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너무 어렵게 살지 마세요

2017. 3. 14. 13:23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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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너무 어렵게 살지 마세요

- 우리시대의 멘토 12인. 삶의 지혜를 말하다 -

■ 이태형 지음

0 고려대 사학과 졸

0 국민일보 공채 1기로 입사. 일본 특파원

0 미국 풀러 신학교 유학

0 종교국 부국장, 기독교 연구소장

0 저서 : 두려운 영광.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배 부르리라. 더 있다 등

■ 저자의 말 : 인생 너무 어렵게 살지 맙시다!

샤를 푸코는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인간 자신이 먼저임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인생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에 달려 있음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 자신을 비교하기 보다는 내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들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가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그리고 우리들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앞과 뒤를 계산하지 않고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앞장선다는 것을. 내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에 의하여 내 인생의 진로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을…….”

푸코의 말대로 우리는 타인을 통해 무언가를 배웠으며 배우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반면교사(反面敎師)적인 배움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소설 <빙점>으로 유명한 일본의 여류 소설가 고 미우라 아야코의 남편 미우라 미츠요 씨와 긴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에게 “사랑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미츠요 씨는 “사랑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타인을 행복하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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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겠다는 의지”라고 답했습니다. 그를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배웠습니다.

소설가 고은 선생님으로부터 “맛있는 인생”을 김용택 시인으로부터는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 서영은 선생님에게서는 일흔을 앞둔 여류 소설가가 유언장 써 놓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난 이유를 들었습니다. 정진홍 선생님은 노년과 죽음학에 대한 강의를, 이해인 수녀님에게는 희망을, 이어령 선생님으로부터는 ‘성공은 동행이 있는 삶’이란 것을 배웠습니다. 김남조 선생님은 “감동, 감수성은 결코 늙지 않는다”는 감동적인 문장을 주셨습니다. 그밖에 많은 선생님들로부터 귀한 것들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정말 ‘선생님’이셨습니다.

혜민 스님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지금 바로 나와 대화하는 당신”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인생, 너무 어렵게 살지 마세요”라고 덧붙였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 단순한 말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혜민 스님 뿐 아니라 이들 선생님들과의 만남에서 전체를 관통했던 공통분모는 ‘지금, 여기서, 나만의 삶을’입니다.

그들 대부분 푸코가 말했던 것과 같이 ‘인생은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지금, 여기서, 나만의 삶을 산다면 삶의 성취여부와는 상관없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저의 책을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출간한 것입니다. 이 책을 접하신 모든 분들이 기쁘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읽으면서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퍼지는 행복한 책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이태형 -

혜민

당신은 행복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행복하면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조차 언젠가는 당신을 좋아해 줄 겁니다.

‘명랑한 스님’을 만났다. 혜민 스님. 그와 인사동 찻집에서 가진 인터뷰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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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쾌했다. ‘생전의 법정 스님을 만났더라면 그렇게 유쾌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사람들은 “스님, 장차 법정 스님과 같은 큰 스님이 되세요.”라고 덕담을 하면 그는 대답한다.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법정스님이 아닌 혜민 스님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그의 약력은

- 미국의 명문 UC버클리대학교에서 영화전공,

- 하버드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비교종교학 공부

- 대학 3학년 때 불광선원의 휘광 스님을 만남, 1999년 해인사에서 계를 받고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불교학 박사 학위 받음

- 미국 메사추세츠 대학교에서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

- 수십만 명의 팔로워

그의 트위터에 올라온 글 몇 개

- 기분이 꿀꿀하신가요? 그렇다면 잠자는 아이의 얼굴을 1분만 바라보세요. 평온한 쉼의 물결이 전해집니다.

- 복권 대신 꽃을 사 보세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꽃 두세 송이라도 사서 모처럼 식탁 위에 놓아보면, 당첨 확률 백 퍼센트인 며칠간의 잔잔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삶은 당신 친구들과의 경쟁이 아닌, 나 자신과 벌이는 장기 레이스입니다. 친구들을 무조건 앞지르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그 시간에 나만의 아름다운 색깔과 열정을 찾으세요.

2012년 1월, 그는 그간 트위터에 남긴 잠언들을 모아 에세이집 <맘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펴냈다.

몇 년 전 서울 인사동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나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에게 물었다. 아마 비슷한 질문을 수없이 받았으리라.

“스님, 멈추면 무엇이 보입니까?”

“내 마음이 보여요. 우리는 ‘너무나 세상이 바쁘게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세상은 한 번도 스스로 ‘나 오늘 바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세상을 바라보는 내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바쁘기에 세상도 바빠 보입니다. 세상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투사된 내 마음을 보고 우리는 세상이 ‘이렇네, 저렇네.’ 판단하며 사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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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 스님은 ‘마음의 렌즈’란 이야기를 했다. 가슴에 와 닿는 단어였다. 마음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만큼 보인다는 뜻이다.

“결국 세상이 바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바쁜 것입니다. 정말 쉬고 싶다고요? 그럼 지금 바로 내 마음을 현재의 시간에 온전히 가져다 놓으세요. 상념이 없는 ‘바로 지금’은 바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쉬면 세상도 쉬고, 내 마음이 행복하면 세상도 행복합니다. 세상 탓하기 전에 내 마음이 렌즈를 먼저 아름답게 닦읍시다.”

혜민 스님은 고등학교 시절, 인생에 대한 궁극적이 질문을 던지면서 동시에 영화에도 몰입했다. 영화를 만든다고 사방을 돌아다녔다.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서 친지가 살고 있던 미국 캘리포니아로 갔고 UC버클리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영화를 찍어 보니 자기 길이 아니더란다.

UC버클리 대학을 다닐 때 그는 미국 대학생들의 파티 문화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 많은 학생들이 마약을 하는 등 자신의 생활과는 너무 맞지 않았다. 결국 3학년 때 기숙사에서 나와 근처 사찰에서 머물기 시작했다.

아침과 저녁에 참선을 하면서 점차 불교에 깊숙하게 들어갔다. 그때 처음으로 ‘스님이 되어 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버드대학교를 다니던 1999년에 평생의 은사인 휘광 스님을 만났다. 인연이었다. 출가를 결심했다.

“저는 기독교도 좋아했고 그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동생 부부도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저희 가족끼리는 아무런 문제기 없어요. 출가할 때 속가의 어머님에게 ‘며느리에게 아들을 빼앗기지 않게 됐으니 얼마나 좋으세요?’ 라고 했더니 웃으시더라고요.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출가한 이후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질문했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얻었다고 했다. 깨달음이 온 것이다. 하나의 깨달음은 하나로 끝나지 않고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처음에 수행은 홀로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도반과 함께 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30분만 있어 보세요. 그 편한 자세가 불편한 자세로 변합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이라 해도 영원히 좋은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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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상(無想)합니다.

그런데 그 무상함을 지켜보는 뭔가가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의 관조자가있다는 뜻이지요.

그것을 기독교 영성가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은 나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고 표현했습니다. 나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안에 있는 것이 나를 온전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관조자, 주시자를 인식하면서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것을 개달았습니다.

“인간은 왜 태어났습니까?”

“거룩하고 예쁘게 말하자면 사랑하려고요. 사랑을 통해서 ‘너와 내가 본래부터 하나였다는 것’을 다시 발견하려고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스님은 0.1초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

“그럼 지금은 저네요.”

“네.”

“내 앞의 사람과 공유하는 유대감, 따뜻한 마음, 행복감, 나누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사상이나 종교를 들이대면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위험합니다.”

“어떻게 하면 화를 다스릴 수 있습니까? ‘욱 선생’을 어떻게 억제할 수 있느냐고요.”

“화를 없애려면 그 화난 마음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불편한 감정은 없애려 하면 더 살아납니다. 그 마음자리에서 빨리 빠져 나와야 합니다. 마음 밖으로 나와서 화를 내는 나를 바라보다 보면 그 화가 점차 소멸됩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관계의 기본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사람 한 명 한 명을 난로 다루듯이 해

야 합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아야 합니다. 아무리 관계가 좋다

고 하더라도 사람과 찰싹 달라붙으면 결국 지겨워집니다. 친구뿐 아니라 부

부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아무리 좋아도 여운이 남아야 그리워집니다. 너무 가까우면 지겨워지고 숨이 막힙니다.“

그는 청년들은 만날 때마다 “인생은 연극‘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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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렵게 살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는 내게 자신이 30대 어느 봄날에 깨달은 세 가지를 말해 줬다.

1.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다.

2.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 줄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이다.

3. 남의 위해 한다는 대부분의 행위들이 실제로는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그 결론이 인생을 너무 어렵게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세요. 나도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 아닙니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연의 이치가 그런가 보다’라면서 ‘허허’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절대로 어렵게 살아선 안 됩니다. 자충수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당신은 그런 변수와는 상관없이 행복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미국 생활을 하다가 잠시 한국에 들를 때마다 느끼는 점들이 있다. 한국인들은 정말 열심히 살지만 너무나 바쁘다. 가족끼리 보내는 시간이 미국인들에 비하면 너무 적다. 과거보다는 훨씬 잘살게 되었지만 뭔지 모르게 결핍 현상이 있다.

“보통 미국인들은 오후 5시면 ‘칼 퇴근’을 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에게 퇴근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은 것 같아요. 한국인들은 일상이 바쁘다 보니 삶 자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시 쉬어야 합니다. 멈춰야 합니다. 너무 남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면 좋겠습니다. 남이 정해 놓은 시간표가 아니라 자신만의 시간표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남을 의식하다 보면 불행해집니다. 위를 보면 나보다 잘 난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러나 아래를 보면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즐비합니다. ‘이렇게 하면 행복해진다’는 타인의 말을 무시하세요. 그리고 자신만의 행복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는 마음 치유 콘서트에서 만난 20대 중반의 청춘들 가운데 “너무 늦었다.” 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정말 밥 사 주면서 말해 주고 싶어요. ‘아직 늦지 않았다.’ 고요. 20대는 물론 70대, 80대라도 늦은 시기란 없습니다. 더구나 20대, 30대는 많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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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을 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는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도저히 모릅니다.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바로 하세요. 주저하지 마세요. 젊음은 그 자체가 자산입니다. 마음껏 아르바이트도 하고 여행도 하며 외국인 친구도 사귀세요 생각대로 하세요 그러면 인연 가운데 평생 해야 할 마음에 맞는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합니까?”

“행복하다는 것은 내가 성공하고 나서도 밤에 다리를 쭉 펴고 잘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더불어 함께 행복한 것이 중요합니다. 수행은 혼자일 때보다도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더 효과적입니다. 그 관계 속에서 내 모습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상대와의 관계 안에서 내가 끊임없이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 행복해집니다.”

우리는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님은 행복하세요?”

“내 나름 행복합니다.”

“나름? 행복하다? 그래도 스님이신데…….”

“왜요? 스님은 늘 고행만 해야 하나요? 천성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어릴 때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사랑에 대한 결핍이 없어요. 누가 나를 욕해도 괜찮아요. 내 안이 사랑으로 충만하기에 누가 나를 무시해도 ‘그런가 보다’ 그래요, 이렇게 길러 주신 부모님께 감사해야지요. 자존감이 낮더라도 자신을 사랑하고 챙겨주다 보면 극복 할 수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있는 그대로를 느끼는 마음이 사랑이지요. 사랑하면 내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나의 이기심이 사라집니다. 집착이 사라집니다. 사랑하면 나는 사라지고 상대가 좋아하는 모든 것에 몰입합니다.

“사랑받으면 행복하지요? 어떻게 해야 사랑받고 행복해질 수 있나요?”

“이 세상 모든 성인들이 말씀하신 황금률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자님도, 부처님도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바로 ‘남들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너도 남들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간단하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그 상처 그대로 받습니다. 행복해 질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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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에게는 자신만의 색깔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주 안의 모든 사람들도 스스로의 독특한 맛과 멋이 있다고 언급했다. 절대로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사랑하며 살라고 했다. 나에게 “선생님도 인생 너무 어렵게 살지 마세요.”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혜민 스님의 트위터 글을 하나 더 소개해 본다.

그 누구에게도 내 인생의 결정권을 주지 마십시오. 내가 내 삶의 주인입니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그 어떤 성스런 스승이라도 나 자신이 있었기에 그분들의 성스러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십시오.

이해인

기다림과 견딤의 시간을 갖다보면 희망의 싹이 틉니다. 희망은 청하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저절로 오는 손님이 아니랍니다.

오래전부터 이해인 수녀님을 만나고 싶었다. 1981년 대학교에 입학한 그해 나온 그녀의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깊은 감동으로 읽은 뒤 그녀를 그리워했다.

내가 <민들레의 영토>를 읽은 지 정확히 30년 만에 수녀를 만났다. 이 수녀는 2008년 7월 암 수술을 받았다. 여전히 투병 중이다.

그녀는 모습 그대로 평생 깨끗하고 아름다운 글을 써 왔다. 산문집 <꽃이 지고나면 잎이 보이듯이> 서문에서 “요즘은 매일이란 바다의 보물섬에서 보물을 찾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고 썼다.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주변에 보물 아닌 것이 없단다. 비록 수도자 이지만 암 환자가 어떻게 희망과 감사를 말할 수 있을까? 희망에 대하여 물었다.

“겨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도저히 잎이 필 것 같지 않지요. 그러나 몇 달이 지나 봄이 오면 잎과 꽃이 피어납니다. 가을에는 열매가 달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희망이지요.”

그녀는 기다림과 견딤의 시간을 갖다 보면 희망의 싹이 돋는다고 말했다.

“인생에는 빛나는 순간만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할 때, 새벽으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영혼의 어둔 밤’이란 말이 다가 왔다. ‘영혼의 어둔 밤’은 16세기의 위대한 수도사였던 ‘십자가의 성 요한’이 했던 말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는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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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빛, 고통과 기쁨, 희생과 사랑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너무나 깊이 연결되어 있어 타인들에게는 그것이 때로는 같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너 있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너 있지 않은 데를 거쳐서 가라. 아직 다다르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도중 아무 것에도 발을 멈추지 말라.”

이 수녀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헤쳐 나갈 때에는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을 기다려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마음 안 드는 나 자신을 기다려 주는 겸손’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저는 수녀로서 영성 생활을 합니다. 이런 생활은 착함 외에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고통이 왔을 때도, ‘아, 내게도 이것이 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거나 인생의 연륜이 있는 선배에게 물어서라도 헤쳐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 합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꼭 있어야 해요. 자신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겸손이지요.”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법정 스님 이야기도 했다.

법정 스님이 말씀하셨지요.

‘죽음은 삶 속에 숨어 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늙음이 아니라 녹스는 것이다.’라고요. 맞는 말입니다. 그녀는 죽음을 강을 건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쪽 강에서 저쪽 강으로 건너가는 것.

이쪽 세상은 어머님을 비롯해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계시는 세상입니다. 미지의 세계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우정에 대해서도 얘기 했습니다.

“우정은 감상적으로 ‘너 나 좋아하니? 나 너 좋아한다. 다른 사람과 친하지 말고 나하고만 친하자.’고 하는 약속이 아닙니다. 친구란 선과 진리, 아름다움을 향해 걸어가는 인생 길 위의 마음 통하는 동반자입니다. 일종의 도반처럼 같이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함께 가려면 인내도 필요합니다. 함께 가면서 자신들끼리의 세계로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세계관을 갖고 마침내 세계를 품었을 때라야 참다운 우정의 빛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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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친구를 또한 서로 행복하고 발전하도록 격려해 주는 사람, 항상 문이 열려 있는 집과 같은 존재, 언제나 묻지 않고, 초인종 누르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도 말했다.

‘세계를 품는 것’이 수녀들의 삶의 모토 가운데 하나다. 그녀는 매일 열심히 신문을 읽는다. 신문에 나오는 뉴스를 보고 기도한다. 그녀가 드리는 기도는 추상적이지 않다. 구체적이다. 신문에서 아픔을 당한 사람들의 소식을 접하면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직접 추모 사이트에 들어가 글을 남기거나 현장을 찾기도 한다.

“정말로 동참이 중요한 것 같아요. 세상과 격리되어 사는 수녀지만 아프고 슬퍼하는 이웃에게 마음 한 조각 나눠 주려 합니다. 때론 성당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것보다 그것이 더 깊은 기도의 행위가 되기도 합니다. 그들과 함께하는 작은 노력이지요.”

“제대로 살려면 일단 자신의 마음속에 선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잘 사는 것’에 대해 알고는 있는데, 그 아는 것을 비켜가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어진 시간 속에서 ‘해야 할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을 먼저 행합니다. 순서가 뒤바뀌었어요.

저는 마음의 소리를 듣기 위해 성서뿐 아니라, <논어>와 <채근담>등도 즐겨 읽었습니다. 물론 일기도 썼지요.

이 수녀가 보기에 요즘 세상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 감탄할 줄 모른다. 감탄사를 잊어버린 것이야말로. 중병이다. 따뜻하고 일상을 감사하며, 감탄하는 것이야말로 수도자의 또 다른 덕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매 순간을 감탄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경탄의 감각’을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녀의 얼굴은 무척 맑았다. 어떻게 하면 이 수녀와 같은 얼굴을 소유할 수 있을까? 그 얼굴의 비결은 무엇인지 물었다.

“아유,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프기 전에도 그랬지만 늘 보물섬에서 보물을 찾는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동심을 유지한 것이지요.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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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매일 똑같이 보는 사람들도 처음 보듯이 대한다면 전혀 느낌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 하더라도 그분을 마치 내일이면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바라보면 무척 사랑스러워질 것입니다. 아무튼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남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풍요로운 보물을 자기 내면으로부터 길어내야 합니다. 동시에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내면의 바닥이 드러나지 않도록 채워 나가는 노력도 해야 하고요. 결국은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고요.”

이 수녀는 하루에 세 종류의 일지를 쓴다. 업무 일지, 편지 일지, 사색 일지가 그것이다. 깨달음이나 책에서 읽은 좋은 구절을 적어 놓은 것이다. 매일 쓴다. 수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집없이 쓴 사색일지가 130권을 넘겼다.

이 수녀는 사색 노트 가운데 적혀 있는 ‘새로운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다.’는 말을 들려줬다. 영성가 토마스 머튼의 말이다. 열정보다 겸손이 더 중요하다는 조언도 해줬다. 그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성실과 겸손을 꼽았다.

“겸손하면 감사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감동스러운 좋은 것을 보여주면 ‘나도 닮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감사하면 됩니다.

반대로 누군가의 좋지 않은 모습을 보게되면 ‘반면교사(反面敎師)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좋은 것은 좋아서 감사하고 나쁜 것은 거기서 배울 수 있으니 감사하지요. 그래서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탄사를 잊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중병입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경탄의 감각’을 살려야 합니다.

이 수녀는 누군가가 타인에 대한 험담을 하려하면 “꽃부터 보고 오세요.”라고 말한단다. 그러면서 “꽃 마음, 별 마음”으로 살자고 권한다. 갑자기 내게 “시 한 편을 읽어 드릴게요.”라면서 <꽃의 말>이란 시를 낭송해 주었다.

고통을 그렇게 / 낭만적으로 말하면 / 저는 슬퍼요

필 때도 아프고 / 질 때도 아파요

당신이 나를 자꾸 / 바라보면 부끄럽고 / 떠나가면 서운하고 / 나도 내 마음을 / 모를 때가 더 많아/ 미안하고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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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늘 신기하고 / 배울 게 많아 / 울다가도 웃지요

예쁘다고 말해주는 / 당신이 곁에 있어 / 행복하고 고마워요 / 앉아서도 멀리 갈게요 / 노래를 멈추지 않는 삶으로 / 겸손한 향기가 될게요

이 수녀는 대화가 깊어질수록 더욱 끌리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향기가 났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겸손한 향기에 젖는다. 감사와 우정, 격려, 사랑, 감탄, 행복 등의 단어가 저절로 떠 올려진다. 살면서 그런 사람을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아, 나는, 우리는 타인에게 어떤 존재로 기억되는가. 우리는 지금 어떤 향내를 풍기고 있는가.

김용택

참된 공부란 자연을 읽어내고 사람과 잘 놀며 현재의 자기를 귀하게 가꾸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내가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찾아옵니다.

1948년 전북 임실군 진메마을에서 태어난 시인은 순창농고를 졸업한 이듬해인 스물한 살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후 2008년 8월 정년퇴임할 때까지 28년 동안 자신의 모교인 임실 운암초등학교 마암분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물론 그 사이에 아름다운 시를 쓰면서 ‘섬진강 시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영원한 정신적 정체성은 교사다. 평생을 가르쳤다. 지금도 시로, 삶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전주에서 아내 이은영 씨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시인은 공부를 ‘우리가 살아왔던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알아서 보는 것’이라고 정의 했다. 그리고 “생각을 키워주고 생각을 일어나게 해 주는 것이 공부입니다. 생각을 키워 주면 아이들이 그 생각을 스스로 정리하게 됩니다. 그 생각의 정리가 철학입니다. 생각을 키워주는 것은 삶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철학적 토대를 갖게 해 주는 것이지요. 정리를 해야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새것으로 나아갑니다.”

그럼 학교란 무엇인가? 그에게 학교는 더불어 살고 노는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다. 혼자 노는 것보다 더불어 노는 것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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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남이 있을 때 행복한 것이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행복은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있을 때 온다는 것을 알려 줘야 한다. 나무와 더불어, 해와 더불어, 산과 더불어, 엄마 아빠와 더불어, 친구와 더불어 있어야 행복하다. 나 혼자 있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이웃이 있어야 한다. 행복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늘 발견하고 찾아야 한다.

그는 아이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살짝 웃을 때 해맑은 소년의 모습을 간직한 시인은 “그런데 과연 우리 사회는 지식이 인격으로 승화되는 교육을 시키고 있는가?”라고 말할 때에 분노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는 자연이야말로 위대한 학교라면서 그 안에서 잘 노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온전한 인격을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자연과, 사람과 잘 놀아야 합니다. 놀기 위해서는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상대와 재미있게 놀려면 상대를 인정해야 합니다. 놀면서 상대를 인정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부모들은 아이들이 노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놀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오직 정답만 찾는 공부를 하다 보니 지식이 인격으로 전환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교육이란 무엇입니까?”

“교육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게 해 주는 것이 교육입니다. 좋아하면 열심히 합니다. 열심히 하면 잘합니다. 잘한 것을 갖고 사회에 나가면 크건 작건 반드시 제 몫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평생 하고 사는 게 인생입니다.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평생 하다 보니 성숙하고 성공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결국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지요. 그러데 지금 한국의 교육은 행복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인생을 가르쳐 주지 않아요. 출세와 성공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격 형성과는 상관없는 교육이지요. 그러다 보니 사회 자체가 공허하고 불합리하게 흘러갑니다.

“인간에게는 놀이를 가르쳐야 합니다. 잘 놀게 해야 합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자연과 사람 특히 엄마와 놀게 해야 합니다. 어머니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는 위대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어머니와 아이들이 놀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어머니와 노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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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기를 포기했습니다. 아이들을 학원에다 맡겨버렸습니다. 어머니의 입에서 하루 종일 공부와 점수만 따지고 있으니 아이들이 온전한 인간이 되겠어요? 점수 벌레가 되는 것이지요.”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와 놀고 장난감과 놉니다. 그러나 사람과 놀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과 놀다 보면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방법을 배웁니다. 놀이는 상대를 인정하는 훈련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노는 시간이 없습니다. 큰일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놀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어릴 때부터 놀게 해야 합니다. 자연과 사람이 놀게 해야 합니다. 어머니와 친구와 놀게 해야 합니다. 독창보다 합창을 해야 합니다. 합창은 자기를 다 비우고 다른 사람과 맞추는 과정입니다. 놀아야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이런 것들은 학원에서 배울 수가 없습니다.

인격이 없으니 직장에 들어가도 재미가 없습니다. 학교와 직장 모두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들이 선생들이 거기 맞췄습니다. 대기업에 들어가고 변호사와 의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는 사라지고 맙니다. 고민하고 생각하는 자기 말입니다. 인생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고민하는 자기는 실종됩니다.

김용택 시인 하면 생각나는 것이 섬진강이다. 그는 ‘섬진강 시인’으로 불렸다. 스스로도 섬진강 지킴이로 살았다고 말한다. 섬진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무수한 시를 썼다. 섬진강은 그에게 무엇인가?

“평생 섬진강 길을 걸으며 살았습니다. 섬진강은 내 삶, 내 정신적 힘의 줄기입니다. 핏줄입니다. 그러나 섬진강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섬진 강변의 공동체는 살아 있었습니다. 강과 마을 사람들이 어울리며 살았습니다. 같이 먹고 일하고 노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풍습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그것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문화가 생성, 소멸, 발전했습니다.”

“강은 우리였고 나였습니다. 우리 마음과 강물의 마음은 같았습니다. 우리 삶이 강물을 닮은 것이지요. 우리 삶이 맑고 깨끗하면 강물도 맑았습니다. 우리 삶이 혼탁하면서 강물도 더러워진 것입니다. 삶과 강이 일체였습니다.

넓은 강변에 토끼와 노루가 살고 수없이 많은 풀꽃이 피고졌습니다. 지금은 그런 강이 다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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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자신이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자신했다. 이유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서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태어난 곳에서 평생 선생을 하면서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살았다. 섬진강을 바라보면서 그 강물만큼이나 맑은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과 생태, 순환의 논리를 배웠다. 문학과 예술을 사랑했다. 주어진 여건은 나빴다. 가난한 6남매의 집안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이루었다.

“저는 언제나 ‘나만큼 행복하고 잘 산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은 자유니까요.”

“교육은 나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시기에 나는 나를 가르쳤습니다. 어린이들 역시 나를 가르쳤습니다.”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인생에서 배운 점은 ‘지금을 귀하고 소중하게 가꾸다 보면 내가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글쓰기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글을 쓰면 생각을 조직하고 넓히는 능력이 생긴다. 시인은 우리나라처럼 글쓰기를 가르치지 않는 나라는 없다고 개탄했다. 글을 쓰는 사람과 안 쓰는 사람과는 인생 전체에서 10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꼭 형식에 맞춰 소설과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는 삶에 대한 글을 쓰면 된다고도 했다.

글은 삶이, 풀과 꽃이, 나무와 자연이 써 주는 것이다. 내가 쓰는 것이 아니다. 오늘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모든 것을 품는 것, 그것이 바로 글쓰기의 기본이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하나로 ‘부부가 잘 사는 것’을 들었다.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는 남편과 아내가 잘 놀아야한다는 사실을 삶을 통해서 체득했다. 지금도 그는 아내 이은영 씨와 함께 놀 때가 가장 즐겁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시인은 38세에 결혼했다. 귀찮을 것 같아서 결혼하지 않고 살려고 했다가 아내를 만나 25년째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술도 안 마신다. 친구도 별로 많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아내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아내와 이야기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는 아내뿐 아니라 남편도 살림을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방안 정리 가구 배치 사진 한 장 붙이는 것도 아내와 상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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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는 20대의 아들과 딸이 있다. 공부를 잘하진 않았지만 한 번도 “공부 좀 하라”고 기를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지독한 방황기를 거쳤다. 대학도 늦게 갔다. 그러나 결국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고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아들이 군대 갔을 때 시인은 편지할 때마다 시 한 수씩을 써 보냈다.

딸은 지금 미국에서 유학중이다. 영미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딸에게도 500여 편의 시를 보냈다. 신문에서 좋은 내용의 칼럼이나 인터뷰, 시를 발견하면 다운받아 이메일로 딸에게 전해줬다. A4 용지로 1만장이 넘는 엄청난 양을 보냈다고 한다.

요즘 딸은 아빠에게 고백한다. “아빠는 내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야.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을 가르쳐주는 종합적인 선생님.

시인에게 나의 세 아들들에게 간단한 교훈의 말씀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말했다.

“혼자 잘 먹고 잘 살려 하지 말거라. 세상을 가슴에 안고 사는 큰 산 같은 큰 사람이 되거라. 세계를 위해 헌신, 봉사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거라.”

한비야

우리 안에는 분명 마음의 숯불에 바람을 불어넣어 활활 타게 만들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 숯불이 타는 시간이 바로 나의 정확한 그때입니다.

나는 지난 2004년 1월 초 한비야를 이란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이던 그녀는 지진으로 5만 여명이 숨진 이란 밤시에 탤런트 박상원씨와 함께 왔다. ‘바람의 딸’로 각인된 오지여행가에서 NGO의 긴급구호팀장으로 ‘보직’이 바뀐 지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유명인이었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비롯해 <그건 사랑이었네> 등 출간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됐다. 2009년에는 52세라는 나이에 미국 보스턴에 있는 터프츠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늦깎이 유학을 가기 전 그녀는 월드비전을 사직했다. 물론 월드비전 측은 “공부를 마치고 꼭 다시 돌아오라.”며 끝까지 한비야를 잡았다. 당시 그녀가 한 말은 강렬했다.

“나는 지금 환승역에 서 있어요. 환승역에서는 지금까지 타던 차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열차를 탈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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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환승역에서 서성이다, 새로운 열차를 끝내 타지 못한 사람들에게 한비야의 끝없는 도전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1년간 유학 생활에서 인도적 지원에 관한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오자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다. 24개 구간 가운데 10구간을 마치고, 2010년 마지막 날 중국으로 떠나 중국어 고급과정을 공부했다. 현재 그녀는 월드비전 세계 시민학교 교장과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2010년 가을에 그녀를 만나 장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나이를 물었다. 1958년 생이라고 했다. “그럼 저보다 네 살 연상이십니다.” “어머 그럼 마흔 아홉? 아직 핏덩이네요. 호호호.”

이 여인, 쉰이 내일모레인 나를 핏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인생은 축구 경기로 치면 후반전에 들어와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단다. 후반전에서 남은 시간도 엄청 많고, 이후 연장전, 페널티킥 승부까지 남았다고 말하며 웃었다. 열정과 꿈, 환희, 도전, 약동, 가슴 뛰는 삶…….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느끼는 감정이었다. ‘한비야 다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한비야는 자신만의 시간표를 갖고 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는 ‘기준시간표에 전혀 좌우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는 ‘한비야 스탠다드’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스스로가 정한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한비야 스탠다드를 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지난 30년간 그녀는 이틀에 한 번씩만 잠을 잤다고 한다. “정말로?”란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룻밤을 새운다 하더라도 고작 여섯 시간 자지 않는 것이잖아요. 밤을 새우며 책을 읽고 글을 썼어요. ”기가 질린다.“

그녀는 여러 가지 재지 않는다. 간절히 원한 ‘그 일’에 최선을 다한다. 백두대간 종주할 때에는 백두대간만 생각한다. 종주를 위해서 좋다는 모든 것을한다. 관절을 위해 연골 주사도 맞았다. 초콜릿을 싫어하지만 종주 기간에는 먹었다. 열량을 보충하기 위해서다. 잠도 매일 잤다. 오직 백두대간 종주를 위해서.

서점에 나가 보면 ‘20대에 해야 할 일’ 30대 라면 해야 할 일‘ 등과 비슷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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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책이 많이 보입니다. 그런 것은 참고자료가 될 뿐이지 내 인생에 고스란히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남들이 제시한 표준 시간표와 상관없이 내가 인생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지금 바로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그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면 됩니다.

저는 늦게 개화되는 가을 국화를 닮았습니다. 사실 35세 까지 누구도 저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 출간된 이후에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가을 국화와 같이 저의 꽃봉오리는 35세에 터졌습니다. 20대에게 35세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고 여겨지겠지요. 그러나 그때가 바로 ‘나의 때’였습니다. 표준 시간대로라면 늦었지만 ‘나의 시간표’로 따진다면 정확히 바로 그때 핀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꽃 필 날’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책을 여러 권 썼는데 작가로서는 70대가 전성기일 수 있어요. 지금까지는 설익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때까지 인생을 잘 살면 더 깊은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등산을 하다보면 5부 능선에서 보는 경치와 7부나 9부 능선에서 보는 경치는 완전히 다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대한민국은 너무 조로(早老)사회인 것 같아요.”

그녀는 먼저 자기가 어떤 과의 꽃인지, 어떤 유의 동물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다.

“자신이 낙타인지 호랑이인지 알아야 합니다. 호랑이가 사막에 가면 바보가 됩니다. 사막에서는 낙타가 왕이지요.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를 특정한 규칙대로 하면 공평하게 이뤄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들어 온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토끼의 규칙’에 따라 펼쳐졌습니다. 우화에서는 토끼가 잠들어 거북이가 이겼지만 실제로 토끼는 엄청나게 유리한 조건에서 거북이와 경주를 한 셈이지요. 언제나 토끼가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거북이의 규칙’에 따르면 전혀 상황이 날라집니다. 물속에서 경주하면 토끼는 백전백패하지요. 아예 물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잖아요. 언제부터인가 저는 세상의 규칙이 아니라 ‘나만의 시간표’대로 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시간표대로만 잘 가면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지요.”

“월드컵에서 한국팀 경기가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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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중계방송을 보잖아요. 그때 한국인들은 그 시간에 할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국팀 경기를 보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용기는 무언가를 간절히 하고 싶은 강도가 크면 클수록 다른 것들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용기는 ‘자기가 선택한 일이 얼마나 하고 싶은가.’에 정비례합니다.”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할 용기가 납니다. 간절함이 중요합니다. 진실로 자기가 선택한 그 일을 위해 자신이 지닌 100%를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될 때 용기가 생깁니다. 9년간 월드비전에 있으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당시 저의 몸값은 ‘0원'이었습니다. 그것이 분쟁 지역에서 활동하는 구호요원의 몸값입니다. 저는 목숨을 걸고 현장을 지켰습니다. 수천 명의 죽은 시체를 보고도 사선으로 뛰어 갔습니다. 트라우마가 있어도 숨기고 자원해서 갔습니다. 나를 가슴 뛰게,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현장이었기에 갔습니다. 무언가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요?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자신이 그것을 정말로 원하고 있는지를요. 정말로 원하면 행동에 옮깁니다.“

한비야는 사막에서는 밍크코트를 벗어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비유였다. 모든 사람들은 밍크코트를 입으려 노력한다. 만약 그 밍크코트를 사막에서 입고 있다면 어떨까. 괴로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벗지 못한다. 사람들이 밍크코트를 좋다고 해서 보통 사람들은 “그냥 참아라. 조금만 참으면 시원해질 거야.”라고 말한다. 결국 땀띠로 고생해도 밍크코트를 벗지 못한다. 그런데 사막에서 밍크코트를 입은 사람이 살 길은 벗는 것이다. 벗어야 산다.

“사춘기 때에는 모든 것을 다 겪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후반기에 ‘사추기’를 겪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너, 인생 실패했다.’ 라고 절대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곧잘 자신의 지난 인생을 후회한다. 늘 후회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매 순간을 영원처럼 소중히 여기고 있기에 한비야는 후회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끝까지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후회 없는 삶은 자기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을 마침내 하고야 마는 삶입니다. 하고 싶은 그것에 백퍼센트 몰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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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입니다. 사람의 에너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 장작 열 개가 있다고 칩시다. 장작을 하나씩 태우면 밥을 지을 수 없습니다. 열 개를 한꺼번에 넣어야 물이 끓고 밥이 됩니다.”

그녀에 따르면 자기를 백퍼센트 태워서 행한 일은 뭔가 잘 안 되어도 남는 것이 있다. 자기가 열심히 했던 바로 그 혼신의 노력이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안 되다니……. 라면서 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열심히 한 그것이 내 가능성이다.‘라고 만족해 하는 것이다. 물론 한계이기도 하다. 한계인지 아닌지는 한계까지 가 봐야 한다. 시도하는 것이 힘이다. 일단 하기 시작하면 절반은 따먹고 간다. 결국 모든 일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진인사 했을 때 천명을 기다릴 수 있다. 진인사 했을 때 자기가 마음에 든다.

“마지막에 제가 스스로에게 묻는 것은 ‘남보다 잘했느냐.’가 아닙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힘을 다 썼는가.’입니다. ‘어떤 힘도 남기지 않았다.’ 고 할 때의 제가 마음에 듭니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한비야가 쓴 대표 저서 가운데 하나다. 어떻게 경계선 분명한 지도 밖으로 나갈 수 있는가? 지도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경계선을 넘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사회에는 지도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지도 안에서 묵묵히 머무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지도’란 자기 생각의 틀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능성이 많고 멋집니다. 그런 멋진 자신을 시도해 보지도 않고 ‘나는 여기까지’라고 포기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대부분이 자기가 한계라고 정해 놓은 지도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오면 철저히 아무것도 안 하고 활자로 된 것만 보고 글을 씁니다. 1년에 백여 권의 책을 읽어요. 그것이 저의 힘입니다. 인터넷만 하다보면 생각하는 힘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인터넷 검색을 활용하다보면 누가 올린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엉뚱한 인용을 하게 됩니다. 인터넷 정보를 마치 내 정보인양 사용하게 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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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와의 인터뷰는 보통 사람들과 인터뷰할 때보다 같은 시간에 두 배나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었다. 그만큼 말이 속사포 같았고 내용이 질서정연했다. 그 넘치는 에너지가 부러웠다. 그 열정이 더불어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전염이 될 것은 확실했다.

“친구가 많을 것 같습니다.”

“네, 많지요. 수도 없이 많지만 ‘나는 이 사람 하나면 충분해.’라고 생각되는 친구는 다섯 사람 정도 있습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 가장 따끔한 이야기를 해 주지만 언제나 내 편인 사람이 친구입니다. 심장이 하나라서 못 떼어 주지만 만일 두 개라면 한 개는 떼어줄 수 있는 사람이 친구이지요.”

“인생에서 남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뜨겁게 몰두했던 순간이 남을 것 같습니다.”

“ 그 남는 것을 위해서 해야 할 인생에서 소중한 세 가지를 든다면?”

“결국은 믿음과 소망,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책 <그건 사랑이었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세상을 향한, 여러분을 향한 내 마음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도 또렷이 보였다. 그건 사랑이었네.

이어령

진짜 성공은 영원히 성공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끝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성공자이며 행복한 사람이지요.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남들은 나를 보고 성공했다고 말하겠지요. 문필가로, 교수로, 장관으로 활동했으니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실패한 삶을 살았습니다. 겸손이 아닙니다. 나는 실패했습니다. 그것을 항상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을 만나 꼭 이야기 나누고 싶었던 주제가 성공이었다. ‘시대의 지성’으로 불리며 화려한 삶을 산 그에게 ‘당신은 정말 성공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서울대학교 문리대 출신에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와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던 그는 분명 성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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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일 것이다. 문필가로서, 문학평론가로도 그는 큰 인기를 얻었다. 저술가로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평생 100권정도의 책을 직접 쓰기도 했고, 편집했으며 편찬도 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와 <장군의 수염><축소 지향의 일본인> 등을 비롯해 영적 구도의 길을 다룬 최신작 <지성에서 영성으로>에 이르기까지 그의 책은 언제나 독자의 관심을 받았다.

그의 나이 29세에 발간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출간 1년 만에 30만부를 기록한 초 베스트셀러였다. 당시와 지금의 출판 규모를 생각해 볼 때 공전의 히트였다. 한국의 문화를 분석해 낸 한국 최초의 한국인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지금까지 250여 만 권이 나갔다. 청년 이어령의 젊고 자유로운 영감으로 가득 차 있는 책이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와 관련해서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들이 많다. 대만에서 번역 출간 되었을 때는 린위탕(林語堂)으로부터 ‘아시아의 빛나는 거성’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저명한 문화인류학자 다다 교수가 자신이 읽은 책 중 ‘가장 감동을 준 세 권의 책 가운데 하나’로 꼽을 정도였다. 영문으로 번역되어 나갔을 때는 미극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었다. 이 책으로 이어령은 ‘젊은이의 기수’ ‘언어의 마술사’ ‘단군 이래의 재인(才人)’으로 까지 불렸다. 불과 그의 나이 29세에 쓴 책이다. 2011년 9월부터 이어령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출간 50년을 기념하는 속편을 월간지 <문학사상>에 쓰고 있다. 한 권의 책이 반세기 동안 살아남아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는 것이다.

이 전 장관이 쓴 또 다른 밀리언셀러는 ‘축소’의 논리로 해부한 일본인론인 <축소지향의 일본인>. 이어령은 ‘축소지향’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일본의 고전, 역사, 현재의 과학기술 분야를 모두 아울러 일본인을 해부했다. 일본의 지식인들마저도 깜짝 놀랄 저작이었다. 역시 100만 부 이상 팔린 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77세에 쓴 그의 구도기인 <지성에서 영성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남들은 내가 노인답지 않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육체적으로 노인답지 않다는 말이 아니겠지요. 나는 20대와 30대에 하던 일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추구한 것은 돈과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나는 이미 성숙할 대로 성숙해져서 늙어버렸을 겁니다. 늙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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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됐다는 것은 더 감동도 없고 더 해볼 것도 없다는 의미인데 나에게는 아직도 읽지 않은 책이 정말 많습니다. 책이 나의 인생이라면 무한히 많은 인생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문학적 상상력의 측면에서 보면 늙는다는 것도, 무엇을 달성한다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대단한 그가 스스로를 실패한 인생이라고 평가했다. 그가 “나는 실패자.”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의 인생 실패를 선언하게 된 것은 동행자가 없어서라고 말했다.

“내게는 친구가 없어요. 그래서 내 삶은 실패했습니다. 혼자서 나의 그림자만을 보면서, 동행자 없이 숨 가쁘게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더러는 동행자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니 모두 경쟁자였습니다.”

가족이 이 말을 들으면 섭섭해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집에서도 언제나 글을 썼습니다. 머릿속으로 24시간 동안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요. 애들과 야구구경을 간다거나, 아내와 오붓하게 영화감상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졸은 남편, 좋은 아버지라고 할 수 없지요.”

그는 인생의 동행자가 없었던 가장 큰 이유로 자기 자신을 들었다. 누가 보아도 훌륭하다고 할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진정한 동행자로 맞이하며, 함께 걷고,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행자가 없다는 것은 사랑에 실패했다는 의미지요. 그것이 이성이건, 동성이건…….”

그에 따르면 사랑에는 에누리가 없다. 시장 원리보다 더 한 것이 사랑이다. 준 것만큼 받는다. 설령 줬는데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사랑을 준 기쁨은 반드시 보상 받는다. 상대가 사랑 대신 미움을 준다 해도 그것까지도 약이 된다.

“나는 사랑을 줘 보지 않아서 받지도 못했다고 스스로 판단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당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꿀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결핍으로 생긴 일이었다. 그 결핍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부터 시작됐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한 유일한 분이 어머님이셨습니다. 그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시니 본능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게 됐습니다. 사람들을 경계하기 시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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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잘 표현되어 있듯이 그는 극심한 질병과 자녀 문제로 어려움에 처한 딸 민아 씨의 믿음을 보면서 절대자를 추구하게 됐다. 결국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에게 질문했다. “모두가 성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성공했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날 흔히 말하는 성공은 타자의 기준, 사회의 기준에 따른 성취를 의미합니다. 우리말에 ‘남 보라는 듯’ ‘여 보라는 듯’이라는 구절이 있지요. 그 말대로 타자의 기준과 목표에 자기가 맞춰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갖고 싶지 않아도 남들이 원하는 트로피, 남들이 만들어준 트로피를 위해서 살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자기실현적인 성공의 측면보다는 타인지향적인 성공이 더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성취를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지요? 내가 아는 재벌급 회사 사장이 있는데 하루아침에 회사를 떠나 동굴로 들어가 몇 년간을 수련을 하더라고요. 남들은 미쳤다고 하지만 그 사람은 새로운 삶, 뉴 라이프로 들어간 것이지요. 꿈도 꾸지 못했던 삶을 살기 위해 지금까지의 성공을 버리고 다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영웅이고 진정한 성공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짜 성공은 영원히 성공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끝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성공자이며 행복한 사람입니다.”

“문화부 장관을 2년 남짓하시고 사표를 내셨습니다. 문화부 장관 입각 때도 수없이 고사하셨고요. 문화부 장관 하려고 애를 쓰는 무수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허탈했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장관 2년 하고 사표를 냈습니다. 사표 냈을 때 어떤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옛 선비들과 같이 벼슬자리를 내어 놓으면서 ‘훌훌 털고 나니 시원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장관직을 연명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이 버린 자리를 내가 좇는다고 해서 그것이 성공이 아닌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우물을 파는 사람이라고 했다. 우물을 파는 사람이기에 일단 물이 나오면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다른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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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또 파러 간다는 것이다. 그렇다. 어쩌면 성공은 갈증을 끝없이 채워 가는 마음이 지속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 갈증은 결코 채워지지 않겠지만.

“마시는 재미가 아니라 파는 재미로 사는 것이지요. ‘물이 나올까, 안 나올까?’를 생각하면 참 재미있습니다. 그 물을 마시느냐, 안 마시느냐는 완전 논 외의 일입니다. 암반을 뚫고 수맥을 찾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지요. 새로움을 향한 열정이고요. 내가 평생 꿈꿨던 것은 창조적 인생입니다. 그래서 이미 얻은 결실에서가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내 삶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아까 말과 모순되나요?”

“나는 삶에서의 우연성을 강조하는 편입니다. 어느 날 밤에 갑작스레 일어났는데 다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잠을 자야 하는 시간에 잠이 오지 않으니 불행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할 수 없이 서재에 가서 이 책 저 책 뒤져보다가 정말 대단한 책을 만났습니다. 꼭 봐야 했는데 그 이전까지 접하지 못했던 책입니다. 그때 그 기막힌 우연을 생각합니다. ‘만일 내가 잠이 잘 왔더라면 그 책과는 평생 만나지 못했겠지. 읽더라도 이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더라면 진가를 몰랐을테지.’ 삶의 우연성을 통해서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얻어 낼 때 나는 그것을 ‘수지맞았다.’고 말합니다. 그런 우연성을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수지맞는 일입니다. 삶은 우연에서 필연을 만들어 내는 과정입니다. 인생의 불행마저 행복으로 역전시키는 데 삶의 묘미가 있습니다.”

이어령은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지성은 의문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라고 썼다. 그가 기독교 신자가 되고 세례를 받은 것은 한 재벌 기업 회장이 동굴로 들어간 것과 같은 뉴 라이프의 세계로 들어간 일대 사건이다.

“세례를 받을 때 눈물을 흘리셨다지요? 시대의 지성 이어령의 눈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맞아요. 세례를 받을 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까지 누구 앞에서도 운 적이 없었습니다. 살면서 인간의 나약함, 끝없이 지성을 탐구해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손가락 한마디만큼도 도움을 줄 수 없는 그런 나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았습니다. 그 나약함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이 보였습니다. 어린 시절, 굴렁쇠를 굴리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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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앉아 한없이 울었던 나 지신도 보였습니다. 세례받을 때엔 왜 우는지 잘 몰랐는데,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는 ‘지성에서 영성으로’ 들어가게 될 때의 상황을 ‘플런지(Plunge 빨려 들어가다)’ 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플런지는 믿음의 단계에서 아주 중요하다. 그가 영성의 세계로 ‘플런지’하게 된 계기는 딸에게서 비롯됐다. 지성에서 영성의 세계로 플런지 하지 못하고 문지방에 머물고 마는 사람들도 많다.

행복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는 전체적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행복한 순간들은 있었다고 답했다.

“행복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된다는 의미로서의 행복은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김연아가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장면을 보고 좋아합니다.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은 더 따분하고 슬픔니다. ‘차라리 김연아 경기를 보지 말걸.’ 이라고도 생각합니다. 행복감을 느낀 뒤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니 더 따분해 집니다.

결국, 결핍 상태에서 가끔 충만하게 되는 순간, 그 연속체가 행복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에는 무수히 행복한 순간들이 있지요. 지속되지는 않아도 점으로 찍혀진 행복의 순간 말입니다. 어느 날 죽기 직전에 그 점으로 찍힌 행복을 잇다보면 내 삶이 행복했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 애플사를 창업한 스티브 잡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지요.

스스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어쩌면 그는 이 땅을 사람 사람들의 희망이다.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늙은이는 늙은이대로 이어령은 삶의 역할 모델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창조적 갈증이 있다면, 우리 역시 그와 같이 늙어도 영원한 청춘으로 살 수 있다.

또한 ‘이어령은 우리와 다른 유형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 실패감에 젖은 사람이라도 낙망할 필요는 없다. 동행이 있으면 된다. 지금 평생지탱해 줄 동행이 있다면 당신은 그보다 더 행복한, 성공한 사람일 수 있다.

이 전 장관을 지성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로 인도한 외동딸 이민아 씨가 2012년 3월 15일 암 후유증으로 이 땅을 떠났다. 언제나 자신만만했던 이 시대의 지성 이어령도 그토록 사랑했던 외동딸의 죽음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어령의 눈물’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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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잃고 여전히 비통해 하고 있을 이 전 장관에게 그가 내게 했던 이 말을 다시 전하고 싶다. “삶은 우연에서 새로운 필연을 만들어 내는 과정입니다. 인생의 불행마저 행복으로 역전시키는 데 삶의 묘미가 있습니다.” 부디 딸의 죽음 앞에 절망하지 마시고 지성에서 영성의 길을 넘어 천국의 길로 향하시길…….

미우라 미쓰요 (미우라 아야코의 남편)

사랑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의지가 아닐까요?

일본 홋가이도 북부의 중심도시 아사히카와, 내가 인구 36만여명의 아사히카와에 간 것은 순전히 한 사람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였다.

미우라 아야코, 40대 이상의 한국인이라면 일본이 자랑하는 이 여류 소설가를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1964년 7월 10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1면에 42세의 주부로 잡화점을 운영하는 아야코 씨가 1,000만 엔 현상 소설 공모에 1위로 뽑혔음을 알렸다. 소설의 이름은 <빙점(氷點)>, 일본과 한국에 ‘아야코 붐’을 일으킨 작품이다.

1922년 아사히카와에서 태어난 아야코는 199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96편의 소설을 썼다. <길은 여기에> <양치는 언덕>등 그녀의 작품은 일본은 물론 한국 독자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아마도 한국인이 가장 친밀감을 느끼는 일본인 가운데 한 명이 미우라 아야코 일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 훨씬 이전에 미우라 아야코가 있었다.

작가로서 화려한 삶을 산 그녀, 그러나 아야코는 폐결핵과 척추 질병 등으로 꽃다운 24세부터 병상에 누워 천정만 바라보아야 했던 비참한 여인이었다. 물론 그녀는 고통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처절한 고통에서 인간의 구원과 희망을 찾았다.

그녀가 고통을 초월할 수 있었던 것은 독실한 신앙 덕분이었다. 그리고 현실의 고통을 함께 지고 나간 평생 반려자 미우라 미쓰요의 헌신이야말로 아야코의 삶을 지탱해 준 원동력이었다.

미우라 부부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매우 유명하다. 아사히카와에서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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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을 하던 미쓰요는 1955년 6월 우연히 투병을 하던 홋타 아야코의 병문안을 가게 된다. 침상에 고정돼 움직일 수 없었던 아야코에게 미쓰요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로 시작하는 요한복음 14장 1~3절까지를 읽어줬다. 노래해 달라는 아야코의 부탁에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을 불러줬다. 세 번째 방문한 날에 미쓰요는 “제 생명을 아야코에게 주어도 좋습니다. 아야코를 낫게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만난 지 5년 뒤 이들을 결혼했다. 미쓰요가 35세, 아야코가 37세였다. 그때까지도 아야코는 병상에 누워 있었지만 건강은 꽤 회복했다. 이후 아야코는 기적적으로 치유됐고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

그때부터 그녀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미쓰요는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아내가 구술한 내용을 필기했다. 그 이후 30여년 동안 미쓰요는 아야코의 충실한 남편이자 비서로 지냈다.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빙점>의 무대인 아사히카와 미혼린에는 미우라 아야코의 기념 문학관이 있다. 아야코가 죽기 1년 전인 1998년에 세워졌다. 문학관 건립을 위해서 그녀를 사랑한 독자 15.000여 명이 십시일반으로 기부한 금액이 무려 2억엔에 달했다. 아사히카와 도요오카에는 미우라 부부가 30년 넘게 살았던 집이 있다. 지금도 미쓰요 씨가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담백한 2층 집, 부부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문패가 인상적이었고, 잘 정돈된 거실에는 그들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과 각종 의미 있는 물품들이 놓여 있었다.

인터뷰 당시 86세인 미쓰요 씨는 소년 같은 미소가 아름다웠다. 그를 보고 단박에 생각했다. ‘저렇게 늙어야 하는데…….’ 목소리도 온화했다.

그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미쓰요 씨라면 이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을것 같았다.

“사랑이라……. 사랑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싶네요. 사랑의 조건과 환경은 시시때때로 달라집니다. 인간의 마음도 변화하지요. 끝까지 죽도록 사랑하겠다는 사람들도 갈라서곤 합니다. 그러나 어떤 환경, 어떤 조건일지라도 한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야코 씨는 사랑을 어떻게 정의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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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코는 정말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분명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는 어떤 독특한 사랑의 인자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깊은 고통 속에서 아야코는 ‘사랑은 참고 견디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작가 아야코는 어떤 아내였는지가 궁금했다.

“순종의 여인이었어요. 고통 속에서도 남을 돕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쓴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요카타 요카타. (좋아요 좋아요)’ 라고 말해 줬어요. 학교를 8년 밖에 다니지 않는 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위해 줬어요. 그녀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의견을 물었고 동의를 구했습니다. <빙점>을 쓸 때에도 제게 동의를 구했습니다. 사탕을 하나 살 때에도, 그 어떤 일을 할 때에도 물었습니다. 저보다 훨씬 지적이었음에도 아이와 같은 천진함과 순종적 자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야코는 진실로 아름다웠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은혜라는 사실을 아야코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척추 질병으로 13년간이나 병상에 누워 지내던 여인과 어떻게 결혼할 결심을 하셨습니까? 55년도 넘은 이야기지만요…….”

“당시 병상의 아야코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미에가와 다다시라는 아야코의 어린 시절 친구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다시 다다시가 홋카이도 의학부를 다니다 결핵에 걸려 요양 생활을 하게 됐고, 당시 26세이던 아야코와 결핵 환자로서 재회하게 됐습니다.

그때 아야코는 절망 속에서 죽을 결심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었습니다. 다다시는 아야코에게 생의 의미, 희망의 의미를 가르쳐 줬습니다. 아야코는 다다시를 연모했습니다. 그러나 다다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는 유언을 아야코에게 남기고 이 땅을 떠났습니다.

저는 다다시가 죽은 지 1년 후에 아야코의 병상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아야코는 숨이 멎을 정도로 전율했다고 합니다. 저와 다다시가 너무 닮아서요, 외모, 말투, 종교까지…….

아야코를 세상에 알린 소설 <빙점>의 제목을 정해준 사람이 다름 아닌 미쓰요 씨였다.

“빙점은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드라마와 영화화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도 ‘미우라 아야코’는 친숙한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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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이 <아사히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하자 아야코의 생활도 크게 변했습니다. 여러 주간지와 월간지의 연재 의뢰를 받거나 강연요청도 쇄도 했습니다. 이후 저는 일을 그만두고 아야코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다섯 번째 작품인 <시오카리 고개>를 연재할 때부터는 아야코가 구술하고 제가 필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30년 동안 아야코의 모든 작품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미쓰요 씨는 아야코가 강력한 빛의 여인이었다고 언급했다.

“아야코는 언제나‘일어나서 빛을 비추라.’고 말했습니다. 빛을 향하라고 했어요. 빛에 등을 돌리고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 불길한 그림자만을 보지만 빛 쪽을 향했을 때 그림자는 사라지고 성스러운 따뜻한 빛만 남는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생명 그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했지요. 그 말대로 저도 생명 자체를 기뻐하려고 합니다. 이제 너무나 늙었지만 이 늙음 자체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빛을 향하며 기뻐하며 살다가 아야코 곁으로 가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인생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괴로움과 걱정. 그것은 어쩌면 신이 우리들에게 보내신 편지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편지를 잘 읽어 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미우라 아야코의 <작은 우편>에 있는 글이다. 고통은 신이 우리에게 보내 준 편지다. 그 편지를 잘 읽어야 한다!

“아야코 씨와 헤어진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아내가 그립습니까?”

“하하, 아야코와의 추억은 희미해지지 않습니다. 무척 생생합니다. 마음속으로 언제나 대화를 합니다. 꿈에서도 자주 봅니다. 이제 머지않아 직접 만나게 될 겁니다. 천국에서 아야코를 만나면 먼저 이기적인 남편이었던 것을 사과할 작정입니다. 더 많이 소중하게 대해야 했는데 이기적인 말만 해서 정말 미안하다고요. 살아 있을 때 좀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사랑에는 마침표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삿포르 아사히카와 아야코의 방에서 그리움을 생각해 본다. 누가 나를 그리워 하고 있는가. 내가 그리움의 대상이 될 삶을 살았는가. 나는 누군가를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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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으로 그리워하고 있는가. 아,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는가.

‘ 미우라 미츠요 씨는 인터뷰를 한 지 4년 후 2015년 10월 30일 90세를 일기로 이 땅을 떠났다. 하늘에서 아야코 씨를 만나 더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으리라.’

2017년 2월 26일

* 다음에 2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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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너무 어렵게 살지 마세요(2)

- 우리 시대의 멘토 12인, 삶의 지혜를 말하다 -

■ 이태형 지음

김남조

잘 보는 것은 자세히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것입니다. 이 땅의 청춘들은 자신들이 지닌 것, 아직 남아 있는 것을 잘 보아야 합니다.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김남조 작사, 김순애 작곡의 <그대 있음에>다. 소프라노 조수미가 부른 이 곡을 다시 들었다.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의 선율과 가사가 그대로 다시마음에 들어왔다. 회상(回想). 가슴이 저려온다.

김남조 시인은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서 태어나 1955년 걸출한 조각가 김세중(1928~1986) 전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과 결혼 후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

- 38년 동안 숙명여대 교수, 한국 시인협회 및 한국여성문인협회 회장

- KBS, MBC 이사

- 만해 대상, 한국시인협회상, 국민훈장 모란장, 은괸문화훈장

시인은 시로 말한다. 1953년 <목숨>을 시작으로 16권의 시집과 12권의 수필집, 콩트집 <아름다운 사람들>을 펴냈다. 800여 편의 주옥같은 시를 발표한 그는 노천명, 모윤숙 등 ‘여류시인’의 계보를 잇는 인물이다. 최근 ‘시보다 아름다운 41편의 짧은 소설’이라는 부제가 붙은 <아름다운 사람들> 개정판을 냈다. 1984년에 출간 됐다가 절판된 뒤 27년 만에 다시 묶은 책이다. 가려져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한 잔잔한, 애잔한,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그 속에 있다. 시인은 서문에 이렇게 썼다.

“삶 그 자체가 장대하고 엄격한 어버이라면 살아가는 사람인 우리는 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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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한 자식으로 땀 흘리면서 마지막까지 걸음을 이어가야 하는 가난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귀중한 시간, 귀중한 만남, 귀중한 포부들에 대하여 에누리 없이 그 값을 치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긴 인생을 관통했던 하나의 키워드를 말해 달라 청했다.

“풍부한 어휘력이 있는 요즘 젊은 시인들과 비교할 때 내가 쓰는 어휘 수는 많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한국어를 공부할 시간이 적었으니까요. 그런 나를 살린 것은 감수성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어요. 일상의 것들이 가슴 깊게 들어옵니다. 사람들은 보통 눈이 가득 쌓여야 ‘눈이 왔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눈꽃 한 송이를 통해서도 눈발 날리는 광야를 볼 수 있었습니다. 낙엽에서도 생명을 발견했고요. 광야나 설산, 바다를 보면 내 작은 폐 속에 콸콸 감동이 밀려들어옵니다.

그는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이야기를 해줬다. 말년에 백혈병으로 고생하던 릴케는 어느 날 장미를 손질하다 손가락을 가시에 찔렸다. 상처는 쉽게 낫지 않아 화농이 생겼다. 백혈병으로 면역이 양해진 릴케는 결국 장미 가시 상처를 통해 들어온 균이 온몸에 퍼져 세상을 떠나게 됐다. 의사는 병석에서 고통스러워하던 릴케를 위해 여러 차례 진통제를 처방했다. 릴케가 죽은 후에 침대 밑을 보니 진통제가 가득 쌓여 있었다. 진통제를 먹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릴케는 죽는 순간까지 고통의 맛을 음미했을 겁니다. 고통과 슬픔은 막는다고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요즘은 세대 간의 구별 없이 너무나 메마른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분명 생활은 풍요로워졌는데 삶은 팍팍해집니다. 감수성을 느낄 겨를이 없고, 그러다 보니 감동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감동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사실 메말라 간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1930년대에 소설가 김유정은 당시 유명한 명창이었던 박녹주에게 사랑을 느낍니다. 그 대단한 문장가가 일주일 걸려 연애편지 한 통을 씁니다. 붓글씨로 한 자를 쓰는 데 5분 이상이 걸렸습니다. 손가락을 깨물어 ‘녹주야 너를 사랑한다.’고 혈서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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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떻습니까? 전화를 걸거나 메일 하나 보내면 됩니다. 소중한 것과 바꿀 수 없는 환치물(換置物)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백화점에 가서 한 시간 동안 아이쇼핑만 해도 다 가진 것과 같은 포만감을 느낍니다. 이런 가운데 정신적인 배고픔을 알 수가 없지요. 이것은 풍요이자 빈곤입니다.

이 환치물이 많은 시기에 메마르지 않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웃을 향한 관대한 사랑을 실천해야 참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한마디 해 주시지요.”

“꼭 전해 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잘 보는 것은 자세히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것입니다. 이 땅의 청춘들은 자신들이 지닌 것, 아직 남아 있는 것을 잘 보아야 합니다. 여기 스무 살 청춘과 팔순의 시인이 있습니다. 시인은 많은 것을 이뤘고 청춘은 아직 불안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청춘의 장기는 팔팔합니다. 위, 폐, 장이 건강합니다. 피도 젊습니다. 남아 있는 시간이라는 보물 창고도 있습니다. 항상 위태하고 절망스러울 때에도 전체 안에서 내게 허락된 것을 보고 그 풍요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노약자!

“어느 날 내가 해를 몇 번 쳐다봤나 했더니 3만 번 정도는 보았겠더라고요. 쳐다보면서 그 수만큼 해의 덕성과 은공을 생각했을 겁니다. 늙을수록 그 덕성과 은공을 더 잘 알겠지요. 하루에 열 번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30만 번 정도 타인을 생각했겠지요. 사람의 마음을 음표라고 한다면 노년은 인생의 오묘한 음표를 헤아릴 줄 아는 시기입니다. 감사하면서 살아야지요, 무엇보다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 3만 / 365 = 82년 (약 82세)

<너를 위하여> - 김남조 시인의 대표 시

나의 밤 기도는 / 길고 / 한 가지 말만 되풀이 한다 //

가만히 눈 뜨는 건 / 믿을 수 없는 만치의 / 축원 //

갓 피어난 빛으로만 /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 내 사람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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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히 /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 이적지 못 가져본 / 너그러운 사랑 //

너를 위하여 / 나 살거니 / 소중한 건 무엇이건 너에게 주마 /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

눈이 내리는 / 먼 하늘에 /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

오직 너를 위하여 /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 기쁨이 있단다 / 나의 사람아//

그렇다. 이미 준 것은 다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 모든 사람의 동행이 될 것이리라.

그는 병치레 때문에 병상에 자주 누웠다. 소녀 시절에는 폐결핵 진단까지 받았다. 병과 싸우며 누워 있는 긴 시간 동안 그는 많은 생각에 잠겼고 타고르의 시편들을 읽으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

그때 어머니가 늘 이렇게 위로해 줬다.

“얘야, 아픈 날이 많았어도 앞으로는 아프지 않는 날이 더 많을 거야.”

그것이 김남조에게는 좋은 가르침이 되었다. 나중이 그 역시 제자들에게 언제나 말했다.

“한쪽 문이 닫힐 때 한쪽 문은 반드시 열립니다.”

그는 평생 감사하며 살았다고 말했다. 어느 누구보다도 ‘문학적 호강’을 했으며 잔이 넘치는 삶을 살았단다. 그래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내가 언제나 화려한 장미꽃 같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라고 고통에서 자유롭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에게도 수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 고통의 무게가 너무 커서 잠시 절망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사한다고 말했다.

“출생에 대한 선택권이 내겐 없지요. 그래서 ‘또 태어나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어요. 그러나 ‘태어나서 좋았니?’라고 물어본다면 ‘좋았더라.’고.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태어난 아이들과 힘겨운 삶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출생은 축복이며 세상은 아주 좋은 곳이란다.’고 말해주고 싶은 것이 내 진심입니다.”

지난 시절, 여류 문인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 ‘김사랑’, 그 별명과 같이 그는 ‘사랑의 시인’으로 생명을 선택하며 사랑하는 시를 써 왔다. 90년 가까운 인생을 “좋았더라”고 회고하는 시인은 참으로 ‘행복한 노약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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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밥 한 그릇을 먹을 때에도 정성을 다 바쳐야 하듯 이 땅 모든 것들은 경이로움을 갖고 바라봐야 합니다. 거기서 맛과 멋이 나옵니다.

0 1933년 생. 중학교 때 한하운 선생의 시집을 읽고 시인이 되기를 결심

0 1958년 시 <폐결핵>을 발표하면서 등단

0 지금까지 시, 수필, 평론 등 140여권의 저서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에 시인의 집이 있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발표 시기가 되면 기자들이 ‘진 치고’ 있는 집이다. 수 년 전 겨울 날, 고은 시인을 만나기 위해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는 갓 태어난 여덟 마리의 강아지들이 엄마와 함께 놀고 있었다. 그네도 보였다. 시인의 집에 어울릴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시인의 서재에는 손때 묻은 고서에서 젊은 시인들의 신간시집까지 수많은 책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화장실, 지하실 등 도처에 책 뭉치가 보였다. 거실에는 영국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외동딸 고차령씨와 함께 그린 그림들이 그득했다. 라르스 바리외 주한 스웨덴 대사가 그린 고은 시인의 초상화도 눈길을 끈다. 그의 서재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이었다. 함께 갔던 사진작가는 “그동안 여러 서재를 보았지만 가장 인상에 남는 곳.”이라고 말했다. 고은 시인은 그야말로 책과 그림들에 파묻혀 살고 있었다.

그는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9세의 나이에 입산, 효봉 선사의 상좌가 되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수선(修禪)과 방랑생활을 하다가 1962년 환속했다. 197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58년 시 <폐결핵>으로 등단한 이래 <만인보>등 수많은 시집을 발간했다. 시인 고은에게 출가와 환속이란 무엇인가가 궁금했다.

그는 또한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다. 불의에 항거하며 정의를 위해 거리로 나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생명을 걸고 시를 썼다. 노벨문학상에 근접한 작가가 됐다. 산문집 <나는 격류였다>와 같이 그는 정말 격류의 삶을 살았다.

그의 인생 전체에는 삶보다 죽음이, 환희보다 비탄이 더 짙게 드리워져 있다. 실제 민주화 운동을 하다 구속돼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그런 그가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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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맛있고, 술이 맛있고, 책이 맛있습니다.”

‘민족시인’ ‘현실참여시인’으로 분류된 시인은 그동안 수차례 구속되었다. 지독한 상황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환경이 자신의 삶에 있는 고유한 맛을 거둬가지 못했다. 핏자국이 선명한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조사받을 때에도 시인은 ‘생의 맛’을 느꼈다고 한다.

‘이 조건에서는 나름 행복하다.’ 라고 생각하며 견디었다는 것이다.

그는 사막의 베드윈 족을 보라고 했다. 극지방의 에스키모의 삶을 살펴보라고도 권했다. 우리가 보기에 외관적으로 열악한 조건에 사는 사람들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생의 의미를 만끽하며 살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결국 오늘 주어진 생의 의미를 만끽하는 것, 주어진 삶에서 충분한 맛을 느끼며 살려는 마음의 태도가 맛있는 삶을 가능케 한다는 말이었다.

그에 따르면 밥 한 그릇을 통해서도 삶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다. 밥은 종교와도 같다. 신성하다. 그 밥 한 그릇이 내 앞에 오기 위해 일면식 없었던 사람들이 수고했다. 그 밥은 결코 어떤 이유로도 모독되어질 수 없다. 그 한 그릇을 먹지 않으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그는 지방에 갈 때에는 반드시 그 지역의 술을 한 잔 마신다. 토신(土神)이나 지신(地神)등 그 지역의 ‘에센스(사물의 가장 근본적인 것)’에게 바치는 심정으로 술을 마시며 “제가 여기 왔습니다.”라고 말한다. 애주가인 그는 술이 “기가 막힌 액체”라고 찬사를 보낸다.

“조상들께 제사 지낼 때 머리를 조아리며 차 한잔, 술 한잔 올립니다. 얼마나 신성한 행위입니까. 국가 원수들이 만찬 때에 취기 있는 액체(술)를 마시고 축하합니다. 얼마나 경건합니까. 결혼한 첫날밤에 부부가 몸을 섞기 전에 합환주(合歡酒)를 마십니다. 서로 합해서 환희에 이르자는 의미의 술 한잔입니다. 기가 막힌 액체가 아닙니까? 성서에도 예수께서 포도주를 가지고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하셨지요.

그는 늘 술을 맛있게 마신다. 술을 맛있게 마시기 위해서는 동행이 있어야 한다. 함께 취할 친구가 필요하다. 오랜 친구, 최근 사귄 친구 등에 따라 ‘술의 얼굴’이 달라진다. 몇 십 년 동안 우정을 간직한 친구와 만나서 마시는 술은 깊디깊다. 묵힌 술이 제 맛이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과 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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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술은 싱그럽다. 묵힌 술보다는 최근에 빚은 술이 걸맞다.

애주가지만 술에 함몰되지는 않는다. 스스로 “술에 생을 거는 스타일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맛있게 밥을 먹고 술을 마실 뿐 아니라 맛있게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 행위는 세계를 마시는 것과 같다. 시인은 생의 절반을 책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책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어린 시절 고향 산골에서 지방 시인의 시집 하나를 보았다.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시를 읽었다. 시가 무서웠다. 길거리를 가다가 분실된 시집을 주워 읽고 감동받기도 했다. 그러나 삶은 책을 기반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세계문학전집을 읽고 나서도 ‘나도 이렇게 써야겠다’며 문학을 시작하지 않았다. 예술을 모방하지 않았다. 전쟁 후 폐허를 보면서 그냥 시를 쓰게 되었다.

그가 보기에 책에는 에너지가 있다. 그 에너지가 자신을 끌고 가며, 자신 역시 책을 이끌고 간다. 둘이 우정을 나누는 것이다. 책을 활자 가득 찬 종이로 생각하지 말고 살아 있는 생명체, 즉 생체로 보라고 권한다. 생체와 생체가 만나 사랑과 우정을 나누면서 친해지다 보면 맛있는 독서가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시인은 세상에서 맛을 찾으려 하지 말고 자기 안에서 맛을 생산하고 그 맛을 누리며 나눠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의 이 말이 와 닿았다.

“사실 세상에 맛있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맛을 만들어야지요.”

그 맛을 찾지 못할 때,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더 이상 맛을 느낄 수 없다고 판단할 때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 생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빈부귀천을 떠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 있다. 낙조를 생각해보자. 모두에게 낙조가 보인다. 그러나 낙조에 도취하며 울고 시 한 수 읊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 해가 멋들어지게 떨어지네.”라면서 그냥 무덤덤히 지나는 사람이 있다 시인은 말한다.

“대자연의 절경을 연출하는 낙조를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있어서는 맛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밥 한 그릇을 먹을 때에도 정성을 다 바쳐야 하듯 이땅의 모든 것들을 경이로움을 갖고 바라봐야 합니다. 거기서 맛과 멋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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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는 개미의 이야기를 했다. 개미에게는 개미의 일생이 있다. 아침부터 구덩이에서 나와 먹이를 물어 나른다. 열심히 일한다. 비가 와서 흙이 무너지거나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질 한 방으로 그동안 쌓아놓은 것이 다 없어진다. 그럼에도 개미는 그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다음 개미가 똑같은 일을 한다. 시인은 개미들의 행렬을 보면 숙연함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우주에서 볼 때 우리 역시 개미나 박테리아 정도로 보일 겁니다. 우주에서 본 인간들은 티끌보다도 더 보잘 것 없겠지요. 티끌 같은 우리에게 운명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차원의 엄연한 운명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경건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는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면 시인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아주 진부하지만 역시 사랑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사랑은 일반적 의미의 사랑과는 다르다. 사랑은 보편적인 것이다. 보통명사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독특한, 유일한 사랑이 수없이 많이 있다. 마치 ‘철썩’ 거리는 파도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보이지만 수억만 개의 파도가 기실 모두 다른 것과 같다. 사랑에도 ‘네가 하는 사랑, 나도 한다.’라는 식의 복제형 사랑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사랑이 있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는 사랑이라는 말은 무진장 참고 참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한마디씩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구건 한국이건 매일 ‘아이 러브 유.’하는 부부도 마음이 멀어지면 쉽게 이혼한다. 사랑의 언어를 자주 날리지만 그 사랑을 실현하지는 못한다. 시인은 사랑은 참다못해 폭발하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은 흐르다 막다른 벼랑에 미쳐 도저히 흐르지 못할 때에 아래로 쏟아져 버린다. 댐에 물이 고여 넘치면 폭포가 된다. 이렇듯 사랑은 심장 표현으로서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진실로 사랑하며 살다가 ‘사랑한다.’ 는 말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의 모델만 있지 정작 사랑은 없게 되는 모순에 빠진다. 약동하는 사랑의 생명력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시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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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면 사랑은 ‘두 개의 나’가 최고 형태로 만나는 행위다. 나(我)를 없애고 타(他)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두 개의 나가 없어져 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유일하게 사랑에 있다.

행복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보편언어가 있다. 가령 사랑은 보편 언어다. 미워하기 보다는 사랑하는 것이 훨씬 낫다. 인류사에서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가치들이 있다. 열정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열정적으로 살아야 한다. 먹을 때도 놀 때도 열정적이어야 한다. 이밖에 감사와 슬픔 등 여러 보편적 가치의 언어들이 있다. 이것들의 의미는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보편적이라는 것은 공간적이라기보다는 시간적이다. 장소에 따라 제한받지 않는다. 인류사가 몇 천 년 지나더라도 한결같이 유효한 것들이 보편적인 것이다.

행복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들은 모두에게 주어졌다. 이를 어떻게 누리고 발전시키는가에 따라 결과는 다르다. 중요한 것은 '나의 행복이 너의 행복은 아니다.' 라는 사실이다. 이 사회에서 어떤 행복은 본질적으로 다른 불행을 기반으로 하는 것들이 있다. 나의 부는 타자의 부를 약탈한 것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내 행복이 타인에게 나눠 줄 수 있는 것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진정한 행복을 가질 수 있다.

시인이 평소 행복과 관련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곱하기보다 나누기가 많아야 행복이 잘 써지는 것입니다.'

곱하기는 축적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물질화하는 것이다. 축적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침해해야 한다. 타인의 행복을 갈취해야 한다. 타자를 빈털터리로 만들수록 잘 축적할 수 있다. 이 아파트 시대에는 나누기보다 곱하기가 더 보편적이 된다.

"농촌에서는 맛있는 것을 결코 혼자 먹지 않습니다. 제사 음식도 다 같이 먹습니다. 지금도 그런 풍속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아파트에서는 그런 나눔이 없습니다.

시인은 우리가 꿈꾸는 참 행복은 나눠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신만 행복

하고 주변은 불행하다면 결국 그 행복은 불행에 포위되어 질식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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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선진 사회로의 진입에 행복의 길이 있지 않다."고 단언했다. 선진 시대에는 오히려 행복이 퇴행한다.

"과거 지향적인 관점은 아니지만 후진 시대에는 '이웃'이 있었습니다. 행복이 넘쳤습니다. 선진 사회가 되어서 뭐합니까? 선진 사회에 이르면 더 갈 곳이 없어집니다. 선진 사회에 가더라도 자연스럽게 도달해야 합니다. 미친 듯이 선진 사회로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공에 대해서도 물었다. 시인이 생각하는 참다운 성공은 무엇인가. 그는 결코 실패를 미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실패의 반대편, 즉 뭔가 성취하기 위해 충실하게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성공만이 최고라며 성공 지상주의로 나가는 것은 피해야 한다. 성공을 수량화할 경우에 열 명 가운데 성공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두 명 정도에 불과하다.

성공이 수량화될 때, 실패한 사람들은 고향에도 가지 못한다. 가더라도 밤에 몰래가야 한다. 실패한 사람은 어디서도 대우받지 못한다.

시인이 넋두리처럼 내 뱉는 한마디.

"나는 말이에요, 누가 성공을 이야기하면 오싹오싹 소름이 끼쳐, 소름이…."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인생의 맛이 있지요? 정말 성공은 상대적인 개념 아닙니까?"

"늙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늙어가는 것에 대해 아련한 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나는 늙었다고, 늙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 입에서 늙는다는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아직 나는 철이 안 들었어요. 지금도 애 같지요."

"아니 애 같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뭐라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애가 어떻게 애를 설명합니까?"

지금도 그에게는 모든 것이 경이롭다고 한다. 앞으로 읽어야 할 책이 그득하다. 평생 읽어도 결코 읽지 못할 것들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정열적인 독서가가 될 수 있다.

아무튼 그는 늙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는 나를 보고 평생 소년이라고 해요. 철딱서니가 없다면서요. 하하.”

그는 지금도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설렌다고 한다. 슬픈 영화를 보면서 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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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운다. 과거에는 창밖의 만월(滿月)을 보면서 밤새도록 운적도 있다. 새벽까지 비치는 달빛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출가(出家)와 환속(還俗)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10대 후반에 죽음을 많이 보았지요. 그러다 보니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영혼이 됐지요. 고향 전역이 피범벅이 됐습니다. 자연스레 떠돌아 다니는 영혼이 됐습니다. 어느 날 스님이 보여 그냥 따라갔습니다. 그저 길에서 스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안(절)에서 나의 정신적 상처가 치유됐습니다.

환속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나에게는 정치나 역사의식이 없었습니다. 1960년 4월 혁명 이후 우연히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거리로 나서고 갑작스레 현실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민주화를 위한 심부름’을 한 시기였다.

그때 종교를 초월한 동지를 만났다. 박형규 목사, 문익환 목사, 안병무 박사, 김수환 추기경 등이 당시 생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었다. 결혼식도 안병무 박사 집에서 함석헌 선생이 주례를, 문익환 목사가 축사를, 문재린 목사가 축도를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고은 선생이 내게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친구하자.’고 하더니 이렇게 배반해 버렸다.‘면서 웃으며 축하해 줬다.

함민복

이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북소리에 맞춰 살아보는 경험도 중요합니다.

0 1962년 생

0 서울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

0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성선설’ 등을 발표하며 등단

0 시집 <우울씨의 일일(一日)>,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0 에세이집 <눈물은 왜 짠가> 등

0 2005 김수영 문학상

함민복 시인 그는 51세의 나이에 늦장가를 갔다. 신부는 동년배인 박영숙, ‘맨발로 지구를 신고 있는 시인’ ‘돈도 집도 아내도 자식도 없는 시인’이라고 불리던 그에게 아내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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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시인은 고통, 고생, 가난, 외로움 속에서도 반짝이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시로써 표현해 온 시인입니다. 더 아름다운 것은 자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훌륭한 사람인지를 스스로 잘 모른다는 거지요.”

소설가 김훈의 결혼식 축사의 일부다. 축가를 부른 가수 안치환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의 가사를 ‘민복인 꽃보다 아름다워’로 바꿔 불렀다.

강화도 초지 인삼센터 앞마당에서 시인 함민복을 만났다. 아내 박영숙씨는 이 센터에서 ‘길상이네’라는 인삼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가 강화도와 인연을 맺은 때는 1996년 회사를 그만두고 창작의 길로 들어선 이후 서울과 일산 문산 등지를 전전하던 그는 우연히 강화도에 놀러 갔다가 마니산에 반해 눌러 앉았다. 동막 해수욕장 인근 폐가를 보증금 없이 월세 10만원에 빌려 살았다. 어렵지만 치열하게 시를 썼다. 생활비가 떨어지면 방 한 가운데 빨랫줄에 걸린 시 한편을 출판사로 보내 몇 만 원 받아 버티기도 했다.

“왜 직장을 그만두고 ‘고생길’로 들어섰나요?”

“다른 길을 가 보고 싶었어요. 스물 네 살 때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막내라서 철이 없었습니다.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과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고 나서 새로운 세계로 떠나야겠다는 열병을 앓게 됐었지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없었기에 쉽게 결정했습니다. 새로운 세계로의 모험을 시작한 것이지요. 무엇을 해야 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냥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막연히 ‘글을 써보자.’고 결심했지요.

“지금 알고 있는 모든 세계로부터 떠날 것.”

원자력 발전소에 다니던 당시 그의 책상 앞에 붙여 놓은 글귀다.

새로운 세계, 이상은 달콤했지만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그때 시 한편이 들어왔다. 시를 공부하던 친구가 시인 최승호의 시집을 보내왔는데, 거기에 <인식의 힘>이란 제목의 시가 있었다.

프레드리히 니체의 ‘절망한 자들은 대담해지는 법이다.’라는 말이 부재이고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확실히 시에는 위로의 힘이 있습니다. 그 짧은 시가 절망에 빠진 저를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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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해 주었습니다. 그 시를 통해서 절망한 자는 대담해 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 또한 그렇게 위로하는 시를 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서 나온 뒤에 서울예전 문창과에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한 경기도 백마에서 방 한 칸 얻어서 문창과 친구들과 어울려 지냈다.

함민복은 2학년 여름방학 이른 데뷔를 했다. <성선설>이라는 짧은 시였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시를 읽고, 또 읽어 보았다. 여운이 남았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전해졌다. 캄캄한 엄마 뱃속에서 손가락을 헤아리는 태아의 모습이 다가오는 것 같다. 이 시를 접하면서 ‘함민복은 천상 시인이었구나.’ 싶었다.

얼마 뒤 백마 부근에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주민들이 일제히 떠나기 시작했다. 시인과 친구들도 하나씩 떠나갔다.

그때 마침 대산 창작지원금 500만원을 받았다. 갑자기 강화도가 떠올랐다. 언젠가 강화도 마니산을 등산 한 적이 있었는데, 마니산에서 내려다 본 강화도 풍경이 무척 멋졌다.

‘바닷가에서 한 번 살아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500만 원을 들고 동막 해수욕장 인근 지역을 찾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꽤 큰 옛날 양철집을 얻었다. 집에 살구나무와 고염나무가 있었다.

혼자 살다보니 동네 친구들이 많이 찾아왔다. 시인은 그들과 곧잘 어울렸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여러 번 지나갔다. 그사이 한 권의 시집과 세 권의 산문집을 냈다. 산문집을 더 많이 낸 것은 시보다는 산문의 원고료가 많아서였다며 웃었다.

시인에게 시란 무엇일까.

“시가 뭐냐고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시는 감정의 출렁거림을 기록한 것입니다. 마음이 제일 움직이는 순간이 있어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지요.”

그에 따르면 시는 본질상 반성적이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 시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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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아름다운 시를 쓴다고 가정해 봅시다. 내가 그 아름다움을 갖지 못했기에 아름다운 것이 보이는 것이지요. 따스함과 사랑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어떻게 해야 ‘시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게을러야 할 것 같아요. 열심히 안 살아야. 하하하.”

“결혼하고 자식 생기면 열심히 살아야 되지 않나요? 혼자라면 시적인 삶이 가능하겠지 만은요?”

“물론 결혼해서 처자가 생기면 그렇게 살 수 없지요. 어린 시절 반항기에는 ‘차라리 고아였으면 뭐든지 해 볼 텐데.’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결혼식이 상당히 화제를 모았습니다. 각 언론에도 상세히 보도 됐었지요. 소설가 김훈 씨가 주례를 섰고…….”

“이상하게 판이 커져버렸습니다. 하하. 저나 아내나 모두 평생 혼자 살 작정이었는데 인연의 끈이 연결되었습니다. 자유인으로 살다가 결혼하니 가족관계가 확 넓어졌습니다. 일 있을 때마다 인사해야 합니다. 아내는 10남매 중 막내입니다. 결혼 이후 처조카가 가족관계도를 설명해 주더군요, 30여 명을 외워야 하는데 손들었습니다.

“가족이란 무엇입니까?”

“김치 국물 자국 같아요. 서로 간에 근심도 되고, 즐거움도 나누는, 그래서 김치 국물이 흘러내린 신문 같지만 정겨운…….”

“결혼 이후 생활이 변했겠습니다.”

“이제는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지요. 집도 전등사 주변의 단독 주택으로 옮겼습니다. 세간도 훨씬 늘었고요. 동막의 집에는 제대로 된 살림이 없었어요. 전기 제품이라곤 컴퓨터와 라디오 정도였어요. TV는 월드컵 경기를 보려고 중고를 샀어요. 월드컵 끝나고 쳐박아 두었습니다. 요즘은 아내가 경영하는 인삼가게 ‘길상이네’에서 보조 역할을 합니다.

“사랑은?”

“사랑은 곡선이지요. 사랑은 무언가를 포옹하게 하는 힘입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기도 하지만은요. 곡선처럼, 사랑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실체입니다. 심장과도 같습니다.”

“함민복표 성공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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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 덜 후회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가급적 많이 실천하고 사는 삶, 가슴속에 담긴 소원들을 끝없이 미뤄 가다가 삶의 끝을 만나면 얼마나 안타깝겠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실패지요. 가급적 실천을 많이 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고 ‘잘 놀면서’ 살아 오셨습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부러운 모습입니다. 공부란 무엇입니까?

“남을 먼저 생각해 주는 태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남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땅을 사는 개개인들이 그런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너무 세상이 삭막해지지요. 지금 사회는 죽어라 공부하며 열심히 하는 사람들, 이타성과는 상관없이 암기 잘하는 사람들이 살기에 유리하게 짜여 있습니다.

행복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그는 “욕심내지 말고 매일 행복한 순간이 50%가 넘는 삶을 살면 좋겠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았다. ‘나는 하루의 절반 이상 행복한 느낌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시인 손택수는 “함민복은 천상병 이후 시인하면 떠올리게 되는 전형적인 모습, 기인이면서 가난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저 아름다운 영혼을 잘 보살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동감한다.

나는 1980년대 말 인사동의 찻집 ‘귀천(歸天)’에서 생전의 천상병 시인을 여러 번 만났다. 그의 아내 목순옥 여사가 만들어 준 모과차가 그립다. 이제 그들은 이 땅에 없다. 함민복은 외양은 천상병과는 무척 달랐지만 확실히 닮은 점이 있었다. 소년의 모습, 둘에게는 순진무구한 소년의 모습이 있었다. 착한 소년의 모습이.

이철환

따스함과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소통을 해야 합니다. 소통한다는 것은 ‘나의 중심’을 ‘너의 중심’으로 가져간다는 뜻입니다.

0 1962년 생. 입시학원 강사와 야학 교사

0 <연탄길> <행복한 고물상> <반성문>등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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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길>의 작가 이철환을 생각하면 따뜻함과 희망, 용서, 사랑, 참을성 등의 단어가 떠오른다. 그는 저서에서 혹독하게 가난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따스함을 그려냈다. 모두가 곰보빵을 먹으며 연탄길을 걸어 행복한 고물상에 갔던 어련한 추억이 있기에 그의 글은 시대를 뛰어 넘어 공감을 얻었다.

2000년에 출간된 <연탄길>은 요즘에도 변함없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연극으로 만들어져 대학로에서 공연되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일본어판은 두 달 만에 15만부 이상이 팔렸다. 전후의 가난과 지진 재난을 겪은 일본인들의 정서에도 <연탄길>은 강한 여운을 남긴 것이다.

그는 서울 도봉구의 한 아파트에서 아내 권미수씨, 그리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이철환은 맑은 얼굴의 소유자다. 얼굴에 ‘착한 사람’이라고 써 있는 것 같다. 이전에도 몇 번 만났다. 그때마다 착한, 아니 어진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분명히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시인 윤동주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이철환이 윤동주와 외모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1999년부터 3년간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 1년 동안 문밖출입을 전혀 하지 않았다. 수없는 자살 충동을 느꼈다.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새벽까지 <연탄길>을 집필하다 과로로 이명이 왔다. 양쪽 귀에서 고음의 쇳소리가 들리면서 우울증이 찾아왔다.

정말 엄청난 자살 충동을 여러 차례 느꼈습니다. 불도 켜지 않고 몇날 며칠을 방구석에 박혀 살았고요. 보름 동안 머리를 감지 않은 때도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손으로 빗어도 넘어가지 않았어요. 당시 부모님 댁이 바로 옆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제 모습을 보시고 섧게 우셨어요. 어머니의 우는 모습에 무척 속상했지만 마음이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어떨 수 없었어요. 아마 지금 심각한 우울증을 겪고 계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그는 운동으로 우울증을 극복했다. 감기가 폐렴으로 도져 보름동안 입원했다. 당시 그는 ‘이렇게 하다가는 결국 죽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의 의지가 생겼다. 그때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매일 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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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동안 산길을 걸었다. 그랬더니 면역력이 강화되면서 똑같은 이명도 작게 들리는 것 같았다.

작가 이철환을 대중에게 확실하게 각인 시켜준 <연탄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연탄길은 30대 초반부터 쓴 글들을 모은 것입니다. 7년 남짓 썼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400만부 넘게 나갔습니다. 최근에도 나가고 있어요. 10년이 넘었는데 쉽지 않은 일이지요. 아마 그 안에 생명과 진정성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지금 전업 작가의 길을 가고 있는 것도 <연탄길> 덕분입니다.

어떻게 따뜻한 글을 쓰느냐고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배려가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아버지는 차가 작아서 함께 타면 우리가 불편할까 봐 일부러 걸어가셨습니다. 배려지요. 어린 시절에도 어머니가 물건 값을 깎으려 하면 ‘그러지 말라’고 만류 하셨어요. 그런 아버지 모습에서 따스함을 보았습니다.

그때 생각했지요. ‘아, 저런 작은 행동들을 통해서도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구나.’라고요. 그런 작고 따뜻한 행동들을 글로 옮기려 했습니다.

이철환의 책에 보면 아버지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아버지는 깊은 사랑과 배려를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이철환은 결혼 전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7년 남짓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하는 자신과 형의 구두를 반질반질하게 닦아 놓으셨다. 아무리 편찮으셔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것이 이철환에게 감동을 주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시절, 어느 날 하루 종일 함박눈이 내렸다. 아버지는 이철환 가족의 차에 쌓인 눈을 몇 번이나 쓸어 내렸다. 어차피 다시 쌓일 눈인데. 그 ‘어리석은 사랑’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아버지를 통해서 이 작가는 알았다. 교양이란 손과 발에 어떤 생각을 담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을 소리 없이 배려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우울증과 이명으로 고통받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묵상했습니다. 나의 그 나약함 속에서 내가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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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글들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님을 절감했습니다. 세상과 떨어진 고통의 섬에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통의 섬에서 평범한 땅에서는 볼 수 없는 환한 것들도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마치 반 고흐가 ‘밤은 낮보다 더 화려한 시간을 갖고 있다.’라고 말한 것과 같았어요. 어둔 밤, 그래요. 영혼의 어둔 밤을 지나면서 밝을 때 그저 지나쳤던 것들을 보았습니다. 가령 나의 나약함은 아픔이 없다면 절대로 볼 수 없는 것이지요. 지나온 날들도 모두 생각났습니다. 캄캄한 방에서 웅크리고 있다 보니 지난 시절 동안 남을 아프게 했던 것들도 모두 떠올랐습니다. 심지어는 ‘그래서 내가 아픈가?’라고도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위로를 주는 글들을 쓰기를 원하고, 실제로 쓰고 있습니다.

그는 <연탄길>을 통해 얻은 모든 것과 우울증으로 고생한 3년의 시간을 교환하자면 당연히 바꾸겠다고 말했다. 출간으로 누린 명예와 명성을 모두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분명 이철환은 죽음과도 같은 시간을 지낸 것 같다. 그는 “기쁨은 슬픔을 경계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아무리 박수갈채를 받아도 그것이 자신을 또 쓰러뜨릴 수 있는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완벽한 기쁨을 갖기 힘들다.”고도 말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가령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은요?”

“자연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이란 말 속에는 많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비록 도시 속에서 살지만 도시에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시는 끊임없이 나와 타인을 비교하며 경쟁하는 공간입니다. ‘과연 여기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시는 몰인정하며 비인간적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평화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지요. 가장 평화로운 삶은 도시의 삶이 아닙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분들은 땅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보편적인 평화의 정서가 있습니다. 선량한 마음들이 있습니다. 삶의 본질에 대한 진정성이 있습니다. 그래요. 자연을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는 도시건, 시골이건 따스함과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소통을 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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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했다. 소통이 되어야 배려할 수 있게 된다. 소통한다는 것은 ‘나의 중심’을 ‘너의 중심’으로 가져간다는 것이다.

중심을 ‘나’에서 ‘너’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희생과 배려가 필요하다. 그는 딸과 이야기할 때 여러 차례 말이 잘 안 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자신의 딸에게 원하던 것을 절반쯤 포기하니까 신기하게도 통하는 것을 경험했다.

“결국 모든 것은 소통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소통이 되면 배려하게 됩니다. 진심이 통하게 되는 것이지요. 만일 내가 누군가를 설득했다면 내 말속에 진심이 담겨 있어서일 겁니다. 역시 누군가로부터 설득 당했다면 그 누군가의 진심을 알게 됐기 때문이고요.

진정한 소통은 ‘내 것의 절반쯤은 네게 주겠다.’는 희생의 마음이 있을 때 이뤄집니다. 그것이 배려입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에게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인지 물었다. 그는 벽의 메모장에 써 있는 노벨문학상 작가 파블로 네루다의 글을 읽어줬다.

“너의 슬퍼하는 눈에서 꿈의 땅은 시작된다.‘ 질문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대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져주는 글이 좋습니다.”:

문장은 수려하지 않지만 뭉클한 감동을 주는, 서사가 있는 글이 있다. 이철환은 그런 글이 삶의 방향을 바꿔주는 좋은 글이라고 했다.

그에게는 글을 쓰는 것보다 읽는 일이 훨씬 재미있다. 실제로 읽는 시간이 쓰는 시간보다 더 많다. 하루에 아홉 시간 가까이 연속해서 읽기도 한다.

“무수한 책을 읽었겠지만 가장 감명 깊었던 작품은 어떤 책인가요?”

“생텍쥐페리가 쓴 <어린 왕자>입니다. 법정 스님은 1970년대에 <어린 왕자를 마흔 번 정도 읽으셨다고 하는데 저는 아홉 번 읽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매력이 있습니다. 그 안에 ‘우리가 보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나비를 보고 싶다면 애벌레를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구절이 기억에 남습니다.”

“작가로서 소위 상공했는데, ‘이철환식 성공’은 무엇입니까?”

“성공은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높이를 갖기 위해서 깊이가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높이만 추구하면 언제나 더 높은 곳을 열망하기에 행복할 수 없습니다. 깊이가 없는 높이는 쓰러지게 됩니다. 지금보다 더 성공하고 싶다면 좀 더 깊이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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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은 높이를 향하되 높이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높은 곳보다 낮은 곳에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철환에게 사랑을 말해 달라고 했다.

알랭 드 보통은 ‘사랑에 빠지면 대부분 그 사랑을 미화시키면서 사랑의 광기에 빠져든다.’ 고 말했어요. 대부분 사랑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기보다는 실제로는 환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환상에서 벗어나 조금 더 담담해질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가 쓴 모든 책의 주제는 결국 사랑이다. 연탄길을 걷던 시절이건 고속열차를 타는 시절이건 상관없이 사람들은 따스함을, 사랑을 갈구한다. 사랑만이 이긴다. 사랑만이 남는다. 그래서 이전보다 훨씬 더 잘 살게 된 지금도 사람들은 어진사람, 이철환이 그리는 따스하고 아름다운 유년의 삽화에 가슴 아려 하는지 모른다.

“세상에 고물이 아닌 것이 없던 시절, 그러나 사랑으로 수리되지 않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 <행복한 고물상>중에서

서영은

사랑은 치러내고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다치게 됐을 때, 피하지말고 그대로 당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0 1943년 생, 어린 시절 선생님의 영향으로 문학 세계에 눈을 뜸

0 23세 때 직장생활을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

0 1983 <먼 그대>로 이상 문학상

0 1990년 <사다리가 놓인 창>으로 연암문학상

산티아고는 길이고 숲이고, 낙엽이며 바람이다. 걷기는 자연과 대지의 신비를 탐색하는 모노드라마다. 그 드라마는 수고와 기쁨의 양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리가 수고하면 가슴에는 기쁨이란 이슬이 맺힌다.

_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중에서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 나를 연결해 준 것은 그녀의 산티아고 순례기인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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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였다. 선생은 66세이던 2008년, 유언장을 쓰고 말없이 산티아고로 갔다. 인생의 마지막 어떤 희망을 기어히 찾겠다는 욕망 하나로 40일간 그 성스럽다는 ‘산티아고의 길’을 걸었다. 책은 강렬했다. 거기에는 어떤 비밀스런 코드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오랜 기간 동안 기독교 신자로 살아온 그녀는 그렇게 만나고 싶어했던 하나님과 그 길에서 대면했다. 나는 바로 인터뷰를 했고 기꺼이 서평을 썼다. 다음은 서평의 일부 내용이다.

이 책은 산티아고 까지 도보 순례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여행기로서도 탁월하다. 그러나 이것은 여행기가 아니다. 여류 소설가가 산티아고 가는 길을 맛깔나게 묘사한 수필집이 아니다. 이 책은 믿음의 책이다. 여기에는 분명한 영적 코드가 있다. 그 영적 코드를 읽지 못하면 책에 담긴 깊은 뜻을 알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전율을 느꼈다. 이 책은 인간이 믿음의 본질을 향해 피를 철철 흘리며 가는 신앙의 여정기다. 인생 산맥을 걷다가 마침내 온전한 믿음을 향한 강을 건넌 사람의 절절한 이야기가 거기 있었다.

그날 이후 자주 선생을 만났다. 주로 서울 평창동에 있는 한적한 카페와 부암동의 손만두 집에서 만남을 가졌다.

만날 때마다 선생은 현자와 같이 내게 지혜를 주었다. ‘선생님’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60대 후반에 산티아고 길을 걸었던 선생에게 자극받아 나도 걷기를 시작했다.

아마 젊은 사람들에게는 서영은이라는 이름이 생소할지 모른다. 1980년대 그녀는 한국 문단에 화제를 뿌린 인물이었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먼 그대>를 비롯해 <사다리가 놓인 창> <사막을 건너는 법>등 수많은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의 탄탄한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그녀를 가장 화제의 인물로 만든 것은 한국 문단의 거목이었던 김동리 선생과의 사랑이었다. 서른 세 살의 나이 차이를 넘어 이들은 부부가 됐다. 선생은 김동리의 세 번째 부인으로 그가 이 땅을 떠날 때까지 곁을 지켰다.

“사랑은 치러내는 것입니다. 감당해야 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상대는 가만히 있는 인형이 아니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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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관계에서도 소유하고 다치게 하는 것이지요. 그 다침까지도 사랑이라는 말로 치장이 됩니다. 자기가 다치게 됐을 때, 피하지 말고 그대로 당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밀고 당기고 할 것 없이 치러내는 것이지요.“

김동리와의 사랑은 운명적이었다. 상대는 존재의 이유였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그녀는 김동리와의 사랑을 ‘서사(敍事)’라고 표현했다. 긴 세월 속에서 이뤄진 서사라는 것이다. 그 서사 속에 어찌 절절한 사랑만 있었겠는가. 사랑과 미움, 다툼, 지겨움, 원망 등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다. 그 서사를 치러내고 감당하는 것이 사랑이다. 상처받을까봐 마음의 칼자루를 조금 내밀었다가 다시 당기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내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상처받을까 봐 치러내지 못하고 감당하지 않는다면 바닥을 볼 수 없다. 바닥에 내려가지 않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치러 내고 감당하다 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 우뚝 서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김동리라는 상대만을 생각한다면 그의 떠남 이후 남는 것은 회한 밖에 없겠지만 그로 인해 얻었던 또 다른 절대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김동리와의 만남은 섭리였음을 느낀다.

“17세 소녀 시절부터 접한 문학에서 구원을 찾았습니다. 당시 한국 문단의 거목이었던 김동리는 저에게 신과 같았습니다. 굳건한 지지대였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문학은 절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안에 구원은 없었습니다. 거센 지지대였던 김동리가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휘청거리며 쓰러졌을 때 그 손에 쥐었던 모든 것, 업적과 자랑이 모래알 같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학이 절망이 되고, 반석 같은 지지대의 허물어짐을 목격했을 때, 죽음이 어른거렸지요. 그때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로 인도됐습니다. 이후 저는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크리스천이었지요. 하지만 저의 마음속에 잠재된 영성의 씨앗은 언제나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아,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라고요. 그 간절한 소원의 성취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선생님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사랑을 찾았다고 하셨지요? 사랑은 섭리였다고도 했고요. 물론 그 섭리 안에 우주의 절대 질서가 있겠지요. 그럼 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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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사랑을 알 수 있겠습니까? 목숨이 간당간당할 때까지 물어뜯는 것이 사랑이더라고요. 하나님의 사랑은요. 완전히 찢어져야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번 순례길에서 깨달았습니다. 그 사랑을 알고, 체험하며 나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것이 저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동안 선생은 전 세계 160여 개 도시를 다녔다.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언제나 떠남의 자리에 뒀다고 말했다. 그렇기 ‘산티아고’를 그저 마음에만 두지 않았다. 그곳을 향해 떠났다. 그녀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언젠가는 꼭 산티아고로 떠나 보세요. 모험하세요. 모든 일을 모험으로 바꾸세요.” 물론 여기서 산티아고는 스페인의 한 지명이 아니다. 미지의 세계다. 치러내고 감당하는 추상적인 것일 수도 있고 명확한 지점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산티아고를 향해 떠나는 것이다. 떠나는 모험을 했을 때에만 새롭게 빚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강릉 태생이다. 강릉 앞 바닷가에서 놀았다. 바다를 헤엄쳐 갔다. 그래서 마음 깊숙한 곳에 해양적 정신이 있다. 늘 향하고자 하는 배 같은 성향 말이다. 지금도 한강 정도는 거뜬히 수영으로 왕복할 수 있단다.

“한강을 건너는 그거요? 아무 것도 아니지요. 현해탄도 잘하면 건널 수 있어요.(호호). 어찌 됐건 저는 모험을 좋아합니다. 겉은 여자인데 속은 남자라고 할 수 있지요.

아주 어렸을 때에 몸이 오그라질 정도의 긴장 속에 읽은 책이 <백경>이었어요. 선장 에이모프가 고래를 쫓는 과정에서 다리까지 잃는 데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투쟁합니다. 오합지졸 선원들을 모아서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백경만을 쫓는 선장 에이모프의 이야기.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인생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의 여정입니다. 분명한 것은 모험을 하면 무언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험을 해야 합니다.”

젊은 시절 오직 한 사람과만 교차했던 소설가 서영은은 지금 수많은 길의 교차점으로서 치러내고 감당하는 삶을 살고 있다. 선생은 앞으로도 치러내고 감당하는 사랑을 하면서 모험의 삶을 살며 어딘가로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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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내 죽음을 누가 가장 슬퍼할까?’ 와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라는 두 질문은 인생의 시기와는 상관없이 늘 제기해야 합니다.

0 1937년 생. 서울대 문리과대학 종교학과졸, 평생 종교문화연구에 매진

0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울산대학교 석좌교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월의 흔적에 따라 인간은 성숙해 지는 것인가. 일흔이 넘으면 정말 공자가 말한 대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즉 뜻대로 행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삶이 가능할까.

정진홍 교수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었다. 정교수는 오랫동안 서울대학교 종교학 교수로 재직했다. 2003년 은퇴한 이후에는 한림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를 거쳐 울산대학교에서 석좌교수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한국 종교학계의 거목이다. 평생 유교와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여러 종교와 더불어 씨름해야 했던 노학자를 가을이 깊어가는 수 년 전 10월 말 서울 신촌 이화여자대학교 연구실에서 만났다.

그는 나이를 먹으면, 그것도 일흔을 넘기면 자신이 신선이 되는 줄 알았다며 웃었다. ‘드문 나이’인 고희에 이르면 성숙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이 말은 물론 일흔을 넘겼지만 여전히 신선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일 게다.

정 교수가 말하는 늙음의 정의는 '몸이 회복 불가능하게 퇴행과정에 접어든 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절정의 시간이 있다. 그 절정의 시간이 지나면 내리막길을 가게 된다. 세월이 그 길을 알려준다.

늙음과 더불어 욕심은 가시지 않고, 가슴앓이도 삭지 않는다. 미움도 여전하다. 고집은 신념이란 이름으로 더욱 질겨진다. 후회도 점점 커진다. 초조와 불안, 분노가 일상을 충동하는 깊은 정서가 된다. 고독과 슬픔, 소외는 철저하게 구체적이며 현실적이 된다.

그러나 정교수는 말한다.

“늙음은 축복입니다.”

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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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부분이 보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과거에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현상과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마치 평생 산문을 써왔던 사람이 문득 시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고 정교수는 설명한다. 시적 상상력을 통해서 세상을 볼 때, 산문의 세계에서 보지 못했던 것에 눈뜬다. 늙음의 축복 중 하나가 바로 시적 상상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 시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산문의 논리에만 매어 있으면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보다 훨씬 더 클 텐데요.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현상 배후에 있는 어떤 것이 내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나를 규제하고 있습니다. 시적 상상력을 통해서 세상을 보면 안 보이던 것이 굉장히 많이 보입니다.”

산문에서 시의 세계로 돌입하게 되면 과거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게 된다. 자기를 바라본다. 그동안 학대해 왔던 자신을 사랑하는 시간을 갖는다. 바쁜 일상에서는 이런 ‘자기 사랑’ 이 쉽지 않다.

늙음을 통해서, 기계적으로 주어지는 은퇴를 통해서 사람들은 자기를 보게 된다.

그러면 도대체 늙음의 시기는 언제부터인가? 그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새무얼 울만의 시 <청춘>을 인용하자면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닌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 이지력이다. 또한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한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한다. 해서 때로는 스무 살의 청년보다 예순 살의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다. 울만은 말한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어 간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을 만들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재미있는 경험을 했어요. 젊어서 가르칠 때에는 F학점을 마구 줬습니다. ‘이 게으른 놈들…….’하면서요. 그것이 아이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당했지요.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데 은퇴할 때 쯤 되니 ‘이 아이는 이래서 A학점을 줘야 하고, 저 아이는 저래서 A학점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A학점을 안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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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문득 ‘이제 선생의 기능은 모두 끝났구나.’ 생각했는데 그 고비가 늙음인 것 같습니다.

그는 은퇴가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은퇴를 통해서 비로소 자기가 자신을 사랑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동안 노인들을 대상으로 죽음교육을 해 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강자들에게 항상 ‘나는 언제 죽을 것인가.’에 대해 적어 보게 한다. 그러면 대부분 어느 적정한 시기에 고혈압이나 당뇨병, 심장 질환 등으로 죽게 될 것이라고 쓴다. 그런데 노인들을 한결같이 당황하게 만드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바로 ‘내 죽음을 누가 슬퍼할까?’와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이다. 이 질문을 받으면 모두 잠시 생각을 멈춘다.

그는 청년이건 노년이건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생을 살아간다면, 좀 더 후회 없는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늙음의 공부, 죽음의 교육은 노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장년과 중년은 물론 청년과 아이들에게도 절실하다. 이를 통해서 성숙하게 된다. 죽음 이후까지도 삶의 영역 속에 끌어안을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다는 것이 정 교수의 설명이다.

“그럼 교수님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 원하십니까?”

“어떻게 보면 그 기억됨이라는 것도 욕심 같아요. 나이를 먹어보니 억지로 기억되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이 몇 날입니까? 그 가운데 나와 스쳤던 사람들이 수두룩할 텐데요. 이미 다들 판단하고 있겠지요. 이미 인생의 나이테는 다 그려져 있습니다. 기억되는 것은 고사하고 그저 폐나 끼치지 않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인생의 나이테는 다 그려져 있다! 이 얼마나 엄숙한 말인가.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행했던 모든 것들로 인생의 나이테는 형성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나이테를 기억한다. 우리는 지금 어떤 나이테를 그리고 있는가. 생각해 보니 정말 잘 살아야 겠다.

한번은 정 교수가 서울대학교 자연대에서 45세 이하 젊은 교수들을 위한 교양 강좌를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끝난 후 갑자기 한 젊은 교수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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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준비되지 않는 질문이었다.

정 교수는 불쑥 “저는 여러분을 신뢰합니다.”

나중에 교수들은 그 어떤 이야기보다 그 대답이 고마웠다고 말했다.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내가 당신을 신뢰하고 있소.’가 아닐까요?” 노년들은 젊은이들을 어떻게 격려하며 삶에 지친 그들의 치어리더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살았던 날들의 보람과 후회 모두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노년의 삶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살면서 대한민국의 고비 때마다 절망적인 순간을 여러 번 만났습니다. 아버님이 한국전쟁 당시 납치되셨습니다.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저는 고아원에서 살았습니다. 제대로 학교를 다닐 수 있을지도 몰랐지요. 모두 잘 아는 ‘시시포스의 신화’가 있습니다. 힘들게 돌을 굴려 정성까지 가면 다시 떨어지는 것, 그리고 다시 올리는 것 말입니다. 인간의 절망적 모습을 그린 시시포스의 신화를 어릴 때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굴릴 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라고요. 지금 회상해 보니 희망이 없을 때는 절망도 없었습니다.

정교수는 앞으로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죽음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 죽음의 철학과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가르치는 분위기가 넓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은 죽음 교육에 관한 한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다. 일찍 고령화 사회에 도달한 일본에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도쿄대학교에는 ‘사생학과(死生學科)’가 있다. 우리가 ‘생사학(生死學)’이라고 쓰는데 비해 그들은 죽음을 먼저 앞세운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곳에서는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을 시킨다. 죽음의 철학 등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고 있다.

일본에서 이런 실험이 실시된 적이 있다. 초등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쪽은 죽음 교육을 시켰다. ‘삶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면서 죽음에 대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다른 한 쪽은 죽음을 전제하지 않은 교육을 시켰다. 일본인들은 과거 “소년이여 꿈을 가져라”를 외쳤던 클라크 박사의 영향으로 죽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진취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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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아이들이 성장한 뒤에 인성검사를 해보니 뚜렷한 차이가 났다. 죽음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더 착하고 협조적이며 덜 공격적이었다. 이 실험은 죽음 교육의 당위성을 이야기 할 때 거론되는 실제 사례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모가 자식과 떨어지는 연습을 하지 않습니다. 부모로부터 떨어지지 못하니 아이들은 커도 성숙한 어른이 되지 못합니다. ‘어른 만드는 문화’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는 주체’로 살아갈 준비가 안 되는 거예요. 모든 삶의 마디를 스스로 겪고 넘어가야 성숙하고 책임지는 자가 됩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자는 것이지요. 죽음 이후도 내 삶의 영역 속에 끌어안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에게 “행복하세요?” 라고 물었다. “행복하다.”는 답이 왔다.

재차 물었다. ‘정말로 행복하세요?“ 그가 또 답했다.

“정말로 행복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뭐하지만 지금 떠나도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이뤘다는 느낌이 있어서 드는 생각이 결코 아닙니다.”

그는 이제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 여행도 하고, 책도 실컷 읽고 싶다고 말했다. 가르침을 위한 책이 아니라 읽고 싶은 책을,

마지막으로 ‘가장 하기 싫은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친구 빈소에 가는 것이지요. 친구의 사망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아련합니다. 그 문상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친구는 그냥 떠나지 않습니다. 나와 공유했던 기억도 가지고 갑니다. 어떤 이야기는 그 친구 아니면 같이 할 사람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 이상 그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는 것이지요. 외로워지지요. 자꾸 그 공유하지 못하는 이야기의 숫자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친구가 가면 갈수록 나는 가난해 집니다. 그만큼 외로워지고요…….”

- 끝 -

2017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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