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

2018. 2. 6. 18:11독서후기

반응형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

■ 홍일식 지음

0 1936년 서울 생

0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졸, 고려대 문학박사

0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소장

0 중한 대사전, 한국문화사대관, 한국민속대관 등 편찬

0 고려대학교 총장 역임

0 독립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 기획위원

0 1982 제1회 세종 문화상. 1991 문화훈장 보관장 서훈 등

0 육당연구. 21C 한국전통문화. 일제하의 문화운동사 등 다수의 저서

* 이 책은 1996년에 초판 인쇄되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많은 감동과 교훈을 주는 책입니다. - 이수영

1. 우리를 지켜온 힘

■ 미래의 희망

나는 21세기의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민족이 분명히 인류문명을 이끌어나가는 당당한 주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

우리 민족의 미래에 대한 이러한 희망과 기대를 비단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대다수 국민의 의식 속에 이미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것도 같다. 지난 수 십 년간에 걸친 눈부신 경제 성장, 그리고 국제적인 지위의 급격한 상승 등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승승장구해 온 우리의 발자취는 바야흐로 우리 모두에게 그런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고 나아가 자신감을 갖게 해 주었다.

그런데 그 자신감을 당당히 내세우려고 하니 우선 가슴에 아프게 걸리는 것이 있음을 솔직히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자신감을 비탄어린 자괴감으

로 바꿔놓고 마는 갖가지 현상이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제히 분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 1 -

더구나 우리를 이러한 우려로 몰아붙이는 작금의 상황이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어쩌면 앞으로 적어도 상당 기간은, 지금껏 우리가 흉악하다고 생각했던 일보다 더 흉악한 일이, 엄청나다고 생각했던 일보다 더 엄청난 일이 참혹하다고 생각했던 일보다 더 참혹한 일이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터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의 현실은 오랜 세월 쌓아두고 덮어두기만 했던 문제들이 마침내 한계점에 도달하여 내부의 팽압을 견디지 못하고 한꺼번에 폭발하려는 듯한 형국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를 거쳐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민족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좌표는 어디인가…. 이러한 우리 자아의 위상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면 이 암담한 현실도 곧바로 희망의 재료가 되지 못할 까닭이 없다.

그러한 민족적 자아의 위상을 확인하고 우리 민족이 지닌 특유의 저력과

남다른 자질을 잘 발휘한다면 우리가 21세기 인류문명의 견인차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결론부터 미리 말해 둔다면. 우리가 지닌 고유의 정신적 가치의 총체인 전통문화의 창조적인 계승을 통해 대한민국은 앞으로의 세계를 정신적으로 이끄는 문화대국, 인류문명의 새로운 중심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것이다.

■ 수도거성(水到渠成)과 소심익익(小心翼翼)

내가 우리민족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우리 민족에게 특유의 저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의 저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먼저 중국이라는 나라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19세기 말까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아니 거의 유일한 외교적 상대국이었으며, 좋으나 싫으나 수천년 동안을 이마를 맞대고 살아야 했던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사의 크고 작은 굴곡들이 어느 것 하나 중국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그 면면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 민족이 지닌 저력의 실체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 중국과의 국교가 정상화 되지 않았던 그 시기로부터 사전 편찬과 나 자신의 연구를 위해 중국을 수십 차례에 걸쳐 방문하고 때로 장기간

- 2 -

체류하여 연구와 강의를 하면서 중국을 면밀히 관찰하고 많은 사색을 하였다. 그러면서 중국에 대해서 느낀 것 한 가지는 이런 것이었다.

중국인을 상대하는 동안 내 입에서는 ‘아, 우리 할아버지들이 정말 고생하셨겠구나!’ 하는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도무지 이 사람들은 법도, 경우도, 논리도 통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요령부득의 민족을 수천년 동안이나 상대해 오면서 우리 민족이 이 정도로 지탱해 올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속성을 한두 가지만 말해서 나머지는 짐작해 볼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자고로 우리의 정서 속에는 사람이란 겉과 속이 일치해야 바람직한 인격이라는 관념이 있다. 우리는 겉다르고 속다르면 가장 부도덕한 것으로 친다. 그러나 이것이 중국에서는 반대가 되어 있다. 즉 겉 다르고 속 달라야 오히려 바람직하고 도덕적이며 더불어 사귈만한 믿음직한 사람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은 오히려 위험천만한, 그래서 상대조차 못할 사람으로 여긴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가치관이 아닐 수 없다.

북경대학교 초청 교수로 가 있는 동안 한 달에 한 번쯤 중국 고위층 인사와 저녁자리에 나갈 때면 으레 나는 한국과 중국 간에

“빨리 국교가 정상화되어 문화교류 협정이 좀 체결되어야지,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대개 그들은 이런 말로 받았다.

“수도거성(水到渠成)아닙니까?”

‘수도거성’이란 물이 흐르다보면 도랑이 저절로 생기는 법이라는 뜻의 중국 속담이다. 나 같은 사람이 하나 둘 오가다 보면 교류가 생길 것이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보면 또 언젠가는 국교도 정상화되고 협정도 체결될 것인데 일부러 조급하게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이 흐르도록 하기 위해서 굳이 도랑부터 팔 게 뭐 있느냐는 식의 중국인다운 ‘만만디’ 앞에서는 할 말을 잊게 된다.

나는 “그럼 제가 소심익익(小心翼翼)이란 말씀이군요.”하고 그들과 함께 웃어 넘기고 말았다. ‘소심익익’이란 요즘 중국 사람은 잘 안 쓰는 고문에 있는

- 3 -

말로, 참새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연신 재재거리고 날개짓하며 좌불안석 하는 모양을 형용하는 것이다.

‘수도거성’ 운운하는 그 만만디가 그들의 정확한 내심이요 본심인것 같았는데, 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내가 중국에 있는 동안이었는데 때마침 우리나라와 구소련 간에 국교가 정상화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저녁을 같이 하자며 일시에 나를 불러대는 것이었다.

자리가 파한 뒤면 나는 숙소로 돌아와 혼자서 그들과의 대화를 상기하면서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이들의 이런 돌연한 태도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중국인이 자나깨나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잠재의식 속의 최대 적국은 미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바로 당시의 소련, 현재의 러시아다. 현실적으로가장 긴 국경선을 맞대고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늘 슬라브 민족에 대해서 공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한편, 중국 사람들이 관념적으로 한국이란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한문(漢文)을 대할 때의 느낌과 흡사하다고 하면 그리 어긋나지 않은 비유가 될 것이다.

한문은 우리에게 외국어이면서도 외국어가 아니다. 생각하기 나름으로는 분명한 외국어이지만, 그러나 영어나 불어 같은 외국어는 아니다. 중국인들이 한국을 생각하는 것도 그와 같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기네 나라의 일부인 듯했다가도 냉정하게 보면 엄연한 외국이다. 기나긴 역사적 관계 속에서 한때 우리가 중국의 속방(屬邦)을 자처한 일도 있었으니, 그들이 볼 때의 한국은 우리가 한자를 대할 때 이상으로 늘 알쏭달쏭한 것이다. 평소 무심코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마치 한국을 저희네 나라의 일부로 생각하는 듯한 표현이 불쑥불쑥 섞여 나오기도 한다.

천여 년을 그렇게 생각해 온 한국인데, 바로 그 나라에 자신들의 가장 큰 경쟁자요 자나깨나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인 소련이 자기들보다 먼저 상륙한다니, 그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각할수록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게다. 바로 그 때문에, 여태까지 ‘수도거성’운운하며 만만디를 부리던 그들이 그 객관적 상황 변화 하나로 태도가 돌변하여 ‘소심익익’이 되고 말았다.

- 4 -

좋다, 싫다를 겉 다르고 속 다르게 교묘히 얼버무리는 그들의 이중성, 그리고 그렇게 겉과 속이 달라야만 오히려 더 바람직한 인격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관념, 이런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을 상대할 때 곤란을 당하기 십상이다.

중국은 유교(儒敎)의 발상지요 종주국으로서 유교가 그 나라의 지배적인 철학이었다는 것이 객관적 사실이지만, 오늘날 현실적으로 중국인의 삶을 지배하는 철학은 유교가 아니라 도교(道敎)이다.

그러면 이 도교의 특질이 무엇인가? 도교의 한 가지 특징은 그것이 바로 난세를 헤쳐 가는 종교요 지혜라는 점이다.

실제로 근현대사만 보더라도 중국은 아편전쟁, 신해혁명, 5·4운동(1919년 5월 4일부터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과 민중의 반일, 반제 투쟁)에서 문화대혁명 등, 자고 나면 칼자루를 쥔 쪽이 달라져 있는 엄청난 공포와 불안과 혼돈의 시대를 지나왔다. 그러한 세상을 살면서 자기의 속마음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표리일체의 인격을 지니고서는 가히 생존조차 도모하기 어렵다. 또 그러한 사람과 가까이 했다가는 그것만으로도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그래서 나온 생존의 지혜가 바로 모든 게 다 좋다는 식의 모호함, 그리고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오히려 더 높게 사는 가치관이다. 그것이 지금 중국인 의식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노태우 정부 말기였다. 3월 초 대통령이 외무부 초도순시에서 지시한 사항이 대문짝만하게 신문을 장식하였다. 내용인즉 이러했다. 대통령은 지난 해 우리가 북방 외교에서 대성공을 거두어 마침내 소련과 국교를 정상화 했다고 자평하고, ‘금년은 우리의 모든 외교적 역량을 총경주하여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이루는 데 힘쓰자’는 요지의 말을 하였다. 그러한 말이 제목으로도 뽑히고 대서특필되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중국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서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을 조금만 더 알았어도 그 역으로 말하지 않았겠는가. 즉, “지난해 우리가 북방 외교에서 힘써 소련과 국교가 정상화 된 것은 아주 성공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북방 정책에만 치중하는 것은 북한을 너무 자극하는 일이 될 터이니, 북방 정책은 이 정도에서 현상 유지 쪽으로 가고, 기존의

- 5 -

우방인 미국, 일본, 그리고 더 나아가서 동남아시아 제국과의 우호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도록 외교를 강화하라.”는 식으로 중국과의 수교문제를 슬쩍 현안에서 배제시켰더라면 단번에 그들을 소심익익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중국이 그런 우리의 태도를 보고는 오히려 더 느긋한 자세로 돌아서서, ‘그렇게 한국 쪽에서 애타게 하자고 매달리니 그럼…’하는 식으로 못 이긴 척 따라나서면 되는 상황이 되었다. 중국은 가만히 앉아서 외교의 주도권을 쥐게 된 셈이다.

단순히 중국을 알지 못했던 것 하나로 해서 국익 차원에서 얼마나 큰 손실이 빚어질 수 있는가를 말해 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지난 수천년 동안 우리 민족이 이런 중국과 이마를 맞대고 살면서 지탱해 왔다는 것은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어수룩한 척 했어도 오늘날의 우리와는 달리 그런 문제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그랬기에 그런 요령부득의 중국을 능히 다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 중국이라는 나라

‘중국’이라는 국호는 하나의 고유명사이기 이전에 ‘천하지중심지국(天下之中心之國)’이라는 뜻을 지닌 보통명사의 성격이 더 강하다. 천하, 즉 세계의 중심에 있는 나라로서 변방과 아울러 이미 그 자체로 천하를 이룬다는 의식이 그 밑에 깔려있다. 그래서 중국이라는 나라를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 ‘나라’의 개념으로 생각했다가는 여러 가지 차질이 온다. 북경대학에 있을 적에 나는 이런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런 기회에 중국 천하를 다 둘러봐야 되겠다 싶어서 집중 강의를 2개월 만에 마치고 나머지 5개월여를 안 가는 데 없이 돌아다녔다. 티벳, 신강 위구르 족이 사는 우르무치, 해수면 보다 154m 낮은 투루판, 혜초 스님의 족적이 남아 있는 돈황의 막고굴 등, 그러는 동안 중앙아시아의 천산산맥을 네 번이나 넘었다.

떠나기 전 북경대학 측에서는 나의 여행을 극구 만류했다. 내가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자 젊은 중국인 강사를 따라 붙였다.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이라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를 위해서였다 물론 그의 여행 경비까지 내가 부담했다.

- 6 -

북경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탔는데 1940년대에 만든 소련제 비행기였다. 이 비행기가 날 수 있을까 의심될 만큼 비행기는 낡았다. 그런데 비행기가 항로의 중간 지점인 옥문관 근처에 이르렀을 때 예정에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 기착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몇 십 Km를 달려 초대소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잤다, 다음 날 중국인 강사에게 그 원인을 알아보라고 했더니 대답이 이랬다.

“비행기가 고장 난 것이 아니고 이 지역 당 간부께서 지금 그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가셨기 때문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간도 열흘이 될지 보름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듣고도 중국인들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 한민족의 불가사의

중국, 크기로 보나 인구로 보나 어마어마한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볼 때 불가사의한 하나의 큰 용광로였다. 역사상 한족(漢族)에게 걸려들어 녹아들어가지 않은 민족이 없고, 녹아들어가지 않은 문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과 대결 또는 상관한 민족과 문화 대부분이 그 속으로 용해되어 들어가 흔적을 잃고 말았다.

낭설인지는 모르지만 성서시대에 유대 종족의 한 갈래가 중국으로도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곳으로 간 갈래는 다 뚜렷한 흔적이 있지만 유독 중국으로 들어간 갈래만은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이야기가 중국이라는 나라의 불가사의한 특성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중국이라는 나라를 우리가 수천년 동안 이마를 맞대고 살면서도 자주적인 국가를 이루고 독자성을 지키며 버텨 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은 55개 소수민족과 한족이라는 한 개의 대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다. 본래는 수백 개에 이르는 종족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동화되고 남은 것이 56개이다.

여기에서 하나 주목할 만한 사실이 발견된다. 한때는 각자가 자기 역사의 주체였을 이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지금 중국 영토 밖에 독립주권국가를 이

- 7 -

루고 있는 민족은 오직 둘 뿐이다. 그 예외의 2개 민족이 바로 우리와 몽골이다.

문제는, 과연 우리민족에게 무엇이 있었기에 이것이 가능했겠느냐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무슨 힘으로, 어떤 경로를 거쳐, 저 중국이라고 하는 거대한 불가사의의 용광로 속에 녹아 들어가지 않고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고유한 영토를 확보하고 고유한 주권을 지니고,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지켜 올 수 있었을까?

우리에게 막강한 군사력이 있어서였는가? 그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특별한 부존자원이라도 있어서 막강한 경제력으로 대항하고 버텨 왔을까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뭔가 우리 민족에게 남다른 힘이 있었어야 하지 않는가? 그 비밀의 열쇠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 열쇠가 바로 우리민족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열쇠이며 우리 민족의 장래를 여는 열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문화의 힘’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수천년 동안 중국과 상대해 오면서 항상 지성의 힘으로써 평화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위기를 극복했으며 생존을 도모해 왔다. 그 문화의 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휘되었는가 하는 실례를 찾아보기 전에, 중국내 소수민족의 하나인 티벳(藏族)의 경우를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 티벳의 경우

티벳은 장족(藏族)이라는 이름으로 현재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되어 있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그 민족은 1954년 공산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전까지 장장 2,600년 간이나 독립주권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그들이 지금은 중국의 소수민족의 하나로 전락해 있지만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고유한 영토와 문화와 언어를 지켜왔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례와 비교해 보지 않고 단순히 우리의 사례만을 보고서 ‘우리 할아버지들은 참 위대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만다면 그것은 우물 안 개구리꼴이 되고 말 것이 아닌가.

중국 당나라 때의 기록을 살펴보니, 그 이전에도 중국은 수차례에 걸쳐 티

- 8 -

벳 정벌에 나섰다가 번번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당나라는 문성공주를 그곳으로 시집을 보내, 다시 말해 정략결혼을 통해 그때부터 티벳을 간접적으로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과연 티벳이 그럴 수 있었던 저력은 무엇일까?

나는 비행기를 타고 티벳으로 가면서 티벳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그 비행기 속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으레 비행기를 타면 고공으로 상승한다는 느낌과 다시 착륙을 위해 하강한다는 느낌이 완연한 법이다. 그런데 이 티벳으로 갈 때는 분명히 떠오르는 감각만 있고 내려가는 감각이 거의 없었다. 그냥 떠오르기만 해서는 위에다 턱 얹어 놓는다는 느낌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만 해도 자신이 있었는데, 공항 활주로를 내려 불과 20~30미터를 걸었을까. 도저히 걸어갈 수가 없어 주저앉게 되었다. 속이 울렁울렁하고 금방 토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담배라도 피면 가라앉을 까 싶어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니 웬일인지 불이 켜지지 않는다. 라이터를 들고 한참 씨름하고 있을 때 옆을 지나치던 티벳 사람 하나가 묘한 비소를 지으며 성냥을 꺼내준다. 워낙 산소가 희박하고 기압마저 낮아서 라이터조차 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동행한 중국 청년을 돌아보았더니, 이 34세의 북경대학 강사는 나보다 더 괴로워하고 있었다. 젊어도 건강 상태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공항에서 수속을 마치고 나니 우리를 안내할 사람이 나와 있었다. 우리는 차를 얻어 타고 거기서 90Km 떨어져 있는 티벳의 수도 라사로 향했다.

호텔에 들어서자 안내자가 심각한 목소리로 단단히 주의를 준다.

1. 지금 들어가면 절대 목욕하지 말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으라.

2. 침대 머리맡에 산소공급 호스가 있을 테니 한 시간쯤 지나면 안정이 되지 만 그래도 움직이지 말고 푹 자라.

3. 내일도 오전에는 푹 자도록 하고, 오후부터는 조금씩 움직여도 괜찮을 것 이다. 웬만큼 적응되려면 사흘은 기다려야 한다. 안정이 될 때까지 무조 건 잠만 자라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티벳이 중국내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기 전에는 중국

- 9 -

에 동화되지 않고 장장 2,600년 간이나 독립주권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거기에는 틀림없이 어떤 비결이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티벳의 인민들이 유난히 전투적이었던가? 또는 그 민족성이 특별히 강인하고 담대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문화적으로 다른 요인이 있었던 건가? 그러나 결론은 너무도 선명했다.

그 답은 그곳에 도착한 순간 이미 드러나 버렸다. 비록 내가 20세게 후반의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와서도 이렇게 맥을 못 추고 드러누운 형편인데, 천 수백 년 전 당나라 군사가 아무리 강하기로서니 무슨 수로 이런 악조건과 싸울 수 있었겠는가.

티벳이 중국에 녹아들어가지 않았던 까닭은 바로 이 지역적 조건 때문이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한 답으로 드러난 것이다.

티벳이 2,600년 동안이나 독립주권을 지켜 왔다고는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들이 지켜낸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음이 이로써 확인된 것이다. 이제 남은 질문은 과연 우리 할아버지들은 무슨 힘으로 지켜왔는가 하는 것이다.

■ 이소사대(以小事大)와 이대사소(以大事小)

인류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다.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이 경계를 맞대고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중국과 우리 사이에도 전쟁의 위험은 상존했다. 그리고 중국과 우리는 대소와 강약에 있어 서로 견줄 바가 되지 못하였다. 전쟁, 즉 무력을 통해서 맞서서는 결코 저들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중국은 한 번 거병 했다 하면 10만, 20만은 보통이요. 100만 대군을 이끌고 변방 경략에 나선 예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10만의 군사도 양성하기가 벅찰 정도였다.

중국은 역대의 무수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통해 왕조가 매우 빈번히 교체되었다. 우리 민족처럼 한 왕조가 오백년, 천년씩 지속되는 예는 찾아볼 수 없고 백년을 지속한 왕조도 드물어 당, 명, 청 등의 왕조를 제외하고는 불과 수십 년씩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렇게 빈번히 왕조가 교체되는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즉 역대를 하나로 꿰는 일관된 규범, 일관된 통

- 10 -

치 철학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할아버지들은 바로 이것을 간파하였다.

중국 역사상 누가 천하를 통일하더라도, 중원을 지배하는 주체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그들이 표방하는 통치 철학의 본질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불변하는 통치철학이란 다름 아닌 공맹사상(孔孟思想)이었다.

우리 할아버지들은 바로 이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그리하여 재빨리 공맹사상을 수입해서는 그 사상의 본산인 중국보다도 오히려 더 깊이 연구하고 더 철저히 실천하였다. 그럼으로써 중국에 침략의 명분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왕조가 건국되면서 그때까지 천여 년 이상을 국교로서 받들던 불교를 하루아침에 배척하고 유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채택하고 나선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나는 70년대 후반에 미국 앨라배마에 가서 야릇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흑인들이 인종차별에 대한 항의시위를 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평화적인 시가행진이었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그들이 모두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묵주를 목에 걸고 십자가와 성경을 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런 구호를 외쳤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딸로서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간다. 성경 어디에 인종차별이라는 가르침이 있으며, 성경 어디에 인권 탄압이라는 가르침이 있는가?”

흑인은 약자요. 백인은 강자이다. 지금 흑인 위에 백인들이 군림하고 있다. 그런데 약자인 흑인들이 강자인 백인들의 논리인 기독교의 가르침을 역으로 들이대며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우리 할아버지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할아버지들이 일찍이 공맹사상을 도입하여 구사한 지혜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공맹사상의 주된 내용 한 가지를 든다면 그것은 바로 예(禮)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 대한 우리할아버지들의 외교적 자세는 ‘작은 나라가 예로써 큰 나라를 섬긴다’는 것이었다. 즉 ‘사대(事大)’를 표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겉만 보고 판단하여 내면까지도 사대였다고 해석하고 만다면 그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이다. 그렇게 말하는 측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 채,

- 11 -

식민지 시대 일본인 사가(史家)들이 우리 민족의 실체를 부정하기 위해 도출해 낸 악의에 찬 해석만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사대라 하면 사람들은 이소사대(以小事大)만 생각하지 이것의 대응 개념인 이대사소(以大事小)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소사대와 이대사소는 맹자에 나오는 개념이다.

이소사대는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섬긴다는 의미이며, 이대사소는 큰 것으로써 작은 것을 섬긴다는 의미로, 작은 나라와 큰 나라 간에 서로 섬기는 도리가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예(禮)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소사대와 이대사소는 마땅히 짝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중국에 대하여 작은 나라임을 인정하고 이소사대를 표방하고 나섬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대사소, 즉 작은 나라인 우리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도록 족쇄를 채운 것이다. 그럼으로써 전화를 미연에 방지하고 국권을 지켰다. 그 과정이 예로써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히려 떳떳하고 당당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지혜로웠다고 할 수 있을지언정 어찌 비굴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 사대주의의 겉과 속

사대(事大)가 역사적으로 비난의 대성이 되는 것은 주체성 없이 맹목적으로 남의 문화에 순응 동화해버리는 경향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날 우리 문화는 결코 중국 문화에 동화되어 버리지 않았다.

지금부터 200년~300년 전쯤을 돌이켜 생각해보자. 그때 우리는 대륙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세련되게 발전시킨 동방 문화의 꽃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주변국들인 월남, 일본, 태국, 몽골, 기타 여러 아시아 국가들 중 특출한 선진국가로서 뭇 나라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리를 가리켜 동방문화의 종주였던 중국에서까지도 ‘소중화(小中華)’라 불러 찬탄해 마지 않았다. 저희 못지 않은 문화를 지녔다는 뜻이다.

한 번 생각해 보자. 구체적으로 우리문화의 어떤 면이 중국 문화의 아류인가? 그 입증을 찾다보면 오히려 그 반대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선 우리가 흔히 보는 건축물을 보라. 건축에 있어서 완만한 곡선의 미는

- 12 -

우리의 자연조건과 조화를 이룬 독창적 미라는 것이 세계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목조 건물을 지으면서 못하나 쓰지 않는 것도 우리 건축의 고유한 특징으로 되어 있다.

또 음식만 해도 그렇다. 우리가 먹는 음식과, 먹는 데 사용하는 제반 식기류 중에 어느 것이 과연 중국의 그것과 같으며 그것의 아류라 할 만 한 것이 있는가? 입는 옷을 비롯한 의식주의 모든 것이 우리의 독창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혹자는 정치적인 예속관계를 들어 비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 또한 그리 단순하게만 판단해 버릴 일이 아니다. 때마다 중국에 주청사(奏請使)를 보낸 것이 사실이요. 조공(朝貢)을 보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표면의 사실만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중국과 굴욕적인 관계를 맺었던 것이라고 속단 해 버린다면, 이것이야말로 중대한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는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 동양사회에서 ‘국가’의 개념은 현대 국가의 개념과는 달랐고, 우선 세계관부터가 지금과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들은 다투어 크게 앞선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선진 대열에 서는 것이 최대의 이상이었다. 능력이 모자라 이에 미치지 못하는 나라는 그야말로 오랑캐 나라, 즉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를 세우면 반드시 중국에 주청하여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것은 꼭 무슨 정치적 주종관계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스스로 국제 사회의 일원임을 공인받기 위함이었다.

조공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것도 공물을 일방적으로 갖다 바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예물(禮物)로서 서로가 주고받는 것이었다.

앞에서 ‘이대사소’를 말한 바 있지만,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가 보내는 공물을 받고도 ‘입을 싹 닦고’ 만다면 천하의 중심국가로서 위상을 지켜 나갈 수가 없다. 중국은 공물을 받으면 받은 것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을 안겨서 돌려보내는 것이 당연한 도리였다. 학자에 따라서 ‘조공무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살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결국 중국과의 관계에서 명분도 살리고 실리도 취하는 외교로써 전쟁 없이 영토와 민족과 문화를 보전해 왔다는 결론을 내릴 수

- 13 -

있게 된다. 주체성이 없었다는 말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면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을 만한 선조들의 지혜가 어찌하여 오늘 날 자기비하의 원인으로 왜곡되어 비치게 되었는가? 바로 일제 식민지 사학의 악영향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사학의 본질은 역사적 사실의 정당한 해석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멸망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규정하기 위한 망국의 사관이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우리가 일찍부터 한 번도 독자적으로 역사 창조의 주역이 되어 본 적이 없다고 해석하였다.

생각해 보면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 중국을 중심으로 했던 동양 사회에서 왜국(倭國)은 문화수준이 몹시 낮아서 야만적 후진국으로 취급을 받았고 당시의 국제질서 속에 당당한 일원으로 참여조차 할 수 없었던 나라들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일본이 중국에 주청과 조공을 하지 않은 것은 그들에게 특별히 강한 주체성과 자주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럴 자격이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채 저들이 우리 역사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그들과 같은 해석을 되풀이 하고 있다면 그것보다 더 서글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 牽强附會 : 근거가 없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대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맞춤

■ 생존의 지혜

이쯤에서, 우리 선조들이 그러한 외교의 지혜를 발휘했다면 어째서 원(元)의 침입이나 정묘년, 병자년의 호란 같은 대륙민족의 침략을 예방하지 못하였는가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천여 년래 우리를 침략한 것은 중원의 한족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침략한 것은 언제나 당시 세계 질서에서 만족(蠻族)으로 치부되다가 일시적으로 강성해진 북방의 몽골족, 여진족 등이었다.

이들의 우리에 대한 침략은 성격상 대개 두 가지로 구분된다. 원(몽골)의 경우처럼 무력으로 중원을 정복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남하한 경우가 있고, 금(金 여진족)의 경우처럼 중원을 정복하기 위한 전단계로서 우리를 먼저 쳐

- 14 -

내려온 경우가 있다. 이럴 때의 저들의 전력은 워낙 막강하여 도저히 당시 우리의 국력으로는 당해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럴 경우 대비하는 방법은

1. 재빨리 침략 세력과 손잡고 중원 정복에 참여하는 길

2. 일시적으로 굴욕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구실을 붙여 강화를 하는 일

여기서 우리는 항상 두 번째 방법을 취하는 슬기를 보였다.

침략세력과 결탁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현실주의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영원할 수가 없다.

여진족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가? 3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여진족의 말로는 그들의 고유한 문화는커녕 그 민족 자체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시 수모를 당하긴 했어도 이상주의를 선택한 우리 겨레의 오늘을 보라. 우리는 그들의 무력 앞에 굴복했다고는 하나 잠시도 우리의 혼을 빼앗긴 적은 없었다. 오히려 높은 수준의 문화적 긍지를 가지고 그들을 경멸하는 주체성을 견지하여 왔다.

아득한 옛날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천년 이래의 우리 국토, 우리 인구를 가지고는 무력으로 대륙을 정벌하고 지배한다는 것은 역부족한 일이었다. 만약 우리 선조들이 문화보다 무력에 힘을 기울여 북방의 여러 민족과 한족(漢族)에 대항하고 무력으로써 그들을 제압하려는 모험을 감행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여진, 말갈, 거란 등과 같이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용맹과 무력보다는 지략과 지혜로써 나라와 영토와 민족을 보전하는 길을 택했다. 싸우지 않고도 국경을 지켰으며 피흘리지 않고도 겨레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했다.

2. 부정에서 긍정으로

■ 자기 부정의 논리

19세기 이후 인류 문명사의 큰 흐름을 한 마디로 하면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 할 수 있다.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으로 인해 동양의 여러 나라, 특히 오늘날 제3세계라고 일컫는 여러 신생국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도 이런 세계사의 큰 조류에 밀려 그 제물이 되었다. 물론 우리는 동양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

- 15 -

으니 경우가 다르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명치유신 이후의 일본은 서구화 세력의 일부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식민지로 전락한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은 엄청난 충격과 함께 스스로 지난 날 자기들이 절대가치, 최고 가치로 믿고 의지하던 전통문화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품게 된다.

이런 가운데 식민지 지배자들은 통치의 편의상 여러 측면에서 지배국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한편, 식민지의 전통문화의 비합리성, 비생산성, 비과학성만을 부각시켜 그것은 논리적, 과학적으로 입증하여 말살하는 이른바 식민지 사관을 정립해 간다. 이러한 식민지 사관의 논리는 지배자들이 의해 새로이 설립, 운영된 소위 근대식 교육기관을 통해 강압적으로 주입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곧 식민지 교육이다.

이러한 비주체적인 교육을 받는 동안 점점 더 자기 것에 대한 회의, 부정의 심리가 커지고, 이제는 자기 것은 모두 창피한 것, 하루바삐 버려야 할 것으로만 여기는 가치관이 생겨나게 된다.

그 시절 우리 젊은이들 사이에 스스로를 비하하여 ‘엽전’이라고 자조하던 일종의 퇴폐주의가 만연하였던 것도 물론 우리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문화에 대한 긍지가 가장 강하다고 하는 중국마저도 그 무렵 한 때 전면 서구화를 부르짖고 나왔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약소민족의 이러한 ‘자기 부정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극복되는 시기는 대개 식민지 해방 투쟁이 성공하여 자주 독립국가를 수립한 직후의 상당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를 포함해서 많은 약소민족들이 독립한 시기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얼마간이다. 이 두번째 시기를 한마디로 규정지어 말한다면 ‘자기 긍정의 시대’라 할 것이다.

이시기의 특징은 전통문화, 민족문화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엄격한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거 아니라 지난 시대에 대한 반작용으로써 강렬한 감정적 분위기에 휩싸인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과 논리보다도 지금까지 부정되고 천시되던 전통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고 새롭게 부상하려는 의욕 그 자체가 중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문화에 대한 열광적 긍정이 민족적 자존을 확인시켜 주

- 16 -

는 나름의 중대한 역할을 하지만, 오래지 않아 신생 독립국가들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제부터 스스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과제, 예를 들면 근대화, 산업화, 공업화를 추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전통문화에 대한 맹목적 열광만으로는 충분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게 되는 시기가 도래하는 것이다. 이 시기를 이름하여 ‘조화와 극복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945년 8월 15일, 우리도 36년간의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는 감격과 환희를 맛보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다른 신생국 일반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상실한 전통문화를 되찾는 열광에 잠겨 볼 겨를조차 없었다. 광복과 동시에 민족 분단 시대의 개막이라는 불행한 상황이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현대사 속에서 커다란 또 하나의 비극이요 우리의 특수성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일제시대에는 지배자들에 의해 강요되었던 자기부정의 논리, 그리고 광복 이후에도 극복하지 못한 자기부정의 논리, 이것이 오늘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멸시하고 우리 것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풍조를 낳은 근본 원인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러한 우리 자신의 논리를 다시 한 번 부정하는 일이다. 이때의 부정은 그러나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다. 부정의 논리를 부정함으로써 긍정의 논리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 우리의 조국 조선 왕조

지금 우리 자신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얼마나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기를 드러내는 비근한 예로 이런 것을 들 수가 있다. 즉 오늘날 고등교육을 받은 우리 지식인 중에 조선왕조를 자신의 조국으로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거의 없다고 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고 있다 왕실의 임금들은 하나같이 무능하고 부도덕하였으며, 주지육림에 빠져 있지 않으면 비빈(妃嬪)들의 치맛자락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민생은 외면했던 것으로만 여긴다. 또 당시의 지식인 지배계층, 즉 사대부에 대해서는 서민들 등이나

- 17 -

쳐 먹은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 그리고 당파싸움이나 하면서 국력을 낭비한 사람들로만 인식한다. 또 그런 가운데 망한 나라라 해서 조선왕조 그 자체를 증오에 찬 시선으로 바라본다. TV의 사극도 늘 그런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과연 조선왕조가 그런 나라였던가? 그 해답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찾아보기로 하겠다.

일본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역사상 가장 긍지를 가지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시기가 다름아닌 에도시대, 곧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시절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에도시대는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조 중기 이후에 해당하는데, 그 시대 일본의 문화는 당시 조선의 문화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낙후된 후진문화였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통신사 한 가지만을 예로 들어도 분명해진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후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면서 일본의 요청에 따라 파견하기 시작한 우리의 문화사절이었다. 7년에 걸친 전란으로 원수의 나라가 된 일본은 끈질기게 국교 정상화를 요청하였고 전란이 끝난 9년 만에 국교가 재개 되면서 보낸 것이 조선통신사였다.

오늘날에도 8.15 광복 후 국교가 정상화되기까지 20여년이 걸렸음을 비교하면 그 옛날에도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는 어떤 나라도 살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의 일본 기록을 보자.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구성된 300~500명의 통신사 일행이 도착하면 에도 정부는 재정이 바닥날 정도로 그야말로 ‘칙사 대접’을 하였다. 그 이유는 선진국인 조선의 문화사절을 자기들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에도 통치권의 권위와 정통성을 확보하기 이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선진의 문물과 세련된 예의범절을 배울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통신사 행렬이 지나가는 길목에는 일본의 지식인들이 구름 모이듯 모여 들었다. 그리고는 지난 10여 년 동안 궁금히 여겨 왔던 것을 모두 적어 놓았다가 그때 일제히 물어 보곤 하였던 것이다. 이번에 놓치면 다시 10년 이상의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때의 의사교환은 모두 필담으로 아루어졌고 그들에게 조선은 환상을 빚어낼 만큼 아득한 문화의 선진국이었다.

- 18 -

에도 시대의 지배층이라면 무사계급인데 일본의 무사 앞에서는 백성의 목숨이 파리 목숨과도 같았다. 일반 평민은 길 가다가 사소한 트집만 잡혀도 무사가 그 자리에서 칼로 베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처럼 원시적이고 포악한 시대였는데도 오늘의 일본 지식인들은 그 시대를 자기 역사의 찬란했던 한 시대로 생각하여 애정과 긍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반면 조선은 그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문화국가였는데도 우리의 지식인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부정적 시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바로 저 에도 시대를 찬미하는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심어준 비뚤어진 역사관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 모순이 어떻게 연장되어 오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증례로서 ‘이조(李朝)’라는 용어를 들 수 있다. 지금도 무심코 ‘이조시대’니 ‘이조백자’니 ‘이조실록’이니 하는 말들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 역사상 ‘이조’라고 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엄연히 ‘조선왕조’인데도 일제가 교묘한 통치 술책으로 고의적으로 ‘이조’라는 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 속에 어떤 저의가 있는지 살펴보자.

1. 고종황제의 의문의 죽음과 3·1운동을 겪으며 조선왕실이 더 이상 백성의 구심점이 될 수 없도록 하는 술책으로써 ‘이조’라는 말을 만들어 냄, 조선 백성의 나라가 아니라 일개 전주 이씨 가문의 나라라는 뜻

2. 이왕직(李王職)이라는 직제를 만들고, 고종황제를 이태왕(李太王)으로 격 하. ‘조선왕조실록’을 ‘이조실록’으로 고쳐 부름

그리고 진실을 말하자면 고종황제야말로 진정 위대한 순국선열의 한 분이시다.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을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로 선포하였고, 갖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을사 및 정미조약에 끝끝내 서명하지 않았으며,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 국권을 지키려다 강제로 황제위를 양위당하고 마침내는 저들에게 독살당함으로써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였다.

그의 내전(內殿)인 명성황후도 일인들의 폭거에 의해 시해당하고 시신이 불태워지는 참변을 당했다. 그러나 지금 고종황제나 명성황후에 대해서 순국선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이러한 모순의 씨앗을 뿌려놓은 일본인 자신들은 자기네 왕실에 대해서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모셔놓고 끔찍이 받들고 있다.

- 19 -

지금 우리의 조선왕조는 우리 가슴 속 어디쯤에 있는가? 그 빛나는 조국은 어디로 갔는가?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의 가슴속에 조국으로서의 조선왕조는 사라지고 없다. 이는 조선왕조 시대에 대한 향수를 느껴서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미우나 고우나 조선왕조는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뿌리요 밑바탕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 뿌리와 밑바탕을 송두리째 부정하고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 조선왕조의 건국이념

조선왕조의 경우처럼 한 왕조의 정통성이 오백 년씩 면면히 이어져 내리는 예는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지구상에 그런 나라의 예가 없다. 만일 그러한 예를 찾고자 한다면 우리 한반도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한반도에서는 조선뿐만 아니라 한 왕조가 들어서면 오백 년, 천 년씩 지속되는 예가 허다하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하나의 기적과 같은 일로서 실로 찬탄의 대상으로 보아도 좋을 만한 일인데, 이것을 두고 일제의 사학자들은 이런 해석을 달았다. 즉 ‘조선 사람들은 무능한 왕실에 불만을 느껴도 혁명을 일으켜 그것을 뒤엎을 만한 기상이 없는 무기력한 백성이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물론 결코 진실일 수 없는 억지 주장이다.

한 왕조의 사직이 오백 년 씩 지속되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그 긍정적인 요소의 첫 번째를 도덕적 정당성과 논리적 합리성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적 정당성과 논리적 합리성이라는 바탕 위에서 성립되지 않은 왕조는 아무리 창칼로 백성을 위압하여 지탱한다 하더라도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는 법이다.

*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교체되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당위성

- 보수불교에서 신흥 유학으로 사상적 패권이 넘어가는 전환기 즉, 신흥의 사상이 전통보수의 불교 사상과 대결을 벌여 판정승을 거두는 장면이다.

조선의 개국을 즈음하여 조선의 기본 정책을 밝히기 위해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등에 의해서 찬진(撰進)된 <조선경국전>은 개국이념과 철학을 명문화하여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 20 -

적어도 14세기 말, 이 지구상에 이토록 뚜렷한 건국이념과 합리적인 통치철학을 명문으로 밝히면서 출범한 국가는 없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근본적인 핵심을 요약한다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四端)이될 것이다. 혹은 인의예지에 신(信)을 더하여 오상(五常)으로 그 핵심을 요약하기도 한다. 조선왕조는 바로 이 유학의 핵심인 인의예지를 건국의 이념으로 삼고 통치의 철학으로 삼은 것이다.

* 통치 철학이 담긴 궁궐

1. 인의예지와 대응하는 사대문

- 흥인문(興仁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門), 홍지문(弘智門)

2. 대문과 대문 사이 혹은 안팎의 소문

- 광화문(光化門), 혜화문(惠化門), 돈화문(敦化門), 흥화문(興化門),

홍화문(弘化門), 선화문(宣化門)

-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化 라는 글자는 ‘교민화속(敎民化俗)’ 즉 백성을 가르쳐 풍속을 순화하겠다는 뜻

3. 보신각(普信閣) : 인의예지에 더하여 信으로서 五常을 이루겠다는 뜻

- 인정(人定) : 한밤중 4대문을 닫는 종으로 인정(人定)이라 함, 28번, 하 늘의 별자리 28수가 1순환을 마치면 하루가 끝난다고 봄

- 파루(罷漏) : 33번, 요즘은 제야의 종, 3.1절 등에도 33번을 침, 삼일운 동 때 민족대표 33인을 상징하여 33번을 친다는 것은 말이 안 됨, 삼일운 동이 일어나기 몇 백 년 전에도 파루는 33번을 쳤음

* 33천(33개의 하늘) 이라는 동양고래의 우주관 반영

- 동서남북 사방에 8개의 하늘이 있고 그 가운데 이 모두를 지휘하는 견선 성(見善城) 이를 모두 합치면 33개의 하늘

- 견성성의 성주를 환(桓)이라 하는데 일찍이 양주동 박사는 단군의 부조인 환인천제, 환웅천왕이 거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함

- 기미년에 민족대표가 33인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님

다시 한 번, 그때로 돌아가 보자. 조선은 무력이 아닌 인의예지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교화할 것임을 33천, 곧 우주 전체, 하늘에 맹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치의지가 종이 울릴 때마다.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다시 말하거니

- 21 -

와 14세기 말, 이 지구상에 과연 어떤 나라, 어떤 전제군주국이 이렇게 거룩한 이념과 철학을 가지고 등장한 예가 있는가! 조선왕조가 오백 년이나 사직이 지속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자기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를 모두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본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정하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때는 남을 좇아갈 도리밖에 없다. 극한의 열등의식밖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불안하고 조급해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도덕적으로 황폐해진 것은 바로 그 자기부정이 만들어낸 조급함에 기인하는 것이다.

열등의식이 빚어낸 조급함이 불식되고 나면, 민족과 민족문화에 대한 자존심이 생기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이 땅의 도덕은 저절로 소생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확신해도 좋다. 우리는 누천년을 이어 내려온 뿌리 있는 문화민족이기 때문이다.

■ 예송(禮訟)에 대하여

조선왕조를 부정적으로 말하는 대표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당파싸움’이다. 오늘날 기성세대의 대부분은 당시의 지식인 지배계층이 쓸데없는 당쟁만을 일삼다가 나라를 망쳤다고 하는 인식을 고정관념처럼 가지고 있다. 또 ‘한국 사람들은 둘 만 모여도 파가 갈린다’는 식으로, ‘당파성’이 아주 고질화된 우리의 민족성이어서 그렇게 된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진실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민족에게도 천부적이고 선천적인 민족성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한 때 세계를 정복했던 저 몽골족을 보라. 만약 저들의 민족성이 진취적이요 용맹스러웠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기상을 지금도 떨치고 있어야 옳다. 그러나 오늘의 몽골족을 놓고 어떤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멀리 갈 것도 없다. 약 100년 전 쯤 이 땅을 다녀간 외국인들이 쓴 글들을 보노라면 한국 사람들이 게으르다는 것, 그것도 아주 구제받지 못할 정도로 게으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인들을 게으르다고 할 수 있는 사람

- 22 -

은 없다. 오히려 극성스러울 정도로 부지런 하다는 게 한국인에 대한 공통적인 견해다. 미국 이민사회에서, 만약 유태인 가계 옆에 한국인이 가게를 열면 유태인은 빨리 짐 싸들고 떠나는 게 상책이라는 풍자까지 나오게 되었겠는가? 불과 100년 사이의 변화다.

천부적이고 선천적인 민족성이 따로 있어서 그것이 그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역사적 문화적 환경이 한 시기의 민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일정한 시기, 일정한 풍토에서 한번 형성된 민족성이 그 다음 시기의 민족문화 창조에 영향을 줄 수는 있겠지만, 결코 고정불변의 민족성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한국 사람이 쉽게 분열하고 둘만 모여도 파가 갈린다는 것이 설사오늘의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우리의 고정불변의 속성은 아닌 것이다.

당쟁에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것을 모두 살펴볼 수는 없고, 가장무의미하고 부정적인 당쟁의 하나로 치부하는 사례를 들어 당쟁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그런 사례로 들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은 바로 예송(禮訟)이다. 예송은 예법을 놓고 쟁송을 벌인다는 이야기다. 그때 쟁점은 왕실이 복상(服喪)문제였다.

<문제> 효종의 사망과 효종비의 사망 때 효종의 계모후인 자의대비가 몇 년 간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 하는 왕실의 복상문제

*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고 둘째인 봉림대군(효종)이 왕위 계승

- 조선시대 거상기간 : 부모상은 3년(부모가 죽었을 때)

그 역의 경우 같은 기간의 상복을 입는다. 그래서 자의대비는 맏아들인 소 현세자가 죽었을 때 이미 3년 상복을 입은 바 있음, 둘째 이하가 죽었을 때는 1년 상복을 입어야 함

- 효종은 종통(宗統)을 이어받은 왕이지만 둘째 아들이므로 기년상(1년복)을 해야 한다는 주장 : 송시열과 그를 따르는 노론

- 효종은 둘째이나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맏아들로 예우해서 3년 상을 해 야 한다는 주장 : 허목 등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들의 주장

- 노론의 승리, 권력의 주도권을 잡음

- 23 -

* 3년(실제로는 만 2년) : 이 기간은 태어나 독립된 생명으로 설 수 있기 까지 부모의 품에 안기어 보호받는 기간과 같다.

이 사건을 두고 오늘날의 사람들이 맨 먼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아니 그때 선비들은 그렇게도 할 일이 없었는가? 지금 임금이 죽은 판국에 그 어머니가 1년 복을 입으면 어떻고 3년 복을 입으면 어떻단 말인가? 표면적으로는 예(禮)를 문제 삼았지만 속셈은 권력 투쟁에 있었던 게 아닌가?”

바로 일제의 사학자들이 내린 결론이 그와 같은 것이었다. 즉 국가 운영상 아무런 중대성도 없는 사안을 두고 소모적인 권력투쟁을 벌였다는 것이 그들의 해석이다. 예송은 표면상의 명분으로 예를 내세운 것일 뿐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었으며, 사실상 조선 사람들의 민족성, 고질적인 당파성이 당쟁으로 나타났고, 그것이 예송에서 극명히 드러났다는 식으로 결론지었다.

언뜻 들으면 꽤나 합리적인 분석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그것이 어느 시대의 가치기준을 가지고 본 것이냐 하는 데 있다.

그 시대에는 공법 개념의 법이 없었고, 대신 예(禮)가 있었다. 그 시대에는 예가 곧 공법이었다. 그것이 헌법의 역할을 하고 민법의 역할을 했다. 사회의 모든 질서가 이것에서 비롯되어 나오고 유지 되었다. 오늘날의 법보다도 훨씬 포괄적인 범위에서 사회전반을 통제하고 있어서, 이것이 무너지는 날에는 사회의 기본 질서가 함께 무너지는 것으로 그 시대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가령 왕실에서 예의 적용이 잘못 이루어진다는 것은 실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오늘날 대법원 판례 이상의 큰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일반 백성의 사사로운 가정에까지 그 혼란이 이어지게 되어, 사회 근간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그 시대 사람들에게 그 문제는 목숨을 바쳐 싸워도 아깝지 않은 일, 마땅히 싸워야만 할 일이었던 것이다.

연전에 외국에서 비행기를 탔는데 옆 자리에 스위스 사람이 앉았다. 대화중에 그의 직업이 국회의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앉은 좌석은 3등석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 국회의원의 경우만 생각하고, 국회의원이라면 1등석에 앉지 왜 3등석에 앉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국회의원이 무슨

- 24 -

돈이 있느냐면서 이런 말을 했다. 자기가 안 한다는 것을 지역 주민이 하도 강권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4선 째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데, 국가에 봉사하는 것도 좋지만 이로 인해 많은 돈을 벌 기회를 잃게 되어서 이젠 아무리 시켜도 더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도 곧 그런 때가 오지 말란 법은 없다. 앞으로 몇 백 년 후 정말 대통령 같은 것은 시켜줘도 안 한다는 시대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이 와서 우리 자손들이 1960~1970년대 신문을 펼쳐 놓고서 이런 말을 한다고 상상해 보라.

“그때 할아버지들 침 웃기는군, 아니, 누가 대통령을 하면 어때? 또 3선하면 어떻고 4선하면 어떻다고 그랬을까? 괜히 학생들이 공부하기 싫으니까 그랬던 게지.” 이렇게 말한다면 과연 이것이 진실을 본 것이겠는가?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가 300년 전의 예송을 놓고 지금 이 시대의 가치기준으로 해석하여, 예(禮)와 같은 부차적인문제로 피나는 투쟁을 벌였다고, 또 그런 문제를 명분으로 내걸고 권력다툼이나 벌였다고 매도해 버린다면, 우리 또한 그 미래의 야속한 후손들과 다를 바가 뭐 있겠는가.

당시로서 예송(禮訟)문제는 양보할 수 없는, 국가의 존폐와 직결되는 중대사였다. 그래서 생명을 걸고라도 싸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고, 권세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권세를 내놓으면서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반대측과는 지조있는 결별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고질적인 당파성’이라고 매도했던 것의 실체이다.

그때 대립의 초점이 바로 예(禮)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예송은 고매한 이념의 논쟁으로서 세계사 속에서도 보기 드문 위대한 투쟁이었다. 이런 위대한 이념의 논쟁을 부끄러운 역사의 한 부분으로만 인식해 왔으니 실로 우리의 자기부정이 어떤 지경에 와 있는지 알 수 있다.

이제 근본적인 시각의 전환이 있어야 겠다. 앞으로 긍정적인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역사, 내 문화에 대한 애정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애정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해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하나씩 하나씩 제대로 알아나가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 25 -

■ 광복을 보는 눈

* 광복 : 빛을 되찾음, 주권을 되찾았다는 의미

* 해방 : 속박에서 풀려나는 것, 수동적인 수치스런 말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가를 조선왕조의 건국이념과 예송이라는 단면을 놓고 살펴보았는데, 이번에는 우리 현대사 속에서 그 예를 한번 찾아보기로 한다.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조국, 이 대한민국의 탄생 배경에 대한 이해에서도 뿌리 깊은 부정의 논리가 발견된다.

이를테면 ‘8·15 광복’ 이라고 해야 할 것을 흔히 ‘8·15 해방’이라고 말하는 데서도 그것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어째서 ‘해방’이 아니고 ‘광복’이라고 해야 옳은지는, 지금부터 살펴보려고 하는 대한민국의 탄생 배경 속에서 분명해 질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오늘날 제3세계라고 하는 많은 약소국들이 신생독립국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테벳의 경우처럼 독립국이었다가도 대전 후에 남의 나라 지배 아래로 들어간 나라도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독립주권국가로 거듭난 것은 결코 제2차 대전의 종결에 따른 당연하고도 자동적인 결과였다고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또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될 수도 있는 운명의 기로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학교교육을 통해서 이렇게 배웠다. 즉,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측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전범국들인 일본, 독일, 이탈리아에 의해 부당하게 점령되거나 주권을 박탈당했던 나라들이 다 같이 주권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그 흐름 속에서 우리도 독립국이 되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독립은 마치 연합국이 승리했기 때문에 거저 얻어진 보너스인양 인식되고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스스로 독립을 쟁취한 것도 아닌데 광복절을 성대히 자축하는 것은 민망스러운 일이 아니냐는 극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도 있다.

물론 연합국의 승리가 우리의 독립에 중요한 작용을 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뿐인가? 진정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가?

대한민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주권국가로 탄생하게 되는 유일무이한 국제법적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카이로 선언이다. 1943년 11월 미

- 26 -

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개석 3거두가 모인 대전후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을 위한 회담이었는데, 제1항과 2항은 만주국과 대만을 중국에 귀속시킨다는 것이었고, 3항이 조선을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후의 포츠담 선언은 카이로 선언의 확인인 셈이었다. 이것이 유일한 근거가 되어 우리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제3항을 삽입한 사람이 장개석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장 총통이 ‘조선은 수백년 동안 중국의 속방이었지만, 중국이 그 내정에 간섭해 본적이 없다. 따라서 조선은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 면서 자진해서 그 조항을 삽입했던 것이다.

장 총통은 다른 선택도 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나 처칠은 조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조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 한마디에 중국의 속방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장 총통은 작은 섬 한 조각도 놓치지 않고 중국에 귀속시키면서 조선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지 않고 독립을 시켜야 한다고 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상해 임시정부 시절을 회고해 볼 필요가 있다.

임시정부 초기인 1920년대, 임시정부 요인들이 겪은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을 무렵 임정 국무총리였던 이동녕 선생이 손문과 장개석 총통에게 절박하게 지원 요청을 했다. 그러나 중국측으로부터는 ‘내 코가 석자’라는 냉담한 말 한마디만 돌아왔다.

세월이 흘러 김구 선생이 임정 국무령으로 있던 1932년 장개석 총통 측에서 김구 선생과의 회견을 청해 오는 변화가 생긴다. 그것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 투척 사건이 원인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우고, 1932년에는 상해 사변을 일으켜 1차 전투에서 15만의 중국군이 5만의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한다. 중국의 체면이, 그리고 장개석의 위상이 흔들릴 무렵, 김구 선생의 지휘를 받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일본의 콧대를 꺾어 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이 소식의 외신으로 전파되자 은근히 통쾌해 한 것은 그동안 일본의 등쌀에 캥겨 있던 열강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측의 인식이 새로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 27 -

장 총통은 이 사건의 배후에 바로 지난 날 자신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가 냉대를 받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국군 10만이 못한 일을 조선 청년 윤봉길 혼자의 힘으로 해냈구나.” 그리고 김구 선생과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백범일지에는 일대일로 필담을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튼 이때부터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도 있고 하여 우리 임시정부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 지사들이 다시 모여들고 진용을 재정비함으로써 광복 때까지 줄기찬 투쟁을 계속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는 것이다.아울러 중국과 우리는 일본에 대항하여 연대를 이루게 되고, 중국 측은 ‘일본 제국주의를 박멸하는 중국의 정책은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함에 있다.’는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게 되었다.

1943년 카이로에서 장개석 총통이 왜 그런 선택을 하였는가 하는 배경은 이로써 설명될 수 있다.

우리의 독립은 광복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끈질기게 전개해 온 피나는 투쟁의 연장선 위에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해방이라는 말 속에는 다분히 우리의 독립이 우리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찾아온 수동적 결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서글픈 말도 바로 우리의 그 ‘망각병’이 만들어 낸 것이다. 국내외에서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바친 그분들은 넉넉한 유산을 남길 수도 없었고, 자신의 자녀를 제대로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나라를 되찾은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한 것은 무엇인가?

요즘은 보훈처에서 많이들 발굴해서 보훈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지만, 지금보다 더욱 알뜰한 대우를 해야 할 것이다. 대학도 그 순국선열들의 후손에게 맨 먼저 교육의 기회를 돌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조국의 미래가 뻗어 나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 28 -

3. 보편성과 특수성

■ 보편성과 특수성

우리 고전문학 작품 중에 <춘향전> 만큼 국민적 사랑을 받는 작품도 드물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이 작품을 한국 고전 소설의 백미라 일컫는다. <춘향전이 어째서 훌륭한 작품인가 하는 소위 문예미학적인 측면은 접어두고, 한 가지 사실에만 유의해서 보면, 이 작품이 그만큼 한국인의 정서에 잘 맞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나는 여러 해 전에 한국 문학을 공부하러 온 어느 외국인에게 춘향전을 강독해 준 적이 있다. <춘향전> 속에서 가장 절정을 이루는 대목은 무어니 해도 ‘어사출또’ 장면이다.

그런데 나에게 배우던 그 외국인은 한국인이 후련해 마지않는 바로 이 대목에서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못마땅해 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이 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대문을 나설 때부터 자기는 이 작품이 좀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될 것을 염려했다. 그의 염려대로 공권을 가지고 자신의 연적인 변학도를 타도하는 일이 못마땅했다.

그 외국인이 옳으냐, 혹은 <춘향전>의 그 장면을 아무런 거부 반응 없이 보아 온 우리가 옳으냐 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그 외국인은 서구적 민주사회의 정의라는 ‘보편성’에 입각해서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고, 우리는 한국적 사고체계라는 ‘특수성’속에서 그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떠나, 한국인에게는 한국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특수성이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외국인으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굉장히 많다.

어느 날 내가 탄 영업용 택시가 곡예운전을 하며 달리고 있는데 그 앞에 승용차 한 대 때문에 더 빨리 갈 수가 없었다. 그는 경음기를 울려대더니 어찌어찌해서 앞지르기를 하고 그 승용차 앞을 가로막더니 차를 세우고 욕을 해대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도 한 가운데서 시비가 붙었는데 법규를 위반한 것은 영업용 택시 기사였는데도 그가 더 기승이었다.

“왜 비켜 달라고 신호를 보내도 안 비켜 주는 거냐! 나는 이것으로 식구를

- 29 -

먹여 살려야 하는데 그러니까 당신이 양보를 해야지!”

만약 서구인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 택시 기사의 논리를 이해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때만 해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한국에서는 이해가 되는 시대였다.

세계가 함께 이해할 수 있고 인정하는 보편성이 있는가 하면, 한국인에게만 이해되고 한국인에게만 인정되는 특수성이 있다. 이것은 자잘한 일상적 문제에서부터 체제나 이념, 사상과 같은 거대한 정신의 문제에까지 확대 적용할 수 있다.

우리가 보편성을 외면한 채 특수성 안에만 갇혀 있을 때, 우리끼리는 얼마든지 교감하고 어울려 살 수 있다. 그러나 세계인과 더불어 호흡할 수 없고 세계와 소통통할 수 없으며, 나아가 세계 속에서 나의 생존조차 확보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관건이 되는 것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조화롭게 접목시키는 일이다. 이 접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 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을 세계에 이해시킬 수 있고 우리를 세계의 중심에 놓을 수 있다. 우리가 부르짖고 있는 ‘세계화’도 세계적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을 얼마만큼 성공적으로 접목시키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 한국인의 종교는 샤머니즘

외국을 다니다 보면 더러 일정한 서식에 인적 사항을 채울 일이 생긴다. 그러면 종교가 무엇이냐고 묻는 난이 있는데, 나의 경우는 거기에 ‘없음 (nothing)’ 이라고 쓰게 된다. 나뿐만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쓰게 될 것이다. 물론 없으니까 없다고 쓰는 것인데. 이것을 외국 사람들은 굉장히 이상한 시선으로 본다. 특히 심한 것은 중동지역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니, 종교가 없다니! 어떻게 사람이 종교가 없느냐?’며 놀란다. 뒤집어 얘기하면 ‘종교가 없다니, 너도 사람이냐?’는 것이다. 물론 사고방식의 차이다.

그런데 종교 란을 ‘없음’이라고 쓰는 한국인에게 과연 종교가 없는 것일까?

어찌 보면 우리 의식의 심층부에는 종교라고 이름붙이지 않은 어떤 종교가 강력히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 30 -

언젠가 오대산에 등산을 갔다가 산제(山祭)를 올리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을 만났다. 면면을 보니 과학기술원에서 온 사람들로 미국에서 핵무기학을 전공한 사람 등 쟁쟁한 과학자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산제를 올린다고 돼지 머리를 갖다 놓고 넙죽넙죽 절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런 농을 던졌다.

“우리야 인문과학 하는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고 최첨단 과학을 하신다는 분들이 왜 그러고들 있으시오?”

그러자 한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우리는 한국사람 아닌가요?”

맞는 말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새 집을 지으면서, 사업을 새로 하면서 혹은 다른 사연으로 고사 한 번 안 지낸 사람이 있을까? 한국 사람이 가는 곳에는 어디나 이런 의식이 따라간다.

물론 고사를 지내는 것이 우리의 ‘종교 아닌 종교’에 따른 행위의 전부는 아니다. 많은 정치가와 경영인들이 점복(占卜)에 의지 하는가 하면, 서민들은 손 없는 날을 찾아 이사를 하고, 난관에 부딪힌 자손들은 조상의 원혼을 달래는 궂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우리의 행위는 샤머니즘, 정령신앙, 자연숭배 등을 포함하는 원시 종교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민족의 종교는 원시종교, 넓은 의미에서의 샤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구한말에 선교사로 와서 한국문화를 연구하고 한국 독립을 위해서도 애를 썼던 H. 헐버트 박사는 <대한제국 멸망사>에서 한국인의 종교를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한국인들이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고, 고난을 당할 때는 영혼숭배자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종교가 무엇인지 알려면 그가 고난에 빠졌을 때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를 살펴야 한다. (중략)

한국인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신앙은 원시적인 영혼숭배사상이며 그밖의 모든 문화는 그러한 신앙위에 기초를 둔 상부 구조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매우 정확한 지적이라고 본다.

고대 우리민족의 이동과 분포를 추적하고 고고학적 지표로 삼을 수 있는 것으로 거울, 방울, 칼을 들게 되는데, 이 세가지로 일습되는 것은 단순한 생

- 31 -

활 용구가 아니라 샤머니즘의 제의에 사용되는 신기(神器)였다.

방울과 칼은 오늘날에도 무당이 궂을 할 때 쓰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시베리아, 몽골, 만주, 한반도를 거쳐 일본의 큐슈 지방까지 분포되어 있지만, 그 외지역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적어도 수천 년 동안 이것은 우리민족, 또는 우리와 혈연적으로 가까운 민족을 늘 따라다녔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을 느끼게 된다. 우리 민족과 그 근원적 생리를 함께하며 수천 년을 이어 내려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원시종교는 대개 외래 사상의 그늘에서 미신으로, 잡술로 천시되고 배척되어 왔을 뿐 한 번도 변변히 우리 고유의 종교로, 우리 고유의 전통 사상으로 대접받으며 발전할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 원시종교의 본질을 잘 들여다보면, 얼마든지 차원 높은 사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일례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보배요, 거룩한 정신적 유산인 ‘효(孝) 사상’을 보아도 근원적으로는 조상을 신으로 숭배하는 우리 원시종교에 뿌리를 박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우리 원시종교의 신관(神觀)이나 사관(死觀)을 분석해 보면 질 드러난다.

무릇 인류의 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처음부터 학적(學的으로 체계화되고 철학적으로 승화된 상태에서 출발한 예는 있을 수 없다. 장구한 시일을 두고 그 민족의 예지로써 그 민족 생리에 맞도록 다듬고 연마하는 동안 지금과 같이 세련된 고등종교와 사상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의 고유한 민간사상으로서의 원시종교도 계속 이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할 것이다.

■ 한국적 사고의 단면

어떤 종교를 개관할 때 가장 흥미 있는 영역은 그 종교에서 받드는 산(神)의 성격이다. 왜냐하면 어떤 신을 창조하고 어떻게 신봉하느냐 하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곧 인간의 자기표현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에서든, 그 종교에서 받드는 신의 성격은 곧 그 신을 신봉하는 집단이나 개인의 인생관 내지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기에 한국인이 창조하고 신봉하는 제신(諸神)의 성격을 살펴보는 일은 곧 한국인의 인생관, 가치관, 윤리관 등의 사고방식을 엿보는 일이요, 이러한 사고방식이 창출해 낸 한국인의 문화 일반을 투시하는 일이 된다.

- 32 -

한국에서는 유일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외래 종교의 유일신을 신봉하는 이라 하여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유일신 외에 또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는 허전해서 못 배긴다. 가령 부처님께 철따라 불공도 드리고 복도 빌지만, 가정적으로는 또 조상신을 극진히 모시면서 그 조상신에게 가운의 번성을 빈다. 또 기독교를 신봉하는 이들 중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월이면 신수점을 치고, 사주관상을 보며, 기타 무수한 고사를 지내는가. 그리고 현대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 각 방면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는 인사들 중에도 상차려 놓고 속신(俗神)들 앞에서 큰절 올리기를 망설이지 않는 이가 많다.

한국의 토속신 중 대부분이 이미 불교와 같은 외래 종교에 흡수되었으나 아직도 속신으로 잔존하는 것이 많다.

터주대감(집터의 신), 성주대감(가옥 신), 삼신(포태의 신), 제석님(생명을 주관하는 신), 조왕신(부엌 신), 산신령(산 신), 용왕님(水神), 시왕님(내세 관장), 역신마마(천연두 신), 서낭 신(촌락수호 신), 장승(길, 마을의 수호신)등

이런 신들은 지속적인 찬미와 숭경(崇敬)의 대상은 아니지만 위기에 맞닥뜨렸다던가 해서 필요할 때만 찾는 경향을 드러낸다.

그래서 원시 종교행사인 산제, 당제, 굿, 푸닥거리 등은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잡다한 제신을 위로하고 그 노여움을 풀어주는 의례이다.

* 토속 신을 중심으로 본 한국적 사고의 단면

1. 신의 이미지에 대한 것

- 산신은 대개의 경우 산중왕이라 일컫는 호랑이로 표상된다. 이것은 신의 권위가 자비와 고매한 품성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위협을 통해서 유지된다는 것,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으니 받든다는 피동적이고 숙명적인 신앙.

2. 우리의 속신에는 선과 신의가 없다

- 본질적으로 선신과 악신의 구별도 애매하고, 신은 자신의 비위에 맞는 자의 편에 선다. 한국인의 사고방식이 현세주의 이면서도 이상주의적이고, 이타적이면서도 이기적이 양면성을 띠고 있다는 점과 연관이 깊다.

3. 끈질긴 집요성이다.

- 33 -

- 서양의 신화나 전설에서 보는 것처럼 적과의 과감한 투쟁 끝에 장렬한 희생을 하는 것이 아닌 일방적으로 당하면서도 한발 한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끈기다.

4. 의타적 안일성이다

- 위기 앞에서도 자기 방어의 방법이 지극히 의타적이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기적에 의존하려는 안일한 사고의 일단이 드러난다. 안일을 찾는 길에서는 모험은 금물이다.

■ 우리 민족의 주특기

우리는 외래의 종교와 사상을 수용하되, 그것에 우리 자신을 동화시키고 그것으로 우리 정신의 근본을 삼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을 우리 민족 집단의 존립에 이바지할 도구적 이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즉 위대한 사상인 불교, 고매한 이념인 유교를 어떻게 하면 우리 나라, 우리 백성을 살아 남게 하고 부강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한 것이지 결코 그 종교나 사상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일찍이 불교가 호국불교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나, 우리가 유교를 국책으로 채택함으로써 중국을 견제하고 우리 자신을 지키는 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서구와 비교해 보면 서구에서도 무수한 파란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 개혁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타락하고 부패한 성직자의 퇴출, 부패의 원인이 되는 교회제도의 개선, 성경의 새로운 해석 등 다방면의 개혁을 단행하면서도 기독교 본래의 이념과 사상만은 견지하여 왔다.

거기에 비해 우리 민족은 외래의 종교와 사상을 수용하여 한동안 그 속에 안주하기는 하지만 상황이 달라지면 미련없이 그들을 내버릴 태세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항상 그 시대의 보편주의를 수용하여, 그것으로 우리 자신을 무장하고 그 속에 안주함으로써 그 시대의 세계 속에서 우리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기민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 지닌 문화적

- 34 -

저력의 실체로서 우리 민족의 주특기라고 할 만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처럼 보편주의만을 추종하여 갈 때, 지난날의 역사가 입증하듯이 그것은 생존의 논리, 현상 유지의 논리, 위기 극복의 논리는 될지언정 지속적인 발전의 논리, 번영의 논리는 될 수 없다.

오늘의 상황은 지난 중세 동양의 국제질서처럼 우리에게 보편주의만을 강요하는 상황도 아니다. 그러기에 유사 이래 민족중흥과 약진을 꽤해 볼 절호의 기회가 지금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 전통 문화를 계승하자는 뜻

미래의 한국문화는 반드시 전통문화라는 바탕위에서 성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늘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고 말하게 되는데, 그러면 개중에는 으레 오해를 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아니 그것이 될 법이나 한 얘기냐? 이 밝은 세상에 갓 쓰고 도포 입고 행전 치고 옛날로 돌아가 살자는 말이야?”

물론 그러자는 말이 아니다. 또 그럴 수도 없다.

전통문화의 계승은 반드시 오늘이 현실적 요청에 따라 재생산하고 재창조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반드시 우리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계승하여야하는가? 흔히들 그 당위성을 ‘우리 것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기 때문’이라는 논리에서 찾곤 하는데, 이것은 새로운 자기부정의 논리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지난날의 우리 문화가 최고의 것이기 때문에 보존하고 계승하여야한다면, 가령 오늘의 시점에서 남의 것과 비교하여 훌륭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것은 몽땅 내버려도 좋다는 역논리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난날의 문화가 아름답고 훌륭한 것일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비록 그렇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것’이라는 그 절대성, 숙명성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보존하고 계승하여야 한다. 비록 내 어머니가 미인이 아니어도 나를 낳아 준 그 사실 자체 때문에 애틋하게 사랑하듯이, 전통 문화는 오늘 우리를 있게 한 근본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존중하고 아끼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금후에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생존해 나

- 35 -

가고 번영해 나가기 위하여 발 딛고 설 근본적인 밑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전통문화는 우수한 여러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수용하고 용해시켜서 우리 것을 살찌우고 꽃피게 하는 그릇이요, 틀이요, 용광로이다. 그 그릇, 그 틀, 그 용광로를 깨뜨려 버리고 나면 남의 좋은 것을 받아들이려고 해도 받아들일 근거를 상실하고 만다.

우리가 앞으로 창조해 나가야 할 문화도 결국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문화여야 한다. 우리가 이질적인 외래문화를 수용하더라도 그것을 녹여서 한국의 문화로 꽃 피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에게 고유의 전통문화라는 바탕이 있을 때 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절대성, 숙명성 때문에 전통문화는 비록 그것이 아름답거나 훌륭하지 않다 해도 반드시 발양(發揚)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전통문화가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할 때에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2018. 2. 5

- 36 -


반응형

'독서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왼손과 오른손  (0) 2018.03.02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2)  (0) 2018.02.12
말 그릇 (2)  (0) 2018.01.23
말 그릇   (0) 2018.01.15
상처 없는 영혼(2)   (0) 2018.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