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을 묻는다

2019. 2. 8. 15:35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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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연을 묻는다

- 위대한 國師 -

■ 고운기 지음

0 1961 전남 보성 출생, 한양대 국문학과, 연세대 석사, 박사

0 삼국유사를 주제로 한 그의 저서

- 우리말로 쉽게 번역한 삼국유사, -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길 위의 삼국유사. 등

0 1983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외 3권의 시집

■ 들어가며 : 탄생 800주년, 다시 읽는 일연의 생애

- 이 책은 2006년에 편찬된 책임

0 일연은 1206년 음력 6월 11일(양력 7월 25일)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남

0 14세 설악산 진전사에서 승려가 됨

0 22세에 승과 시험 장원급제

0 32세 경상도 달성 비슬산에서 득도의 체험

“내가 오늘 온 우주가 꿈과 같고, 대지에 실오라기 하나만큼의 장애도 없음을 보았노라.”

0 일연이 태어난 해는 몽골의 칭기즈칸이 제국의 첫발을 뗀 해

일연이 비슬산으로 간 것 또한 이 전쟁과 관련이 있다. 다른 한 스님의 시에는 “몽골과의 전쟁이 치러지는 동안 산에서 장맛을 본 적이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판에 언제 차분히 들어앉아 장을 담글 수 있었겠는가. 마흔네 살까지 일연 또한 비슬산을 떠나지 못했다.

전쟁과 상처뿐인 땅에서 1283년 일흔여덟의 일연은 국사(國師)에 책봉된다.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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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으로 이 백성에게 희망과 위로를 줄 것인가. 땅에서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난다 했거니와 그렇게 짚을 땅은 어찌 생겼더란 말인가, 뿌리와 줄기와 가지는 어떤 모양인가.

이 수많은 질문과 답변을 일연은 삼국유사 안에 고스란히 집어넣었다. 평생의 경험과 사유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모은 자료를 가지고, 조동일 교수의 말마따나 “역사관 시정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보태고 고치고 읽어 새로운 가능성을 찾도록” 만들었다.

이 책은 국난과 국치의 시대에 국사로서 그가 한 일을 좀 더 부각시켜 보았다. 이로써 그의 탄생 800주년을 축하하면서, 민족의 고전으로써 <삼국유사>를 읽는데 도움을 주고, 재발견으로써 일연의 생애를 소상히 전하려 한다.

- 무악산 아래 위당관에서 고운기

* 이 책이 쓰여진 2006년이 일연 탄생 800주년이었습니다.

◉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

■ 시 한편으로 시작한 짝사랑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삼국유사>는 가장 잘 알면서도 가장 잘 모르는 책이다. 초등학교 국사시간부터 우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더불어 <삼국유사>를 얼마나 많이 들어 왔는가?

이름만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잇는 상당한 이야기는 이 책에 의존하고 있으니, 안다면 참으로 많이 알고 있는 책이다.

내가 구체적으로 <삼국유사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것은 한편의 시 때문이었다. 일연이 <삼국유사> 안에 그가 쓴 48편의 시를 남겨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나는 내가 읽던 어느 전공 책에서 일연의 시 한수를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시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홀연히 들리는 노 젓는 소리, 깜짝 놀라 일어나네

어느 곳 고깃배인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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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372년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가 처음으로, 이어서 374년 진(晉)의

아도(阿道)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이야기를 적고 난 다음 쓴 것이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시는 그러나 많은 의미를 그 안에 담고 있다.

1, 2행은 고요한 봄 풍경이다. 그것은 문명이 전해지기 이전의 미명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다가 3, 4행에서 분위기는 달라진다. 노 젓는 소리에 잠을 깨 갈매기가 날아간다. 이때 노 젓는 소리와 갈매기의 비상은 껍질이 깨지는 하나의 파각(破殼)이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징조이며 신호이다.

신호의 주인공은 바로 배에 타고 오는 손님인데, 5, 6행에서 ‘손님’이라 표현한 그는 곧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 전한 순도이거나 아도이다.

시초는 그렇게 신비롭고 엄숙했다. 안개가 가득한 강 저편에서 새로운 진리를 품고 미지의 땅을 향해 다가오는 전도자의 모습이 이 시 속에는 여실히 그려져 있다. 움직임과 고요한 상승과 하강의 시적 긴장이 잘 조화된 탁월한 시편이다.

■ 발로 뛰며 쓴 책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내가 받은 또 하나의 인상은 그 많은 기록 가운데 상당수가 그의 현지답사와 더불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여느 책과 비교하여 돋보이는 삼국유사의 미덕이라면 책상 앞에 앉아 읽는 삼국유사가 아니라 발로 뛰면 읽는 <삼국유사>가 되어야겠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삼국유사에 기록되었고 지금까지 그 모습을 지켜오던 현장들이 자꾸 훼손되고 사라지고 있다. 오랜 세월의 풍화 속에서 당시의 모습이 온전히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할 바 아니지만,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것조차 무관심이나 무분별하게 개발에 밀려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어 안타깝다.

다행히 최근 들어 지방 자치제도의 활성화와 함께 문화재나 유적지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그것으로 역사의 발전이나 선전 수단으로 삼으려는 분위기가 만들어 지면서, 좋은 방향의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울산의 처용암의 경우, 내가 처음 삼국유사 답사를 시작하던 1990년경, 근처 온산공단 때문에 마을은 폐허가 되고 바다는 썩어들어, 지자체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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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차라리 매립해서 공단부지로 쓰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반대 투쟁을 했는지, 겨우 목숨을 건진 처용암 바다는 이제 제법 물이 맑아지고 바다낚시를 할 수 있을 만큼 되었다.

현장은 해석의 단초를 제공해 준다. 이것은 몇 푼의 돈으로 만들 수 없는 엄청난 세월의 무게를 안고 있다.

나는 이제 <삼국유사>를 새롭게 읽기 위해 이야기의 현장을 직접 방문해 상고해 보기로 했다. 1988년 여름, 책상을 떠나 처음으로 찾아간 곳이 군위 인각사(麟角寺), 경상북도 군위군의 산골짜기에 있는, 일연이 만년에 거처하며 삼국유사의 저술을 마쳤다는 곳이다.

■ 이름에 담긴 비밀

일연은 1206년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金)이었으며 이름은 견명(見明)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는 홀어머니 손에 양육되었는데 아홉 살 나던 해 광주 무량사(無量寺)로 취학했다.

처음엔 다만 공부를 위해 갔던 광주 무량사에서 인연이 되어 열네 살이 되던 해 설악산 아래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로 가서 삭발을 하고 스님이 되었다.

* 취학 : 당시에는 사찰이 아이들이 와서 공부하는 서당의 역할을 했음

승려로서 처음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스물 두 실에 승과에 나가 합격한 일연은 몽골전란기의 혼란한 사회상황 속에서도 삼중대사, 선사, 대선사 등의 직급에 차례차례 올랐다. 마흔 네 살에는 당대의 실력자 정안(鄭晏)이 경상도 남해의 개인 집을 내놓고 정림사(定林寺)를 만들었는데, 그곳의 주지로 부임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때부터 불교계의 지도자로 자리잡아가게 되며 왕명을 받들어 불교 행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남아 유일하게 전하는 그의 저서 <중편조동오위(重篇曺洞五位)가 간행되기도 했다.

일연(一然)이란 이름은 그가 만년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개명에는 놀랍고도 중요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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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은 처음 이름이 견명(見明)이었고, 불교의 이름을 회연(晦然)이라 지어 밝음(明)과 어둠(晦)을 대조 시켰다. 옛 사람들이 이름(名) 다음에 자(字)를 지을 때 흔히 하는 방법이다. 그러다가 만년에는 이 둘, 곧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에 일(一)자를 넣었다.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이름 속에 숨어 있다.

일연은 1281년 그의 나이 일흔 여덟에 국사로 책봉되었다. 이제 명실상부한 한 나라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그를 존경해 마지 않는 것은 무신정권기와 몽골 전란기를 헤쳐가면서 그가 보여준 삶의 궤적 때문이다. 비록 작은 나라의 승려로 힘없는 자의 설움을 당하면서도 그는 민족의 자존을 늘 염두에 두었던 사람이다. 그것을 그는 불교적 인식 세계에서 불국토(佛國土) 사상으로 이었으며, 만년에 군위의 인각사에 거처하면서 정리한 <삼국유사>에 여실히 표현해 놓았다. 오늘날 우리가 이 책의 가치를 논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 역사의 여명 앞에서

일연은 한 사람의 승려요 문인이다. 그의 저서를 보면 승려로서 그를 평가할 저서와 문인으로서 그러할 책이 하나씩이다. 바로 <중편조동오위>와 <삼국유사>가 그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삶이 있고 현장이 있다. 고대인의 숨결까지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삶의 현장, 그것이 <삼국유사>가 가진 최고의 미덕이다. 나는 <삼국유사>를 밭에서 방금 캐낸 야채로 비유한다. <삼국사기>의 그것을 통조림이라 비유하는 것과 대조해서 말이다. 해석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제공해주는 이야기는 마치 방금 캐낸 야채로 무엇이든 요리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아니면 라이브 무대의 가수로 비유한다. 가공을 거쳐 리코딩 된 판과는 다른 분위기를 라이브 무대에서 느끼게 된다. 티 없이 깨끗한 레코드판에 비해 거칠지만 살아 있는 숨소리를 듣는 것이 라이브 무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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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세기의 바람

■ 허약한 왕권 방자한 문신귀족

일연은 1206년에 태어나 1289년에 죽었으니 13세기를 온전히 살다 간 사람이다. 우리 역사의 13세기는 고대와 중세가 확연히 갈리는 대전환의 시기였다. 13세기의 고려사회를 규정짓는 중대한 두 사건은 무인 정권의 성립과 대몽항전이다. 전자는 대내적으로 후자는 대외적으로 고려 사회를 변화시켰다.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탄생한 무인정권은 1258년 최씨정권이 무너지기까지 90여 년간 지속되었는데 이 가운데서 최씨 정권이 4대에 걸쳐 집권을 한 60년간을 본격적인 무인정권기라고 보아 13세기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다. 무인정권은 그때까지 지속되던 고려사회의 질서를 밑으로부터 흔들어 놓았다.

고려왕조가 문반 중심의 귀족사회로 전개된 데는 과거 시험 제도의 시행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과거 시험은 광종 때부터 시행되었다. 958년, 후주(後周)에서 고려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광종이 이 같은 결정을 한 데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히 컸다.

개국 40년,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공을 세운 호족 세력의 힘이 너무 컸다. 광종은 그들을 제압하고 새로운 유교적 교양을 갖춘 문신 중심의 관료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광종의 계산은 주효했다.

신라사회가 태어난 혈통을 중요시하여 성골과 진골의 불가침한 세력을 가지고 유지되었다면 고려는 과거시험을 통해 등용된 엘리트들이 사회를 이끌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철저히 문인 중심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부작용도 있었다. 새로운 문신귀족들은 권력 투쟁에 집착하면서 지도력을 잃고 점차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인종의 재위기간 중 고려사회의 해체를 알리는 대표적인 사건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었다. 오만방자해진 귀족 세력의 독점적 권력의 말로를 보여주는 것이 이자겸의 난이라면, 권력 투쟁으로 심각한 국가적 위기를 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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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이 묘청의 난이었다. 특히 서경천도 운동으로 대표되는 묘청의 난 이후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다.

■ 고려 귀족 사회를 무너뜨린 무신의 난

당시 권력구조를 보면, 의종은 국왕이면서도 정치적 권력은 거의 행사할 수 없었다. 정치권력은 귀족 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고, 왕권은 극도로 쇠약한 상태에 있었다. 의종은 국왕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는커녕,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껴, 국왕으로서의 지위 보전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바로 이런 왕의 시대에 무신의 난은 터진다.

의종 즉위 24년째인 1179년의 일이다. 왕을 우습게 볼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형성한 문신귀족들의 무신보기는 어떠했겠는가. 그러니 문신 귀족들은 무신들이 칼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문신들의 끝없는 차별을 일거에 해소하고 방자한 문신들을 침으로써 왕권을 수호한다는 명분도 살릴 수 있기에 무신들의 칼은 피를 뿜었다. 정중부가 칼을 드는 저 유명한 보현원 사건은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이 같은 사태를 연출한 장본인은 이고와 이의방이었다. 그들은 기실 낮은 계급의 무신이었음에도 거사를 계획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이날 마침 이소웅이 문신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이때 정중부는 그들이 내세운 무신의 ‘얼굴마담’격이었다.

이후 무신의 권력은 경대승-이의민-최충헌으로 이어진다. 특히 최충헌은 집권 이후 4대에 걸친 세습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은 우리 역사상 희귀한 경우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무신정권의 변화에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의 출현으로 기존의 거의 모든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성립되었다는 점만을 기억하자.

일연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206년은 최충헌이 집권한 십 년째 되던 해였다. 이제 그의 정권이 탄탄한 기반을 잡게 되는 데에는, 왕이 그를 진강후(晋康侯)로 봉하고, 부를 세워 흥녕(興寧)이라 할 정도였다. 진강후는 최충헌이 진주 출신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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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질서 속의 이웃나라 몽골

13세기 고려사회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사건이 대몽항쟁이다. 13세기 몽골은 어떤 나라였는가? 먼저 간략한 역사를 살펴보자.

몽골족은 당시 요(遼)와 금(金)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불세출의 영운 테무진이 나와 부족을 통일하고, 자신은 칸에 추대되어 칭기즈칸이라 부르며 대몽고국(大蒙古國)을 세운 것이 1206년, 곧 일연이 태어나던 해였다. 그의 정복전쟁은 계속되었다. 주위의 사하국은 물론이요, 자신을 지배하던 요와 금마저 정복하였으며,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출하여 중앙아시아는 물론 남 러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칭기즈칸은 이 영토를 여러 아들 및 동생들에게 나눠주고 다스리게 했다.

한편 몽골 본토는 막내아들 툴루이의 차지가 되었다가 중국 지역을 정복한 뒤 1271년(원종 12년)에 국호를 원(元)으로 바꾸었다.

그렇다면 고려와의 싸움은 어떻게 되었는가. 고려와 인접한 요동지역은 칭기즈칸의 막내 동생인 오치긴에게 분봉되었다. 그런데 1218년 (고종 5년) 몽골군이 거란의 유민들을 추격하여 고려에 들어오는데 고려는 몽골을 도와 이를 격퇴시키는데 협조한다.

이로 인해 두 나라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없이 평등한 관계가 성립되는 듯 했다. 몽골의 요구에 따라 두 나라 사이에 형제 맹약이 맺어졌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몽골은 고려에 대해 공납(貢納)을 강요했고 고려에서는 이에 반발하였다.

이때 마침 공납을 독촉하기 위해 파견된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돌아가는 길에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골은 이 사건을 고려측의 소행이라 단정하고 국교를 단절하였으며 이후 1231년부터 1258년까지 28년 동안 7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였다. 이때 고려 정부는 최씨 무인 정권 이었다.

몽골과의 전쟁은 고려 사회의 변화에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우선 중국 본토에서 오랑캐족 나라를 세웠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변경의 고려에도 자극을 주게 되었다. 천자의 나라라고 한껏 뽐을 내던 중국 사람들도 세력의 강성함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중국의 그 같은 사정을 보며 고려 사람들도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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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의 나라가 오랑캐에게 무너졌다. 자존심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중원(中原)까지 내주고, 오랑캐 출신의 황제 아래에서 구차한 목숨을 잇기 위해 벼슬살이를 하였다.

한편 오랜 기간 전쟁을 통해 몽골의 풍습이 좋건 싫건 유입되었는데, 이것 또한 고려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이것은 고려가 끝내 몽골에게 항복한 이후에 더욱 강렬하게 밀려왔다.

쌍화점(雙花店)에 쌍화 사러 갔더니

회회(回回)아비 내 손목을 쥡니다

이 말이 이 점 밖에 나고 들면

조그만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더라

여기서 쌍화점은 만두가게, 회회아비는 서역출신의 가게 주인으로 보인다. 이는 전쟁의 과정에서 유입된 몽골 이주민의 한 부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찌 되었건 13세기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에는 이전에 보지 못하던 무리들이 쏟아졌고, 그들에 의해 미풍양속을 저해하는 짓들이 저질러졌으며, 그것이 당시 사회변화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런 13세기 바람은 거셌다. 이 시기를 정점으로 고려에는 시대의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사회문화적인 분위기가 열리고 있었다.

◉ 원효와 일연, 삼성산이 맺어준 인연

■ 삼성산의 세 성인

일연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에서 태어났다. 일연의 출생에 대해 비문은 다음과 같이 전해 준다.

“처음에 어머니가 둥근 해가 집안으로 들어와 배에 쏘이는 꿈을 꾸고, 무릇 3일 밤이나 계속되어 태기가 있더니, 태화(泰和) 병인년 유월 신유(辛酉)일에 태어났다. 나면서 준수하였으며 의표가 단정 풍만하고 굳은 입에 소걸음과 호랑이 눈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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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는 금나라 장종의 연호이고 태화6년은 1206년이고 6월 신유일은 11일이다. 이는 양력으로 치면 7월25일이다.

아버지는 김언필(金彦弼)이고 어머니는 이씨(李氏)였는데, 아버지가 특별한 벼슬을 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나중에 일연이 국사(國師)에 까지 이르자 좌복야에 추증되었다. 그다지 번성하지 못했던 가문인데다 그나마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홀어머니에 의해 길러졌으니, 그의 신분과 더불어 초년의 고생을 짐작할 만하다.

내가 일연의 탄생지라고 짐작한 곳은 영남대학 근처 압량면 사무소 부근으로 생각했는데, 향토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탄생지는 거기서 서북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압량면 유곡동이었다. 유곡동에는 삼성산(三聖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여기서 세 분의 성인이 태어났기에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세분 성인들은 다름 아닌 원효, 그의 아들 설총, 그리고 일연이었다. 조금은 우스운 기분도 들었다. 성인이라는 말의 뉘앙스로 본다면 세 사람이 과연 같은 반열에 들 수 있는 것인지…….

어쨌던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그토록 원효의 행적에 관심을 가진 이유를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원효와 일연은 그렇다 쳐도, 설총은 분명 경주의 요석궁에서 태어나지 않았던가. 어느 틈에 설총은 압량 출신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믿고 있는 세분의 성인을 인연으로 이어놓는 다는 사실은 그들이 삼성산의 주인공이냐 아니냐를 떠나 무척 중요하다. 이 산을 가운데 두고 한쪽 자락에서는 원효가. 또 다른 자락에서는 일연이 태어난 것인데, 일연의 생애가 원효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우리는 <삼국유사>안의 여 러 기록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 일연의 큰 스승 원효

학자들은 <삼국유사>에서 가장 잘 다듬어진 부분을 의해(義解)편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원광으로부터 시작하여 삼국 고승들의 전기를 담고 있는 <의해>편은 어쩌면 삼국유사의 정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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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 원효의 생애를 다룬 <원효불기 元曉不羈> 조는 이 책 전체의 성격과 관련해서도 유심히 읽어 보아야 할 부분이다.

‘원효불기’는 원효의 탄생 내력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그가 탄생한 곳을 율곡(栗谷)이라 쓰고 ‘고전(古傳)’이라 하면서 이 마을의 지명이 이렇게 된 연유를 밝하고 있다. ‘예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라면 이 지역 출신인 일연 자신이 어려서부터 들었다는 쪽으로 해석해 봄이 옳을 듯하다. 공식적인 지리서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그 마을의 전설을 가지고 설명하는 방식은 바로 이 책 전체의 성격과 연관되지만, 그것이 일연 자신의 고향 이었기에 더욱 실감나게 들린다.

일연이 소개한 기이한 두 가지는, 첫째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은 일이요. 둘째 무애 춤을 만들어 천촌만락에 부처님 이름을 전파했다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둘이면서 서로에게 원인과 결과가 되는 긴밀한 것이다. 권위 있는 중국 승전의 이야기는 거기에 미뤄버리고 이 두 가지 일만 소개한 데는 일연 나름의 의도가 있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라벌 큰 거리에 나타나 원효는 노래 불렀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 주려나

내가 하늘 괴는 기둥을 깎아 줄 텐데.

오늘날 몰가부가(沒柯斧歌 누가 자루빠진 도끼를 주겠는가)라 불리는 이 미치광이 같은 노래를 알아들은 사람은 태종무열왕이었다. 나라의 기둥이 될 인재를 낳을 것이라고 해석한 임금은 원효를 요석궁에 홀로 사는 공주에게로 불러들인다.

저물 무렵, 원효가 문천(蚊川)의 다리를 건너다 그를 찾으러 오는 산하들을 피하려고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는데, 이는 사실 원효의 의도된 추락이 아닌가? 젖은 승복을 말리고 가라며 요석궁으로 인도할 빌미를 그들에게 제공한 것이다.

원효는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에 몰렸다. 신라 열 명의 성현 반열에 드는 아들 설총을 낳았건만 원효에게는 파계승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만다. 본인 스스로 속인의 옷으로 갈아입고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했다.

그러나 승려로서의 그의 삶은 이때부터 더 괄목할 만하다. 우연히 뒤웅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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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고 <화엄경>의 “일체의 막힘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의 길에서 벗어난다”는 뜻을 취하여 이름을 무애(無碍)로 짓고, 노래를 만들어 세상에 유행시켰다. 그 내용이 곧 불타의 세계를 전파하는 것이었으니, 그렇게 널리 교화시키는 모습을 그리고 난 일연은 이렇게 감격하여 적고 있다.

그것을 가지고 천촌만락에서 노래하며 춤추며 돌아갔으니 초동 목수까지도 부처의 이름을 알며 나무(南舞)의 칭호를 부르게 되었다. 크도다. 원효의 공이여.

특별한 계층이 아닌 중생이면 누구나 부처의 이름을 찾게 해 준 이는 원효 말고 그 이전의 우리 역사에는 없었다. 이는 그의 사상이 대중에게나 맞는 낮은 수준이라는 뜻이 아니다. 경전의 깊은 진리를 깨닫고 끝까지 추구해 나가 조명했지만, 대중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 할 때는 그보다 더 쉬울 수 없는 경지까지 갔다.

일연이 원효에게서 배운 바가 이것이었다. 생활 속에 스며든 불교로서, 우리의 주체적인 해석이 가해진 불교로서 원효의 맥을 일연은 잇고 싶었던 것이었다.

■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하던 해 태어나

원효의 본가는 압량군 남쪽의 불지촌에서 북쪽 율곡 사라수(紗羅樹) 아래였다. 그러나 원래 위치는 북쪽이 아닌 서남쪽 이었다. 만삭인 어머니가 마침 이 북쪽 골짜기를 지나다 밤나무 아래에서 갑자기 산기를 느꼈다. 다급해진 아버지는 나무에 옷을 걸어 가리고는 출산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낳은 아이가 원효이다. 사람을 살렸다는 뜻을 취해 이름을 사라수라 했다. 이 불지촌의 북쪽 율곡이 지금 삼성산의 동남쪽 아래의 마을이다. 마침 그곳에는 원효의 아들 설총을 기리는 도동재(道東齋)와 그 사당 뒤편으로 설총의 무덤이 있다.

사람들이 추정하는 일연의 탄생지라고 알려진 곳에서 산의 반대편이다.

그 고갯마루 어디께 일본 사람들이 왜정 때 말뚝을 박은 곳이 있다는데 그것은 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날 인물을 막자는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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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의 어머니 이씨는 태몽을 꾸었다. 어느 날 밝은 해가 집안으로 들어와 비추기를 무릇 3일. 그런 다음 아이를 가졌고 일연을 낳았다. 당시 송(宋)나라의 연호 태화(泰和) 병인년(1206년) 6월이었다. 어머니는 나중에 낙랑군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일연의 태몽은 대체적으로 특이한 인물의 출생담에서 으레 보이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처음 이름을 견명(見明이라 했음에서 짐작하듯, 세상의 빛이 되라는 소박한 소망을 안고 태어났다.

일연이 태어난 1206년은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하고 황제로 즉위한 해이다. 중국 붕괴의 충격은 고려 조정도 마찬가지였다. 13세기에 들어 고려사회가 급진적으로 변화를 보이는 것은 이 같은 세계질서의 재편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들의 말발굽이 지나가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을 정도로 처참한 피해를 당했던 것이다.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회복 불능의 지경에 이르렀다. 일연은 바로 그런 시대가 시작되는 해에 태어나 평생을 그 바람 속에 살다 갔다. 이는 오늘 날 우리가 일연을 이해하면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다.

■ 마음 속의 스승 원효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세속적인 인연을 다시 들먹일 필요도 없이, 원효가 지닌 민족 주체적 신념을 자기 시대 속에서 몸소 겪고, 그것을 새로운 의미로 발전시켜 나갔다는 점에서 두 사람 사이는 각별하다.

경주의 황룡사지 옆에는 분황사가 저리잡고 있다. 지금은 초라한 법당 하나만 남아 있지만, 이 절에서 원효는 만년을 보냈고, 그가 돌아가자 아들 설총은 유해를 갈아서 얼굴 모습을 소상(塑像)으로 만들어 봉안하고, 죽을 때까지 경모하였다고 전한다. 언젠가는 설총이 옆에서 절을 하니 원효의 얼굴이 홀연히 돌아보았다. 이런 일을 적고 나서 일연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각승(角乘)으로 처음 삼매축(三昧軸)을 열었고

뒤웅박 들고 춤추니 온 거리에 유행하였다네

달 밝은 요석궁 봄잠은 옛일이니

문 닫힌 분황사 뒤돌아보는 그림자 부질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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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행은 원효의 학문적 업적을 기린다. 전국의 이름난 승려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백좌고회(百坐高會)에서 빠졌던 원효는 결국 <금강삼매경>을 강의하는 자리에 독보적인 존재로 왕의 부름을 받는다. <금강삼매경>에는 2각이 있음을 안 그는 소 한 마리를 청한 후 그 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붓을 들었다. ‘각승’은 이에서 연유한 말이다. 2행은 무애희(無碍戱)포교 사실을 시화했다. 그것이 온 거리에 유행하였음은 앞에서 예기한 바 있다 이렇게 일연은 원효가 가진 뛰어난 두 면, 곧 학문과 신앙의 경지를 두 줄 속에 두루 포섭하였다.

일연은 설총이 만든 소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기록했지만, 그 지금이란 일연 당대인지 아니면 다른 때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시 천고의 세월이 흐른 이제는 근거도 모를 원효의 초상화가 하나 걸렸을 뿐, 설총이 만든 소상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 해양 무량사

■ 가지산파 종찰 보림사

안개가 자욱한 새벽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보림사(寶林寺)였다. 신라 말기, 바야흐로 이 땅에 선문의 기운이 싹틀 무렵, 그 첫 번째 뿌리가 내리기는 아홉 선문 가운데 하나인 가지산파(迦智山派)였다. 이 보림사는 바로 가지산파의 종찰(宗刹)이다.

보림사는 지금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에 위치해 있다. 가지산파를 여는 초조(初祖) 도의(道義)는 신라 선덕왕 5년(784년)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남종선의 지취(旨趣)를 한 몸에 가득 담고 그의 스승 서당지장(西堂地藏)의 심인(心印)까지 받아 귀국한다. 그때가 헌덕왕 13년(821년) 이었다.

심인은 불심인(佛心印)의 약자이기도 한데, 깨달음을 인가한다는 뜻이다. 선종에서 특히 많이 쓰여, 불립문자(不立文字)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깨달음이 주고받음을 말한다.

우리 불교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까지 교종 특히 화엄사상에 깊이 몰두하여 발전해 왔다. 우리가 익히 아는 원효와 의상은 해동 화엄학의 크고 깊은 경지를 열어놓은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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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성불(見性成佛), 단박에 깨친다는 선의 논리는 가히 한 시대를 뒤엎을 혁명적 사고였다. 그리고 그것은 변하는 중국 사회에 일대 충격을 주었고 달마 이후 용출한 빼어난 제자들로 인해 선종은 어느 덧 중국 불교의 중심에 놓였다. 이때가 대체로 당나라 초중기이다.

중국에서 선종이 자리를 잡을 무렵, 이때는 선종이 중국의 남과 북으로 갈리어 남종선이니 북종선이니 다양해지고 있었는데 신라에서는 바로 도의 같은 분이 처음 그 길을 찾아 중국으로 갔던 것이다. 그 수행에 대한 짧은 소식은 앞서 적은 바이지만, 귀국한 뒤의 신라 쪽 사정은 달마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와 비슷하였다.

돌아와 고국의 상황이 여의치 못함을 안 도의는 설악산으로 들어가 자신의 사상을 더욱 깊게 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거기서 지은 절이 진전사(陳田寺 )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진전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선종이 안긴 최초의 보금자리였다. 마치 달마에게 숭산의 소림사와 같은 존재이다.

도이는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가지산문을 직접 출발시키지 못했지만, 그 밑에 염거(廉居)와 채징(體澄)이라는 걸출한 제자를 길러냈다.

바로 가지산문의 세 번째 조사(祖師)인 체징에 이르러 이 산문은 품격을 이루었으며, 보림사는 그의 손에 의해 완성을 보게 된다. 체징은 보조선사로 불리는 분이다.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이 보림사를 창건한 것은 서기 860년, 그는 가지산문을 연 도의의 손자뻘 제자였다. 이 절이 뒷산 이름이 지금도 가지산이라 불리는 것은 이같은 이유에서다. 끊임없는 중창과 중수를 거치면서도 의연하던 절이 그 모습을 완전히 버린 것은 지난 한국전쟁 때였다. 공비들이 퇴각하며 불 지른 대웅전은 서쪽을 향하여 세운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인 중층 팔작지붕의 큰집이었다고 한다. 국보 204호였다.

대웅전 안에는 철조 비로자나불이 있었는데 그 규모가 국내에서는 가장 컸고 이 또한 국보이다. 그러나 이 비로자나불은 대웅전이 불탄 다음 지금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다. 그나마 노천에 방치되어 있다시피 했던 불상을 마을 주민들이 겨우 수습해 들인 다음 그 자리를 지키건만 마치 거인이 난쟁이 집에 들은 것처럼 비좁기만 하다. 이 불상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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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은 장사부수 김언경이 헌안왕 4년(860년) 봄에 사재를 털어 철 2,500근을 사서 주조하였다. 이는 절 한 쪽에 세워진 체징의 비문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김언경이라는 사람의 불심과 정성 앞에 자연 고개가 숙여진다.

그러나 그렇게 숙였던 고개를 채 들기도 전에 우리는 그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이 불상의 왼쪽 위 팔뚝에 다른 기록이 나오는 까닭이다. 기록된 바 헌안왕 2년에 방사부관 김수종이 왕에게 주청하고 왕명으로 주조하였다고 한다. 앞의 기록보다 2년 앞서 이런 일이 있었음을 그것도 눈에 잘 띄지 않는 팔뚝에 양각으로 세긴 기록을 가지고 알게 되니, 필시 여기엔 무언가 곡절이 있을 법하다.

가능성은 한 가지. 양각 문신보다 더 뒤에 이룩된 비문에 의심을 두는 일이다. 헌안왕 2년에 김수종으로부터 시작한 일을 4년에 김언경이 마무리 지었는데, 후자가 자신의 공을 드높이자는 의도로 전자의 공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김언경은 팔뚝의 양각 문신을 지우는 일을 꾀하지 않았을까? 그래야만 완전 범죄가 될 텐데 말이다. 그 대답은 이렇다. 당시 도금술에 의해 이 양각 명문이 숨겨져서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김언경은 그 명문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 같은 추론은 일찍이 간송미술관 최완수 선생이 보림사 답사기를 쓰면서 내린 것이다. 최 선생은 여기에서 보다 분명한 증거를 대고 있다.

■ 보림사 근처 무량사

일연은 아홉 살 나던 해에 고향 경산을 떠나 광주 무등산의 무량사로 간다. 이는 비문에 서 전하는 바이다. 아홉 살 소년이 걸었을 이 먼 거리는 무엇을 뜻하는가. 경산에서 출발하여 광주까지 가자면 당시의 도로와 교통수단으로 보아 그 나이에는 거의 살인적이었을 것이다. 어찌하여 이 먼 길을 걸어가야 했을까?

더욱이 그 위치를 해양(海陽)이라 밝히고 있을 뿐 무량사가 지금 어디인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해양은 무진(武珍)이라고도 불렸는데 지금의 광주이다. 그러나 비문에 전하는 해양이라는 곳은 광주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경남 남해의 옛 이름이 해양이라서 남해나 진주 어디쯤으로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양이 광주라고 보는 명백한 증거는 일연이 승려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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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한 산문이다. 일연은 가지산파에 속한 승려였다. 무량사에 간 이 경상도 소년은 총명함이 뛰어났고, 때로 가부좌를 한 채 저녁 시간을 다 보내곤 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진전사로 보내 출가를 시킨다. 왜 진전사로 갔을까? 진전사는 강원도 양양에 있는 사찰이다. 그 거리가 처음 무량사로 온 그것보다 훨씬 더 멀다. 그렇게 멀리 옮겨 산문에 들었다면 처음 들어간 무량사와 진전사가 어떤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같은 산문이라는 것으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연이 처음 무량사로 갔을 때는 승려가 되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비문에는 ‘취학(就學)’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일연 당시 사찰은 공부하는 서당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고려 말의 유학자 이제현(李齊賢)의 말을 빌리자면 무신의 난 이후 문인 학자가 많이 죽고 산 사람마저 절로 도망을 가, 사람들이 자녀 교육을 시키려면 부득이 절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일연 또한 무량사를 찾은 것은 그때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그랬듯이 공부를 하자는 목적이었다.

그러면서 경상도 땅에서 태어난 소년은 전라도 땅의 훈훈한 흙냄새를 맡고 무럭무럭 자랐다.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생에 해당한 아홉 살부터 열네 살까지이다.

◉ 선불장의 일등 승려

■ 진전사행

고려 초 진공(眞空) 대사는 도반들과 함께 설악산에 갔다. 그는 보조국사 체징(體澄)의 제자였으며, 나중에 소백산에 은거하면서 큰 법을 베풀었다.

진공이 설악산을 찾은 것은 그가 속한 산문의 첫 사람이요. 이 땅의 산문을 열었던 도의(道義)선사의 유적을 참배하려는 목적이었다. 앞서 밝힌 대로 도의는 이 땅에 가지산문을 처음 들인 분이다. 여러 곳을 거쳐 이곳 설악에 그 마지막 주석처를 잡았으니 여기가 바로 진전사(陳田寺)이다.

진공은 가지산문을 체계화시킨 체징에게서 배웠지만, 산문을 이어나갈 제자로는 선택되지 못했는데, 도의에 대한 우러름은 오히려 더욱 극진했던 듯하다. 진전사는 지금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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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이 길은 사람의 발길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다지 깊은 산골까지 들어와 절을 짓고 생애를 마친 스님도 스님이려니와, 그런 옛 스승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 후예의 발길도 이럴 때는 차라리 경이로울 정도다.

비문이 알려 주는바 일연은 열 네 살 되던 해 진전사에 가서 삭발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 비문에 구족계를 내린 이로 진전장로(陳田長老)가 보이지만 이는 실명이 아니요 당시 주지나 조실을 말하는 일반 명사일 터였다. 그렇다면 일연은 무슨 연유로 이곳에 와서 구족계를 받았던 것일까.

의문의 꼬리는 우리 같은 속인의 생각으로, 그 먼 거리 때문에 잡힌다. 일연이 처음 취학하였던 광주 무량사에서 이곳 설악산까지의 거리가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듯 먼 거리를 걸어야 했던가. 이런 의문에 대해 앞서 나는 산문(山門)관계로 추정해 보았다. 가지산문의 종찰 보림사 가까운 데서 공부하던 그가 불가의 인연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이 산문과의 관계를 빼놓고 달리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 진전사에서 승려가 되다

무량사에서 이미 예견되었던 대로 일연의 수행 생활은 이곳에 와서도 남달랐다. 그것을 비문에서는, “여기에서 여러 사찰을 돌며 공부하는 대 명성이 대단했다. 같은 도반들은 구산사선(九山四選)의 우두머리가 되리라고 예상했다”고 적고 있다.

구산이란 구산선문을, 사선이란 이 선종선을 이른다고 하면, 승과에서 나가 장원급제 하리라는 말이 될 것이다.

스물두 살, 산문에 든 지 여덟 해 만에 일연은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듯 승려들의 과거시험 즉 선불장(選佛場)에 나가 당당히 수석으로 합격한다. 이것은 그간에 자신이 쌓은 수행을 세상에 한 번 알린 일이요. 진전사 시절을 마감하는 일이기도 했다.

일연이 진전사에 와서 구족계를 받던 해, 최씨 무인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은 사망하고 아들 우(瑀)가 권력을 인계받았다.

정치적으로는 암울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이 시기의 불교계는 중흥의 때를 맞이한다. 지눌(知訥 1158-1210)을 잇는 혜심(惠諶 1178-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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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와 불교계에서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었으니, 청년 일연으로서는 선사들의 도를 듣고 배우며 그들을 뒤따르려 결심했을 터이다.

열네 살에서 스물두 살까지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를 일연은 낙산사가 멀리 바라다 보이는 진전사에서 공부하며 보냈다. 그러면서 이 지역의 “여러 이름난 사찰을 돌며 공부했다”는 비문의 기록은 그냥 지나치지 못할 일이다. 지금의 속초에서 양양을 거처 강릉에 이르기까지를 그 이야기의 무대로 삼고 있는 삼국유사의 ‘낙산의 두 성인 관음과 정취 그리고 조신’조는 그대로 일연의 유력(遊歷)의 코스다.

■ 의상과 원효의 거리

<의상>

0 치밀한 구도자의 삶을 살다 간 사람,

0 관음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지금의 홍련암이 자리잡은 바위굴에서 이레동안 재계하고 기다림 - 용이 나타나 수정 염주와 여의보주를 주고 갔지만 그만두지 않고 다시 이레 동안 재계한다. 그리고 마침내 관음 진신을 친견한다. 대나무 두 그루가 솟는 곳에 절을 지으라는 말에 따리 지은 절이 낙산사이다.

0 당나라 유학시절 에도 그의 스승 지엄(智嚴)화상의 수제자로 명성을 날렸던 그가 선묘(善妙)라는 여인의 유혹도 물리치고 당당히 돌아섰던 의상은 해동불교에 면면히 흐르는 주체적 신앙의 본보기가 된다.

<원효>

0 관음 진신과의 인간적인 만남

- 원효가 관음진신을 만나러 낙산으로 가는 길

1. 원효가 벼를 베는 여인에게 희롱조로 벼를 좀 달라고 청하니

여인 또한 희롱조로 말라붙은 벼를 줌

2. 다시 길을 가다가 개짐을 빨고 있는 여인을 만나 물을 좀 달리고 청하자 여인이 빨래하던 더러운 물을 떠서 줌 : 원효는 그 물을 버리고 깨끗한 물 을 떠 마시고 돌아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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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나무 위에서 푸른 새 한 마리가 뜻 모를 울음을 울 뿐인데 그 밑에는 신발 한 짝이 놓여 있었음

0 관음 진신을 뵈러 가는 도중에 벌어진 이 일이 기실 관음 진신을 만나는 사건이었음을 안 것은 원효가 낙산사에 도착해서였다. 관세음보살의 좌대 밑에 조금 전 소나무 밑에서 보았던 신발의 나머지 한 짝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원효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쳤다. 그가 희롱하며 만난 여자들이 다름 아닌 관음의 진신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레를 두 번씩 재계하며 진신을 뵈옵고 그의 가르침대로 절까지 짓고 떠난 의상의 경우는 성공한 만남이고, 신성한 자리를 찾아가며 도중에 여자들을 희롱이나 하다가 정작 진신을 뵙기는 했으나 알아보지 못한 원효의 경우는 실패한 만남일까. 그러나 진신을 만나는 자체는 여기서 문제 밖이다. 이 이야기에서 일연은 우리에게 우리들 삶의 어떤 유형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의상이 경우를 ‘치밀하고 정성스런 만남’이라 정의한다.

원효의 낙산사 사건에 관한 한 그것은 표면적으로 실패한 만남 같다. 하지만 나는 원효의 경우를 ‘우연히 스치듯 한 만남’ 이라 정의한다. <삼국유사>에는 곳곳에 이런 만남이 소개 된다. 그들은 한결같이 우연히 스치듯 성인을 만나고 그런 뒤에야 비로소 그가 성인임을 깨닫는다. 만날 당시에는 성인임을 모르는 이것이 어쩌면 인간이 지닌 한계요 운명이다. 엄밀히 따지면 사실 이것은 만남이 아니다. 성인임을 알고 만나야 진정한 만남이라 할 수 있는데 원효는 그러질 못했고, 알고 난 다음에는 이미 현실적 만남은 끝나 버린 상태다. 그런데 성인과의 만남이 이런 구조를 띠기에 그 만남은 소중한 것이며, 또 이런 만남은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일어날 가능성이 크기에 현실적이다.

■ 운명적 생의 눈을 뜨고

이 땅의 삼대 관음 사찰의 하나로 불리는 낙산사는 이렇듯 깊은 뜻을 지닌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실린 한 편의 시 <조신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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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 새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걸 알겠네.

조신이 강릉태수 김흔공의 딸과 꿈속에서 만나 생시에 이루지 못한 연분을 맺었으나, 고달픈 인생의 괴로움 속에서 도리어 비참해졌다는 이야기를 시적으로 압축해 놓았다. 앞의 석줄에서 조신이 꿈속에서 현실을 오간 생애를 그리면서, 뒤의 넉줄은 한단지몽(邯鄲之夢)의 고사에서 따와 일종의 잠언으로 허망한 세상의 이치를 일찌감치 깨닫기를 권하고 있다. 지금 경상북도 군위의 인각사 앞에 세운 일연의 시비에는 바로 이 시가 적혀 있다.

진전사는 지금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앞서 적은대로 조선 중기 이전에 폐사가 된 듯한데, 해방 이후 이 지역이 38선 이북으로 편입되는 바람에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가 , 전쟁이 끝나고도 상당한 시간이 지난 1965년 문화제 관리국이 대대적인 조사를 벌여 절터라도 찾게 되었다. 절 아래 마을에서는 예로부터 ‘탑골’ 또는 ‘진전터’라는 이름이 전해 내려왔다고 하니, 비록 기록으로 그 지점을 입증할 수 없으나 심증은 있어왔다. 그러니 1965년 발굴당시 ‘진전(陳田)’이라 새겨진 기왓장이 발견되어 이곳이 진전사 터임은 확증되었다.

지금 절터에는 삼층 석탑이 남아 있다. 마을 노인들의 말로는 일제시대까지 조금 기울어진 채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일본 사람들이 쫓겨 가기 직전 도굴을 하려고 완전히 무너뜨려버렸다. 지금의 모습을 다시 갖추기는 발굴조사가 있고난 다음이다. 국보 122호로 지정된 이 탑 기단부에는 여덟 좌의 천인좌상(天人坐象) 양각되어 있다.

2004년, 그리고 그 다음 해 대웅전과 요사체 한 채씩 만들어 진전사 현판을 걸었다. 조계종 본사 가운데 하나인 설악산 신흥사에서 발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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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포화, 도를 깨치다

■ 청년 일연의 금의환향

스물두 살 청년 일연은 선불장(選佛場) 곧 과거 시험의 승과에 나가 당당히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한다. 요즈음으로 치면 수석합격이라고나 할까. 스물 두 살이라면 또한 지금 대학을 졸업할 나이다.

한편 고려 때의 과거시험이 세속에 속한 제도이기는 해도, 승려로서 정식 직함을 받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우선 승과에 합격을 하면 대선(大選)이라는 법계를 받는다. 이렇게 출발하여 대덕(大德), 대사(大師), 중대사(重大師),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오르고 여기서 선종은 선사(禪師), 대선사(大禪師)에 이른다. 물론 이 같은 법계는 승려에게 주어지는 명예일 뿐이다. 다른 과거 시험의 합격자처럼 관직을 얻는 수단은 아닌 것이다.

선종의 선불장은 개성의 광명사에서 열렸다. 고려조에는 승과가 교종과 선종으로 나뉘어 실시되었는바, 광명사는 선종의 시험이 치러지는 곳이었던 것이다. 일연은 처음 시험을 보기 위해 이 절에 갔다. 그러나 그로부터 50년쯤 후에는 국사(國師)가 되어 이 절을 다시 찾는다. 광명사는 국사가 머무는 절이었다.

일연은 선불장에 합격을 하고 청소년 시절을 보낸 강원도를 떠났다.

그의 발걸음이 이른 곳은 지금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의 비슬산(琵瑟山)이다. 비슬산은 일연 당시에 포산(包山)이라 불렸는데 그 이전에는 소슬산이라고도 했다. 정상이 1000미터가 넘으며, 청도군, 달성군, 경산군을 구획지을 만큼 덩치도 큰 산이다.

한편 비슬산은 일연의 고향 압량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일연이 이 산으로 올 때 그로서는 혹여 금의환향하는 기분이라도 들지 않았을까. 이렇듯 속된 생각을 해 보는 것은, 아홉 살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난 그가 겪었을 고초에 값할, 나 같은 세속인의 보상 심리가 작용하는 까닭이다.

일연은 일생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이 산에 거처했다. 스물두 살에 시작하여 마흔네 살에 남해 정림사로 옮겨 갈 때까지가 첫 포산 시절이요. 쉰여덟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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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비슬산 아래 인흥사(仁興寺)에 거처하다가 일흔 한 살에 청도 운문사로 옮겨 가기까지 두 번째 포산 시절이다. 도합 서른 세 해를 일연은 이 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셈이다.

선불장에 나아가 장원급제를 했다는 세속적안 판단 기준보다, 불가에서 훨씬 중요시하는 득도의 체험을 일연은 이 산에 든지 10년 만에 한 것이다.

■ 부처님을 뉘어 놓은 산

용천사(茸泉寺)는 일연이 두 번째 포산시절, 곧 환갑을 맞을 무렵, 퇴락한 법당을 중수해 불일사(佛日寺)라 부른 내력을 지난 곳이다. 언제 다시 용천사로 바뀌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지금은 조그마한 절인데, 격을 갖추지는 못했어도 산의 중턱쯤에 아늑히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는 비슬산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풍습이 전해져 왔다. 산의 정상에 절터가 있고 거기에 우물이 남아 있어, 가뭄이 들면 동네 사람들 가운데 제관을 선발하여 가서 고사를 지내고, 그 우물의 물을 퍼낸다고 한다. 그러면 비가 내린다는 전설을 믿어서이다. 정상에 이르러보니 그곳은 대견사지(大見寺址 지금은 대견사) 였고, 우물도 남아 있었다.

현풍에서 버스를 타고 유가사에 가면 유가사의 뒷면 산 중턱에 도성암이 있다. 도성암 주지는 성찬 스님이었다. 이십여 년째 이 암자에서만 거쳐하고 있다는 그는 만공(滿空)선사의 제자였는데, 처음 찾아뵈었을 때에도 무척 연로했고 기침을 심하게 했다. 두 번째 도성암을 찾을 때는 병이 깊어 대구의 큰 병원에 입원하고 없었다. 오랫동안 이곳에 거처한 이답게 산에 얽힌 여러 전설을 환히 알고 있었는데 대부분 삼국유사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첨가되고 변형된 것도 있었다. 세 번째 찾아가기 전 끝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곳 법당에서 <삼국유사>에는 이름만 적혀 있는 포산구성(包山九聖)을 그린 불화를 볼 수 있었다.그러나 결려 있는 그림은 실물이 아니고 사진이었다. 실물은 여러해 전에 도둑맞고 마침 사진을 찍어둔 것이 있어서 확대해 놓았다고 한다. 비슬산은 그 아름다운 자태만 간직하고 있을 뿐, 그곳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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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는 삼천 암자며, 일연의 비문에 보이는 여러 암자도 지금은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적막한 산이 되어 있었다.

■ 문수보살이 일러준 곳에서 얻은 깨달음

선불장에 합격한 다음 그가 이른 곳을 비문에서는 포산 보당암(寶幢庵)이라 알려주고 있다. 이 암자의 정확한 위치를 지금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이 산에 옹립해 있었다는 삼천 암자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할 밖에 없다.

이 기간 동안 일연에게 일어났던 가장 큰 사건은 “활연한 깨침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문에서도 이 사실을 중심으로 첫 비슬산 시절을 전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일은 전란을 피해 다닌 사실과 맞물린다.

일연이 서른 살 되던 해인 1235년 몽골군은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한다. 몽골의 3차 침입이다. 몽골과의 전쟁은 일곱 차례의 크고 작은 침공으로 이어지지만 이때는 1232년 2차 침입 이후 얼마간 소강생태 끝의 일이었다. 이미 1차 침공 이후 곧바로 최씨 무인정권은 왕을 위협하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놓고 있었다. 이때 최씨 정권의 집권자는 최이 였다.

몽골의 3차 침입은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2차 침입 때 몽골은 살리타가 고려 장수 김윤후에게 사살되는 등 큰 타격을 입은 바 있어서 이에 대한 보복을 하려고 벼르고 있던 중이었다. 경주까지 침입한 몽골은 부인사에 보관 중이던 대장경과 황룡사의 구층탑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일연은 전란의 칼바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기감 속에서도 “생계는 줄지 않고 불계는 늘지 않는다(生界不滅 佛界不增)”는 화두를 놓고 정진에 들어갔다. 이 화두는 불교의 연기(緣起)와 관련되는 매우 뜻 깊은 것이고, 불경 가운데 가장 짧은 경이면서 요체를 담고 있다는 <반야심경>에서도 중요한 구절이다.

어느 날 활연한 깨달음이 왔다. 일연은 사람들에게 선포하였다.

“내가 오늘 삼계(三界)가 환몽(幻夢)과 같고, 대지에 실오라기 하나만큼의 장애도 없음을 보았노라.”

세상이 꿈만 같으며, 그런 세상에 사는 일생이기에 걸거치는 일 없이 살아갈 수 있겠노라는 이 혁명과도 같은 선언, 그해에 일연은 삼중대사(三重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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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가 되었다. 서른 한 살 되던 1236년의 일이고 이로써 선승으로서 깨달음의 순간을 얻은, 그야말로 득도(得道)의 경지를 지나가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다시 아홉 해 뒤 일연은 선사(禪師)가 되는데, 여기까지가 그의 첫 비슬산 시절에 일어난 중요한 일들이다.

■ 숨어 풍류를 즐긴 사람들

0 <삼국유사> 피은(避隱)편의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인의 이야기

- 관기는 산의 남쪽, 도성은 산의 북쪽에 살고 있었는데 서로가 부를 때는 부르는 사람 쪽을 바람이 불었다

- 죽을 때 도성은 처소의 바위틈으로 몸이 뚫고 공중으로 올라갔는데 수창 군(대구 수성구)에 몸을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음

- 지금도 도성암 암자 뒤에는 어마어마한 바위 무더기가 있다.

젊은 시절 일연이 생각한 삶의 방향이란 무엇일까? 그때 썼다는 시의 부분을 보자.

한밤중

달빛 보며 자리 잡고 있으니

몸에 걸친 옷

바람 부는 대로 반 남아 날도다

거적자리에 바로 누워 단잠 들 것이니

티끌 세상

꿈속에서도 가지 않으리라

앞 네 줄에서 일연은 수련하는 불승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여실히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거적자리에 누워서도 단잠 들 것이니, 홍진에 묶일 세상에서는 꿈속에서도 가지 않으리라는 결연한 다짐을 한다. 다짐은 결연하지만 오히려 비장해 보인다. 서른 전후의 아직 젊은 그이다. 세상의 유혹은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은 과하다 싶게 자신의 의지를 시 속에 집어 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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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시는 앞서 조신의 꿈 이야기 끝에 일연이 붙인 시와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겠네”라 노래한 대목은 여기서 “티끌세상, 꿈속에서도 가지 않으리라”라고 부른 대목의 시적 변용이다.

스무 살 초반부터 마흔 초반까지 20여 년간, 일연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대한 보다 자세한 기록이나 구체적인 행적은 여전히 알 수 없다. 이것은 일연의 생애를 따라가며 끝내 놓을 수 없는 의문 가운데 하나이다. 만년에는 국사까지 지낸 고승이다. 고려시대 때 국사가 어디 간단한 자리이던가, 요즘으로 치면 조계종 종정에 가톨릭 추기경을 합쳐도 모자랄 비중의 위치였다. 대체적으로 그런 이들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기록이 산재해 있으련만, 도대체 옹색한 비문의 기록 외에, 그리고 삼국유사를 통해 짐작하는 간접적인 자료외에 신통치가 않다.

내가 여름철에 비슬산을 찾았을 때다. 산의 나무는 울창한데 가끔 불어오는 시원한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이 일연이 바라본 옛 모습이려니 싶었다.

◉ 세상 속으로

■ 정안과의 만남

일연의 비문을 다시 살펴보건대 그의 남해 주석 시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짤막한 소식을 발견할 수 있다.

기유년(己酉年 1249년) 상국 정안(鄭晏)이 남해에 있는 그의 개인집을 내 놓아 절을 만들고 정림사(定林寺)라 하였다. 그리고 스님을 청하여 그곳에 주석케 했다.

기유년이라면 일연의 나이 마흔 넷일 때이다. 이 기록으로 우리는 일연이 오랫동안 머물던 비슬산을 떠나 새로운 거처로 삼은 곳이 남해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정식 주지의 자리이다. 기록으로 나타난 일연 최초의 직장이다. 전쟁의 와중에서 수도정진해온 그동안의 삶과는 달리, 이제 그의 존재가 외부로 알려지는 계기가 여기서 잡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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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을 초대한 정안은 당대의 실력자였다. 경남 하동이 본관인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최씨 무인 정권의 돈독한 사랑을 받으며 최고 실력자 층의 반열에 오르는데, 아버지 정숙첨은 최씨 정권의 두 번째 집권자인 최이를 사위로 삼을 정도였다.

정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닦아놓은 터전에다 최이의 신임을 받아 중요한 직책을 맡아 이했지만, 무인정권의 불합리한 점을 일찍이 발견하고 조용히 은퇴하기만을 바랐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와 사뭇 다른 점이다.

은퇴한 다음에 그는 불사(佛事)에 힘썼는데, 오히려 그것이 너무 지나쳐 노비들의 원성을 살 정도였다. 원성을 샀다는 사실은 그다지 좋을 바 아니지만, 그만큼 불교에 심취해 있었음을 반증한다. 개인 재산을 들여 국가사업으로 진행하던 대장경 간행 사업을 돕는데, 판각 경비의 절반을 댈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신심과 희생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이런 일이 혼란한 중앙 정계에서 벼슬살이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그를 행복하게 했던 것이다.

■ 정림사와 대장경 간행사업

최근 한 학자는 해인사에 수장된 팔만대장경이 강화도의 대장도감에서가 아니라 분사도감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면서, 분사는 남해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이 그렇다면 이는 매우 충격적이다. 기실 우리는 세계문화재로 등록까지 한 팔만대장경에 대해서 아는 바가 그다지 많지 않다. 몽골의 3차 침입 때 부인사에 보관 되어 있던 대장경이 불타자 새로 팔만대장경을 조성했다는 매우 피상적인 정보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것이 불력으로 외적을 물리치려는 동기에서 제작되었다는 정도가 추가될 뿐이다.

한편 이규보(李奎報)의 기록에 따르면, 최씨 정권이 강화도에 대장도감과 선원사를 설치하고 이 일을 진행했다고 하는데, 이 점 믿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대장도감이 어떻게 조직되었으며 여기에 얼마만한 인력이 투입되었는지, 게다가 여기에 들었을 엄청난 경비는 어떻게 조달했는지 알 수 없다. 전란기에 그것도 강화도라는 작은 섬에 천도 되어 있던 고려 정부가 과연 이만한 일을 해낼 만큼 힘이 있었을까.

이런 이유로 분사도감의 역할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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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감은 쉽게 말하자면 팔만대장경에도 몇몇 판에 분사도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정림사의 위치와 그 기능을 장황히 설명하는 데는 달리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릴 뻔했던 일연의 생애에서 중요한 부분을 건사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문에 는 단 한 줄 밖에 언급되지 않은 남해 시절 12년간 일연의 행적이 좀 더 자세히 밝혀진다.

대장경 제작과정에서 증의(證義)라는 것은 오늘날 감수와 비슷한 일이라 하겠는데, 시간상으로 비록 전체를 다 하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으로 참여했으리라 보인다. 이런 일을 맡길 때는 절을 희사한 이가 이 사람의 능력을 인정한 다음이라야 한다. 마흔 넷의 나이, 학문과 신앙의 경지가 무르익어가는 선승 일연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바로 정안이었다.

선정(禪定)의 여가에 두루 대장경을 열람했다는 비문의 기록이며 <삼국유사>의 곳곳에 대장경과 관련된 소식을 놓치지 않고 수록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일연의 대장경에 관한 관심이 남달랐음을 알게 된다. 팔만대장경이 완성된 15년 뒤, 일연이 중앙에 널리 알려진 다음인 예순 세 살에 운해사(雲海寺)에서 대장낙성회(大藏落成會)를 주관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길을 열어준 계기는 정안과의 만남 그리고 정림사 주석에 있으므로 우리는 그 시절을 소중히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우리는 이 유서 깊은 정림사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다만 여러 자료와 위치를 참조해서 경남 남해군 고현면 다사리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신충 - 정안의 다른 모습

나는 일연의 생애에서 이 기간을 남해 시절이라 부른다. 마흔넷에 처음 발을 들여 쉰여섯에 강화도로 불려 올라가기까지 열 두 해를 가리킨다. 앞서 밝힌대로 이 기간 동안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고, 대장경 판각의 현장에서 보다 폭넓은 경전 공부를 했다. 게다가 여기서 익힌 출판에 관한 지식이 후일 이 분야의 여러 일을 해낼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고 지금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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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충은 효성왕이 아직 욍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을 때부터 그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때는 왕위가 장자에게 무조건 승계되는 법이 없이 왕자나 형제 가운데 능력 있는 자가 등극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충은 잣나무 잎이 우거진 그늘 아래서 그와 더불어 바둑도 두며 신하로서 성심껏 모셨다. 그러나 이 패기만만한 왕자는 신충에게 이렇게 약속을 했다.

“내 장차 왕위에 오르거든 그대를 잊지 않겠소. 이 잣나무에 대고 맹세하리다.” 드디어 효성왕은 그 자리에 올랐다.

신충은 효성왕뿐만 아니라 경덕왕 대까지 두 임금에 걸쳐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 충직한 신하의 도리를 다했다.

신충과 정안은 여러면에서 비교된다. 세상의 이복(利福)을 모두 누리고 살았다는 점에서 우선 두 사람은 닮아 있고, 만년에는 세상의 번잡함을 거두고 불교에 심취하여 인생의 진리를 찾으려 했다는 점 또한 같다. 그런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그 인생의 마지막에서다. 신충은 끝내 은거의 길에 들어 그것으로 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하지만 정안은 어쩔 수 없는 사정에 말려 다시 세상에 나가게 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결국 두 사람의 최후가 좋고 좋지 않았던 열쇠는 은거에 있다.

일연이 중요시한 부분은 이것이다. 자신의 첫 후원자 정안의 비참한 최후를 보면서, 일연은 현실 정치의 무서움에 대해 뼈저린 체험을 했다. 그것이 모두 이기심과 탐욕에서 비롯되었을진대, 인생의 참된 가치를 구현하고 사는 길의 표본을 그는 신충을 통해 보여주면서 애틋한 마음으로 정안을 그렸을지 모른다.

■ 가야를 찾아가는 유일한 자료

‘가락국기’와 ‘금관성 파사 석탑’조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야의 역사를 전해주는 가장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고려 문종 때 금관성의 지사가 쓴 글을 입수하여 이를 전재한 ‘가락국기’나 호계사를 직접 답사하고 쓴 ‘금관성 파사석탑’조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는 것은 그대로 가야사가 살아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야국의 존재가 오직 이 자료 하나로 전해지는 까닭이다.

우리는 <삼국유사>의 머리에 실려 있는 단군신화를 비롯한 삼국의 건국 신화를 이 책의 성격과 더불어 일연의 역사의식을 가늠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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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한다. 같은 선상에서 '가락국기'의 수록은 최소한 같은 무게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 고대사에서 가야국의 존재가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 자료의 미비에서 생겨난 인식이기도 하다. 한반도에서 남방문화의 모습을 확인하는 유일한 왕조가 가야라는 점과 함께, 나중 신라문화에 끼친 영향 등에서 가야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하는 기록이 없어 그 평가는 소홀하기만 했다.

◉ 유일하게 남은 저서 <중편조동오위>

■ 정권의 소용돌이

마흔 넷에 시작한 일연의 남해 생활은 쉰여섯 그러니까 1261년 왕명을 받고 강화도롤 가기까지 12년 동안 이어졌다. 거기서 그는 앞서 살펴본 바 남해 정림사의 주지 직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이에 정국에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60여 년 지속되던 최씨 무인정권이 막을 내리고 왕정이 복고된 일이다. 이 소용돌이 속에 일연은 어찌하고 있었는가?

최이에서 최항으로 이어진 대는 그다지 탄탄하지 못하였다. 최이 자신이 아들인 최항을 못내 미더워하지 않았다.

정실부인에게서 아들을 보지 못한 그가 기생의 소생이었던 최항을 환속시켜 후계자로 삼는 것이다. 결국 1249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최항은 이후 8년간 집권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역정을 보여준다.

최충헌이 죽은 다음 최이는 그의 아버지 밑에서 일하던 심복들을 모두 죽이거나 유배 보낸다. 이는 정통성이 없는 정권의 소심함에서 비롯되는 것, 어쨌거나 최이는 요소요소에 자신의 심복을 키우면서 정권을 유지해 나갔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 그것뿐인 최항도 같은 수순을 밟았다. 심지어 계모인 대씨(大氏)를 죽이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1257년 최항이 죽고 아들 최의가 집권하지만, 이 정권은 채 1년이 못가고 무너진다. 최의는 정권을 이어받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고, 선대 집권자들처럼 위험인물을 제거할 힘도 없었다. 최의를 죽인 유경 등은 기실 최항의 아랫사람들이었다. 최씨 정권을 포함한 90년의 무인정권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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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편 조동오위>를 찾게 된 사연

일연의 비문에서 나오는 그의 저술은 두 가지이다. 어록(語錄)2권과 게송잡저 3권이 그것인데, 앞은 그가 행한 설법이나 설법에 가까운 산문일 것이요, 뒤는 불교사나 그에 가까운 운문일 것이다.

일연의 비문에 나타난 그의 저술은, 중편조동오위 2권, 대장수지록 3권, 제승법수 7권, 조정사원 30권, 선문염송사원 30권,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비문에 없는 삼국유사도 그의 저술이 맞느냐고 세간의 입방아를 찧게 했다. 정말 일연이 찬술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해야 할 책은 <중편조동오위>이다. 그동안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이 책이 한 불교학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지난 1970년대 중반 일본 교토대학 도서관에서였다. 당시 연세대사학과에서 봉직하던 민영규(閔泳珪) 선생이었다.

1. '조동'은 중국의 동산양개(洞山良介)와 조산본적(曺山本寂)이 성립한 선종 의 일파이다. 사제 관계인 두 선사의 이름 앞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2. 역사적으로 일본은 조동종이 매우 큰 세력을 형성함

3. 중편자의 이름으로 회연(晦然)이라 적어 놓았는데 회연은 일연의 처음 이 름이다. 그리고 책의 서문을 읽어보면 일연의 저술이 틀림없다.

■ 우리나라 조동종의 큰 흐름

서문에서 일연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를 간략히 밝혀 놓았다. 요컨대 쉰하나 되던 해, 윤산(輪山) 길상암(吉祥庵)에 주석하여 한가한 시간을 얻자, 평소 꿈꾸어 오던 일을 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책으로 간행하기는 일연의 나이 55세 때이다. 일연이 남해로 옮긴지 일곱 해를 넘길 무렵이었다.

일연은 마흔넷에 정안의 초청으로 남해 정림사 주지로 왔다가 그가 최항에게 죽임을 당하는 쉰하나에 길상암으로 옮겼고 거기서 <중편조동오위>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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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들어가 5년 만에 찬술을 끝냈다. 이듬해 강화도에 있는 왕명을 받고 남해를 떠났다.

조동종에 대한 관심은 조선 초기까지 이어져 김시습의 <조동오위요해>를 나오게 한다. 그러므로 일연의 책은 우리나라에서 최소한 김시습 시대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편조동오위>의 전래가 언제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앞서 밝힌바, 조동종은 일본에 가서 큰 세력을 얻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일본의 선종을 주도하는 종파이거니와, 이미 중국으로부터 조동종을 수입했던 일본은 아마도 임진왜란 무렵,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간행된 책을 가져 가 그것이 전본의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다음에 제 2부가 이어집니다.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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