정치를 통해 사회에 봉사하며 학자나 예술가는 학문과 예술 작품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듯, 기업가는 그 기업을 통해 경제적 혜택을 사회에 제공하는 책임을 담당한다.
그런데 그것을 개인의 소유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메리카에는 없다.
■ 왜 일을 하는가
나는 40세가 될 때까지 가난하게 살았다. 본래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 대학을 다닐 때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 해방이 되고 자리가 잡히기도 전에 무일푼으로 탈북을 했다. 겨우 안정을 찾는가 싶었을 때 6·25 전쟁으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정전이 되고 서울에 왔다. 대학교수의 직책을 맡으면서 겨우 안정을 되찾게 되었을 때는 교육을 책임 맡아야 하는 부양 가족이 8명이나 되었다. 북에서 데리고 온 두 동생은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되었고 내 어린애들도 6명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열심히 뛰었으나 혼자의 수입으로 8명의 교육비를 감당하기는 벅찼다 셋방살이의 고생도 치렀고 기초생활의 어려움도 겼었다. 그렇게 사는 긴 세월 동안 왜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돈이 필요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가난을 극복해야 했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지났다. 한번은 서울에 있는 기업체의 강연을 뒤로 미루고 대구로 간 일이 생겼다. 대구의 중·고등학교 선생들 600~700명을 위한 강연 책임을 위해서였다. 서울의 기업체에서는 교통편도 보아주고 사례금도 대구보다 배나 많았다. 옛날이기 때문에 대구를 기차로 왕복하면 완전히 하루를 고생으로 소비해야 한다. 그래도 다녀왔다.
돌아와서 나는 내 생활의 한 단계 높은 가치를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돈을 위해서 일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돈 보다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하는 삶의 방법과 방향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 7 -
그렇게 또 몇십 년을 보내다 80의 나이가 되었다. 다시 물어보게 되었다. 일을 왜 하는가. 일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때의 대답은 ‘일은 이웃과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그 사람들과 사회에 도움이 된다면 내가 내 돈을 써가면서라도 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만 하는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삶이 귀한 것이다. 그런 적게 받고 더 많은 것을 베풀면서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은 없을 것이다.
■ 내가 지닌 것은 모두 남에게 받은 것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모든 물건은 전부 다른 사람이 준 것이다.
나로 하여금 나 되게 했고 이렇게 살게 해 준 모든 사람들의 혜택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다. 내가 갖고 있는 지식과 학문은 모두가 스승과 다른 학자들로부터 받은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내 생명과 인생 자체가 부모, 가족과 더불어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많은 분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가르치는 일 한 가지만 하면 된다. 또 그 한 가지를 열심히 하면 사람들은 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해 온다. 얼마나 어름답고 착한 세상인가. 그 한 가지만이라도 정성껏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인생이다.
■ 오래 살면 좋을까
오래전에 보았던 한 여론조사가 기억난다. ‘오래 살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모두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다시 ‘90세가 남도록 살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18%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뜻밖의 결과였다. 왜 그랬을까.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 가운데서 90세가 넘은 이들의 실태를 본 사람들은 오래 살고 싶기는 해도 그 노인들 같이 될 것 같아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 예상 밖의 통계
90이 넘었는데도 신체와 정신 상태가 모두 건강한 사람은 많지 못하다. 또
- 8 -
건강하더라도 가족 간의 애정은 두터우나 가정과 이웃에 대해 도움을 주거나 생산적인 기여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따라서 그렇게 오래 사는 것보다는 정당한 장수가 더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했을 것 같기도 하다.
내 친구인 안병욱 교수는 춘원 이광수를 아끼고 존경했다. 춘원의 <유정>에서 문학적 눈을 뜨기 시작했고, 그를 통해서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본받아 지녔다. 그런데 춘원이 친일을 한 걸 생각하면 애석한 마음을 금할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춘원은 친일 운동을 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어야 했다.”고 말하곤 했다.
내 주변에서 보았을 때도 그렇다. 90이 넘으면 치매를 완전히 벗어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또 90이 넘으면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을 균형 있게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은 많으나 90이 넘도록 살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는 예상 밖의 통계가 나왔던 것이다.
■ 마음대로 되지는 않아도
그렇다면 얼마나 오래 사는 것이 바람직스러운가.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은 정리해볼 수가 있겠다. 나 지신이 행복하게, 그리고 이웃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 때까지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나도 고통을 겪어야 하고 이웃에게까지 부담과 어려움을 끼치면서 오래 산다는 것은 지혜로운 생각이 아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일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때까지 사는 것이 최상의 인생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장수보다는 좀 더 오래 많은 일로 봉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이 장수의 가치와 의미가 될 것이다.
■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인천에 있는 한 대학교수는 ‘행복학’ 교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교수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행복을 찾아 누릴 수 없다는 지론을 강조한다. 그 교수 자신도 누구를 만나든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고맙다. 감사하다. 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사는 인상을 풍긴다.
■ 고당 조만식 선생의 머리카락
- 9 -
고당 조만식 선생 순국 기념 강연의 내용이다.
나는 평양에서 해방을 맞았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정을 비교적 가까이서 보아왔다. 김일성이 정권을 장악하기는 했으나 국민들의 지지는 받지 못했다. 특히 서북 지역은 기독교 신도가 많은 곳이어서 공산당 정권을 용납하지 않았다. 김일성이 아무리 강조해도 조만식 선생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면 국민들은 고당의 뜻을 따르곤 했다. 그렇다고 고당을 제거할 수는 없으니까,김일성은 그를 평양 도심지에 있는 고려호텔에 연금해 대외관계를 단절 시켰다. 부인만이 허락되는 면회가 가능했을 뿐이다.
홀로 서울에 와 머무는 고당 사모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한번은 면회를 갔더니 선생님께서 앞으로 한 번만 더 오고는 다시 오지 말라고 충고했다. 뜻밖의 지시에 놀라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더니, 세상이 빨리 변하고 있지 않느냐면서 다음번에는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비통한 마음을 억제하면서 마지막 면회에 갔다. 선생은 두 가지 뜻을 전했다. “나는 어쩔 수가 없으니 밑의 애들은 자유가 없는 이 땅에 머물게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당신이 데리고 38선을 넘어가라.”는 명령에 가까운 지시였다. 그리고 이것도 가지고 가라면서 커다란 흰 봉투를 내주었다. 무엇인가 물었더니 가보면 안다고 말했다.
사모님이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당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넣은 것이었다. 이다음에 당신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빈 관으로 장례를 지낼 수는 없으니까 유품으로 남겨준 것이었다. 물론 고당의 서거가 확인된 후에 그 머리카락으로 장례절차를 밟았다.
나는 두 선배의 마음을 되새겨보면서 나 자신의부족한 마음을 깊이 되새겨 보았다. 고당은 내 중학교 선배이기도 했고, 존경하는 스승이기도 했다.
이렇게 지켜온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조국을 위해서 아무 일도 못하면서 대한민국에 대한 감사의 마음까지 저버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아무런 도움도 준 일이 없는데 이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달리고 있지 않은가. 한때는 그 도로를 만들면 안 된다고 떠들고 반대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런데 그때는 생각이 부족했다고 말하는 당시의 지도자들을 본 적이 있는가.
- 10 -
99의 도움을 대한민국으로부터 받아 누리고 있으면서 왜 더 도와주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일이 국민다운 도리인가. 라고 묻고 싶어진다.
■ 임어당 박사의 강연
1968년, 타이완의 철학자 임어당 박사가 사상계사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온 왔다.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광화문에 있던 시민회관에 모여든 청중의 수가 너무 많아서 광장 일대에 마이크 장치를 했다. 운집한 젊은이들이 길가에 까지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그 많은 젊은 청춘을 보고 계속 눈물을 닦았다.
그때 임어당 박사는 이런 얘기를 했다.
선진국가의 젊은이들은 장관이나 사장의 아들딸 같아서 부모의 혜택을 받고 태어났다. 부나 보람의 측면에서 다 올라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내려오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아시아와 한국의 여러분들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더 내려갈 곳이 없다. 위로 올라갈 길만이 주어져 있다. 그 높은 희망과 가능성이 곧 행복인 것이다. 불평과 원망스러운 마음을 버리고 감사하는 마음과 용기를 갖고 새 출발을 해주기 바란다. 는 간곡한 호소였다. 그 분의 지적은 옳았다.
■ 다 떠나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나이 들면 새로 생기는 것이 많을까, 잃어버리는 것이 더 많을까. 50이 넘으면서부터 신체적으로는 잃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건강에도 이상이 생기는 것 같고 갱년기 증세도 뚜렷해진다. 기억력이 쇠퇴하고 이성과의 욕망과 기대도 약화된다. 남는 것이 있다면 소유에 대한 욕망이다. 명예욕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다가 70대 후반부터 80대가 되면 얻어지는 것은 없고, 잃어가는 것이 현저히 많아진다. 소유해보니까 별것 아니더라는 생각도 들고, 소유해보겠다는 욕심조차 약화되고 만다. 현상을 유지해 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다는 소극적인 자세로 바뀐다. 다 잃어버리거나, 모두 떠나고 말면 어떻게 하는가. 무엇이 남는가.
- 11 -
■ 80살 제자를 만나고 오는 길에
지난달이었다.
청주에 사는 내 옛날 제자인 오군을 찾았다. 그와는 70년 전에 중앙중·고등학교 때 사제간의 인연이 맺어진 셈이다.
지난 번 서울에서 만났을 때가 4년 전이었는데 갑자기 쇠약해진 것 같았다. 여러 분야에서 왕성히 활동한 편이었는데 그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본래 착하고 욕심이 적었던 편이었는데, 지금도 아무 욕심도 없어 보였다.
내가 제자와 한 시간 나눈 대화의 내용도 극히 축소되어 있었다. 옛날에는
학문, 정치, 사회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주로 대화의 내용이 되는 것은 지난날들
의 기억들뿐이다.
그 제자는 스승의 날과 새해가 되면 전화로 인사를 계속해 오곤 했는데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나 자신도 언제 어떤 변화를 맞게 될지 모르면서…….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내가 있다’는 명제가 가장 적절한 대답이다. 93세가 되는 가을, 나는 자다가 깨어나 메모를 남기고 다시 잠들었다.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향하는 그리움과
겨레를 위하는 마음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 “나는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그것이 내 인생이었다. 나도 모든 사람이 걷는 인생의 길을 걸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함에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살았는가, 라고 물었을 때에 부끄럽지만 내 나름대로 대답이 있었다. ‘사랑하기 위해 살았다’는.
나도 가난이란 어떤 것인지를 체험했다. 나를 대학 공부시킨다고 고향의 어
- 12 -
머니께서 어떤 고생을 하셨는지 알았을 때에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여섯이나 되는 어린것들을 이끌고 남다른 고생을 했다. 모두가 석사, 박사 과정을 마치도록 뒷바라지를 했다. 탈북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였다. 남다른 고생이 있었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탈북과 실향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그 고생을 모른다. 그랬기에 다른 사람들 보다는 대한민국을 조금은 더 걱정하면서 살아야 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면 더 큰 짐도 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대한민국의 혜택을 너무 많이 받고 살았기 때문이다.
향백(向百)의 나이가 된 지금도 누군가가 저기에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따라갈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은 마음이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나도 나이 들면서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다. 90고개를 넘기면서는 나를 위해 남기고 싶은 것은 다 없어진 것 같았다. 오직 남은 것 한 가지가 있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사랑을 베풀 수 있었으면 감사하겠다는 마음뿐이다.
그 마음밖에는 남을 것이 없을 것 같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나는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나도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2. 사랑 있는 고생이 기쁨이었네
- 결혼과 가정 -
■ 결혼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다.
나와 우리 세대에만 해도 결혼은 필수조건이었다. 시골 마을에 결혼을 못한 노총각이 있든가 노처녀가 있으면 모두가 걱정해 주었다. 스무 살만 되어도 부모들은 딸이 시집을 가야 할 텐데, 라고 걱정했다. 내 누나는 17세에 약혼을 했다. 상대방 가정에서 점찍어 두었기 때문이다. 다들 적당한 나이에 혼인을 맺는다고 부러워했다. 결혼은 해야 하고, 하지 않으면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 13 -
■ 필수가 아니라 선택
생각해보면 내 아들딸들 때에만 해도 결혼은 필수조건이었던 것 같다. 딸들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면 혼기를 놓칠 것 같아 유학을 미루거나 포기하기도 했다. 나는 두 아들과 네 딸을 두었는데 모두가 결혼은 해야 하고, 늦기 전에 결혼을 해야 자녀들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딸들은 대학원을 끝내면서 결혼을 했다. 아들들은 학업을 끝내고 직장관계가 있으니까, 좀 늦게 결혼했다. 늦었지만 결혼은 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내 손주들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결혼은 필수조건이 아니고 선택조건으로 바뀌었다. 할 수도 있고 안 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남자애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여자애들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내 아들딸들의 큰 걱정거리는 손녀들의 결혼 문제다. 늦어지기도 한 데다 결혼을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을 않기 때문이다.
5,6년 전에 우리 대학 경제학과와 경영학과를 졸업한 제자들의 모임에 간 일이 있었다. 모두가 70대 전후였다. 전공과목이 그랬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모두 안정되어 있는 동기들이다.
그들이 나누는 얘기 가운데 걱정거리는 딸들이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아비 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막내딸을 결혼 시켜야 하겠는데 결혼식을 치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 제자들의 얘기도 다 비슷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 철들기 전에 시집을 보내야 하는데 대학원까지 보낸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또 유능한 딸이 더 공부하겠다는데 반대할 수도 없고, 대학원을 끝내고 직장을 갖게 되니까 결혼해서 구속받는 것보다는 독립된 자유가 더 좋다는 것이다.
■ 부부인 듯 친구인 듯
내가 대학에 있을 때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거기에서 두 교수의 경우를 보았다.
훙크라고 하는 물리학 교수는 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았기 때문에 신체가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가구공이 되는 것이 젊을 때 꿈이었는데 신체의 부자유 때문에 학자가 되었다.
- 14 -
그는 허약성으로 독신으로는 혼자 사는 것이 힘들었다. 걱정하다가 지금의 부인과 결혼했다. 부인은 남편을 돕기 위해 봉사심을 갖고 결혼을 했다.
또 S라는 철학 교수는 자유로운 학문 생활을 위해 결혼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다가 문화 사업을 하는 여자 친구가 생겼다. 그 여자는 상당히 자리 잡힌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끌어갈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일이 더 중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고 이성 친구로 지내기로 약속했다.
국내에서는 아직 그런 수가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성격의 결혼 아닌 동거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 자식들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고독감
노년기의 색다른 결혼관들도 있다.
나이 들고 자녀들이 성장했을 때 상배(상처의 높임말)를 하는 경우가 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혼자 자유로이 사는 것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부가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다가 한 쪽이 먼저 가게 되면 그 공허감과 고독감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먼저 간 사람을 뒤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또 억지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다보면 성격이나 생활에서 정상 궤도를 벗어나기도 한다.
우울증, 정서적인 고독 때문에 건강을 해치고, 80대가 되어 남편을 먼저 보낸 부인은 1,2년 안에 뒤따라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옛날에는 효성스러운 자식들이 있어 자위했으나 그 고독감은 자녀들이 해결해주지 못한다.
70대 후반이 되면 홀로 남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많아지게 된다. 그때 할머니들은 가족애도 강하고 건강만 하다면 아들딸들이 함께 살자고 요청해 온다.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 그러나 혼자 된 할아버지는 더욱 약해지고 무용지물이 된다. 경제적 여건이 되면 새어머니를 모셔 따로 살게 해보지만 문제는 있다.
■ 세상에서 가장 허무한 고독
그리스 신화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올림포스 산위에 살던 신들이 지상에 내려와 인간 사회를 살펴본 후, 인간
- 15 -
들의 우수성과 유능함이 곧 신들보다 앞설 것 같다는 걱정스러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신들이 모여 인간들이 영구히 신들 밑에 복종할 수 있도록 운명적으로 결정지을 방법이 없겠는가, 하고 연구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당시는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지지 않고 완전한 동일성이었던 인간을 반씩 쪼개서, 남자와 여자로 분리했다. 그 다음 부터는 인간들이 그 잃어버린 반쪽들을 찾아 합치기 위해 다른 발달을 할 수가 없어 신들보다 앞서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 결혼 할 자격이 없는 사람
남녀가 서로 사랑해 결혼하고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성스러운 인간적 의무이다. 완전한 삶을 위한 필수적 과정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이루어진 결혼이 이혼이 되기도 하며 가정적 불화를 초래하게 되는가. 사랑하고 결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무책임하게 결혼을 하기 때문이다. 무자격자의 가장 큰 특징은 이기적인 인생관과 가치관이다. 이기주의자는 가정과 사회에서 버림받도록 되어 있다.
이기주의자들이 세력을 갖거나 사회를 움직이게 되면 그 결과는 인간적 고통과 불행을 가중시킬 뿐이다.
이기주의자들은 사랑다운 사랑을 할 자격이 없다. 흔히 결혼했다가 파혼을 하거나 이혼을 한 사람들은 성격의 차이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격은 같을 수가 없다. 또 달라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같은 성격이라면 성장과 발전도 없고 새것을 창출해 내는 행복도 사라진다. 달라서 더 귀하고 행복한 것이다.
그런 것은 성격의 차이가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안고 있는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기주의자는 사랑을 못한다. 사랑할 자격을 스스로 포기한다. 그래서 가정과 사회에서 외면당하거나 버림을 받는다.
■ 결혼은 사랑의 출발
사랑의 나무는 조심스럽게 키워가는 것이다. 사랑은 결혼으로 완성되는 것
- 16 -
이 아니다. 결혼은 사랑의 출발이다. 사랑의 성장은 정성스러운 반성과 노력에서 이루어진다. 사랑의 나무가 자라는 데는 3가지쯤의 과정이 있을 것 같다.
그 첫째 과정은 애욕의 과정이다.
애욕은 사랑의 나무가 자라면서 애정으로 승화한다. 결혼생활을 쌓아가다 보면 사랑의 정이 얼마나 강한지를 깨닫게 된다. 애정이 애욕을 포용해서 더 넓고 높은 사랑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다가 자녀들이 태어나면 가정의 구성원이 부부에서 자녀에게까지 확대되면서 사랑의 내용도 바뀌게 된다.
일본에서는 부부가 이혼을 결정한 후에도 막내가 결혼할 때까지는 이혼을 보류하는 것을 부모의 도리라고 여긴다. 우리나라에서도 딸이 어머니에게 요청한다. 아버지와 이혼 하는 것은 좋은데 내가 시집갈 때까지는 참아주면 좋겠다고. 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혼의 목적은 자녀를 낳아서 키우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불가능했거나 불가피했다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자녀를 낳아서 키우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가정을 위한 사랑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 애욕과 애정, 그리고 인간애
내 아내는20여 년을 병중에 있었다. 긴 투병과 간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내가 큰 고생을 했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그런 상황에 부딪쳐보라. 20년이 언제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나도 23년이 4,5년 같이 짧게 느껴지곤 한다.
결혼 초 같으면 힘들었을지 모른다. 아들딸의 협조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러나 힘들지 않게 그 무거운 짐을 질 수 있었던 것은 수십 년의 애정과 가정의 사랑이 인간애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자녀들을 키워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사랑의 짐을 져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랑의 고귀함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이 있는 눈물의 값이 귀한 것이다. 나는 자신과 부부의 즐거움을 위해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들은 가정이 무엇인가를 완전히 체험하지 못하는 인생을 산다고 생각한다. 실연을 해도 사랑을 해보는 것이 귀하다. 인간적인 성장이 더 귀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을 위한 부모의 희생만큼 고귀한 사랑은 없다.
- 17 -
그러면 그 아들딸들이 왜 그렇게 소중한가. 내가 베풀어준 사랑으로 이웃과 사회에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나무에는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 열매가 자녀들이다. 그리고 그 열매는 이웃과 사회를 위해 베푸는 사랑과 봉사다. 나는 이런 인간애를 모르는 인생은 고귀한 삶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늙어서도 애욕을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정한 애욕을 느끼지 못한 부부는 사랑을 모르는 빈 그릇과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허무한 고독을 느끼는 사람은 자녀들이 없이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이라고.’
■ 재혼을 했으면 더 행복했을까?
몇 해 전 저녁이었다. 그날도 혼자서 식사를 끝내고 식당을 나서려고 했다. 문가에 서 있던 여직원 셋 중의 한 사람이 말을 건네 왔다.
왜 혼자서 식사를 하느냐는 것이다. 그날은 비가 와서 손님이 적었으나 손님이 많을 때는 혼자서 네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혼자 넓은 자리를 차지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더니, 옆에 있던 여자가 “그런 뜻이 아니고요, 사모님과 함께 오시면 좋을 텐데 혼자 오시곤 하니까 좀 쓸쓸해 보여서…….”라는 것이었다.
나는 적당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래야겠는데, 어쩌다 보니까 자꾸 늦어져서 아직 결혼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내를 보내고 혼자서 7,8년이 지난 때였다.
우산을 받쳐 들고 길가로 나섰다.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마 내 나이를 70대쯤으로 보았던 모양이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혼자 식사를 하는 것이 안쓰럽고 측은해 보였던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은 보아고 싶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한여름에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시험해보려고 솜바지 저고리를 입고 다녀보았다. 그 사람은 땀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는데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 더위를 먹고 죽었다는 얘기다.
■ 한발로 서 있는 것 같은 쓸쓸함
- 18 -
내가 84세 때 20여 년을 병중에 있던 아내가 내 곁을 떠났다. 어머니가 가셨을 때는 쌀가마니 하나를 내려놓은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슬프기는 했으나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백수를 사실 때까지 건강하셨고 자식이나 손주들에게 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병중에 있는 아내보다 먼저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렇게 되었다. 그러다가 아내마저 보내고 나니까 나머지 쌀가마니까지 내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짐은 다 내려놓았는데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지? 하는 허전함을 느꼈다.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은 “집이 비어서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었다. ‘네 처까지 가게 되면 재혼이라도 하라’는 뜻이었다. 아들이 혼자 남을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것 같다.
아내가 내 곁을 떠나고 2,3년 동안은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하면서 보냈다. 재혼 문제는 고려해 보지도 못했다.
대학 총장을 지낸 동년배의 친구는 상배를 하고 혼자 지냈다. 파출부가 와서 가사를 도왔다. 3,4년을 지내고 보니까 집안 물건들 대부분이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말았다.
두 아들 집보다는 딸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겨우 1년쯤 지난 후에 다시 전 단독주택으로 돌아왔다. 딸과 사위의 정성은 좋았으나 자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이후 아들딸들이 상의를 하다가 늦게 재혼을 추진했다.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어 여러 가지 좋은 조건으로 결혼을 했다. 그러나 4,5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고령이었기 때문이다.
음대의 H교수는 나와 동갑이기도 했고 성격이 원만한 편이었다. 후배와 제자들의 존경도 받고 있었다. 80년대 초반에 부인이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막내딸이 미혼이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살림살이에는 불편이 없었다.
그가 제자들과 미국에 연주 여행을 갔다가 한 여인을 소개 받았다. 여러 가지로 나무랄 데가 없었고 서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재혼을 결심했다. 결혼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H교수는 마음씨도 고왔지만 건강도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3년 쯤 지났을까? H교수가 다시 헤어졌다는 소문이 들렸다.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왜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늙어서 재혼한다는 것이
- 19 -
쉽지 않아, 서로 이해도 했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인생관의 차이였는지 모르겠어. 더 오래지내다가는 사랑하는 정마저 깨질 것 같아서 서로 옛날로 돌아가자고 했단다.
50년씩이나 다른 이의 아내나 남편으로 살았는데 2,3년 동안에 어떻게 그 길었던 과거를 잊거나 청산할 수가 있나. 부부로 살기보다는 친구로 지내는 편이 좋지. 결혼한 것이 잘못이지…….라는 의견이기도 했다.
■ 내 아내와 같은 여성이라면
90고개를 맞고부터 다시 한 번 아내와의 50여 년을 회상해 보았다.
내 아내는 인생의 목표가 나를 돕는데 있었다. 내가 없으면 삶의 모든 미래와 희망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애들이 있으니까 절망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은 내가 인생의 전부였다. 그리고 나를 위하는 길은, 내가 사회적으로 값있는 일과 봉사를 많이 하게 하는 것이었다. 내 아내는, 내 남편은 내가 도울 수 있어서 더 많은 일을 했다면 그것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90이 넘으면서부터는 내 아내와 같은 제2의 여성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 황혼기 이혼에 관하여
셰익스피어의 말일 것이다. “결혼을 하지 마라, 후회할 것이다. 결혼을 해 보라 그것도 후회할 것이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어느 쪽이든 후회는 있기 마련이다. 후회가 있어야 반성도 하고 성장도 있는 법이다.
결혼을 했다가 후회스러워지면, 지금의 결혼생활보다 더 좋은 미래가 있을까 싶어 선택하는 것이 이혼이다. 따라서 이혼을 한 후에는 두 갈레의 길이 남는다. 독신으로 지내든가 다시 새로운 결혼을 하든가이다.
내가 주변에서 본, 이혼할 수밖에 없어 이혼한 경우가 있다. 그들은 상대방의 외모와 부수적 조건 때문에 결혼한 사람들이다.
■ 이혼을 예상한 결혼
- 20 -
내가 아는 한 주부는 치과의사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대학 때 만난 친구는 조선왕조 때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재산 관리가 그 남편의 직업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물려받은 재산은 점점 축소되고 하는 일은 없이 지냈다. 70세가 지나고 보니까 큰 수입은 아니나 부인의 노력은 보람이 있는데, 남편은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노년기로 전락해 버렸다.
상대방의 인간성이나 인격, 장래성보다는 집안의 명예, 갖고 있는 감투, 누구누구의 아들과 딸, 이런 조건들을 보고 결혼했다가 후회하거나 늦은 이혼을 택하는 이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성격이나 양가의 전통의 차이는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으나 편견이 심한 종교적 가치 때문에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인생관과 가치관의 극심한 차이는 부부간의 사랑을 방해하고 가정의 불행을 초래할 수가 있다.
또 흔히 연예인들은 이혼율이 높다는 얘기를 한다. 통계로 보아도 교육계 사람들 보다는 연예계 남녀들의 이혼율이 높은 것은 다른 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른 영역의 사람들보다 훨씬 감성적이며 정서적이다. 그래서 예술인이 된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감정적으로 해결하게 되어 있다. 자연히 지성적이거나 이성적 기능이 약화되기 쉽다.
사람은 100의 마음의 영역을 지성, 감성, 의지가 3등분해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 과학자나 철학자 : 지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 사업하는 사람 : 의지적인 면이 중요하다.
- 연예 분야 : 감정이 강하고, 타협과 해결의 방법이 다양하지 못하다.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예술인들과 연예인들은 그런 장점과 약점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런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미리부터 그런 어려움을 예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먼저 위해주는 것이 사랑
- 21 -
우리가 함께 걱정해보고 싶은 문제가 있다. 흔히 말하는 황혼기의 이혼에 관해서이다. 참고 참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선택이 황혼기 이혼이다.
황혼기의 이혼은 가정적 불행이기도 하나 개인의 인생도 실패했다고 보아 잘못이 아닐 것이다. 차라리 결혼보다도 자신을 위한 취미생활이나 개성을 살려갔다면 보람 있는 인생을 펼쳐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기 때문에 자기 소질과 재능을 발휘하지도 못했고 가정적으로도 행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디에 잘못이 있었는가.
대개의 경우 그런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상대방으로부터 받기만 하지 나누어줌이 무엇인지 모르는 성격이다.
내 부친은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한 옛날 사람이다. 그러나 어린 나에게 “사람이 자신과 가정의 걱정만 하면서 살게 되면 그 사람은 가정의 가장이나 어른만큼밖에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항상 내 직장을 위하고 이웃을 걱정해주는 사람은 직장과 지역사회의 지도자로 성공할 수가 있다. 같은 사람이라도 언제나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면서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동안에 국가와 민족의 지도자로 자랄 수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런 열린 마음과 섬기려는 뜻이 있는 사람은 가정의 더 큰 의무와 책임을 깨닫기 때문에 가정의 고통과 불행을 극복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자녀들을 진심으로 위해주는 부부는 그 자녀들에 대한 의무와 책임 때문에도 남편과 아내의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는 것이 인생이다.
■ 열심히 싸우는 부부는 이혼하지 않는다
S중·고등학교의 교장과 이사장을 지낸 김 장로는 나와 가장 오랜 세월을 보낸 친구이다. 열네 살 때이던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그가 92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만나곤 했으니까 78년간의 친구인 셈이다.
김 장로가 살았을 때의 한 이야기다.
아침이 되면 새벽기도회에 나가는 것이 일과였는데 그날은 쏟아지는 소나기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교회가기를 포기하고 계속 잠을 자고 있었다. 한 살 아래인 부인이 혼자서 일어나 기도를 드리는 것을 누워서도 듣게 되었다.
“……하느님의 뜻이 허락되시면 우리 장로를 먼저 하늘나라로 인도하신 후 저를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22 -
조반을 같이 먹다가 김 장로가 “그래 나 먼저 보내고 혼자 남으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오? 애들하고 즐겁게 살 자신이 있나……. 새 남자하고 연애를 할 나이도 아니고…….”라고 물었더니, “기도하는 것을 들었소?”라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가정을 살펴보았는데 80이 넘어서 혼자 남는 할아버지가 제일 가엾어 보입디다.
그래서 다른 것으로 도와주지는 못해도 영감을 먼저 보내고 혼자 남았다가 뒤따라가는 것이 제일 좋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 심정을 알고 있는 김 장로는 “고마워”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 장로가 세상을 떠나 내가 문상을 갔다.
부인을 찾아가 인사를 나누었다. 결혼할 때부터 잘 아는 사이였고 내 아내와도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섭섭하시지요?”라고 물었다. “섭섭이야 하지요. 그래도 먼저 보내고 나니까 내가 할 일을 다 한 것 같아 고마운 마음도 있어요. 혼자 두고 내가 먼저 떠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했어요. 김 교수님 사모님은 먼저 떠나시면서 교수님께 참 미안했을 거예요. 끝까지 도와드리지 못해서…….”라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그래, 보내는 내 마음도 무거웠지만 나를 혼자 남겨두고 가는 아내의 마음은 더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 ‘그저 내래 잘못했지요’
내 친구 김태길 선생은 89세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다리의 불편은 있었어도 건강했다. 안병욱 선생은 우리 나이로 93세에 작고했다. 부인은 대단히 건강해서 잘 보살펴 주었다. 한우근 선생은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따님처럼 보일 정도로 건강한 모습으로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정진경 목사도 갑자기 작고했기 때문에 무척 건강했다. 정 목사의 사모도 건강했다. 정목사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90세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런 축복을 받지는 못했다. 아내가 20여 년 병중에 있다가 먼저 갔다. 13년 전이다. 그래서 친구들에 비하면 박복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90세가 넘을 때까지 부부가 건강하게 해로하는 것을 보면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을 갖는다.
- 23 -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는 부부싸움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었을 때는 모르겠으나 60이 넘어서는 안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비결은 간단했다. 한 장로의 얘기다.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서면서 목사님은 항상 사모님의 눈치와 안색을 먼저 살펴본다. 좀 이상하다 싶으면, “그저 내래 잘못했지요…….”라면서 인사를 대신한다. 사모님이 “내가 뭐라고 했소?”라고 말하면 “그러니까 내래 잘못했다는 거지요…….”라면서 또 사과한다. 그러면 사모님은 말없이 지나간다는 얘기였다.
부부싸움의 양상도 다양하다. 한 파출부 아주머니의 얘기다.
부부가 모두 박사이다. 남편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고 부인은 대학의 교수이다. 둘이 싸움을 하게 되면 무조건 대화를 중단한다. 꼭 해야 할 얘기가 있으면, 필요한 사람이 거실 꽃병 밑에 쪽지를 넣고 나간다. 그것을 본 남편이나 아내는 대답을 써서 그 자리에 놓아둔다. 어떤 때는 일주일이 넘도록 말을 안 하는 때도 있다. 언성을 높여 싸우지를 않으니까, 남들이 보면 다정한 부부로 착각하고 부러워한다.
그러다가도 어떤 가정에 초대를 받으면 같은 차를 타고 초대한 거정 문 앞에까지 간다. 물론 아무 말도 없이……. 그러나 차에서 내리면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웃으면서 집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다정하게 접대에 응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그렇게 다정한 부부일수가 없다. 파티가 끝나고 차 안에 들어와서부터는 또 남인 듯이 말이 없다. 그렇게 싸우기를 오래 계속한다는 것이다.
■ 더 높은 차원의 사랑
한 여성이 미스코리아로 당선되었다. 그 당선을 전후해서 서울대 의대의 내과 의사를 만나곤 했다. 여자의 부모는 A의사의 인품과 장래를 보아 딸에게 결혼할 것을 권했다. 여자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결혼을 했다. 그 A 내과 의사는 고등학교 때 내 제자였다.
그 여자는 결혼 후부터 초라한 시부모의 모습이 불만이었다. 국립대학의 교수 본봉은 얼마 되지 못하던 때였다. 여자는 자신의 친구들은 더 좋은 조건
- 24 -
에 결혼하는데 자신만이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 불만이 쌓여 남편에 대한 존경심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내 제자인 A교수도 고민에 빠졌다. 차라리 미스코리아가 아닌 평범하고 성실한 여자와 결혼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는 후회심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A교수는 또 교수로서의 꿈이 있었다. 유능한 제자여서 나도 후일에 사회에 도움을 주는 의사가 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아내 때문에 인생을 포기할 수도 없고 아내의 불만스러운 마음을 채워줄 수도 없다고 생각한 A의사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장기간 아프리카에 의료봉사를 떠나기로 했다. 가 있는 동안에 아내의 선택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혼까지를 전제로 삼은 것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첫 임기가 끝나갈 무렵에 아내는 아프리카로 남편을 만나러 갔다. 남편은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반기면서도 아내의 선택을 더 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가 임기가 끝나면 서울로 가냐고 물었다. A교수는 연구 프로젝트가 끝나지 못했기 때문에 좀 더 있고 싶다고 말했다. 아내는 말없이 한 달 더 아프리카에 머물렀다. 그 한 달 동안에 자신과 남편의 장래를 다시 구상해 보았다. 남편이 이전보다 더욱 존경스러워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서울의 주변 많은 남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상한 꿈이 있음을 보고 느꼈다. 자신은 어떤가. 미스코리아로 당선되었다는 미모 외애 갖춘 것이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내 남편은 나보다 몇 배나 인간다운 보배스러움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돈이나 유명함으로 따질 수 없는 존경심이 움트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 조금 더 머물면서 발견한 남편의 인간다움과, 자기에 대한 욕심과 이용심이 없는 사랑에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남편을 만나보고 서울로 돌아올 생각이었으나 함께 더 머물면서 자기의 꿈은 꿈이 아니고 허상이었음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더 높은 뜻을 찾아 새로운 가정을 꾸려나가기로 했다. 어느 사이엔가 아내의 얼굴에서는 화장기가 사라졌고, 화려한 옷이 사치스럽게 보여 입지 않고 남편의 일을 도왔다. 한국서 남편과 같이 와 봉사하는 간호사들이
- 25 -
자기보다 몇 배나 고상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부러워졌다.
두 번째 임기가 끝나면서 A교수는 미국 프로비던스에 있는 대학병원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존경받는 의사가 되었다.
모든 남녀는 인생의 끝이 찾아오기 전에 후회 없는 삶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사랑이 있는 고생이다. 사랑이 없는 고생은 고통의 짐이지만, 사랑이 있는 고생은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 인생이다.
■ 무엇이 여성을 아름답게 하는가
아들딸을 낳아 키워본 부모들은 당연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남아와 여아의 차이를 발견한다.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내아이들은 힘을 과시한다. 그 대신 딸애들은 아름다움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엄마, 나 예뻐?” 라든지 “엄마, 내가 더 예뻐, 언니가 더 예뻐?”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평생 뒤따른다.
서울 남산 입구에 여성회관이 건립되었을 때 정기 강연회에 초청을 받아 간 적이 있었다. 강연회를 주관하는 분은 교장직을 끝내고 이사장으로 있는 황신덕 여사였다 70세를 넘긴 연세였을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황선생의 선배인 할머니가 들어왔다. 그러니까 80대 였을 것이다.
황 선생이 자리에 안내한 뒤 “언니,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더 예뻐졌다.”고 인사를 했다. 그 선배는 “그래, 나는 모르고 있는데…….”라면서 반기는 것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여자들은 어렸을 때나 할머니가 되었을 때나 아름다움이 최고의 관심사인 것 같았다.
내 모친도 90대 중반에도 오래간만에 고향 사람이 찾아와 “얼굴색이 더 좋아졌다.”고 말하면 좋아하셨다.
■ 결혼하기 전에 고려해야 할 것들
주말에 대학원 제자가 찾아왔다. 다음 토요일에 결혼을 한다고 그러면서 함께 인사를 드리려고 왔는데 여자 친구도 곧 올 것이라고 했다.
“사귀던 여자 친구가 따로 있었던 것 같은데 도중에 어떻게 상대가 바뀌었나?”라고 물었다.
- 26 -
“처음에는 얼굴이 예쁜 아가씨에게 관심이 깊었는데 막상 결혼을 앞두게 되니까 평생을 함께 할 여자인데 미모보다는 성격이나 인생관도 살피게 되고 나와 삶의 목표가 비슷한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던데요……?”라면서 선택의 표준이 달라졌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그에게 말해 주었다. “결혼은 연애의 종말이 아니고 더 높은 사랑의 출발이니까, 무엇을 본다기보다는 내 아내의 어떤 면을 키워주고 어떻게 위하는 마음을 가질까 하는 문제가 더 중요 할텐데, 그런 문제라면 내가 한 가지 충고해줄게. 아내로 하여금 계속해서 아름다운 감정을 유지하고 키워가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여성들은 감정이 아름다우면 생활 자체가 아름다워지고 가족과 주변의 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아름다운 행복을 더해줄 수 있을걸, 그리고 무엇보다 감정이 아름다운 여성은 나이와 상관없이 늙어서도 여성미를 유지하는 법이지…….”
여성들은 감정이 아름다우면 목소리도 표정도 젊어집니다. 반대로 감정이 아름답지 못하면 늙어지고 삶 자체가 윤택을 잃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의 경우를 찾아보면 쉽게 발견할 것입니다. 의사들도 같은 얘기를 합니다. 여성들은 정서적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우울하고 답답한 시간이 오래되면 곧 그 표정이 어두워지고 안색과 감정까지 흐려집니다. 그러나 항상 아름다운 감정을 갖고 지내게 되면 외모와 표정도 아름답고 젊어진다고 말합니다.
■ 소 교수의 안색이 밝아보였던 이유
50대 중반쯤일 때였다. 여럿이 모여 저녁을 하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보니까 식대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한 친구가 얼마 안 되는 밥값을 각자가 부담하는 것보다 누구 한 사람에게 덮어씌우자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꺼낸 조건이 얼굴색이 가장 좋은 사람을 고르자고 누군가 제안했다. 얼굴은 표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내 왼쪽에 자리하고 있던 소 교수의 안색이 눈이 띌 정도로 윤기가 있고 좋아 보였다. 의과대한 교수였으니까 지갑이 두둑해 보이기도 했다.
나도 동감이었다. 그래서 더 찾아볼 필요가 없으니까 소 교수가 저녁값을 내야겠다고 말했다. 내 얘기를 들은 소 교수가 “이상하다. 내 얼굴색이 그렇게 좋아졌나.” 하더니 “아! 이유가 있었구나.” 라는 것이었다.
-27 -
내가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라고 물었다. 소 교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한 달 동안 국제회의가 있어 마닐라에 다녀왔는데, 한 달 동안이나 내 마누라 바가지 긁는 소리를 듣지 않았으니까 얼굴색이 좋아졌는가 보다.”라고 말해 모두 웃었다. 생각해 보면 이유의 객관성이 있다.
■ 아름다운 감정은 어디서 오는가
아름다운 감정은 어디서 오는가.
어느 정도는 타고난 성품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머니를 보고 딸의 성품을 따져보기도 한다. 유전적으로 주어진 성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아름다운 감정을 유지하고 키워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과 그런 생각을 포기한 사람의 거리는 상당히 큰 것이다. 몇 십 년이 흐르면 현격한 차이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런데 여성들이면 누구나 아름다운 감정을 갖게 하는 길이 있다. 쉽게 말하면, 사랑이 있는 마음은 아름다운 감정을 만들어준다. 여성들에게서 사랑의 고귀성을 배제한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그 사랑의 척도가 여성들의 인생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여성들은 사랑의 폭을 넓혀야 하며 사랑의 아름다운 체험을 해봐야 한다. 옛날부터 주어지는 여성다운 아름다움, 즉 모성애가 바로 그것이다.
시인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표현은 고귀한 뜻을 품고 있다.
■ 뜻대로 안 되는 자녀교육
나는 두 아들과 네 딸을 키웠다. 말 않는 장학방침이 있었다. 평범하게 자라서 주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해라. 가능하다면 주어진 분야의 지도자가 되어라. 그 이상은 원하지도 않았고 강요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입학시험 때도 부담감이나 억압적인 요청은 하지 않았다. 그저 최선을 다하라고만 했다.
■ 루소의 교육사상
- 28 -
나는 대학에 있을 때 장 자크 루소의 교육사상을 좋아했다. 그는 자녀 교육에 대해 방임은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성장을 중요시 했다.
어린애를 수재나 영재로 만들려고 간섭하고 고생시키는 것은 볏모를 잡아 빼서 빨리 자라게 하는 것같이 위험하다. 강아지를 키워도 그렇다. 먹을 것을 적당히 조절해 주고 함께 있어주면 된다. 그 이상의 간섭과 강요는 금물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교육은 어머니들의 욕심과 교육당국의 간섭 때문에 후퇴하고 있다. 부모는 욕심보다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보다 귀한 것은 자녀들의 일생을 위한 사랑이다.
교육은 지식 전달로 끝나는 성적 올리기의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좋은 학생을 키운다는 것은 낮은 위치에 있는 학생을 높은 위치로 올려주도록 돕는 것이다. 우수한 학생을 평범한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애들은 학원에 다닌 일은 없었다. 예능 분야의 두 딸이 개인 지도를 받은 일은 있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모두 대학 과정을 밟길 원했는데, 사회 어떤 분야에서 일하든지 지식과 인간적 기초교육을 터득하도록 돕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내 손자들이 받는 교육 시스템보다는 자유로운 선진국 고등학교와 비슷한 교육을 받길 원했다.
그렇다고 애들 모두가 우수한 성적으로 일류 대학에 간 것도 아니다. 낮은 성적으로 입학했더라도 대학에 가서는 최선을 다하는 공부벌레가 되기를 원했다. 고등학교까지는 기억력에 호소하는 기초지식을 습득하면 되나 대학에 와서는 사고력을 키워야 하고 사고력은 배워서 깨닫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노력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자녀들도 중·고등학교 성적은 높지 않았으나 대학에 와서는 성적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학과목에서 사고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여섯 자녀 모두가 석사 과정까지는 끝냈다. 그 이상의 박사과정은 학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외국에서 밟도록 했다. 한 아들은 독일에서 다른 아들과 딸은 미국에서, 그 셋은 다 교수가 되었다.
■ 재산가와 명문가와는 결혼 꺼려
애들의 결혼은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 두었다. 두 가지는 고려의 대상으로
- 29 -
삼았다. 재산이 많은 가정과 명문가로 꼽히는 가정은 피하기를 권했다. 재산의 노예가 되거나 가문적 행세 때문에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지 힘들 것 같았다.
넷은 가난한 가정을 택한 셈이고 둘은 중산층 가정으로 간 셈이 되었다. 한 딸은 너무 가난한 시집을 갔다. 내 아내는 아쉬워했으나 나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라는 법은 없다면서 모르는 체했다. 지금은 여섯이 모두 비슷하게 살고 있다.
■ 인생은 50전엔 평가해선 안 돼
그러니까 자녀 교육에서는 크게 성공은 못했으나 실패한 셈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모두가 평범하게 자라 최선을 다하고 맡은 일에서는 전문가나 지도자가 되라는 교육관을 갖고 있다. 인생은 50이 되기 전에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자녀들을 키울 때도 이 애들이 50쯤 되면 어떤 인간으로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성공보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행복하며 유명해지기 보다는 사회에 기여하는 인생이 더 귀하다고 믿는다. 나 자신도 그렇게 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나는 손주들의 교육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애들이 나보다 더 좋은 교육을 할 것으로 믿는다. 요청을 받으면 상담하는 정도이다.
3. 운명도 사랑도 아닌 그 무엇
- 우정과 종교 -
■ 나에게 우정은 섭리였던가
<운명도 허무도 아니라는 이야기>라는 제목의 내 책이 있다.
4·19 혁명이 있은 후 나는 대학에서 민주화 투쟁의 한 모퉁이에서 여러 가지 체험을 했다. 그러다가 뜻하지 못했던 행운을 얻어 1년간 미국에서 연구 생활에 참여하게 되었고, 세계일주 여행을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썼던 글을 모은 책이다.
- 30 -
인생의 목적과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철학자들은 두 가지 길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 하나는 인생은 운명적인 존재라는 결론이다. 인도의 업보사상이 그랬고 동양인들이 운명론도 그랬다. 인과 법칙을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고 자랑하던 그리스 철학자들도 운명론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러한 운명적인 존재인 인간도 영원 앞에 서게 되면 결국은 허무로 돌아가게 된다. 수백광년의 시간 속에서 100세 시대를 떠들어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결국 유(有)는 무(無)로 화하고 존재는 비존재인 허무로 돌아가고 만다. 존재의 무의미를 우리는 허무라고 말한다.
긴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둘 다 아닌 또 하나가 있었던 것 같다. ‘섭리’였던 것이다.
■ 철학계의 삼총사
나는 연세대로 일터를 옮겼다.
그 당시에는 지성사회를 대표하는 월간지 <사상계>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한 번은 청탁을 받고 썼는지 내가 써서 원고를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현대의 본질’이라는 원고를 기고한 일이 있었다. 사상계 편집위원회에서는 그 글을 월간지 권두논문으로 실었다. 그때 편집장을 맡고 있던 이가 안병욱 교수였다. 아마 안 선생이 나에게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나도 그때부터 안 선생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몇 해 후에 안 선생이 연세대로 부임해 왔다. 사상계의 장준하 사장이 연세대 백낙준 총장에게 추천하지 않았나 싶은 추측을 했다 그렇게 부임해 왔다가 곧 대학을 떠났다. 숭실대학으로 적을 옮겼다. 그러면서 서로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1년 여름에 미국에 교환교수로 갈 때부터는 더 없이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우스운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소심한 편이기 때문에 혼자 해외로 떠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안 교수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마침 좋은 기회가 마련되어 함께 가게 되었다.
다음해 여름에는 나와 안 선생, 그리고 서울대학의 한우근 교수 셋이서 세
- 31 -
계 일주 여행을 떠났다. 긴 여행 기간 동안에 우리는 잊을 수 없는 우정을 쌓아갔다.
서울대학 철학과 김태길 교수는 약간 늦게 미국서 학위를 끝내고 귀국했다. 내가 연세대 철학과 과장으로 있을 때 연세대로 부임해 왔다. 같은 대학에 있었기 때문에 친분과 우정을 굳혀가게 되었다. 몇 해 뒤 서울대학으로 간 후에도 친분과 우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되어서 서울대학의 김태길 교수와, 숭실대학의 안병욱 교수, 그리고 연세대학의 나는 철학계와 더불어 사회적으로도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철학계의 삼총사’라는 말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김태길 고수는 2,3년 늦게 학계와 사회의 관심은 끌기 시작했으나, 오랫동안 좋은 업적을 남겨 주었다.
■ 사랑이 있는 경쟁
우리 세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다른 면이 있다. 김태길 선생은 학구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반면 사회적 활동은 좀 좁은 편이다. 반면 안 선생은 학구적이 영역보다는 사회활동의 업적이 큰 셈이다. 나는 그 중간쯤에 해당할 것 같다.
안 선생과 나는 문장도 좋고 강연도 인기가 높은 편이다. 그에 비라면 김태길 선생은 문장은 뛰어나지만 강연에는 능숙한 편이 아니었다. 안 선생은 일찍부터 서예를 좋아했기 때문에 달필인 편이다. 나는 타고난 재간이 없어 졸필이라기보다는 악필에 가깝다.
우리들 셋은 모두가 같은 마음과 생각이었고, 세 사람의 우정은 축복받은 관계였다. 흔히 셋이 같은 철학계에서 비슷한 활동들을 하기 때문에 라이벌 의식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이기적인 경쟁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선의의 경쟁은 성장과 발전을 초래하나, 사랑이 있는 경쟁은 행복을 더해준다고 믿는다. 우리의 경쟁은 사랑이 있는 경쟁이었다.
우리 셋은 반세기 동안 함께 일했다. 나는 항상 두 분이 오래 건강해서 많은 일을 하게 해달라는 마음을 가지고 지냈다. 두 친구가 다 80대 말까지 많은 일을 했다.
- 32-
김태길 선생이 먼저 89세를 일기로 , 안 선생도 93세로 나만 남기고 떠났다. 두 친구를 보내고 난 후에는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지 않았다. 한층 더 고독해졌다. 이제는 남은 친구가 없어졌다.
■ 내 친구 안병욱
1970년쯤으로 기억한다.
경부선 열차가 천안역에 정차했을 때 한 젊은 여성이 내 옆자리로 옮겨 앉으면서 옆에 앉아도 괜찮겠느냐고 인사를 했다. 물론 그러세요, 라고 반기는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는 “저는 교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쓰신 책도 읽었고요. 방송도 듣곤 했으니까요…….”라면서 어색함이 없이 말을 꺼냈다.
그 여자 승객은 “교수님 고향은 북한이고요. 어린 시절은 시골에서 보내시다가 평양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셨지요?”
“그 다음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셨고요. 해방 후에는 월남하셔서 잠시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다가 대학의 교수가 되셨지요. 책도 여러 권 쓰시고 방송과 강연도 많이 하셨지요?”라면서 내 과거를 상세히 아는 것 같았다.
내가 “나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아 기분이 좋은데요?”라면서 웃었더니 “사진으로만 보다가 직접 옆에서 뵈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미남이십니다.”라면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아! 참, 제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성함은 안병욱 선생님이시고요…….”라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멋쩍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할 수 없이 서울역에 도착할 때까지는 안 교수 행세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아가씨는 역 앞 광장에서 헤어지면서 오른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사라져 갔다.
며칠 후에 안 선생을 만나 그 얘기를 했더니, 안 선생은 “나도 때때로 김 교수와 착각하는 이가 있어서 당황하는 경우가 있어.”라면서 웃었다. 그러더니 “그러면 그 아가씨에게 내 전화번호라도 알려주지 그랬어.”라며 자기가 직접 만났어야 했는데 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 33 -
■ 쌍둥이 이력
안선생과 나는 공통점이 너무 많다. 내 이력과 경력을 고유 명칭만 빼고 얘기하면 누구나 동일한 사람으로 볼 정도이다. 생년은 같은 해이면서 내가 3개월 먼저 태어난 셈이다. 태어난 곳도, 우리 둘에게 큰 영향을 남겨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고향에서 비슷하게 가까운 셈이다.
무엇보다도 1961년과 62년에 같이 미국에 가 머물다가 함께 유럽과 동남아를 거쳐 귀국하는 여행을 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 둘은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우정을 쌓아갔다. 나는 계속 서울 서쪽에 살았고 안 선생은 동쪽에 살면서 새의 두 날개와 같은 위상을 차지하면서 지냈다. 같이 강연을 다니는 일이 수없이 많았다.
한 번은 제주도에 갔을 때였다. 강연하기로 되어 있는 강당 옆 대기실로 들어가 앉았더니 누군가가 먼저 강연을 하고 있었다. 들어 보았다. 내가 할 강연과 같은 성격의 강연이었다. 누군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목소리를 식별하고서야 안 선생인줄 알았다. 아마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내가 강연하는 것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 꿈에도 갈 수 없는 고향
우리 두 사람은 같은 때에 탈북한 실향민이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가 되면 실향민끼리 이산의 아픔을 서로 잘 이해는 하면서도, “평안남도 도청사무실에서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라는 연락이 없었어요?”라고 물으면 “우리보다 절박하게 상봉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라면서 얘기를 끊는다. 우리가 양보해야지, 하는 생각에서이다. 안 선생도 그랬을 것이다.
미국에 갔다가 집안 동생인 달홍이가 평양에 다녀온 소식을 들었다. 오래 전 일이다. 평양 보통강호텔에서 사흘을 기다렸더니 달홍의 어머니가 셋째 동생과 같이 찾아왔다. 부친이 인쇄소를 해 잘 살았기 때문에 시골로 쫓겨나 살고 있었다. 미국서 가족이 왔다고 해서 가까운 도시의 단칸집으로 이사를 시켜주고 도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달홍의 어머니가 아무도 없을 때 달홍에게 “네 막냇동생은 빨갱이가 다 됐
- 34 -
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듣기만 해라. 아래 동생과는 무슨 말이든지 해라. 나하고 통하고 있으니까.”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시골에서 1주간을 보내고 순안공항까지 왔다. 가족들이 배웅을 하는데 막냇동생은 “형님도 빨리 살기 좋은 우리 인민공화국으로 오세요.”라고 얘기했다. 큰 동생은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는 표정이, ‘형님, 그때 날 데리고 가지 왜 혼자 떠났어요.’라고 원망하는 것 같아 비행기가 떠난 후에야 눈물이 났다는 얘기였다. 달홍이는 그 뒤에도 두 번 더 북한에 다녀왔다.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자란 고향에서 옛날에 같이 살던 사람들은 지금은 모두 북한 전역으로 흩어져 살고 한 가정도 남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산야만 남고, 그 일대는 어린이대공원으로 되어 주민들이 거주하는 곳은 사라진 것이었다.
■ 그래도 고향은 고향이다.
솔직히 말하면 태어난 고향은 내가 갈 곳은 못된다. 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이제 내가 갈 곳은 잃어버린 과거의 공간인 고향이 아니다. 영구히 잠들어야 하는 미래의 고향인 공간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 통일이 된다면 몰라도. 안선생도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병으로 칩거하기 전에 한 번은 아들들 앞에서, "내게 남은 한 가지 소망은 고향에 가 부모님 산소에 큰 절 드리고 마음껏 우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 마음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산소에 가서 용서를 빌어야 하겠는데 역사는 내 소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다.
■ 강원도 양구 '철학의 집'
이렇게 지내는 동안에 우리 둘은 90고개를 넘겼다. 점점 고향은 멀어지고 갈 곳은 없어지고 있을 때였다.
강원도 양구의 뜻있는 분들이 안 선생과 나에게 제2의 고향을 장만해주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양구는 휴전선 밑이니까 북한과는 가장 가까운 곳이다. 그리고 우리 국토 정중앙에 해당하는 곳이다. 나와 안 선생은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안 선생은 생전에 한 번은 양구에 가보고 싶어 했다. 우리 둘을 위한 '철학의 집' 기념과 개관식 때였다. 그러나 병중이어서 그 뜻은 무산
- 35 -
되고 말았다. 그래도 유가족들이 용머리공원 기념관 옆에 안 선생의 영원한 안식처를 준비해두었다. 2013년 10월 7일 새벽 안 선생은 우리 곁을 떠났다. 나는 슬프지는 않은 것 같은데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나 혼자 남았다는 고독감에서 오는 외로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렇게도 사랑하던 조국의 통일을 못 보고 가는 서러움이었을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약속했다.
나만이라도 통일을 보게 되면 제일 먼저 와서 그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 현대인에게도 종교는 필요한가
프랑스의 오귀스트 콩트 (1798 - 1857)는 사회과학의 개척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인류 역사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옛날에는 종교가 사상계의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적 철학사유가 증대되면서 정신계의 큰 부분을 철학이 계승했다. 그러다가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종교는 설 자리를 상실해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철학자 막스 셀러(1874 - 1928)는 인간학의 개척자로, 인간은 종교적 신앙, 철학적 사유, 과학적 영역을 동시에 갖고 있으나 시대와 사회적 여건에 따라 비중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두 철학자의 주장이 다 정당할 것이다. 종교의 영역이 좁아졌다고 해서 종교적 신앙이 사라진 것도 아니며 인간적 실존의 근거로서의 종교적 기대가 근절될 수도 없겠기 때문이다.
■ 무한의 강가 이편에 서서 저편을 보고
어떤 인생의 후반기를 맞이한 사람이 ‘무한’이라고 불러서 좋은 넓은 강가에 서서 강 저편을 응시하고 있다. 그때 한 사람이 옆에 다가외서 “나는 당신이 젊었을 때 이 강가에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어디서 헤메다가 다시 이곳을 왔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을 받은 사람이 말했다. “시간과 더불어 살면서 어떤 영원한 것이 있는가 싶어 여러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학문과 예술이 있는 곳도 갔었고 정치나 경제적 이념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 36 -
어디에고 ‘영원’은 없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혹시 이 강을 건너 저 피안에는 ‘영원’이 있을 까 싶어 다시 이곳까지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옆의 사람이 “강 저편에는 ‘영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 강을 혼자 건널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건너간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강가에 있던 사람이 다시 물었다.
“강 저편에는 ‘영원’을 확증할 무엇이 있습니까?”
“거기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갈 수 있는 길과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강 이편에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강 저편으로 가겠다고 결단을 내린다면 내가 안내해 드리지요.”
“그러면 나를 찾아온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그리스도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 선택과 결단은 그런 것이다.
나는 대학에 있을 때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공부했다. 참 힘들게 노력해서 얻은 칸트의 학설이다. 그러나 예수는 아주 쉽게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원하는 것같이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모든 사람의 대인관계의 교훈이다.
그래서 어떤 물리학자의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적 물리학자가 어떤 가설을 예고하고 세월이 지나면 수학자들이 그것을 입증할 수 있게 된다. 그 원리를 실험을 통해 확증하면 우리 모두가 받아들인다. 그것처럼, 종교적 천재라고 볼 수 있는 인생의 스승이 가장 영구한 진리를 가르쳤다면 그것을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서 구현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분들의 가르침이 몇백 년 또는 수천 년을 두고 우리들의 인생관이 되는 것은 역사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자의 교훈을 2500년 동안 이어오기도 했고 석가의 가르침에 모든 삶의 지혜를 모으기도 한다.
크리스천은 예수의 교훈보다 앞서는 가치관과 인생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 운명도 허무도 아닌
- 37 -
내가 대학생일 때 읽었던 한 독일의 철학자는 “참 자유로운 사람을 한 번 보았으면 좋겠다.”고 술회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역사 속에서는 예수와 그의 후세의 제자였던 성 프란체스코가 참 자유를 누렸던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다.
운명으로부터의 자유는 그렇게 소중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젊었을 때는 모두가 자유를 외치다가도 늙으면 모든 것이 운명이었다고 인정하게 된다.”고 말한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운명론자가 된다는 뜻이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니체는 “잡스러운 범인들의 삶을 버리고 초인이 돼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 초인은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운명애의 철인이라고 말했다.
가장 아이큐가 높은 사람은 괴테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괴테는 <파우스트>의 주인공과 같이 회의주의자였다. 회의주의자의 결론은 허무주의로 귀착된다.
그 둘, 즉 운명과 허무가 전부라면 인간과 삶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면 ‘제3의 삶의 길은 없는가’ 라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보면 운명론도 허무주의도 아니다. 또 다른 차원의 인생관이 있다. 그것이 섭리이다.
신약에서 예수를 제외한 주인공은 베드로와 바울이다. 그들은 섭리의 주인공 들이다. 그들의 역사적 업적은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신앙인들이 같은 은총의 체험인 섭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교회에서는 그것을 성령의 역할이라고 본다. 만일 우리가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체험한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삶의 질서인 은총의 질서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2016. 11. 5
* 다음에 <백년을 사랑보니> 후반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38 -
백년을 살아보니(2)
■ 김형석 지음
■ 흑과 백 사이의 수많은 회색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가장 어른다운 대접을 받은 때가 언제쯤일까. 70세를 넘기면서부터 몇 해 동안이었던 것 같다. 80이 지나고 나니까, 어른보다는 늙은이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강연을 위해 지방에 가면 제일 많은 질문을 받는 시기가 그때쯤이다. 아마 그 나이가 되면 젊은 교수들보다 좀 더 성숙해졌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겼는지 모른다.
한번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은 우리 민족성 가운데 가장 시급하게 고쳐야 할 단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시급한 것은 절대주의적 사고방식을 뒷받침하는 흑백논리일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학자들은 조선왕조 500년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온 것은 유학인데 유학 중에서도 주자학 같은 형식논리를 추구하는 동안에 흑백논리가 민족적 전통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 이론으로만 가능한 색깔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물리학자들은 색채팔면체를 얘기하면서 흑과 백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색에는 네 가지 원색이 있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이다. 그 네 원색이 밝은 방향으로 삼각형의 한 방향과 같이 올라가면 끝의 정점에 해당하는 것이 흰색이다. 그와 반대로 네 원색이 어두운 방향으로 내려와 모든 색이 다 사라진 정점에 이르면 흑색이 된다.”
- 1 -
이때의 백과 흑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나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모든 색이 다 채워진 원점도 없고 다 사라진 끝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가정이 가능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가장 나쁘게 평가하는 것이 회색분자이다. 그것은 원리적으로는 악이 되고 논리적으로는 거짓이 된다. 그리고 회색을 모두 배제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삶의 현실은 내팽개쳐지게 된다. 그러니까 흑백논리를 갖고 싸우는 동안에 인간과 사회는 버림받거나 병들게 되는 것이다.
한 점의 흠도 없는 사람이나 지도자는 없다. 개선할 여지가 전무한 악한 사람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인 단점을 발견하고는 더 많은 장점이 있는 사람을 배척한다.
■ 종교의 폐쇄성에 갇힌다면
진전한 의미의 기독교는 창조성에 있다. 예수가 그런 면의 선구자였다. 구약적 교리주의와 민족종교의 울타리를 넘어선 인간애와 인류의 종교로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진리와 생명의 종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적 근본주의를 고수하는 교리주의자들은 폐쇄적인 배타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사고방식이 굳어지거나 보편화되면 또 하나의 흑백논리로 굳어질 가능성이 있다. 절대주의 신앙에 빠지는 길이 항상 열려있기 때문이다
- 영국과 미국 : 경험주의, 실리적 가치 존중, 현실에서 이념을 넘어 더 높은 현실 추구, 발에 크기에 따라 신발을 맞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공리주의, 정치는 의회민주주의 창출, 경제는 복지 사회주의
- 프랑스와 독일 : 합리주의, 논리적 가치 추구,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현실은 하나의 이념을 위한 수단과 방법일 뿐, 구두에 발을 맞추면 됨,
그러나 우리가 더 소중히 여겨야 할 정신적 과제가 있다. 그것은 사회과학적가치의 기준이 되는 휴머니즘과 인간애의 가치이다. 궁극적으로는 열려 있는 사회를 위한 이상이다. 이 모든 노력의 목표는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열린 역사의 길을 개척하는 데 있다.
- 2 -
■ 위험한 흑백논리
절대주의를 선택하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에서는 투쟁에서 승리하는 측이 힘을 소유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스로의 변증법을 모순논리라고 본다. 모순논리의 특징은 중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흑백논리가 그러했듯이 중간 존재가 배제된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는 약으로 치료하는 처음 단계가 있고 주사를 쓰는 다음 단계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수술이다. 그것이 바로 대화, 토론, 투쟁의 순서에 해당한다. 이 수술의 단계는 역사적으로는 혁명의 단계인 것이다.
내 가까운 친구였던 한우근 서울대 교수는 젊어서 도쿄대학에 있을 때 마르크스의 책을 읽었는데, 혁명에서 혁명을 거듭하는 공산주의 사회는 건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의사가 환자를 계속 수술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20대에 마르크스를 모르면 바보가 되지만 30대가 넘어서까지 마르크스에 매달리는 사람은 더 바보”라는 얘기들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가치의 객관성과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대화의 목표와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휴머니즘적 가치관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실패한 것은 그런 인위적 이념에 역사적 현실을 방편화했기 때문이다. 지나친 이상주의를 경계하는 것은 인간애의 정신과 과정을 배제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최고, 최초의 이상주의자였던 그리스의 플라톤이 경계의 대상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인간애는 사랑의 무거운 짐을 담당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 죽음에도 의미가 있는가
90고개를 넘기면서부터는 나도 모르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해보곤 한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이다. 죽음이 아주 가까이까지 와 대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행복한 죽음은 없겠으나 고통이 적은 좋은 죽음을 맞고 싶다는 욕망은 누
- 3 -
구에게나 있다. 살아 있었을 동안에도 체험하지 못했던 고통을 치르고 세상을 떠나는 것은 보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하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이기도 하다.
나는 내 동갑내기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복 받은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쇠해 있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는 했으나 죽을 만큼 아프다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날 밤에도 편히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2층에서 일어난 큰아드님이 식사를 도와드리기 위해 아버지 침실로 갔는데 이미 세상을 떠나 있었다.
아드님으로부터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나는 ‘마음씨가 착한 분이니까 고통 없이 떠나셨다’고 생각했다.
■ 죽음을 전재로 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
가장 지혜롭다고 자부하던 스토아 철학자들은, 죽음은 자연스러운 생명계의 현상이기 때문에 이성의 지혜를 빌려 자연의 섭리로 돌리라고 가르친다. 나무가 자라 꽃을 피우면서 즐기고, 열매를 익혀가면서 행복을 누리다가, 완숙기인 가을이 되면 충분히 익은 열매는 떨어진다. 그래서 또 다른 생명체들과 인간에게 생명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인간의 일생도 그렇다. 연륜이 차면 옆에 남아 있는 다른 열매들에게 “내 때는 찼으니까 먼저 갑니다. 남은 시간을 즐기다가 오세요.” 라면서 떨어져 가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에 대한 지나친 욕심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느끼며 절망에 빠져 불행과 고통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 자연의 섭리는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예측할 수 있어,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의 삶에 대한 선택과 결단의 책임을 지게 된다. 중병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회복된 사람이 인생의 차원 높은 새 출발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소중하기 때문에 그 일에 최선을 다하다가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값있는 인생을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택할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죽음을 예상하기 이전보다 죽음을 맞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다짐하게 될 것이다.
- 4 -
고맙게 일생을 마무리 하려면 더 지체하지 말고 한 가지 공부를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지난날들을 보내면서 하지 못했던 일들도 좋고, 취미와 소질이 있다고 생각되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도 좋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씩은 타고난 장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실리성에 붙잡혀 그 취미와 개성을 묻어두고 마는 때가 있다.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한 가지만이라도 계속해 살려나간다면, 늦게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해 온 일들보다도 더 큰 행복과 성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
■ 나를 키워준 사회에 작은 도움이라도
또 하나의 필수적인 과제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작고 큰 사회에서 태어나 살다가 사회를 떠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를 키워준 사회에 해악을 남기지 말고 작더라도 선한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항상 모든 잘못은 지도자나 다른 사람에게만 있고 나에게는 책임이 없는 듯이 살아온 것이 우리 사회의 폐습이다. 우리도 그렇게 살았다. 그 결과로 남겨진 것이 오늘 우리의 서글픈 현실이다.
더 늦기 전에 보다 좋은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한 가지씩이라도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고 본다. 큰일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해야 할 일을 하자는 뜻이다.
한때 천주교의 지도자들이 ‘내 탓이오’라는 구호를 보편화한 일이 있다. 모든 지도자들과 어른들이 ‘네 탓이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 잘못이다’는 생각을 갖고 30년이나 50년을 살았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얼마나 좋아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쁨은 나누어 가지면 배로 늘고 고통은 나누어 자기면 반으로 준다는 격언은 언제 어디서나 변함이 없는 진리이다. 이렇게 대단치 않는 얘기를 꺼내는 것은 그런 마음씨 없이는 행복한 사회질서가 회복될 가능성이 없겠기 때문이다.
■ 사형수 이중사의 이야기
오래전에 있었던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겠다.
- 5 -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한 고아원이 있었다. 원생들은 만 18세가 되면 원을 떠나게 되어 있다. 이 모 군이 18세로 고아원을 떠나게 되었다. 갈 곳이 없는 이군은 우선 군에 입대하기로 했다. 갈 곳과 직장은 그 다음의 문제로 미루었던 것이다.
군에 머물면서 중사까지 진급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저주스런 운명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울적함은 쌓여만 갔다. 휴가 때 고아원으로 가면 반겨주기는 하나 사랑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군에서 사귄 친구들도 때가 되면 모두 자기 부모가 있는 가정으로 가 버린다. 자기의 처지를 아는 여자가 있어 사랑과 결혼을 할 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에 대한 원망스러운 반항심은 쌓여갔다.
어느 날 이 중사는 신병들에게 실탄 사격 훈련을 시키다가 수류탄 두 개를 훔쳐 군복에 넣었다.
안동 시내로 들어가 막걸리를 마시고 취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동안에 늦은 오후가 되었다 그때 문화극장에서 영화 관람을 끝낸 사람들이 밀려 나오는 것을 본 이 중사는 자신도 모르게 ‘너희들은 모두 즐겁게 살고 나만 버림받으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홧김에 수류탄을 군중 속에 던졌다. 여러 사람이 다치고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는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고 남한산성의 육군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담당 군목이 이 중사와 면담을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부당했다.
군목은 이 중사를 위해 기도를 하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이 이 중사를 저렇게 만들었는가. 사랑의 단절이다. 이 중사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다면, 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저런 큰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책임은 이 중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다.
군목은 어렵게 이 중사와 면담을 가졌다. 그리고 함께 울었다.
얼마 후 이 중사는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었다. 군목은 이 중사에게 “과거에도 너를 사랑했고 지금도 너를 사랑하며, 앞으로도 네 영혼을 사랑해줄 분에게로 가자”고 말했다.
그 다음부터 이 중사는 함께 기도를 드렸고 성경을 읽었다. 하느님께서도 자기를 용서해주실 것을 믿었다. 하루는 이 중사가 목사님에게 물었다. 자기가 죽을 때 신체의 여러 부분들을 기증하면 다름 사람들이 목숨을 살릴 수
- 6 -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허락이 된다면 내 몸 전체라도 누군가에게 주고 싶다고 했다. 자기도 누군가를 한 번 만이라도 사랑해 보고 싶다는 애원이었다.
목사는 앞 뒤 사정을 알아보고 이 중사에게 알려주었다. 이 중사는 총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장기는 사용할 수가 없고 눈은 원하는 환자에게 이양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중사는 꼭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뒤 사형이 집행되는 이른 아침이었다. 앰뷸런스가 형장에 도착하고 이 중사가 열린 문으로 내려섰다.
우리는 아직도 오래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이 중사는 죽음이 문 앞에 섰을 때 그것을 깨달았다. 사랑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아직 좀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인생 최고의 희망이었던 것이다.
■ 마지막 선택권은 누구에게나 있다
지금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나 한 때는 많이 소개 되었던 한 젊은이의 이야기가 있다.
캐나다 서쪽 태평양 해안에는 밴쿠버라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가 있다. 거기에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이 있다. 캐나다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이다.
그 대학에 테리 폭스라는 학생이 있었다.
- 성적 우수, 농구 선수(캐나다에서는 선수가 우등생임)
- 18세가 되는 1977년 무릎에 암 질환
그는 수술을 받기 전날 밤 꿈을 꾸었다. 자기가 북미 대륙의 동쪽 대서양 바닷가에서 태평양 쪽의 고향 밴쿠버까지 달리기를 하는 꿈이었다. 그는 치료를 받고 나면 대륙횡단을 하기로 결심하고, 기금 100만 달러를 모아 청소년 암 치료에 기부하리라 마음먹었다.
■ 한 발로 대륙횡단 마라톤
18개월 동안 암 치료를 받은 폭스는 1979년 2월부터 뼈를 깎는 마라톤 연습을 시작했다. 1년여의 연습을 끝 낸 폭스는 형의 도움을 받아 대륙 횡단을 시작했다.
- 7 -
한쪽 다리는 수술로 절단을 했기 때문에 목발을 여러 개 준비를 하고 형은 운전을 하고 동생은 대륙횡단의 마라톤을 시작했다. 밤에는 자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작은 모험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몬트리올까지 갔을 때는 언론들의 관심을 모았고 그 젊은이의 용기를 극찬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성공을 빌었다. 그 다음부터 그가 달리는 길가에는 완주와 건강을 기원하는 군중이 모이기 시작했다. 매스컴은 하루하루의 주행 기록을 보도해주었다.
그가 오타와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군중이 모여 환영했고 때마침 벌어지는 야구 시합의 시구자로 위촉하기도 했다.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캐나다 제1 도시인 토론토까지 왔을 때는 달린 거리가 3,300마일이 되었다. 더 달릴 수 없게 된 폭스는 비행기로 벤쿠버로 돌아왔고 1981년 6월29일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달리고 있는 동안에 여러 시민들이 암 환자를 위해 기부한 모금액이 2200만 달러나 되었다. 그 기부금은 청소년 암 환자들을 위한 기금으로 쓰였다.
당시의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해 반 국기를 게양하고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우리 시대의 가장 용기있는 젊은이라고 극찬해 주었다.
■ 내게 시한부 인생이 주어진다면
젊었을 때는 삶의 시간적 단위가 긴 편이다. 20년, 30년의 계획을 세워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50고개를 넘어서면 10여 년씩의 설계를 해 본다.
다시 세월이 흘러 70대가 되면, 10년의 계획도 가능할까 싶어진다. 78세가 남자들의 평균 수명이라고 전해진다. 나와 같이 90의 언덕 위에 서게 되면 삶의 계획이 2년이나 3년으로 짧아진다.
철학계 후배들의 청을 받아 <철학과 현실>계간지의 연재를 청탁받은 일이 있다. 1년에 네 차례 200자 원고지 100장씩 연속 발표하는 내용이다. 그것이 한권의 책으로 완성되려면 1000장은 넘어야 한다. 순조롭게 진행되어도 2년 반의 세월이 필요하다 나도 모르게 그 일이 가능할까를 묻게 된다. 그때는 우리 나이로 99세가 된다.
- 8 -
고민한 나머지 원고지 ‘1000장쯤은 미리 써 놓기로 하자.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그때에 가서 완성해야겠다. 내 학문과 사상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한계는 생각지 않을 수가 없다.
■ 묻지 않을 수 없고 물어야 할 질문
어떤 철학자는 “죽음이 내 삶 속에 둥지를 틀고 있을 뿐 아니라 손님이 나를 찾아 마중 나오듯이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시간의 공간은 빠르게 축소되고 있다. 그 죽음의 시간이 찾아오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한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해 보고 있다. 앞으로 2년 정도의 일은 책임 맡고 있으나 그러고도 여백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고 물어야 한다.
인생의 나이는 길이보다 의미와 내용에서 평가되는 것이다. 누가 오래 살았는가를 묻기 보다는 무엇을 남겨 주었는가를 묻는 것이 역사이다.
4.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 돈과 성공, 명예 -
■ 그는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했고 사회적 명성도 얻었는데, 자신은 실패했다고 후회하며 말년에 가서는 장년기 때보다도 더 무가치한 수고를 했다고 자백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화려한 명성에 비해 역사적으로는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나와는 친분도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나보다 더 알려진 A씨가 있다. 대단히 유능한 분이다. 그는 스스로를 학자이기도 하고 행정력도 특출하다고 믿고 있었다.
몇 차례의 과정을 거쳐 A씨는 결국 명문 대학은 아니지만 그 이사장이 제안한 자리가 총장이라서 수락하고, 그 대학의 총장으로 4년 임기를 채웠다. 성과도 있었고 교수들도 좋게 평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1차 임기가 끝나
- 9 -
면서 이사장은 A씨의 중임을 반대했다. 결국은 한 임기 더 하고 싶은 총장직을 떠나게 되었다.
그 즈음에 나는 다른 기회에 그 대학 이사장을 만났다. “A총장과 몇 해 더 함께 지냈으면 했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더군요.”라고 하자, 이사장의 대답은 내가 예측했던 것과 같았다. “A총장은 유능하고 좋은 분인데 우리 대학이 목적이 아니고 우리 대학 총장직을 더 좋은 대학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삼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도 그 이사장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A씨는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목적은 강 건너 저편에 있으면서 강 이쪽에 있는 일은 그 발판으로 삼았던 것이다.
■ 강 이편에서 강 저편을 탐하는 사람들
오랜 세월을 지내다 보면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지난해에는 어떤 지방의 고등학교 교장을 만났다.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그 교장은 마지못해 이곳까지 와 교장직을 맡고 있으나 임기 중이라도 큰 도시의 교장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한 번은 교육계에서 존경받는 대학총장이 자신의 꿈은 대학의 총장이 아니라 대권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는 것이다.
그분은 얼마 후에 교육계를 떠나 정치계로 진출했다. 순조로웠다면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와 내 친구는 그것은 존경받는 처신도 아니며 또 정치가 특정인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 인촌 김성수와의 만남
나는 대학으로 가기 전에 서울의 중앙중·고등학교에서 7년을 보냈다. 그 후반기에는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 밑에서 일했다. 그분은 인간관계가 특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나는 30대 전후였기 때문에 아직 사회적으로는 철들지 못했던 때
- 10 -
였다. 그러나 그 몇 해 동안에 그분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인촌은 아첨하는 사람, 동료를 비방하는 사람, 편 가르기를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 당신 밑에서 일하도록 받아들인 사람은 끝까지 돌보아 주는 후덕함을 지니고 있었다.
■ 소통이 막힌 사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완전히 폐허가 된 서독의 지도자들이 다시 모여서 새로운 독일을 재건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복음아카데미 운동, 즉 기독교 신앙을 갖고 새 출발을 하자는 운동이었다. 그때 채택된 가장 소중한 과제가 완전히 파괴된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운동이었다. 독일 사람들은 맥주를 마실 때에도 서로 동시에 마셔야 안심할 정도였다. 누가 독을 탔을지도 모를 정도의 불신사회가 되었던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나쁜 것은 비밀 정책이다. 히틀러 정권의 사회악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도 그랬다. 그런 인간 관계를 바로잡는 방법은 무엇인가? 대화운동이었다.
■ 대화와 토론, 그리고 투쟁
우리나라에서도 민주정치를 위해서는 소통이 잘되어야 한다고 걱정하고 있다. 소통은 대화에서 오는 것이다. 사실 서구사회에 있어서 대화는 긴 전통을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교육법이 대화를 통한 교육이었다.
대화는 나와 너의 주장과 사고에서 차이점을 찾게 된다. 공통점은 서로 인정하면 된다. 차이점이 발견되었을 때는 더 높은 객관적 가치와 해답을 얻을 수 없겠는가 모색한다. 소망스러운 객관적 해답이 주어지면 그 해답을 위한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첫째는 마음의 문을 열고 듣는 일이 앞서야 한다.
내가 오래전에 뉴욕에 갔을 때였다. 한인상가연합회 회장으로 부터 들은 얘기가 생각난다.
- 한국인 : 자기편의 이익만을 생각, 다양한 거래가 되지 못함,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다가 한두 번 거래하다가 끝남
- 11 -
- 유대인 : 서로간의 이익을 타산, 상호간의 이윤이 지속되는 동안 거래지속
- 영국인 : 내가 얼마나 이익을 주면 우리 물건을 쓰겠느냐 상담, 결국은 그 사람들이 상권을 차지
나를 위한 이해관계만을 따진다면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우리는 가장 대화가 잘 되어야 할 종교계에서도 대화의 한계를 느끼는 때가 있다. 교리적 갈등이 종교전쟁으로까지 번지는 사례도 있을 정도이다.
그 원인은 간단하다. 종교계와 정치계에 선입관념과 고정관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정신적 지도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화가 불가능해지면 주장만을 앞세우는 토론이 된다. 토론에서 해답을 얻지 못하면 투쟁이 된다. 정신적 투쟁이 혁명과 전쟁이 될 수도 있다. 우리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 경제적으로 중산층, 정신적으론 상위층
독일에서 많이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세 사람의 강도가 길을 가고 있다. 숲속에서 황금 덩어리를 발견했다. 세 강도는 모두 놀랐다. 세 사람이 이 금덩어리를 팔면 한평생 먹고 사는 데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 사람은 발걸음을 고향으로 돌렸다.
- 세 사람이 나룻배로 강을 건너다 둘이서 한 사람을 강에 빠뜨려 죽였다.
- 두 강도는 금을 들고 거리로 들어갔다가 무슨 변이 생길지 모르니까 한 사람은 으슥한 곳에서 지키기로 하고 한 사람은 거리로 들어가 점심 도시락을 사 오기로 함.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함, 으슥한 곳에서 지키던 사람은 칼을 갑자기 휘둘러 상대를 죽이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도시락을 사러 간 도둑은 술병에 독을 넣어가지고 옴. 한 도둑은 칼에 찔려 죽고 한 도둑은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죽음
세 강도의 욕심스러운 꿈은 사라지고 금괴는 또 어떤 사람에게로 갈 지 모르게 그 자리에 남겨지고 말았다.
내가 대학생 때 독일어 교재로 읽었던 이야기다. ‘돈은 악마와 겉이 우리를 유혹한다’는 뜻이다. 그 유혹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과 인격을 잃어가는지 모른다.
- 12 -
우리는 그들이 강도니까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가 뽑아준 지도자, 정치계에서도 돈의 유혹에 빠져 인생을 그르친 사람이 많다. 재벌가의 재산 싸움과 가정적 불행은 그치지 않는다.
■ 로마는 왜 무너졌을까
가장 중요한 점은 돈과 경제는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는 관념이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후진 사회에서는 경제 문제 해결이 무엇보다 선결조건이다. 그 빈곤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주의 문제는 시급한 과정이다. 그렇다고 해도 돈과 경제는 좀 더 인간다운 삶의 수단이며 과정일 뿐이다. 돈과 경제가 인생의 목적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소유욕은 한계가 없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 그 사회도 병들게 된다.
역사가들은 ‘로마가 왜 무너졌는가’라고 물었다. 일을 적게 하거나 안 하고,부가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도덕성의 빈곤이 로마의 종말을 가져온 것이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은 포기하고 주어진 유산으로 사는 젊은이들이 성공하거나 행복해지는 예는 없다.
나는 1962년 봄학기를 하버드에서 보냈다. 그 당시 하버드 대학에서는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 교수를 초청한 일이 있었다. 그때 니부어 교수가 학생들에게 했던 말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지금 여러분들은 선조들의 업적을 이어받아 세계에서 가장 여유로운 경제적 부를 누리고 있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 부를 우리끼리 즐기자, 라든지 아메리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메리카는 부도 유지하지 못하며 경제적 가치도 더 창조해내지 못한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부를 세계 가난한 나라에 베풀어야 한 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잘 사는 나라가 되면 아메리카는 그 나라들의 도움으로 더 많은 부를 누리면서 인류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충고였다.
카네기의 말이 있다. “내가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그는 부자였다’는 말이다.” 주기 위해 일했지 소유하기 위해서 일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 13 -
■ 자서전을 쓴다면
요사이는 평범한 사람들도 자서전 비슷한 저서를 남긴다. 책을 펴내지는 않아도, 70고개를 넘기면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자서전 비슷한 글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나는 젊은 시절 마하트마 간디의 자서전, 죤 스튜어드 밀의 자서전, 그리고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의 자서전을 일고 가장 큰 감명을 받았다.
■ 모든 것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간 슈바이처
슈바이처 박사는 독일이 낳은 훌륭한 수재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에 관한 글을 쓰면서, 자기는 24세가 될 때에 다른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 성취하는 일을 이미 세 가지나 갖추었다, 고 고백한다. 학자로서 대학교수가 되었고, 전통 있는 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어려서부터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해 음악계에서 인정받는 연주가가 되었다. 그리고 파이프오르간 제작에도 일가견의 전문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위치에 있으면서도 항상 마음 한구석을 차지한 빈 공간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는 서른 살이 되면서 사생활을 등지고 공 생활에 투신해 새로운 삶을 성취했는데, 자기도 30고개를 넘기면서부터는 지금 이루어 놓은 것보다 더 소중한 사명을 찾아 나설 수 없을까 하는 소원이었다.
그러던 중에 슈바이처는 우연한 기회에 한 잡지에 실린 기사를 읽었다. 아프리카에는 의사가 없어 도움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는 환자들이 많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슈바이처는 그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사명이라고 받아들였다.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의과대학에 입학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그 대학에는 교수와 학생의 신분을 동시에 갖는 규정이 없었고, 슈바이처는 교수직을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전체 교수회의에서 특별한 혜택을 주었다. 덕분에 슈바이처는 교수직을 계속하면서 야간에 의과대학 수업을 받는 특전을 받았다. 의사 자격을 얻은 후에는 열대의학 에 관한 분야까지 추가로 공부해야 했다.
- 14 -
모든 준비를 마친 슈바이처는 아프리카로 갈 준비에 착수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자기를 사랑하고 위해주는 사람들의 만류였다.
또 한 가지 뒤따르는 문제는 경제적 후원이었다. 그가 아프리카로 간다고 해서 재정적 후원을 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사재를 정리하고 간호사로 일할 수 있는 부인과 같이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프리카에 정착한 그는 무로부터 유를 창출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오슬로에 갔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맞이해 주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자들이 상금을 무엇에 쓰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운영하고 있는 병원에는 나병 환자를 위한 병동이 없는데 이번에 그 병동을 신축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90세가 될 때까지 그 병원에서 봉사했다. 슈바이처를 돕고 있던 후배 의사들이 이제는 좀 쉬시라고 권고했으나 그는 꾸준히 환자들을 돌보면서 “왜 나의 책임까지 빼앗으려고 하느냐.”고 농담 섞인 불만을 말하기도 했다.
그가 프랑스에 있는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나는 60 평생을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위해 줄 수 있어 누구보다도 행복했습니다.”라고 심경을 고백하고 있다. (30세 이후 60년)
그의 부인은 먼저 아프리카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외동딸은 한국을 방문해 아버지를 존경하고 추모하는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한 일도 있었다. 나도 그 자리에 참석했었다.
■ 인간다운 삶의 궁극적 목표
나는 슈바이처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나 자신에게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해 보았다. 인간다운 삶의 근본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학문도 귀하다. 예술도 있어야 한다. 교회와 신앙생활도 축복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지금 당장 죽음과 싸워가면서 생명을 유지해야 할 사람들은 삶 자체의 여유가 없다.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삶의 가치와 행복을 그대로 상실하고 만다.
슈바이처는 자신을 위한 모든 삶의 소유와 자산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고통을 받는 이웃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는 자신의 것을 버려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목표였던 것이다.
- 15 -
슈바이처는 학문과 종교는 인간을 위한 것이지, 그것들이 삶의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참된 삶의 수단으로서의 학문과 종교였던 것이다. 학문이 인간보다 귀한 것도 아니며, 종교가 인간적 삶의 목적도 어니다.
슈바이처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생명뿐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생명성까지 존중히 여길 것을 주장했다.
예수는 ‘밀알이 떨어져 썩으면 그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죽음을 거부하고 그대로 남으려 한다면 말라서 사라질 뿐’이라고 가르쳤다. 우리의 생명과 삶도 그렇다. 죽기를 거부하는 밀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 많은 생명과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는 것이 인생의 순리인 것이다. 그것이 신의 섭리이다. 거부할 수 없는, 거부해서도 안 되는 생명과 삶의 순리인 것이다.
■ 세 동상
미국 LA 부근에 가면 ‘리버사이드카운티’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그 도시 시청 앞에는 기다란 공원이 있고, 그 공원에는 세 동상이 있다.
맨 앞에는 흑인 인권운동을 이끌다가 암살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동상이 있다 그 동상에는 그의 유명한 연설문 첫머리에 나오는 ‘나에게는 꿈이 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저기 꿈쟁이가 온다’
이 문구는 구약 창세기에 나온다. 이스라엘 세 번째 선조인 야곱에게는 열 두 아들이 있다. 그 아들들은 네 어머니의 태생이었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야곱은 가장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태어난 요셉을 각별히 사랑해서 언제나 곁에 머물게 했다.
그런데 요셉은 자주 꿈을 꾸고는 그 꿈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들려주곤 했는데 그 내용은 형제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며 살려주기를 애원하고 심지어 부모들까지 그에게 절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형제들이 그를 미워했다.
한 번은 여러 형제들이 먼 곳으로 목축을 하고 있을 때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며칠 집을 비우더라도 형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오라고 심부름
- 16 -
을 보냈다. 요셉이 멀리서 오는 것을 본 형제 가운데 하나가 “저기 꿈쟁이가 온다.” 이번 기회에 요셉을 죽여 버리자.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들짐승에게 잡아먹힌 것 같다고 하기로 하고 요셉을 물이 없는 빈 우물에 쳐 넣기로 약속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이집트 대상들을 보고 형제들은 다시 계획을 바꾸어 그를 이집트 대상들에게 팔아버린다.
훗날 요셉은 이집트 총리가 되어 형제와 아버지를 가뭄에서 구출해 이집트로 이주해 오도록 이끌어 준다는 얘기다.
킹 목사는 흑인 인권운동을 하다가 암살당한다. 그 덕분에 흑인들의 위상이 높아지고 흑인 대통령, 흑인 국무장관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의 동상에는 “나에게는 꿈이 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안창호 그리고 간디
그다음 자리에는 도산 안창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단신으로 선진국인 미국으로 건너온 안창호는 오렌지 농장주를 찾아가 일급을 받고 고용해 줄 것을 간청했다 안창호의 정성 어린 모습을 본 농장주는 아무 연고도 없는 젊은이를 채용키로 했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농장주는 도산의 자세와 인품에 감명했고 그를 믿게 되었다. 얼마 후 도산은 그곳을 떠나게 되었고 긴 세월이 지난 후 들려 오는 소식은 그가 한국인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미 한국인들의 협력을 얻어 동상을 세우게 된 것이다.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의 동상을 세우는 그곳 유지들의 마음은 우리를 더욱 감동케 해준다.
세 번째로 세워진 것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동상이다. 그도 뜻밖의 인물이다. 이번에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지도자의 동상이 세워진 것이다.
여러 해 전에 마하트마 간디의 일생이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된 일이 있다. 그가 피격 당해 죽은 뒤 관습대로 화장에 처해지고 그의 유골 가루를 인더스 강에 뿌리는 장면에서 나온 대사가 “모든 거짓은 사라지고 진실이 남는다. 온갖 폭력이 사라지고 사랑이 남는다.” 였다. 간디가 염원했던 인류의 희망이었다.
- 17 -
나는 이 세 사람의 일생을 회상해보면서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첫째는 세 사람 모두가 역경 속에서 태어나 일생을 마쳤다.
둘째는 세 분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정의사회를 위한 꾸준한 노력과 정신적 투쟁이다.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나무는 피를 거름삼아 자란다고 말한다. 역사가 이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도 민주화를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폭력을 쓰지 않는 항거와 투쟁의 일생을 살았다. 희생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폭력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들의 싸움은 더욱 힘들었다.
세 사람은 다 같이 사랑이 있는 고난의 길을 걷다가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킹 목사도 폭력에 의한 죽음을 맞이했다. 간디는 종교적 제전에 참가하기 위해 가다가 한 젊은이가 축복해 달라고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축복의 손을 얹었다가 그 젊은이가 쏜 총에 맞았다. 도산은 일제의 강압을 받다가 병원에서 일생을 끝냈다.
그들은 다 같은 인생의 길을 걸었다. 자신들의 목숨이나 일생보다도 더 귀하고 높은 목적이 있었기에 그것을 위해 고난의 길을 택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순교자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 나에게 ‘감투’란
오래전 일이다. 집안 동생을 만났을 때였다.
“형님도 장 자리 하나 얻으셨어요?”라면서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장 자리는 하나도 없는데…….”라고 했더니 “저는 나이 40이 되어서 겨우 감투 하나 썼습니다”라는 것이다. 내가 “큰일을 한 모양이네 앞으로 감투를 몇 개나 더 쓰겠는데…….”라고 했더니 “하나로 끝낼 겁니다. 동네에서 1년 동안 반장 일을 좀 봐 달라고 해서 시한부 감투를 썼습니다.”라는 것이었다.
■ 심부름꾼으로 족해
그런 얘기를 하고 보니까 나는 밖에 내 놓을만한 감투는 써본 일이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 18 -
이런 일 저런 일을 맡기는 했어도 위원이나 이사회의 한 사람이었지 장은 맡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심부름꾼으로 그치곤 했다. 또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31년간 대학에 있을 때도 그랬다.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장은 학과장을 했다. 누구에게나 한 번씩 돌아오는 자리니까 못해본 교수는 없는 자리였다.
한 번은 학생처장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총장이 얘기했다. 못한다고 사양해 겨우 벗어났다. 행정직을 맡을 시간이 있으면 공부를 하거나 대외적 활동을 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스운 것은 내 경력을 소개하는 때가 생기면 연세대에 있을 때 학생상담소장을 지냈다는 항목이 나온다. 그러면 나를 아는 사람들은 30여 년 대학에 있었는데 겨우 맡은 감투가 상담소장이었는가, 라고 놀리기도 했다. 나는 “그것도 나에게 과분하지. 그래도 장 자리라는 것은 인정해야 돼…….”라면서 웃는다. 그다음에는 인문과학연구소 일을 4년 맡아보았다. 학과장과 연구소장은 대학에서 감투이기보다는 학문적으로 소중한 직책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신문이나 월간지 같은 곳에 소개되는 내 이력을 보면 초라한 편이다. 감투가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보직과 감투를 좋아하는 교수도 있다. 그런 감투를 따라 교수직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긴 안목에서 보면 보직과 감투를 좋아하거나 목적 삼는 교수들을 보면 성공한 편도 못되며 명예롭지도 못한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 호텔비가 너무 적습니다
사실 교수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자기모순에 빠지는 때가 종종 있다. 자주 겪는 일중의 하나이다.
한 번은 지방에 있는 대학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졸업생들을 위해 강연을 맡아 달라는 청이었다. 그런 경우는 별로 없었다. 지방대학이기 때문에 전날 가서 하루는 호텔에 머물러야 했다. 학위 수여식 절차를 다 끝내고 호텔로 돌아왔다. 대학 당국의 책임자가 와서 호텔 사용료를 정리했다. 담당 직원이 나에게 “선생님 호텔비가 너무 적습니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필요한 것은 다 쓴 셈이다.” 라고 말했다. 다른 손님들은 나보다 많다는 얘기였다.
- 19 -
다른 손님은 그 대학의 전직 총장이나 귀빈들이다. 대학에서 초청해야 할 인사들이다. 그분들은 호텔에 머물면서 필요한 것들을 다 대접받은 것이다. 호텔에 비치되어 있던 양주들도 있었으니까.
나는 습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짜로 주는 물병 외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더욱이 학교 일을 위해 갔을 때에는 그렇다.
그날도 호텔비용은 방값뿐이었다. 다른 손님들은 초대를 받았으니까 필요한 것들은 챙겨 썼던 것이다. 그래서 그 직원은 요것뿐이냐면서 다른 분들의 절반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1971년이었을 것이다.
서울대학의 Y교수와 서강대학의 K교수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다음 해의 한국철학회 회장직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상의였다. 연세대학 차례도 되었고 연세대에서는 정석해 교수 다음이 내 차례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그 책임을 회피하는 것도 옳지 않으나 맡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내가 1년 동안 미국 대학에 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덜 미안하게 사양할 수 있었다.
가까운 친구들이 그 흔한 학회장직도 못해 봤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철학회에 대해서는 죄송하나 나 같은 사람도 있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소설가 박경리 씨나 화가 천경자씨 등이 더 존경스럽게 생각되기도 한다. 그들은 작품을 위한 열정 외에는 어떤 감투에도 생각이 없던 분들이다.
■ 공연윤리 위원회에서 잘린 사연
대외적인 활동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공연윤리 위원으로 오래 일했다. 초창기부터 였으니까. 또 도서윤리 위원이기도 했다. 둘 다 청와대 소속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적지 않은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그러다가 전두환 정권으로 연장되었을 때였다 예고도 없었는데 갑자기 청와대로 오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통령이 찾아서 상견례도 하고 수고한다는 말도 하려는 절차였다.
그런데 나는 그날 지방 대학에 강연이 잡혀 있었다.
위원장이 청와대가 소집하는 데 지방대학의 양해를 구하고 가자고 권고했
- 20 -
다. 그래도 나는 청와대에서 점심을 접대 받는 것보다 국민들을 위해 맡은 일이 중하기 때문에 고집을 부렸다.
그 결석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두 직책 다 없어지고 말았다.
다른 일은 모르지만 군 정신교육위원으로는 초창기부터 공화당 정권이 끝날 때까지 성의껏 협조했다. 나름대로 도움이 되는 일도 많이 했다.
감투는 쓰지 않았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봉사활동으로 군 방송, 군 관계 강연, 군을 위한 책자 만드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는 월드비전 구호기관에서 19년 동안 이사로 있었다. 기독교 기관으로서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단체다. 지금은 명예이사로 있다. 정년퇴직을 한 후에는 한우리독서운동에 동참해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지금은 성천문화재단의 이사 중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두세 차례 떠나려고 했으나 지금 임기가 끝나면 자동으로 떠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놓아주지 않기 때문에 고마운 직책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외적으로 내 놓은 감투가 없다. 감투가 없으니까 뒤따르는 명예도 없다. 그래도 일을 남겼으니까 감사할 뿐이다.
■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오래전 일본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이케다 일본 수상은 일본에서도 존경받는 정치가였다. 일본 경제를 본궤도 위에 올려놓은 경제 전문가이기도 했다. 그가 인후암으로 비교적 건강한 때에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앞두고 투병을 하던 때에 그의 후계자로 수상직을 맡았던 미키 친구가 찾아왔다. 인후암이었기 때문에 대화를 나눌 수는 없어 필담을 교환하곤 했다. 이케다 수상은 흰 종이 위에 두 마디의 글을 남겼다.
“죽고 싶지 않다.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유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은행에서 조사한 보고문건에서 였다.
지난 100년 동안 일본 정부가 투자한 예산 중에서 가장 무가치한 지출은 바로 군사비로 나타났다. 가장 효과적인 예산은 압도적으로 교육을 위한 투자로 나타났다. 정치적 투자는 경제보다 하위였던 것이다.
이케다 수상이 다시 태어난다면 교육계에 헌신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화려
- 21 -
하지는 못하고 사회적 명성은 낮았을지 모르나 교육은 정치보다 소중한 일임은 사실이다.
■ 황장엽의 회한
황장엽 씨가 북한을 탈출해 서울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나와 나이가 비슷했고 같은 평양에서 젊은 시기를 보냈기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해방되고 2년을 지내다가 조용히 교육 사업을 접고 탈북했다.”고 말했다. 김일성과는 같은 고향이고 초등학교 선후배 관계이기도 했으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할 일이 없었다는 얘기도 했다. 그 얘기를 들은 황장엽씨는 “김 선생은 선견지명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어 오늘 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일생을 무의미하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이 보람 있는 인생의 선택을 했을까. 다시 태어나도 나는 지금 하는 일을 하겠다는 신념이 있다면 그가 최선의 인생을 산 것이 아닐까 싶다.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도 죽고 싶지 않으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어떠할까. ‘지금은 죽고 싶지 않다. 그러나 때가 오면 죽어야 할 것으로 안다.’고 대답할 것 같다. 그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더 일할 수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는 죽음을 맞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 죽음이 주는 교훈
죽음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의 교훈을 주는가? 이제부터 남은 세월을 무엇을 위해 살다가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과 해답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내용을 그대로 연장하면 된다는 사람이 있다면 긍정적인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무엇인가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살아야 겠다는 자기반성이 있다면 늦기 전에 삶의 내용과 의미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중학교 선배인 황순원 작가의 기념관을 보았을 때 고마움을 느꼈다. 많은 소설을 정성스레 다듬어 우리에게 남겨준 고마움을 잊을 수 없어 좋은 기념
- 22 -
문학관을 유지들이 지어준 것이다. 스스로의 뜻으로 세운 동상이 아니라 예술을 사랑하고 흠모하는 사람들이 정신적 기념비로 세워준 기념관이다.
셰익스피어를 존경했기 때문에 영국을 우러러보는 사람들,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읽었기 때문에 프랑스가 좋아진 사람들, 괴테를 사랑했기 때문에 독일 문화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개인이 남겨준 정신적 유산이 그의 조국을 영광스럽게 높여준 것이다.
■ 우리 곁의 평범한 이웃
그러나 그 어떤 사람보다도 인류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사람이 있다. 그분들이 우리들 주변에서 우리와 같이 지냈다면 위대함을 몰랐을 정도로 평범하게 산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업가도 정치가도 아니었다. 학자나 예술가도 못되었다. 우리와 큰 차이가 없는 인생을 살았다. 공자나 석가는 존경 받는 스승이기는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나 예수는 범죄자의 낙인을 받고 사형에 처해진 사람이었다. 우리와 같이 평범하게 살았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의 친구가 되고 스승이 되었다. 그분들은 인간다운 인간,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다가 간 분들이다. 큰 업적을 남긴 바도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사랑받고 감사의 대상이 되는 인간으로 만들었는가.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을 사랑했다. 그 사랑의 뜻이 너무 컸기 때문에 인간 모두에게 뻗칠 수 있는 사랑이었다. 인간애의 주인공들이었다.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삶, 그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 그 사랑이 귀하기 때문에 더 높은 사랑은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5. 늙음은 말없이 찾아온다.
- 노년의 삶 -
■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
노년기는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보통 65세부터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와 내 가까운 친구들은 그런 생각을 버린 지 오래다.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 23 -
않는다. 노력하는 사람들은 75세까지는 정신적으로 인간적 성장이 가능하다. 신체가 쇠약해지면 늙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생각은 동물적이거나 생리적 관점이다. 신체적인 성장은 여자가 22세까지이고, 남자가 24세까지라고 한다. 그 후부터는 서서히 하강하는 것이 신체적과정이다. 그러다가 40대가 되면 성인병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누구나 늙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신적 성장과 인간적 성숙은 그런 한계가 없다. 노력만 한다면 75세 까지는 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래전 이야기다. 선배 교수 한 분이 나에게 “김 선생은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더라?”고 물었다. 내가 “70대 중반입니다.”라고 했더니 “좋은 나이로구먼…….”하면서 부러워했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인생의 황금기는 60세에서 75세 사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1961년 처음 미국에 갔을 때 가장 부러웠던 것은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었다. 백인 교수들은 모두 그렇게 믿고 있었다.
■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
지금 내가 “노년기는 언제부터인가?”라고 물어보는 것은 성장이 시작하는 때를 더듬어 보자는 뜻이다. 만일 성장이 정지되는 75세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늙기 시작하는 것은 75세부터라고 보아 좋을 것 같다. 그러다가 80세가 되면 노년기에 접어들게 된다. 그 나이가 되면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나의 인생이 정착되거나 평가의 대상이 된다.
글을 쓰고 있는 나는 97세를 맞고 있다. 그러니까, 80고개를 가고도 17년이 지난 셈이다. 때로는 나 자신에게 물어보곤 한다. 내 인생에 후회는 없었던가?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면 언제쯤부터 잃어버린 삶의 결함을 채워갈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삶의 의미를 남겨주었던 가?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 80에 내 삶을 돌아본다면
나는 가까운 친구들을 보면서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 인정받을 수 있
- 24 -
다고 생각한다. 내 가까운 친구였던 김태길 서울대 교수는 76세 때 ‘한국인의 가치관’에 관한 책을 내놓았다. 88세까지는 노쇠 현상을 크게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또 한 친구인 안병욱 교수도 94세에 작고했다. 병중에 있던 4,5년을 제외한다고 해도 89세 까지는 일을 계속한 셈이다.
정진경 목사는 88세까지 정상적으로 일하다가 다음 날 스케줄을 짜놓고 잠든 것이 영면으로 이어졌다. 김수환 추기경은 병으로 불편했으나 87세까지 영향력을 보여준 셈이다.
나는 약간 예외인지 모르겠다. 65세가 되면서 연세대를 정년으로 떠났다. 후배들에게 “나도 대학을 졸업했으니까 내일부터 졸업생답게 사회에 나가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농담 섞어 말했다. 그리고 만 31년간 또 일을 했다. 앞으로 몇 해나 더 지금 생활이 연장될지 모르겠다. 매일 원고도 써야 하고, 1주간에 한두 번쯤은 강연에도 나가고 있다.
늘 해오던 일이니까 계속 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일하고 싶어 한다기보다는 아직은 사회가 요청해 오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다.
요사이는 60분 정도까지의 강연은 서서 한다. 그보다 긴 강연을 맡았을 때는 앉아서 하기도 한다. 그런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원고를 쓰는 일은 자유로운 시간을 활용하기 때문에 크게 제약을 받지 않는다.
왜 이런 부끄러운 얘기까지 하는가? 지금도 우리 사회는 너무 일찍 성장을 포기하는 젊은 늙은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40대라고 해도 공부하지 않고 일을 포기하면 녹스는 기계와 같아서 노쇠하게 된다. 차라리 60대가 되어서도 진지하게 공부하며 일하는 사람은 성장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실한 노력과 도전을 포기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된다.
■ 장수의 비결이 뭔가요?
“건강과 장수의 비결이 뭔가요?” 90보다 100세에 가까워졌을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신체적 건강은 의사들이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도움을 줄 수는 없다. 나는 건강에 너무 관심을 쏟는 것도 좋지는 않
- 25 -
으나 너무 관심을 갖지 않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건강 자체가 인생의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 남달리 건강하지 못했다. 20이 될 때까지는 항상 신체적 건강에는 자신이 없었다. 조심조심히 살아왔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지금도 신체나 정신적 무리는 하지 않는다. 그것이 장수의 한 비법이 되었는지 모른다.
■ 최고령 수영장 회원
50고개를 넘기면서야 정상적인 건강에 자신을 찾았다. 그래도 90을 넘긴 지금도 무리는 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일의 90%까지만 책임을 맡는다. 10% 정도는 항상 여유를 남겨둔다. 언제든 하고 싶을 때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여유를 갖고 산다.
그래도 건강을 위해서는 한 가지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정구를 생각했다. 그러나 장소와 같이할 짝이 있어야하는 등 불편했다. 궁리하다가 자유로운 시간에 혼자서 할 수 있는 수영을 택했다.
운동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건강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그러나 즐겁고 도움이 되는 방법이었다. 운동의 목적이 건강이었다고 해서 건강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건강은 일을 하기 위한 또 하나의 필수조건이었다. 마지막 목적은 일이었다.
지금도 일주일에 세 번쯤은 수영장을 찾는다. 30분 정도 물에 들어가 수영도 하고 다리 운동도 한다.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오늘은 피곤한데 수영은 그만 두라.”고 권한다. 그러나 나는 수영을 함으로 오히려 피곤을 푸는 가벼움을 느낀다.
■ 하루에도 수차례 2층 방을 오르락 내리락
수영과 더불어 하는 운동 아닌 운동은 걷는 일이다. 하루에 50분 정도는 걷는다. 전에는 아침 시간에 산책을 했으나 80을 넘기면서부터는 오후에 걷는다. 체온 관계도 있고 아침운동은 여름이 아니면 부담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는 걷기운동은 산책이고 산책도 정신적으로는 생산적이기도 하
- 26 -
다. 원고 내용을 사색하기도 하고 다음 주간에 있을 강의 내용을 정리하기도 한다. 내 방은 2층이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층층대를 오르내린다. 그것이 운동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생활 자체가 운동인 것이다.
운동을 위한 운동은 운동선수들의 몫이다. 건강을 위한 건강은 목적이 없지 않은가. 친구들과 비교해보면서 누가 더 건강한가를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누가 더 일을 많이 하는 가 물으면 된다.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 칸트는 80년을 살았다. 300년 전에 80까지 살았다면 장수한 셈이다. 무엇이 그의 건강을 지탱했는가. 학문에 대한 열정과 일이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하루에 몇 시간씩밖에 수면 시간을 갖지 않았다. 정신적 일뿐 아니라 육체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90을 넘길 때까지 일에서 손을 놓은 일이 없었다. 아프리카에 와서도 60년간 환자들을 위해 일할 수 있어 누구보다 행복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건강이 일을 도왔는지 일이 건강을 도왔는지 묻고 싶은 생각을 해본다.
■ 건강은 일을 하기 위해서
나는 일이 내 건강을 유지해 주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은 상호작용 한다고 믿고 있다. 젊었을 때는 신체적 건강이 정신적 건강을 이끌어주나, 나이 들면 정신적 책임이 신체적 건강에 더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일을 사랑하고 위한다는 것은 인간적 과제에 속한다. 어떤 사명감을 갖고 산다든지 긍정적인 사고와 희망을 창출해 내는 노력 같은 것은 인간 전체적 기능과 역할에 속한다고 보아 잘못이 아닐 것 같다. 뚜렷한 목적을 갖고 사는 사람과 아무 목적도 없이 사는 사람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런 배경을 인정한다면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건강해진다는 생각도 잘못은 아닐 것이다.
■ 젊어서는 용기, 늙어서는 지혜
흔히 들어온 이야기가 있다. 젊었을 때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장년기에는
- 27 -
신념이 있어야 하나, 늙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 장년기는 가장 오랜 세월을 차지한다. 30에서 60까지는 장년기에 속한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어떤 이는 70까지를 장년기로 보기도 한다. 자신의 일과 더불어 성장하는 기간이며 일의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평가받는 기간이기도 하다.
이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뚜렷한 삶의 목표와 목적을 위한 확고한 신념이다.
그러다가 장년기를 끝내게 되면 대개의 경우 일선에서는 물러나게 된다. 늙으면 주어진 일을 열정적으로 수행하기에는 인간적 에너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 나보다 더 유능한 후배들을 위해
2015년 캐나다에서는 아주 젊은 총리가 당선되었다. 그것도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총리가 된 것은 아버지 총리의 덕분이라고 캐나다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트뤼도 총리는 오랜 임기에 해당하는 기간을 총리로 지냈다. 국민들도 압도적으로 총리직에 더 머물 것을 원하고 있는데 본인은 좋은 후계자에게 양도하는 것이 캐나다를 위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그는 총리직을 떠날 것을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그는 많은 국민들에게 아쉬운 존경과 사랑을 남기고 떠났다.
물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장년기를 신체적 연령만으로 측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늦어도 30대 후반부터 70이 될 때까지는 장년기라고 보아 좋을 것 같다. 그 나이가 지나면 노년기가 시작된다. 노년기를 맞으면서는 무엇보다도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를 갖추지 못한 노인들은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
■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
인간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성숙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관념이 보편화되고 있다. 늙는다는 것은 꽃이 피었다가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익어가는
- 28 -
것 같은 과정이다. 그 기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이다.
지혜로운 노년기의 부모는 직접 자신이 하던 일을 서서히 아들딸에게 물려주고 배후에서 질문도 받고 도움을 준다. 사회 일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때 노년기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정신적 자산이 넓은 의미의 지혜인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직책이나 지위를 가지려 하지 않는다.
로마의 교황은 옛날부터 종신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교황은 자신의 건강과 맡은 책임의 한계를 느끼면 생전에 그 자리를 내놓는 절차를 택한다. 그것이 사회를 위한 책임자의 지혜인 것이다.
■ 계속 배우고 공부한 덕분
그렇다면 노년기에 필요한 지혜란 어떤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해서 지식을 넓혀가는 일이다 70대에 갖고 있던 지식을 접거나 축소하지 말고 필요한 지식을 유지하거나 넓혀가는 일이다.
후배들과 자리를 같이 하면서 지식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안 하다 보면 내 지식이 축소되기 쉬우나 여유 있게 노력하는 자세만 갖추면 지적인 후퇴는 방지할 수 있다.
■ 이렇게 사는 것이 좋겠다는 모범
노년기의 지혜는 가능만 하다면 늙으면 이렇게 사는 것이 좋겠다는 모범을 보여주는 책임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이들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다. 버릇이 없다든지 예절을 모른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젊은 이들의 잘못보다는 우리가 그들에게 선한 모범을 보여주지 못한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아르바이트생들이 고생하는 직업을 귀중하고 장래를 위한 경험으로 인정해 주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아르바이트생인 나에게 정중하게 다른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대해 주고 내 인품과 인격을 자신의 아들같이 대해주는 사람을 보았을 때는 정말 존경스러웠다. 대학에서 교수님을 대하는 것 같은 존경심을 갖게 해 주었다.
- 29 -
그래서 이다음에 나도 어른이 되면 어떤 직업도 소중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대접을 받았듯이 존경하면서 살아보자. 세상에 천한 직업이 없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인간적 대우와 인격적 평가를 주고받는 사회가 되어야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내가 푸대접을 받았어도 상대방을 대접할 수 있는 인품, 모두의 인격을 고귀하게 대해줄 수 있는 교양, 그 이상의 자기 수양은 없을 것 같다.
■ 취미생활의 즐거움
여러해 전 일본에서 실시된 여론조사 내용을 읽은 일이 있었다. 60대 중반여성들에게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를 물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무 일도 없이 세월을 보낸 사람이었다.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가족들과 더불어 세월을 보내고 옛날 친구들과 때때로 만나는 여성들이었다.
반면 새로운 행복을 찾아 누린 사람은 세 가지로 나타났다. 공부를 시작한 사람, 취미활동을 계속한 사람, 봉사활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세 가지 중의 하나라도 계속한 사람은 보람과 행복을 누렸고 자녀들로부터는 존경을, 이웃과 더불어는 즐거움을, 사회적으로는 고마움을 받으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 노후에는 일이 없는 사람이 가장 불행
아무 일도 없이 노년기를 보내는 사람은 불행하다. 남들이 사는 대로 나도 지내면 된다는 생각은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지지 못하게 한다. 물론 한 가지 일을 70대, 80대까지 계속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 의미에서 학자나 예술가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학문이나 예술에는 정년이 없다.
노후에는 일이 없는 사람이 가장 불행하다. 그 일을 미리부터 준비해두자는 생각이다. 노후를 위해 경제적 준비를 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일을 준비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내가 연세대에 있을 때 정년퇴임한 한학자 장지연 선생이 있었다. 정년이 되면서 아드님에게 출퇴근 할 방을 하나 제공받았다. 그리고 대학에 출근하
- 30 -
는 때와 비슷하게 공부를 하곤 했다. 또 시간이 되면 난을 가꾸는 취미를 계속했다. 80이 넘을 때는 난을 가꾸는 즐거움과 더불어 부수입도 약간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그분은 공부와 취미활동을 병행했던 셈이다.
■ 마음 가는 대로 써본 글
내 경우도 그랬는지 모르겠다. 40을 맞이하게 되면서 내 친구들은 한두 가지씩 취미 생활을 시작했다. 그림, 음악 동아리, 서예, 등산, 낚시, 바둑 등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다가 수필이나 수상에 해당하는 글을 써 보자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한두 가지는 너무 딱딱한 학문과 사고에 얽매이는 것 같아 정서적 여유를 갖고 싶었다. 그리고 젊었을 때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글을 쓰고 싶은 의욕을 갖고 있었다. 시나 소설 같은 전문적안 작업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예술적 정취가 스며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오래 계속하다 보니까 마음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쓰는 동안에 즐거웠고 독자가 많아질 때는 행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필가로서 사회적 평가를 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 본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도자기의 즐거움
수필을 쓰는 일이 궤도에 올라 시간적 여유가 생겼는가 싶은 50대가 되었을 때였다. 나 자신이 항상 부끄럽게 반성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한국적인 것’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
한국적인 것에 가장 쉽게 접근하는 방법의 하나로 우선 국전과 대표적인 화가들의 전시회를 찾아 감상하는 방법을 택했다. 청천과 소정의 그림, 박수근의 그림, 그러다가 운보 김기창을 만나게 되면서 한국화의 전통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같은 동양화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우리 것은 완연히 구별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는 동안에 전통적인 화가보다는 문인화에 마음이 끌리기도 했다. 허소치의 그림이 효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 31 -
문인화를 즐기는 동안에 우연히 민화에 정이 쏠리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회화나 문인화보다는 옛날의 민화가 가장 한국적이고 서민적인 데 흥미를 느꼈다.
그러다가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옛날, 특히 조선왕조 시대의 도자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것은 도자기에 스며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후로 인사동, 장안평, 청계천 등지를 시간만 나면 찾아 다녔다. 15년 내지 20년 동안 한국적인 것을 찾아다닌 셈이다.
그러는 동안에 상품으로서는 뒷전으로 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을 수집하기도 했다. 강원도 양구에 근현대사 박물관이 생기면서 한 공간을 얻어 기증하기로 했다.
지금도 시간이 생기거나 일이 있어 양구에 가면 내가 기증한 도자기가 있는 방을 찾아간다. 호수 맞은쪽에는 안병욱 선생과 나를 기념하는 ‘철학의 집’이 있고 여러 해 전에 건축된 박수근 화백의 미술관 이 있으나, 정들었던 도자기들이 있는 방이 내 방 같은 인상을 받는다.
■ 구름 사진가가 되면 어떨까
앞으로 10년만 더 건강과 시간의 여유가 생긴다면 한가지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나는 어려서 농촌에서 자랄 때부터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가난과 싸우며 고생스럽게 살면서도 거처를 마련할 때는 산이나 들이 보이는 곳을 찾아다녔다. 하늘 과 구름을 보고 싶어서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은, 사진 기술을 배워가지고 구름들을 찍어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이다. 그런 작업을 한 사람의 사진첩이 있다면 구해서 보고 싶은 데 아직은 구하지 못하고 있다. ‘하늘과 구름’그 속에는 무한에 가까운 예술품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곤 한다.
‘구름 사진가’ 그런 예술가도 있었으면 좋겠다.
■ 늙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1961년 늦은 여름이었다. 미국 LA에 있는 YMCA에서 늦은 조반을 끝내고 쉬다가 인근 공원 산책을 나섰다.
- 32 -
예상 못했던 광경을 보고 놀랐다. 늙은 할아버지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가 백인 노인네 들이었다.
YMCA호텔로 돌아와 약속했던 김성락 박사를 만났다. 내가 늙은이들로 가득한 공원을 처음 보았는데 나도 늙으면 저렇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더니 이 공원 일대에는 노인네들이 머무는 양로원들이 있고, LA는 미국에서도 따뜻하고 건조한 지역이어서 여러 지역의 노인들이 모여든다는 설명이었다.
의식주의 문제는 국가와 사회가 보장해주는데 늙어서 버림을 받은 사람들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사람들은 없다. 저렇게 앉아서 시간을 보내다가 급식소에 기서 점심을 먹고는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으니까 라디오나 TV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주변에는 노인네들을 위한 싸구려 영화관도 있고 여자들이 나체에 가까운 차림으로 춤을 추는 스트립쇼 공연장도 있다. 그곳에 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잠들곤 한다. 그러는 동안에 1년에 몇 명씩 세상을 떠난다.
처음 미국에 와서 본 장면의 하나였기 때문에 늙음이 참 쓸쓸하고 비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렇게 버림받게 되는가 싶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보게 될 현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 물건을 쓰다가 낡으면 버리듯이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내 친구가 정년퇴직을 하면서 수원 부근에 있는 양로시설로 갔다. 두 내외가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처음에는 편한 것 같았다. 의료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고 산책과 건강을 위한 시설도 충분했다. 식사는 물론 머무는 방도 호텔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식당이나 복도에서 만나는 사람 모두가 늙은이들과 환자에 가까운 피보호자들이었다. 젊은이들은 물론 장년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 친구 내외는 2,3년 후에 그곳을 나왔다. 그 조용하고 하는 일 없는 분위기가 더 빨리 늙음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나와 다른 친구들을 만나면서 하는 말이 갈 곳이 못 된다는 얘기였다.
■ 누구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 33 -
늙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세월은 흐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회는 그 늙음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옛날부터 경로당이 생겼다. 그 노인네들을 그래도 좋았다. 경로당에 나왔다가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더불어 식사도 하고 함께 지낼 수 있었으니까.
대학에 있을 때였다. 교수회가 있게 마련이다. 회의를 진행하다보면 원로 교수로 자처하는 늙은들 몇이서 회의 시간을 다 차지해버린다. 후배 교수들이 좀 새로운 발언을 하면 못마땅한 듯한 표정으로 외면한다. 더 늙어 사회에 나오기 되면 그런 습관이 더 심해진다. 우리 주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던 교수가 있다. 장관도 지냈다. 지금은 80대 전후일 것 같다. 그 교수는 어떤 회의에 나가면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발언을 한다. 그래서 동석했던 사람이 미리 빠져나가기도 한다. 늙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늙으면 여러 가지를 삼가게 된다.
나는 가까운 사람이나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면 문상을 안 갈 수도 없고 가기도 어색해지는 때가 있다. 그래서 문상객이 적은 시간에 다녀오기도 한다.
그리고 연하의 상가에는 보통 가지 않는 것으로 한다.
■ 나이자랑 건강자랑
늙으면 필요 없는 자랑을 하길 좋아한다. 아직은 늙어 버림받지 않고 있다는 잠재적 반증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젊은 사람들이나 후배들이 있는 곳에 가면 은근히 나이 자랑을 한다. 대접을 받고 싶기도 하고 상좌로 안내받기를 원한다. 90이 넘은 노인네들은 ‘내 나이를 몰라봐?’라는 눈짓을 하기도 한다.
늙은이들은 기회만 있으면 건강 자랑을 한다. 날로 쇠약해지는 건강을 과시함으로써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장년기에는 이성과 감정이 균형을 갖춘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먼저 생각하고 감정을 노출하며 행동을 한다. 그런데 늙으면 이성 기능이 약해지고 감정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감정조절을 잘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화를 내기도 하고 충격을 받기도 한다.
늙으면 자기 생각과 같으면 모든 것이 옳고,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아니라
- 34 -
고 본다. ‘그래도 내가 나이라도 한 살 더 먹었는데!’라고 화를 내기도 한다. 지적 수준과 교양이 낮은 사람들은 더 심한 변화를 가져온다. 자녀들까지도 부모님 연세가 높아지니까 모시기가 힘들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은 본인의 잘못이기 보다는 세월의 탓이다. 강물이 흘러가듯이 세월은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 저 어른같이 늙었으면 좋겠다.
몇 해 전에 미국에 갔다가 선배 교수인 C선생을 찾은 일이 있었다. 그때 그 분은 95세 였다. 아드님과 함께 조용한 식당에서 만났다. C선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나를 대해 주었다. 혹시 후배에게 실수를 할 것 같아 조심을 하는 눈치였다. 오래전에 뵈었던 존경스러운 스승 그대로였다.
사람이 나이 들수록 나무가 높이 자라듯이 지혜롭게 자라야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세상 사물을 대할 때 좀 더 높은 위치에서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나이 들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대할 수 있다면 그것이 존경받는 노년기 인생이 되는 길이라고 믿는다.
■ 노년기에는 존경스러운 모범을
내 아내가 발병을 하고 2,3년 지났을 때였다. 친구인 C 교수가 내 방에 들렀다. 한 가지 충고라고 할까, 도움이 되는 얘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C 교수의 아내가 밖에서 두세 차례 내 모습을 보았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홀아비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아무리 안 사람이 병중이고 위독하다고 해도 교수도 공인인데, 또 젊은 학생들 앞에 서야 하는데 남이 보아도 안됐다는 얘기였다. 내 친구는 같은 남성이니까 느끼지 못했지만, 여성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친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부인에게도 충고에 따르겠다는 얘기를 해달라고 말했다.
그 후로 제일 먼저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옷차림이었다. 될 수 있는 대로 깨
- 35 -
끗하게 비교적 밝고 젊어 보이는 모습을 따르기로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을까 옷에 대한 안목은 좀 높아진 셈이다.
아내가 보아주지 못하게 되면서 예전에 무관심했던 때와는 달리 신사다운 면모를 갖추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그 점에 있어서는 자랑거리는 못되지만 합격점수는 얻은 셈이다.
십몇 년을 그렇게 살다 보니까 이제는 옷차림이나 모든 면에서 60대 신사로 보이자는 욕심을 내보기도 한다. 누구를 위해서라고 물으면 나 자신보다도 보는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외손녀들이 “우리 할아버지가 아빠보다 더 멋지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본래부터 할아버지가 멋쟁이였단다. 라고 말해 웃곤 한다.
여성들의 아름다움은 사회를 아름답게 만든다. 늙은이들의 젊은 옷차림은 사회를 더욱 젊고 활기차게 만들어 준다. 옷을 잘 입는 신사 축에는 끼지 못해도 인품을 떨어뜨리는 옷차림은 하지 않아야 한다.
■ 내가 먼저 “고맙습니다”
여러 해 전 일이다.
서울의 남산 순환도로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에 미국의 젊은 대학생 같은 남녀가 올라왔다 그들도 택시를 타려는 참이었다. 빈 택시가 오다가 내 앞을 지나 그 미국 학생들 앞에서 정차했다. 나는 할 수 없이 다음 차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그 남학생이 나에게 “택시를 기다리셨지요?” 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 두 학생은 기사에게 우리보다 저분이 먼저 기다렸다면서 양보해주었다. 내가 다가갔더니 남학생이 택시 문을 열어주면서 먼저 타라는 것이다. 내가 탄 후에 문을 닫아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고 택시는 떠났다.
그날 나는 좀 색다른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는 흔히 젊은이들이 버릇이 없다고 말한다. 예절을 가르쳐주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최근에는 인성교육이 필요하다고 누구나 걱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어른들이 모범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청소년들만 나무랄 필요가
없다. 우리 젊은이들은 보고 배운 것이 없었던 것이다. 젊은이들을 탓하기
- 36 -
전에 우리 자신부터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나는 버스나 택시를 타고 내릴 때는 반드시 기사들에게 인사를 한다. “고맙습니다.” “수고 하십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간단한 인사다. 그 기사들이 불친절하다든지 불만스럽다고 불평하기 전에 나부터 친절해지고 고마움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다.
사회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좀 더 나이든 사람들이 후배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모범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 누구 곁으로 가야 하는가
내 인생의 처음, 그리고 가장 오랜 동반자는 어머니였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물론이고, 30대 중반부터는 어머니를 모시고 40여 년을 살았다. 부친이 북한에서 월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 후부터는 아내가 내 인생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가 되었다. 60년 가까이 옆에 있었다.
■ “집이 비어서 어떻게 하지……”
그렇게 많아 보이던 가족이 다 흩어지고 마침내는 내가 모친과 아내를 이끌고 집을 옮기기로 했을 정도로 한적한 가정이 되어 버렸다. 딸 셋은 미국에 살고 두 아들과 한 딸은 서울에 살고 있다. 60이 넘으면서부터는 아내마저 간병 치료를 받아야 했으니까 90이 넘은 모친과의 대화가 전부일 정도로 우리 집은 노인정으로 변하고 말았다.
내가 76세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 운명하기 2개월 전쯤이었을 것이다.
조용한 아침시간이었다. 햇살이 밝게 비쳐 들어오던 기억이 남아 있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떠나야 하겠고 또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라면서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마음을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늙은 어머니가 며느리를 먼저 보내는 일은 없어야 겠다는 모친의 소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먼저 가고 네 처도 오래지 않아 내 뒤를 따라올 텐데……”
어머니가 혼자 남을 늙은 아들을 위해 근심했던 것이다. 내 얼굴을 살피면서 “혼자 지낼 수도 없고…….”라면서 말끝을 멈추었다. 모친은 아마 내가
- 37 -
“가능하면 재혼이라도 하겠지요?”라고 말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한참 말이 없으시더니 “나까지 떠나가면 집이 비어서 어떻게 하지…….”그러고는 더 말씀을 하지 않았다.
두 달 쯤 후에 어머니는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7년 뒤에는 아내도 세상을 떠났다. 나 혼자 남았다.
“집이 비어서 어떻게 하지…….” 갑자기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 떠나고 싶지 않지만 떠나야 한다면
내 나이 100에 가까워져 왔다. 아직은 건강이 유지되고 있으나 곧 어디로 가야할 것 같다. 여기는 비어있는 집이지만 모친도 아내도 운명한 집이다. 떠나고 싶지는 않더라도 떠나야 한다면 하늘과 산, 가능하다면 호수나 바다도 보이는 요양병원으로 갔으면 좋겠다.
누구 곁으로 갈까 했으나 이제는 누가 내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을까 하는 마음이다. 어머니나 아내 같은 마음을 가진 여인이 곁에 있으면 고맙겠다. 그러나 내가 떠난다고 해서 아픈 마음을 갖지 말고 조용히 감사히 생각할 정도로 성숙된 인간애를 갖춘 여자였으면 좋겠다. 나 때문에 슬퍼할 여인이어서는 내 마음이 무거워질 것 같다. 미소를 머금고 보내줄 사람은 없을까. 이별까지도 감사히 생각하며 보내줄 수 있는 …….
■ “오래 사시느라 교생 많으셨습니다”
2011년 3월이었다. 내가 한림대학교에서 일송(一松)상을 받게 되었다. 대학에서 내정한 후에 연락이 왔기 때문에 감사히 수락하게 되었다.
수상식이 끝나게 되면서 답사를 할 순서가 되었다. 특별히 준비한 내용이 없어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상을 받게 된다는 영광스러운 마음은 있었으나, 내가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반성해보았습니다. 특별한 직책을 맡은 일도 없었고, 남다른 업적을 남긴 바도 없었습니다. 나보다 훌륭한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습니다. ‘오래 사시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준다면 받아도 되겠다고 마음의 위로를 받습니다.”라고 했더니 모두가 웃었다.
- 38 -
■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개인적으로도 그랬다.
지금은 건강과 장수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평생 잊지 못하고 살아온 어머니의 얘기가 있다. “우리 장손이 스무 살까지만 사는 것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너무 가난한 한평생을 보냈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탈북과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오랫동안 두 동생과 여섯 자녀를 위한 책임을 지고 살아야 했다.
건강, 가난 둘을 다 타고난 인생의 집이었으나 그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을 때까지는 고생의 연속이었다.
그보다는 환경에 따르는 사회적 고생이 더 많았다. 나라를 빼앗긴 후 36년의 일제강점기를 보냈다.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를 자퇴해보기도 했다. 그때가 중학교 3학년이었다. 대학을 끝내면서는 일본군대로 끌려가는 학도병 문제로 절망 상태에 빠졌던 체험도 아직 생생하다.
해방 후 환희는 너무 짧았다. 2년간 공산 치하의 세월에는 일제강점기보다도 더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자유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탈북을 했다. 나에게는 고향을 잃은 것만이 아니었다. 다시 찾은 조국의 반을 빼앗긴 슬픔을 안고 목숨을 건 대한민국에로의 탈출이었다. 대한민국이 없었다면 어디로 갔을까.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대한민국의 한없는 혜택을 받으면서 살았다.
6·25 전쟁과 4·19 혁명은 눈을 감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고뇌의 짐이었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우리 모두의 운명과 하나였으니까. 그 후의 경제적인 정착과 정치적 민주화 운동은 대학생활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편하게 마음 놓고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들 모두에게 주어진 역사의 무거운 책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인생이 불행했거나 무의미한 고생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 사랑한다는 것은 위해주는 것
- 39 -
1947년 가을부터 7년 동안 중앙중·고등학교서 지냈다. 27세였다. 전쟁 기간을 제외한다면 5년 정도밖에 학생들과 같이 지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참 행복했다. 그 교사생활 때는 내 평생에서 가장 학생들과 함께 사랑을 나눈 기간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위해 주는 것이다. 학생들이 많이 따라 주었기 때문이었을지 모르나 나도 학생들을 진심으로 위해준 기간이었다. 전쟁의 시련을 함께 겪은 것도 원인이었을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내 제자들을 사랑하고 걱정했다. 또 나보다 유능하고 장래가 기대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우리학생들이 스승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한 듯싶은 생각이 있었다. 내가 일제강점기 중·고등학교 다닌 때는 선생들의 사랑을 넘치게 받으면서 살았던 기억이 새로워졌다.
■ “제 큰절 받으세요”
2015년 가을이었다. 45회 중앙졸업생 중의 한 제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국에 살던 방 군이 서울에 오는데, 동기생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점심을 같이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약속한 시간에 63빌딩 양식당으로 갔다 방 군을 포함한 9명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80세 전후의 옛날 제자들이었다. 이름이 기억나는 이도 있고 얼굴이 기억에 남는 제자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나도 동창의 한 사람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모두 늙어 있었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방 군이 입을 열었다. 방 군은 일찍 미국에 건너가 의사로 일하다가 정년으로 퇴직을 하였다. 방 군은 6·25 전쟁 기간 중의 졸업생이었다.
“제가 미국에서 우연히 TV를 보다가 선생님께서 건재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더 세월이 지나기 전에 뵈옵고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베풀어 주신 말씀과 사랑에 감사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때 토요일 오후마다 들려주시던 말씀을 못 들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더 늙기 전에 큰 절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의자에 앉으신 대로 제 절을 받아 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카펫위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자리를 함께하고 있던 다른 친구들도 우리도 같이 큰절을 드리자면서 엎드렸다. 서빙을 하기 위해 들어섰던 직원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자그마한 사람은 의자에 앉아있고 덩치가 큰 노인들이 큰절을 하고 있으니까.
- 40 -
그것이 사제 간의 사랑이다. 나는 제자들에게 해준 일이 없었다. 그저 저 제자들이 자라 모두 행복해지고 사회를 위해 봉사를 하는 일꾼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졌을 뿐이다. 오늘 같은 일이 있을 것을 예상했다면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역시 사랑의 짐을 질 수 있는 그때가 행복했다. 다시 교단에 설 수 있다면 더 많은 제자들을 위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위하게 되어 있지 않다.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도 더 사랑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 끝 -
2016 11. 18
- 41 -
'독서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등의 독서법 (0) | 2017.01.02 |
---|---|
당신은 아무 일 없던 사람보다 강합니다 (0) | 2016.11.28 |
나는 더 이상 여행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0) | 2016.10.22 |
피었으므로 진다 (0) | 2016.09.23 |
조선이 버린 천재들 (0) | 2016.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