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26. 12:26ㆍ독서후기
상처 없는 영혼
- 공지영 에세이 -
■ 공지영
0 1963 서울 생, 연세대 영문과 졸
0 1988 구치소 수감 증 <창작과 비평>에 ‘동트는 새벽’ 발표
0 1989년 첫 장편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0 1993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1994년 ‘고등어’ ‘인간에 대한 예의’
0 대표작 : 봉순이 언니, 착한 여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즐거운 나의 집, 도가니, 높고 푸른 사다리 등
0 소설집 : 인간에 대한 예의, 별들의 들판,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등
0 산문집 :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딸에게 주는 레시피
0 2001 : 21세기 문학상, 2002 : 한국 소설문학상, 2004 : 오영수 문학상
2007 : 한국 가톨릭 문학상, 2012 : 이상 문학상,
2006 : 엠네스티 언론상 특별상
< 오! 성(城)이여, 오! 계절이여, 상처 없는 계절이 어디 있으랴>
- 렝보
* 이 글은 작가의 어떤 이야기의 내용과 줄거리 보다, 작가가 지닌 독특한 표현에 초점을 맞추어 요약해 봤습니다. (이수영)
1. 홍콩으로부터의 편지
■ 기다린다는 것
지금 해가 지는 시간, 뿌옇게 바다 안개가 오르고 멀리 구룡반도에서는 벌써 하나, 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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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릴 때부터 전혀 낯설지 않았던 도시 홍콩, 억양이 고르지 못하고 약간 시끄러운 느낌마저 드는 광둥어를 자세히 듣지 않는다면 어디 마산이나 부산쯤에 그저 잠시 다니러 온 느낌입니다.
어제와 오늘, 향기와 진득진득한 열대 과일과 광둥요리를 배부르게 먹고 혼자서 거리를 쏘다녔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밤이면 나는 잠 속으로 빠르게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하루하루를 보내기가 수월해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약이라던 어른들의 말씀은 얼마나 긴 시간 앞에서 숙연해진 후에야 할 수 있었던 말인지 이제 알 것만 같습니다.
나에게만, 이 세상에서 오직 나 하나에게만 내리쏟아지는 것 같던 고통은 시간이라는 톱니바퀴와 이국의 풍물 앞에서 조금씩 마모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더 무디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이 남아 있겠지요.
어제부터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창밖에서 개구리가 울어대고 있군요. 처음에 나는 저것이 새소리인 줄만 알았습니다. 왜 나는 저것이 목이 쉰 새가 우는 소리라고 생각했을까요? 도회에서 나서 도회에서 자란 여자의 무지 탓일까요?
고통은 때로 치통처럼 나를 덮칩니다. 그 고통 속에 나를 팽개치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하다가 말았습니다. 고통이 나를 덮친다면 그대로 두는 것도 괜찮은 일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거부하지 말고 마치 헝클어진 서랍을 정리 하듯이 하나씩, 가지런히 고통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는 일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구원은 어쩌면 거기서부터 조금씩 시작되는 거라고 말입니다. 고통은 나를 덮치지만 구원은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오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저 뿌연 안개 속으로 어둠이 내립니다. 보석 상자 속 검은 벨벳 천 위에 놓인 반짝이는 보석처럼 하나 둘 불들이 밝혀집니다. 다시 개구리들이 울어대고 있습니다. 안개는 다시 모든 불빛들을 감추며 바다를 덮고 있습니다.
이 이국의 땅, 저 안개에 가려진 불빛들을 밝혀 놓고, 이 밤 저 불빛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버림받고 확신하고 혼돈스러워하고 있을까요.
■ 사랑은 생채기를 통해 오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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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다……. 낯 동안 감추어두었던 일렁임들을 바다는 이제야 저 혼자 앓고 있습니다. 밤배들도 모두 항구로 떠나고 바다는 이제 저 혼자입니다. 그래서 물결은 그리운 불빛을 찾아 이쪽 나트륨 등 가로 찾아와 흔들리고 있습니다.
홍콩에서 맞는 일주일째 밤입니다.
방금 창 옆에 달린 에어컨의 소리가 멎었습니다. 그러자 해안도로를 질주하는 홍콩의 빨간 택시들 소리가 낮은 저음으로 깔립니다. 그리고 고요.
나는 왜 이곳까지 와야 했습니까? 눈 그리고 바람불던 서울, 인수봉 이 바라보이던 수유리 내 사무실 창가에 의자를 당겨 놓고 앉아 있던 그날들. 흰 눈을 머리에 얹고 내게 오셨던 그대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 가슴 아픈 사연에조차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생의 자국들은 대체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나는 생각했습니다. 서울의 그 차갑던, 먼지 이는 거리에서 이곳으로 떠나 온 것은 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왜냐하면 그곳은 내 탯줄을 묻은 곳이고, 그곳은 어린 시절 부터의 내 생채기가 묻힌 곳이고 사랑은 그 생채기를 통해서 오는 것이니까요.
내가 아무리 몸부림친다 한들, 시계는 언제나 한 번에 한 걸음 밖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남겠지요. 그러니 어쩌면 저 시계의 한 걸음이 영원을 향해 떠나는 첫걸음일지도 모릅니다.
■ 무심한 마음
지금 식구들은 잠들고 나는 혼자 바다가 바라보이는 내 방의 탁자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서울을 떠나오기 전부터 나는 그 질문을 회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무엇이며 나는 그대에게 무엇이었을까요.
세상에 나 있는 거미줄처럼 질기고 연약한 인연의 한끝자락을 따라 오르다가 우리는 만났습니다. 내게는 이미 인연보다 더 질긴 동아줄이 친친 감겨 있습니다. 그대는 내게서 그 동아줄을 풀어 주마고 말씀하셨지요.
나는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의 아무 인연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헤어짐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만남은 피할 수 있을 거라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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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가 이미 만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리석은 나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온통 회색으로 변해가는 저 잔잔하고 깊은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남아 있는 나의 생과 사랑을, 혹은 행, 복, 같은, 모든 사람들의 입가에서 늘 쓸쓸하게 사라지곤 하던 그 낱말들을 생각합니다.
그대의 그 쓸쓸하고 견고하던 고독 앞에서 나는 무엇이었던가요? 흘러가버리는 시간 앞에서 아무 갈피도 잡지 못하고 나는 그저 이렇게 서 있습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사랑도 아니고 그리움도 아니고 그저 낡은 책갈피에 끼어 있던 빛바랜 꽃잎이 팔랑팔랑 떨어져 내리듯 무심한 마음입니다.
이제 세상이 점점 어두워져 갑니다. 언제나 내 마음속에서 한 점 불빛으로 반짝이는 그대여. 그러면 안녕히.
■ 나의 헛된 갈망들
이 밤에도 비행기는 날아오릅니다. 저 캄캄한 하늘, 비행기 꽁지에 붙은 작고 빨간 불빛이 멀어져 갑니다.
언니는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수녀복을 입은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조용조용히 걸어 다니는 생 폴 병원, 나는 신생아실 유리벽으로 예쁜 조카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열 달을 다 채우고 튼튼한 조카와는 달리 인큐베이터 속에 든 작은 아이가 보였습니다. 이 무더운 날씨에도 아이는 빨간 털모자를 쓰고 있더군요. 올의 생김새를 보아 누군가가 손으로 뜬 것이 분명했습니다. 저것은 누구의 솜씨일까요?
글쎄요. 어미가 된 이후부터 나는 아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작은 아이. 우리 조카처럼 볼이 발그스름하고 통통하지도 못한 그 작은 아이가 자꾸 눈에 밟혔습니다. 인형보다도 작은, 젓가락 같은 팔다리를 뻗은 채 머리통만 유난히 커다란 저 아이에게도 나의 사랑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 어미 된 사람에게도 위로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모두 저렇게 작은 사람이 아니었냐고 말입니다. 누구나 저렇게 작았다가 크는 게 아니냐구요. 누구에게나 저렇게 삶이 버거운 시간은 있게 마련 아니겠느냐고 말이지요.
그러고 나서 병원 뜰을 산책했습니다. 성당이 있더군요. 오래된 기억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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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났습니다. 중등부, 고등부 시절들의 나. 신부님이 나에게 수녀가 되라고 하셨을 때 심각하게 고민하던 생각이 납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신부님께 저는 말씀드렸댔습니다. 오래 생각해 보았지만 수녀가 될 수는 없을 거라고, 왜냐하면 저는 제복이 싫거든요. 라고 말하던 열일곱 살의 나.
오후기 되자 마음이 좀 가라앉았습니다. 언제나 이런 식입니다. 그러면 병원 옆에 있는 여학교의 벽돌 교사, 그 곁에 선 커다란 나무들이 뿜어내는 이국의 향기를 나는 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조차 나는 내 것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들어도 싫고 낯설고 거친 광둥어를 쓰는 이곳 사람들의 것이니까요. 중국 여인들의 귀에서 짤랑거리는 작은 은 귀고리처럼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제 글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내가 어디에 서든, 설사 다시금 흔들리게 될지라도 나는 같은 자리에서 아마도 다른 자세로 앉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대여 고통과 격정에 싸여 비통해 하기에는 우리의 생이 너무 짧은 것은 아닐까요. 이 세상은 아주 넓은데.
■ 잘못이 없는 바다
언니가 아이를 낳은 후 엄마와 형부가 교대로 언니의 침상을 지키고 있는 동안 나는 집에 앉아 있습니다. 형부가 출근하고 조카가 한국인 학교로 갔습니다. 오전 10시, 커피를 끓여서 큼직한 머그잔에 따라놓고, 담배와 라이터를 가져다 놓으면 그때가 바로 내가 홀로 바다와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텅 빈 집……에서 바라보는 바다. 햇살이 온통 바다로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어제의 안개는 걷혀버렸군요. 바다는 평화로워 보입니다. 그 위를 지나가는 저 육중한 배들도 느긋해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그리 평화롭지도 느긋하지도 못합니다.
처음 이 집에 이사 와서는 이 창가에 앉아서 바다만 바라보았는데 지금은 집안일 하다가 바다를 보면 아, 거기 바다가 있구나. 한다는 언니의 말이 떠오릅니다.
예전의 나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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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일상에 젖어 바다가 저기 있는 줄도 모르고 사는구나 하고 말이지요.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언니는 이제야 저 바다를 언니의 것으로 가지게 되었구나 하고요.
글쎄요. 함께 있다는 것의 소중함은 문득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진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니의 아파트 앞 화단에 핀 봉선화를 보았습니다. 글쎄요. 그것은 봉선화였을까요? 거의 저만큼 키가 큰 봉선화, 봉선화라는 뉘앙스가 주는 애처로움은 찾아볼 수 없는 그 키가 크고 튼튼해 보이는 꽃. 만일 난파가 다시 살아온대도 저 꽃을 보고 봉선화라는 애처로운 노래를 다시 지을 수는 없을 겁니다.
저는 조선이라는 말을 생각했습니다. 조선이라는 글씨가 붙은 배추, 무, 고추, 혹은 오이……. 그것들은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요. 작고 단단하고 맛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맛있는 것들만 생각하다가 나는 다시 서울을 생각했습니다. 수유리 내 사무실 창에서 비리보던 인수봉과 백운봉, 비가 그친 날 오후 아카데미하우스 구름의 집에서 마시던 뜨거운 커피, 부드럽게 산을 휘감아 내려오던 흰 구름들.
나는 아직은 울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는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만 같습니다. 내 가슴으로 차오르는 공기들은 꾸역 꾸역거리다가 마치 압력솥에서 나오는 증기처럼 가끔가끔 피식거립니다. 삶이 힘겹게 지나가는 소리가 내게는 들려옵니다. 그래요.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어떤 쓸쓸한 유행가 가사처럼 등이 휠 것만 같던 삶의 무게가 내게만은 왜 그토록 생생했던지요. 지나친 엄살을 부리는 나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바다는 저기 있군요. 잘못이 없는 바다. 그러나 바다는 내게 한 번도 손을 흔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눈이 멀도록 앉아 있는 나를 한 번쯤은 아는 척해주어도 좋았을 텐데 한 번쯤만 저렇게 반짝반짝 웃어주었어도 나는 눈멀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 부질없는 생각들이 머리를 스칩니다. 그러니 사실은 바다의 잘못이었던가요. 저는 그만 변명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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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실패 속에서
바다의 안개가 걷히고 있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가지고 온 가요 CD를 줄곧 들었습니다. 그 모국어의 모음과 자음들이 내게 위안을 줍니다.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이리저리 쓰러뜨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누구나 인생과 세상과 미래에 대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사실. 우리의 불행은 이 실패들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제가 떠나기 전, 혜화동 거리를 걸으며 한 선배는 제게 말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솔직히 받아들이고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새로운 출발을 위해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하고.
스콧 펙 박사라는 분은 그렇게 말했지요.
거의 비중이 같은 어떤 갈등 속에서 올바른 선택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선택한 후의 감정의 조절이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감정의 조절이라는 것을 도무지 할 줄 모르는 나는 감히 기도하고 마는 것입니다.
내 하나, 또 하나의 실패 속에서 싱싱하게 뛰노는 숭어 한 마리 건질 수는 없을까요, 하고.
2. 일본으로 부터의 편지
■ 두고 온 얼굴
어제 처음으로 일본 본섬에 도착했습니다. 1994년 한 나흘 쯤 홋카이도에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첫 일본 착륙이었지요.
사촌 언니의 집은 참 작았습니다. 일본에서의 유학 생활이라는 게 다 그렇다고 언니는 말하더군요. 변변치 않은 가구들 때문에 마치 어디 잠시 여행이라도 온 기분으로 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습니다.
H 언니와 통화를 하고 나서 한 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나를 배웅해 주었던 유일한 사람, 공항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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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애정이라는 것, 진실이라는 것은 전달된단다. 네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거야 네가 편해야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편안하다. 기다려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너에게든 누구에게든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그 말.
처음으로 서울에 두고 온 얼굴들이 그리워졌습니다.
■ 두려움에 떨던 나는 누구였을까요.
이곳은 다다미방, 지도를 보니까 위도는 부산보다 조금 낮은 곳입니다. 그런데 집의 구조를 보면 추위에는 전혀 대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창은 뚫릴 수 있는 사방으로 모두 뚫려 있고 도착한 나는 그저 춥기만 한데요. 하기는 이곳의 여름을 아직 겪지 않았으니 이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만. 그들은 수만 년 동안 이곳의 기후를 겪은 후 아마도 추위보다는 더위가 훨씬 더 사람을 괴롭힌다고 생각했겠지요.
다다미를 깔아 놓고 또 그 위에 벌레가 올라오지 않도록 비닐을 깔고 그 위에 다시 전기장판을 까는 것이 이들의 보통 생활이라고 합니다. 차라리 우리처럼 바닥에 난방을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습기가 그토록 걱정이라면 말이지요. 온돌 난방을 하고 그 위에 다다미를 깔아도 될 텐데 하는 생각. 하기는 이곳에서 그릇을 씻어 엎어 놓아봤자 물기는 언제나 그대로 있습니다. 목욕탕에 한 번 쓴 수건을 걸어놓으면 언제나 그대로 젖은 채이지요. 나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습기가 굉장한 모양입니다. 하기는 그릇을 씻어 잠시 그대로 놓아두었더니 그릇 뒷면에 이상한 것이 끼여 있었습니다. 아마도 곰팡이 종류인가, 생각하는 순간, 기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기후라는 것이 정말로 인간들의 정신을 바꾸어놓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사람들을 얼마나 긴장시킬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맑고 쨍한 햇빛이 내리쬐어서 모든 것이 그 햇빛에 자연히 마르곤 하는, 그저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우리나라의 그 순수한 자연성과는 다르게 이들은 노력해야만 하고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아야만 하는 모양입니다. 왜냐하면 그 그릇에서처럼 앞면과 뒷면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왜 이들이 그 윤이 나고 차진 아끼바리 쌀로 밥을 하고도 그 밥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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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지 않는지 나는 사실 의아했습니다. 끊임없이 초를 치고 간장을 묻히고 색색가지 고물을 뿌려대는 이들, 이제 그것을 이해할 것만 같습니다.
자연이 밥을 쉬어서 못쓰게 만들어 놓기 전에 초를 뿌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인공은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미덕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미덕이 되듯이 말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 아버지가 하신 말씀, 일본인들의 다테마에(建前)와 혼네(本音)를 구별해야 한다고 하셨던 그 말씀, 당사자 앞에서는 절대 거절의 말도 귀에 거슬리는 말도 하지 않는다는 이들, 그러나 그것이 본심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말씀. 그릇의 앞과 뒤, 이들의 특수한 역사도 있겠습니다마는, 혹시나 이런 자연이 주는 공포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베어버려서 그러는 것은 아닌지, 그릇 하나 가지고 내가 너무 진도를 많이 나갔습니다.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말이라는 것의 허망함입니다. 물론 나는 아직도 말이라는 것 즉 어떻게 어떤 말을 골라 쓰느냐가 매우 귀중하다고 남들보다는 많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넘쳐나는 말들의 홍수. 이랏샤이마세, 아리카도 고자이마스, 도모……. 첫날 빵을 사러 갔을 때 빵집 아주머니의 모습은 마치 그 사람만 계속해서 한 30분만 촬영했더라면 무슨 정신병자-인사를 못한 것이 무슨 한이 되는-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앞의 사람이 누구고 무슨 빵을 얼마나 사든지 간에 똑같은 억양의 똑같은 동작, 무릎을 꿇고 서빙하는 호텔의 아가씨들, 거기에 무슨 고마움이 표현될 것이며 무슨 의미가 대체 존재하기나 하는지. 예를 들어 일본인들이 친절하다고 하는 신화는 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습니다.
이들의 웃음과 친절 그리고 끊임없는 인사말은 그저 습관일 뿐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 불안을 견디는 첫발
그래도 바라보아야 하는 거겠지요. 아까 내가 자전거를 타고 너무나 아름다운 복사꽃과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 공기 속, 깨끗하게 정돈되어 신발을 벗고라도 걸어 다닐 수 있을 것 같은 골목길들을 뱅뱅 돌며 그 즐거움을 가슴속에 담으려고 애썼듯이 그렇게 우연히 지나치던 어떤 골목길. 모던하게 지어진 어떤 건물 앞에 이르렀을 때, 김일성 수령님 감사합니다. 라고 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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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던 글귀, 너무 신기해서 그 주위를 뱅뱅 돌며 그것이 재일 조선인 초등학교라는 간판을 확인했듯이 그렇게……. 그 자전거 길,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위해 섬세하게 배려해 놓은 보도블록과 아름다운 길들, 내 자전거가 달려가는 앞길로 할랑거리며 떨어져 내리던 벚꽃 이파리를 내가 가슴 속에 사진을 찍듯이 눈여겨보았듯이 그렇게……. 가끔 나를 뒤흔들어놓는 슬픈 감정도 결국은 내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인정해야만 하는 거겠지요.
운전을 처음 배울 때 온 몸이 마비되는 듯이 고통이 따르고 이것이 내게는 도저히 맞지 않는 기계처럼 생각되었지만 그것이 주는 혜택을 위해서 너는 어깨가 빠지는 듯한 고통을 참고 견딘 사람이다. 이제 자동차의 핸들은 네게 더 이상 공포가 아니며, 핸들은 이제 네 몸처럼 자연스럽다.
이제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상처 입는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만이 상처 입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토록 잘 알고 또 되뇌면서 한 걸음을 내딛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사람을 한번 만날 때마다 불안했습니다. 결국 또다시 나만 상처 입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이 혼자 있는 이 시간 다시 나를 엄습합니다.
나는 언제나 주눅 든 모습으로 그것이 새로운 나로 태어나려는 몸부림과 함께 뒤죽박죽인 채로 ……인 것입니다. 꾸미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무엇이 정말 나인지, 때로는 말이라는 것이 정말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내 스스로 진실되게 느끼면서도 나는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나는 대체 누구인지 두려운 것입니다.
떨고 있던 내게 H언니는 충고해 주었지요. 넌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냥 너 자신, 너의 존재 그것만으로 충분하단다.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라. 라는 말 따위는 지당도사들이 하는 말이란다. 진심으로 너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그게 바로 쓸모 있는 존재란다.
■ 당신은 아직 젊으며
모든 것이 지금 시작되려 하고 있습니다
L선생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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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있습니다. 떠나오기 전 서점에 들러서 아주 우연히 산 책인데 지금 제게는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치 <성서>처럼 귀중하게 느껴집니다.
결국 고뇌하는 모든 인간은, 그러니까 고뇌와의 싸움에서 승리했거나 적어도 진지한 모든 인간은 결국, 제가 가려고 하는 그길, 그러니까 침묵과 고독의 사막을 지나 이르는 묵언과 진실과 스스로도 평화로운 그 길로 간다는 사실을 한 번 더 느끼면서 제가 가려고 하는 그 길에 안도해 봅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쉽게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5년이 걸려 알아야 할 것을 5개월 만에 알아보기도 하니까요. 사람은 함께한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들이 만나고 있을 때 각자가 살아 온 -진정으로 살아온- 햇수가 덧붙여진 만큼 함께하는 거라는 걸 나이가 들면서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지요 나이가 드니까 좋은 것도 참 많구나.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이가 들면 좋은 것이 많아지도록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떠난 후, 허전해 하시는 선생님의 외로움을 생각합니다.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저는 이해할 것만 같습니다. 언제나 보내는 사람이 더 힘든 법이니까요. 왜냐하면 떠나는 사람은 언제나 몸만 가져가고 떠난 사람의 자취는 보내는 사람의 주변에 고스란히 묻어 있는 법이니까요.
서울에도 꽃이 피었을까요.
이상한 일입니다. 고향을 생각하면 수유리가 떠오릅니다. 그곳은 제가 태어난 곳도 아니고 성인이 된 후 그저 한 5년을 산 곳인데 말이지요. 그곳에 선생님께서 계시기 때문일까요. 우리들이 나누었던 그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때 우리가 바라보던 도봉산의 노을자락이 제 가슴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 부디 안녕하시고 마음으로 가득 선생님을 안아드립니다.
■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다시 L 선생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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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서울을 떠난 지 이제 겨우 한 달째인데 몇 년이 지나가버린 기분입니다. 몇 번이나 편지를 드리려고 생각했지만 핑계가 아니라 정말 몸이 제자리에 가만히 잡혀주질 않더군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에게 익숙해진다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로 지나간 삶을 이해하고 그것을 맞추어 이제 친구가 되려고 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이 제게 하셨던 말씀들을 생각햇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진실은 흐른다”라는 말씀이 왜 그렇게 아프던지요. 왜냐하면 내가 좋은 쪽으로 진실하기가 참으로 힘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제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가만히 있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면 마치 자전거를 타고 길을 달리면서 작은 언덕길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느낌입니다. 내가 좀 성숙했다는 유일한 증거가 있다면 이제는 오르막의 힘든 길을 오르면서 아마도 내리막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이토록 사소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33년 동안 그토록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멍해지지만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신기해하고 있습니다. 선진국이라는 것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요. 대체 이 나라이 개인당 국민소득이 높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요. 집도 모두 조그만 곳, 그렇다고 옷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먹는 것을 풍족하게 먹는 것도 아니고 ……. 차라리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낮은 상해 사람들의 삶이 더 풍요롭게 기억될 정도입니다. 최소한 그들은 먹는 거라도 푸짐하게 먹잖아요. 어떻게 반찬을 이렇게 조금만 줄 수 있는 건지, 이건 사람이 먹는 음식이 아니라 거의 새 모이 수준이잖아. 사촌 언니와 외식을 하다가 저는 분개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이네들의 습성들, 특히 성에 대한 여성들의 엄청난 개방성과 어떻게 보면 기가 막힌 무지성, 톱스타들도 잡지에서 헤어누드를 선보이는 것은 예사이고. 5백 그램을 다이어트 하기 위해 처녀들이 줄줄이 팬티와 브래지어 차림으로 TV에 몰려나와 두 시간 동안 옷도 안 입고 사회보는 여자만 옷을 입고 있어요. 뱃살을 꼬집어보게 하고 허벅지의 지방을 걱정합니다. 게다가 자신의 누드 사진을 잡지에 게재하고 연락을 부탁한다는 스물 두엇의 처녀들이 줄줄인 판이니……. 그것도 모두 여자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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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남자의 그런 모습들은 단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비교해보면 당연히 우선은 우리 것이 좋아 보이는 일이 더 많지만 조금 더 지켜볼 예정입니다.
■ 내가 떠날 무렵
북쪽으로 난 베란다로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거립니다. 자전거를 타고 슈퍼마켓에 가던 길의 그 화사함. 내가 좋아하는 화창한 나날들이 이제 시작됩니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내게는 이제 겨우 봄이 오는 것만 같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홍콩에 있을 때와는 달리 모국에 대한 갈증이 전혀 일어
나지 않습니다. 이야기할 사람이라고는 사촌언니뿐 게다가 언니도 매일 늦는
생활인데요. 예전에 홍콩에서는 언니도 있고 엄마도 있었는데, 그때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모국어가 아니었던가요. 하지만 이제 나는 그것에 드토록 목말라하지 않는 자신을 느낍니다.
이 신비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나는 가만히 혼자 웃기까지 합니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나는 우연히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책을 발견했고 그것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하루키가 일본을 떠나 외국에 살았던 나날들의 기록이었지요. 하루키의 소설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오히려 그 글을 읽으면서 그를 따뜻하게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먼데서 울리는 북 소리를 듣고 자신의 나라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 구절을 읽으면서 사실 이것은 좀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나를 떠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지침, 피곤함, 혼자있고 싶다는 생애 처음의 절박한 심정들……. 그리고 나의 사랑. 그가 북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아마도 종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경고의 종소리. 내 삶이 더 이상은 파멸로 달려가서는 안 된다는 경종.
나는 늘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랬기 때문에 적어도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은 내 마음보다 안정된 것들을 선호하고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안한 폭발이란…….
그것이 그토록 새로운 사물로 표현된 것은 아마도 내게 돈이 생겼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돈이 들어오는 대로 그냥 통장에 넣어놓고 있었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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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고 L선생님은 놀라워하셨지요. 10만 원 하던 에스프리의 원피스를 덜덜 떨면서 사는 나를 보고……. 그래요, 내게 돈은 그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빚을 얻지 않고 오늘 원고를 써서 오늘의 양식을 얻어야 했던 그 절박함이 없어진 것만이 감사한 일이었으니까요.
결코 돈 때문에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그러니까 10만 원, 20만 원 하는 사보의 글이나 쓸데없는 콩트 따위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이 내게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행히도 그때 그 경종을 울려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거의 벼랑 끝으로 몰려가 있었구나 하고.
■ 예전처럼 흔들리지 않고
L 선생님께.
지금은 저녁 6시 반. 보내주신 팩스 잘 받았습니다. 저녁을 도시락으로 해결하고 막 설거지를 하던 참이었어요. 초밥이 먹고 싶어서 슈퍼마켓에 가서 도시락을 사오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는 우리동네 풍경이 하도 좋아서 그만 마음이 헤헤 풀어진 바람에 오늘은 선생님의 팩스를 받고 울지는 않았어요.
선생님은 제게 말씀하셨지요. 어떻게 살 것인지 그것은 전적으로 저의 결정이라고요 다만 네가 상하지 않고 네가 건강하다면 무엇이든 괜찮다고 말입니다.
건강하려고 합니다. 그럴 자신이 있다고 지금 말한다면 선생님은 아직 믿지 않으시겠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또 말씀드려보려고 합니다.
선생님, 이제는 조금 자신이 생기는 것 같아요, 하고 말이지요.
선생님 이 팩스 받으시는 땐 아침이겠네요. 어떤 아침일까요? 사실 우리들에게 아침의 빛깔은 매일매일 달랐고, 우린 그것을 나누었는데요. 내일 일본에는 비 소식이 있어요. 일본이라는 나라, 생각보다 참 스산하네요.
선생님, 다시 만나 뵐 때까지 건강하시고 강릉에도 한 번 다녀오시고 멋진 봄날, 마흔 아홉의 봄날 보내세요. 또 소식 주세요.
■ 하나를 얻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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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저녁입니다. 그제는 32도까지 올라가는 기온이었습니다. 마치 여름이라도 된 듯이 긴 팔이 덥게 느껴지더니 어제는 또 흐리고 음산한 날씨였습니다. 혼자서 큰맘 먹고 일본에 도착한 이래로 처음 지하로 들어가지 않는 기차를 타고 신궁이라는 곳을 찾아갔더랬습니다. 음산한 토요일, 긴장되고 설레는 마음으로 열차를 기다리며 플랫폼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무어라 이야기 할 수 없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뭐랄까. 여행자의 기분 같은 것, 미지의 곳으로 떠나는 자의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그런 기분을 느끼면서 문득 아아 이것이 내 본래의 모습은 아닐까. 혼자 날 내버려두는 것을 그렇게 견딜 수 없어 하던 나였지만 어느덧 나는 이렇게 혼자인 것, 혼자서 용감하게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보는 것. 이것이 본래의 내 모습은 아닐까하고 느꼈습니다.
무시무시하게 무성한 나무들이 우거진 신궁 길을 걸으면서 음산하고 쓸쓸했던 기분. 이상한 일입니다만, 나는 이 일본에서 전혀 이국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종교는 막강한 힘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아요. 일본에 와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서울 우리 집 베란다에서 내다보며 세어봤을 때 16개나 되던 십자가들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까. 어쨌든 신궁에는 토요일이라 그랬는지 갓 태어난 아이들을 안고 부부들이 걷고 있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저들은 신궁에 참배하는 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신궁의 팻말을 살펴보았지요.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기반이 그러하듯 신궁도 상업화 되어 있었습니다. 간판을 보니, 대학 합격 기도에 얼마, 아이 태어난 것 축하에 얼마……. 교통사고 부적이니, 가정의 안녕을 위한 부적이니, 아예 정찰제이더군요. 5천 엔, 6만 엔이라고 붙은 정찰제 팻말을 바라보며 혼자 가만히 웃었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걸로 얻을 수만 있다면 얼마어치의 돈인들 지불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오늘은 하도 글이 풀리지 않아서 슈퍼마켓에 다녀오는 길에 가지 않았던 길로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가보았습니다. 일본의 미덕 중의 하나는 어떤 집의 담장에도 꽃들이 피어 있다는 것입니다. 담벼락 밑의 그 좁은 틈새, 흙이 없으면 플라스틱이나 스티로폼 화분에도 꽃들은 피어 있습니다.
저녁 무렵 자전거를 타고 슈퍼마켓에 가는 길이면 물뿌리개를 들고 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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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 있는 할머니를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피어난 꽃들 덕분에 이 도시는 삭막하지 않고 골목길들은 풍부한 표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가 본 그 거리에서는 벌써 장미가 어린아이 얼굴만 하게 피어나 있더군요. 훈제 연어에 크림소스를 듬뿍 얹은 것 같은 빛깔이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나도 모르게 아, 하는 생각을 했지요. 누군지 모르지만 저 장미를 심은 자에게 축복이 있기를,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때로 아무 것도 아닌 행동이 그 곁을 지나가는 나 같은 이방인의 쓸쓸함을 덜어줄 수도 있다는 사실, 그 장미를 심고 물을 준 사람은 이 생에서는 나와 결코 인사를 나눌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이미 그렇게 만난 것입니다.
삶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토록 행복하고 싶었지요. 그토록 사랑받고 싶었지요. 그토록이나 평화롭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없었고 사랑받을 수 없었음을, 그래서 마음의 평화는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음을 이제 깨닫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내가 그토록 바라던 평화가 조금은 깃들어 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는 길에 다시 한 번 그 장미를 보러 갔습니다. 중간 크기의 전형적인 일본 목조 주택, 문패에 스즈키라는 성이 붙어 있더군요. 그래서 나는 스즈키라는 이름을 기억했습니다. 저 장미를 심은 사람이 스즈키 씨이든, 스즈키 씨 부인이든, 그도 아니면 이미 작고한 스즈키 1세든 그들은 나와 만난 것입니다. 어쩌면 내일부터 매일 저녁 어스름에 저녁 식사를 사러 가면서 그 장미를 보러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만개한 그 장미가 이제 지는 일만 남았겠군요.
■ <조용한 생활>을 읽는 밤
가끔 멍청한 내 머릿속에서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폭탄처럼 터져 나옵니다. 미처 글을 쓸 사이도 없이 누구에게 설명할 사이도 없이. 그러면 이렇게 가끔씩 나는 글을 쓰기도 하지만 생각의 잔해를 주워 담기에 바쁠 뿐입니다.
어젯밤 잠이 오지 않아서 오에 겐자부로의 <조용한 생활>을 다 읽었습니다. 그의 글 속에서 나는 가끔씩 북받치는 듯한 어떤 감동을 읽었습니다.
그 책의 초반에 나오는 대학 4학년짜리 정 많고 영리한 소녀 -대학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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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소녀라고 하기에는 좀 뭣하지만 왠지 그녀의 인상은 계속 소녀로 남아 있습니다- 의 진술이 내내 마음에 남았습니다.
지적 장애아 오빠를 수발하며 이 소녀는 어머니의 호들갑과 절망을 바라보면서 이야기 합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눈앞이 캄캄해도, 힘을 내서 나아가면 되잖아! 하고.
33년 4개월을 살아온 지금 나는 생각합니다. 정말 그러면 되는 걸까 하고.
식민지의 여파는 일본에 도착한 이래 일본인들과 말을 나누어야 하는 순간에 내 마음속에서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습니다. 이 묘한 위축감들, 처음에 여기 도착해 느낀 나의 위축들, 중국인이냐고 묻는 택시 운전사에게 아니요. 한국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했을 때 그의 실망스럽고 퉁명스러운 반응에도 나는 위축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대해 내가 가졌던 좋은 이미지들은 이곳에 와서 지내는 동안 산산이 사라져 버렸지만 그 위축감은 남아서 나를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 이것은 길고 무서운 역사이구나. 선조들의 패배는 결코 선조들만의 패배는 아니었구나. 그러므로 역사는 무서운 것이구나 하고.
만일 이곳이 미국이었다면, 그리고 프랑스나 스위스였다면 그들에게 한국인이란 그저 극동에 있는 한 나라일 뿐이고, 그저 노란 얼굴의 사람일 뿐이니까요. 같은 동양인 필리핀이나 중국에 갔을 때의 느낌도 그랬습니다. 저는 그저 한국이라는 나라의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곳에서 한국인이라는 말은 그저 외국인이라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본인이라는 말이 그저 외국인이라는 말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저 역시 홍콩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판하려고 드니까요.
윤동주의 시 <쉽게 씌어진 시>를 좋아했습니다. 그가 유학시절에 쓴 시라고 했지요. 그 시에 나오는 것처럼 내가 사는 방도 6조 다다미 방입니다. 여기 6조 다다미 방에서 나는 새삼 그 시인을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그의 시를 베껴 쓰면서 한국 말로는 ‘첩’이라고 읽고 일본 말로는 ‘조’라고 읽는 그 한자의 의미를 도무지 몰라 답답했던 그 신정이 내게서 선명하게 살아오는 것입니다.
말이 너무 심각해졌습니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요. 어제는 밤에 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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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한국 식당에서 김밥하고 순대를 사왔습니다. 순대는 그저 그런 순대였고 문제는 김밥이었습니다. 그 김밥은 가짜 소시지와 단무지만으로 만들어 깨소금을 촌스럽게 뿌린 것이었는데- 가짜 소시지는 대체 어디서 났을까요? 일본은 훈제 음식이 발달한 편이라 소시지도 아주 맛있는데요- 우습게도 고향의 맛이었어요!
초밥이 그토록 맛있는 이 일본에서 그 가짜 소시지와 단무지를 넣은 김밥을 먹으면서 언니와 나는 즐거워했지요. 고향이란 이런 곳인가요?
■ 이제 모든 것이 추억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오사카를 떠나기 위해 사촌언니의 집에서 짐을 쌌습니다. 그러자 하루가 남더군요. H백화점에 들러 선물을 고르다가 문구점 앞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조카에게 줄 선물을 샀습니다. 48색의 사인펜을 골랐지요. 도회에서 자란 내게 색연필이라든가 크레파스라는 이름은 농촌에서 자란 이들에게 수수깡이라든가 잠자리가 주는 기억과 같은 무게를 가질지도 모릅니다. 나는 크레파스라는 이 이국의 단어를 그저 무심히 생각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내 어린 날을 채색했던 하나의 뉘앙스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필통을 몇 개 골랐습니다. 산요사에서 나온 필통에는 여전히 고양이 키티가 웃고 있더군요. 초등하교 2학년 때였던가. 아버지가 도쿄에 다녀오시면서 내게 빨간색의 필통을 사다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필통에서 나는 고양이 키티를 처음 만났습니다. 귀여운 고양이 였지요.
그 필통 속에 들어 있었던 지우게 속에서도 키티는 웃고 있었지요. 반 아이들이 일제 필통을 가지고 다니는 나를 구경 오던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가 사다주셨던 핑크색 바바리와 디즈니 시계, 그리고 롤러스케이트, 그런 신기한 이국의 물건들로 나는 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었댔습니다. 행복했느냐구요. 글쎄요. 그것은 나를 행복하게도 만들었지만 불행하게 도 만들었던 것만 같습니다.
나는 그날 저녁 혼자서 그 도시를 떠났습니다. 안개처럼 가는 비가 뿌리고 있는 저녁이었습니다. 밖으로 나와 열쇠로 현관문을 채우고 그 열쇠를 다시 신문이 들어오는 작은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지요. 쨍그랑 하고 열쇄가 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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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 내리는 소리가 오래 내 귓가에 남았습니다. 이제 저 문은 내게서 영원히 닫혀진 것입니다. 아마도 내가 어느 날 다시 사촌 언니를 방문하기 전까지 저곳은 나의 공간이 아니겠지요.
이제 저 문 안으로 나는 들어가지 못하겠지만 기억들은 남아서 가끔씩 나를 저 문 안으로 안내해 주겠지요.
■ 처음으로 혼자인 이 시간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본에서 바라보는 마지막 비가 될 것 같은 예감입니다.
전화로 비행기를 예약하고 낮에는 비 내리는 이 도시의 나고야 성을 돌아보았지요.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계속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은 그저 훌륭할 뿐이었지요. 이제 모래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두 달간……. 생각해 보면 조용한 여행이었습니다. 나를 힘들게 만들고 그래서 나를 더욱 자라게 만들었던 여행이었지요. 어느덧 익숙해져서 간간이 뜻을 알아듣는 TV를 켜 놓았습니다. 흰 요리 모자를 쓰고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 맛있다는 뜻의 “오이시이”를 연발하는 TV를 켜놓고 이 글을 씁니다. 이곳은 나고야 성을 정원처럼 바라보는 호텔입니다.
며칠간 혼자서 여행하면서 정말이지 거의 평생 처음으로 오로지 혼자라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내 살점을 거기 둔 채로 떼어내고 온 듯한 이별의 기억들도 아득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내 방에서 바라보는 저 도시의 불빛들은 왜 그렇게 어두울까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나에게만 의지하면서, 나 자신을 믿고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지요. 죽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는 것은 아직도 나 자신에게 삶의 희망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요.
저 건물의 옥상위에도 자잘자잘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일본은 매우(梅雨)그러니까 장마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래요. 시작되어야겠지요. 그것이 시작되어야 한다면 말이지요. 저는 <조용한 생활>에 나오는 마짱의 말을 기억했습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눈앞이 캄캄해도, 힘을 내서 나아가면 되잖아 그러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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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우(梅雨) : 매실이 익어가는 계절에 내리는 비, 장마를 뜻함
* <조용한 생활> : 일본의 드라마 제목, 선천성 뇌장애아를 가진 가족의
감동적인 이야기
■ 내가 사랑이라고 이름 불러주었던 집착을 이제 떠납니다
이제 여행을 마칩니다. 헤어짐은 헤어짐이 아니더군요. 침묵은 침묵이 아니며, 말은 말이 아니더군요. 그 동안의 나는 침묵은 그저 무일 뿐, 아무것도 전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얼마나 초조한 나날들을 보냈는지요. 헤어짐은 내 살점을 찢어내는 것처럼 느껴졌지요.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그토록 뱉어놓고 부끄러움 때문에 거리를 걸으면서 토할 것만 같은 시간들도 지나갔습니다.
아아 나는 드디어 변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남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변화를 이토록 비싼 대가를 치러서 얻어내는 것이 서글프지만, 대가를 치르고도 변화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은 거라고 특유의 낙관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요 나는 아마도 이 시간들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비로소,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로소 혼자 있는 이 시간 누구의 시선, 누구에 대한 기다림, 누구와의 끈도 없이 이토록 온전히 혼자였던 지금 이 시간……. 내가 사랑이라고 이름 불러주었던 집착으로부터도 이제 나는 떠납니다. 끝이라고 믿어왔던 그 수많은 모퉁이들을 돌아 앞으로 걸어갑니다. 글쎄요, 나는 감히 예감했습니다. 아마도 먼 훗날 이날을 기억하며 글을 쓰리라. 그것은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하나의 봉우리 같은 시간이었다고 …….
이 세상에 발을 디딘지 33년 4개월이 지나고서 처음으로 나는 내 인생의 한 시간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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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를 꿈꾸게 하는 그날의 삽화
■ 아직 나를 꿈꾸게 하는 그날의 삽화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사항이 내게는 몇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주거에 대한 희망 사항이다. 서울 토박이로, 그것도 열 살이 채 못 된 나이부터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 자란 내게는 이상한 꿈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텃밭이 있고 대숲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진돗개 두 마리와 삽살개 두 마리, 거위 세 마리, 그리고 다리가 통통한 암탉과 긴 목이 아름다운 한국 수탉을 키우면서 말이다. 상추와 토마토, 고추와 가지 그리고 딸기와 호박 덩굴, 매화나무와 감나무, 살구나무, 대추나무 그리고 바람과 비에 예민하게 떨리는 파초 이파리, 때로는 이런 공상 속에서 밤을 새우는 일도 있었다.
내가 한때 이런 나의 공상을 피력하자마자 어머니는 대번에 면박을 주셨다. 대체 그런 게 얼마나 지저분한지 아느냐고, 닭똥과 개털과 먼지와 흙으로 범벅이 된 마당을 생각해보라고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도 모르는 것이 있다. 바로 이런 공상을 심어준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아파트로 이사하기 전, 그러니까 여덟 살 이전 무렵의 어떤 여름날의 삽화가 내게는 있다. 대청마루로는 솔바람이 불어오고 나는 어머니가 마악 햇볕에서 마루로 걷어 놓은 뽀송뽀송한 솜이불에 누워 있었다. 햇볕은 뜨거웠지만 솜이불에서 내게 전해져 오는 그 열기는 뭐라 설명할 수 없이 상큼한 것이었다. 그 건조하고 까실까실하고 따끈한 쾌적함.
아직 ‘깨끗하게’ 시멘트를 바르지 못한 한옥 마당은 서늘한 물기가 뿌려져 있고, 그리고 아랫집 사과나무에서 매미가 울고 있었다. 빨래가 나부끼는 마당의 풍경너머 피어오르던 뭉게구름과 빛나는 검자줏빛으로 윤이 나던 장독대들, 마당 한구석 펌프가의 커다란 함지박 속에는 할머니가 사 오신 수박이나 참외가 둥둥 떠 있곤 했다.
대청마루에서 나도 모르게 눈을 감으면 매미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풀을 먹이며 주고받는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고 다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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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돌 소리가 말어졌다 가까워지고 문득 눈을 떠보면 벌써 푸르스름한 여름 저녁이 마당에 내리고 고소하게 갈치 굽는 냄새가 피어나곤 했다.
만일 그 여름날의 삽화가 내게 없었다면 내 인생은 결단코 달라졌을 거라고. 그러니 나의 아이들에게 대청마루와 뽀송뽀송한 풀을 먹인 이불과 나팔꽃과 분꽃을, 삭막한 시멘트 광장 가득 불쾌하게 달아오르는 아파트 단지의 여름날 말고, 내 기억 속에 남아 아직도 나를 꿈꾸게 하는 그런 여름날의 기억을 꼭 물려주고 싶다고 말이다.
■ 나뭇잎이 진 자리
나는 나무를 참 좋아하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한여름, 하늘은 높고 맑은데 뭉게구름이 떠 있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 햇빛에 반짝이며 팔랑거리는 나무 이파리들을 사랑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힘들거나 괴로울 때 그런 이파리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그래도 아름답고 살만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저 나무 이파리들이 팔랑거리는 것만큼 나도 움직이면서 반짝이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 하지만 나무에게서 배울 것은 그것 뿐만은 아닌 것 같다.
8월이 넘어서면서부터 바람이 달라진다. 습하고 무더운 바람이 건조하고 까슬까슬한 바람으로 바뀐다 싶으면 어느 새 가을인 것이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는 가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것은 겨울에 대한, 그러니까 추위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추위를 몹시 타는 편인 나는 어렸을 때 엄마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옷도 없고 집도 없이 꼼짝없이 추위에 떠는 나무를 보면서 내가 나무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추위에 대한 공포는 사실 체감하는 온도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겨울날 형제들 하고 아랫목에 둘러앉아서 다리를 길게 뻗고 노레를 부르며 날고구마를 깎아 먹던 기억이나 김장김치를 퍼다가 길게 찢어 먹으며 끓여먹던 라면, 그도 아니면 눈이 펑펑 쏟아지는 거리에서 연인과 손을 처음 잡던 날의 기억들은 춥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추위에 대해 가지는 공포는 사실은 가난과 쓸쓸함에 대한 공포인지도 모르겠다. 돈은 떨어지는데 전화해볼 그리운 이름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 때, 불 꺼진 방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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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찬밥을 데워 먹어본 사람만이 아는 쓸쓸함.
누군가 사람은 병들어 죽는 게 아니고 외로움에 절어 죽어가는 거라고 말했지만 쓸쓸함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병이라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꾸하게 된다.
그러던 요즘 한 시골 농부가 쓴 수필을 읽게 되었다. 그분 역시 나에 비할 수도 없이 나무를 사랑하고 아끼시는 분인데 그분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가을의 나무는 길 떠나는 성인처럼 모든 것을 떨구어버립니다. 험한 길 가는데 부차적인 것들은 버리는 거지요. 요즘 사람들은 버리려고 하지 않는 게 탈이 아닐까요.”
뭐랄까.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봄과 여름 내내 열심히 피워낸 것들을 버리는 것조차 성인의 길 떠남으로 비유하는 그 혜안은 결코 나이에서 오는 것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많이 아프고 많이 생각하고 그러고 나서 관조의 눈을 얻어낸 한 인간의 담담한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무는 끊임없이 버림으로서 새 잎을 얻는 것이다.
버림은 혹은 떠나보냄은 진정한 얻음이요. 만남의 시작이라고 믿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년 봄 저 잎 지는 자리에 새로 돋는 연한 이파리는 아마도 내가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 보는 듯 한 눈부심과 신선함을 내게 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내게 가을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 늙은 밤나무
환갑이 훨씬 넘으신 한 선배 작가 분은 이렇게 더운 여름은 난생 처음이라고 하셨댔다. 예순이 넘으신 분에게 그런 여름이었으니 1994년의 여름은 서른이 겨우 넘은 내게 너무나 괴로웠던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오죽하면 나는 열대 지방에서 왜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는지 이해했고, 그들이 왜 게으르게 낮잠을 자는지에 대해서 고개를 일백 번이라도 끄덕여줄 수 있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먼 유리창 빛이 투명해 지면서 우리 집 베란다 너머로 하늘이 푸르게 열렸을 때, 내가 맨 먼저 느낀 것은 뜻밖에도 울컥 치미는 배신감 같은 것이었다. 뽀송뽀송한 두 팔을 자꾸 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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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언제나 땀으로 끈적거렸던 이마도 만져보고 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렇게 서늘해질걸 그렇게 뜨거웠던가 하는 원망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가을이 오면서 내게 새로이 느껴졌던 것은 비단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뿐만은 아니었다. 새삼스레 새로운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뭇잎이 사각거리는 소리, 포도알처럼 빽빽이 달린 대추가 대추나무 가지에서 흔들리는 소리, 그건 무덥고 습하고 뜨겁기만 하던 여름 속에서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오후 집 앞에서 부대끼는 무성한 나무 이파리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새삼 그걸 깨달았다.
지난여름은 소리로 느끼기에는 너무 잔인했다. 하지만 이 가을 밤 나는 문득 귀를 기울이고 푸른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군청색으로 변하는 그 순간들의 소리조차 들을 것만 같다. 그만큼 내 마음이 고요해졌다는 이야기일까.
아아, 어쩌면 이제 모두 버릴 시간은 아닐까. 어쭙잖게 얻은 것들, 다 내 뜻은 아니었지만, 얼결에 얻은 것들, 다 으깨어지더라도 한 번쯤 살아온 모든 시간들을 다 내던지고 새로이 시작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런 날이면 침대맡에서 등불처럼 빛이 나는 스탠드를 잠시 끄고서 나는 오래 잠들지 못한다. 가을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무책임하지만 실은 가을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반복될 가을이기 때문에 나는 잠시 내 삶의 지나감을, 지나가고 다시 오지 않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욕심 많은 내 생, 그 지나가고 있는 내 생의 한밤중을.
지난번 괴산 매산지 물가에서 하늘을 보았다. 별들은 작고 먼 등불처럼 하늘에 매달려 있었다. 은하수가 흐르던 그 군청색의 밤하늘.
반딧불이들이 가끔 별빛처럼 날아들고 무더기무더기 들국화가 서리를 맞고 있던 그 호숫가에서 나는 무심하고 담담하며 당당하게 살아가자고 다짐했지만 서울로 돌아오고 난 후 그 다짐을 잊고 말았다. 하지만 다시 기을이고 이제 나는 그때의 다짐을 다시 떠올려본다.
■ 자연 속에서는 늙어가는 것도 자연스럽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파트라는 곳에서 살았다. 그 당시 서울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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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아파트 단지라는 것이 거의 없던 때였는데도 서울 토박이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무 거리낌 없이 아파트라는 생활 수단을 선택하셨던 것이다.
내가 아파트를 떠난 것은 최근의 일이었는데, 작지만 혼자 방을 얻을 수 있는 돈과 자유가 허락되자 나는 미련 없이 아파트 아닌 곳을 선택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드는 생각은 사람이 장말 사람답게 사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흙과 더불어 살아야 할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얼마 전 이곳 수유리 국립공원 산기슭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더욱 분명해졌는데, 가끔 평일 낮에 혼자서 산을 오르다보면 할머니들이 혹은 할아버지들이 천천히 산을 오르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이곳의 할머니들이 혹은 할아버지들이 파고다 공원이나 시내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노인들과는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이 다른지, 그 정체를 그 당시로서는 딱히 꼬집어 낼 수 없었다.
어쨌든 세 들어 사는 연립주택에는 주인의 배려로 인해 뒤뜰에 조그마한 텃밭까지 얻게 되어 나는 서울 토박이치고는 기이하게도 흙을 일구어 내는 기쁨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진기한 기쁨을 맛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흙에서 어떤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갈등 없이 그 향내를 들이켰다. 나는 시골에서 살아본 일도 없으니 그건 향수랄 수도 없었을 거고, 그러면 무엇이었을까. 땀을 흘리던 나를 감동시켰던 그 향기는.
나는 호박과 표주박 그리고 열무씨와 과꽃을 내 마음대로 배치해 보았다. 날마다 물을 주고 녹차를 마신 찌꺼기를 모았다가 그 물과 함께 텃밭에 뿌렸다. 싹이 나오기까지 그 초조한 기다림이라니. 어느 날 푸릇한 작은 점이 흙속에서 보였다. 나는 잠까지 설쳐가며 그 싹들을 기다렸다. 내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는지 싹이 트는 거였다. 그 싹들은 생명에 충만한 머리를 들고 지상으로 몸을 내 미는 것이 아닌가.
수유리로 이사 온 후, 나는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해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번은 꽃망울이 터지던 어느 봄날 오후, 한 손에 지팡이를 그리고 한 손엔 작은 약수 통을 들고 있는 노인은 나를 열 걸음쯤 앞서 걸어가다가 걸음을 멈추어 섰다. 우리 동네 어느 집 담장에서 골목으로 삐져나온 수양 벚나무의 늘어진 가지마다 피어난 벚꽃을 바라보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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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인은 터져 나오는 그 꽃망울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노인이 터져 나오는 그 꽃망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그건 아마도 생명에 대한 경이였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꽃이 가지를 뚫고 터져 나온다는 것은 겨울을 견디고 봄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 마치 기독교의 창조주가 이 세상을 창조하고는 바라보기에 좋았다는 것과 같았을 그 생각. 나는 북한 산 기슭에서 만난 할머니들에게서 내가 받은 느낌이 어떤 것이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나는 수유리가, 아직 동네 개들이 어슬렁어슬렁 짝을 찾아 돌아다니고, 소나무가 골목에 서서 한 때는 이곳이 그저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산이었음을 말해주는 이 수유리가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내 아파트 생활 20여 년 동안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언어였다.
■ 자기가 아궁이인 줄 모르는 아궁이
일전에 한 선배가 노후를 보내기 위해 장만한 시골집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그곳에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그 집에서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를 발견했다. 곁에 있는 시골집들이 기름보일러로 난방 형태를 바꾸고 있었지만 선배는 불을 때는 일이 좋아서 그저 재래식 아궁이를 고집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여름이었지만 산골이었고 한기는 금세 우리를 떨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엌 바닥에 널빤지를 하나씩 가져다 놓고 불을 때기 시작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 재래식 집에는 아궁이가 둘 있었다. S와 나는 자연스레 아궁이를 하나씩 맡았다. 그런데 운이 나쁘게도 내가 맡은 그 아궁이에는 불이 들지 않는다고 선배가 걱정스레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기세 좋게 타오르는 불 앞에 앉아 있는 친구 S가 부러워서 나는 불을 때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불을 때는 일은 나로서는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나는 도회에서 자란 사람이었고, 이런 아궁이를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시절의 수련회 때뿐이었지만 그나마 이런 일은 언제나 남자 선배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이 아궁이에는 불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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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앞에서 거의 초주검이 된 나를 보고 선배는 웃고 있었다.
“그만 포기해라. 그 아궁이는 지가 아궁이인 줄 잊어버렸어. 너무 오래 불을 때지 않았거든, 동네 아주머니들도 포기한 아궁이라니깐.”
초짜인 주제에 너무 오기였을까. 나는 혼자서 이 아궁이가 아궁이인 줄을 알게 해주고 말겠노라 결심했다. 그리고 연기를 뒤집어쓴 채로 눈물 콧물 흘리며 꺼져가는 그 아궁이에 불을 하염없이 들이 밀어댔다. 괜스레 비장한 표정으로 열중하고 있던 내가 안됐던지 선배가 다시 거들었다. 그리고 선배의 말대로 꺼질 줄 알면서 불붙은 장작을 S에게 빌려 들이대기를 한 세 시간쯤, 드디어 불이 붙었고, 나중에는 S의 아궁이에서보다 더한 기세로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궁이는 드디어 아궁이 노릇을 하게 된 것이었다.
언젠가 나와 친한 선배가, 내가 유명해지고 나서 나와 친해진 것을 후회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선배의 말을 그 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명해지든 말든 나는 난데 그게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야 하는 생각에서였다. 소설가 공지영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를 받아간 자리에서 말다툼을 벌인 일도 있었다. 객관적으로 살펴보자면 그쪽에서 충분히 내게 무례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나중에 그곳을 빠져 나왔을 때 한 사람이 내게 비난하듯 말했다. 지켜보는 눈이 있어. 그걸 의식해서 대충마무리를 지어야지. 나는 그것이 도통 억울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어디 서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올바른 삶을 사는 기초가 된다고 내가 존경하는 정신 분석의는 말하곤 했다.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는 데는 언제나 고통이 따른다고, 하지만 그 현실을 정확히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나는 그 의미를 그제야 조금씩 감지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산다는 것은, 그것도 잘 산다는 것은, 전적인 사로잡힘과 전적인 무시가 아닌, 그 사이의 적당한, 차마 말로는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선택의 연속이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언젠가 어느 책에서 안다는 것과 깨닫는 것과의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한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안다는 것과 깨달음의 차이는 그것이 아픔을 동반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이다. 만일 당신이 어떤 사실을 아는 데 있어서 아
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이 깨달은 것이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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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이 아니면서 움직이는 것들, 그것이 우리들을 깨달음의 길로 자주 인도한다고 S는 말하곤 했다. 흐르는 강물이 그렇고, 파도치는 바다가 그렇고, 하늘의 구름 혹은 바람들, 이제 생물이 아니면서 생물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이 불길 앞에서,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자기가 아궁이인 줄 깨달은 아궁이 앞에서 우리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가 가장 자기다울 때 인간은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이다.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야옹거린다면, 진돗개가 치와와처럼 응석을 부린다면, 망아지가 강아지처럼 주인에게 달려든다면……. 우리들은 밤시 참묵했다. 우리도 우리가 누구인 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우리 자신들에게 가장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안 까닭이었다.
■ 내게 온 부처
나는 내가 공자의 자손이라는 게 몹시 싫었다. 아버지도 그러하셨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어린 나를 야단치실 때마다 그야말로 공자 왈 맹자 왈 하셨던 것이다. 예를 들어 밥상에서 말을 많이 하지 말라든가. 여자는 말처럼 뛰어 놀면 안된다든가 하는 꾸중을 들을 때마다 어김없이 공자의 78대 손이라는 말이 튀어 나왔으니 내가 공자라는 세계가 인정하는 성인을 감히 싫어했던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자라면서 여자라는 이유로 여러 가지 제약을 받을 때마다 나는 엉뚱하게도 공자라는 사람은 왜 왈, 왈, 해서 나는 못살게 구는지 생각했고 더불어 유교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리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논어>를 읽게 되었는데,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다 덮을 때까지, 그리고 덮고 나서는 더욱, 나의 어리석음과 무지와 오만에 대해, 내가 마치 살아있는 공자 앞에서 심하게 화를 낸 경험이라도 있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할아버지의 밥상머리에서 듣던 공자와 내가 <논어>에서 읽은 공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부끄럽게도 불교에 대해서 내가 가졌던 생각들도 그런 것의 하나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가 모두 기독교 계통의 학교였으니 내게 불교란 할머니나 어머니 그리고 외할머니의 종교일 뿐이었고, 그나마 사상적으로 불교라는 것에 접근해볼 엄두를 내기도 전에 나의 대학생활은 최루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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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져 버렸다. 더구나 나의 친한 친구중의 하나가 불교에 관심을 가진 아이였는데 그 애는 언제나 최루탄에 범벅이 된 나를 보고는, “그래도 모든 것이 공이야. 결국은 무로 돌아가는 거라구” 라며 비웃었으니 공자와 마찬가지로 내가 석가라는 그 훌륭한 성인을 달가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성당에 다녔던 내게서 이미 신도 떠나가버린 뒤였고, 과학과 신념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던 80년대의 꿈도 사라진 듯 보였을 때였다. 바로 그때 나는 불교를 만나게 되었다.
그저 불교에 관심이 있다고만 하는 사람 좋은 선배를 통해 나는 먼저 불교에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씩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하면서 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불교는 나를 비웃던 친구가 말하던 그런 종교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내게 주기 위해 부적을 만들어 는 그런 종교도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친구의 부처님과 어머니의 부처님은 누구란 말인가.
나는 점차로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통을 정직하게 바라보며 담담하게 견디는 법을 불교를 통해서 배우게 되었는데. 어느 날 시장에 갔다가 거지에게 무심히 돈을 놓아주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10년 만의 일이었다.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도 이야기라고 털어놓는 것은 거지에게 동전을 던지는 그 단순한 행동을 내가 10년 동안 하지 않게 된 것에 숨어 있는 나의 의식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두 가지, 하나는 사회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거지에게 동전을 던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때문이요. 둘째는 거리의 걸인 앞에 서서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그것을 내던지는 내 모습을 누가 보면 창피할 것 같다는 해괴망측한 자의식 때문이었다.
어쨌든 나는 불교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어머니와 할머니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천 년을 울려도 맑은 소리가 그치지 않는, 사찰의 종을 만들어 낸 조상들의 예술을 이해하게 되었고, 아직은 모르는 어떤 힘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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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순간에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맘때의 나이면 누구나 그랬듯이 소녀 적의 나는 윤동주의 시집을 늘 끼고 다녔다. 시를 좋아하다보니 어느 날 그의 전기도 구해서 읽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게 인간으로서 차마 그럴 수 없는 생체 실험을 당하고 죽어간 윤동주의 죽음이 그려져 있었다.
안경이 깨어진 채로 - 눈이 나쁜 사람은 안다. 이것의 막중한 의미를! - 알 수 없는 주시를 맞다가 죽어간 그 시인,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이따금 그 생각이 떠오를 때면 이상하게도 쉽게 몸서리가 진정되지가 않았다. 철창 안에서 이름을 불리고 끌려나가 주삿바늘이 제 몸에 닿는 순간까지 깨어 있었을 시인의 의식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멎질 않는 것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 불명확하게 아른거리던 그 공포.
백 번 양보해서 잘못된 역사는 누구를 고문할 수도 있지만, 선량하고 용감했던 사람을 무심히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시인에게만은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나는 혼자 비분강개하며 중얼거리기도 했다. 왜냐하면 시인은 한 나라의 양심의 척도라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돈을 벌지도 못하고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닌, 그저 어쩔 수 없이 시대의 병을 포착하는 그 예민한 사람들을 없애는 것은 사회의 희망을 없애는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 다음에 2부가 이어집니다.
2017.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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