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22. 08:27ㆍ독서후기
열한 계단
- 나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 -
■ 채사장 지음
0 채사장의 의미 (본명 채성호, 34세)
- 지식 가게의 사장
- 널려 있는 정보들 중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가치 있는 지식을 선별하여 쉽고 단순하게 손질하고 진열하는 사람
0 성균관 대학 졸, 하루 한 권 이상의 독서
0 글쓰기 강연 : 인문학을 쉽고 재미있게
0 저서 : 시민의 교양,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현실 편 / 현실 너머 편)
■ 저자의 말 : 당신이 표류하지 않고 항해하는 삶을 살기를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말이다. 그는 잔인하게 덧붙인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다만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표류하는 삶이 아니라 항해하는 삶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이 단순히 사회적 성공이나 부의 축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열한 계단>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이 책은 두 가지 가치를 다룬다. 바로 성장과 지혜다. 먼저 오래된 지혜를 선별했다. 나를 불편하게 한 지
- 1 -
식들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던 열한 개의 고전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열한 계단>은 인류의 고전을 개인의 성장기와 연결시킨 ‘인문학적 수필’의 형식을 갖게 되었다.
2016년 겨울의 길목에서 채사장
◉ 소년, 불편함의 계단 앞에 서다
■ 불편함의 계단
계단 앞에 선다. 이건 불편함의 계단이다. 한 칸씩 오를 때마다 그전까지 내가 믿었던 세계를 흔들어 깨트려야 한다. 어디까지 오를 수 있을까.
계단을 오르는 길에는 사람들이 있다. 나를 앞서가는 사람, 내 뒤를 따르는 사람, 어떤 이는 계단 중간 어딘가에서 이미 자리를 잡았다. 그 계단의 높이가 그는 가장 마음에 들었으리라.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 오른다.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불안함을 감수하면서 다른 세계를 보고자 한다. 그는 성장하는 사람이다.
어떤 삶도 괜찮다. 계단의 중간에서 멈추든, 계속 오르든, 우리는 행복하거나 성장할 것이다.
이제 어느 평범한 소년이 되어 보자. 그리고 계단 앞에 서자. 고개를 들면 우거진 수풀과 안개와 구름에 뒤덮인,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계단이 보인다. 뒤를 돌아보면 거기엔 가족과 학교와 직장이 있다. 지금까지 나를 편안하게 보호해 주었던 세계.
작별을 고할 필요는 없다.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떠나지만 우리가 이 계단을 오르고 있음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 모험은 나와 당신의 내면의 성장에 대한 기록이다.
■ 불편함에 대하여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익숙한 책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하나의
책을 읽고 동감하면, 다음에는 그와 관련된 좀 더 심도 있는 책을 선택 한
- 2 -
다. 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자기 분야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불편한 책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하나의 책을 읽고 그 세계에 동감하면 다음에는 그 세계를 무너뜨리는 전혀 다른 세계관의 책을 선택한다. 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자기 세계의 지평을 점차 넓혀가는 사람이 있다.
<책을 선택하는 방법> : 1. 익숙한 책 2. 불편한 책
어떤 방법이 더 옳은가? 그런 것은 없다. 두 가지 모두 괜찮은 방법이다. 하나의 분야를 선택해서 전문적인 깊이를 더해가는 삶도 훌륭하고 다양한 세계를 떠돌며 여행하는 삶도 훌륭하다. 두 가지 방법을 다 선택하면 좋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함을 우리는 안다. 죽음 때문이다. 우리에게 일생동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은 무척 짧다. 너무 어리거나 늙었을 때를 제외해야 하고, 잠자는 시간 경제활동 하는 시간,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고 함께하는 시간을 제외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독서 시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한정되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당신이 두 번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불편한 책을 읽는 사람, 불편한 세계를 선택하고, 그 불편함을 극복해 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세계는 아주 넓고 오래되었으며, 그래서 신비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기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찾거나 만들어낸 세계의 신비로움은 다양한 분야에 숨어 이어져 오고 있다. 내가 들춰내기 전까지 세계의 신비는 나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세계의 다양한 영역을 모험하는 가장 괜찮은 방법은 불편한 책을 읽는 것이다.
■ 불편한 책
그렇다면 어떤 책이 불편한가? 그것은 자신만이 안다.
그런 책이 있다. 처음 몇 페이지를 넘기면서부터 나를 불편하게 하고 반감을 일으키는 책이 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함에도 이미 거짓이라고 믿고 있던 세계, 그렇게 피해왔던 세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책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만약 기독교인이라면 불편한 책은 다른 종교의 책이다. 하
- 3 -
지만 인생의 여정에서 이런 책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왜냐하면 작은 불편함만 이겨낸다면 나는 이 책을 통해 아직 가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편함은 나를 인도하는 하나의 문이다. 불편함을 꾹 이겨내고 다른 종교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하면 곧 알게 된다. 당연히 거짓일 거라고 생각했던 불교나 힌두교의 내적 논리가 얼마나 탄탄한가를. 이제 한 계단을 오르게 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기독교인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교도나 힌두교도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드디어 종교인이 된다.
불편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불편함을 참고 철학과 과학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하면 곧 알게 된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움이 철학과 과학의 성과 안에 담겨 있음을, 나는 다시 한 계단을 더 오르게 된다. 나는 드디어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이 된다.
불편함은 계속된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에게도 불편함이 있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가 그것이다. 먹고 사는 과정에서 생기는 경제, 정치, 사회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문제들은 나를 불쾌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요구들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극복할 때 우리는 이상과 현실이 조율된 하나의 조화로운 삶을 만나게 된다.
이후에도 불편함은 계속된다. 불편함은 삶을 죽음으로, 죽음을 초월로 밀어 올린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불편함을 권한다.
■ 불편함의 변증법
불편함이 성장의 신호라는 건, 삶의 체험 속에서 얻는 소중한 깨달음이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사람이 있다. 그는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다. 그가 제시했던 변증법이라는 개념은 ‘불편함을 수반한 성장’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이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해보자.
방금 하나의 어린 정신이 태어났다. 이 정신은 완벽한 하나의 세계로서 결함 없이 정상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정신의 이름은 ‘정(正)’이다. ‘정’은 평화롭고 고요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어린 정신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자기 안에서 자라난 질문들, 모순된 결론들과 대면하는 것이다. 이제는 공존할 수 없다.
- 4 -
이러한 반대되는 자아상을 이제부터 ‘반(反)’이라 이름 붙이고 자아로부터 떼어내자. 이제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닌 것과 대면하게 되었다. 자아와 반자아의 투쟁이 시작된다. 치열한 투쟁결과 어린 정신은 모순된 자아상을 수용한다. 이제는 ‘정’도 아니고 ‘반’도 아닌 새로운 성숙한 정신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숙한 정신의 이름은 합(合)이다. 합은 완벽한 하나의 세계로서 결함 없이 정상적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제 ‘합’은 동시에 ‘정’이 된다.
이것이 헤겔이 제시한 변증법적 과정이다. 그는 정, 반, 합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정신이 성장해 간다고 생각했다. 헤겔은 변증법의 적용을 단지 개인의 정신에 한정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더 나아가서 물질적인 우주 역시 변증법의 원리에 따라 성장해 간다고 믿었다.
정리해보자. 불편한 지식을 접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기존의 세계를 해체하고 한 계단을 더 올라가는 과정은 변증법적 원리의 현실적 적용이다.
이제 하나의 어린 정신으로서 소년은 계단을 오를 것이다. 그때마다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새로운 지식을 대면해야만 한다. 그리고 결국 기존의 세계를 극복하고 성장할 것이다.
계단 앞에 서자. 새로운 세계를 모험할 시간이다.
■ 출발 전 주의사항
계단을 오르는 모험을 시작하기에 앞서 두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첫 번째는 계단의 각 단계가 보편적인 기준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문학에서 시작해 초월에 이르는 열한 개의 계단을 따라 간다. 하지만 이러한 단계는 보편적인 순서가 아니다. 불편한 책이 사람마다 다르듯 성장의 과정에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식은 사람마다 다른 순서로 찾아온다. 이 책에서 제시된 단계들은 성장하는 개인을 탐구하기 위한 하나의 사례다.
두 번째는 계단의 순서가 서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순서상 ‘종교’보다 ‘과학’이 뒤에 나온다고 해서 진리에 더 가깝거나, ‘이상’보다 ‘삶’이 위에 있다고 해서 더 고결한 것이 아니다.
- 5 -
◉ 첫 번째 계단, 문학 / 죄와 벌
■ 공부 못하는 학생
지금 생각해보면 전형적으로 조금 모자란 학생이었다. 반마다 그런 학생이 꼭 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 노는 것도 아닌, 그냥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가는 것만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학생, 나는 그런 학생이었다. 이런 부류의 학생은 스스로는 모르고 있지만, 사실은 선생님을 가장 화나게 하는 유형이다.
십 년 가까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제는 대중 강연을 진행하게 되면서 가끔 당시의 선생님들을 회상한다. 표현이 서투른 선생님과 표현이 서투른 학생이 만나면 서로를 힘들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관계를 다만 악의적인 관계라고만 평가할 수는 없다. 좋은 사람들만 모아놓아도 서로를 힘들게 할 때가 있다.
내가 다닌 D고교는 서울의 동쪽 끝에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는지 모르겠는데, 당시만 해도 학교 뒷산을 넘어가면 늪지가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가끔 너구리가 나오고 처음 보는 색깔의 새가 날아오기도 했다.
나는 수업을 듣지 않고 종일 창밖의 뒷산을 바라보았다. 계절마다 색을 바꾸는 나무들을 보며 그렇게 하루를 잘 견뎌냈다.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니고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니, 성적은 늘 형편없었다. 2학년이 되어서는 매우 심각했는데 50명이 조금 넘는 반 인원 중 40등 내외였다. 성적이 개선되지 않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학생 스스로의 문제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평가에서 이정도의 성적을 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부모의 문제다.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어머니의 돈벌이로 각박한 경제사정이 그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나는 학교와 집에서 자유롭게 방치되어 창밖으로 흘러가는 계절과 함께 별다른 걱정 없이 천천히 성장해 갔다.
■ 수학 시험
- 6 -
2학년 2학기, 중간고사 때의 일이다. 수학 시험시간, 시험지를 받았는데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주저하다가 OMR카드에 번호를 찍기 시작했다. 시험이 끝났다.
채점하는 시간이 왔다 그냥 갈까 하다가 혹시나 싶어 맞춰 보니 두 문제를 맞혀서 10점이 되었다. 다른 성적도 크게 다를 것이 없는데 전교 문과생 290명 가운데 280등 정도 했던 것 같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내 뒤에도 열 명이 더 있었던 것이었다.
■ 인생의 첫 번째 책
교실 창밖의 뒷산에는 눈이 쌓였다. 방학을 맞는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았다. 이제 곧 고3이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스트레스는 없었다. 대학을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경주의 트랙에서 벗어나 있었으니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나는 겨울 방학 내내 방안에서 누워서 보냈다. 부모님이 나가고 나면 집은 온종일 내 공간이자 내 시간이었다. 잠자고 TV보고……. 그렇게 누워 있는 가운데 문득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책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나는 학교 특별활동으로 문예반에 소속되어 있었다. 도대체 내가 왜 문예반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 어쨌거나 밑도 끝도 없이 스스로를 ‘문학소년’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지금까지 소설책은 고사하고 그 어떤 책도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문예반인데 하는 마음으로 누나의 책장 앞에서 멋져 보일 책이 없나 뒤적이다 놀라운 두께와 놀라운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죄와 벌>게다가 작가의 이름도 ‘도스토예프스키’. 내 삶의 첫 책이 되기에 충분히 묵직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겨울 방학의 절반 가까이를 <죄와 벌>을 끼고 살았다. 책만 들면 금세 졸렸다. 졸리면 잤다. 자다 깨면 읽었다. 그리고 결국 보름 넘어 다 읽었다.
<죄와 벌>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나의 무기력한 일상은 산산조각났다. 무한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칠흑 같은 내 영혼의 골방에 깊은 균열이 생겼다. 빛이 새어 들어왔다. 나는 무엇인가 잘못 건드렸다는 걸 강하게 느꼈다.
- 7 -
■ 죄와 벌
<죄와 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배경이다. 당시 이곳은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앞두고 사회적으로 불안한 상황이었다. 가난과 도덕적 타락이 만연했고, 도심에는 빈민굴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야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센나야 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애칭 로쟈)는 23세의 대학생으로 법학을 전공, 현재는 휴학 중이다.
로쟈는 창백한 피부에 황갈색의 머리카락, 짙은 색의 아름다운 눈, 준수한 외모, 가난 때문에 누더기 같은 옷에 찌그러진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우연히 술집에 들렀다가 두 사람이 대화를 엿듣게 된다.
대화의 내용은 근처에 살고 있는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맡긴 담보물을 빼앗고 고리대금업을 해서 부를 쌓은 전형적인악인이었다. 그런데 죽을 때가 가까워 오자 자신의 사후 명복을 위해 모든 재산을 어느 수도원에 기부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두 사람은 해만 끼치는 노파를 죽이고 그 돈을 빼앗아서 무수히 많은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얘기하고 있었다.
A. 너는 어떻게 할 건데? 네 손으로 노파를 죽일 거야?
B. 나는 당연히 아니지. 이 일은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이 이야기를 들은 로쟈는 고민에 빠진다. 로쟈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평범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비범한 사람, 즉 영웅이다. 두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다. 궁극적인 선을 위해 소를 희생시킬 수 있는지 여부다. 평범한 사람은 그러한 희생 앞에서 주저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없지만 영웅은 희생을 넘어서 궁극적인 선을 추구한다.
고민 끝에 로쟈는 자신이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적인 두려움을 넘어서기 위해 실천하기로 한다.
로쟈는 노파를 살해하고 그때 집안으로 들어서던 노파의 여동생까지 당황한 나머지 살해한다.
계획은 실행되었다. 하지만 로쟈는 고통에 휩싸인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 8 -
는 생각이 든다. 자신은 궁극적인 선을 위해 평범한 사람들의 도덕적 한계를 뛰어 넘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알 수 없는 죄책감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후 로쟈는 고뇌 속에서 다양한 사건과 마주친다. 다시 만나게 된 가족, 여동생의 약혼자, 수사망을 좁혀오는 경찰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아름다운 여인 소냐와의 만남이다.
소냐는 몸을 파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하얀 얼굴에 금발을 가졌고 왜소하고 온순했다. 소냐갸 몸을 팔게 된 이유는 그녀의 가족 때문이었다. 알콜중독자인 아버지, 과대망상증에 폐병을 앓고 있는 의붓어머니, 가난과 배고픔에 우는 의붓 동생들 이들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건 소냐가 벌어오는 돈이었다.
소냐와의 만남을 통해 로쟈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는다. 세상을 구하는 방법에서 로쟈와 소냐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로쟈는 다수의 선을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소냐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다수의 선을 실현했다. 로쟈는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밝히고 용서를 구한다.
며칠의 고민 끝에 로쟈는 경찰서로 가서 죄를 고한다. 8년 형을 선고받은 로자는 시베리아 유형 길에 오른다. 그 뒤를 소냐가 뒤따른다. 유형기간동안 소냐는 로쟈를 돌보고, 로쟈는 성경을 읽는다. 어느 이른 아침, 강제 노역장의 한쪽 한적한 숲속에서, 파랗게 밝아오는 하늘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다.
■ 공부의 시작
그렇게 나는 <죄와 벌>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창밖으로는 천천히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나의 내면의 평화는 이미 깨어졌다. 단조롭고 지루하던 일상은 무너져 내렸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삶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존재임을,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결연한 의지와 실천이 따라야 함을 깨달았다.
로쟈의 행위가 옳았는지 옳지 않았는지는 당시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의지와 실천이라는, 나에게는 없는 낯선 무언가에 나는 강하게 이끌렸다.
- 9 -
국문학과에 진학하겠다고 다짐했다. 왜냐하면 문학을 해야만 하니까. 당시의 나는 문학공부는 국문학과에서만 하는 줄 알았다. 어쨌거나 나에게는 문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가 자라났다.
대입 시험을 준비했다. 동시에 세계문학을 읽어갔다. <전쟁과 평화>, <이방인>, <폭풍의 언덕>,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 <셰익스피어 4대 비극> 등, 삶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나는 문학의 숲을 헤매었다.
성적은 빠르게 좋아졌다. 폭풍 같은 겨울 방학을 보내고 고3의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중간고사의 수학 시험에서 나는 85점을 받았다. 친구 G가 동업을 의뢰해 왔다. 책을 내자는 것이었다. 당시 책제목도 정했다. ‘수학, 1주일만 하면 채사장만큼 한다’ 였다.
어른이 되어 오랜 기간 수험생들을 가르치면서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을 보면 항상 마음이 쓰였다. 그들이 왜 공부를 하지 않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멍청하고 공부 못하는 학생은 없다. 다만 학생을 멍청하고 공부 못하는 존재로 평가하는 어른들의 시선만이 존재할 뿐이다.
개인의 한정적인 경험이 모든 다채로운 상황을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개인적인 경험은 그랬다. 단조롭고 무의미한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문학을 해야만 했고,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국문과에 가야했으며, 국문과에 가기 위해서는 대입 시험을 잘 치러야 했다.
■ 첫 번째 질문
<죄와 벌>의 내용으로 돌아오자.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질문 1> 내가 로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벌레 같은 노파가 하나 있다. 이기적이고 사회에 해가 되는 존재다. 어려운 사람을 갈취하고 타인의 생명을 좀먹는다. 내가 그녀를 살해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사후에 그의 재산을 유익히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이 질문을 공리적인 문제로 쉽게 치환해서 생각한다. 즉 ‘노
- 10 -
파를 살해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관점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잠시 공리주의에 대해서 정리해 보자. 공리주의는 ‘윤리란 무엇인가?’ 라는 거대한 두 관점 중의 하나다.
첫 번째 관점은 변하지 않는 도덕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관점이다. 이것을 ‘의무론적 윤리관’이라고 한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윤리적 의무를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을 죽이지 마라’, ‘거짓말 하지 말라’, ‘노인과 약자를 도와야 한다’등의 의무가 그것이다. 의무론에 따르면 그것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두 번째 관점은 의무론을 거부하며 등장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도덕적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이다. 이것을 ‘목적론적 윤리관’이라고 한다.
공리주의가 친숙한 한국인들은 로쟈의 고민도 쉽게 공리주의로 환원한다. 노파를 살해할 것인가의 문제가 단순히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것이 타당한가?’ 라는 공리주의적 논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답은 명쾌해진다. 공리주의가 타당하다고 믿는 사람은 노파를 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공리주의를 부당하다고 믿는 사람은 노파를 살해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로쟈는 노파 살해를 의무와 권리라고 생각한다. 즉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하가된 사람, 벌레 같은 노파를 살해할 수 있게 허락된 사람, 보통 사람들의 도덕적 족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사람, 그러한 권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러해야만 하는 의무를 사진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바로 영웅이다. 두 번째 질문은 이러한 사람에 대한 질문이다.
■ 두 번째 질문
당신에게 묻고 싶은 두 번째 질문이 있다. 사실 앞선 질문은 이 대답을 한 이후에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
<질문 2> 영웅에 대한 로쟈의 사상은 타당한가?
소설에서 로쟈는 휴학 중인 법학도로, 잡지에 논문을 발표했으며 그 논문에서 예심판사와 로쟈의 대화를 통해 주요 내용이 드러난다. 그의 사상에 대해서 평가해보자.
- 11 -
그 논문에서 로쟈는 영웅을 이렇게 정의한다.
비범한 사람은 모종의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사회의 관습, 도덕, 종교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양심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현실의 장애물을 뛰어 넘을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도 이러한 인물을 찾을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자인 리쿠르고스, 아테네의 혁명가이자 개혁가인 솔론,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 유럽을 정복했던 나폴레옹 등을 들 수 있다. 생각해보면 이들은 당시 법과 관습에서 보면 모두 범죄자라고 할 수 있다. 공통적으로 그들은 그때까지 신성시 되어온 오랜 전통을 파괴하고 , 유혈 혁명이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그 피 앞에서도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로쟈의 사상에는 두 가지의 주장이 섞여 있다. 세상은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으로 나뉜다는 주장과 비범한 사람인 영웅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법과 도덕 그리고 희생을 뛰어 넘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
갓 열아홉 살이 된 나는 열광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법, 도덕, 관습, 종교를 넘어 설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며, 그가 바로 영웅이라는 로쟈의 생각은 난생 처음으로 삶에 대해서 사유하게 된 나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상에는 착하고 선한데 너무나도 가난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반면 범죄자와 사기꾼과 악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부유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던 세상의 부당함과 불공평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치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회의 부조리란 선구적인 영웅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다는 깨달음에 나는 열병을 앓았다. 당시의 나는 그랬다.
■ 첫 번째 계단
만약 도스트예프스키가 <죄와 벌>을 통해서 지향해야 하는 인물을 설정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로쟈보다는 소냐에 가까울 것이다. 로쟈는 결국 소냐를 통해 깨닫는다. 사상과 사유의 구름속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 12 -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은 <죄와 벌>은 나로 하여금 소냐의 삶에 더 귀 기울이게 한다. 주어진 삶과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의 구원을 찾는 모습은 나에게는 더욱 도달하기 어려운 이상향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제 막 열아홉이 된 나는 폭풍 같은 로쟈의 말과 사상에 더 크게 매료되었다.
여행을 마친 사람이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여행의 장단점과 주의사항을 말해줘 봤자 소용없다. 스스로 밟아가야 한다. 직접 경험하고 실패하고 배우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의 재목이 ‘열한 계단’이다. 충분한 시간과 경험이 주어지지 않은 가운데, 자신의 궁극적인 모습으로 한 번에 도약하는 사람은 없다. 인생이라는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자신만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
견고하던 나의 세계에 균열이 가고 삶의 방향을 크게 바꿔야만 했던 시점을, 나는 비교적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건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죄와 벌>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다. 나의 첫 번째 계단은 문학이었다.
소년은 첫 번째 계단을 오른다. 뒤를 돌아봤을 때, 그곳엔 아직도 가족과 학교와 직장이 있다. 지금까지 나를 편안하게 보호해 준 세계, 그곳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소년은 이제 다른 시야로 세계를 본다. 세계는 다르게 드러난다. 소년은 이제 청년이 된다.
◉ 두 번째 계단, 기독교 / 신약성서
■ 재수생
아직도 기억이 난다. 불합격 통지를 받던 날, 입학시험 원서를 넣었던 S대학에서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내렸다. 날은 춥고 흐렸다. 지난밤부터 함박눈이 쏟아졌다. 무릎까지 오는 검정색 농구코트의 앞 지퍼를 턱밑까지 채웠다.
합격자 명단은 대학 운동장에 커다랗게 붙여졌다. 커다란 합격자 명단 앞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번호를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순차적으로 번호를 훑기 시작했다. 없다. 끝 번호부터 반대로도 해 보았다. 이름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이다. 열차 좌석의 끝에 구부리고 앉아 나는 소리 없이 펑펑 울었다.
- 13 -
그렇게 재수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할만 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빚을 졌다. 기대하지 않았던 아들에게서 일말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이 쓰였던 건 밤마다 간절히 기도하는 어머니의 굽은 등이었다. 그 오랜 기도가 만들어 내는 고요함 가운데 어머니의 흐느낌이 시작되면 나는 화가 났다.
소설을 탐독했다. 공부에 지칠 때면 언제나 소설책을 폈다. 걸어다니는 동안에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끔은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밤, 지하철 벤치에 앉아서도 책을 읽었다. 막차 시간이 가까워진 승강장은 언제나 마음을 평화롭게 했다. 그 고요함이 좋았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삶의 이유와 목적은 무엇일까? 왜 초라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지속해야만 하는 걸까? 소설 속에서 답을 찾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도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매일 풀어야 하는 수학문제처럼 정확한 답이 있기를 바랐다.
■ 로쟈의 성서
학원에서 물리 수업을 받던 중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죄와 벌>이 생각났다. 로쟈가 소냐의 집에 찾아가서 자신의 죄를 고하던 부분이었다. 그는 고뇌의 고통속에서 소냐에게 부탁을 한다. <신약성서>를 읽어 달라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직전, 그 숨막히는 절박함 속에서 말이다. 로쟈가 부탁한 내용은 죽은 라자로가 부활하는 부분이다. 소냐는 <요한복음서> 11장을 읽어 준다.
많은 유다인들이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 있었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타는 마중을 나갔다. 그동안 마리아는 집 안에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주실 줄 압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또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
- 14 -
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날 예수께서는 라자로를 부활시켰는데 죽었던 라자로가 나올 때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
(요한복음 11장 19절 ~ 44절)
로쟈는 소냐의 음성으로 라자로의 부활을 듣는다. <죄와 벌>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부신 장면이다. 가난에 찌든 동굴 같은 방에선 살인자와 매춘부가 부활의 책을 읽고 있다.
왜 로쟈는 가장 절박한 순간에 죽은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는 부분을 듣고 싶어한 것일까? 그것은 구원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라자로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처럼 자신도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구원 받을 수 있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성서 속에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삶의 마지막 목적은 구원에 있고, 그 구원의 방법을 성서가 알려줄지도 모른다. 성서를 읽기로 했다. 삶에 대해 신에게 따져 묻기로 했다.
■ 성서
성서는 말 그대로 성스러운 글을 의미하므로, 다양한 종교들 마다 나름대로의 성서를 갖는다. 이슬람의 코란이나 힌두교의 베다 등이 그것이다. 다만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성서라고 할 때는 그리스도교의 <신약>과 <구약>을 의미한다.
구약은 신과 인간이 맺은 오래된 약속을 뜻하고, 신약은 새로운 약속을 뜻한다.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된다. 구약은 예수탄생 이전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과 구원의 약속이 역사적 사건과 연결되어 종교적 시각으로 해석되어 있다. 신약은 그리스도 탄생 이후의 기록이다. 총 27권으로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 그리고 묵시록이다. 복음서는 4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신약의 꽃이다.
복음이란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무언가 어렵고 지루할 것 같지만, 이 네 개의 복음서는 생각보다 재미있다. 철학적이 이론서가 아니라 예수의 생애가 구체적으로 서술 되어 있기 때문이다.
- 15 -
■ 당시의 상황
4대 복음서에 기반한 예수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
예수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될 것임을 전해 듣는다. 이후 약혼자였던 목수 요셉과 함께 호구조사를 위해 베들레헴으로 가다가 마구간에서 예수를 출산한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집트로 몸을 피한다.
이는 당시의 헤로데 대왕 때문이었다. 그가 유다인의 왕이 태어난다는 예언을 듣고 이스라엘 지역의 유아들을 살해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헤로데 대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에야 마리아와 요셉은 갈릴래아 지역으로 돌아와 나자렛에 정착한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선명하게 파악되지 않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지역 이름과 통치자의 이름이다.
당시 유다인들은 북쪽으로부터 갈릴래아, 사마리아. 유다 지역에 넓게 퍼져 살았는데 맨 남쪽은 유다지역으로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이있고 예루살렘에는 예수가 붙잡힌 겟세마네 동산과 처형당한 골고다 언덕이 있다. 제일 북쪽의 갈릴래아 지역에는 예수의 고향인 나자렛이 있다.
그 가운데를 사마리아 지역이라 했는데 이 지역에는 유다인과 다른 민족의 혼혈인 사마리아 인들이 살고 있었다. 예수는 유다 지역과 갈릴래아 지역을 오가며 말씀을 설파했다.
당시의 통치자들은 루가 복음서에 잘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의 사마라아 지역을 포함한 전 지역은 빌라도가, 갈릴래아 지방은 헤로데 대왕의 둘째 아들인 안티파스가 통치했다. 로마의 입장에서 본다면 빌라도는 직영점, 안티파스는 가맹점 정도가 된다.
■ 가르침의 시작
갈릴래아 지역의 작은 마을 나자렛에서 예수는 유년시절을 보낸다. 서른 살 무렵이 되면 그는 전도를 시작한다. 예수의 활동에 앞서 그의 등장을 예언하며 길을 닦은 인물이 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이다. 요한복음서의 그 요한과
- 16 -
는 다른 사람이다. 당시 요한은 흔한 이름이었다. 요한은 예수보다 6개월 앞서 태어난 친척으로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임을 알리며 요르단 강가에서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예언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나타나 세상을 벌할 것이다. 둘째는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그리스도가 죽게 될 것이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는 홀로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을 하며 기도를 했다. 이때 악마가 나타나 예수를 시험하려 했지만, 이를 물리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모으면서 본격적으로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갈릴래아와 유다지역에서 예수는 기적을 행하고 말씀을 전파했다. 우선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였다.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했고, 수많은 병자를 고쳤으며, 물위를 걸었다. 그리고 라자로를 비롯한 죽은 이들을 살렸다. 예수는 기적을 행하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 가르침의 장소는 산과 강과 회당을 가리지 않았다 비유와 상징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메시아의 도래를 이야기한 것이다.
■ 첫 번째 질문
나는 불만이었다. 밤은 깊어가고, 지하철이 승강장은 고요하고, 막차 시간은 다가오는데, 복음서 안의 가르침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말씀이 가득한데, 왜 그리스도가 점령한 이 세계는 가난하고 구차한 삶으로 가득하단 말인가? 고통 속에 놓인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은데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서 무얼하고 있단 말인가? 나는 물어야 했다.
“그 나자렛 사람이 왔다.”
군중들은 호숫가에 앉거나 서 있었다. 예수는 배에 올라앉았다.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을 하고 계신다. 중간에 와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질문을 하러 왔으니 기회를 봐야 겠다.
그리스도 :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가 쪼아 먹었다, 어떤 것은 돌밭에 떨어져 말라 죽었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서 숨이 막혔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몇 십 배, 백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 13:3~13:9)
- 17 -
재수생 : 알아들었습니다. 씨가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억눌린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 마태 13:18)
그리스도 ; 너는 여기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재수생 : 질문이 있어서 왔습니다. 2016년을 기준으로 75억의 인구 중에서 세 명 중 한 명이 당신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가난과 고통과 불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 겁니까?
그리스도 :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말씀을 들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해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마르코 12:38_ )
■ 두 번째 질문
재수생 : 벌을 주신다고 하신지가 벌써 이천 년이 넘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벌을 받고 누가 상을 받았습니까? 실제 현실은 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더 부유해졌고, 상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가난과 비참함 속에 던져졌습니다. 하느님이 완전히 선하고 전지전능하시다면, 왜 악한 세상을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방치해두는 겁니까?
하느님이 선하지만 전지전능한 것은 아니거나, 반대로 전지전능하지만 선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으로요.
그리스도 : 선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지금 당장 세상의 악을 몰아내지 않으시는 이유가 있다. 이 이야기를 들어보아라.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기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말했다.
주인님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 원수가 그랬다. - 저희가 가서 그것을 뽑아버릴까요? -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에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태워버리게 하겠다. 이 말을 이해하겠느냐? (마태 13:24 ~ 30)
- 18 -
재수생 :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심판에 이를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심판의 때까지 우리는 무엇을 하며 기다려야 합니까?
그리스도 :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야 한다. 그 계명이란 다음과 같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증언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재수생 :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요.
그리스도 :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마태 19:2)
재수생 : 그리스도교인 중에서도 지금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한국 교회에서는 사회적 성공과 부의 획득을 자기 신앙의 증거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부와 명성을 쌓았다는 건 하늘이 자신을 축복한 결과이고, 가난과 고통 속에 있다는 건 하늘이 벌주신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마태 19:23 ~ 24)
■ 최후의 만찬
염치없이 따라 다녔다. 그리고 질문을 했다. 아무리 치명적인 질문과 반론이 제기되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질문을 모순 없이 해결해줄 수 있기를 바란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반박할 수 없는 진리가 당연히 가장 위대한 진리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언제나 참일 수밖에 없는 진리를 원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반박할 수 없고 언제나 참인 진리가 가장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유다인들의 최대 명절인 과월절의 하루 전. 예수와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예수는 이 순간이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임을 알았다.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머리에 두른 뒤, 대야에 불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어 주었다. 그리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세
- 19 -
족식이 끝난 후에는 식탁에 모여 즐겁게 음식을 먹었다.
식사 도중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들 중 자신을 배반할 사람이 있음을 밝혔다. 제자들은 자신이 아닐 거라고 스승에게 말했다. 예수는 빵과 포도주를 들어 축복하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과월절(유월절) : 유대인 3대 명절 중의 하나. 이집트 노예생활로부터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날(유대력 니산월 14일 저녁)
■ 세 번째 질문
예수 그리스도는 바쁘셨다. 제자들에게 말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는 질문할 수 있는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잠시 후 가리웃 유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함께 올리브 산으로 향했다. 산길은 어두웠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을 했다.
재수생 : 삶이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대한 저의 질문에 당신은 계율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는 시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교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당신을 믿는지의 여부입니다. 당신을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요.
그리스도 : 나는 실제로 그렇게 이야기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뜻이다. (요한 3:16~18)
재수생 : 당신을 믿는다는 건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당신의 지위를 믿는 것입니다. 당신을 하느님이 보낸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을 말하지요. 두 번째는 당신의 가르침을 믿는 것입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이타적인 사랑의 가치를 이해하고 그에 따른 삶을 사는 것을 믿음이라는 말
- 20 -
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첫 번째 해석을 절대적으로 믿습니다. 이타적인 삶을 살았는지의 여부보다는, 어쨌거나 궁극적으로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믿는 것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정말로 하느님은 당신의 지위는 믿지 않지만 평생을 이타적인 마음으로 살아온 사람보다, 당신의 지위를 믿지만 평생을 이기적으로 살아온 사람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는 건가요?
■ 예수의 마지막
베드로가 물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예수는 지금 자신이 가는 곳으로 따라올 수 없다고 말했다. 베드로가 장담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가도 좋고 죽어도 좋습니다.” 예수가 답했다. “베드로야, 내 말을 들어라.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베드로를 포함한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겟세마니 동산에 올랐다. 예수는 홀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도를 했다. 제자들에게 돌아왔을 때 제자들은 잠에 취해 있었다.
그때 유다가 왔다. 대사제들이 보낸 군인들과 함께였다. 유다는 군인들과 약속한 신호에 따라 예수에게 다가가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예수는 잡혔다. 제자들은 모두 달아났다.
예수는 대사제였던 가야파의 집으로 끌려갔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 뒤를 따랐다. 대사제의 관저에 들어가서 불을 쬐고 있는 경비원들 틈에 앉았다. 여종 하나가 베드로를 알아봤다. “당신도 저 갈릴레아 사람 예수를 따라다니던 사람이 아니냐?” “베드로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피했다. 대문을 나서려고 할 때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봤다. 베드로는 사람을 잘못 보았다며 예수라는 사람은 알지도 못한다고 맹세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왔다. 사람들은 베드로를 예수의 무리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자신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잡아떼었다. 그때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사람을 피해 몸을 숨긴 뒤, 엎드려 몹시 울었다.
다음 날이 되어 예수는 유다총독 빌라도 앞에 섰다. “네가 유다의 왕인가?”
- 21 -
빌라도가 물었다. 예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특별한 죄가 없으며, 여기까지 끌려온 것이 대사제들과 군중의 시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당시 유다지역에는 명절이 되면 군중의 요구에 따라 죄수 한 명을 풀어주는 관례가 있었다. 유다인들 간의 문제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빌라도는 그들 스스로가 선택하게 했다. 당시에 바라빠라고 하는 죄수가 갇혀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이름 역시 예수였다. 빌라도가 군중을 향해 물었다. “누구를 놓아주면 좋겠느냐? 바라빠라는 예수냐? 그리스도라는 예수냐?”
군중들은 바라빠를 풀어주기를 바랐다.
빌라도는 물을 가져오게 하고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었다. 이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그는 자신이 결코 책임이 없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예수를 채찍질 해서 십자가형에 처하게 했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렸다. 오전 아홉시에 시작된 처형은 오후 세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 무렵 예수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이 말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이다.
저녁이 가까웠다. 예수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았다. ‘이제 다 이루었다.’ 그의 고개는 떨구어졌다. 그날이 가기 전에 예수의 시체는 수습되어 당시의 관습대로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안치되었다. 큰 돌을 굴려 입구를 막았다. 맞은 편에는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앉았다.
안식일이 지나고 그 이튿날이 되었다. 동틀 무렵 두 여인이 무덤을 보러갔다. 돌은 치워졌고, 예수의 시신은 없었다. 예수는 부활했다. 그리고 갈릴레아에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재회했다. 예수는 그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승천했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 그 이후
막차가 승강장을 빠져 나갔다. 피로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따라 나도 계단을 올랐다. 복음서는 이렇게 끝났다. 그런데 4대 복음서 중 유일하게 <요한복음>에서 그 이후의 일화가 짧게 소개되어 있다.
- 22 -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의 어느 날, 베드로와 다른 여섯 명의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호숫가에 예수가 서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가 소리쳤다.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져라. 그 말대로 하니 끌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잡혔다. 제자 중 하나가 예수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베드로는 물속에 뛰어들어 헤엄쳐 왔다 다른 제자들도 배를 저어왔다.
육지에 올랐을 때, 숯불이 펴 있고 생선이 올려 있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들어라.”라고 말했다. 평화로운 아침식사가 끝나고 예수가 베드로에게 물었다. “베드로야 너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그렇다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수는 한 번 더 물었다. “베드로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베드로는 다시 그렇다고 말했다. 예수는 한 번 더 물었다. 그때도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에는 서울의 야경을 볼 수 있는 좁은 장소가 하나 있었다. 가끔은 그곳에서 한참을 서서 서울이 야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재수 생활도, 집안 살림의 어려움도, 성서속의 질문들도 곧바로 얻거나 해결할 수 없는 없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나는 두 번째 계단에 올라섰다.
◉ 세 번째 계단, 불교 / 붓다
■ 대학 신입생
재수 끝에 결국 대학에 입학했다. 친구 G의 증언에 따르면 늦게 공부를 시작했음에도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건 ‘머리가 새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신입생이 된 나는 매일 흥분 상태였다. 수업을 제외한 모든 것이 좋았다. 벚꽃이 날리는 캠퍼스, 동아리 사람들, 출입금지의 잔디밭과 그걸 무시하고 잔디밭에 앉아 통기타를 치는 학생들. 그런 모든 것이 자유롭고 신선했다.
다만 나의 외형만 이러한 신선함에 부합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매우 부담스러운 신입생이었다. 나이도 한 살 많은데다가 외모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 많은 여드름, 발목 부분이 조이는 검정색 추리닝 바지, 허름한 점퍼 등, 그것도 대부분 동아리에서 받은 옷들이었다.
- 23 -=
이러한 몰골을 유지한 이유는 첫 번째는 도대체 이게 왜 문제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자기 세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외모에 신경을 쓰는 건 그 사람의 영혼이 빈곤하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은 정의로움과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현실 세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인간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현실을 넘어선 세계라고 생각했다. 아직 도달하지 않은 정의로운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고, 이를 위해서는 인류가 영혼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이상주의자들은 보통은 괜찮고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는 결벽증적인 강박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세상을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청결과 불결로 나누고 자기가 선, 정의, 청결의 편에 섰다고 단정하고 거기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사실은 나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이상주의자들이 문제적인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극단적인 사람들이다. 평생을 이상주의자로 살거나 혹은 평생 한 번도 이상주의자로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문제다. 전자는 미숙해 보이고, 후지는 인간으로서의 매력을 찾을 수 없다.
■ 몽골 여행
이상주의자인 나에게 세상은 완전하고 선명했다. 그래서 행복했다.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그 순간은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몽골로 떠난 봉사활동 중에 있었다.
동아리에서 단체로 가는 봉사활동이었고, 스무 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참여했다. 나는 몇 안 되는 1학년들 사이에 끼여 있었다.
난생 처음 타보는 비행기였다. 출발 전부터 흥분되었다. 가는 곳은 수도 울란바토르 주변, 빈민촌 유치원의 울타리를 세우고, 노후 주택을 수리하고, 동물이 빠질 위험이 있는 구덩이를 흙으로 메우는 일이었다.
환경은 열악했다. 게다가 몽골의 건조한 기후 때문에 힘들었다. 아무리 일을 해도 땀이 나지 않기 때문에 무리하다가 쓰러지기도 했다.
저학년들이 빌빌대는 것과 달리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 선배들은 일을 매우 잘했다.
- 24 -
일에 열중하다가 허리를 펴면 몽골의 초원과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몽골은 아름다운 나라였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지평선 그리고 둥글다고 밖에는 표현하기 힘든 막힘없이 거대한 하늘, 저녁이 되면 하늘은 노을에 붉게 물들었고, 밤이 되면 쏟아질 것만 같은 별들로 가득 찼다. 숙소는 초원 위에 지어진 몽골 전통의 이동식 가옥인 게르였다.
잠을 자는 게 아쉬웠다. 혼자 게르를 빠져나왔다. 세상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쏟아질 듯한 별들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은하수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았다. 밤하늘에는 실제로 별들의 강이 있었다. 그것은 놀랍도록 선명하고 짙은 우윳빛이었고, 한쪽 하늘에서 시작해서 내 머리 위를 거쳐 반대편 하늘까지 거대하게 이어져 있었다.
이제 그만 살아도 되겠다고 생각한 건 바로 그때였다. 그 순간 너무나도 맑은 정신 속에서 나는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나의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그것은 시간의 한계를 초월한 느낌이었다.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완전함 혹은 충만함의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완전함과 충만함이란 아이러니하게도 미숙함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른으로 성숙해 간다는 것은 세계의 복잡성을 초연하게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세계의 복잡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함과 충만함의 허구성을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완전함과 충만함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행복은 없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지금의 단계에 머무를지, 아니면 한 걸음 더 오를지. 니체는 여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충고한다.
“만약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다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려 한다면 질문하라.”
■ 니체의 비판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수많은 질문 중 나를 괴롭힌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수동적인 존재인가?”
- 25 -
내 삶을 구원받기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과 그리스도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인간 삶의 구체적인 현실은 무엇인가. 주체적인 도덕성, 자기 극복의 의지, 저항의 가치, 이 모든 것은 단지 인간이 자만한 결과인 것일 뿐인 건가. 실제로 교회는 인간에게 강요한다. 순종과 인내와 복종을 말이다. 인간 의지의 가치는 그렇게 하찮은가. 인간은 다만 종으로서, 노예로서 태어난 것일 뿐인가.
니체는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비판한다. 그리스도교적 사상이 서구의 문화를 병들게 했다고 진단한다.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도덕성은 원한과 증오에서 출발한 노예의 도덕에 기반을 둔다. 니체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니체는 그의 책 <도덕의 계보>에서 두 가지 가치 체계를 비교한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인들의 가치체계와 그리스도교의 가치체계다.
0 고대 그리스인들의 가치체계 : 좋음과 나쁨
- 좋은 사람 : 주체성, 강인함, 자유, 스스로 주인이 되는 사람
- 나쁜 사람 : 순종, 복종, 겸손, 절제, 저속, 비천, 열등한 사람 즉 노예들
0 그리스도교의 가치체계 : 노예의 도덕에서 출발
- 노예들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상상해 낸다. ‘주인은 악하다.’ 이것이 그들의 도덕관의 시작이다. 이제 노예들의 머릿속에서 주인은 탐욕스럽고 음란하며 신을 거역하는 죄 많은 존재로 변신한다. 노예들의 원한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악으로 규정된 주인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주인이 악이라면 노예 자신은 무엇인가? 당연히 우리는 선이다.
가치는 전복된다. 주인의 ‘좋음’은 ‘악’으로, 노예의 ‘나쁨’은 ‘선’으로 뒤바뀐다. 이런 일은 실제 역사에서 발생했다.
유다인들은 로마 식민지 노예였다. 오랜 기간 노예 상태로 지배받았던 무력감은 결국 유다인들의 영혼 속에 지워지지 않는 원한과 증오를 남겼다. 그리고 그러한 원한과 증오는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정립되면서 새로운 도덕 체계로 탄생한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유럽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노예의 도덕은 오늘날 유럽인의 도덕 체계로 자리잡게 되었다.
니체는 근대 유럽사회를 진단한다. 그리스도교는 유럽을 병들게 했다. 노예
- 26 -
의 도덕, 원한과 증오의 도덕이 유럽인들을 잠식하고 있다. 신에 대한 순종, 복종, 겸손, 절제라는 초라하고 수동적이며 부정적인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왜 그들이 지금 내 앞에서 신에 대한 순종을 말하는지, 왜 국가에 대한 복종을 말하는지, 왜 나에게 겸손하고 절제하는 도덕적인 삶을 살라고 강조하는지, 그러한 강요를 통해 도대체 자신은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인지를 의심의 눈으로 직시해야 한다.
■ 세 번째 계단 앞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대부분 철학과 과학 서적을 읽으면서 보냈다. 특히 철학이 도움을 주었다. 다음 계단으로 올라서는 것이 결코 불경하지 않음을 다양한 근거를 통해 알려 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주저했다. 니체의 진단이 뼈저리게 정확해도, 철학과 과학의 근거가 인간의 주제성을 강력하게 논증해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무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로쟈의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받아들인 뒤 나에게 찾아온 영혼의 충만함에 상처가 나는 것이 괴로웠다. 당시 나는 다음 계단으로 올라서는 것이 이들을 버리거나 배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나로 하여금 다음 계단으로 오를 수 있도록 용기를 준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붓다였다. 붓다는 타자에 의한 구원이 아닌, 스스로에 의한 깨달음이 가능하다는걸 몸소 보여준다.
붓다라는 계단으로 나아가 보자.
■ 당시의 상황
붓다는 기원전 6세기에 히말라야 산기슭의 작은 나라 사키야족의 왕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 여기서 고타마(Gotama)는 성이고 싯다르타(Siddhrtha)는 이름이다. ‘자신의 목표를 성취한 자’라는 뜻이다.
- 붓다 : 일반 명사로 깨달음을 얻은 자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
- 석가모니 : ‘사키야족의 성자’라는 뜻
- 아리안 족 : 기원전 2500년 경, 인더스 강 부근으로 내려옴. 펀자브 지방
- 27 -
에 정착하여 ‘베다(Veda)’라는 문서작성. 베다는 다양한 신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문서
- 의례절차를 주관하는 사제들을 ‘브라흐마’ 혹은 ‘바라문’이라 함
인더스 강 지역에는 ‘베다’의 전통이 강하게 전파되었으나, 갠지스 강의 동쪽 지역은 그렇지 않았다. 이 지방에서는 해탈에 이르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다양한 스승들이 탄생했고 그들을 ‘슈라마’ 혹은 ‘사문’이라 불렀다. 그들은 출가, 고행, 명상 등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했다.
정리해 보면 붓다가 활동하던 당시의 인도에는 두 종류의 사상이 대결하며 공존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라문’과 ‘사문’이다. 붓다는 이들 사상의 일부를 수용하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 어린 시절
기원전 6세기, 싯다르타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슈도다나, 어머니는 마야부인, 마야부인은 흰 코끼리가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했다. 출산이 가까워 당시 전통에 따라 친정으로 향하던 중 룸비니 동산에서 싯다르타를 낳았다. 전설에 따르면 싯다르타는 태어난 직후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외쳤다고 한다. 여기서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것은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여섯 단계의 윤회를 뜻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것은 윤회의 고리를 끊었음을 상징한다.
이어서 그가 외친말의 의미는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 온 세상이 고통스러우니 내가 마땅히 이를 평안케 하리라.’라는 뜻이다.
여기서 ‘나’가 의미하는 것은 싯다르타 자신이 아니라 일반명사로서의 각각의 나를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싯다르타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성인 아시타는 이렇게 예언한다.
“왕자님은 세속에 계시면 세계를 통일할 제왕이 되실 것이고, 세속을 떠나면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실 것이니 많은 이를 고통에서 구하실 것입니다.
왕은 아시타의 이야기가 기뻤으나 왕자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되기를
- 28 -
바랐다. 그는 바라문을 초청해서 아기의 장래를 예언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라문은 아이가 자라서 네 가지를 보면 출가 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네 가지는 늙은이, 병든 이, 죽은 이, 출가 수행자다. 왕은 왕자가 절대 이러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호화로운 궁궐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성장했다.
■ 출가
어느 날 싯다르타는 하인 찬나를 데리고 궁 밖으로 몰래 빠져 나왔다. 거기서 싯다르타는 인간이 처한 생로병사의 운명 앞에서 깊은 슬픔에 빠졌다.
왕은 싯다르타의 슬픔과 우울을 눈치 챘다. 그래서 싯다르타가 16세가 되자 현실에 정착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공주 아쇼다라와 혼인시켰다 얼마 후 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싯다르타는 이들의 이름을 ‘라훌라(발목을 잡는자)’라고 지었다.
하지만 속세에 대한 미련은 싯다르타를 붙잡지 못했다. 29세가 된 싯다르타는 출가를 결심하고 궁궐을 빠져 나왔다. 성문을 빠져 나오며 싯다르타는 맹세했다.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그는 하인 찬나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칼을 꺼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 고행
싯다르타가 처음 찾아간 곳은 마가다 왕국이었다. 그곳에는 여러 혁신적 종교들이 성행 중이었다. 싯다르타는 스승을 찾는다. 그리고 알라라 칼라마와 우사카 라마 풋타에게서 가르침을 받기로 한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판단한 싯다르타는 ‘가야’라는 지방으로 내려갔다. 훗날 이곳은 붓다가 깨닫게 되는 곳으로, 이를 기려 ‘붓다가야’라고 불리게 된다.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만난 다섯 명의 고행자들과 함께 생활 했다.
고행은 6년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 깨달음
결국 싯다르타는 강변에 쓰러졌다. 그의 몸은 뼈밖에 남지 않았다. 마을 사
- 29 -
람들은 그를 먼지귀신이라고 불렀다. 정신을 차렸을 때 싯다르타는 생각했다. 고행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극도의 쾌락도, 반대로 극도의 고통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싯다르타는 쾌락과 고통의 중도로서 자신만의 길을 가기로 한다.
싯다르타는 적당한 크기의 보리수나무 아래 편안한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평온한 몸과 마음으로 깊은 명상에 들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그는 다짐했다.
깊은 선정에 들었을 때 욕계의 왕 마라가 찾아왔다. 마라는 아름다운 외모의 세 딸이 있었다. 그들은 각각 탐욕, 성냄, 욕망의 의미했다. 마라는 세 딸을 보내어 싯다르타를 유혹했다. 다음에는 군대를 보내어 위협했지만 선정을 방해할 수 없었다. 싯다르타는 점점 더 깊은 선정에 들었다.
얼마 후 사성제를 깨닫는다. 사성제는 불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교리로 고(苦), 집(集). 멸(滅), 도(道)라는 네 가지 진리로 구성되어 있다.
고는 고통, 집은 집착, 멸은 소멸, 도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행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팔정도는 여덟 가지의 수행 방법인데,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생명을 유지하고, 바르게 노력하여 바른 신념을 갖고 바르게 정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싯다르타는 드디어 스스로 눈뜬 자, 붓다가 되었다. 그의 나이 35세 때의 일이다.
■ 가르침의 전파
붓다는 옛 스승이었던 칼라마와 라마풋다에게 가서 가르침을 전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래서 붓다는 다섯 명의 고행자를 찾아갔다. 고행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제자가 되었다.
그들에게 행한 첫 번째 설법 이후 붓다는 45년 동안 인도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가르침을 전파했다.
붓다의 궁극적인 가르침은 “어떤 죄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행할 것,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정화할 것.”
■ 열반
- 30 -
붓다 생애의 마지막 석 달은 <대반열반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오랜 기간의 가르침을 펼치고 붓다는 쿠시나라 지역을 향해 최후의 여정을 떠났다. 붓다의 상태는 위독했다. 제자들은 걱정했다. 그들은 파바라는 지역에 잠시 멈추었다. 그곳에는 붓다를 따르는 대장장이 춘다가 살고 있었다. 그의 망고나무 숲에서 붓다와 재자들은 머물렀다. 춘다는 훌륭한 요리로 그들을 대접했지만, 붓다는 그 음식을 먹고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여행 끝에 쿠시나라에 도착했을 때, 붓다는 매우 위독한 상태였다. 마지막을 깨달은 붓다는 목욕을 했다. 제자들에게 사라나무 숲속에 누울 자리를 깔게 했다. 그곳에 바르게 누워, 붓다는 밤늦게까지 제자들에게 최후의 가르침을 전했다.
“자신이 자신의 등불이 되어라.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되어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처로 삼아라.”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붓다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생겨난 존재는 없어지게 되어 있다. 부지런히 정진에 힘써라.”
이대로 선정에 든 붓다는 그대로 완전히 열반에 이르렀다.
■ 두 가지 길
듣고 싶던 대답이었다. 구원은 반드시 타자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신을 비롯한 그 어떤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는, 나 스스로에 의한 깨달음도 가능하다. 붓다의 가르침은 나로 하여금 사람을 향하게 했다. 보이지 않는 하늘 위 그 무엇인가를 좇는 일을 그만두고, 자신의 내면에 주목하게 했다.
나는 종교적 구원에 이르는 두 가지의 길이 있음을 배웠다. 첫 번째 길은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길이다. 두 번째 길은 붓다를 뒤에 두고 홀로 걸어가는 길이다.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길이 더 마음에 드는가? 나는 두 가지 길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두 방법 모두를 간직하기로 했다.
모든 결정의 권한은 나에게 사람에게 있다. 심지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선택하는 것 까지도 말이다. 붓다를 통해 나는 신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주체적이고 의지적인 존재로서 건강한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 31 -
◉ 네 번째 계단, 철학/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동해 여행
어느 날 밑도 끝도 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야겠다. 가방을 가져 오고 옷도 챙기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도 하나 챙겼다.
그렇게 뜬금없이 출가가 결정되었다. ‘머릿속이 맑아지면 돌아오겠다.’ 다짐하며 편의점에 가서 삼천 원을 주고 지도를 하나 샀다. 전국 지도였다 무작정 지도를 훑었다. 어디를 가볼까. 그러다 ‘동해’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동해로 간다.”
동해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그곳은 내가 상상하던 곳이 아니었다. 막연히 바다와 해안선이 펼쳐진 대자연의 풍경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와 보니 공장 지대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실제로 큰 굴뚝을 가진 공장들이 있었고 넓은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으며,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선 오늘 밤을 보낼 곳을 찾아야 한다. 당시 나는 숙박시설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정처 없이 걸었다. 기찻길을 따라 걷다가 ‘감추사(甘湫寺) 00미터’ 라고 적힌 표지판을 발견했다. 화살표를 따라 좁은 산길로 들어섰다. 작은 절의 입구가 나타났다. 문을 두드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조폭과 같은 실루엣을 가진 덩치 큰 남성이 나타났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하루만 재워 달라.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니다. 이정도의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주지 스님이셨던 것 같다. 그분이 안내해준 곳은 암벽을 파서 만든 작은 방이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서 누우면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딱 맞는 정말 작은 공간이었다.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잠이 오지 않았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새벽의 푸른 빛 속에 드러나는 감추사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곳이었다. 지난 밤에 이런 곳에서 밤을 보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푸르른 바다. 그 바다와 맞닿은 암벽, 그 위에 감추사는 소박하게 올라앉아 있었다. 아침을 먹고
- 32 -
가라는 말씀에 함께 아침을 먹었다. 호박이 들어 있는 된장찌개와 나물반찬. 감사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감추사를 떠났다.
■ 철학에 대한 관심
잠은 절이나 교회의 문을 두드려서 해결했다. 거절당하기 일쑤였지만, 다행히도 받아주는 곳이 있었다. 동해시를 중심으로 돌아다녔다. 목적지 없는 여행은 마음을 가볍게 했다. 해변이나 계곡이나 편해 보이는 자리가 있으면 그대로 앉아 시간을 보냈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하늘 빛깔, 바람에 따라 몸을 흔드는 나뭇잎을 천천히 주시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구경했다.
오래 앉아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이었다. 직전 학기에 수강했던 철학 수업의 부교재였다. 그 무렵이 철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 시점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철학 책은 무엇을 말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철학과 관련된 책들을 꾸역꾸역 읽어갔다. 기대 때문이었다. 당시 나에게 철학이라는 분야는 막연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미지의 대상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는 진리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대학 수업을 포기할 뻔했던 나를 구한 건, 우연히 청강한 철학 수업이었다. 철학 수업은 놀랍고 재미있었다. 그것은 세계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존재적인 재미였다. 수업을 듣고 강의실을 나설 때마다, 기존에 내가 알던 세계는 철저히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를 토대로 재구성되었다.
철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게 된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국문과의 문학 비평시간의 일이었다. 교수님이 들어오셨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교수님은 담담하게 주의사항을 전달하셨다. “여러분, 문학에 정답이란 없습니다. 하지만 치열하게 토론해 봅시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어떻게 정답이 없는데 열띤 토론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무엇인가 옳은 견해가 존재하고 그른 견해가 존재해야 주장과 반박이 가능한 게 어닌가? 내가 수업 내내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도 다른 학생
- 33 -
들은 열심히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고 토론을 이어갔다. 자신이 느낀 점과 이해한 방식에 따라 분명하고 자신있게 발표를 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철학과 수업이 있었다. 교수님이 들어오셨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교수님이 주의사항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 철학을 전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가 아무리 토론을 해도 진리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동해 여행은 일주일을 넘겼다. 계곡의 그늘에 앉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머릿속이 정리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그리웠다. 나는 돌아가기로 했다.
■ 네 번째 계단
여행을 통해 내가 보고 배운 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이었다. 감추사에는 붓다가 아니라 주지스님이 있었고, 교회에는 신이 아니라 신자들이 있었으며, 시장에는 상품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은 형이상학적인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는 공간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체적인 삶으로 가득했다. 나는 그 자명하고 단순한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현실에 발붙이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살아가지 못하고 현실 너머의 그 무엇에 정신을 쏟는 사람이 있다.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는 처음으로 눈을 떴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대지 위에 발을 딛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니체의 이 책은 서구 역사 2000년 동안 철저하게 배제되고 잊혔던 절반의 세계, 현실과 신체라는 구체적 세계를 복원해 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 역사적 배경 : 현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중요한 역할
- 주요 개념 : 신의 죽음, 초인, 영원회귀
■ 서구 역사의 변화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독일 작센 지방의 뢰켄에서 1844년에 태어나
- 34 -
1900년에 죽었다. 그가 1900년, 즉 19세기의 마지막 해에 죽었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근대의 문을 닫고 현대의 문을 열어젖힌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 프로이드, 니체를 묶어 현대 사상의 출발점으로 평가한다.
인류 역사는 보통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한다. 구분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진리’에 대한 관점이다.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어떤 세계관을 공유했는지가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서구의 역사는 진리관에 따라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 고대 :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 진리는 ‘신화’,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실제로 그리스의 신들과 함께 살았다.
- 중세 : 기원 후 4세기부터 대략 14세기 혹은 17세기 무렵까지. 진리의 기준은 ‘유일신’으로, 아브라함 계열 종교의 신인 야훼, 여호와, 알라, 하느님
- 근대 : 17세기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대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는 1945년까지를 일반적으로 근대로 구분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진리의 기준은 ‘이성’. 근대 합리주의 세계관은 과학적 방법, 기술적 평가, 수학적 통계다. 오늘날에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도 과학의 성과에 의심을 갖지 않는다.
- 현대 : 진리의 기준은 없다. 단일한 진리에 대한 믿음이 인류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 서구 역사에서 니체의 위치
니체는 근대의 끝과 현대의 시작 그 사이에 있다. 니체는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서구 사상의 주류가 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니체에게 그리스도교는 대중화된 플라톤주의에 다름 아니다. 천국과 인간 세계의 이분법적 구분의 토대는 이데아와 현상세계의 구분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천국은 유일하게 가치를 갖는 본질적인 공간이 되었지만, 현상세계는 원죄와 타락으로 가득한 가치 없는 공간이 되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플라톤주의가 절반의 세계를 억압한 것이 문제다. 현실에
- 35 -
존재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이념, 종교, 사유, 도덕만을 추구한 나머지 구체적인 현실을 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늘의 가치만을 추구하다가 대지를 더럽히고 말았다.
더 이상은 안 된다.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니체는 근대를 끝내려고 한다. 플라톤주의를, 그리스도교를, 이성중심주의를,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끝내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선언한다. “신은 죽었다.”
■ 주요개념 1 : 신의 죽음
차라투스트라는 실존했던 인물이다. 기원전 6세기 무렵에 고대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예언가다. 영어로는 조로아스터, 독일어로는 차라투스트라가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서른이 된 차라투스트라가 고향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동굴에서 10년의 세월 동안 정신적 수양과 고독을 즐기며 깨달음을 추구했던 차라투스트라는 어느 날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쌓은 지혜를 베풀겠다고 다짐하고 사람들이 세계로 내려간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몰락’이라 말한다.
산을 내려가던 차라투스트라는 숲에서 성스러운 노인을 만난다. 그는 자신도 인간을 사랑했기 때문에 숲과 황야를 헤매고 다녔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제 인간 대신 신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너무도 불완전한 존재임일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경고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자아를 파멸시킬 뿐이라고.
성자와 헤어지고 난 후 차라투스트라는 산을 내려가며 이렇게 말한다.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있느라 신이 죽었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구나.”
‘신의 죽음‘은 니체의 여러 저서에서 찾을 수 있다. 최초의 언급은 <즐거운 학문>에서였다. 대낮에 등불을 든 광인이 그를 비웃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가 신을 죽였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 36 -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 다시 말해서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내가 발 딛고 있는 구체적 현실로 돌아오라는 니체의 제안이다. 이상적이고 불변하는 본질의 세계 같은 것은 없다. 초월적 세계의 잡히지 않는 그 무엇만을 추구하다가 현실의 건강함을 짓밟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다. 신의 죽음은 필요하다.
■ 주요 개념 2 : 초인
초인은 독일어 ‘위버멘쉬(Ubermensch)’를 번역한 말이다. 영어로는 슈퍼맨, 오버맨으로 번역하는데, 한국에서는 영어번역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슈퍼맨이나 오버맨은 마치 초인이 어떠한 초월적 능력을 갖춘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냥 ‘위버멘쉬’ 라고 읽거나 ‘초인’이라고 사용하면 된다.
초인은 삶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자기 자신을 극복한 존재를 말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그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세계에 사로잡히지 않은 존재다. 그는 대지에 속해 있으면서 건강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존재다. 그리고 신이 죽은 세상의 허무를 긍정하는 주체적 존재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초인이 되는지를 비유로 알려준다. 낙타와 사자와 아이의 비유다. 인간의 정신은 세 가지 차원으로 변화한다.
첫 번째 정신은 낙타가 된다. 낙타가 된 정신은 내면이 외경심으로 가득한, 인내심 많은 강인한 정신이다.
두 번째 정신은 고독한 사막 한 가운데서 이제 사자가 된다. 사자는 자유를 쟁취함으로써 사막의 주인으로 서고자 한다. 이제 마지막 주인만 쓰러뜨리면 된다. 그것은 신이다. 신은 거대한 용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자는 용에게 달려든다.
용의 이름은 무엇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대답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으로서 섬기지 않는 거대한 용은 무엇인가? ‘너는 해야 한다’이것이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사자의 정신은 이에 대항하여 말한다. ‘나는 원한다’라고.”
‘너는 해야 한다’와 ‘나는 원한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앞의 것이 의무
- 37 -
라면 뒤의 것은 권리다. 노예에게 주어진 의무와 주인에게 주어진 권리. 정신이 사자가 된다는 것은 종속적인 노예가 주체적인 주인으로 일어서려는 저항을 말한다.
이제 자유를 획득했으니,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할 때다. 이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정신은 아이가 된다.
“형제들이여,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고 망각이다.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그리고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다.
낙타의 인내가 중세 그리스도교의 도덕관을 반영한다면, 사자의 자유는 근대 이성의 주체성을 상징한다. 아이는 탈근대, 현대를 의미한다. 니체에게는 아직 오지 않았던 시대,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극복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초인이 바로 아이인 것이다.
◉ 다섯 번째 계단, 과학
■ 도서관
옷을 샀다. 어울리는 운동화를 사고, 예쁘게 머리를 자르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연애를 했다. 버스 창가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사람과 거리를 구경했다. 대지를 걷는 시기가 찾아왔다. 돈은 항상 부족했지만, 마음은 여유로웠다.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시간은 더 많아졌다. 취업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졸업을 하면 군대에 가야 했다. 학사장교로 40개월의 군 복무가 예정되어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취업이나 영어시험 준비로 분주할 때, 혼자만 다른 세상에 사는 듯 천천히 걸을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살았다.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가서 저녁 늦게까지 책을 읽었다.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창밖으로 노을이 질 때였다. 그렇게 3년 가까운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하루에 한 권 정도를 읽었다.
어떻게 하루에 한 권을 읽을 수 있었느냐고 가끔 묻는 사람들이 있다. 굳이 이유를 생각해보면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특별히
- 38 -
할 게 없었다. 돈은 없고 시간은 많고. 책을 읽는 목적도 없었다. 그저 재미있었다. 마음이 가는 책을 산책하듯 읽어 나갔다. 철학, 종교, 사회, 과학, 문학 서가를 가리지 않고 배회했다. 마음에 드는 제목과 적절한 두께의 책들을 골라, 대여섯 권 정도가 되면 자리에 앉아 읽었다. 선택한 모든 책을 읽은 것은 아니다. 잘 읽히지 않는 책이면 고민하지 않고 옆으로 제쳐두었다.
■ 여행하는 영혼
첫 번째 계단을 오르기 전에 책을 선택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 사람은 자기에게 익숙한 책을 선택한다. 그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간다. 이 사람은 우물을 파는 영혼을 가졌다.
두 번째 사람은 자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책을 선택한다. 그에게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강인함이 있다. 또 기존에 움켜쥐었던 세계를 미련 없이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도 지니고 있었다, 세계의 지평은 점차 넓어진다. 이 사람은 여행하는 영혼을 가졌다.
나는 당신이 여행하는 영혼을 가졌으면 좋겠다. 여행하는 영혼들은 대체로 숨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물을 파는 영혼은 비교적 사회에서 환영받는다. 그래서 여행하는 영혼의 소유자도, 우물을 파는 영혼의 소유자도, 모두 자신이 우물을 파는 영혼인 것처럼 행동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전문가가 되려고 한다. 평생을 거쳐 하나의 분야를 파내려가고자 한다.
그 이유는 현대 자본주의의 특성 즉 산업화에서 찾을 수 있다. 산업화의 본질은 기계화와 분업이다. 현대사회의 노동자는 일의 전체적인 전망을 가질 필요가 없다. 대신 세분화된 특정 분야에 숙달되어 있으면 충분하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떠나고 싶어 한다. 우물을 걷어차고 도망치고 싶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을 뿐이다. 사랑하는 배우자와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지친 몸을 이끌고 우물가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비극이 시작된다. 그 비극은 부모로부터 아이에게로 전달된다. 소중한 가정을 위해 스스로 하나의 노동자로, 하나의 전문가로 살아가기를 결심한 부모는 결국 자녀의 가슴에 슬픔을 남긴다.
- 39 -
우리는 다시 여행자가 되어야 한다. 자녀도, 부모도, 모든 우물을 파는 영혼은 다시 여행길에 올라야 한다. 사회와 국가는 당신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회와 국가는 오직 당신의 노동력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당신은 노동자로 살기 위해 이곳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시간이 주어졌다. 3년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여행자가 되어 볼 수 있었다. 도서관에 앉아 현실세계와 현실 너머의 세계를 떠돌았다. 끝없이 펼쳐진 사유의 대지 위에서 우연히 만나는 풀꽃과 동물들을 관찰하고 마을의 골목길을 돌고, 펼쳐진 게르 안에서 밤을 지새웠다.
■ 다섯 번째 계단 앞에서
도서관의 창밖으로 계절이 천천히 지나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입대가 가까웠다. 어머니의 잔소리로 종합 검진을 받았다. 영양실조가 의심된다는 진단이 나왔다. 장교 임관을 위해서는 체력 측정에 통과해야만 했다. 걱정이 되었다. 밤이 되면 동네를 뛰기 시작했다. 몸은 그렇게 뛰면서 머릿속은 사유의 세계에서 예수를 만나고 붓다를 만나고 니체를 생각했다.
종교와 철학의 모든 논의는 디딜 수 있는 그 어떤 기반도 갖지 못한 채 어설프게 쌓아 올린 상상의 성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종교와 철학을 강하게 비판한다. 검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20세기 초,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신, 영혼, 자유, 형이상학적 주제, 윤리적 가치는 의미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이것들은 우리 세계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그래서 과학을 중요시했다. 모든 학문은 과학처럼 검증 가능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학 서적들을 읽어 나갔다. 종교와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에 마음을 쓸수록 과학은 내 믿음의 근거 없음을 물고 늘어졌다. 나는 과학과 우주의 계단 앞에 섰다.
■ 과학은 믿을 만한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학은 믿을 만한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
- 40 -
은 다른 분야에 비해 과학을 더 신뢰한다. 당신은 과학이 철학이나 종교, 혹은 사회학 등의 학문에 비해서 더 객관적이고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입장이 있다.
첫 번째 입장은 과학도 하나의 견해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과학적 방법론이란 과학을 연구하는 방법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실험’과 ‘관찰’이다.
그러나 실험과 관찰로부터 이론을 도출하는 방법은 필연적인 한계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귀납적인 종합이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특수한 사례’들로부터 일반화된 ‘보편 이론’을 도출하는 귀납법은 명백히 논리적 비약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귀납법의 오류는 영국 출신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정확히 지적했다. 흄은 불쌍한 거위를 예로 든다. 어느 날 농부가 거위에게 모이를 준다. 신중한 거위는 바로 받아먹지 않고 주저하며 생각한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그리고 백 일째 되던 날 거위는 지금까지의 경험적 자료들을 정리해본다.
첫 번째 날, 거대한 동물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만 동격하지 않음
두 번째 날, 거대한 동물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만 공격하지 않음
세 번째 날, 네 번째 날 ....
백 번째 날, 거대한 동물은 나에게 먹을 것은 주지만 공격하지 않음
백 번의 관찰을 통해 지혜로운 거위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일반적인 법칙을 정립하고 학위를 받는다. "모는 날에 거대한 동물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만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
학위 수여식이 예정되어 있던 부활절의 아침 농부는 도끼를 들고 거위를 찾아온다.
정리해 보자. 과학 역시 철학이나 종교 같은 여러 학문 분야 중에 하나라는 입장이 있다. 이들에 따르면 실험과 관찰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은 단지 실용적이고 임의적인 방법일 뿐이다.
이에 대비되는 두 번째 입장이 있다. 이 입장은 과학을 다른 학문 분야와
구별하려고 한다. 특히 과학적 방법론은 하나의 견해가 아니라 모든 학문 분야의 기본 토대가 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 41 -
철학의 시원으로 말해지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벼운 물체보다 무거운 물체가 먼저 낙하한다고 주장했다. 놀랍게도 오늘날까지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무게가 다른 물체라 하더라도 같은 높이에서 떨어뜨렸다면 언제나 동시에 바닥에 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를 지배하는 모든 법칙을 순수한 사고만으로 충분히 밝혀 낼 수 있다고 생각했고, 더 나아가서는 그것이 더 고귀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갈릴레이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지동설을 포기할 것을 강요받은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갈릴레이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건 실험과 관찰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해서 이론을 정립한 첫 번째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적 방법론이 당시의 종교적 분위기에서 통할 리가 없었다. 갈릴레이는 카톨릭 교회의 강요에 의해 자신의 지동설을 포기해야만 했다.
정리해보자. 과학을 옹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과학적 방법론이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실험과 관찰만이 객관성을 보답해 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과학적 방법론이 사이비 학문들을 걸러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못할 때, 진리는 억압되고 사회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과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가진 신념이다.
그럼에도 내가 과학을 신뢰하는 이유는 수학 때문이다. 과학이 진리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학이 자신의 방법으로써 두 가지를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귀납으로서의 '경험'과 연역으로서의 '수학'이다.
■ 과학의 역사와 수학
1564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1642년에 죽은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또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평가 받는다. 그것은 로마 교황청의 탄압에 맞서 진리를 추구했다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가 이룬 업적 때문이다. 오늘날 과학이 두 가지 방법론, 즉 귀납과 연역을 동시에 사용하게 된 기원은 갈릴레이에게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의 귀납이란 관찰과 실험을 말하고 연역은 수학적 적용을 뜻한다.
이후 17세기가 되면 프랑스의 철학자 테카르트와 수학자 페르마에 의해서 해석 기하학의 기초가 정립된다. - 2017. 1. 29. -
*다음에 2부가 이어집니다.
- 42 -
열한 계단(2)
- 나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 -
■ 채사장 지음
◉ 여섯 번째 계단, 이상 / 체게바라
■ 안 병장
이상적인 인간이 있다. 그는 상황을 핑계 삼지 않고, 부조리에 불평하지 않으며, 자기 삶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말이 아니라 실천하는 이상적인 인간, 자기 삶의 입법자, 안 병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안 병장을 알게 된 건 내가 소위 계급장을 달고 부대로 막 배치를 받았을 때였다. 나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당시의 내 눈엔 부대 안의 모든 것이 낯설고, 사람들이 행동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허위의식으로 가득 차 보였다. 획일화된 통제와 복종 그리고 불필요한 절차들에 넌덜머리가 났다.
현실의 군대는 그저 생활의 공간이었다. 나는 불평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대의, 신념, 용기 같은 고결한 가치들은 기대할 수 없다. 모든 인간 군상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데에만 편집증적으로 매진한다. 이곳에서 3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지옥 같은 일이다.
이런 생각으로 생활하다 보니 문제가 끊이질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숨으려고만 했고, 이 때문에 윗사람에게 깨지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비실비실 웃으며 상황을 모면하려고만 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그들의 보잘 것 없음을 욕했다. 힘든 시기였고, 그건 부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부대에서 짐스러운 존재였다. 결국 나는 나의 병과와는 무관하게 업무량이 가장 적은 정훈 장교의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임무가 없었다.
몇 개 되지 않는 나의 임무 중에는 병사들이 부대로 반입하려는 책들을 허가해 주는 일이 있었다.
- 1 -
당시에는 상급부대에서 내려온 불온서적 명단이 있었다. 왜 이런 책이 불온서적으로 분류되었는지 이해하기 힘든 명단이었다. 뭐 어쨌거나 상관없다. 나는 병사들의 책이 이 명단에 해당하는지만 확인하면 되었다.
안 병장과의 인연은 정보과에 앉아서 책들에 반입 허가 스티커를 붙이고 있을 때 시작되었다. 아무런 의욕 없이 책의 제목들을 하나씩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칼 마르크스, 프로이트, 서양철학 입문, 그리고 니체, 기분이 묘했다. 마치 오랜 타향 생활에 지쳐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우연히 고향친구에게 들켰을 때의 기분 같았다. 누가 이런 책을 읽는 걸까. 우선 나는 네 권 모두에 반입 허가 스티커를 붙였다. 참고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공산당 선언 같은 고전은 불온서적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추측해 보건대 당시에 군에서 설정한 불온서적의 기준은 북한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미국과의 동맹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혹은 한국 노동문제의 현실을 제시하는 정도가 되었던 것 같다.
늦은 오후가 되었을 때, 정보과로 병사 두 명이 찾아왔다. 그 중에서 병장이 브라보 포대에서 맡긴 책을 찾으러 왔다고 말했다 나는 상자에 담은 책들을 넘겨주며 넌지시 물었다.
“이건 누가 신청한 책이야?”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책을 가리켰다. 병장이 말했다. “제가 신청한 책입니다.”
안 병장을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밖에서 뭘 했길래 이런 책을 읽어?”
“밖에서 일러스트 그리다 왔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철학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것저것 읽어보고 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부대 도서관에 붙은 그림들은 안병장이 이등병 때 그린 것들이었다.
* 일러스트(illust) : 어떤 의미를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삽화, 사진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안병장과는 그렇게 알게 됐다. 내가 철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을 알고 안 병장은 기뻐했다. 일과를 마치고 별 일이 없으면 안 병장은 종종 정보과를 찾아왔다. 서구의 역사에 대해서, 근현대 철학에 대해서, 현대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안 병장은 나로부터 서양 철학의 궁금증을 해소했고, 나는 안
- 2 -
병장으로부터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아쉬운 건 안 병장의 전역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 전투화
“안 병장 같이 자유로운 영혼이 억압된 환경의 군 생활에 어떻게 적응했는지 궁금해.”
“아닙니다. 군 생활 엉망으로 했지 말입니다.”
안 병장은 포대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의 선임과 후임들은 안 병장을 따르고 상관들도 안 병장을 인정했다. 내가 브라보 포대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당직 근무를 서게 되면서 안 병장을 만날 기회는 많아졌다. 가끔은 안 병장이 근무에 들어 올 때가 있었다. 그러면 밤새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 번은 그의 전투화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안 병장의 전투화는 항상 깨끗했다. 당장 구보를 나갈 때도, 흙바닥에서 작업이 예정되어 있을 때도 그는 직전에 전투화를 닦았다.
“어차피 곧 더러워질 텐데 너무 비효율적인 거 아닌가?”
“저도 예전에는 안 그랬지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군 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건 보람도 성취도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모든 걸 대충하려고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 저는 군 생활 전체를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채우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20대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하찮은 시간으로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짐했지 말입니다. 나한테 선물해야겠다. 군 생활 2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서 스스로에게 선물을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뭐, 구두부터 닦기 시작했습니다.
■ 부대 평가
대대 ATT 훈련이 다가왔다. ATT는 부대평가다. 전술훈련 성과라고 도 하는데, 평가 결과가 간부들의 진급에 영향을 미치는 까닭에 모두가 예민
- 3 -
해진다. 그런데 인사과에 들렀을 때, 인사과장은 이번 평가는 어차피 별로 좋지 않게 나올 테니 사고만 안 나게 하면 된다고, 컴퓨터로 작업을 하며 건성으로 내게 말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물었다.
“야 넌 그런 것도 모르냐? 대대장님 진급 안 된 거 알아, 몰라?”
“듣긴 들었습니다.”
“야, 그럼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결과가 이미 나왔는데, 상급 부대에서 우리 부대에 좋은 평가를 주겠나? 진급 가능성이 있는 다른 대대장들이 있는데, 그들을 밀어줘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도 지난번에 대대장님이 장병들을 모으시고 이번 ATT 잘 받아야 한다고 신신 당부 하시지 않았습니까?”
인사과장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럼 어차피 좋은 평가 못 받으니 설렁설렁 하라고 하랴?”
나는 안 병장이 생각나서 시무룩해져서 말했다.
“대대장님 말씀을 듣고 전역 직전인데 훈련 참가를 자원한 병사도 있지 않습니까?”
“아, 얘기 들었어.”
“그럼 안 병장에게 말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요? 이번 ATT 참가할 필요 없다고요.”
“야. 신경 꺼. 지 인생 지가 사는 거지. 너는 너 살거나 생각해.”
2박 3일간 우리 부대는 진지를 돌았다. 정해진 위치에 포를 방열하고 지휘에 따라 사격을 진행했다. 군대 특유의 오랜 대기와 피로감이 지속되었다. 상급부대에서 파견된 평가관들이 함께 따라 다녔다.
나는 근무 시간이 새벽에 잡혔다. 얼마나 잤을까. 전 근무자가 깨워 어렵게 눈을 떴다. 나는 달빛이 희미하게 반사되는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근무 장소에 도착했다. 입구 천막을 손으로 들췄다.
그때 한 병사가 벌떡 일어나 경례를 했다. 안 병장은 원래 오늘 근무가 없었으나, 내가 당직 사관으로 온다는 것을 알고 자원해서 근무자가 되었다.
“이게 진짜 제 마지막 근무입니다.”
나는 무심코 안 병장의 전투화를 봤다. 하루 종일 진흙바닥 위를 뒹굴었을
- 4 -
텐데도 그의 전투화는 깨끗했다. 내가 되물었다.
“원래는 이번 훈련에 참가 안 해도 괜찮았잖아? 누가 하라고 한 거야?”
“에이 아닙니다. 제가 자원했습니다. 지금까지 분대원들과 같이 고생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나가도 제들은 남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좋은 마무리를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판단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무수히 많은 생각의 가지를 뻗었다. 자신의 시간을 포기할 만큼 군대라는 집단이 그렇게 윤리적인 집단이 아님을 생각했고, 한국 군대의 권위주의와 관료주의, 국수주의와 애국주의를 생각했다. 그는 그 모든 이유와 무관하게 옳다. 그는 자기 삶의 입법자이고, 자기 삶의 대지를 걸어가는 자가 아닌가.
■ 이상적인 인간
“이번에 근무를 자원한 거는, 정훈장교님께 인사드리려고 한 게 아니라,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랬습니다.”
“뭐 어떤 거?”
“이번에 책을 읽다가 이상적인 인간이라는 단어를 봤습니다. 그림만 그리면서 살다 보니 한 번도 생각을 안 해본 겁니다.”
“이상적인 인간?”
상황실 텐트 안은 고요했다. 랜턴의 희미한 불빛만이 흙먼지로 범벅된 천막 안을 밝히고 있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찾아 헤매던 질문이 아닌가?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집어든 <죄와 벌>에서부터 시작된 질문, 이상적인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니체의 어린아이를 떠올렸다.
“이상적인 인간이 있지. 그런 이는 보통 숨겨져 있어서 극한의 상황이 찾아왔을 때 타인의 시선 때문에 허세를 부리던 사람들마저도 지쳤을 때, 누가 진짜 이상적인 인간이었는지가 밝혀져. 그는 상황을 핑계삼지 않고, 부조리에 불평하지 않으며, 자기 삶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지. 말이 아니라 실천하는 이상적인 인간. 자기 삶의 입법자.
혹시 ‘체 게바라’에 대해서 들어봤어?” “못 들어 봤습니다.”
“더 나은 세계를 꿈꾼 몽상가였고, 행동하는 실천가였으며 그의 실천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우리는 체 게바라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 5 -
■ 어린 시절
20세기 공산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는 1928년 5월 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라 세르나. 보통 ‘에르네스토’라고 불렀다 그가 ‘체(Che)’라고 불린 것은 혁명군에 가담할 무렵부터다 ‘체’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붙이는 말로 어이, 이봐, 친구, 동지 정도가 된다.
- 가정은 유복, 아버지는 건축가, 어머니는 스페인 귀족으로 프랑스 문학에 심취한 교양 있는 여인
- 두 살 때 찬물에 목욕하다가 폐렴에 걸렸고 이때 생긴 천식은 평생을 따라 다님, 럭비, 축구 수영 같은 거친 운동을 좋아함
- 별명은 스페인어로 새끼 돼지를 의미하는 ‘찬초’
- 잘 씻지 않는 성격, 하지만 정 많고 따뜻한 성격 때문에 모든 사람의 사랑
- 또래보다 성숙한 아이. 책을 많이 읽음 : 볼테르. 랭보, 보들레르의 시, 네루와 간디의 책, 존스타인백과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등
- 7세부터 평생 일기를 씀, 게릴라 투쟁을 하는 중에도 독서와 글쓰기 - 청년 에르네스토는 의사가 되려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의학전공, 대학의 마지막 학기를 남겨둔 1951년 1월, 친구이자 선배인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남미 종단 여행 시작 (24세 때)
- 결과적으로 이 여행이 혁명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남미 토착민들의 비참한 삶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그 비참함의 근원이 미국의 침략적인 자본주의에 있음을 직시했다.
■ 남미 여행
여행은 ‘포데로사’라고 이름붙인 낡은 오토바이로 시작,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베네수엘라 까지 7개월 간 1만Km, 칠레에서 고장 난 포데로사를 버리고 걷거나 차를 얻어 타고 여행을 계속하면서 그가 본 것은
- 조상들의 땅을 빼앗기고 떠도는 토착민들의 가난과 비참함
- 추키카마의 거대한 구리광산에서 미국 기업 브레이든 컴퍼니에 의해 행해
- 6 -
지는 비인간적인 착취, 무너진 농민들의 삶을 보고 투쟁의 결의를 다짐
- 당시 남미의 많은 국가들은 미국과 손잡은 군사정권이 장악, 경제적으로 미국에 종속됨으로써, 자국민들의 노동착취와 인권 침해에 눈을 감았다.
7개월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에르네스토는 그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고민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남미의 문제는 미국의 제국주의에 기인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이 필요하다. 유일한 방법은 무력을 통한 혁명뿐이다.
■ 여행 이후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에르네스토는 어머니와의 약속대로 의학공부를 마쳤다. 자격증을 따기 무섭게 그는 과테말라로 떠났다. 1953년, 26세 때 였다.
당시의 과테말라가 사회주의적 변화를 이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르벤스 대통령 : 과감한 개혁정책, 농지개혁법 시행, 사회보장제도 마련
- 그곳에서 그는 혁명적인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마르크스주의를 학습
* UFC(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 악명 높은 미국 기업으로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의 정치를 좌우
* 바나나 공화국 : UFC로부터 돈을 챙기고 나라를 경제적으로 미국에 종속시킨 나라들, 예를 들면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그레나다, 과테말라
* 과테말라 아르벤스 대통령의 개혁정책은 1954년 미국의 폭격과 CIA의 사주를 받은 카를로스 대령의 쿠데타로 막을 내림
에르네스토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 “미국은 인간성의 적이다.” 라고 말하며 무력투쟁을 위해 멕시코로 떠난다.
당시 멕시코는 혁명적인 사람들의 집합소였다. 망명자들과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활발히 교류하던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오랜 동지가 될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다. 그는 쿠바 사람으로 미국에 동조하는 쿠바 정부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었고, 석방되자 멕시코로 도피해 온 상황이었다.
피델은 쿠바 정권을 공격할 부대를 조직하고 있었고, 에르네스토는 피델과 뜻을 같이 하기로 했다. 이를 시작으로 남미 전체의 해방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7 -
에르네스토는 멕시코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쿠바 혁명군에 가담한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게릴라 훈련을 받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군의관 신분으로 참여 했다. 이 무렵부터 에르네스토는 ‘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 쿠바 혁명
1956년 11월 25일, 체의 나이 29세, 82명의 혁명군은 작고 낡은 요트 그랜마 호를 타고 쿠바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들은 경험이 부족했고 배는 일주일이나 표류했다. 그동안 정부군은 모든 준비를 갖추고 매복을 끝마친 상태였다. 혁명군은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하고 3분의 2의 병력을 잃었다. 체는 목과 옆구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정부군이 바짝 뒤를 쫓고 한 손으로는 목을 지혈시켜야 하고 다른 한 손 밖에 쓸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앞에 놓인 탄약상자와 구급상자 중 탄약 상자를 선택했다.
정부군을 따돌린 뒤 혁명군은 17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들은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 깊숙이 숨어들었다. 피델은 이곳을 게릴라 부대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혁명군은 농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을 설득하며 함께 생활 했다.
2개월 후, 혁명군의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라 플라타 강 하구에 위치한 소규모 병영을 습격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첫 번째 승리는 혁명군의 사기를 높이고 쿠바인들과 세계가 이들을 주목하게 했다.
미국은 지속적으로 바티스타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정부군의 압박은 거세졌다. 하지만 혁명군은 점차 세력을 확장해 갔다. 자체 신문을 제작하고 라디오 방송으로 메시지를 전파했다. 피델은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의 미디어들을 불러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혁명군 내에서 체의 입지는 점점 강화되어 갔고 곧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부대원들은 그를 멋진 남자라고 생각했다. 체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냉철함과 강직함을 잃지 않았고, 매우 용감했다.
체의 비범한 행동과 타고난 외모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로 자리 잡았고, 점차 전설이 되어갔다.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에 정착한 지 18개월, 부대는 정착에 성공했다. 곧이어 혁명군은 전국적인 규모의 전투를 계획했다.
- 8 -
피델의 판단은 정확했다. 12월이 되면서 쿠바 전역에서 정부군은 무너져 갔다. 결국 1958년 12월 31일, 바티스타는 측근 몇 명만을 데리고 급히 쿠바를 떠났다. 혁명군은 승리했다. 체와 피델은 쿠바인들의 환호 속에서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체의 나이 32세 때였다.
■ 혁명 이후
체의 꿈은 명확했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성이 회복된 세계를 만드는 것, 구체적으로는 남아메리카를 사회주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쿠바 혁명의 성공은 그러한 이상적 세계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밟아가야 할 실제 현실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피델이 스스로 수상 자리에 오르고 체는 숙청의 역할을 담당했다.
- 바티스타 정권과 결탁했던 수천 명의 정치범 처벌,
- 체는 쿠바 국립은행 총제, 산업부 장관 역임, 공산주의 급진파로 세계적인 혁명을 원함
- 피델은 체에게 중요 임무를 맡기는 동시에 그와 일정한 거리 유지, 미국 등 주변 국가들과의 인정이 필요하다고 생각, 그는 민족주의자이지 공산 주의자가 아님. 미국과의 관계 악화 이후 공산주의자로 급격히 선회
- 미국 기업들의 손실은 1조 달러 이상 : 담배농장, 정유회사, 은행 등 미국 소유의 땅과 재산이 쿠바 정부의 소유로.
- 대대적인 숙청과 재산 몰수로 많은 쿠바인들이 미국으로 망명
- 미국의 보복 : 쿠바와의 외교 단절, 경제적 압박, 쿠바 침공 계획
- 혁명 정부는 소련에 핵미사일을 쿠바에 설치해 줄 것을 요청
- 1962년 7월부터 소련은 쿠바 내에 핵미사일 건설에 착수 , 같은 해 10월 14일 미국의 U-2기에 의해 세부 사진이 공개 되고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강경 대응. 3차 세계대전의 공포에 휩싸이자 소련은 극적으로 쿠 바 미사일 기지 철수를 발표(1962. 10. 28)
- 미국과 소련의 협상 과정에서 쿠바 혁명정부는 완전히 배제,
- 소련의 공산권 지배력 약화
- 9 -
체는 피델과 쿠바가 처한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남아메리카의 혁명을 완수해야 할 임무가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체는 떠날 때가 가까웠음을 느꼈다.
■ 또 다른 혁명과 죽음
체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그가 이상주의자이며, 특히 인간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점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윤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신성한 의미를 깨달아 일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다.
그는 절제를 강조했고 자신과 타인에게 엄격했다. 구겨진 군복에 구멍 난 양말, 사무실 바닥에서 잠자고 쉬는 날이면 공장이나 밭에 나가 땀 흘려 노동을 함께 했다. 자신의 아내에게도 자가용을 타지 못하게 하고 비싼 선물은 그대로 돌려보내게 했다. 동지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유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상황은 악화됐다.
체는 미국의 제국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하는 동시에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도 비판했다. UN총회와 알제에서의 연설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공개적인 비난은 소련의 심기를 건드렸고 쿠바 혁명 정부를 난처하게 했다. 피델은 점차 체를 멀리했다. 체는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피델을 보호하기 위해 쿠바 시민권을 포기한다.
38세 때인 1965년 4월 아프리카의 콩고로 향했다. 콩고민족해방주의 지도자를 만났다. 그는 술과 매춘부에 빠져 있었고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간신히 몸을 피했다. 그는 다시 1966년 11월 남미의 볼리비아에 변장한 채로 입국했다 그는 그곳에서 볼리비아 공산군과 합세했지만 문제가 생겼다. 그들의 노선이나 지휘권 문제로 체의 혁명군은 따로 활동하게 되었다. 결국 24명의 게릴라들만 남았다.
1967년 10월 8일 체는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정부군에 잡혔다. 포획된 체는 정부군 병사에게 부축되어 근처의 작은 시골학교로 끌려왔다. 그는 교실에 갇혔다. 그곳의 교사인 훌리아 코르테스라는 여성이 체에게 수프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기쁘게 마셨고, 금보다 귀하다며 고마워했다.
- 10 -
1967년 10월 9일 그는 학생들이 사용하는 나무 의자에 묶인 상태에서 사살되었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그리고 체의 시신은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 비밀리에 암매장했다. 그것은 체의 추종자들이 그의 시체를 찾아서 숭배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체가 사살된 지 10일 후, 피델은 쿠바인들 앞에서 이렇게 연설한다.
“우리는 체의 신념의 가치, 인간성의 가치, 사고의 가치, 도덕성의 가치, 정서의 가치를 의심해 본적이 없습니다. 체의 가치는 인류보편의 가치입니다.”
■ 이상적인 인간의 조건
시계는 새벽 5시를 향하고 있었다.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짙푸른 빛으로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나와 안 병장은 텐트 가까이를 서성였다.
“안 병장은 그런 이상적인 사람이 될 수 있겠어?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따라 실천하는 사람.”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멋진 사람은 죽어도 못 될 것 같습니다.”
“아마 우리 모두 그럴거야. 체 게바라 같은 강한 신념과 실천력을 갖기는 어려워, 샤르트르도 체 게바라를 보고는 이렇게 이야기했어. ‘금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주변에도 이상적인 인간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해.”
이상적인 이들이 이상적인 이유는 그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서가 아니야. 그들의 내면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지. 제 게바라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쿠바 혁명에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야. 그는 성공보다 더 많은 실패를 했어. 콩고와 볼리비아에서는 참혹하게 패배했지. 마찬가지로 그가 높은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야. 그가 군의관 신분으로 쿠바에 상륙했을 때 혁명군은 그의 지위가 아니라 그의 용기와 신념을 알아보고 그를 좋아했어. 이상적인 인간은 대중의 평가, 혹은 사회의 인정과는 무관해. 그런 사람은 각자 자기 세계의 범위 안에서 영웅이 되는 거야.
■ 마지막 평가
대대 ATT는 조용히 끝났다. 부대는 오전 중에 철수 준비를 해서 점심 무
- 11 -
렵에 부대로 복귀했다. 부대에는 실내 강연장 같은 게 없기 때문에 실내 집합은 항상 교회 건물을 이용했다. 2박 3일간 진행했던 부대 평가에 대한 결과 보고가 계획되어 있었다.
결과 보고가 시작됐다.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평가관들은 어느 정도 적정 비율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로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평가 후반부는 항상 문제점들의 개선을 요구하며 끝이 났다.
그때였다. 안 병장이 손을 든 것은. 나는 그 장면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손을 들고 일어선 안 병장의 심경은 복잡해 보였다. 평가가 정당하지 않음을 말하고 싶은 동시에 일개 병사로서 그런 말을 해도 되는지를 고민하는 것 같았고, 자신이 이렇게 말해서 무엇하나를 생각하는 동시에 자기 분대원들의 노력을 지켜주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그의 말은 잘 들리지 않고 어눌했다. 그는 몇 마디를 더 잇지 못하고 울었다. 남자들만 있는 군대에서 눈물을 할리는 일은 흔치 않다. 평가관은 당황했다.
전역 후에도 안 변장과 연락이 닿았지만, 한 두 해가 지나면서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나의 군 생활은 길어졌다. 새로운 만남과 헤어짐에 나는 마음을 쓰느라 언제나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가끔 안 병장이 생각나곤 했다. 그는 현실을 잘 걸어가고 있을까. 그곳에서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을까. 부대의 계절은 매번 반복되었다. 군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은 점차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 일곱 번째 계단, 현실 / 공산당 선언
■ 사회인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이 모였다. 보자. 보자. 하면서도 시간 맞추기 쉽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친구 G가 중간에서 시간을 조율했다. 모두 아저씨 몸매가 되긴 했지만 옛날 그대로라며 서로를 반겼다.
변한 건 대화의 소재뿐이었다. 과거를 추억하기보다는 앞으로의 시간에 더
마음이 쓰일 나이였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며 각자가 배워온 먹고 사는 일
에 대해 떠들었다. 누구는 얼마를 번다더라. 누구는 승진을 했다더라. 재테크
- 12 -
보험, 투자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야야, 너 이번에 아파트 샀다며?”
“사실 차도 뽑았다.
“대출받고 전세 낀 거라 내 돈은 거의 안 들어갔어. 차도 할부로 산 거고.”
당시에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에게 집이나 차를 산다는
것은 돈 많은 어른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놀랐다. 게다가 집을 사는데 자기 돈은 안 들었다니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돈을 많아 벌었을 거다. H가 겸손하게 이야기한 것뿐이다. 나
는 다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흥겨운 시간이 끝나고 G가 지하철역까지 차로 데려다준 덕분에 막차를 탈
수 있었다. 어쨌든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하지만 서글프기도 했다. 세상
에 대한 우리들의 짝사랑이 서글펐다.
현관을 밀고 들어섰을 때. 불 꺼진 집안의 고요는 여전히 내 숨을 조여왔
다. 긴 군 생활 동안 작은 집은 더 작은 집으로 옮겨졌다. 전역한 아들에 대
한 반가움은 현실적인 궁핍 속에서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밤이 깊을 때까지
방 한 구석에서 어머니는 기도를 했다.
■ 이상과 현실
정오까지 잠을 잔 어느 날, 무거운 몸을 일으켜 이불위에 앉았다. 불투명한
창은 햇살을 산란시켜 눈이 부시게 했다. 어쩐지 정신만은 너무나도 맑았다. 그리고 끝도 없이 다짐했다. 돈을 벌겠다. 떳떳한 어른이 될 것이다. 적응하고 말겠다. 나는 샤워를 했다. 그리고 집을 나왔다.
돈이 되는 일을 따라다녔다. 작은 회사에 취업해서 일하기도 하고 의류와 화장품 관련 창업을 하기도 했다. 학생을 가르치거나 전업 주식 투자자 생활도 했다. 부동산 투자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그러는 동안 책과는 점차 멀어져 갔다.
지금은 안다. 이렇게 불안하고 조급한 시간들도 개인의 성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임을 말이다. 우리는 선입견이 있다. 내면의 성숙은 고결한 방식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선입견,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어려운 철학책과 씨름하고 조용한 공간에서 사색하는 아름다운 방법만이 우리를 성장 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 13 -
하지만 그것으로는 얻지 못하는 절반의 배움이 있다. 고결하지 않고 만나고 싶지도 않은 세계에서의 경험들, 부당함에 굴복하고, 부조리에 타협하고, 옳은 주장을 꺾고, 스스로의 초라함에 몸부림칠 때에만 얻게 되는 그런 배움이 있다. 그때에야 비로소 나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한 가지에만 집중한 사람들의 한계를 쉽게 본다. 책만 본 사람들과,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
- 책만 본 사람들 : 타인에게 엄격하다. 세상이 쉽다, 책의 울타리 속에서 보호받으며 살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나약하고 자신이 그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과 도덕과 정의를 습관적으로 강조하는 사람이다.
-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 : 자신에게 너그럽다. 세상이 어렵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계획과 일정은 정확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옳고 그름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타협과 조율로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손익으로 판단하고 심연의 깊은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이다.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 한다. 책과 삶이, 이상과 현실이. 하지만 나는 그렇기 못했다. 대학생 때까지는 전자에 치우쳤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후자에 치우쳤다.
■ <공산당 선언>의 의미
얼마만인가. 뭐가 그리 바빠서 이곳에 잡시 들를 겨를도 없었을까. 서가 사이를 천천히 돌아서 사회과학 코너로 향했다. 그리고 금방 찾아내었다. <공산당 선언>이 책은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을 목적으로 집필 된 책으로, 1848년 1월에 30세의 마르크스와 28세의 엥겔스가 공동으로 작성했다. 이 혈기왕성한 두 청년이 작성한 3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책자는 곧바로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광범위하게 읽히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사회과학 서적들 중에서 이 책만큼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는 책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아직까지도 우리가 이 낡은 이념의 책을 읽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책이 자본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공산당 선언>은 자본주의에 대한 책이다.
- 14 -
생각보다 재미있는 책이다. 왜냐하면 170년 전에 쓰인 이 책을 읽는 동안 오늘날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를 너무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왜 내 월급은 간신히 먹고 살만한 정도고 사장들은 돈이 넘쳐나는지. 왜 회사에는 노조가 있고 이들이 파업을 하면 국가가 기업의 편에 서서 막아주는지, 왜 주기적으로 경기가 침체하고 공황이 오는지, 왜 이렇게 세계화가 추진되는지, 왜 미국이 세계 경제의 패권을 쥐고 있는지.
놀랍게도 <공산당 선언>은 일관되고 체계적인 원리를 통해 이에 대해 답변한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중요한 개념들을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한 사람이 공잔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산당 선언>은 자본주의의 한계를 명확히 제시함으로써, 반대로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게 한다. 이 책은 총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 <공산당 선언>의 구성
1장 -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2장 -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3장 - 사회주의, 공산주의 문헌
4장 - 기존의 여러 반대파에 관한 공산주의자의 입장
크게 이론과 실천이라는 두 가지 내용을 다룬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론적 측면으로서 자본주의와 계급 갈등에 대한 내용을 분석하고 실천적 측면으로서 투쟁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볼세비키혁명의 중심인물이었던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렇게 평가한다.
“이 작은 책은 전집의 가치를 갖는다. 이 책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모든 문명세계에서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를 지도한다.”
■ 부르주아의 국가
소련이 붕괴하고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완벽하기 장악한지 25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한국에서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낙인처럼 사용된다. 복지 확대,
- 15 -
세금 인상, 평등, 형평성,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집단을 공격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잘 알려진 것처럼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모는 것이다. 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과 배척은 비단 오늘날의 일만 아니다. 공산주의의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부터도 이미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는 왜 이렇게 욕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그것은 공산당이 국가 체제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애국심을 긍정적으로 가치로 교육 받아온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현재의 국가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이 좋아 보일 리가 없다. '국민‘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보기에 공산당은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파렴치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매국노, 친일파와 다를 바 없다. 공산당이 비난받아온 것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상식적이다.
그렇다면 왜 국가는 국민 모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닌 부르주아 계급만을 차별적으로 보호하는가? 이 질문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근현대 국가의 형성 자체가 부르주아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말이다. 국가가 부르주아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구성된 단체가 국가다.
공산주의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주인공의 등장이다. 부르주아가 몰락하고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등장, 그리고 그들에 의한 국가, 세계, 역사의 완성이 공산주의가 원하는 것이다.
이제 두 가지 질문이 해소된다. 첫째 국가란 무엇인가? 공산주의자들의 대답은 이것이다. 역사상의 모든 국가는 부르주아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둘째, 국가는 왜 국민과 국민과의 대립, 다시 말해서 기업과 노조의 대립에서 일관되게 기업의 편에만 서는가? 공산주의자들은 말한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모든 국가의 존재 이유였다.
■ 부르주아의 생산수단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용어는 너무 낡긴 했다. 오늘날에도 이 개념이 유효한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정리해 보자.
- 부르주아 : 돈이 많은 자본가, 생산 수단의 보유자, 타인의 노동을 이용
- 16 -
- 프롤레타리아 : 노동자, 돈이 적은 자, 자신의 노동을 판매
* 부르주아지 : 자본가 계급, 프롤레타리아트 : 노동자 계급
또 다른 두 가지의 질문이 있다. 첫째 왜 사장은 저렇게 돈이 많은가? 공산주의자들의 대답은 이것이다. 그들이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생산 수단을 토대로 노동자들의 시간과 노력을 이용하고 이로써 부를 획득한다.
둘째 왜 노동자의 임금은 그들이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제공되는가? 공산주의자들은 말한다. 그것은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해서 자신의 몸을 팔아 생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를 통해 부를 획득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오히려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에게 종속 된 듯 행동한다.
이 대립구도를 생각해야 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 이것이 근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구조다. 이러한 대결 속에서 국가, 법, 정치, 질서가 세워지고 부르주아의 이익이 지속적으로 관철된다.
■ 부르주아의 탄생과 성장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 구도는 마르크스 이전의 수많은 사상가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이들은 두 계급의 대립을 완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했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급 갈등이 있다는 현상만을 피상적으로 이해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빈부 격차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부유층의 동정심에 호소하여 기부를 장려하거나, 소유주를 설득하여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것 등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선언한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역사적 측면에서 이해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프롤레타리아를 구제의 대상이 아닌 혁명의 주체로 파악할 수 있다.
공산주의의 이론은 다섯 단계의 역사 발전 과정을 기본 전제로 한다.
- 17 -
1. 원시 공산사회
2. 고대 노예제 사회 : 왕과 노예
3. 중세 봉건제사회 : 영주와 농노
4. 근대 자본주의 :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5. 현대 공산주의
우리는 여기서 3. 중세 와 4. 근대를 한정해서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부르주아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다. 우리는 부르주아를 따라감으로써 자본주의의 발생과 한계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는 중세에서 시작한다. 중세의 특징은 기독교와 계급이다.
모든 사람이 신의 실재를 믿고, 신의 뜻이 사회를 움직인다고 믿는 사회, 계급은 세분화되어 절대적으로 지켜졌다. 신의 권위에 버금가는 왕이 있고, 성의 주인인 영주가 있으며, 농노와 상공업자들이 있다.
특히 상공업자들은 동업자 조직인 길드를 형성하고 있었다. 장인들은 길드에 소속되어 소량으로 물품을 생산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상공업자들과 농노 가운데서 초기 도시의 시민들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바로 이들이 부르주아의 기원이 되는 사람들이다.
중세에 싹을 틔운 부르주아는 근대에 이르러 거대 자본가로 성장했다. 이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사회적 생산 방식의 변화였다.
생산 방식은 3단계를 거친다.
1 단계 ; 단순 협업, 중세는 폐쇄적인 길드에 의한 독점 형태.
2 단계 : 공장 내 분업, 매뉴팩쳐(Manufacture 공장의 노동자들이 단순한 일을 나눠서 진행하는 형태)
3 단계 : 기계제 대공업. 증기기관 공장에 적용, 기계의 놀라운 효율성이 대 량 생산을 가능하게 함. 공급량이 수요량을 넘어섬. 진정한 의미의 부르주아 탄생
대량생산은 사회의 모습을 바꿨다. 부르주아는 필연적으로 세계화를 추진하게 된다. 대량생산으로 인한 초과 공급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근대 유럽이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 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한 이유 그리고 오늘날 미국을 중심으로 무차별적으로 세계화가 추진되는 이유는 초과공급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경제적인 목적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 18 -
■ 부르주아의 의의와 몰락
부르주아의 등장은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다. 중세의 부르주아는 혁명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은 중세의 그림자를 몰아내고 풍요로운 근대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 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차갑고 합리적인 경제의 세계로 탈바꿈했다.
부르주아의 또 다른 혁명적인 역할은 그들이 복잡한 계급관계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데 있다. 기존의 인류는 언제나 강력하고 세분화된 서열과 등급에 얽매여 있었다. 부르주아는 복잡했던 계급 체계를 두 가지로 단순화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이다.
이것은 긍정적이면서 동시에 부정적이다. 긍정적인 측면은 계급의 단순화와 함께 자유인이 확대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동시에 부정적인 한계를 갖는다. 그것은 계급적 적대 관계를 뿌리 뽑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가 단지 낡은 계급 대신에 새로운 계급, 새로운 억압 조건, 새로운 투쟁 형태들을 만들어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부르주아 계급 역시 필연적인 붕괴의 길을 피할 수는 없다. 부르주아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생산 수단의 개인소유다. 그런데 생산 수단은 두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과잉생산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 수단에 고용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등장이다.
■ 프롤레타리아의 등장과 공산주의 사회
공산주의 이론에 따르면 부르주아의 몰락과 함께 근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막을 내릴 것이다. 이제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다. 그들은 역사의 종착점이다.
하지만 실제의 역사는 공산주의 혁명을 실패한 역사로 기록한다. 물론 성과도 남았다. 전 세계노동자들에 의한 수많은 저항과 투쟁이 그들의 노동조건과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공산당 선언>을 읽다 보면 마치 오늘날의 상황을 묘사한 것만 같아 적잖이 놀라게 된다. 한국의 노동자들과 자영업자들이 처한 현실을 그려놓은 듯한 내용이 있어서 소개한다.
- 19 -
“노동자는 이제 기계의 부속물이며,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단순하고 가장 단조로우며 가장 쉽게 습득한 기술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생산 비용은 거의 전적으로 그가 자신을 유지하고 종족을 번식 시키는 데 필요한 생존 수단으로 제한된다.”
다음으로 자영업자들의 현실이다.
“소매상, 상점주, 수공업자, 농민 등 중간 계급의 하층은 점차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세자본으로는 현대 산업이 움직이는 규모를 감당할 수 없고 대자본가와의 경쟁에서 뒤처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궁극적으로 꿈꾸었던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이것은 너무 먼 미래여서 그런지 구체적인 정책과 제도는 제시되지 않았다.
■ 아직 남은 것들
도서관 창밖으로 하늘이 어두워진다. 돌아가야겠다. 도사관의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며 함께 걷는 마르크스에게 물었다.
회사원 : 왜 아름다운 공산사회는 오지 않을까요? 왜 공산주의 사회의 실험 은 실패하고, 역사는 자본주의에서 멈춰선 것처럼 보이는 걸까요?
마르크스 : 그건 노동자가 단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는 지역적으 로 흩어져 있거나 서로 경쟁하는 분열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 만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여러 번 실패를 겪음에도 프롤레타리아 는 하나의 조직으로, 정치집단으로,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지배자로 일어설 것입니다.
회사원 : 정말 그럴까요? 공산주의는 이젠 유령이 된 것 같아요. 유령은 믿 는 자에게는 존재하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존재하지 않죠.
마르크스 : 그럼 당신은 지금 불평등과 착취를 모른 체할 건가요? 아니면 기 득권과 자본가들의 동정심에 호소할 건가요?
회사원 : 그럼 어떻게 합니까? 저는 아무런 힘도 없어요. 제가 아무리 연대 해야 한다고 소리 질러도 대중은 꿈쩍도 하지 않아요. 제가 지금 신경 쓰는 건, 사회 전체가 아닙니다. 냉정히 말해서, 저 하나 먹고 사는 거예요. 사회 시스템은 어차피 정해져 있어요.
- 20 -
◉ 여덟 번째 계단, 삶 / 메르세데스 소사
■ 살아야 할 이유
사람들은 서로에게 묻곤 한다. 왜 살고 있는지를.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은 왜 살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문학적이고 멋진 말을 만들어 삶에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실적인 답을 제시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이 있다. 얼버무리는 사람들이 다. 그들은 ‘그냥’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장 사실에 근접한 대답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실제로 어떤 이유나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살고 있는 건 아니다. 말 그대로 그냥 산다. 배고프니까 먹고, 졸리니까 자고, 내 심장이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뛰어주고 있으니 산다. 그러고 보면 삶도 관성의 법칙을 따르는 것 같다.
우리는 지금껏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무의미하게 반복하며 유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답변은 ‘그냥’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외부의 힘이 삶의 반복을 멈춰 세우고, 나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그런 강력한 계기가 반드시 한 번쯤은 찾아온다. 나에게도 있었다. 그건 내가 이상과 현실이 괴리 속에 함몰되어 있던 늦은 겨울의 어느 날 제주도에서 였다.
■ 입원
친구 G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멀쩡하구만.”
나와 눈을 마주친 G가 첫 번째로 내뱉은 말이었다.
“속은 곯았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며 엄살을 부렸다.
“목이 안 돌아가.”
나는 좌우로 천천히 목을 돌리며 환자임을 시연했다.
- 21 -
G는 병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병원이 깔끔해서 좋다느니, 냉장고에는 뭐가 있냐느니, 부산스럽게 굴었다. 그러다 침대위에 놓인 이어폰과 책에 시선이 간 모양이었다. G가 말했다.
“뭐 들어?”
“메르세데스 소사.”
“누구?”
“뭘 그런 걸 들어?”
병원 밥이 물렸던 터라 몰래 나가서 먹기로 했다.
“돌아가신 분들은?”
“바로 거기서 장례 치르고 다 했지.” 둘이서 많은 얘기를 나눴다.
시간이 늦었다. G를 병원 입구까지 배웅했다. G는 어서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병실로 바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사고 이후에 알게 되어 매일 듣고 있는 노래가 있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가 부른 노래다.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Gracias a la vida)’당시에 내가 이 노래를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언어를 뛰어 넘는 그녀의 깊고 낮은 음성 때문이었다. 그 깊은 목소리는 항상 나를 예민하게 몰고 가는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 사고
2월 중순의 춥지만 화창한 날이었다. 오랜만의 여행이었다. 직장 동료들을 따라온 것이기는 했지만, 시간 없음을 핑계로 일에만 몰두하고 있던 나에겐 숨 돌릴 틈이 되었다. 2박 3일의 제주도 여행, 사고는 둘째 날 오후에 있었다. 우리는 12인승 승합차를 빌렸고, 가이드 분이 운전을 맡았다. 제주시에서 서귀포시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사고가 나기 직전에도 우리는 승합차에서 잠시 내려 경치를 둘러봤다. 생각보다 바람이 찼다. 차가 출발하고 5분 정도가 되었을까. 차 안의 따뜻한 공기에 잠깐 졸았다 싶었다. 급할 게 없는데 왜 이렇게 빨리 달리나. 그때였다. 몇몇 사람이 ‘어어!“하며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인가 눈을 뜬 순간 차는 무엇엔가 크게 부딪히는 굉음을 내며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왼쪽으로 급하게
- 22 -
쏠렸다. 나는 앞좌석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차는 곧 시계 반대방향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구르는 동안 나는 의식이 있었다.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던 까닭에 차 천장과 바닥에 계속 부딪히고 있었다. 부딪히는 가운데 생각했다. 원래 이렇게 오래 도는 건가.
얼마나 돌았을까. 이제 그만 돌아도 되겠다고 생각할 때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정자세로 멈췄다. 급작스럽게 정적이 찾아왔다. 몸이 어떤 상태로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전신에서 깊고 아련한 통증이 느껴졌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 나는 코를 만져 봤다. 코가 있었다. 살았다고 생각했다.
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갑자기 웃음이 났다. 다 살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차 밖으로 빠져 나가서 정말 죽을 뻔 했다고 말하며 함께 웃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생각이 틀렸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뒤를 돌아봤을 때 차의 뒷면은 뻥 뚫려 있었다.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남자 동료 한 분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엎드려 있었다. 머리의 윗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그분 뒤로 50미터 정도 더 떨어진 곳에는 여자 동료 한분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지만 의식이 있어서 계속 일어서려고만 하고 있었다.
차 밖으로 나가야 갰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흔들었으나 문은 구겨져 열리지 않았다. 창문으로 빠져 나왔다. 차가 구르는 동안 갈린 여자 동료를 발견했다. 피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점퍼를 찾았다. 우선 다친 동료에게 덮어주었다. 핸드폰을 찾았다 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신고를 했다.
무사한 사람들은 첫 번째 구급차가 도착할 때까지의 30분가량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안절부절 서 있었다. 그렇게 차례차례 길고 긴 시간을 두고 구급차가 도착했다. 사고는 긴 시간을 두고 수습되어갔다.
반년이 지났다. 사고라는 외부의 힘은 그동안 관성에 따라 날아가던 내 삶을 멈추게 했다. 많은 것이 변했다. 습관적으로 입에 붙이고 살았던 ‘이제 그만 살아도 되겠다.’ 라는 말은 단 한 번도 꺼내지 못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했다. 사고능력과 언어능력이 저하되었다는 판정을 받았다.
- 23 -
나는 언제나 폭발 직전의 상태였다. 사고 직후에도 고집스럽게 놓지 않았던 직장은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주변 사람들과 스스로에게 습관적으로 괜찮다고 말해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일을 그만둔 겸해서 반년 만에 뒤늦게 입원을 했다. 그렇게 삶은 무겁게 정지했다.
■ Gracias a la vida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
내가 메르세데스 소사를 알게 된 건 그 무렵이었다. 마음의 불안을 억제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우연히 편안한 음악이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편안한 음악을 찾기 위해 음악의 세계를 헤매었다.
소사의 목소리를 처음 듣게 된 순간이 기억난다.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 가수의 이름도, 노래의 제목도, 앨범 표지에 그려진 검은 머리의 인디오 여성의 얼굴도 낯설었다. 음악을 재생하고 눈을 감았다. 전주는 없었다. 곧바로 소사의 깊고 풍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
낯선 스페인어 발음도, 이해도 할 수 없는 가사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음성은 귀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에 직접 호소하는 듯했다. 나는 눈을 떠 가수의 이름과 노래 제목을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그녀의 노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노래에 대한 관심은 그녀의 삶에 대한 관심으로 나를 이끌었다.
노래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할까 한다.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는 그녀가 부른 노래 중 가장 잘 알려진 곡이다. 우리말로 하면 ‘삶에 감사해’, ‘인생이여 고맙습니다’, 정도가 된다. 스페인어로 ‘Gracias'가 감사하다는 뜻이고, ’vida'가 생명, 목숨, 일생, 생애 등의 뜻이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메르세데스 소사의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는 1982년 공연 당시에 녹음된 음성이다. 1982년 3년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자신의 조국 아르헨티나로 귀국한 소사는 그동안 자신을 기다려준 청중들 앞에 섰다. 군부정권이 다시 그녀를 체포할까봐 사람들은 우려했다. 하지만 2월 18일 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은 시작됐다. 그녀가 무
- 24 -
대에 오르자 사람들은 함성과 박수로 그녀를 맞이했다. 끝나지 않는 함성 속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메르세데스 소사, 아르헨티나인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첫 번째 노래가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노래가 끝나기 전에 메여왔다. 청중들은 함께 노래를 불러주었다. 이후 28일 동안 공연은 계속되었고 연일 매진을 기록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이끌려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이 노래가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였던 이유는 단지 음색과 가사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도저히 삶의 감사함을 말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그녀의 깊은 영혼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의 삶을 알아볼 차례다.
■ 어린시잘
메르세데스 소사의 애칭은 다양하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 때문에 검은 여인이라는 뜻의 ‘라 네그라(La Negra)’라고 불리기도 하고,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 ‘고난 받는 이들의 어머니’ 등으로도 불린다.
그녀의 외모는 수수했다. 검은 머리, 인디오의 얼굴, 검소한 옷차림, 하지만 소박한 외모와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노래인 ‘누에바 칸시온’을 이끌었으며, 군부 독재의 탄압에 맞서 아메리카 민중의 상징이 되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다. 1935년 7월 9일 투쿠만주의 평범한 가정에서였다. 그의 고향은 안데스 산맥과 평야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 다양한 지형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져 ‘아르헨티나의 정원’이라 불리는 곳이다. 투쿠만은 남미의 민속 문화와 전통음악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소사는 이러한 자연과 전통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5살 무렵 그녀는 투쿠만의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아마추어 노래 콘테스트에 참가하게 되었다. 뜻밖에도 소사는 경연에서 우승을 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음악인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다.
■ 새로운 노래운동
- 25 -
1957년 그녀의 나이 27세, 첫 남편인 마누엘 오스카 마투스를 만나게 된다. 그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다. 소사는 결혼 이후 남편의 고향인 멘도사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남편의 도움으로 다른 음악인, 예술인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가졌다.
소사는 전통음악의 예술적, 사회적 의미와 자신의 역할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다. 전통 음악을 한다는 것은 거대 자본을 기반으로 하는 상업 음악에 저항함을 의미했다 그리고 미국의 제국주의에 맞서는 것을 의미했다.
1959년 그녀의 나이 29세, 남편 마투스의 도움으로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하지만 무명 시절이 이어졌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전통 춤을 가르치고, 가정부 생활을 하고. 기회가 주어지면 노래를 불렀다.
1960년대 중반의 아르헨티나에는 본격적으로 누에바 칸시온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새로운 노래'라는 뜻의 이 운동은 남아메리카의 민속음악을 발굴하고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민중 스스로가 미국의 억압에 저항하게 하는 다분히 정치적인 문화운동이었다. 소사는 이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1963년 소사는 멘도사의 음악인들과 함께 누에바 칸시온 선언에 동참하게 된다.
누에바 칸시온 운동을 대표하는 노래는 ‘모두가 함께 부르는 노래’다. 이 노래는 그녀를 단숨에 누에바 칸시온의 상징으로 떠오르게 했다.
누에바 칸시온의 현실적인 결실은 1970년 칠레 아옌데 정권의 탄생이다. 노래로 하나 된 칠레의 민중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정권을 만들어 냈다. 민주적으로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는 곧바로 사회주의 개혁을 시작했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들이 미국정부를 움직여 경제적 압박과 정치적 공작이 시작됐다. 그리고 결국 1973년 9월 11일. CIA의 지원 아래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대통령 집무실인 모네다 궁은 쿠데타군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아옌데는 무네다 궁 안에 있던 국영방송 마가야네스 라디오를 통해서 마지막 연설을 한다.
“저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민중은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희생해서는 안 됩니다.
아옌데는 모네다 궁 안에 남아 있던 여성들과 경호원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 26 -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에게 선물 받은 AK-47 소총으로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전투기와 탱크의 진입이 시도되자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피노체트의 쿠데타는 성공했다. 이후 일주일 동안 3만 명의 시민이 죽었다. 저항하는 이들과 진보진영 인사, 반미 정치인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됐다. 누에바 칸시온 운동은 금지 되었다.
소사의 고국 아르헨티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르헨티나는 계속된 쿠데타로 정치적 혼란기에 있었다. 군부 정권은 누에바 칸시온 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소사에게는 비밀경찰이 붙었다. 그녀의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다. 이때부터 소사는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에 맞서 노래했다. 그녀가 부른 ‘모두가 함께 부르는 노래’는 저항하는 모든 민중의 위로가 되었다.
■ 망명과 귀국
소사의 공연은 극우 반공주의자 테러의 표적이 되었다. 소사는 목숨의 위협 속에서도 공연을 지속했다. 하지만 1976년이 되면 상황이 더 악화된다. 쿠데타로 집권한 호르헤 비델라에 의한 공포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불안한 날들이 이어졌다. 소사는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살해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를 떠나지 않기로 다짐했다. 탄압받는 민중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1978년 10월 23일. 소사는 군부 정권에 의해 체포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라플라타 시에서 공연 중이었다. 그녀는 대지주의 착취와 소작농의 비참함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었다.
무장한 경찰들이 공연장을 포위했고 소사와 관객 350명을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 다음해 1월 소사는 아르헨티나에서 강제로 추방된다. 이때 불행이 겹친다. 자신의 음악 세계를 이끌어주던 두 번째 남편과 사별하게 된다.
조국과 남편을 잃고 추방당한 소사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근거지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유럽에서의 망명 생활은 반대로 그녀의 목소리를 전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1982년. 소사는 망명 생활을 끝마치기로 결심한다. 조국에서 노래하리라. 아직 군부독재하에 있던 아르헨티나로 목숨을 건 귀국을 시도한 것이다. 조국에 돌아온 소사는 곧바로 공연 준비를 했다. 그리고 2월 18일 밤, 부에노
- 27 -.
스아이레스의 오페라극장에서 귀국 후 첫 번째 공연을 갖는다. 정부의 체포가 우려되었지만, 많은 사람이 몰렸다. 소사도 청중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다. 사람들의 함성은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에 섰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메르세데스 소사, 아르헨티나 인입니다.”
그리고 <Gracias a la vida >가 시작된다.
삶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샛별 같은 눈동자를 주어
흑과 백을 온전하게 구분하게 하고,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보게 하고,
수많은 사람 가운데 내 님을 찾을 수 있게 했네.
…………………….
얼마 후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은 너무도 허탈하게 몰락했다. 민중의 저항이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포클랜드 전쟁에서의 패배 때문이었다. 당시 포클랜드 섬은 영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과의 2개월간의 전쟁 끝에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은 항복한다. 신뢰를 잃은 정권은 몰락하고 결국 1982년 12월 민주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민주화된 아르헨티나에서 소사는 꾸준히 아르헨티나와 남미 민중의 삶을 노래했다.
노년이 되어서도 소사는 음악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2009년 10월 4일. 소사는 75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 그 사소한 것들
병실 침대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새벽이 가까울 때까지 오래 생각했다. 오랜만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맺지 못한 생각들을 꺼내었다. 묶인 것은 풀어주고 풀린 것은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 어지러운 기운 속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한 곡만 더 듣고 자기로 한다. 소사의 노래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그 사소한 것들’이다. 소사가 눈을 감은 해인 2009년에 발표된 앨범 칸토라에 수록된 첫 번째 곡이다. ‘칸토라’는 가수라는 뜻의 스페인어다.
- 18 -
<그 사소한 것들>
시간이 흐르면 잊히리라 생각하겠지만
떠나간 기차는 다시 돌아온다네.
그리움에 사무치게 하는 건
언젠가 스쳐지나갔던 사소한 기억들
함께 걷던 골목길에 핀 장미
낡은 서랍속의 편지
그것들은 마치 도둑처럼 문 뒤에 숨어 있다가
살그머니 우리 곁에 다가와서는
바람이 낙엽을 이리저리 흩날리듯
우리의 마음을 휘저어 놓겠죠.
그러다가 문득
그 기억들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면
더 이상 함께일 수 없는 우리는
눈물짓고 있겠죠.
◉ 아홉 번째 계단, 죽음 / 티벳 사자의 서
■ 삶으로의 복귀
생각해보면, 세상에 정말 힘든 일 같은 건 없다. 두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된다. 충분한 시간과 집중할 수 있는 여건, 우리는 어떤 어려운 문제든 처리할 수 있다. 문제는 힘들지 않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주어질 때 발생한다. 정신은 분산되고 신경은 예민해진다.
모든 일에서 문제가 연쇄적으로 터진다. 관계된 사람들에게 습관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된다. 반대로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쉽게 짜증을 내고 이것이 다시 원인이 되어 신경을 쓸 일들이 더 늘어만 간다.
퇴원 후의 상황이 그랬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노라 다짐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고 후유증과 현실로 복귀 사이에서 나는 힘들어 했다.
- 29 -
혼자 있을 때는 이상한 상상에 빠져 있었는데, 그건 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진지했다. 몇 가지 근거가 있었다. 첫 번째 근거는 사고 당시 내가 너무 멀쩡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근거는 의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르던 차가 멈추었을 때, 내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사고 전에는 승합차의 중간에 타고 있었지만, 멈춘 다음에는 가장 마지막 좌석에 앉아 있었다.
아니면 나는 지금 병원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지인들은 내 상상을 걱정했다. 그들의 표정은 나를 더 걱정스럽게 했다.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모두 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울증 치료제를 너무 오래 복용했다. 하지만 쉽게 끊을 수는 없었다. 목의 통증과 예민한 신경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약은 새끼손톱 반만 한 희고 작은 알약이었는데. 입 속에 넣는 순간 잠에 빠지게 만드는 마법 같은 약이었다. 약은 수면욕은 강렬해진 반면 먹는 것이나 성,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특별히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없어졌다. 감정의 동요가 사라지고 어떤 의지도 자라나지 않았다. 이러다가 이번 생에는 해탈에 이룰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날은 모든 일이 한 번에 마무리된 흔치 않은 날이었다. 꼬였던 일들이 동시에 해결되었다. 내가 벌여놓았던 회사 일이 마무리 되었고, 불안함에 억지로 적을 걸어두었던 대학원의 학기도 끝이 났다. 약을 먹지 않기로 했고, 오랜 시간 나를 기다리던 사람을 보내주었으며, 가을이 끝나가고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제 다 된 것이 아닌가. 무엇을 더 기대하고 있는 걸까. 다 늙어버린 영혼으로 무엇이 아쉬워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려는 것일까. 어쩌면 오늘이 가장 적절한 날일지도 모른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양손을 올려 목을 잡았다. 다만 궁금한 건 그 다음이었다. 생의 경계 넘어, 죽음이라는 순간 넘어, 그 문턱을 넘는 순간 나는 무엇을 보게 되는 것일까.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다. 어리석게도 나는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인가.
- 30 -
멀리서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만이 들려왔다.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래, 오늘 죽은 거다. 삶은 끝났다. 다만 얼마간 시간을 주기로 하자. 어차피 끝난거니까. 남은 시간은 보너스라고 생각하자. 남은 시간 동안 해보고 싶은 걸 다 하리라. 코트와 가방을 챙겼다. 건물 밖을 나서자 찬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 순간의 불빛과 눈송이와 찬바람과 지하철과 아련함이 그리워서 생의 너절함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당시 나는 가려져 있던 삶의 비밀을 들춰본 듯한 기분이었다.
■ 죽음 이후에 대한 관심
놀아보기로 했다. 어머니는 반대했으나 나는 집을 나왔다. 하늘이 보이는 커다란 창문이 달린 원룸을 얻었다.
늦게까지 서울의 밤거리를 걸었다. 음악을 듣고, 게임을 하고, 영화를 봤다. 화실에 등록해서 그림을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밤을 세워 글을 썼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시간이 흘렀다. 나는 안정을 되찾아갔다. 다시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이 있다는 건 위안이 된다. 세상과 내가 빠르게 변해가는 동안에도 도서관은 변하지 않고 언제나 나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으니. 익숙한 고요와 책 냄새. 나는 대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천천히 서가 사이를 서성였다.
당시 내가 주로 읽은 책은 임사체험에 대한 것이었다. 임사체험은 의학적인 죽음에 이르렀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겪었다고 주장하는 체험을 말한다. 빛을 보거나 조상을 만나거나,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그런 것들이다. 여러 국가의 다양한 사람들이 임사체험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임사체험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그런 체험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물론 이러한 연구에 회의적인 사람들이 더 많다.
우선 임사체험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무지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죽음 이후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사후세계의
개념은 근현대 합리주의가 애써 몰아낸 낡아빠진 종교의 영역이 아닌가.
- 31 -
임사체험을 연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개개인의 체험을 기록하고 종합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검증할 수 없는 지극히 주관적인 체험에 의존한 연구에는 학문적 지위를 부여할 수 없다. 이것이 비판적 견해의 주된 논점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탐구를 죽음의 순간까지로 한정 짓는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학문이 아니라 당신이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사후세계에 대해서 어떤 전망을 갖고 있는가? 두 가지를 구분해서 사유하는 것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주관적 판단과 구분해서 다루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주관적 판단을 사회공동체의 객관적 판단에 종속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현대 시대가 구획지어 놓은 과학과 학문이라는 영역 안에 머물며 거기서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신기한 것들을 만나고 놀라워하며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 합리주의라는 근현대의 기준 안에 당신의 드넓은 영혼을 구겨 넣지 않기를 바란다.
사후에 대한 논의 없이 삶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죽음 이후를 배제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행위는 실제 인간의 삶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한 예로 우리는 앞서 니체의 영원회귀를 알아보지 않았는가? 죽음을 하나의 완벽한 소멸이라고 믿는 유물론자의 삶과 니체의 영원회귀를 고민한 사람의 삶이 동일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안다.
두 가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학문적 접근과 당신 스스로의 이해, 학문은 죽음 이후에 대해 논의하지 않아도 문제없지만 당신의 삶은 그렇지 않다. 당신이 서구 근현대 합리주의의 파수꾼이 아니라 자기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창조자이길 바란다.
도서관에 앉아 죽음 이후에 대한 책들을 읽어 나갔다. 당시에 내가 읽었던 책들은 레이먼드 무디의 <삶 이후의 삶>, 마이클 뉴턴의 <영혼들의 여행>등의 임사 체험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사후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놀랍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참과 거짓의 문제를 넘어 깊은 위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 32 -
그런데 이런 종류의 책들을 읽을 때마다 자주 언급되는 책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티벳 사자의 서>였다. 이 책은 삶과 죽음, 인간과 세계에 대한 나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티벳 사자의 서>를 읽는 동안 나는 죽음의 세계를 방문했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다시 살아났다.
■ 죽은 자를 위한 안내서
<티벳 사자의 서>는 원래 제목이 아니다. 원래 제목은 ‘바르도 퇴돌’이다. ‘바르도(Bardo)’는 둘 사이를 뜻한다. 여기서는 삶과 삶 사이의 중간을 말한다.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한 사람이 죽고 그가 다시 태어날 때까지는 49일간의 중간 세계를 거쳐야 한다. 이 중간의 세계가 바르도다. ‘퇴돌(Thos-grol)’은 듣는 것을 통해 벗어남을 뜻한다. 이를 종합하면 ‘죽음 이후에 한 번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게 함’을 의미한다.
<바르도 퇴돌>은 죽은 자를 위한 안내서이다.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두 가지다.
1. 본질적인 목적으로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남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해탈하 게 한다.
2. 차선의 목적으로,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남을 멈추지 못했을 때, 그나마 더 나은 삶으로 환생할 수 있도록 사자를 인도한다.
실제로 티벳인들은 죽음에 임박한 사람 옆에 앉아서 이 책을 읽어 준다. 시신 옆에서 친지나 혹은 동료들이 49일 동안 3회 혹은 7회 반복해서 읽어주는 것이다.
은둔자들의 나라 티벳에서 읽혀지던 이 책이 세상에 알려진 건 20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종교학자이자 민속학자인 에반스 웬츠가 티벳의 학승 라마 카지 다와삼둡과 함께 1년 동안 이 책을 번역하고 편집해서 1929년 서구사회에 출간했다. 이때 출간된 영문명이 ‘티벳 사자의 서’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가 보여주지 못한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 근본적인 이유
- 33 -
가 되었다. 서구의 수많은 학자와 사상가가 이 책의 영향을 받았다. 심리학의 거장 칼 융은 이 책에 깊이 영향을 받고 ‘가장 차원 높은 정신과학’이라며 극찬할 정도였다.
<티벳 사자의 서>를 대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 사람들은 이 책을 특정 종교의 경전이라고 판단한다. 티벳 불교라는 하나의 지엽적인 종교가 만들어낸 종교서일 뿐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사람들은 이 책을 보편적 진리로 대한다. 실제로 우리는 윤회를 하고 <티벳 사자의 서>는 이 윤회의 고리를 끊게 해주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어떤 관점이 옳은지는 결코 논박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분명히 하고 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티벳 사자의 서>가 종교를 다루는 태도다. 이 책은 특정 종교의 옳고 그름만을 말하지 않는다. 불교 문화권, 기독교 문화권 힌두교 문화권, 무신론적 문화권에서 태어나 죽은 이들이 다른 대우를 받지 않는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단지 내 마음의 환영이다. 그리고 죽음과 삶은 동일하니, 삶의 세계도 사실은 내 마음의 환영일 뿐이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 깨달음 속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바르도 퇴돌>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다.
이 가르침은 특정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영혼이 사후에 겪게 될 구조적 특징에 대한 보편적 서술이다. 그런 까닭에 유럽의 칼 구스타프 융은 이 책이 놀라운 심리학적 저술이라고 극찬하였고, 미국의 티모시 리어리는 환각 체험의 보편성을 이 책을 통해 설명했으며, 오늘날 세계의 다양한 임사체험자들이 이 책의 내용과 너무도 유사한 보고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 파드마삼바바
<바르도 퇴돌>을 쓴 파드마삼바바는 티벳 최고의 성인으로 평가 받는다. 그의 일생은 신비한 전설들과 함께 전해지지만, 정확한 탄생과 죽음의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인도의 우디야나국에서 태어나서 8세기 무렵에 티벳으로 건너가 활동했다고만 알려져 있다. 그는 연꽃에서 태어난 까닭에 파드마삼바바라고 불리게 되었다. 파드마삼바바는 ‘연꽃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 34 -
우디야나국의 왕이었던 인드라보디가 후계자가 없어서 이 아이를 왕궁으로 데려다 길렀다. 왕은 그가 왕위를 계승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출가하여 나란다 불교대학에서 정통불교를 공부하고 여러나라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스승들을 만나 의학, 점성학, 논리학, 예술 등을 공부하고 비밀의 가르침인 탄드라의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의 수행 끝에 결국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
<바르도 퇴돌>의 구성은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 죽음의 순간을 지난 사자가 사후 세계의 현상들을 경험하고 마지막으로 환생에 이르기까지 49일간의 경험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치카이 바르도(죽음의 순간), 초에니 바르도(중간 상태), 시드파 바르도(환생의 길)가 그것이다.
■ 죽음의 순간
나는 죽음에 이르렀다. 좋은 삶이었다. 가족과 친지들이 나의 임종을 지키고 있다. 의식은 희미해지고 숨은 잦아든다. 마지막 숨결이 조용하 코와 입으로 빠져 나간다. 나의 의식은 이제 막 죽음의 경계선을 넘으려 하고 있다. 이제 어떤 일이 펼쳐질 것인가?
<바르도 퇴돌>은 분명하게 밝힌다. 앞으로 3일 반, 혹은 4일 동안 나의 의식체는 신체와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기절한 상태에 처해 있을 것이다. 사후세계의 첫 여행의 그렇게 시작된다. 이 기간이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 즉 치카이 바르도다.
생전에 오랜 시간 수행해 온 사람들은 깨어 있는 정신으로 이 기간을 맞이한다. 혹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깨어 있을 수도 있다.
이제 투명한 빛이 밝아온다. 빛이 내 앞에 나타난다. 이 빛은 정광명(淨光明)이라 하는데 영어로는 단순히 ‘Clear Light’로 번역한다. 말 그대로 순수한 빛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빛이다. <바르도 퇴돌>에 따르면 사자는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빛을 흘려보내고 만다. 오랜 시간 수행한 높은 수준의 의식만이 이 빛에 머무름으로서 영원한 자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궁금하다. 도대체 이 빛은 무엇인가? 존재의 근
- 35 -
원에서 나오는 빛이라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 빛의 본질은 나의 마음이다. <바르도 퇴돌>은 현명하게 밝힌다. 나의 마음이 곧 존재의 근원이다. 본래 텅 비어 있고, 모습도 없고, 색깔도 없는 빛, 이러한 빛이 곧 나의 마음, 나의 의식이다.
<바르도 퇴돌>은 의식의 의미를 비유와 상징이 아닌 객관적인 서술을 통해 정확하게 제시한다. <바르도 퇴돌>은 이렇게 말한다.
“그대의 마음은 본래 텅 빈 것이고 스스로 빛난다. 그것은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 이것을 깨닫는 것으로 충분하다. 본래 텅 빈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붓다임을 깨닫고, 그것이 곧 그대 자신의 참된 의식임을 알 때, 그대는 붓다의 마음 상태에 머물게 되리라.”
여기서 붓다가 종교적 측면에서의 싯다르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붓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해탈, 깨달음, 무(無)의 상태를 말한다고 봐야 한다.
◉ 열 번째 계단, 나 / 우파니샤드
■ 동굴에서 광장으로
소중한 것일수록 곁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하고, 부부는 서로 숨기는 게 없어야 하고, 자녀는 속마음을 부모에게 말해야 하고, 연인은 모든 추억을 함께해야 하고, 친구는 나와 가장 친해야 하고, 세상은 나를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의 눈과 입은 원래가 모난 까닭에 가까운 대상일수록 쉽게 흠을 찾아내고, 쉽게 상처를 입힌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들이 상처입지 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을 당신으로부터 밀어내야 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아니라, 그들을 그리워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로운 시간이 필요하고 아무 말도 없이 깊은 내면으로 고독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 36 -
세상과 단절된 나의 작은 공간에서 나는 회복되어 갔다. 나는 작은 공간에서 충분히 머무르기로 했다. 창문 밖으로 변해가는 계절과 나무 침대와 음악과 책만 있으면 나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충만함의 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여러 일들이 있었다. 사고 이후에 불안한 마음을 다스려보고자 써내려갔던 원고를 출간할 기회를 얻었고. 예상치 못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고, 다양한 장소에서 강연하며 지혜로운 분들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광장에서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입으며, 내가 지금까지 보고 듣고 좋아했던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경제와 정치에 대해서, 삶과 인문학에 대해서, 미스터리와 신비에 대해서 사람들은 좋아해 주었고 나는 기뻤다.
■ 뒷골목에서
사실 아쉬운 점도 있다. 광장에 서서 이야기 할 때면 나는 눈치를 보는 편이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현실과 밀접한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이야기, 이런 주제로 진행되는 강연은 호응과 참여가 좋고, 그러면 나도 즐겁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신비에 대한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신비는 단적으로 말해서 나와 세계의 ‘관계’다. 나는 누구인지, 세계는 무엇인지, 나와 세계는 도대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나는 언제나 궁금했다.
이제는 이유를 안다. 왜 많은 사람이 세계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지를 말이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사회가 치열하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것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시대다. 부양할 가족, 나의 꿈, 노년의 안정을 위해서는 한가하게 앉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로 고민할 시간이 없다.,
둘째는 한국의 사상적 기반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아무런 사상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개인마다의 차이는 있겠지
- 37 -
만, 한국인들은 대체로 근대 합리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미국식 프로테스탄티즘이나 반대로 유물론적 무신론의 영향을 받는다.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는 자아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논의하는 사상적 분위기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가정, 학교, 종교, 사회 어디를 가도 나와 세계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곳은 없다. 한국은 신비가 낯설다.
■ 작은 강연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문서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이고 다른 하나는 <베다>입니다. 구약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이라는 아브라함 계열 종교의 기반이 되는 너무나 중요한 문서입니다.
다음으로 <베다>가 있습니다. 고대 인도에서 기록되어 베단타 철학과 힌두교 그리고 불교에 영향을 미친 문서입니다. 힌두교가 베다 철학을 대중적으로 해석한 것이라면 불교는 베다 철학에 대한 비판적 수용을 통해 발전한 것이죠.
이 두 문서의 공통점은 우리에게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준다는 것입니다. 차이점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구약>
- 신과 인간의 관계를 단절적으로 파악.
- 신은 신의 역할, 창조주로서 절대적이고 유일한 존재. 인간은 신의 피조물로서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신의 뜻에 따르고 그에게 순종해야 함.
<베다>
- 신과 인간의 관계를 연속적으로 파악,
- 신과 인간은 다른 존재가 아님, 신이 곧 인간이고 인간이 곧 신임, 강과 바다와의 관계와 같음.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강이 바다에 이르러 개별적인 이름을 버리고 거대한 바다와 하나가 되는 이치와 같음
인류는 언제나 질문을 가졌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세상은 무엇인가. 삶의 목적은 무엇이고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놀랍게도 <우파니샤드>는 이에 대한 대답을 비유와 상징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답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지혜로부터 도출됩니다.
- 38 -
그것은 범아일여(梵我一如)입니다. 전체로서의 신과 부분으로서의 인간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심오한 가르침으로 말입니다. 이 비밀스럽게 전해져 온 인류의 지고한 지혜를 지금부터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 베다와 <우파니샤드>
<우파니샤드>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베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앞서 붓다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베다가 성립하던 시기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기원전 2500년 무렵에 아리아인(Aryan)들이 인도 북서쪽의 인더스강 부근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펀자브 지방에 정착했고 ‘베다’라는 문서를 기록했다. ‘베다’는 지식과 지혜를 의미한다. 아리아인들이 가졌던 신화, 종교, 철학이 총망라되어 있다. 특히 다양한 신들에 대한 의례절차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리그베다’는 대략 기원전 5000년 전부터 기원전 1200년 사이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베다의 전통이 뿌리내려갔고 업, 윤회, 해탈이라는 베다의 기본적 세계관과 의례절차를 중시하는 분위기도 강해졌다. 그와 함께 의례를 전문적으로 집행하는 사제들을 ‘브라흐마’혹은 ‘바라문’이라 불렀고, 바라문이 중심이 된 종교를 ‘바라문교’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종교는 후에 힌두교로 이어진다.
하지만 바라문교의 형식주의적이고 기복적인 경향은 인도 전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저항에 부딪혔다. 그리고 베다를 비판하거나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새롭고 독창적인 지식인들이 탄생하였고 이들을 ‘슈라나마’ 혹은 ‘사문’이라 불렀다.
고타마 싯다르타 역시 베다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그를 여러 사문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바라문교의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은 우파니샤드기 담당했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본질을 되찾으려 했고 베다를 철학적으로 체계화 했다. 우파니샤드가 제시하는 인간의 지향점은 사제나 자신의 배려에 의존하는 기복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궁극의 지혜를 깨우침으로써 영원한 자유에 이르러야
- 39 -
한다. 이것이 <우파니샤드>가 제시하는 인간의 유일한 목표다. 인도인들은 베다를 ‘슈루티와 ‘스므리티’ 로 구분하기도 한다. 우선 슈루티는 ‘신으로부터 들은 것’ 스므리티는 스승으로부터 전승되어 ‘기억된 것’을 뜻한다. 우파니샤드는 슈루티에 해당한다.
<우파니샤드>는 신으로부터 직접 전달되어온 지혜인 만큼 비밀스럽게 전수되어 왔다.
<슈베따슈바따라 우파니샤드> 6장 22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오래전부터 전수된 이 베단타의 가장 높은 신비의 지혜는 욕망이 가라앉지 않는 사람, 아들이나 제자가 아닌 사람에게 전수해서는 안 된다.
■ 불교와 <우파니샤드>
<우파니샤드>는 낯선 어휘들 때문에 어쩐지 어렵고 먼 이야기일 것 같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면이 많다. 왜냐하면 우리가 베다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불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불교의 세계관이라고 하는 업과 윤회 그리고 해탈에 대한 개념들은 사실 불교 고유의 사상이라기보다는 고대 인도의 베다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우파니샤드>와 불교는 기본적인 세계관을 공유한다. 그래서 <우파니샤드>를 처음 읽을 때에도 낯선 단어들 속에서 친숙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불교와 우파니샤드는 우리에게 한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 너의 생각과 행위는 업을 만들어 내고, 업은 너를 다시 윤회하게 할 것이다. 이번 생에서 욕망을 내려놓고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면 너는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에 이르러 궁극적인 자유를 얻을 것이다.
이렇게 공통된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지만, 불교와 <우파니샤드>는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그것은 ‘자아’에 대한 입장이다. 우선 <우파니샤드>의 고정불변한 자아는 그리스도교의 영혼과 같은 존재다.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로서 본질적인 자아를 ‘아트만’이라고 부른다.
반면 붓다는 ‘아트만’을 부정하고, 무아(無我)를 주장한다. 영원한 자아나 영혼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여태껏 사람들이 품어 온 가장 기만적인 망상이다. 이를 ‘아나트만’이라고 한다.
■ 네가 바로 그것이다
- 40 -
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이야기를 듣지만, 사실은 다른 영화, 다른 책, 다른 이야기를 봅니다. 그것은 각자가 가진 삶에서의 체험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체험한 만큼의 시야 안에서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내 시야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실제로도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자기 시야의 경계를 한 본 보십시오. 경계가 보이나요? 아무리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내 시야의 한계를 볼 수 없으며 그것이 전혀 답답하지도 않습니다. 누구도 자기 뒤통수를 볼 수 없지만, 아무도 그것을 답답해하지 않죠. 우리가 시야의 경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해의 시야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자신의 제한된 이해만으로도 만족스럽게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칼 융은 <티벳 사자의 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은 닫힌 책으로 시작해서 닫힌 책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영적인 이해력을 가진 사람에게만 열리는 책이기 때문이다. 닫힌 책으로 시작해서 닫힌 책으로 남는다.’ 이 문장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무리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를 꼼꼼하게 읽어 간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의 텍스트 안으로 마음대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본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눈이 있으면 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눈을 감아도 보고 꿈을 꾸면서도 봅니다. 지금 눈을 감고 방금 보았던 강연장을 떠올려 봅시다.
강연장이 있고 연단이 있고 조명과 빛이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어디에 있으며, 또 당신은 무엇을 통해 당신의 기억을 보고 있습니까? 조금만 사유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본다는 것은 눈이라는 감각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둘째 본다는 것은 외부 세계의 실재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보는 존재입니다. 유일한 관조자. 그는 눈이 필요하지 않고 외부 세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내면을 보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외부에 있다고 믿어왔던 세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지 내 내
- 41 -
면의 투영입니다. 물질세계도, 사후세계도, 꿈속에서의 세계도 보는 존재로서의 내가, 나의 외부에 있다고 믿는 내 내면의 세계인 것이지요. 이제 더 이상 나의 내적 세계와 외부의 세계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입니다.
지금으로부터 7천 년 전, 고대의 인류는 이미 자아와 세계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이렇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외부세계가 나의 바깥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색깔로 가득한 이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고, 세상은 단단하게 나를 감싸고 있다고 말이죠.
그리고 자아를 나의 신체와 동일시하기도 합니다. 내가 남성이면 내가 남성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여성이면 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생각하고 내가 졸리면 졸리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렇게 내 눈 앞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는 무지를 고대 인류는 ‘마야’라고 불렀습니다. 무지 혹은 무명의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 눈 앞의 세계가 실제로는 내 내면의 세계라는 것을, 실제로 존재하는 건 관조하는 주체로서의 나뿐이지. 그런데 이런걸 알아서 뭘 하나? 이런 질문에 대해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범아일여의 깨달음이 영원한 자유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것은 윤회의 고리를 끊고 너를 놓아 줄 것이다.’
제가 오늘 <우파니샤드>를 여러분에게 소개한 이유는 다른 문화권의 종교를 알아보는 즐거움 때문이 아닙니다. 또 <우파니샤드>가 탁월한 진리이니 기존에 믿던 종교와 사상을 버리고 이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파니샤드>는 도움이 됩니다. 무엇에 도움이 됩니까? 바로 당신이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공이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당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 열한 번째 계단, 초월 / 경계를 넘어서
■ 경계
우리는 지금까지 열 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왔다. 소년은 문학으로 눈을 떴고, 예수와 붓다를 통해 구원의 문제를 고민했다. 이러한 고민은 철학과 과
- 42 -
학을 비롯한 학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상을 추구했지만,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고민했다. 소사의 삶은 수용이라는 적극적 행위를 통해 이러한 괴리를 극복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삶에 대한 고민은 죽음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고, 삶과 죽음이 나라는 존재 안에서 통합됨을 이해하게 했다. 결론은 이것이다. 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삶과 죽음을, 내면과 외부를, 자아와 세계를 통합하는 구심점이다.
■ 열한 번째 계단
나의 계단은 여기에서 끝난다. 얼마나 올라왔나. 소년은 뒤를 돌아본다. 이제 나를 편안하게 보호해주던 가족과 학교와 직장이라는 작은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그 세계는 먼 바다와 넓은 초원과 장대한 산맥에 가려져 있다. 어쩐지 나는 이 자리가 마음에 든다. 계단 한 쪽에 쪼그리고 앉아 넓은 대지를 여행하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한동안 이곳에 머무르리라. 나는 생각했다. 간간이 나를 스쳐가는 건강한 사람들이 나에게 물어왔다.
“젊은이 다음 계단은 어디에 있나?”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다시 묻는다. 여기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편안함을 떨쳐내고 불편한 세계를 향해 한 발을 더 내디딜 것인지.
그리고 아마도 나는 다시 모험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마음이 끌려 불편함을 감내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더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 알게 될 것이다. 열한 번째 계단은 끝이 아니라, 겨우 시작에 불과했음을.
자신의 계단을 오르는 당신이 건강하기를,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여행의 중간 어딘가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찾아오기를 기대해본다. - 끝 -
2017. 2. 17
- 43 -
'독서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성에서 영성으로 (0) | 2017.04.06 |
---|---|
인생, 너무 어렵게 살지 마세요 (0) | 2017.03.14 |
유대인식 Why? 사고법 (0) | 2017.01.10 |
1등의 독서법 (0) | 2017.01.02 |
당신은 아무 일 없던 사람보다 강합니다 (0) | 2016.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