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11. 18:02ㆍ독서후기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2)
■ M. 토게이어 지음 주덕명 편역
◉ Chapter 5. 현재는 미래의 출발점이다.
■ 돈은 자기도취의 지름길, 자기도취는 악의 지름길
“어리석은 행위의 제1단계는 자기 자신의 현명함에 자기도취하는 것이며 제2단계는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고, 3단계는 충고를 경멸하는 것이다.”
자기도취는 자신에게 마음이 쏠려 빠지는 마음이다. 즉, 자기 자신에게 애착을 느끼는 현상이다.
정신분석학적 용어로는 나르시시즘이라고 하는데 독일의 정신과 의사 P. 네케가 명명했다. 나르시시즘이란 말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 물에 빠져 죽은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어로는 자기애(自己愛)라고 번역이 가능하다.
거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처럼 보기 흉한 것도 없다. 유대사회의 옛 속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태양은 당신이 없어도 스스로 떠오르고 스스로 진다.’
거만한 마음을 가지면 사람은 겸손함을 잃어버려 자기 자신을 고치려는 생각은 하지 않으며 또한 자신이 모든 중심에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 빠져들기 때문에 남을 무시하고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한편 지나친 자기혐오도 거만한 마음의 하나로 보았다. 주위의 사람들이 자기에게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도 짐짓 자기가 그들 사이에서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지나친 자기혐오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자랑스러움과 거만한 마음가짐은 분명히 구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랑스러움은 건전한 것이지만 거만한 마음가짐은 병이며, 더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다. 자기 스스로를 칭찬해서는 안 된다. 자기 스스로를 칭찬하기에 앞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고대 유대인 사회의 ‘예비바(학교)’에서는 1학년 생도는 ‘현자(賢者)’,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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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도는 ‘철학자(哲學者)’, 그리고 최종 학년인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생(學生)’이라는 신분을 부여했다.
이것은 겸허하게 학문을 연구하며 배우는 위치에 잇는 것이 가장 지위가 높으며, 학생이 되는 데는 몇 년이나 수업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예비바(학교)’에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탈무드>는 ‘현인이 하더라도 지식을 함부로 떠벌이는 자는 무지를 부끄러워하는 어리석은 자보다도 못하다고.’ 겸허할 것을 엄하게 타이르고 있다. 더불어 자기도취의 위험에 대해서는 ‘돈은 자기도취의 지름길, 자기도취는 죄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경계하고 있다.
■ 어리석은 일에서 교훈을 얻는 슬기를 키워라
“인생이란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몸으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교훈의 연속이다.“
유대의 격언 가운데는 어리석음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신랄하게 꾸짖는 것이라기보다는 한 가닥 동정하는 마음씨가 느껴지는 것이 특색이다. 유대인의 어리석음에 관한 격언은 다음과 같다.
‘어리석은 자는 한 시간에, 현자가 일 년 걸려서도 대답할 수 없을 만큼의 질문을 한다.’
구세주가 찾아 왔을 때, 병든 환자는 모두 고쳤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를 현명한 자로 만들 수는 없었다.
‘현명한 자는 어리석은 자로부터 교훈을 끌어낼 수가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가 현명한 자로부터 교훈을 끌어 낼 수는 없다.’
‘어리석은 자를 가르치는 일은, 구멍 뚫린 주전자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
■ 현재는 언제나 미래의 출발선이다
“쓸쓸한 마음으로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 그것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니까. 빈틈없이 현재를 이용하라. 그것을 할 사람은 곧 그대다. 그림자와 같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라. 두려워하지 말고 늠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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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이 처음 동물들을 만들었을 때 새에게는 아직 날개가 없었다. 그래서 새는 하느님을 찾아가 하소연을 하였다.
“뱀은 독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자에게는 이빨이, 말에게는 발굽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각종 위험으로부터 몸을 지키자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느님은 새의 호소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날개를 주셨다. 날개를 얻은 새는 한참 있다가, 또다시 하느님을 찾아와서 호소했다.
“날개란 오직 짐이 될 뿐입니다. 날개를 몸에 달고 있기 때문에 그 전처럼 빨리 달릴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새의 말을 들으신 후,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새여, 너의 몸에 달려 있는 날개를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아라. 너에게 두 장의 날개를 준 것은 결코 무거운 짐을 지고 땅위를 걷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날개를 써서 하늘 높이 날아서 공격을 하려는 적으로부터 피하라고 달아준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 남보다 부족하다고 종종 불평을 한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있는 능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미 존재하고 있는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가, 사용하지 않는가에 따라 성공, 실패가 달려 있는 수가 많다. 의욕, 용기, 자기를 규제하는 의지, 인내력, 투혼 등이 그러한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많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무기를 갈고 닦아 활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현재는 언제나 미래의 출발선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 기도는 자신을 저울에 달아보는 일이다
“고뇌는 이따금 악인에게 기도하는 마음을 가르치지만
행복이 기도를 가르치는 경우는 절대 없다.”
유대인은 시나이 반도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 유대인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사람은 신에게 복종해야 하지만, 동시에 신에게서 독립된 존재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인간은 계약을 맺을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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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은 신에게 결코 맹종만 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탈무드>는 ‘이성은 신과 사람 사이의 중계자’라고 말하고 있다. 권위에 대해서 맹종하는 것은 유대인이 가장 꺼리는 일이다.
헤브라이어로 ‘신에게 기도한다.’는 말은 ‘신에게 부탁드린다.’ 또는 ‘신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남의 힘으로 소원을 이루겠다는 뜻이 되기 쉽다. 다만 신에게 매달리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면 스스로 위안 받는 효용 정도밖에 기대할 수 없다.
<탈무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께 기도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기도한다는 것은 스스로 겸허해지려는 좋은 면도 있다. 언제나 겸허한 마음가짐을 지니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기도의 의미는 ‘히트파렐’이다. ‘히트파렐’은 ‘스스로를 평가한다.’ 혹은 ‘자기를 달아본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하느님에게 또는 자신이 믿고 있는 신에게 기도하는 유일한 존재다. 그러나 그가 구하고 있는 것, 갈망하고 있는 것을 신에게 했다고 해서 그것이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에 신이라는 이름의 향수를 뿌린 것이다.
‘자기 스스로도 경의를 표하고 싶은 자기’를 만들어야 비로소 신은 만족한다.‘
■ 말하는 것의 두 배는 듣도록 하라
“말하는 자는 씨를 뿌리고 듣는 자는 수확한다.”
‘말하는 것의 두 배는 듣도록 하라. 어째서 사람에게 두 개의 귀를 만들고, 입은 하나밖에 만들지 않았을까? 그것은 말하는 것의 두 배는 듣도록 하라는 하느님의 가르침이다.’
‘행복하게 살려고 생각한다면, 코로 신선한 공기를 가득 들이 마시고, 입은 다물고 있도록 하라.’
현명한 자는 자기의 지성을 숨기며,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어리석음을 노출시킨다. 입은 화(禍)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아도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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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존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을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지성을 나타내고 있다. 항상 떠들썩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탈무드>는 ‘보물처럼 자기 혀를 신중히 다루도록 하라.’ 고 가르치고 있다. ‘침묵을 금이요. 웅변은 은이다.’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은 뜻에서다. 물론 필요한 때에는 충분히 자기주장을 하고 자기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 그러나 얘기하는 것보다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배우는 편이 더 어렵다.
흔히 혀는 칼에 비유된다.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사람을 다치게 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다치게 한다.
훌륭한 무사는 정말로 필요한 때가 아니면 칼을 빼지 않는다. 혀의 실수는 정말 순식간이다. 눈이나 귀는 우리가 마음대로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혀는 자기 스스로 조절이 힘들지만 노력한다면 훈련이 가능한 것이다.
<탈무드>에는 다음과 같이 혀에 관한 훈계가 많은데 그만큼 혀로 인한 실수가 많다는 뜻이다.
- 말은 당신의 입안에 있을 동안은 당신이 주인이지만 한 번 입 밖에 나와 버리면 다음에는 그 말의 노예가 된다.
- 입은 문과 같은 것이다. 문은 필요한 때에는 열어두어야 하나 항상 열어두 면 도둑이 들 위험이 있다.
- 귀는 듣기에 생소한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며, 눈은 눈에 선한 것을 쫓는 다. 그런데 혀는 너무 분방하다.
- 혀에는 뼈가 없다. 그러므로 조심하라.
- 마음이 혀를 움직여야 한다. 마음이 혀로 인해서 움직여서는 안 된다.
■ 금욕도 과욕도 경계하라
“인생의 낙은 과욕보다 절욕에서 찾아야 한다.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욕심을 제어하면 그 속에 낙이 있으며 봉변을 면하게 된다.”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되는 일이 물론 나쁜 것은 아니다. 물질적으로 풍족해지면 보다 건강한 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여가 시간이 늘어남으로써 그만큼 자기 계발에 시간을 쓸 수가 있다. 한마디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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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인생에 있어서 폭넓게 선택을 증대시켜준다. 따라서 물질적으로 풍족한 것은 좋은 일이다.
반면 물질을 만능이라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일찍이 물자가 궁핍했던 시대에는 물건을 소중히 여겨 검약하지 않으면 파산이나 패가망신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소비를 경계했다. 물자와 먹을 것이 풍부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소비를 두려워하고 금욕적이었다. 따라서 검약은 미덕이었다. 하지만 유대인은 금욕적이 아니었기에 항상 물건을 생활의 유용한 도구로써 다루어 왔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절반은 하늘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이처럼 절반은 하늘에 속하고, 절반은 땅에 속하고 있다는 데에 유대인의 균형 감각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물질을 소비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질에 의해 우리가 소모될 우려가 있다. 물건은 각각의 특성과 용도에 맞도록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이 물건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 유대인과 하느님의 관계
“믿음은 산을 옮길 수 있다.”
유대교에서 하느님은 유일신이다. 유일신을 가정한 것은 유대인이 처음이었다.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역시 유일신을 주장하나 이들은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유일신은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권위가 있기 때문에 어디에도 다른 절대적인 권위는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을 낳았다. 그래서 유대인은 히틀러나 스탈린, 모택동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유대인에게 큰 힘이 되어 왔다.
유일신은 절대신이다. 유대교에 의하면, 신은 유대인과 계약을 맺고, 유대인은 신에 의해 선택된 민족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유대인은 신에 대한 불평도 기록으로 많이 남겼다.
<탈무드>에는 ‘신은 유대인을 모든 민족 가운데서 선택했다고 하는데 왜 신은 우리들을 선택했는가.’하고 개탄했으며, 또 만일 신이 이 지상에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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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면 신의 집 창문과 유리는 한 장도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 하느님은 얼마나 공정하고 올바른가? 하느님은 부자에게는 음식물을 주고 가난한 자에게는 식욕을 준다.
- 하느님에 대해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대답이 듣고 싶으면 여기까지 올라오라.
- 하느님은 가난한 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부자를 도와준다.
- 하느님은 사람을 세 단계에서 저울질 한다. 어렸을 때는 하느님은 허물을 용서한다. 청년이 되면 그가 어떤 목표를 세우고 있는가에 따라 저울질 한다. 나이가 들면 하느님은 그가 회개하도록 기다린다.
■ 유대인의 기도
“기도는 음악처럼 신성하고 구원이 된다. 기도는 신뢰이며 확인이다. 진정 기도하는 자는 원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의 경우와 고뇌를 말할 뿐이다.
유대인은 기도할 때, 큰 보자기를 머리에서 어깨까지 두른다. 그 보자기 네 귀퉁이에는 술이 달려 있는데, 히브리어로 ‘찌찌트’라고 하며, 이 술이 달린 보자기를 ‘탈릿(기도보)’이라고 한다. 유대인은 반드시 탈릿을 두르고 기도를 올리는데 그것은 기도에 집중할 수 있고, 기도하는 사람을 외부와 차단시킨다는 뜻이 있다. 유대인들은 성인식 일주일 전에 찌찌트(술)를 달지 않은 탈릿(기도보)을 아들에게 선물하여 사용법을 가르치는데, 성인식날 찌찌트를 단 탈릿을 처음 사용한다. 비로소 독립적으로 기도를 통하여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찌찌트는 탈릿뿐 아니라 평상복에도 다는데 세계 여러 나라의 거리에서 만나는 유대인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다. 찌찌트를 달게 된 이유는 민수기 15:37-41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호아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 대대로 옷단 끝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술의 귀에 더하라 이 술은 여호아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느님 앞에 거룩하리라. 나는 여호아, 너희 하느님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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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유대인은 이 말씀에 대한 순종의 의미로 찌찌트를 사용한다.
유대교의 대축제일인 ‘욤 키풀(속죄의 날)에는 모든 유대인은 단식을 하며 종일 참회하는 기도를 올린다. 이날 사람들은 시나고그에 모여서 세 사람의 장로가 읽는 ’토라‘를 듣는다. 죄는 56종류로 나뉘어져 있는데 대표가“하느님이여, 우리를 용서하소서.”하고 용서를 비는데, 이때 절대로 개인적으로 “나를 용서하소서.”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하며 기도를 올린다.
유대인들은 서로의 죄를 함께 책임진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인류의 죄에 대한 책임을 분담한다는 뜻도 담겨져 있다.
■ 사람과 사람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바보도 칭찬해 보라. 그러면 쓸모있게 된다.”
사람은 자기애(自己愛)가 무척 강하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과 로맨스에 빠져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자기에게 아첨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기 자녀들이나 부하를 대할 때에 그 중 한 사람만을 편애 한다면, 가정이나 사회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 집단 속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 최소의 단위는 부부, 혹은 연인이다. 그리고 가족, 회사 등으로 확대되어 간다. 그러나 자기애가 강해서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한다면 다른 사람의 반감을 사게 된다.
세상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중심이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가 중심이 되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책임이 있다. 세계는 자기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적당한 자기애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사람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는 일에 지나치게 빠지면 자기를 지키는데도 위험하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상대방을 존중해 주는 것은 에티켓이며, 상대의 마음을 얻는 선물이다.
<탈무드>에서는 칭찬의 정도를 가르치고 있다.
‘남을 칭찬할 때, 어리석은 자에게는 많이 칭찬하고, 현명한 자에게는 조금만 칭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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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우리는 노인과 어린이에 대해서는 부드럽게 대한다. 왜냐하면 노인은 과거에 속하며, 어린이는 미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현재의 경쟁 상대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 친절을 베푸는 일은 드물다. 사람이 성공이라는 정상에 접근할수록 시기하는 사람을 보게 되는 것은 그와 같은 까닭에서이다.
■ 인생에 특별히 정해진 레일이 없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잡으려면 움직여야 한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일반적인 꿈은 남이 알아주는 일류대학교를 졸업하여 일류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이라고 한다. 왜?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일류 기업에 취업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른바 ‘레일 위를 달리는’, 혹은 ‘에스컬레이터를 탄’ 평탄한 일생을 보내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산길을 갈 때에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 다져진 길을 걸어서는 결코 귀한 보물을 찾을 수가 없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류 기업에 취직을 해서 정년이 되기까지 이미 정해져 있는 레일을 따라 안일하게 흘러가는 생활을 해서는 틀에 박힌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는 모험도 때로는 필요하다. 야망이 없는 사람, 야망이 없는 조직은 탄탄한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라도 과감하게 도전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그것이 성장하는 사람이 사는 삶의 방식이다. 도전에 실패했을지라도 체득한 지혜를 다음 단계에 활용하고 항상 진보해야 한다. 젊은 사람이라면 젊은 사람답게 사회적으로 이미 정해진 레일을 거부할 수 있는 야망이 필요하다.
■ 사람은 자기도취적 존재다
“탐욕에 눈이 멀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나의 잘못을 종종 다른 사람이 용서해 주는 일이 많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용서해 주더라도 자기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돌이켜보아도 그 일을 생각하면 아픔을 맛보게 된다. 그 일은 자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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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에 상처를 낸 것이기 때문에 좀처럼 낫지 않는다. 결국 어떤 잘못에 대한 최종적인 용서는 스스로의 마음가짐에 있다. 인간이란 자기를 도와준 사람보다는 자기가 돌보아 주고 있는 사람에게 더 강한 호의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도 인간의 약함이 나타나 있다.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은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 자신의 공로를 스스로 내보이지 말아라
“성공한 곳은 놔두고 상처 부위만 노리는 파리떼처럼, 약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점은 무시한 채 단점만 찾으려고 혈안이 된다.”
<탈무드>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자기의 나쁜 일을 감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장점이나 공적을 감추도록 노력하라.’
의식적인 행동으로 겸허함을 내보여서 다른 사람을 감동 시키려한다면 그만큼 상스러운 것은 없다. 진정으로 겸허함이란 계산되지 않고 자연히 넘쳐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지성이라는 산꼭대기는 겸허함이라는 아름다운 눈으로 덮여 있다.
<밋 드라슈>라는 책에는 ‘알이 많이 달린 포도송이는 처진다. 빈약한 포도송이는 높은 데 매달려 있다. 훌륭한 사람일수록 낮은 데로 내려온다.'라고 쓰여 있다. <탈무드>에서는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괴어 있는 물은 썩지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항상 맑고 아름답다.‘고 가르치고 있다.
◉ Chapter 6 친구와 이웃을 소중히 하라
■ 약한 갈대라 할지라도 글을 쓰는 펜이 된다
“참된 친구는 자신만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법이다.”
유연해 지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하느님은 흙이라는 재료로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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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었으나 한 사람 한 사람이 제각기 얼굴도, 생각도, 품성도 다르다. 그러므로 저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유연성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혼자서만 세상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어느 집회나 단체에 가입하는 이유는, 타인을 탓하고, 무엇을 요구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참석하는 것이 아니다. 웃고 즐기고 새로운 환경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참석하는 것이다.
새롭게 만난 그곳에서 자신의 긍정적인 사회성을 표현하며 공감을 얻어라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인생의 동반자를 만날 수도 있다.
랍비 얀켈은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갈대처럼 휘어져라. 삼목(衫木)처럼 높이 솟아서는 안 된다.’
갈대는 어느 쪽으로 바람이 불어도 바람에 따라 흔들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삼목은 강한 바람이 불면 쓰러져 버린다.
■ 문제없는 인생은 없다. 문제의 본질을 살펴라
“이성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별 것 아니다. 즉 자기 자신의 본질에 따라 사는 것이다.”
일에 열중한 나머지 본래의 인간다운 생활에서 멀어져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바쁘다는 것은 얼핏 보기에 근면한 것처럼 여겨지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때로는 일손을 멈추고 도대체 나는 왜 태어났는지, 어떤 사명이 주어져 있지는 않은지,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기본적인 것을 생각하는 일은 비록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에게 깊이를 더해준다.
현대를 ‘노 하우(Know how)'의 시대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지 고민을 한 후 그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노하우(Know how)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노 하우에 열중한 나머지 ‘노우 홧(Know what)’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Know what'이란 사물의 본질을 알려는 노력을 말한다. 그리고 ’노우 홧‘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면 인생의 목표를 알 수 없다.
편법(便法)만 생각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다가는 정작 주위의 사람들에게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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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는 무엇인가를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반면 ‘노우 홧’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위를 점검하고 조율하는 신중함을 지니게 된다.
■ 자신을 해방시키는 날이 진정한 휴일이다.
“휴일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지 인간이 휴일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유대인의 생활 중, 가장 큰 특징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은 새버드(안식일)이다.
일주일이 7일로 되어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일주일이 7일로 정해진 연유가 토라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느님은 엿새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셨는데 바로 이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주일은 일요일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근원을 따지자면 안식일로 끝이 나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7일 째에는 휴일이 되었다. 영어로 발하면 '홀리데이(holiday)'이다. ‘홀리데이’는 원래 ‘성스러운 날’을 짧게 줄인 것이다. 유대인이 ‘새버드’ 또는 ‘샤바트’라고도 불리는 안식일은 금요일의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지기 직전까지 만 하루 동안 계속된다. 이스라엘은 이 시간이 휴일로 되어 있다.
안식일 에 금기시 되는 것.
- 사업에 관한 이야기,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해서도 안 됨
- 일에 관한 책을 읽어서도 안 되고 일과 관련된 계산도 안 됨
- 요리 및 불 붙이는 행위 금지.
- 자동차 운전 금지, 걸어서 다녀야 한다.
안식일은 신성한 날이다. 여자들은 이날이 시작되기 전에 집안 청소, 음식 준비 등을 끝내야 한다. 이는 매주 있는 일이며 유대인 가정의 아주 즐거운 행사이다. 금요일 저녁 식사는 일주일 중에 가장 정성을 들인 식사 이다.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목욕을 하고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시나고그(예배당)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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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화기애애한 가족들의 대화가 각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새버드 날에는 친구 집1을 서로 방문해서 서로의 인생관이나 혹은 예술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야말로 일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다.
<탈무드>에는 ‘쉬는 방법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적혀 있다.
■ 가장 좋은 벗은 거울 속에 있다.
“단지 얘기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우정을 키우는 것은 좋지 않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친구를 한자로 풀이해 보면 친할 친(親) 옛구(舊)다. 친(親)은 가깝다는 뜻이고 구(舊)는 오래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친구의 뜻은 가까이에서 오래 지켜보는 사이다.
진정한 벗의 조건은 졍제력, 지위, 학연, 지연이 아닌 오직 사람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진정 교류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나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디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친구는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다.”
누가 나의 진정한 벗인가? 나는 누구에게 진정한 벗인가?
랍비 이츠하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이 정말로 신을 사랑하고 있는가는 당신이 친구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유대인의 속담에 이런 글들이 있다.
“결점이 없는 벗을 얻으려 한다면 평생 벗을 얻지 못할 것이다.”
“가장 좋은 벗은 거울 속에 있다.”
“좋은 벗이란 오래된 와인과 같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향기를 잃지 않는다.”
■ 단단한 쇠붙이도 내부에서는 활동하고 있다.
“사람은 스스로 믿는 대로 된다.”
사람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사람은 혼자서 성장할 수도 없으며, 혼자서 타락할 수도 없다. 자기에게 맞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모방을 해야 한다. 모방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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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사람은 누구든 좋은 것을 모방하면서 성장해 간다. 뛰어난 예술가나 작가도 처음에는 모두 모방함으로써 스스로의 예술 세계를 형성해 간다. 누구에게나 닮고 싶은 롤모델이 있을 것이다. 그의 행동, 습관, 스타일을 보며 따라 하기도 하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람은 아무리 흉내 내도
똑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는 법이므로, 그 바탕위에서 노력을 기울여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뛰어난 사람들을 모방하는 습관은 좋은 일이다. 인류가 진보해 온 것은 선인의 업적을 이어받아왔기 때문이다. 학습은 모방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 자신이 1이 되도록 노력하라
“리더란 희망을 나눠주는 사람”
사람들이 가장 저지르기 쉬운 잘못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 하나쯤 사회를 위하여 무언가 좋은 일을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하기 때문에 사회는 제 기능을 발휘해 간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이것은 비겁한 태도이다. 마치 기생충과 같지 않은가? 자기가 시작하지 않는 한, 결코 사회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자기의 핑계를 가장 잘 들어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우리들은 아내나 혹은 남편, 아이들, 동료, 상사,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 대해서 엄한 기준을 세우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잘못된 점을 찾고 있다. 이런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잘못은 자기가 본보기를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일이다.
좋은 가정이란, 가족구성원이 서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가정이다. 가족구성원이 함께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서로 발전이 되는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함께 웃음꽃을 피우는 가정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이는 것은 가장 좋은 교육이다. 좋은 행위이든 나쁜 행위이든 전염이 되기 때문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는 우선 본인의 행동이 모범이 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더라도 솔선해서 묵묵히 본보기를 보이면 언젠가는 인정하고 따라오게 되는 법이다. 다른 사람과 부화뇌동해서는 좋은 본보기를 보일 수가 없다.
헤브라이어에서 1이라는 말은 ‘에하토’라고 하는데, 이것은 숫자의 1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유익하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항상 자기가 처음이 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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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노력해야 한다. 1이란 가장 명예로운 숫자이다.
<탈무드>에서는 리더십에 관해서 이렇게 쓰여 있다.
‘몸은 머리를 따른다.’
‘선장을 잃은 배는 방향을 잃고 만다.’
‘비난의 소리에 미소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리더가 될 자격이 있다.’
■ 항상 부지런히 일하는 습관을 들여라
“습관은 제2의 천성으로 제1의 천성을 파괴한다.”
동유럽 지역 유대 사회에는 다음과 같은 속담이 있다.
‘성공이나 실패를 하는 것도 습관이다.’
근면과 인생의 성공은 앞뒤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 부지런했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은 있어도 게으른데도 성공했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부지런한 것만 가지고는 성공할 수 없다. 하지만 부지런하다는 것은 성공의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역경이 뒤따르는 법이다.
<성서>의 <시편>에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 기뻐하며 거두어들이리라.’(126-5)고 노래하고 있다.
스스로 우러난 근면은 자기 발전과 끔을 이룬다. 한 걸음 한 걸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자기를 확립시키게 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부지런히 목표를 향하여 스스로 행하는 부지런함 역시 습성인 경우가 많다.
■ 사람은 시간을 한 번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때와 시간은 묶어두지 못한다.”
시간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의 오랜 연구 대상이었으며 관심사였다. 시간은 ‘이것이다’ 라며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과학적으로도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삶을 영위한 농경, 수렵사회에서는 시간의 개념이 중요하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들에 나가 농사를 짓고, 들에서 짐승을 사냥하고 어두우면 집으로 돌아와 쉬면 됐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거치며 시간이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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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들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사람이 시간을 유익하게 쓰지 않는다면 시간이 사람을 낭비해버린다. 시간은 재빠르다. 시간은 아주 비싸고 귀한 짐승과 같아서 훌륭한 사냥 솜씨로 기회를 잘 포착한 사람만이 제때에 잡아서 성공을 한다.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이해서는 시작과 끝을 분명히 계산하고 계획하여 일을 진행해야 한다. 막연한 목표설정은 시간을 헛되게 보내게 된다.
우리들은 시간을 한 번밖에는 체험하지 못한다.
■ 독특한 개성은 사람을 끌어당긴다
“남보다 뛰어난 것보다 남들과 다른 것이 더 낫다.”
‘헤브라이’라는 말의 의미는 맞은편 물가에 선다는 뜻이다. 반대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또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반대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바르게 돌아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서로 다른 것이 좋은 방향으로 혼합되어 새로운 것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세계가 모두 동일하다면 진보란 있을 수 없다.
<탈무드>는 많은 랍비들의 논쟁을 기록한 것이다. 말하자면 현명한 랍비들의 대화를 몇 백 년 동안 수집 기록해서 정리한 것이 바로 유대인의 영지를 모은 대사전 탈무드가 된 것이다.
<탈무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만 향하고 있다면 세계는 기울어지고 말 것이다.
◉ Chapter 7. 작은 일도 최선을 다하라
■ 사람의 욕심은 언제나 부족한 것만을 생각한다
“모든 것을 탐내면 모든 것을 잃는다.”
한 사람이 불필요하게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은 절실하게 필요한데도 부족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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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언제나 자기에게 부족한 것만을 생각하게 하고 다른 사람의 부족을 배려하지 못하게 만든다.
탐욕은 지나치게 탐하는 욕망을 말한다. 욕심을 좇아서 살아가는 사람은 나누는 삶의 달콤함을 맛볼 수 없다. 그들은 야만인과 같아서 배고픈 사람의 것을 약탈하고 그들의 작은 행복을 짓밟는 것과 같은 혐오스러운 짓을 서슴지 않는다. 자기 앞에 진수성찬을 두고서도 겨우 끼니를 연명하는 사람들의 빵 한 조각을 빼앗는 것이다.
작은 것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이들은 언제나 마음의 여유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부자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 선행은 값비싼 향유보다 귀하다
“인간의 진정한 재산은 이 세상에서 행하는 선행인 것이다.”
<성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선행은 값비싼 향유보다 귀하다.’
옛날에는 향유가 아주 귀했다. 그래서인지, <탈무드>에는 향유나 기름 등은 미덕을 논할 때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향유는 아시아의 온대지역과 유럽에 걸쳐 널리 분포되어 있고 식물 전체에 다소 연한 털이 있고 향기가 짙다. 줄기와 잎을 말려서 발한제, 해열제, 이뇨제, 소염제, 지혈제 등에 사용하며, 민간에서는 좋은 향으로 인하여 목욕하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성경에는 향유에 관한 이야기를 선행에 비유하여 기록(요한 12, 1-11)하고 있다.
<탈무드>에는 선행에 대한 명언들이 있다.
‘좋은 기름은 아래로 흐르지만 선행으로 얻어진 명성은 위로 올라간다.’
‘값비싼 기름은 일시적이지만 선행은 영구히 남는다.’
‘기름은 돈으로 살 수 있으나, 선행은 돈으로 살 수 없다.’
‘기름은 산 사람에게만 도움이 되나, 선행은 죽은 다음에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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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은 부자만이 살 수 있으나, 선행은 가난한 자도 베풀 수 있다.’
‘기름의 좋은 향기는 집안을 가득 채울 수 있으나 선행은 온 나라 안에 알려질 수 있다.
선행을 쌓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신뢰받고, 호감을 사고, 존경을 받는다. 왜냐하면 선행은 성의가 없으면 베풀 수가 없으며, 사람들은 성의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 틀렸을 때는 “아니오!”라고 분명히 말하라
“산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모양이 다르다.”
천사와 사람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천사의 특성은 언제나 티 없이 깨끗하며 결코 부패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에서 천사의 결점을 찾는다면 진보하거나 향상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사람의 결점은 부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점은 단점을 보완하여 향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이처럼 장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다. 물론 장점을 살리면 힘이 된다.
사람은 완전무결할 수는 없다. 완전한 사람은 이상일 뿐이다. 그것은 넓은 바다에서 뱃사람을 인도하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것이다. 뱃사공이 아무리 별을 향하여 쫓아가도 하늘의 별에 이를 수는 없다. 그러나 별을 쫓아 별에 가까이 가려는 마음에서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불완전하나 완전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함으로써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며,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신이다.
겸허함 속에서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힘이 나온다. 그리고 겸허한 사람이 또한 관대하기도 하다. 그러나 원칙이 없는 관용은 문란하게 되어 버리므로 분명한 선을 긋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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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사람 한 사람이 촛불을 지니자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너도 역시 거기에 책임을 느껴야만 한다.”
우리들은 종종 세계가 부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 낙담한다. 부정은 곳곳에 구석구석 깊이 파고 들어가 있으며, 우리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므로 부정과 맞서서 싸우기보다는 타협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만일 당신이 이런 약한 마음이 든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부정에 맞서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일을 생각하여 보자는 말이다.
우선 질병에 비유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큰 병하고 싸우는 일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열이 나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약을 먹는다. 물론 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약도 먹어야 한다. 하지만 병을 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건강을 강화하는 일이다. 운동, 균형 잡힌 식사, 규칙적인 생활 등의 습관들이 사람을 건강하게 만든다. 건강을 강화함으로써 병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삶에서도 이런 법칙이 적용된다. 올바른 생활을 함으로써 세상의 부정을 억제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부정에 저항하는 것도 한 가지 수단이지만 자기의 행동을 바르게 하고 한 층 올바른 생활을 하는 것이 그만큼 세상의 부정을 추방하는 것이 된다.
<탈무드>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좋은 것은 나누어 가져도 자기의 책임은 나누어 갖지 마라.’
자기를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만 있다면 자기의 책임도 없는 것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할 일이 있는 한, 절반은 환경 탓으로 돌릴 수 있다 해도, 절반은 항상 자기 탓으로 남는다. 자기로부터 달아날 수는 없다.
■ 다른 사람에게 죄를 씌우지 말라
“그대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있거든,
그가 누구이든 그것을 잊어버리고 용서하라.”
‘욤 키플(속죄의 날)’에 유대인은 자신이 저지른 죄와 대면한다. 이날, 유대인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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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회에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제단에 제물을 바쳤으며,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는 이 단상에서 탄핵되었다. 죄인은 신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오면서 신에 대한 두려움보다 사람이 만든 법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토양에서 사회과학이 태어나고, 죄도 인간이 만든 법률에 의하여 다루어지게 되었다.
성서에도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는 없다.’고 씌어 있으며, ‘만약 사람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하여 물건을 훔쳤다면 용서받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가난은 범죄를 키운다. 가난은 아름다움이나 지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게 하며 굴욕감에 자기를 내던지는 태도를 낳는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물질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고 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한층 더 큰 유혹을 가지게 되므로 죄를 범하기 쉽다. 대부분의 쾌락은 죄가 되기 쉬우며, 죄의 대부분은 쾌락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각 분야 전문가들의 세부적인 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죄는 최종적으로 개인의 문제이다. 죄는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에게 지워진 것이 아니다. 사회환경으로 말미암아 강요되는 것도 아니다. 자랑스러움은 자기 스스로 확신을 가지는 것에서 나타나듯이 죄도 결국 한 개인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 Chapter 8. 유대인, 그 삶의 철학
■ <토라>와 <탈무드>는 유대인의 지침서이다.
“긍정적인 생각만을 갖도록 힘써라.
그 생각들이 그대 안에서 놀라운 힘을 발휘할 것이다.”
<토라>는 헤브라이어로 구약성서 첫머리의 다섯 편을 가리키며, ‘원칙’ 혹은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토라>는 유대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모세의 책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 편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토라>라는 말이 반드시 성서 첫 머리의 다섯 편을 뜻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며, 시나고그(예배당)에 있는,손으로 쓴 다섯 권의 책도 <토라>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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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란 참으로 묘한 표현이다. <토라>는 단지 이와 같은 의미로 쓰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의미하기도 하고, ‘성서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유대인의 율법 전체를 <토라>라는 말로 부르고 있으며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생활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토라>는 유대인이 신념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여기서 유대인의 신념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도록 유대교와 유대인의 생각을 집대성한 <탈무드>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유대교는 여느 종교와는 다르다. 그리고 <탈무드>도 보통의 책이 아니다.
흔히 이슬람교 혹은 크리스트교라고 할 경우에 그것은 이미 고정된 가르침을 말하는 수가 많지만 <토라>나 <탈무드>는 완성된 가르침이 아니며, 결코 고정된 것도 아니다.
<탈무드>는 성서가 아니다. <탈무드>는 종교, 법률, 철학, 도덕에 관해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삶의 지침서이다. 유대인은 이 지침서를 모든 행동의 규범으로 삼는다. 이러한 것을 기록해서 정리한 것이 <탈무드>이다.
■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하다
“행복하지 않더라도 행복한 것처럼 행동하라. 최악의 상태에 있을지라도 웃으며 행복한 것처럼 행동하라. 진정한 기쁨이 찾아올 것이다.”
성서의 처음 다섯 편 가운데에는 두 개의 중요한 부분이 있다. 하나는 하느님이 세상을 만든 <창세기>이며, 또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이 모세에게 가르침을 주는 대목이다.
창조하는 일은 예술가의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완성된 것을 여기에서 만든다.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는 없다. 이를테면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그 빛이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적혀 있는 것처럼 하느님은 일방적으로 여러 가지 창조 행위를 한다. 하느님의 위대한 힘에 의해서 빛과 어둠이 나누어지고, 하늘과 땅이 갈라진다. 여기에 나오는 하느님 말은 혼잣말과 같은 것이어서 어떤 상대방으로부터도 하느님은 대답을 구하지 않는다.
<창세기>를 살펴보면, 사람은 창조의 중심이 아니다. 하느님은 여러 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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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하였는데 사람은 단지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에 비해서, 시나이 산에서는 하느님이 사람에게 십계(十戒)를 준다. 시나이 산에서 주는 이 가르침은 사람이 이해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에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비로소 계약이 생겨난다. 마침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랍비들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르침을 교사의 모범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교사는 생도들이 하는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며, 또 생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유대인은 매일 ‘미르카트 하트’라는 기도문을 외우는데, 이 가운데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교사’라고 부르고 있다. 가르치는 법과 배우는 법은 유대의 전통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유대인의 전통을 이해할 수 없다.
■ 하느님과의 계약을 어기면 벌을 받는다
“항상 웃음을 잃지 말라. 그러면 삶이 주는 선물이 그대의 것이 될 것이고, 다시 그 선물을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은 뜻하신 대로 여러 가지를 창조하셨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창조한다. 그리고 나서 하느님이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른 인류를 벌주는 대목을 다루고 있다.
<토라>는 하느님이 유대인에게 내린 계시이며, 좁게는 <모세5경>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한다.
유대인은 <토라>를 율법 또는 교훈의 뜻으로 받들어 지킨다. <토라>가 사막 가운데에서 주어졌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일이다. 사막은 사람에게는 생을 영위할 수 없는 불모의 땅인데 여기에서 신과 인간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사막이었으므로 음식도 물도 모자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들은 더 이상 이와 같은 괴로운 자유에는 견딜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다시 이집트로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호소한다.
하느님은 사막을 여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만나’라고 하는 빵을
하늘에서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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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는 인간의 말을 사용하여 씌어져 있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과의 대화를 시작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완전한 것으로 생각해서 천상의 율법을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토라’는 약한 인간을 교육하고, 바른 길을 걷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창조행위를 계속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예시바(유대인 학교)에 가면 사람들이 몸을 흔들면서 <토라>를 마치 노래부르듯이 읽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마치 그들은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들은 깊은 지적인 사색에 잠겨 있는 중이다.
<토라>를 배울 적에는 권위에 마비되는 것을 가장 경계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다. 그것을 자기 나름으로 스스로 이해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해석을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원문을 잘 암송한다 하더라도 외우는 것만으로 <토라>를 공부하는 것은 생도라 할 수 없다. 학문이란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소재로 해서 자기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다.
■ 훌륭한 지도자라도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지도자란 희망을 파는 상인이다.”
모세는 모든 유대인을 대표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속박의 땅 이집트에서 해방된 날을 축하한다. 이날에는 모세의 정신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머문다. 모세는 노예로 이집트에 붙잡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새로운 희망의 땅 팔레스타인으로 인도한 지도자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유월절에도 모세의 이름을 한 번 밖에는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한 사람의 인간을 너무 높은 지위에 두는 것은 꺼리기 때문이다.
한 인간을 신격화하는 것은 유대인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일인 까닭이다. 물론 뛰어난 지도자에게 경의를 표하지만 절대자로 만드는 일은 하지 않는다. 절대자는 하느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랍비들은 모세를 위대한 인물로 보았으나, 초인적인 인간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모세는 모든 이스라엘인을 자기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고 하는 <탈무드>의 말은 모세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위대한 인간이라는 뜻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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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훌륭한 지도자라도 혼자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지도자 역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초인적이고 신과 같은 지도자는 있을 수 없다. 역사를 살펴보면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쥐고 있는 동안에는 국민들로부터 위대한 지도자라고 여겨졌었다. 그러나 그들이 권력을 잃고, 권력과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뒤에는 그와 같은 평가는 나라나 백성들이 한 때 병적인 열에 들떠 있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리더도 다른 사람들과 평등한 위치에 있었다. 유대인은 모세의 상을 만들거나,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경배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유대교에서 우상 숭배는 엄하게 금지되어 있다.
성경에 아브라함이 사상 최초의 유대인으로 되어 있는 것은 우상을 파괴하고 유일신을 믿게 된 맨 처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오늘은 최초의 날이자 최후의 날이다.
“하루하루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라.”
‘메시아’라는 말은 헤브라이어의 ‘하마시아’에서 유래된 말인데 이 말은 성유가 부어진 자‘라는 의미이다. 이 헤브리아어의 ’하마시아‘가 희랍어의 ’메시아스‘가 되었으며, 희랍어로 번역되어 ’크릿그토스‘가 되었다. ’그리스트‘란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신으로부터 성유가 부어진 자는 ’구세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메시아’는 압정으로부터, 혹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유대인을 해방하는 자를 가리키는데, 괴로운 나날을 보내온 유대인은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구세주가 오기를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다. 이 해방자는 유대왕국을 재건할 예정이었다. 이렇게 해서 ‘메시아’는 최후의 심판 날, 하느님이 지상의 왕국을 만들기 전에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구세주를 의미하게 되었다.
구약성서 속에서는, 사울, 다윗, 페르시아의 시라스에 이르기까지 왕들을 가리켜 ‘메시아’라고 불렀다. 이와같이 메시아 라는 말은 시대를 따라 변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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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시아’ 신앙은 유대인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 왔다. 크리스트교도 그 ‘메시아 신앙’을 이어받았다. 언젠가 이 지상에 완전한 세계가 출현한다는 신앙이다. 언젠가는 지상천국이 나타난다는 신앙과 함께 성서의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어 내도록 명령한 사실이 역사를 통해서 유대인을 지탱해 주었다.
유대교에서는 최초의 날과 최후의 날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매일이 최초의 날이기도 하다. 오늘부터 새로운 창조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탈무드>는 ‘오늘은 최초의 날이자 최후의 날이다. 현재를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 유대인을 지켜온 교훈이다.
■ 유대인은 가슴에 문화를 지니고 다녔다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진리를 주울 수 없다.”
전 인류 중 유대인은 불과 0.2%, 1천3백만 명밖에 안 된다. 이런 소수의 민족이 세계 곳곳에서 항상 화제의 중심에 서 있다. 경제학, 물리학, 예술분야 등에서 그들의 행보는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하다.
노벨상을 예로 든다면, 물리, 화학, 의학, 부분 수상자 가운데 30% 이상을 유대인이 차지했다. 유대인이 오늘날까지 모든 분야에서 인류에 공헌한 업적은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의 이 같은 힘이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려면 교육의 힘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은 ‘구약성서의 백성’ 이라고 일컬어지다시피 성서와 더불어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니고 있다. 희랍인들을 살펴보면, 고대 희랍문화가 쇠퇴한 뒤 희랍 민족은 과거의 영광을 잊어버리고 목축에 전념해 왔다.
이집트나 로마의 예를 들어봐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과거의 위대한 유적에 의해서 기억되는 위대한 문화는 많다. 이에 반해서 유대인은 유적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아마도 ‘유대인의 유적’ 같은 말은 그다지 들어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형태의 유적이 아니라 사람의 가슴에 영원히 변하지 않을 유적을 세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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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의 역사는 4천 년 이상이나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하여 <성서>를 낳았고, 마침내 크리스트교를 낳았으며 회교를 낳았다. 마호메트의 말을 기록한 <코란>이 <성서>3부작의 마지막 책에 해당한다.
유대인은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자기들의 이상을 위해 노력해 왔다. 3천 년 동안이나 나라가 없었으면서도 이질적인 문화 사이에서 스스로 독자성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말이 아닌 이민족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겨 왔다.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라틴어, 희랍어와 같은 모든 언어를 유대인은 사용해 왔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은 부자가 많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여러 나라에서 박해를 받으며, 쫓겨 도망 다니는 유대인들이 그와 같은 부를 축적하기에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어디에서나 유대인 거리의 생활이란 가난하고 어렵기 마련이었다. 일부의 돈 많은 유대인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대개의 유대인은 무력했다.
유대인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것은 재력에 의한 것도, 무력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의지(意志)와 지력(知力)에 의한 것이었다. 유대인은 다른 민족과 달라서 지위, 재력, 무력에 의지하는 일이 없었다. 의지하는 일이 없었다기보다는 힘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들의 문화를 꽃피울 국토도 없었다.
유대인은 문화를 개개인의 가슴에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유대의 전통과 발상법 등과 같은 것을 지켜왔던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 유대인의 삶과 정신
“가장 현명한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이기는 사람이다.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인간이 하루를 살기 위해서는 하루를 살기 위한 지혜를 배워야 한다. 하물며 영원히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지혜를 배워야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일까?
유대인은 그렇게 살았다. 무엇이든지 배우며 그 배움을 자신들의 삶에 접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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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켜 자신들의 지혜로 삼았고, 그 지혜를 후손들에게 전하여 수천 년 동안의 박해와 고난의 세월을 이기고 나라를 찾을 수 있었다. 유대인은 지금도 배우고 있다. 영원히 살아남기 위하여!
유대인은 그렇게 살았다. 그들에게 내일은 없었다. 오늘,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지금도 오늘만을 생각하며 산다. 아름다운 내일을 만드는 오늘을!
■ 용기는 지성에서 지성은 책에서 나온다
“독서만큼 값이 싸면서도 오랫동안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없다.”
중세세대를 통해서 보면 크리스트교인들은 유대인의 가슴 속에 간직되어 있는 지식, 즉 책의 힘을 두려워했다. 예를 들면 스페인에서 유대인이 추방되었을 때에 당시의 스페인 국왕은 만일 헤브라이어로 된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발각되면 누구라도 사형에 처한다고 포고를 내렸다.
1553년 <탈무드>는 각 지방의 여러 곳에서 집필 되었는데, 지금까지 불태워지지 않고 보물처럼 전해 내려오는 오직 한 권인 바빌로니아의 <탈무드>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읽는 <탈무드>인 것이다.
유대의 책을 불태우는 사건은 여러 번 되풀이 되었다.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기원전 175~163)도 탈무드를 태우도록 명했다. 1242년에는 파리에서 24대의 마차에 가득 살린 탈무드를 태우도록 명했다. 1288년에는 트로에스의 거리에서 10명의 유대인을 가둔 채 유대의 도서관이 불태워졌으며, 법왕 클레멘트 4세는 전 유럽에서 <탈무드>를 압수해서 불태우도록 명령을 내렸다. 영국에서는 1299년에, 1415년에는 법왕 베네딕트 13세, 1510년에는 맥시밀리안 황제, 18세기에 들어오면 데보스키 추기경이, 좀 더 최근의 역사를 보면 나치스가 전 유럽에 대해 유대관계의 서적을 불태웠다.
유대인들은 책을 항상 보물처럼 다루어 왔다. 고대 유대에서는 책이 낡아서 책장이 떨어지고 글자가 희미해져 더 볼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성자(聖者)를 대하듯이 정성을 다해서 구덩이를 파서 묻었다. 유대인은 책을 불태우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여기서, 유대의 가정에 책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자. 유대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철이 들 무렵이면 <성서>를 펼치고 거기에 꿀을 떨어뜨린다. 그리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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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입을 맞추도록 한다. 이것은 책이 달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한 의식이다. 유대인은 철저한 교육을 통하여 문맹이 없다. 유대인에게 성서를 읽는 것은 의무였기 때문이다.
‘바미츠바’라고 하는 성인식 때면 사내아이는 교회에서 반드시 <성서>의 한 구절을 사람들 앞에서 읽어야만 했다. 또 유대인의 묘지에는 흔히 책이 놓여 있다. 요컨대 생명이 다하더라도 공부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 끝 -
2017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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