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25. 14:29ㆍ독서후기
일연을 묻는다(2)
- 위대한 國師 -
* 출생 시 이름, 김견명(金見明) + 승려 명 회연(晦然) = 一然
- 밝음(明)과 어둠(晦)이 둘이 아니고 하나(一)이다.
- 晦 : 그믐 회, 어둡다, 캄캄하다, 밤
■ 고운기 지음
◉ 바다에서 본 것들
오어사 체류 기간이 불과 한 줄로 언급되고 말았지만, 이 시기를 나는 일연의 동해 시절이라 명명한다. 그 인생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 까닭이다. 처음 내가 대왕암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해는 지고 동해의 바다 위에 달이 떠올라 있었다. 파도에 자갈 끌리는 소리뿐 바로 앞에 보이는 바다 가운데 왕릉의 고혼은 나그네의 방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요할 뿐이었다.
■ 동해 검푸른 바다를 만나다
사대에 걸쳐 60여 년간 계속되던 최씨 무인정권은 몽골전란을 겪으면서 무너졌다. 그렇다고 고려 왕실이 옛날의 권위를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무신정권에서 휘둘림을 당하더니 이제는 오히려 이민족의 칼날아래 복종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왕실의 권위도 민족의 자존심도 허물어졌다. 그런 와중에 일연은 그의 나이 쉰여섯이 되던 해 강화도로 초청을 받아 올라 간다. 경상도 지역에서만 머물던 일연이 처음 중앙에 등장했던 것이다.
일연의 강화도행은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이해된다. 무인 정권이 무너져 왕정이 복구된 다음, 전란의 후유증을 치료하려는 정권담당자들의 계산이 여기에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일연이 정치적으로 중립의 위치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그 이전까지 무인정권을 지원하던 수신사 계통의 승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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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해, 새로운 정권은 몽골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탄압의 칼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일연의 강화도 체류는 3년 만에 끝났다. 번잡한 도회생활을 싫어한 그의 성향이 결국 쉰아홉이 되던 해 지금의 포항 근처의 오어사(吾魚寺)로 내려간다.
오어사 생활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인생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은 동해안을 배경으로 내려오는 설화이다. 탈해(脫解)가 왕이 되는 장면이 그 첫째이며, 연오랑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가 왕과 왕비가 되는 이야기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한편 처용의 설화를 간직한 개운포도 이에 해당되며 문무왕과 신문왕의 치적이 담긴 대왕암과 감은사의 설화도 무척 중요하다. 이런 이야기들은 일연의 동해 시절에 힘입어 <삼국유사>에 거두어 들여졌다고 보아 무방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일연의 또 다른 세계관을 읽는다. 이런 계기가 짤막한 오어사 주석과 관련된다.
포항에서 버스를 내려 오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포항이 제철도시가 된 이후 한가하던 작은 마을도 무척이나 커졌다. 오천은 포항의 위성도시로, 여기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시내를 벗어나 거처를 잡은 곳인데 그런 까닭에 이제는 규모 있는 소도시로 발전해있었다.
오천으로 들어가기 전 긴 담이 쳐진 군부대를 끼고 달렸는데 그 부대의 입구에 “일월지(日月池)입구”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바로 연오랑 세오녀의 전설을 간직한 해달 못이다.
■ 해와 달을 섬긴 사람들
동해 바닷가에 살던 연오와 세오 부부가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은 신라 제8대 아달라왕 때였다. 서기 157년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의 일이다. 하루는 바위가 하나 떠오르더니 연오를 태우고는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후 그의 부인 세오가 바닷가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자. 역시 그 바위가 나타나 태우고는 남편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들은 일본에 가서 각각 왕과 왕비가 되었다.
이 이야기의 끝에 일연은 주석을 붙여, 일본 왕 가운데 신라 사람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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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아마도 한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한다. 이 부부가 일본으로 가버린 다음, 신라 땅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렸다. 기괴하게 여긴 왕이 일관을 불러 물어보니 해와 달의 정령이 사라져 그렇다고 하엿다. 그 정령은 연오와 세오 부부를 일컫는 말이다.
일본으로 사람을 보내 이러한 사실을 알리자 연오가 대답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켜서이다. 어찌 마음대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내가 비단을 짜 놓았으니, 이것을 가져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 했다. 일러준 대로 했더니 과연 해와 달이 다시 빛을 찾았다. 이 제사 지낸 곳을 ‘일월지’라 부르는데 ‘도기야(都祈野)’라고도 한다고 일연은 부연해 놓고 있다.
일연은 실제 있었던 일로 받아들이려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매우 신중한 태도로 일본에 가서 왕이 된 신라 사람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이 이야기의 허구성을 완곡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사실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하면서도, 이야기의 심층구조 속에서 사람들이 믿고자 했던 바를 살려 놓는 것이 바로 “연오랑 세오녀”이다. 해와 달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산다고 생각한 이곳 사람들은, 그 해와 달이 부리는 조화를 잘 알고 그를 숭배하는 신앙을 가졌을 것이며, 그것의 인격화가 연오랑 세오녀로 나타났으리라.
■ 고즈넉한 오어서의 전경
그때만 해도 오어사는 제 모습을 완전히 갖춘 절은 아니었다. 저수지가 생기면서 그렇게 되었을까? 당간지주며 일주문은 자취가 없고 담도 쳐 있지 않았다. 어찌 이렇게 버려져 있나 싶었다. 한적한 산골 절에 무슨 담이 필요하겠는가만, 울도 담도 없는 운치를 즐기기 이전에 관리가 허술하여 된 결과인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절의 뒤편은 운제산(雲梯山)이요, 양 옆 계곡과 능선을 타고 올라가니 좌우에 각각 원효암과 자장암이라 이름 붙은 암자가 있었다. 규모는 원효암에 비해 자장암이 제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절을 포함해서 암자까지 스님은 아무도 없고 몇몇 신도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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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암에는 자장바위가 있다. 신라 때 자장(慈藏)이 수도하였다는 곳인데,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서 있어서 우리는 발걸음을 떼기조차 어려웠다. 그리고 그 바위 아래쪽에 있는 토굴에서 자장은 거쳐하기도 하였다 한다. 이곳 역시 우리네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 혜공과 들사람의 면모
쉰 아홉의 나이에 이런 궁벽진 절로 찾아 든 일연은 이곳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삼국유사>속에 실어 놓고 있다. 바로 의해(義解) 편의 ‘이해동진(혜숙과 혜공의 삶)’조에 나오는 혜공(惠空)과 원효(元曉) 사이에 벌어진 기발한 내기이다.
혜공은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어미가 남의 집 종이었으므로 그 역시 종의 신분이지만, 자라면서 범상치 않은 일을 자주 보여주어 종국에는 그 주인이 면천을 해 주었고 그 길로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걸어간 승려의 길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지 한다면, 그는 법화신앙에 충실한 승려였으며 신령스런 이적을 많이 남기고 죽을 때는 공중에 떠서 사라졌다는 데에서 진사불교와 정토 신앙의 특이한 모습을 보게 한다.
그런 혜공은 만년에 바로 이곳 오어사에 머물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절의 이름은 항사사였다. 지금 동네 이름이 항사동인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원효가 매양 혜공에게 와서 불경의 어려운 곳을 물었다하니, 그의 학식이 높은 바를 알겠거니와, 지금도 사람들은 혜공이 원효의 스승이라 말한다. 절에 요양하러 왔다는 한 불자가 그렇게 자랑스러운 듯이 말하며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루는 두 스님이 절 앞으로 흐르는 시냇가를 따라 걷는데요, 장난기 심한 혜공 스님이 원효 스님에게 내기를 하자고 했어요. 같이 물고기를 먹고 똥을 누어보자 그래서 잡아먹은 물고기가 살아나는 사람이 내기에 이기는 것이라고, 이 내기에서 혜공 스님이 먹은 물고기는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다.
기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나오는데, 살이 보태져 이 지역에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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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 끝에 혜공이 장난말로 ‘너는 똥이고 나는 고기(吾魚)이다’ 라고 했으므로 이 절 이름을 오어사로 했다는 이야기다.
해동불교의 좌장 원효가 한판 패를 당했다는 이야기다.
■ 용들이 사는 바다
일연의 바다체험은 역사적인 데서 문학적인 데까지 매우 넓게 퍼져 있다. 다만 재미로서만이 아닌, 민족의 심성에 관련된 의미 깊은 이야기가 바다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는 여러 편 실려 있다. 수로부인(水路夫人)이야기, 처용(處容)의 이야기 그리고 문무왕과 신문왕 부자에 얽힌 이야기 등인데, 동해를 두고 일어난 이 이야기에는 모두 용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용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이야기 전반부에 향가 '헌화가(獻花歌)' 가 실리면서 애틋한 사랑의 분위기를 연출하는'수로부인'조는 미모의 강릉태수 부인 수로가 동해의 용에게 잡혀가면서 그 분위기가 급전한다. 용이 미모를 탐해 잡아 갔다는 것인데 망연해 있는 태수에게 부인을 구출할 방법을 한 노인이 나타나 알려준다. 곧 바닷가에 모인 백성을 시켜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 남의 부인 앗아간 죄 크고 크도다 / 만일 거역하여 내 놓지 않으면 / 그물로 너를 잡아 구워 먹겠다"는 노래를 부르며 막대기로 땅을 치라 한다. 이 노래가 '해가(海歌)'이다. 가야국 수로왕의 탄생 설화에 나오는 '구지가(龜旨歌)'와 매우 닮아 비교연구 대상이 되어 왔는데 어찌됐든 노래가 끝나자 용이 부인을 받쳐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 폐사의 탑에 서린 뜻
신문왕 때 이 절 앞의 바닷가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한 작은 산이 감은사를 향하여 떠 와서 파도가 노는대로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었다. 왕이 그 연유를 물으니 김춘질 이라는 일관이 대답하였다.
돌아가신 임금께서 지금 바다용이 되어 이 나라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게다가 김유신 공은 33천의 한 아들이라 이제 내려와 대신이 되시고 두분 성인
께서 덕을 같이 하시어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주려 하십니다. 만약 폐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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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으로 가신다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를 얻으실 것입니다.
왕이 나간 곳은 지금의 이견대(利見臺)가 서 있는 자리였다. 감은사와 해중 왕릉의 중간쯤에 위치한 이견대에서는 한눈에 바다 가운데 해중릉이 바라다 보인다. 왕이 보니 마치 거북 모양의 돌섬인데 그 위에 대나무가 한 그루 있어 낮에는 둘로 갈라졌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그렇게 합쳐질 때는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이었다. 이때 바다용이 나타나 왕에게 이 대나무를 가져다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만파식적이다. 이 피리는 나라를 지키는 보물로 신라의 3대 보배 중 하나였다.
일연은 여기서 더 나아가, 유언에 따라 문무왕의 뼈를 간직한 곳이 대왕암이고, 절의 이름은 감은사이며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이 이견대라 하여 이 세 곳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감은사는 선왕을 위한 사당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도 하겠다.
절에 세우는 탑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탑의 자상한 불교적 의미를 말하고자 해서가 아니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폐사를 찾게도 되는데, 그럴 때면 절터를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가 대체적으로 탑이다. 그렇게 남아 있는 탑을 보면서 우리는 색다른 감회에 젖게 된다. 그 감회의 정체는 아마도 탑이 가진 불멸설에 대한 경외심일 게다. 사람이 만든 것들이란 세월이 가다보면 썩어 재로 변하기 십상이지만 돌로 만든 탑이야말로 천세만세 하며 우뚝하다.
■ 용의 바다 처용의 도시
<삼국유사>에서 울산은 ‘처용가’와 ‘처용랑 망해사’ 조의 무대가 된다. 울산은 예로부터 일본과 교류하는 중요한 항구였다. 또한 중국과의 항로도 뚫려 있었고, 이 길을 통해 일본과 중국을 오고가던 먼 이국의 배들도 기항했다는 증거가 남아 있다.
이야기는 헌강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헌강왕 때라면 신라의 번성이 극에 달해 <삼국유사>의 기록인즉, 경주 시내의 집들은 모두 기와로 지붕을 이었고 땔감으로는 숯만 쓴다고 했으니, 그 풍요로움을 어디다 비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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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가 곧 신라 시대의 한 정점이었고. 달도 차면 기우는 이치대로, 또 한 시대는 내리막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번성 뒤에는 사치와 향락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한 사회의 기강을 흩트리고 계층간의 불화를 낳는다.
헌강왕의 울산 순행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돌아오는 도중에 해변에서 가득한 운무를 만나고 이 갑작스런 기후 변화를 일관은 동해용이 일으킨 변괴라고 말한다. 왕은 용을 위해 이 근처에 절을 지어라 명한다. 그러자 운무가 개었다. 이곳의 이름을 개운포라 한다.
동해 용은 운무가 갠 다음 임금 앞에 나타나 기쁜 춤을 추며 그 덕을 치하하고 그의 일곱 아들 가운데 하나를 왕에게 딸려 보내며 보필하도록 한다 그가 바로 처용이다. 왕을 따라 서울로 온 처용이 바람난 아내 때문에 겪는 수난이라든지, 아내와 동침하는 역신(疫神)을 쫓아내기 위해 불렀다는 체념조의 ‘처용가’가 그 다음을 잇는다. 바다를 떠난 처용이 향락의 극치에 다다른 도시에서 좌절한 것일까?
일연은 처용의 이야기에서 한 시대의 종막을 읽고 있다. 처용이야기가 나오는 ‘처용랑 망해사’조는 기실 헌강왕이 주인공이다. 왕이 동서남북으로 다니면서 여러 신을 만나는 내용인데, 그래야 했던 까닭은 자꾸만 기울어 가는 나라 형편 탓이었다. 왕은 만나는 신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춤을 추었다. 신하들은 왕에게 무슨 신나는 일이라도 있어서 그러는 줄 알았다. 그들의 눈에는 왕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 다시 포산에 들어
■ 오어사에서 인흥사로
운문사는 지금 경북 청도에 있는 비구니들만의 사찰이다. 창건 연대를 보면 신라시대까지 올라가는 이 절이 처음부터 비구니 사찰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일제시대의 가혹한 불교 시련기를 거치며 폐허가 된 이 절이 해방과 전쟁을 거친 뒤 다시 일어서면서 비구니들의 안식처요 정진 도량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학생이 제일 많은 승가대학까지 설립되어있다.
우리는 이제 일연이 <삼국유사>를 어떻게 기필(起筆)하였는가를 알아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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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가 되었다. <삼국유사>를 저술한 구체적인 착상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인흥사와 운문사로 발길을 옮겨야 한다.
오어사에 잠시 머물렀던 일연은 인흥사로 자리를 옮긴다. 그의 나이 이미 환갑을 앞두고 있었다. 원종(元宗) 5년 1264년이다. 동해 바다가 가까운 오어사를 떠나 이곳으로 온 필연적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마 고향 가까운곳을 바랐던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인흥사가 일연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비슬산 아래 위치하고 있다는 것도 이거(移居)의 이유로 보인다. 왕명을 따라 일흔 두 살에 운문사로 옮겨가기까지 그의 공식적인 주석처는 이곳 인흥사였다. 나는 이 시간 열세 해를 일연의 제2차 포산 시절이라 명명한다. 일연이 처음 인흥사로 옮겼을 때 이 절의 주지는 만회(萬恢)였다. 일연이 오자 그는 어른의 자리를 양보한다. 이 부분을 일연의 비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오어사에 머문지 얼마 있지 않아 인흥사의 주지 만회가 주석(主席)을 스님에게 양보하였다. 그러자 배우려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 일 이후에 인흥사는 일연을 바라보고 많은 승려와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그렇다면 인흥사는 지금 어디인가? 이 절은 일연이 거처한지 십 년째 되던 해에 임금의 사액을 받아 절을 키우고 그 이름을 인흥사라 했다. 1274년 이해에 충렬왕이 즉위하였다. 이 사실과 결부시켜보면 두 가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어떤 경위로건 일연이 충렬왕과 교류하는 사이였다. 충렬왕은 경주 행재소에 내려왔을 때 일연을 가까이 불렀고 개성으로 돌아갈 때는 아예 동행하여 국사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대장 낙성회 즉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이를 축하하는 자리에 일연을 오게 했다.
둘째 충렬왕이 즉위하자 인흥사의 사액을 내려 주었다. 절터는 지금의 남평문씨 세거지이다.
■ 인흥사에서 쓰기 시작한 <삼국유사>
일연이 인흥사에 거처하는 동안 했던 일은 두 가지 정도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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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앞서 소개한 대장경 낙성회 주맹을 맡은 일이다. 그의 나이 63세 때 일이다. 국가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만든 거대한 사업의 마무리 행사를 일연이 주관하였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삼국유사 연표의 저본이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역대연표를 제작하였다는 것이다. 인흥사에는 일연과 남해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스님들이 같이 있었다. 대장경 판각의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을 일연은 인흥사로 불러 기숙을 같이하며 다른 일거리를 만들어 주었는데 거기서 삼국시대의 연표를 완성하고 이의 출판을 보았던 것이다. 바야흐로 <삼국유사>가 탄생하는 첫걸음인 셈이었다.
그러면 이 일을 좀더 확대해석해 보자. <역대연표>를 완성하고 간행한 것은 <삼국유사>저술로서는 거의 반을 마친 셈이었다고 말이다. 실제 많은 학자는 이 책이 <삼국유사>의 첫째 권인 왕력(王曆)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단일 왕조가 아닌 삼국이 정립되어 있었던 우리 고대사를 돌이켜볼 때 그 연표를 작성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감수하며 작업을 해낸 이유야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여러 정황 증거로 보아 지금 해인사에 그 일부가 남아 있는 <역대연표>의 저자를 우리가 일연으로 보는 것은, 이 시절 이러한 일을 해 낼 유일한 인물로 그를 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국유사 저술의 단초를 우리는 여기서 발견하는 셈이다. 그 필생의 공력이 들어간 책의 가닥이 잡힐 듯하다.
■ 운문사의 새벽예불
발걸음을 돌려 다시 운문사로 향했다. 구름의 문(雲門)이라는 매력적이면서도 불교적 의미를 깊이 간직한 이름을 가진 이 절에 나는 오래 전부터 와보고 싶었다.
인흥사에 머물던 일연은 일흔두 살 되던 해에 이곳으로 옮겨 온다. 충렬왕 3년 왕명을 받들어서였다. 이미 고희를 넘기신 일연으로서는 여기를 자신의 마지막 주석처로 삼고 싶었을 처이다. 그러나 왕은 그를 그곳에 가만 놔두지 않았다. 앞서 적은대로 일흔 다섯 되던 해 경주 행재소로 불러들였고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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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까지 동행해 줄 것을 요구한다. 운문사에는 그렇게 해서 네 해만 머물고 만다.
◉ 운문사
■ 운문면이라는 동네
일연의 운문사 주석은 네 해에 그치고 말았다. 일흔 두 살 늦은 나이에 이 절을 찾은 일연은, 정녕 그의 마지막 주석처를 이곳으로 삼으려 했지만 시절은 그를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일본 원정군을 독려하기 위해 행재소를 차린 충렬왕을 가까운 거리에서 모셔야 했고, 장차 왕이 환궁할 때는 개성까지 모시고 가야 했다. 운문사 시절은 그런 이유로 네 해 만에 끝난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시기를 다시 보는 까닭은 이때 본격적으로 <삼국유사>가 씌어 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생애를 마감하는 시기를 생각하는 나이, 사상과 의식이 익을 대로 익은 고승이 마지막 힘을 들이기로 결심한 일에 우리는 비상한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버스는 청도읍으로 들어가는 길을 버리고 동곡이라는 마을로 접어든다. 이제 운문사가 있는 운문면에 가까워진 것이다. 운문, 이 동네는 우리 고려사에서 매우 이색적인 면모를 가지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초기의 유학자 권근(權近)은 청도를 두고 노래하기를 “고을이 오랬으니 지령이 뛰어나고 / 산이 비껴 있어 검푸른 빛 띠었네”라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역사가 오래되고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 청도이다,
좀 더 올라가자면 그 옛날 이서국(伊西國)이 서 있던 자리이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의 ‘이서국’조를 보면, 노례왕 24년에 이서국 사람이 와서 금성 곧 신라 서울 서러벌을 쳤다 하고, ‘미추왕과 죽엽군’ 조에 보면 저 유명한 귀에 댓잎을 꽂은 군사들이 등장하는 데, 제 4대 유례왕 때에 바로 이서국 군대가 금성에 쳐들어와 막아낼 힘이 없자 이미 죽은 미추왕의 무덤에서 이 군사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죽은 왕의 혼령까지 동원되어야 막을 수 있었던 것이 이서국의 군대였던 것이다. 이어 운문사에 전해오는 ‘제사납전기’를 인용하여, 이서국 금오촌에 영미사라는 절이 있음을 알려주는데 여기서 금오촌이 지금의 청도이다. 청도군은 옛날 이서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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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문사가 서기까지
운문사에 간직된 사지(寺誌)를 보면 절의 초창 년대가 신라 시대로 올라간다. 이름 모를 어느 신승(神僧)이 이곳에 절을 지었다는 기록으로 출발하는 이 사지는 거의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어서 새로운 사실을 볼 수 없으나, 한 가지 참고가 될 만한 것은 이 절을 지키고 중창해 온 역사의 가닥을 세분의 스님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그 세 분은 원광(圓光), 보양(寶讓), 그리고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學一)이다.
운문사에는 석조여래좌상, 사천왕 석주 등 여러 보물이 경내에 보관되어 있다. 특히 대웅전 앞에 있는 두 기의 삼층석탑은 대웅전이 위치한 자리의 지세가 전복되기 쉬운 배 모양의 흉맥이라 하여 그 지세를 누르기 위해 세운 것이다. 기실 그만큼 운문사는 일일곱 채나 되는 크고 작은 전각이 벌여 있지만, 전통적인 사찰의 전형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다.
■ 원광 법사가 지어준 세속오계
일연은 <삼국유사> ‘의해’편의 첫머리를 원광법사로 시작하고 있다. 이 편은 전형적인 승전(僧傳)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그런 만큼 어느 편보다 저자의 손길이 많이 간 부분이다. 같은 승려의 입장으로서 인지상정이지만 이미 중국에서부터 마련된 전범이 있으므로 이를 따르기로 했을 것이다. 그렇게 노심초사한 부분의 첫머리를 원광으로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원광은 기록으로 찾아보는 신라의 첫 해외 유학승이다. 중국의 승전에 따르면 그의 성을 박(朴)이라 하였으니 본디 왕족이 아닌가 싶은데, 그는 당시의 법도대로 유가의 경전을 연구하며 귀족의 소양을 닦아 나갔다. 그러다가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집안의 만류를 뿌리치고 출가를 하였는가 하면, 더 나은 공부를 하고자 중국까지 먼 길을 떠난다. 그가 중국에 가서 눈부신 업적을 남기며 활동한 사실은 중국의 승전에도 자세히 실려 있어서, 일연은 이 승전을 토대로 원광의 전기를 적어 나가고 있다.
중국에서 명성을 날리던 원광은 이 운문사에 거처를 잡았다. 그 무렵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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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운문사와 동서남북 네 군데로 벌려 다섯 사찰이 있었다. 그 가운데 원광이 자리한 가슬갑사는 동쪽에 있었다고 일연은 적고 있다. 운문사에 있었던 일연의 말이니 아마도 정확할 것이다. 바로 이 가슬갑사로 귀산(貴山)이라는 사람이 찾아온다. 그는 원광에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계명을 일러 달라고 부탁한다. 원광은 보살계는 열 가지가 있으나 세속에서 이를 모두 지키기 어려울 것이므로 다섯으로 줄여 주겠노라 하는데 ,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세속오계(世俗五戒)이다.
일연은 운문사에 머물면서 비로소 원광을 만났다. 운문사를 둘러싼 푸르른 산을 바라보며 일연은 원광을 생각하고 그의 전기를 썼을 것이며 시를 읊었으리라. 그리고 그가 이 땅의 승려 가운데 처음으로 우리의 불교를 세계적 수준으로 올렸다고 인정하고 있다. 아마도 <의해>편의 첫 자리를 원광에게 돌린 이유는 여기에 있을 듯하다.
■ 일연이 운문사로 온 까닭
일연은 만년의 주석처로 운문사를 택했다. 비문에는 그것이 왕명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왕의 명령도 명령이지만, 이미 그의 나이 일흔 두 살, 선문에서는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었고, 어느 모로 보나 여생을 정리할 시기이다. 그런 시기에 택한 운문사는 그의 개인사에서도 마지막 정리를 할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그곳이 학일이 중창한 가지산문의 주요한 사찰이었으므로 일단 그에게는 자연스런 선택이었지만, 더욱이 그의 고향 가까운 곳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흥미를 끌었으리라 보인다.
일연이 운문사 주석시절부터 <삼국유사>를 본격적으로 집필했다는 것도 각별하다. 이미 인흥사에 있으면서 <역대연표>를 만든 것이 <삼국유사 기술의 처음이라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비 작업이었다. 더욱이 이 연표는 일연이 운문사로 옮긴 이듬해 곧 충렬왕 4년(1278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준비는 인흥사에서 했지만 마무리는 운문사에 와 있을 때 한 셈이다. 이런 점이 일연의 운문사주석시절 <삼국유사 편찬 개시를 뒷받침해 준다.
오래전부터 운문사에는 근처에 일연의 비석이 서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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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패한 나라의 왕을 모시며
일연이 경주에 머문 기간은 일 년 남짓 된다. 몽골의 일본 원정을 지원해야 했던 고려 군대가 동래로 이동한 것은 충렬왕 7년, 왕은 개성을 떠나 경주에 행재소를 차렸다. 일연에게는 심기 불편한 왕을 가까이서 위로하고 모실 책임이 주어졌다.
■ 경주 시내의 여러 유적
15년 전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리고 15년 만에 나는 다시 경주를 찾았다. 경주에는 볼 것이 많다. 그냥 볼 것이 아니라 역사를 느끼게 하는 볼거리이다. 그러니 단순한 여행이 아닌 수학여행으로 계획된 것이라면 이만큼 좋은 곳도 드물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보건데 그때의 나는 경주에 와서 배운 것이 별로 없었다 바쁜 일정에 쫓기고 불편한 잠자리와 형식적인 설명에 넌더리치며, 밤이 되면 서양 악기를 틀어 놓고 여관집 큰 마당에서 한창 유행하던 춤이나 추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이 지루한 여행에서 남길 유일한 추억이 되기라도 하는 듯.
이렇듯 본말이 뒤집힌 까닭을 대기란 어렵지 않다. 박제화 된 사회의 틀은 교육현장 마저 그렇게 만들었으니, 선조들이 만든 문화유산을 보고 느끼는 방법에 우리는 너무도 서툴렀던 것이다. 기실 하나의 문화유산을 찾고 그 의미를 바로 깨치는 데는 이 모든 것을 한데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학교는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 주지 못했다.
그의 출신이 어디건 관심 분야가 무엇이건 상관없이 <삼국유사>가 경주를 중심으로 기술될 수밖에 없는 것은 역사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삼국 시기를 말하면서 경주를 이렇듯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당대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경주 지역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 답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경주 시내의 궁성 주변과 주요한 사찰, 둘째는 경주 남산 그리고 셋째는 경주 변두리의 절들과 지금은 그 장소를 분명히 알 수 없는 이야기의 소재지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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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에 보인 애정
경주를 어찌 몇 마디 말로 다 설명하겠는가. 계림, 월성, 안압지로 이어지는 중심부 몇 군데를 가지고 입장권에 있는 저 형식적인 설명만 그대로 옮긴다고 해도 원고는 훌쩍 규정량을 넘어서고 만다. 그밖에 자잘한 터까지 다 포함한다면 이제는 요령껏 정리 못할 나의 무능함을 탓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결코 빼놓지 못할 곳, 그곳이 바로 황룡사이다.
안압지에서 나와 발길을 황룡사로 옮겼는데, 월성에서 이곳까지가 결국 그 옛날 왕성의 중심지 였을 게다. 황룡사는 안압지 옆에 당당히 위치한다.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황룡사는 신라문화의 적자의식(嫡子意識)을 나타내는 당당함이 있다. 이제 기둥 한 자루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 터만 보고서도 이런 생각이 드니, 황룡사 9층탑의 어느 한 귀퉁이라도 남아 있다면 우리의 자부심은 얼마나 컸겠는가.
일연은 황룡사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깔끔한 외양으로야 불국사를 따라갈 사찰이 있겠는가만, <삼국유사>에서는 한 불심 깊은 이의 효성의 산물로만 적고 말 뿐, 거기에 어떤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그에 비하면 황룡사는 해동불교의 자존심이며 불국토(佛國土) 사상의 정화로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탑상(塔像)편에 ‘황룡사장육’과 황룡사 구층탑‘조를 연달아 실으면서 이 절의 내력과 의미를 소상히 밝힌다.
‘황룡사 장육’조는 진흥왕이 황룡사를 짓게 된 내력부터 기술한다. 왕이 즉위한 지 14년이 되는 계유년(553) 2월의 일이었다. 대궐을 용궁 남쪽에 지으려는데 황룡이 나타나자 이를 고쳐 절을 짓고 황룡사라 이름했다. 이 자리는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阿道)가 그의 어머니로부터 들은 일곱 가람터의 하나이다. 이미 전세에 인연 깊은 불지(佛地)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얼마 후 인도 아육왕이 보낸 황철과 황금이 울산 앞바다에 도착한다. 인연 있는 땅에 이르러 장육존상을 이루라는 축원문서가 함께 실려 있었다. 이러한 축원을 이루기라도 하듯 장육존상은 신라 땅에서 만들어 졌고 황룡사에 보관되어 신라를 지킨 삼보의 하나가 되었다.
아육왕은 인도 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이소카 왕을 이름이다. 그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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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 불교적 업적은 찬란하기만 한데 그런 사람의 능력을 추켜 주면서 은근히 우리가 그보다 한 수 위임을 내세운다.
이것을 우리는 일연이 가진 불국토사상의 한 면으로 보고 있다. 이 땅의 불교는 단순히 외국으로부터 전래된 종교나 사상이 아니라 이미 전세에 부처님의 땅으로 정해진 곳에 피어난 우리의 것이라는 생각을 뿌리 깊은 불심과 내적 여망을 담는다. 이것이 곧 불국토 사상의 요체이다. 이런 사상은 현실에서 호국사상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황룡사 구층탑’조에 잘 나타난다. 일연은 신라 삼보 가운데 하나인 구층탑을 짓게 된 동기, 건축과정, 그 후의 사정을 대략 셋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직접적인 동기는 자장법사가 문수보살을 만난 일에서 발단된다. 자장이 아직 중국에 머물러 수학하고 있을 때였다. 신라는 27대 선덕여왕 즉위 5년째 였는데, 문수보살은 자장에게 나타나 신라의 위기를 경고하고, 태평지 못에 나타난 신인(神人)은 황룡사에 구층탑을 지으라고 명령한다.
9층탑 연기설화의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리는 여기서 불탑건설이 호국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됨을 알 수 있다. 황룡사 구층탑은 오늘날의 기술로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 웅장한 건축물을 보면서 일연은 신령의 힘으로 가능할 기적적인 역사임을 말하고, 경주 시내를 아우를 듯 날개 치는 아름다운 모습도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이 탑은 한 층 한 층이 변방의 아홉 오랑캐를 제압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앞서 말한 불국토 사상의 연장선상에 놓인 호국사상이다.
황룡사는 일연 당시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 땅을 유린한 몽골군의 노략질 가운데서도 이만큼 큰 손해는 또 없을 것이다. 그는 황룡사가 자랑스러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때와 전란의 소용돌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사라진 다음 모두 이곳에 와 보았다. 그 장대한 모습과 담긴 뜻이 커서 가장 큰 애정을 가졌던 황룡사가 불 타 없어지는 슬픔을 맛보면서 일연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 남산에서 발견한 것들
수학여행의 코스에 토함산이 빠지는 법이 없으나 남산이 포함되는 경우 또한 없다. 토함산에는 석굴암이 있어 볼거리가 되지만 남산은 그만한 가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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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나 경주를 말하면서 또한 신라문화를 말하면서 남산을 빼놓을 수 없다.
크지 않은 아담한 산의 골짜기 마다 옛사람들은 순연한 그들의 신앙을 바위에 새겼다. 다정다감한 불심과 서방정토를 염원하던 원력이 폐허 속에 더욱 빛남은 고난의 역사가 가져다 준 선물이었을까? 그 가운데 하나, 세 번째 남산을 찾았을 때 나는 마애관세음보살상을 보았다.
마애관세음보살상은 냉골에 자리 잡고 잇는데, 남산의 불상 가운데서도 가장 인기가 있다. 뾰족한 바위가 여러 개 서 있는 가운데 하나를 골라 새겨놓은 이 보살상은 겁나지도 여리지도 않은 우리네 심성을 잘 담아 놓았다. 약간 남으로 치우쳐서 서향인 이 불상을 제대로 보려면 역시 저물 무렵에 가야한다.
남산의 유적들은 모두 이렇다. 부처의 모습을 새기려 사람의 손이 들어간 것을 어쩔 수 없는 최소한의 인공이라 한다면 이조차 남산에서는 철저히 자연스럽게 감춰진다. 거대한 역사(役事)를 벌여 이루어 놓지도 않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남산의 바위에 와서 안타까운 마음을 풀어놓았을 뿐이다. 그들은 거기에 소박한 자신들의 모습을 부처님의 얼굴로 그려놓고 내려갔다.
<삼국유사>소재 설화의 무대와 관련하여 가장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는 데가 삼화령(三花領)과 서출지(書出池)이다. 권위 있다는 학자들이 주장해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장소를 향토사학자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리 지형을 옳게 보지 못한 실수라는 것이다.
먼저 삼화령부터 보자. 이 고개가 무대가 되는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생의사(生義寺) 연기설화와 충담사(忠談師)가 지은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의 배경설화가 대표적이다.
선덕여왕 때 도중사(道中寺)에 생의 스님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에 늙은 스님 한 분이 찾아와 그를 데리고 남산으로 올라갔다. 남쪽 골짜기에 이르러 줄을 묶어 표해놓고 말하기를 “지금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나를 파내어 고개 위에 편안히 있게 해 주십시오”하였다. 생의 스님이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까지 했으나 기실 이 일은 꿈속에서 벌어졌다. 잠에서 깬 스님이 꿈이라 하더라도 심상치 않아 친구들을 데리고 남산 남쪽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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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가 보았더니 정말로 풀을 묶어 표한 것이 나타났다. 그것을 파보자 돌로 만든 미륵상이 나왔다.
여기까지가 생의 스님이 삼화령 정상에 미륵불을 모신 이야기의 전말이다. 이 후에 생의 스님은 이 돌부처를 위하여 절을 짓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성껏 모셨다. 선덕여왕 13년(644년)에 지어진 이 절을 사람들은 생의사라 불렀다.
향토학자들은 돌미륵이 발견된 곳이 ‘남산 남쪽’이라 적은 일연의 기록에 주목한다. 그리고 남쪽 골짜기 가운데서 그 정상에 아직도 대연화좌대를 남기고 있는 언양재 근처가 그곳이 아닌지 추정했다. 연화좌대는 지금 대만 남아 있고 위에 모셨던 부처님은 없어 명백한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일반적으로 삼화령이라 지칭 하는 곳은 남산성 북쪽에 있는 작은 언덕이다. 여기서 삼존불(三尊佛)이 발견되어 경주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거니와 이것이 그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방위가 북쪽이어서 <삼국유사>의 기록과 배치될뿐더러, 영(嶺)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왜소하고 낮은 언덕에 불과해 잘 맞지 않는다. 일일이 답사를 해보며 적었을 일연의 기록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경덕왕이 충담사를 만나 ‘안민가(安民歌)’를 짓게 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왕은 궁성 서쪽 귀정문에 올라 인연 있는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에게는 백성을 편안히 할 방도를 일러줄 현사(賢士)가 필요했다. 그때 한 스님이 헌 옷을 입고 삼태기를 짊어지고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가 바로 충담사였다. 충담사는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를 달여드리고 온다고 했다.
충담사는 ‘안민가’에서,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 안은 태평할 것”이라고 노래했다. 이런 충담사의 충성심은 이 노래를 수집하여 편찬한 일연에게도 이어졌으리라. 온 나라가 저무는 위기 상황에서, 임금을 모시며 남산에 얽힌 이런 이야기를 모은 일연의 마음씀에서 우리는 그같은 사실을 추측해 본다.
남산에 얽힌 또 하나의 논쟁은 서출지에서 벌어진다.
사냥에 나선 소지왕(炤知王)이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으로 한 장수를 보냈다. 그가 남산 동쪽 기슭 피촌(避村)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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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하다가 정작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놓쳐버렸다. 당황한 장수가 못가를 헤매고 있는데, 못 속에서 노인이 나타나 글을 주기에 임금에게 가져가 바쳤다. ‘서출지’라는 이름은 이런 연유로 생긴다.
사태는 장수가 가져온 이 글을 뜯어보느냐 마느냐로 심각해졌다. 겉에 씌어 있기를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으리라”하고 했기 때문이다. 선량한 임금은 한 사람만 죽는 게 낫겠다 싶어 덮어두자고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란 다름 아닌 임금을 가리킨다는 눈밝은 신하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는데, 뜯어보니 거기에 ‘사금갑(射琴匣)’이라 씌어 있었다. 거문고 갑을 쏘라는 말이다.
궁궐로 돌아온 임금은 씌어 있던 대로 거문고의 갑을 쏘게 했다. 그러자 내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궁주(宮主)와 은밀히 간통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두 사람은 사형을 받았다.
이런 일을 있게 한 서출지는 어디인가“ 일반적으로 지금의 화랑교육원 연못을 그곳이라 지칭한다. 그러나 마을의 노인들은 거기서 오산계쪽으로 더 내려가 양피사 터 동쪽 연못을 서출지라고 말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못 이름을 ‘양기못’이라고 하고 옛 기록에는 ‘양피못’으로 적혀 있다는 자료를 들이 댄다.
■ 바위 속으로 숨은 뜻
효소왕이 절을 짓고 큰 잔치를 베풀었다. 임금의 은덕을 과시하려는 듯 성대히 베푼 잔치에 많은 사람을 초대했을 터이다. 그런 말석에 비파암에 산다는 초라한 차림의 승려 한 사람이 있었다. 임금은 한 편으로 언짢았으나 그에게 공양을 베푸는 것도 자비심을 과시할 기회라 여겨 한자리 마련해 주었다. 그러고는 내심 거만하게 덧붙였다.
“어디 가서 임금이 손수 베푼 음식을 먹었다 하지 말게.”
그러자 이 초라한 스님에게서 나온 놀라운 말 한마디.
“임금께서도 진신석가(眞身釋迦)께 공양하였다고 말씀하지 마소서.”
스님은 그 말을 남기고 공중으로 솟아 남쪽으로 가버렸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놀란 왕은 시종을 시켜 찾게 했는데, 남산 대적천원(大績川源)에 이르러 바위에 숨어 버렸으니, 그 자리에 남긴 스님의 바리때가 증거물이었다. 비로소 진신석가를 친견한 줄 안 임금은 그 자리에 석가사를 세우라 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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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신수공(眞身受供 진신이 공양을 받다)조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나는 이런 비슷한 이야기의 모티브를 ‘우연히 스치듯이 한 성인 만남’으로 규정하는데, 실제오 우리들은 생활 속에서 참으로 올바른 만남을 그 의미도 모르고 놓치는 수가 많다. 지난 다음에야 깨닫고 아쉬워하기 마련이다.
신라의 불교는 우리의 삶과 생활에 녹아든 종교였다. 진신석가의 출현과 그분이 숨은 남산의 바위, 이 이질적인 것만 같은 현상의 통합이 신라불교의 정수며 특색이 아닐까? 그리고 일연은 이런 이야기를 아무런 꾸밈없이 그의 책 속에 기록했다. 민족문화를 온당하게 보는 그의 시각을 우리는 여기서도 또 한 번 발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연이 경주에서 생활하면서 무엇을 참된 믿음, 참된 생활의 모습으로 발견했는지 분명히 보여 준다.
■ 저무는 역사 퇴락한 사회
기록에 남은 바 일연이 경주에 머문 기간은 일 년 남짓 된다. 몽골의 동정(東征)을 지원해야 했던 고려 군대가 동래로 이동한 것은 충렬왕 7년 왕은 개성을 떠나 경주에 행재소를 차렸다. 딴은 우리나라 군대의 사기를 북돋고자 함이었으나 속국의 차지에서 몽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일연에게는 심기 불편한 왕을 가까이서 위로하고 모실 책임이 주어졌다. 운문사에서 머문 지 사년 째 되던 해 그의 나이 이미 76세였다.
남의 전쟁을 돕는 자리에 행재소가 차려진 경주는 옛날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10만호가 넘는 기와집들이 즐비했고, 집집마다 숯불만 때고 살았다는 경주의 옛 모습을 상상하기란 즐거운 일이다. 황룡사 구층탑은 무슨 재주로 그렇게 높이 올릴 수 있었을까? 또 지금 한창 발굴중인 옛 시가지는 더욱 놀랍다. 집터 하나가 차지하는 넓이도 그렇거니와 가로 세로로 꽉 짜인 계획된 도시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라인의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중간 정도 넓이로 보이는데 폭 24미터, 족히 4차선 도로쯤 되는 길은 자갈이 촘촘히 깔린 전천후로 사용되었다. 이것이 어찌 지금의 아스팔트 포장에 비할까 보더냐.
거대함 뒤에는 세밀함도 숨어 있었다. 정교하게 설계된 배수구 같은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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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집집마다 흘러나오는 하수를 받아 도시 바깥으로 내 보내는 이 시설은 천여 년이 지난 지금에 다시 파 보니 그대로 옛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체로 치면 한 귀퉁이에 불과한 작은 부분을 파면서도 발굴자들은 연방 탄성을 터뜨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묻힌 옛 꿈, 황성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타고 먼지에 뒤덮힐 뿐이다. 적어도 일연이 경주 행재소에 왔을 때 화려한 역사는 먼지와 불길 속에 휩싸여 있었다. 나라를 구하자는 의기는 간데없고 일신의 호사를 도모하는 무리들만 가득했다.
더욱 부끄럽기는 승려들이 행동이었다. 경주 행재소에 왕을 비롯한 정계의 실력자들이 모여들자, 그들은 비단이며 진귀한 물건을 싸들고 와 뇌물로 바쳤다. 그러면서 승려의 직급을 높이 받아갔으니, 역사는 그들을 ‘능수좌 나선사(稜首座羅仙槎)’라 부른다고 적고 있다. 비단으로 산 승려의 계급이었다.
이 같은 지경에 일연의 경주 체류는 그의 생애에서 한가하지도 즐겁지도 않았을 터이다. 물론 그가 이때 처음으로 경주를 찾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미 그의 행동반경에서 경주를 답사했을 기회는 여러 차례였다. 그는 경주의크고 작은 유산 속에서 역사가 주는 교훈과 인간의 바른 도리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황룡사의 거대한 탑에서도 남산의 자잘한 바위부처에서도 찾아내는 의미는 깊기만 했다.
◉ 국사가 되다
■ 속국의 슬픔
경주 행재소를 떠나 왕의 행차가 서울로 돌아온 것은 즉위한 지 8년째 되던 해 가을이었다. 거의 1년 가까이 도성을 비운 충렬왕은 이제야 제대로 왕 노릇을 할 수 있겠거니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다지 만만치가 않았다. 속국의 처지에서 원수 나라의 공주와 결혼해야 했던 일부터가 그를 괴롭혔다. 우선 그것 때문에 세자 시절에 결혼한 빈과 헤어진 충렬왕의 심사를 헤아리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볼모나 마찬가지인 처지로 북경에 끌려가고, 거기서 원나라 공주와 다시 결혼해야 했던 것이다. <고려사>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공주는 변덕이 심하고 꽤나 성깔을 부리던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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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왕이지 몽골의 간섭은 사사건건 미치지 않는 바가 없었고, 툭하면 자기 나라로 불러들이거나 심지어 왕을 바꾸어 버리는 일도 있었다.
충렬왕은 24년(1298년)에 충선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가 이듬해 복위하고 충선왕은 다시 즉위하였다가 5년(1313)년에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원나라로 가야 했으며, 충숙왕은 17년(1330)년에 충혜왕에게 물려주었다가 2년 뒤 복위되었다. 그뿐인가 충숙왕 사후 충혜왕은 복위하려고 원나라 집사성에 뇌물을 주는가 하면 충렬왕은 환국하려는 충선왕을 적극적으로 막기도 하였다. 이 지경이니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다.
■ 충렬왕과 일연
충렬왕은 처음부터 방탕하고 국사에 게으른 사람은 아니었다. 세자의 몸으로 오랫동안 원나라에 가 있을 때는 절치부심 고국으로 돌아가 뜻을 펴보리라 다짐했다. 실제 왕위에 올라 그는 정열적으로 국사를 돌보았다. 비록 원나라의 속국 처지로 전락하였지만 나라의 체통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눈물겹기만 했다.
이런 의지를 가진 왕이었으므로 주변에 좋은 사람을 끌어 모으려 애썼을 터이다. 불교계의 인물로서 일연을 가까이 한 것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연은 왕이 개성으로 돌아갈 때 같이 개성을 갔다. 이때 그의 나이 이미 일흔일곱, 번거로운 생활을 누구보다 싫어했던 그이지만, 심기 불편한 왕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었던가 보다. 아직 정부가 강화도에 있을 때 그곳에 몇 년 머문 일을 빼고는 일연으로서 첫 서울나들이였다. 왕은 대전으로 그를 불러 설법을 들었는데, 그로 인해 용안이 환히 빛났다고 비문은 적고 있다. 왕은 일연의 거처를 광명사에 마련해 주었다. 광명사는 다름 아닌 선종의 우두머리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 시기에 충렬왕이 일연에게 보인 관심은 무척이나 컸고, 이에 따라 중신들도 그를 가까이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대의 문인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기록으로도 입증된다.
이승휴는 다름 아닌 제왕운기(帝王韻紀)의 저자이고 이 책 가운데 단군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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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들어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 <삼국유사>가 단군신화로 시작한다는 것 또한 너무 잘 알려진 사실, 같은 시기에 함께 어울린 두 사람의 책에서, 지금껏 남아 특별히 취급되는 단군신화가 남겨졌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기 아니다. 틀림없이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갔을 화제의 중심에 단군신화 같은 이야기가 자리 잡았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만의 화젯거리는 아니었으리라 보인다. 김부식(金富軾)이 가진 <삼국사기> 식의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이런 이야기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른 국면을 맞으며 살아나고 있었다. 그런 기미는 이미 이규보의 <동명왕편>으로부터 싹이 텄다. 단군 신화의 수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호사취미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한 시대의 흐름이었던 것이다.
■ 국사의 자리에 오르다
이렇게 왕래가 잦아지면서 왕은 일연을 국사(國師)에 책봉하기로 결심한다. 국사는 어떤 자리인가? 국사는 신라와 고려 시대에만 있었던 승려의 최고 법계이다. 조선조에 와서는 태조 때 잠시 왕사(王師)만 있다가 유학의 번성으로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제도 자체가 아예 없어졌다. 물론 국사는 한 나라의 스승이므로 굳이 승려가 맡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교가 지배적인 종교였던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으레 승려가 이 직을 맡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신라시대 때까지만 해도 국사의 제도는 그다지 견고하지 못하였다. 국통(國統)이라 하여 승려 조직을 이끄는 행정적인 성격의 자리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고려가 국사를 임명하여 활용한 것은 현실적으로 민심 수습책의 차원이었다. 곧 불교가 많은 사람의 신앙으로 정착되어 있었으므로, 민중을 정치에 직접참가 시키지 못하는 대신 그들을 도덕적으로 교화할 수 있는 정신적 지도자인 고승을 국사로 책봉함으로써, 왕실의 정치 이념을 구현하는 데 큰 구실을 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국사는 특별한 임무가 주어져 있지 않으면서, 자리 이상의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국사에 대한 예우는 극진하였다. 책봉의 절차부터 위엄을 갖추었고, 일반 백성도 국사에 대하여는 크게 우러러 보았으며, 고려 후기에 들어서서는 국사가 나온 고향의 위계를 높여주기까지 하였다. 고려시대를 통틀어 책봉된 국사는 열여섯 명에 불과하며 추증되어 국사가 된 승려까지 합하여도 사십 명을 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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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은 세 번씩 고사하였으나 왕명은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국존(國尊)에 책봉되고 원경충조(圓徑沖照)라는 호가 내려졌다. 국사를 국존이라 한 것은 원나라 간섭기의 일그러진 초상의 하나이다. 모든 관직의 이름을 한 단계 낮추어 부르게 했는데, 국존 또한 국사를 한 단계 낮춘 호칭이었다.
◉ 인각사와 <삼국유사>
■ 인각사와 장교 후보생
<삼국유사>에 실린 일연의 시를 분석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나는 육군 정훈 장교로 군에 입대했다. 논문을 쓰면서 줄곧 <삼국유사> 가운데 상당 부분이 그의 현지 답사를 통해서 이루어 졌다는 사실 때문에, 답사를 통해 그 분위기를 함께 느껴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 엄두를 못 내면서 시간을 보냈고 급기야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으로 알려진 인각사 한 번 못 가보고 나는 논문을 끝냈다.
그런데 묘한 데에서 인각사와 만나게 되었다. 장교 후보생 시절 나는 영천의 제3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훈련 9주차에 나는 1주일간의 유격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훈련 장소가 화산(華山)이라는 곳이었다.
해발 700미터, 훈련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난 다음 교관 가운데 한 사람이 산 아랫마을을 가리키며 “저 마을에는 유명한 것이 있다. 고려 말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쓴 인각사가 거기 있다.”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당장 가보고 싶었지만 나는 첫 휴가 때에야 인각사행을 이룰 수 있었다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이었다.
국사에 올랐지만 일연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한다. 이런 이유 가운데는 노모가 거기 계시기 때문이라는 점이 가장 컸는데 왕도 그런 사정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일연의 청을 받아들였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더 높은 자리를 원하고, 한 번 그 자리에 오르면 내 놓기 싫어하는 세태에서, 일연의 이 같은 행동은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다.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어머니는 열 아홉에 아들 하나를 낳고 77년을 혼자 사셨다. 오랜 시간을 혼자 사신 어머니에 대한 일연의 향념(向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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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의 자리로도 바꿀 수 없었다 아마도 그는 고향 경산의 어디쯤에 노모를 모시고 평생 마지막 효도를 다했을 것이다.
■ 인각사와 그 주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일연은 인각사를 하안소로 정해 옮긴다. 이때의 사정을 비문은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다.
“조정에서는 인각사를 하안소로 삼아, 근시(近侍) 김용검(金龍劍)에게 영을 내려 이를 수리하게 하였다. 또 납토전 100여 경으로 경비를 충당하게 하였다.”
이 기록을 본다면 일연의 하안소로 정해지면서 인각사는 대대적은 보수를 했던 것 같다. 게다가 납토전으로 100여 경을 하사했다고 하는데 이 정도의 토지라면 대단한 규모이다. 1경이 이즈음 땅으로 3,000평 쯤 된다. 그렇다면 모두 30만 평, 한 나라의 국사인 승려의 하안소라 할지라도 특별한 배려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1991년 인각사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벌어졌다. 일연의 마지막 주석처이며 <삼국유사>가 씌어졌다는 이곳이 지금까지는 외로운 푯말 하나로 그 소재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마침 문화체육부가 매달 지정하는 1992년 7월은 일연을 택했다. 그러면서 인각사를 사적지로 지정했는데, 발굴 작업은 그 이전부터 실시하여 그해 봄 1차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경북대 박물관의 발굴 팀이 삽을 든 발굴 결과, 인각사는 지금의 모양과 많이 다른 모습임이 밝혀졌다.
마침 고려말 이색(李穡)이 쓴 인각사 무무당기(麟角寺 無無堂記)라는 글을 찾아내었는데, 거기서 적고 있는 절의 모양이 발굴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무무당은 대웅전 앞에 있던 강당으로 추정되지만 지금 그 건물은 없어졌다.
발굴 조사이후 인각사의 복원사업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아직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절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다.
일연이 있는 동안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가 두 번 열렸다. 구산문도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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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요즘 말로 전국불교도대회라고 할 것이다. 비록 만년을 조용히 보낼 곳으로 생각하고 내려왔지만, 불사에 끊임없이 정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절 뭐니뭐니 해도 중요한 것은 일연이 평생의 노작으로 <삼국유사>를 완성한 일이다.
백여 권에 이른다는 그의 저작이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두 권을 제외하고 모두 인멸된 반면 <삼국유사>가 이제까지 남아 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사대 이전 우리 선인들이 살다간 모습을 생생이 전해주는 책이 없기에 이를 아끼고 전했던 것일게다. 세월이 흐를수록 이러한 가치는 더욱 커진다.
■ 삼국유사를 지은 절 인각사
인각사는 1992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해 7월 문화부 제정 ‘이달의 인물’로 일연이 선정 되었고, 때를 맞추어 공식적인 사적 발굴도 이루어졌으며 대대적인 보수 복원공사계획이 발표된 바도 있다. 그러나 용머리가 뱀꼬리되듯, 그리고 10여 년이 지나서도 사업은 더디기만 하다.
인각사를 주목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시골의 볼품없고 초라한 말사를 돈 들여 복원하자는 것은 바로 이곳에서일연의 삼국유사가 저작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래서 사적지로 지정된 다음, 그것이 관에서 세웠는지 인각사 측에서 세웠는지 알 수 없지만, 절의 입구에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이라는 자그만 안내판을 내 걸었다.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 - 절의 유일한 자랑거리를 훼손할 의도는 전혀 없지만 그러나 이 말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삼국유사가 언제 어디에서 저술되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한 까닭이다. 더욱이 인각사가 아닌 다른 절에서도 <삼국유사>저술의 장소임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니 말이다.
■ 삼국유사를 읽는 마음
<삼국유사>는 오늘날 여러 면에서 유용하다. 분량으로 치면 그다지 네 세울만하지 못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다양한 폭은 삼국시기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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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민족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이 고상한 지식과 지위를 자랑하는 어느 학자에 의해서가 아니고 피폐해지는 민중의 정신세계를 다시 살리고자 하는 한 노스님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아름답기만 하다.
일연은 몽골전란기를 목숨을 보존하기도 힘든 위태함 속에서 살았고, 민족의 자존심이 철저히 유린당하던 시기의 국사로서 누구보다 뼈저리게 민족의 자존을 염려하였다. 그런 그의 고민과 쓰러진 역사의 영광을 복원하려는 깊은 뜻을 우리는 이 책에서 읽는다.
그동안 <삼국유사>는 문학, 역사, 인류학 등 여러 관련분야에서 요긴한 자료로 쓰여 왔다. 1992년 7월 문화부 제정 ‘일연의 달’을 맞아 중앙승가대학의 불교연구소가 편찬해 낸 <삼국유사연구자료목록>을 보면 삼국유사는 매년 평균 25편의 논저를 내게 했다는 것이요. 이는 한 달 평균 2편 이상의 논저가 나왔다는 계산도 된다. 대단한 분량이다.
이는 단순히 양적인 데만 국한하는 놀라움이 아니다. 우리의 시가문학사는 한 시대를 더 내려가서야 구체적인 작품을 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실린 열네 수의 향가가 우리 고대 가요의 모습을 전해주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흔히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더불어 이 책이 역사서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도 하거니와,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삼국유사는 역사서로서 여타의 책과 견주기보다는 보다 더 광범한 의미의 문화사로 보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
또한 저자인 일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생애의 자세한 이력을 알지 못하는 형편은 남겨진 기록의 미비 때문이지만 방증할 수 있는 자료를 두루 인용하여 구체적으로 밝혀보려는 노력이 미진했다.
누구를 붙들고라도 <삼국유사를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한 편 한 조라도 읽어보았는지를 물으면 시원한 대답을 듣기 어렵다. 이렇게 된 데는 우리 고전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이 그 이유의 선두에 서지만 오늘날의 모습으로 새롭게 해석하여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지 못한 연구자들의 책임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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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를 찾는 사람들
돌이켜보면 <삼국유사>는 13세기를 살다 간 한 스님의 손에서 나왔다. <삼국유사>가 담고 있는 이야기의 대부분이 6~8세기의 것임을 감안할 때 자신의 시대로부터 7~8세기 이전의 이야기를 모은 셈이다. 그리고 다시 7세기가 흘렀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책은 자못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아주 잊혀 자칫 사라질 뻔하기도 하였다.
세기가 바뀌면서 이 책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아마도 최남선(崔南善)이었을 것이다. 그가 들려주는 <삼국유사>의 전승 상황은 무척이나 초라하다. 광문회를 설립하고 여기서 <삼국유사>를 간행하려 했으나, 서넛 승려들이 사찰에 감추어 놓은 것을 내놓는데, 대체적으로 불교관계의 후반부 기사뿐이었다는 것이요. 반면 일본에서는 1904년 이래 수차례 완본이 영인되거나 출판되어 나왔으니, 그가 국내에 <삼국유사>를 다시 소개한 것도 일본의 도움을 받은 결과였다.
어쨌건 간행되고 700년이 지난 다음 이토록 소중한 위치를 되찾아 가는 책 한 권의 운명은 모질어만 보인다. 그것은 이 책이 잘 지어졌기 때문인가. 사람들의 눈이 비로소 뜨인 까닭인가?
■ 인각사에서 부른 노래
인각사 신도들은 매년 칠월 칠석에 일연을 위한 제를 올리고 있다. 이 날이 바로 일연이 입적한 날이기 때문이다. 신도들은 주로 대구에서 많이 오고 군위, 의성 등 근처 신도들도 있었다. 재를 오릴 때면 꼭 국수를 상에 놓는데 그 이유를 물으니 일연이 살아생전 국수를 좋아했기 때문이란다. 나는 아직 어디서도 그런 기록을 보지 못했지만 그것은 아마도 신도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전설 정도로 보였다.
1992년 불교방송의 다큐멘터리 취재차 인각사에 들렀을 때 나는 그곳에서 ‘인긱사가(麟角寺歌)를 부르는 은노미 할머니를 만났다. 일흔을 넘은 노 할머니였는데, 원래 인각사 가까운 곳에 살다가 지금은 대구오 옮겨 큰아들 집에 있다고 했다. 처음 시집와서 고되고 아무 낙이 없어 시부모 몰래 인각사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 불자가 된 계기란다. 그런데 같은 절의 신도인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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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명(작고)씨가 가사체로 된 ’인각사가‘를 썼고, 평소 가사를 잘 부르던 은 할머니에게 노래가 들어갔다. 이 노래의 사가는 다음과 같다.
백두산 뻗어내려 근역 호상 삼천리
무궁화 이강산에 푸른 역사 반반년
나라안에 군위군 고을 안에 고로면
웅장한 화산아래 그 이름 인각이라.
그 옛날 서라벌에 선덕여왕 11년 때
의상조사 우뚝 내쳐 이 가람을 세웠노라.
휘황한 극락전은 동방의 으뜸이요
조화난처 구구존은 천년 역사 지어왔네.
저 고려 충렬왕 때 일연선사 주석하고
육환장을 휘날리며 중생을 깨우쳤네.
도닦던 틈을 타서 삼국유사 저술하니
한국사의 등불되어 만세에 빛나누나.
국사의 시묘효성, 천하의 으뜸이라.
명골의 엄마묘소 동강의 스님 탑.
해마다 섣달 그믐 동강의 서기서려
엄마묘소 덮었으니 스님의 효심이라.
왕명으로 비 세우니 민지가 찬명하고
죽허가 집자하니 왕희지의 유필이라.
정조탑과 보각비는 예술조각 비범하여
보물 428호 대한민국 자랑일세.
절 앞의 학소대는 벼랑에 쌍립하여
장송에 낙락하고 백학 펄펄 날아든다.
절좌편에 병암입삭 수심이 수십척이요.
삼선생에 자취하여 시인묵객 왕래하네.
즈믄 내 유서깊은 찬연한 이 가람에
일연 스님 높은 뜻이 길이 빛나리라.
나무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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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연의 문학
■ 시인 일연
다시 한 번 말해보자. 일연은 13세기 풍운과 같은 시대를 살다간 승려요 문인이다. 내적으로 무신정권의 성립과 외적 몽골과의 전쟁이 겹치며, 우리 역사에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 시기 지식인들은 역사에 대해 깊이 고민을 하였고, 민족의 개념에 대해 조금씩 눈뜨게 된다. 일연이 남긴 <삼국유사>는 그 같은 고민과 세로운 인식의 소산이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의 문학적 면모 또한 추적해 나갈 수 있다. 앞서 일연을 승려요 문인이라 했지만, 그가 문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무슨 작품을 남겼는지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비문에 남아 있는 “유교의 서적을 두루 보고, 백가(百家)를 겸하여 꿰었다”는 기록으로 그가 승려 신분이면서도 거기에만 몰두한 고지식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삼국유사>를 통해 그가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을 구경하게 된다.
물론 일연이 남긴 문학적 저작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저술 목록에 보면 어록(語錄)과 게송잡저(偈頌雜著)가 있는데, 이는 유학자로 치면 개인 문집이다. 이 책들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일연이 승려로서 당대에 시적 재능을 인정받았던 사실을 다른 이의 증언을 텅해 다소 우회적으로 알게 된다.
‘견명(見明)’은 일연의 세속 이름이다. 이장용과 유경은 무신정권이 무너진 다음 충렬왕을 돕던 정치권의 핵심 인물들이고, 특히 일연을 추천하여 임금에게 소개한 것은 이장용의 힘이 컸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 기록에서 주목할 점은 일연의 이름 앞에 ‘선문운사’라 관형(冠形)한 점이다. ‘선문’이 일연의 신분을 나타낸 것이라면, ‘운사’는 그가 시인임을 나타낸다.
이승휴가 승려인 일연을 다른 특징보다 시를 잘 짓는 사람으로 소개한 것도 분명코 일연의 시적 재능을 나타내는 표현에 다름 아니라고 나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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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이 꿈
인각사의 절 입구에는 아담한 일연시비가 고즈넉한 절의 분위기와 어울려 한 인간의 문학적 성품을 알려주는 것이라 눈여겨 볼 만하다.
좋은 시간 금새
마음은 어느 새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이 가득
이제 다시 메조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가 꿈인걸 알겠네.
경계는 어느 시대에나 주어져 있지만 깨닫기는 자신에 이르러서이다. 일연은 수고로운 인생이야 옛 이야기를 들추지 않더라도 꿈인 줄 깨달아야 한다고 명백히 결론짓는다.
■ 설화에서 소설로 가는 징검다리
오늘날 우리들이 일연을 문학적으로 연구할 충분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남긴 삼국유사는 일연을 문학적으로 연구하게 할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이 책에는 앞서 소개한 불교적 깨달음을 적은 시가 있는가 하면, 우리 소설의 흐름을 가늠해 보는 설화와, 고대 시의 전형을 보여주는 향가 그리고 민중의 입에서 불렸을 민요들이 실려 있다.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으며 동시에 높은 식견을 지닌 편찬자였다.
삼국유사의 설화에서 일연이 소설적 서사 전개에 어느 정도 가까이 갔음을 확인하는 부분이 있다. ‘짝지어 이야기하기’ 즉 짝짓기 서사구조 이다. 예컨대 남백월산의 두 성인, 낙산사의 두 성인, 포산의 두 성인, 혜공과 혜숙, 광덕과 엄장경우가 그렇다. 나는 이것을 ‘짝짓기의 서사구조’라고 부른다.
이야기를 흥미 있게 전개 시키면서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일연은 자주 짝짓기의 방법을 썼던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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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다른 설화에서도 이 같은 모습은 심심찮게 보인다.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 등과 같이 짝짓기는 어쩌면 옛날이야기가 진행되는 기본적인 패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들은 일연에 비해 훨씬 후대에 발생된 이야기다. 그런 까닭에 좀 더 이른시기 <삼국유사>의 실화들은 소설이라 규정 짓자는 견해가 만만찮다. 단군 신화를 비롯한 고대 건국신화는 그대로 서사시적 풍모를 가지고 있다. 이미 이 신화들은 <삼국유사>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데 더 긴요하게 쓰이고 있지만, 문학적으로도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이규보의 <동명왕편>,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더불어 소재와 주제에서 지평을 넓혔다. 대체적으로 문학의 전범을 중국에서 배워오고 그것을 답습하는 데 그치는 풍토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 눈으로 바라보고 형상화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였다. 이는 곧 민족의 주체성과 관련되어 논의될 일이다.
■ 향가 :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일연이 <삼국유사>에 신라향가 14수를 실어놓은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고마움을 표해야 할 지 모르겠다. 우리 고대 가요 가운데 그 정형성을 최초로 획득한 것이면서 지극히 높은 정신세계를 구축한 이 시가 장르는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그 전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삼대목’이라는 책에다 신라의 노래를 수집하여 놓았다는 안타까운 기록만이 남았을 뿐이다.
향가란 어떤 노래인가?
산라는 고대 삼국시대 가운데 중국의 문물을 가장 늦게 받아들였지만 가장 훌륭히 소화해 낸 나라이다. 불교의 경우가 그 대표적이다. 재래 신앙이 강하게 형성되었던 사회 중심부에 외래의 불교가 파고 들어오는데, 신라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거기에 종속되지 않는 면을 보여주었다.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이 조화하여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이다.
이 논의는 일급의 문자수단인 한문을 두고 왜 굳이 향찰을 만들어 내었는가와 연결된다. 물론 한문의 문자체계가 복잡다단하여 쉽게 익혀 쓰기가 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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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했다는 점으로 설명하고 말 할 수도 있다. 이는 논리적인 사실만 기록해도 되는 산문에서보다 정서적이며 주관적인 개성을 표현하는 시에서 더욱 그렇고 일반 평민들까지 두루 즐길 노래에 가면 사정은 더욱 절박해진다. 이 같은 표기 수단의 어려움이 우리 글로 짓는 우리의 시가를 갖게 하는 데 동기를 부여했으리라 보는 것이다.
한문이라는 고급 언어수단을 가지고도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란 무엇인가?? 한문이 어렵다지만 배우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신라인들은 그들의 고유정서, 이것을 담아낼 그릇으로서 우리만의 표기수단 을 필요로 했던 것 같고. ‘찬기파랑가, 제망매가, 원왕생가’같은 절창의 노래를 얻어내었다. 향가는 그런 노래이기에 일연조차도 이를 평가해 천지간 귀신이 감동하기를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토록 소중한 자료를 비록 편린이나마 볼 수 있게 해 준 것이 <삼국유사>이다. 일연은 이 시기의 모든 문화적 형상에 대하여 두루 관심을 가졌으므로, 여기에 열 몇 수 남짓한 향가가 실렸다는 점은 달리 이상스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더욱이 그 노래들은 하나같이 이야기를 동반하고 있다. 어쩌면 이야기 전개의 보조수단 정도로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처용랑 망해사’조에서 처용가가 빠지면 처용의 심리상태나 역신이 처용에게 굴복하는 이유가 불분명해진다. ‘무왕’조에서 ‘서동가’가 빠지면 어떻게 하여 선화공주가 궁중에서 쫓겨나게 되는지를 알 수 없다.
시에 대한 남다른 식견 - 이것이 향가 가운데서 뛰어난 작품들을 <삼국유사> 속에 굳이 실은 저변이다.
이는 삼국유사에 산재된 민요와 다른 노래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연의 개인적 취미가 오늘날 우리에게 고대시가의 모습을 전해 주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나는 앞서 고마움을 표시하였지만, 고마움을 넘어 이 자료가 없었다면 우리 시가의 한 시대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논의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니 아찔하기까지 하다. 좋은 시인은 좋은 시를 쓰기도 하지만 좋은 시를 알아 볼 줄도 안다. 일연은 분병 그런 시인이었다.
<삼국유사>에 실린 48편의 찬(讚)은 일연이 쓴 시이다. 일연의 문학 세계를 정면에서 다룰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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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바탕 더 흥겹게 놀리라
기축년 6월에 병을 앓았다. 1289년 그의 나이 여든넷이었다. 드디어 7월7일, 죽음을 예견한 그는 태내(太內)에 글을 올리고, 또한 그를 늘 돌보아주던 염(廉)상국에게도 글을 보냈다. 이제 먼 길을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이날 밤 큰 별이 일연이 자리에 든 집 뒤에서 떨어졌다고 비문은 적고 있다. 다음날 새벽이었다. 일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그의 주위에 모여든 제자들과 문답을 나누었다. 일연은, “오늘 내가 떠나려고 한다”고 말문을 연 다음 액일(厄日)인가 아닌가를 물었다. 제자들은 7월8일이므로 괜찮다고 했다.
요즈음도 일연의 시적일(示寂日인 음력 칠월 칠석에는 인각사에서 추모제를 갖는다. 돌아가시던 해인 1289년 음력 7월 8일은 양력으로 8월 2일 이었다.
제자들은 유언장과 인보를 가지고 개성에 전하니, 왕은 매우 슬퍼하며 사람을 보내 후히 장례 지내게 하였다. 또 안렴사에게 명하여 호상의 일을 보게 하고 시호는 보각(普覺)이라 하였으며 탑을 정조(靜照)라 하였다.
10월 신유일에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을 세웠다. 향년 84세 승려로서의 나이는 71세였다.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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