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없는 영혼(2)

2018. 1. 3. 10:19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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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없는 영혼(2)

- 공지영 에세이 -

■ 공지영 지음

■ 꿈을 안고 살 것인가, 희망 없이 죽을 것인가

영화 <쇼생크 탈출>이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한동안 나는 어둠 속에 앉아 있고 싶었다. 글쎄, 이런 종류의 감동을 무어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사실은 영화 중간에 울고 싶기도 했지만 울 기회가 없었던 영화. 영화중간에 잠시 그 감동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감동할 기회를 주지 않고 관객의 목을 조르는 영화, 그랬기 때문에 영화가 끝났을 때 재빨리 밝아지는 극장의 불빛이 못마땅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장점은 사방이 벽과 창살로 이루어진 감옥 안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일상을 모두 상징해내는 데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고 암거래가 이루어지며 사기와 기만, 가진 자들의 횡포, 그 그늘에서 빌붙어 사는 기생충 같은 인간들이 있다. 그런 곳에 인간의 가치를 아는 주인공을 배치해 놓음으로써 긴장은 생겨난다.

감옥에 가서 그곳에 권력을 가지고 남자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등을 구부린 채로 혼자 앉아 있는 주인공이 모습은 오래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 고독과, 그 처절함과, 그 비통함. 남자가, 그러니까 여자가 아니라도 남자들에게 윤간을 당하는 것이 그토록 처절한 폭력이라는 것을 나는 사실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인간이 될 자격이 없는 인간들이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을 폭행하는 감옥, 하지만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생각할 수도 반성할 수도 있는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주인공은 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봄바람이 부는 야외에서 그냥 맥주를 천천히 마실 수 있는 자유, 텅 빈 도서관에 가치 있는 책들이 채워지고 거기서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자유,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오페라 여가수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는 자유가 우리 삶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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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없이 죽기도 꿈을 갖고 살기도 힘든 이 세상에서 나는 생각해 본다. 희망 없이 살 것인가. 아니면 꿈을 가지고 과거의 나 자신을 죽일 것인가.

■ 사랑이 아니었던 것일까요

어제는 작가회의 소설 분과에 갔다가 방향이 같은 K선배와 또 다른 소설 쓰는 K후배와 덕성여대 앞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함께 얼굴을 보고 있었을 뿐 어쩌면 각자 혼자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셨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밤 1시쯤 오랜만에 이사 와서 처음 술에 취해서 돌아왔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까 비가 내리고 있더군요.

그런데 K형 말입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한 10년만 살고 싶다고 하더군요. 언니도 아시다시피 K형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사람이고, 그 각별함 때문에 힘들어 하는 줄 저는 이미 알고 있었거든요. 애정이든 돈이든 그도 아니면 글이든 퍼주기 위해서는 고이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래요 머리를 써야 먹고 사는 사람들은 좀 텅 비어 버리는 시간들을 가지는 일이 필요한가 봅니다.

지난 여름에 불교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생각납니다.

옛날 중국에 한 농부가 살았답니다. 그는 더할 수 없이 선량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위정자들이 전쟁을 일으켰고 그는 전쟁에 끌려 나가서 8년 만에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8년 만에 돌아온 그를 본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거든요. 잘 웃고 선량하고 건강하던 그 농부가 아니었던 겁니다. 아무와도 말을 하지 않고 사람들을 피하고 그렇게 변해 버렸던 겁니다. 전쟁 속에서 그는 무엇을 겪었을까요.

얼마 후 그는 호미를 팽개치고 집 뒤쪽의 대숲에 정자를 짓고 그 속에 들어앉았습니다. 그러고는 8년간을 그저 최소한의 양식으로 연명하면서…….

그리고 8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다시 웃으면서 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화해한 후 입산을 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왜 그 사람의 이야기가 그토록 오래 내 가슴에 남아 있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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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 내려서 - 전 사실 그때 누가 보아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저러다가 쟤 어떻게 되는 건 아닌지 잠이 안 왔다고 어머니가 나중에야 말씀하시더군요. - 택시를 타고 5·16 도로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서울에서는 내내 비가 내리고 있었던 때였는데 제가 타고 가는 택시 창 밖으로 아아, 초여름의 햇살이 부서져 내렸습니다. 저는 창문을 열고 그 햇살을 제 정수리부터 받았습니다.

그래요,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까요. 그 햇살이 소독약처럼 내 살갗에 부어지는 것만 같았다면 맞을까요. 분명 그 여름의 햇살은 따갑고 아팠지만, 그렇지만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상처에 부어지는 소독약처럼 따갑고 감사했다고.

사랑이라는 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하물며 그것이 핏줄을 나눈 부모나 자식 사이도 아닌 생판 딴 데서 자라나 눈 한 번 맞춘 일밖에 없는 남녀 간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신비에 가까운 축복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사랑이라는 것은 참으로 드물더군요. 그것은 사람들이 악해서라기보다는 약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약해서 가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멋지게 속여 넘기는 일도 모르거든요. 사랑은 결코 상처를 주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상처받았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랑하라. 더욱 사랑하라. 만일 이러저러한 금기 때문에 회피한다면 이 땅에는 간음과 불륜만이 남을 것이다 하고. 그리고 현실이 그것을 가로막는다면 그때는 선택하고, 선택했으면 그게 어떤 것이든 나머지 것들을 돌파하라고 말이지요.

■ 내가 너의 휴식이 될 수 있기를

S에게.

폭풍우가 몰아치리라는 예보를 듣고 우리는 제주에 남았다.

급히 잡은 호텔에 여장을 풀고 나는 베란다 문을 열었지. 너에게는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나는 사실 간절한 마음으로 그 폭풍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바람 치는 바다, 미친 듯이 일렁이는 파도와 바람과 나무들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제주에 붙들어 맨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그것은 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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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나는 나처럼 폭풍우 치는 다른 어떤 사물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 방 앞에 있는 간이 의자들이 철거되고 호텔 밖으로 는 절대 출입하지 말라는 경고가 여러 번 되풀이되었다. 나는 혼자 생각했지. 이제 폭풍우가 불어오면 내가 여기 서서 그것을 바라보는 일만 남았겠구나 하는 생각. 나는 소풍을 앞둔 계집아이처럼 설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이 맑게 개어 있더구나. TV를 켜니 폭풍은 한반도를 비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고 했다. 허탈한 마음이 들었어. 모르겠다. 나는 아마도 비바람 치는 벌판에 나를 혼자 버려두고 싶었나 봐.

한때 나는 숫자에 매달린 적이 있었다. 소득수준과 물가지수 혹은 경제학의 여러 지표들, 그때 내가 중산층 가정의 막내딸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누릴 것 가 누려보고 자랐다는 사실 때문에 더할 수 없이 괴로웠단다. 그것은 내 이마에 새겨진 표지 같았지. 말하자면 나는 빼앗은 자의 딸이었다는 괴로움들 때문에 한 시도 편안할 수 없었던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나의 불행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절대로 행복해져서는 안 된다는 굳은 결의도 있었던 것만 같아.

물론 나는 지금도 절대 빈곤이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이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종류의 물질적 풍요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 상처는 관계에서 오는 것이고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니까 말이야. 나는 이제 확신한단다. 어떤 작가의 말처럼 행복한 사람들은 비슷비슷하게 행복하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가지가지로 불행한 법이니까 말이야.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왔다. 내가 벗어버린 무거운 배낭이라는 것은 바로 그 깨달음이었을까.

S야, 너를 보면 나를 보는 것만 같아. 이 연민도 병이라는 것을 내가 알아버린 지 이미 오래지만 그래도 이 밤 나는 폭풍조차 비켜가버린 이 제주 섬 한 귀퉁이에 앉아 생각해 본다.

내가 잠시 동안 만이라도 너의 휴식이 될 수 있기를 ……. 잘 자거라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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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히, 고요하게 가만히

자존심이라는 것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꾸며 내는 것이 아니란다. 그래 갈 테면 가라고, 소중한 것에게 소리치는 것이 아니란다. 자존심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그것을 그대로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이란다. 왜냐하면 네가 원한 것은 그가 떠나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랬을 때 만일 그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러면 정말로 자존심에 심한 상처가 날 것 같아 두려웠다고 너는 말했지. 그러나 E야, 신기하게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거절당해도 결코 상처입지 않는다. 너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은 오직 너 자신뿐이란다. 너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서 결국 그를 떠나보낸 너 자신에게 상처를 입은 것이란다.

가만히 있기로 하자. 그래. 가만히, 고요하게…….

나무들에서 꽃이 피어날 때 , 혹은 이파리가 돋을 때, 그것들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들꽃 하나도 자신의 꽃을 피우기 전에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들꽃이 꽃을 피운다고, 나무가 겨울을 이겨내며 힘들었다고, 지난겨울은 너무 추웠다고 말을 하지는 않지. 신의 섭리에 묵묵한 그들은, 자연의 본성 자체인 그들은 소리 내지 않는다. 모든 창조는 고요한 것이며 그리하여 어느 날 그들을 발견하는 자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들이 밤새 소리 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때로 감동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E야, 제발이지 고요하기로 하자.

너는 상처 입었다고 말했다. 그래 상처받았겠지,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에 있겠니. 랭보의 말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한 인간의 가슴 속을 열어보면 우리는 숯불처럼 아직도 거기서 지글거리고 있는 그 빨간 상처들을 만나게 된단다. 그 상처들을 바라보렴. 모두가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단다. 남자들의 경우는 특히 더 심하지, 다만 그들은 조금 더 조용히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란다. 하지만 섣불리 손을 내밀어서는 안 된다. 그건 서로가 손을 데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지.

E야. 막 서른을 바라보며 이제 그렇게 막 ,생이 두려워진다고 너는 말했지. 그래. 삶은 두려운 것이란다. 하지만 들여다보아야 한다. 깊은 밤중 산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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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무서운 것을 얼핏 보았을 때 그것이 무섭다고 고개를 돌리는 자에게 무서움은 영원한 것이지만 그것을 똑똑히 들여다보면 사실 그것은 나뭇가지이거나 바위이거나 하단다. 두려워하지 마라. 삶은 너를 안전하게 해줄 거야. 다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단다. 자기 자신을 위해 애 쓰는 사람에게만 이라는 단서가 붙는단다. 사실은 이것이 두렵다는 생각을 나는 요즘하고 있단다.

네가 이 힘든 인생의 한 길목을, 누구 때문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을 위해서 부끄럽지 않게 넘기를 기원한다.

4. 내 마음속의 울타리

■ 내 마음속의 울타리

얼마 전 우연히 부부들의 모임에 갔다가 자신의 남편에게 꼬박꼬박 존대어를 쓰는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대개는 남편이 자신보다 좀 나이가 많더라도 얼마간의 세월을 함께 보낸 뒤에는 반말투를 쓰는 게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예사로운 일이기도 해서 나는 그녀에게 무심코 그 이유를 물었다.

“남편이 저보다 나이가 한 살 적어서요.”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연상의 여자와 연하의 남편이라는 사실이 조금 쑥스럽기도 한 듯했다. 처음에 나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아듣게 되었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잠시 후 나로 하여금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만일 남자가 연상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정말 여자가 연상이라는 사실이 존대어를 써야 하는 이유일까. 더구나 그녀의 남편은 아주 편안하게 반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여자가 나이를 먼저 먹는 것도 일방적으로 존대를 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일까.

그무렵 나는 소설가가 된 나를 찾아낸 한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게 되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거의 20여 년 만에 만나게 될 그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아마도 우리는 아홉 살이었을 것이다. 반고수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서 가볍게 나풀거리고 검은 색의 반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흰 반스타킹을 신고 다니던 그는 내가 이 세상에어 태어나 처음으로 어렴풋하게 느껴보던 남성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흰 성적표 꾸러미를 들고 교실로 들어와 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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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지금부터 등수대로 성적표를 나누어 주겠다.”

세상에 태어나 학교를 다닌 지 겨우 1년 남짓 지난 초등학교 2학년생인 우리들이었지만 이미 그런 식의 대우에 익숙해 있었으므로 괴로움을 표시하는 작은 탄성을 질렀을 뿐 얌전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어떤 소년을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는데, 그날 내가 특별하게 느끼던 바로 그가 나보다 한참 뒤에 성적표를 받는 걸 보고 나는 놀랍게도 걱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기보다 더 등수가 높은 여자아이를 그 소년은 분명히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아마도 나중에 우리가 큰 다음에 결혼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무엇이었을까 아홉 살 먹은 나로 하여금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나보다 공부를 못한다는 사실을 두렵게 만들었던 것은 겨우 아홉 살 나던 그해에 나는 여자로서의 내 운명(?)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서른 살이 넘어 마주 앉은 우리는 그날 만난 자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어질 무렵이든가, 이제는 두 아이의 아빠인 그가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아홉 살 때 너를 내가 좋아했던 거 아니? 나보다 공부 잘하는 네가 참 예뻐보였어.”

남편보다 나이가 많아도 죄스럽고, 공부를 잘해도 걱정이고, 함께 일하는 처지에 가사를 분담하자는 생각도 자꾸만 머뭇거려지면서, 걸핏하면 자신의 아내를 때리는 폭력범으로부터 탈출한 것도 인내심의 결여인 것처럼 느껴지는 우리들의 공통점은 어디서 온 것일까.

아이가 울면 배가 고픈가보다 생각한다. 친구가 갑자기 연락을 끊으면 내가 혹시 잘못을 한 건 아닌가 생각한다. 나아가서 당당하게 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그저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 속에 웅크린 채 피해 받는 여성일 뿐이다. 그리고 그저 피해 받는 여성에게 돌아오는 것은 동정심밖에 없다. 우리가 남성들에게 원하는 것은 동정심은 물론 아니다. 그러므로 남성들과 진정한 동료로서 손잡기 위한 첫 발걸음은 우리들 가슴속에 견고하게 둘러쳐진 울타리를 넓히는 일이며, 그도 아니면 부수는 일일 것이다. 아홉 살 먹던 그때부터 울타리는 이미 내 가슴속으로 들어와 있지만 나는 이제야 그것을 뛰어넘어본다.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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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탁 대신 나만의 책상을

얼마 전 친구가 새로 이사 갔다는 아파트를 방문한 일이 있다. 한국에서 결혼을 한 다른 삼십 대처럼 새로 지은 신도시의 ‘32평 형’에 입성한 것도 아니고 그저 열 몇 평짜리 작은 아파트일 따름이었지만 그녀의 기쁨은 누구보다 큰 듯했다. 결혼 9년 동안 일곱 번의 이사를 다닌 끝에 마련한 새집이니 기쁨이 어련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녀의 기쁨은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집에 들어가 별로 둘러보지 않아도 다 보이는 거실이며 부엌을 구경하고 나자 그녀가 내 손을 끌어 당겼다. 따라가 보니 작은 아파트의 한 구석, 다른 사람 같으면 의당 식탁을 놓았을 자리에 놓인 것이 보였다. 낡은 책상이었다. 의아해 하는 내게 친구는 이 집에 이사오면서 무엇보다 남편에게 자신의 책상을 가지겠다고 선언했고, 그래서 남편과 상의 끝에 식탁을 포기하고 책상을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중고 가구점을 사흘이나 헤맨 끝에 골랐다는 그 책상은 낡았지만 튼튼해 보였고, 그 위에는 어려운 살림을 알뜰히 살아내고 난 후 예쁜 식탁보가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아 책상 서랍을 열어 보여주는 그녀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 보였다.

“난 너무나 오래 나를 잊고 살았어. 이젠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거야.”

처음 책상을 가져 본 어린 시절의 기억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위로 나이 차이가 좀 지는 언니와 오빠가 있는 나는 어렸을 때 책상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내게 어머니가 책상을 주셨다. 물론 의자가 딸린 그럴듯한 책상은 언니와 오빠의 차지였고, 내 것은 언니와 오빠가 쓰던 것 중에서 덜 낡은 것이 배당되었다. 낡았지만 새로 니스칠을 한 것이었다.

그 책상이 의자가 딸린 신식 책상으로 변하고, 지금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수수한 책상을 거의 10년 째 써 오고 있다. 다행히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나만의 책상을 한 번도 포기하고 살아본 적이 없기에 나는 결혼과 더불어 자신의 책상을 친정에 놓아두고 떠나온 친구들의 아픔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은 결혼을 하고 거의 10년이 다 되도록 책상 앞에 호젓이 앉아 일기 한 줄 써 볼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새삼 그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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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살아온 힘든 세월이 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그 세월이 주는 타성에 굴복하지 않고 식탁 대신 자기만의 책상을 놓겠다고 선언한 나의 친구, 그로 인해 밥상을 나르는 수고를 도맡게 된 그녀의 남편에게 새삼 뜨거운 우정을 느꼈다.

■ 또 다른 선택

대학 시절에 나에겐 늘 붙어 다니던 네 명의 친구가 있었다. 가끔 생각해 보면 미소를 짓게 하는 그런 친구들이었다. 전공이 같은 것도 아니었는데 도서관이나 문학 동아리에서 서로 알게 된 우리들은 이내 의기투합하여 언제나 함께 붙어 다녔다.

우리는 방학 때 어김없이 배낭을 싸가지고 여행을 떠나 거의 전국을 싸돌아 다녔다. 바다, 산, 그리고 이름 없는 절, 싸구려 여관방의 연탄 화덕이 꺼진 방에서 추위 때문에 오들거리며 떨던 기억들, 그도 아니면 이상한 남자들 때문에 빗장이 허술한 여관방 문 앞에서 한 사람씩 교대로 보초(?)를 서던 무시무시한 밤의 기억들, 학생 신분이니 돈이 넉넉할 리가 없는 터라 서울로 올라오던 버스에서 우리들은 으레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는 휴게소에 내려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그 매점에서 파는 핫도그가 얼마나 먹고 싶던지 그야말로 손가락을 빠는 기분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데 내 옆에 있던 친구 하나가 말했다.

“우리 이담에 돈을 벌면 서울로 올라오는 휴게소에서 저 핫도그를 실컷 먹자.”

지금도 우리는 그 옛날 이야기를 꺼내며 모두 배를 잡고 웃지만 그때는 사실 처량하기도 했다.

우리는 또 금요일 오후에는 남은 오후 수업을 모두 팽개치고 즉석에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마장동에서 버스를 타고 새터로 갔다. 지금은 러브호텔과 레스토랑과 횟집이 즐비한 유흥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먼지 나는 신작로를 따라 한참을 걸으면 강물이 흐르는 방갈로가 있고 우리는 이미 해가 저버린 밤의 강가로 손에 손을 붙들고 나가곤 했다. 우리는 거기서 밤 강물이 어둠 속으로 흘러가는 소리를 들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시집을 가지고 가서 밤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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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하기도 하고 소주도 홀짝거리면 어느새 창밖이 푸르스름했고 우리는 다투어 새벽 강가로 나갔다. 강물은 깨어나 재잘거리며 흘렀다. 강을 지켜본 사람들은 알리라. 아침이면 강물이 어떻게 깨어나는지를.

그 다섯 명 중 넷은 서른이 넘은 지금 모두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고 나머지 한 명은 학교에 남아 강사가 되고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들은 처음에는 기를 쓰고 서너 시간씩 차를 타고 가서 서로의 얼굴을 보았으나 얼마 후 그것마저 무너지고 서로 그저 전화 연락만 하고 지내고 있는 참이다.

잘 있니? 그래, 잘 있어. 애기도 잘 크지? 그래……. 잘 지내라. 그래. 너도 잘 지내라. 친구들을 떠올리면 삼십대 초반의 삶은 우울하기만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친구들은 남편들의 친구들 모임에는 세 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서라도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남편들이 한 때 친구였다는 사실 외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는 여자들이 둘러앉아 남편들의 학창 시절과 군대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가끔 거기에 앉은 여자들끼리 눈을 마주치곤 하는데, 친구들은 거기서 어떤 서글픔을 발견하곤 한다고.

만일 우리들 여자들의 모임에 이런 식으로 남편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들의 옛날 이야기만 한다면 남편들은 어떤 얼굴을 할까 하고 말을 전하며 친구는 웃었다.

■ 아기를 낳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 되도록

지난 가을 아이를 낳고 나서 나는 몹시 멍해졌습니다. 일전에 어느 선배 분에게 내 내장이 무중력 상태의 세계 속으로 온통 떠다니는 것만 같은 기분이라고 말씀 드렸을 때 인생의 선배이시기도 한 그 분은 아이를 낳고 허해졌을 거라고 위로를 해주셨지만 나는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 말을 내 뱉는 순간 나의 입도 어디론가로 둥둥 떠가고 있는 듯한 환상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지요. 새해가 되고 서른 셋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집도 있고 아이도 있고, 그리고 사고 싶었던 전축도 마련해서 스위치만 누르면 언제든 터질 듯한 바이올린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도 책 한 줄 읽지 못하고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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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의 밤을 견딥니다. 아침이 되면 아이의 울음소리에 눈을 뜨게 되리라는 확신이외에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합니다. 이제는 나의 내장뿐 아니라 나의 머리까지 둥둥 떠다닙니다. 세월의 강에 실린 듯 두둥실 달력은 넘어 갑니다. 벌써 2월이니까요

열아홉 살의 가을이 생각납니다. 그때 아버지가 친구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은 망하고, 내 마음을 주었던 단 하나의 친구는 훌쩍 미국으로 유학을 가버리고, 밤마다 내가 열 장도 넘게 편지를 써 보내던 나의 짝사랑 상대는 거짓말쟁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던 무렵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울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열아홉 살이었으니까요 돌아가면 빨간 딱지가 붙은 가구들 사이에 머리를 싸매고 누워서 소녀같이 울고 있는 어머니가 있고, 태평양 건너 먼 미국으로 떠나서 끝도 없는 막막함에 싸여 있는 내 친구의 편지가 있고 파렴치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도망가버린 내 짝사랑이 있고. 나는 그때 보름달 빵을 매점에서 세 개씩이나 사 먹으며 볼이 미어지도록 살이 쪄가던 열아홉 살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그때 생각했습니다. 푸른 이끼가 언뜻언뜻 낀 어느 수돗가에서 세수하다 두고 온 내 손목시계를 찾아오면서 아아. 나는 노래할 거야. 기어이 명랑한 노래를 부르며 살 거야. 라고 다짐했으니까요.

결혼을 할 때 우리는 많은 분들의 축복을 받습니다. 아이를 가질 때마다 여러분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축복의 말씀을 건네 주십니다. 내가 써낸 어떤 창작품보다 진정한 창조의 행위를 하고 있다는 너무나 귀한 말씀들. 하다못해 아이를 가져 부른 배를 안고 시장을 나서면 아주머니들은 상추를 한 줌이라도 더 얹어 주십니다. 그들은 아이를 낳는 일이 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 고통스럽고 또 이 세상 어떤 일보다 귀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아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돌아서면 나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아이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멍해진 친구들, 그들은 아이를 사랑하지만 자신을 사랑하기에 날마다 끝도 없는 갈등에 휘감겨 닫힌 아파트 문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20여 년 동안 받은 교육과 머리 싸매고 공부한 지식들을 다 팽개치고서, 아이가 잠든 어두운 집 귀가가 늦는 남편의 책상 앞에 앉아 때 묻은 책들을 펼쳐보고만 있을망정 그들은 아이들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도무지 어느 곳에 내 아이를 맡겨야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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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할 수 있는지 그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그렇게 귀한 생명을 엄마의 손에만 맡겨 놓은 아버지들을 생각합니다. 그 아버지들에게 육아 휴직조차 주지 않는 사회를 생각합니다.

■ 꿈을 포기하지 말자

일전에 연변에서 온 교포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의 작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었다는 말로 시작된 자리이기에 이야기는 자연히 여성문제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다. 우리들의 질문은 당연히 지금 중국에서의 여성의 지위에 관한 구체적인 상황이었다.

“만일 오후 7시 쯤 여느 가정집 문을 열어본다면 남편이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고 아내가 탁아소에서 막 데려온 아이와 놀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아이란 너무나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엄마는 퇴근 후에 아이에게 온 신경을 쓰곤 하죠. 그러니 상대적으로 남자들이 그 밖의 집안일을 하는 것이지요.”

중국 교포는 남루한 차림에도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 조국이 이렇게 잘 살지요. 자랑스러운 얼굴로 앉아 있는 우리들은 순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중 한 남자가, 정말입니까 물었을 뿐이었으니까. 물론 그 남자는 우울해하는 우리들 여자들의 눈총을 듬뿍 받았지만 말이다.

중국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아이는 여전히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지만 그 중요한 존재를 키우는 어머니에 대한 대우는 정말 다른 것 같았다. 일견 부럽기도 하고 일견 착잡하기도 한 우리들이 표정을 알아챘는지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우리도 아직 멀었어요. 여기까지 오는데 장장 45년이나 걸린걸요. 그것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협력을 해 주었는데도요. 아직도 편견이 남아 있는 분야가 많아요. 예를 들어 현재는 여성의 보다 활발한 정치 진출에 대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지요.”

말이 끝나자마자 ‘너무 소중한 존재’인 아이를 노래방에 맡기고 온 엄마들 몇이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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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는 단지 시작일 뿐이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처럼 분개한 김에 남성들을 쏘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는 것은 너무 허망한 일이며 그것은 바로 여성답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여성들이란 원래 죽을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 생명을 낳도록 만들어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본질은 바로 ‘살림’에 있기 때문이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것이다.

남자들은 생명을 직접 ‘창조할 수 없다’는 데서 여성들에게 영원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다. 남성이 그토록 여성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남성들의 바로 그 콤플렉스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결코 정복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명 창조의 열쇄를 쥐고 있는 ‘영원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여성문제의 심원에 놓인 본질이 아닐까.

■ 내 친구 재희

내 친구 재희는 싸움꾼이다. 서른세 살이 된 지금도 그렇다. 물론 내가 재희를 알게 된 것도 싸움을 통해서였다.

그건 학교 앞으로 가던 붐비던 전철 안에서였다. 어떤 남자 하나가 별로 붐비지도 않는 전철 안에서 내 몸에 자꾸 몸을 기대오는 것이었다. 너무나 불쾌한 생각이 들었지만 뒤로 돌아 그에게 직접 따지기가 두려워 나는 다른 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 남자가 나를 향해 능글맞은 웃음을 띠며 다가오고 있었다. 온몸이 얼어붙는 듯해서 나는 그 자리에 붙박이듯 서 있었다. 더 도망갈 곳도 없는 것 같은 마치 영원한 덫에 걸린 것처럼 나는 질려 있었다.

그때 내 앞에서 재희가 나타났다. 같은 과에서 그저 얼굴이나 익힌 그런 친구였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하는 이상한 결점을 가진 나는 다짜고짜 그녀를 붙들고 나의 사정을 이야기 했다. 하지만 재희 역시 나처럼 그런 상황에서 언제나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여자였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재희는 놀랍게도, 다가와 내 등 뒤로 바짝 다가서는 그 남자를 향해 온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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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사람들이 다 듣도록 소리를 질러댄 것이다. 그 내용이야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를 꾸짖는 내용이었다. 키는 나보다 목 하나나 작을까 말까하는 그녀의 고함에 온 전철 안의 시선이 쏠렸고 나로 말하자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은 깜빡 잊고 그저 창피스러운 기분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마치 지옥의 사자처럼 영원히 악할 것 같은 그 치한은 대체 이 학생들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면서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것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학교 앞 길을 걸으며 내가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몰라 쩔쩔 매자 재희는 그런 감사는 필요 없다면서 내게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한번 맞서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거지?”

한 번은 과천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였다. 퇴근 시간이라 버스는 만원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짜증이 난 운전사는 연신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승객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정거장에서 어떤 할머니기 올라타면서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노인의 구부정하고 느릿한 행동을 향하여 성미 급한 운전사의 짜증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운전사는 바야흐로 화풀이 대상을 만났다는 듯 제 어머니 뻘 되는 그 할머니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그때 재희가 나섰다. 그 운전사가 할머니를 향해 뱉은 것의 거의 스무 배쯤 되게 더 상스럽고 더 모욕적인 욕을 퍼부었다. 나는 재희에게 그렇게 많은 욕을 그렇게 빠르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사실 그때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 욕설을 들은 운전사가 발끈하려 하자 이번에는 승객들이 하나, 둘 나서기 시작했다. 아가씨의 욕설도 좀 심하기는 하지만 운전사가 나쁘다는 쪽이었다. 운전사는 여전히 거칠게 브레이크를 밟아대긴 했지만 기세가 한 풀 꺾인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버스에서 내린 후 내가 물었다. 어쩌면 그렇게 많은 욕을 그렇게 잘 하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재희가 대답했다.

“어머, 그랬어? 난 내가 무슨 소릴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5. 소설을 쓰고 싶은 그대에게

■ 함께 일 수 없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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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신문사 기자와 아현동 가스 폭발 현장에 간 일이 있었다. 굳이 그곳에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제의를 내가 마다하지 않은 것은 그러니까 그곳이 나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 잘못 따라왔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그곳을 떠난 후 언제나 그곳을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그 후로 다시는 그곳을 찾아가지 않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원래 그곳은 빈민촌이었다. 그 구불구불한 골목길에서 프릴 달린 원피스를 입고 피아노 가방을 들고 걸어가던 내 모습이, 그럴 때 검은색 블루머를 입은 상고머리의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던 그 시선들이, 그때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가던 그 감정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빈민촌에서 빈민답지 않게 산다는 것, 어떤 장소에서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 그럴 때마다 소름처럼 돋는 기억과 나는 다시 마주쳐버렸던 것이다.

어머니는 다르게 생각하시지만 그 어린 시절에 나는 책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든 아이들과 놀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았고 설사 가끔 받아들여준다 해도 저희들끼리 짜고 내내 나를 술래로 만들어 놓곤 했다.

나는 내내 술래인 채로, 그것을 벗어날 길을 도무지 알지도 못한 채로 두 눈을 가리고 어둠 속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를 소리쳐 외울 때면 울음이 먼저 목구멍으로 차올랐다.

하는 수 없이 서가의 책을 빼 들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기억대로 내가 원래 책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만일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다면, 종일 술래인 채라도 내가 얼마나 그들과 놀고 싶은지를 잘 알릴 수만 있었다면 나는 결코 책벌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책 속에는 나처럼 따돌려져 내내 술래가 되어야 하는 주인공들이 많이도 있었다. 그러니 나는 나의 동료를 만난 셈이었고 이제 술래로라도 놀이에 끼워달라고 애원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내가 두 권의 책을, 바로 <토니오 크뢰거)와 <호밀밭의 파수꾼>을 꺼내 든 것은 우연만은 아닐 터이다.

이 두 소설의 같은 점은 둘 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고, 둘 다 도회에 살고 있으며, 둘 다 부르주아 가정의 아이들이고, 그리고 둘 다 끼어들지 못하는 슬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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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토니오 크뢰거는 ‘누구나 지독하게 사랑하면 패배당한 자이고, 괴로움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그 간결하고 악착스러운 진리’를 열네 살 나이에 남보다 일찍 알아차린다.

그뿐인가.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은 낙제생으로 명문고에서 쫓겨나 뉴욕의 거리를 배회하게 된다. 겨울이 되고 호수가 얼어 붙으면 ‘샌트럴 파크>의 오리들은 다 어디로 갈까?’ 하는 홀든의 의문 따위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홀든은 ‘혼자서’ 가지고 있는 꿈이 있다. 그것은 ‘호밀밭에서 아이들을 지켜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홀든은 끝내 정신병원에 갇히고, 크뢰거는 예술가로 성장한 다음에도 결코 사람들 틈에 끼어들지 못한다.

그는 ‘예술가로는 완전하였지만 인간으로서는 불쌍했던 것’이다.

■ 내 인생의 중심은 나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때부터, 누구에게든 그저 순종만 하면서 모든 것을 그저 ‘운명’이었다는 여자 주인공들을 보면 나는 동정심 대신 부아부터 치밀곤 했다. 어린 시절 일찍부터 책을 즐겨 읽으면서도 작가가 될 생각은커녕 소설 속의 주인공도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대개 소설 속의 여자 주인공들은 아름답고 연약했으며 항상 말이 적고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그녀만을 사랑했으며 게다가 체면상 차마 하지 못하는 어려운 일은 그녀 곁을 맴도는 씩씩한 역의 여자 조연들이 다 처리해주는 것을 보았으니까 말이다. 나는 아마도 체념하고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그녀들을 질투했던 것 같다. 그래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데 그렇지 못해서 사랑도 못 받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나로 말하면 주인공이 아니라 그 곁에 있는 주책스러운(?) 조연들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주인공들을 위해 인생을 살고 싶은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었으므로 그저 나와 비슷한 남자주인공들이 나오는 소설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리고 점차 여자들이 보는 눈을 그네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익혀갔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는데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부아가 치밀도록 답답한’ 여자들이 내가 동일시해야 할 남자 주인공의 입장에서 바라보자 ‘청순 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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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저 감싸주고 보호해 주고’ 싶은 여자들로 보이더란 것이었다.

■ 소설을 쓰고 싶은 T후배에게

저는 가끔씩 혼자서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일기도 쓸 수 있고 친구한테 편지도 쓸 수 있는데 내가 왜 소설을 쓸까 하는 질문입니다. 저는 여기에 소설을 쓰는 해담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특정 다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 이외의 이야기는 일기에 쓰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소설가들은 독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독자들은 서점까지 나가서 몸소 책을 사고 이 어려운 세상에서 힘들게 번 돈을 지불하며 그것을 읽기 위해 또 귀중한 시간을 투여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책을 덮는 순간에 1센티미터라도 더 깊어지는 눈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그것이 제가 알고 의도한 것이든 모르는 순간에 독자 스스로가 그렇게 해석한 것이든 어떤 식으로든 작가는 사회와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1963년에 태어났으니까 80년대에 대학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어쨌든 역사에 가정이란 없으니 저는 80년대에 그 이십대를 고스란히 바치고 말았습니다. 어떤 분들이 제게 자꾸만 이제 그만 80년대를 잊어라 잊어라 하십니다. 그 말뜻이 이제 소설의 세계를 좀 더 넓혀가라는 고마운 말씀인 줄 알 만큼도 되었습니다만. 잊을 만한 새롭고 신선한 상황도 없는 상황 속에서 잊으라고만 한다는 것을 저는 개인적으로 부당하게 생각합니다.

남들이 감옥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저는 혼자서 그 운동 단체를 도망쳐 나왔습니다. 우습게도 상처는 저 혼자 받았더군요. 실컷 도망쳐 나와서는 말이지요. 그때의 자괴감, 죄책감……. 악몽을 꾸는 것이 무서워서 잠을 잘 수 없었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처를 글쓰기라는 것을 통해서라도 풀어내지 못한다면 저는 아마 어떤 식으로든 몹시 비뚤어지고 말았을 것 같습니다. 시작은 그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더라도 제게 문학과 종교는 같은 개념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내 짝꿍에 의해서 크레파스를 훔쳐간 도둑으로 몰린 일이 있었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할 정도였는데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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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해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만 아니면 된다. 진실은 진실이니까”라는 말씀이었지요.

소설가가 되어서 제가 책으로 묶어 발표한 소설을 돌이켜보면 제 소설 속에서 제가 겪은 체험담은 거의 없습니다. 아마 반영은 되었겠지만요. 처음에는 체험을 썼느냐는 질문을 하도 많이 받아서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저 내가 거짓말을 참 그럴듯하게 하는구나, 라고 생각해버리기로 했더니 마음이 좀 편합니다.

하지만 통과의례적인 작품은 계속 쓰게 될 것입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말이에요. 왜냐하면 인생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니 매 순간이 제게는 성장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통과의례라는 것이 어떤 성장의 개념을 포괄하는 것이라는 한에서 그렇지요.

80년대에는 오히려 써야 할 주제가 한 가지라는 점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제 데뷔작의 제목이 <동트는 새벽>이었는데 괴롭고 슬프고 그래서 길었던 밤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소설의 끝에서는 동이 트지요. 지금은 정말로 동이 터올 것을 너는 믿기라도 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설의 결론은 명확했지요. ‘동이 터’오니까요. ‘동이 터’ 온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했으니까요. 그것은 개인의 예술 세계를 운운하기 전에 하나의 필연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내가 생각했던 작가의 이미지는 작품을 구상하는 일에 고통을 느끼는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아니면 경제적인 고통 같은 거. 그런데 막상 작가가 되고 나니까 제일 힘든 일은 전화를 받는 일이에요.

옛날에 저는 사모하는 작가에게 편지를 쓸 꿈도 못 꾸었는데요 요즘은 작가들이 무슨 ‘최진실’로 아는 것 같아요. 만나자. 못 만나겠다는 이유가 뭐냐. 우리 모임에 와서 얼굴 한 번 보여 달라는데 웬 건방이냐, 우리들이 공지영씨 책을 얼마나 팔아줬는지 아느냐 모르느냐. 우리를 무시하는 거냐. 하는 사람들에서부터 부부 문제 상담을 요청하는 전화, 심지어 돈을 꾸어달라고 하는 전화까지.

그러나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을 거절하는 일입니다. 이제 제가 예전에 꿈꾸었던 작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쳇말로 ‘떴다’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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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을 빼기 전까지는 절대 놓아주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서 작가가 휘청거리면 ‘이제 맛이 갔다’고 흉을 보겠지요. 그래서 이제 작가들에게는 자신을 지키는 싸움이 가장 절실해진 것 같습니다.

대중 문학과 문학다운 문학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좋은 작품을 가리켜 향기가 있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뉘앙스가 있다고도 이야기하는데 저 같은 경우는 뭐 그런 단어를 생각한다기보다는 그저 두 페이지 쯤 읽어봅니다. 그러면 느낌이 와요. 길지 않은 작가 생활이었지만 이 작가가 어떤 자세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구나 하는 것도 이제는 대충 감이 잡히고……. 어쨌든 피와 살이 안 된다 싶은 소설이라면 딱 덮어버립니다.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문장의 격이 있나 없나를 살핀다고 할까요? 그리고 그 격을 지켜나가면서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 저의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간극을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로 극복하고 싶어요. 스물일곱 살에 쓴,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에서는 ‘젊다는 게 너무 힘겨워 이런 표현을 썼는데 아마 마흔 살이 된다면 표현이 달라지겠지요.

예술가라는 것은 문인들이 모이는 카페에 앉아 술을 마시며 인생을 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술이라는 것을 삶에 대한 본질적인 통찰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저는 어느 순간이든 우리는 이 타락하고 시끄러운, 그래서 때로는 도망치고 싶은 삶의 한복판에 서 있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소설에 기대를 거는 이유는 소설이 가장 자본이 적게 드는 예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대자본에 대한 의존성이 적다는 거지요. 소설과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영상 산업의 경우는 그게 어려워요. 보통 자본 10억이 필요하니까요. 그건 적은 돈이 아니고 10억을 내 주는 자본가가 그래, 네 마음대로 해봐라. 나를 욕해도 좋다. 라고 말하지는 않지요. 그것이 더 큰 돈을 가져오는 경우라면 또 모를까. 저는 산업적인 측면에서 본다 하더라도 소설이라는 것이 마지막까지 양심을 지켜낼 양식이라고 봅니다. 물론 최근의 여러 징후들은 이런 제 생각을 무너뜨리게 하는 여러 가지 양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도 희망을 거는 편이지요.

제가 소설을 쓴 것은 중학교 시절부터이니 오래전부터이지만 대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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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를 읽으면서 제 선택에 대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인생을 걸 만한 일이구나. 하는 설렘을 본 거지요. 이 세상에서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건 많지 않습니다. 지금도 잘 쓴 소설을 읽으면 소설에 대한 욕구가 사무치지요. <무진 기행>의 경우 30, 40번 읽어 거의 순서를 다 외우고 있는데, 소설을 배우고 느끼는 데는 소설이 제일인 거 같아요. 그 중에서도 읽으면 읽을수록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고전이 소설 공부에는 가장 좋은 것 같아요. 도스트예프스키나 톨스토이, 토마스 만 같은 작가들이 그렇지요.

그래요 소설가가 되고 싶으시다구요. 대체 어떻게 써야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달라구요. 글쎄요. 소설가란 무엇일까요.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한참을 망설여야 했습니다. 일전에 박경리 선생님께서 어떤 글에서 말씀하셨지요. 소설가란 신을 닮으려는 가당치 않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라구요. 저는 그 말을 읽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 창조의 아픔.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백지 앞에서 몸부림치신 기억이 물론 있으시겠지요.

소설가들은 어떤 면에서는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제 정신이 아닐 때가 많은 겁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주제에 감히 신을 흉내 내려는 사람들이니까요.

■ 작가의 말

- 초판 1996. 9. 16 -2판 2006. 3. 1

- 3판 2010. 4. 29 - 4판 2017. 9. 10

서른이 되었을 때, 나는 알게 되었다. 그건 내가 인생에 대해서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시인 뮈세의 표현대로 “내게 남은 유일한 진실은 내가 가끔 울었다는 사실 뿐”이었으니까.

누구나 이렇게 아프면서 크는 거라고, 고통 속에서 천천히 기다리며 어떤 것이 단순한 것인지를 구분하는 진리를 조심스레 배우노라면 우리는 드디어 성숙과 자유를 조금씩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한 인간의 절규는 모든 인류를 도탄에 빠지게 할 만큼 충분히 고통스럽다고. 우리는 그것을 겪고 반드시 새로 태어나야만 할 그런 위대한 존재라고 말이다.

한 현인은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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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올챙이는 개구리가, 애벌레는 나비가, 상처받은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한다.” 완전한 인간이란 상처받지 않은 인간이 아니라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자유를 지닌 인간인 것이다. 그 후에 오는 자유는 자기 자신과 타인을 향한 긍지와 선의를 가진 인간에게 주는 신의 특별한 선물이 된다.

2018.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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