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2)

2018. 2. 12. 14:16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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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2)

■ 홍일식 지음

4. 21세기와 효사상

■ 효사상은 우리 민족의 신앙

우리 전통 문화의 핵심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효 사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 효사상이라면 유교에서 나온 것이고, 유교라면 중국의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우리 고유문화의 본질인 양 말하는가?”

물론 유교의 효사상이 우리에게 들어와 철저히 받아들여지고 실천된 것은 사실이요, 그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유교의 효사상이 우리에게 유입되기 이전에 우리에게는 효사상이라고 이름해야 할 사상이 본래부터 있어 왔다는 것이다. 바로 원시종교적 샤머니즘에 뿌리를 둔 부모와 조상에 대한 숭배사상이 그것이다. 이 고유의 사상이 유교적인 옷을 입음으로써 더욱 세련된 모습으로 승화되었다고는 할 수 있어도, 한국인의 효사상이 유교에서 나왔다고는 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그 본질을 이루는 부분은 우리 본래의 효사상인 것이다.

일제 치하인 1917년 경 강원도 산골 화전민들만이 사는 오지에 폭설이 쌓여 이듬해 봄까지 교통이 완전히 두절되었다. 그때 상당수의 화전민이 굶어 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듬해 봄에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그 실태를 조사한 보고서가 있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다. 어느 외딴집 너댓 명의 가족이 굶어 죽었는데 그 집 천장을 보니 종이 봉지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풀어보니 하얀 쌀이 두어 되 정도 담겨 있었다. 그 쌀은 자기 부모 제삿날에 메 지을 쌀이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들에게는 유교가 요구하는 실천 규범으로서의 효 이전에 의식의 심층부에 자리잡은 어떤 강력한 신앙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신앙에 해당하는 부분이 우리의 효 사상이며 이것이 우리 전통문화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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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말하는 효는 규범문화(規範文化)라면 한국인 본래의 효는 관념문화(觀念文化)이다

1. 유형문화 : 용기문화(用器文化)

생활 도구를 비롯한 일체의 용품, 문화권 사이에 전파가 빠르다.

2. 규범문화 : 제도, 관습, 법률 등과 같은 것

상당기간 교류하다보면 역시 큰 무리 없이 우수한 쪽으로 동화된다.

3. 관념문화 : 신앙, 종교, 철학과 같은 고차원의 정신문화로 쉽게 전파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 문화에 동화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문화의 주인인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고유의 효는 규범이라기보다는 신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기제사(忌祭祀)를 예로 들어보면 중국 일본 대만 등의 유교 영향권의 나라들 대부분은 기제사 풍속이 모두 사라졌지만 한국에서만은 그 풍속이 맥맥히 살아 있다. 내가 중국을 유학 온 북한 학생에게 물어보니 북한 주민들도 평범한 밥상이라도 차려 놓고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제도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지만 그것을 당국에 고발하는 사람은 없고 만약 그것을 고발하면 고발하는 사람이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 교인들이 우상숭배를 금하는 교리에 따라 제사를 안 지낸다고는 하지만 ‘추도식’이라고 하는 변형된 형태로라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다. 외형적인 차이는 있지만 그 심층심리는 변함이 없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죽음이 곧 현세와의 단절을 뜻하지 않는다. 즉 부모가 돌아가시면 나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새로운 차원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부모는 돌아가셔도 항상 어디에선가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굽어 살펴보고 계신다. 뿐만 아리라 제삿날이 되면 직접 오셔서 내가 차려 놓은 제사 음식을 실제로 잡수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제사를 정성껏 잘 모시면 복을 받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화를 입는다는 믿음도 있다. 즉 돌아가신 부모는 나와의 관계를 영원히 지속하며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신격(神格)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유교의 주자가례에서는 “제즉진미진지효(祭則盡未盡之孝)”라하여 살아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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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하여야 할 효를 다하지 못했으니 돌아가신 후에 그것을 다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한국인은 ‘종신지효(終身之孝)로 살아 있으나 돌아가시나 매한가지로 영원히 모신다는 것이다.

안동 지방에 전해 오는 민담하나다

옛날 어느 양반이 한 고을을 지나다 우연히 상놈의 집 제사 지내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무슨 음식인지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을 제상(祭床)밑에다 놓고 절을 하고 있었다. 하도 이상하여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그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이 대답하기를 “그건 개고기 였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그것을 하도 좋아하여 상 위에 올릴 수는 없고 제상 밑에 놓고 지낸 것입니다. 귀신이야 상 위에 있으나 밑에 있으나 찾아 잡수셨을 것 아닙니까?”

상놈의 이 말을 들은 양반이 무릎을 탁 치면서 “옛 말에 예출어정(禮出於情)이요 정출어근(情出於近)이라 하였으니 사람의 예는 정으로부터 나오고 정은 가까운 데서부터 나온다 했으니 너의 그 제례야말로 참된 예절이로다.”

한국인의 효 사상에는 한국인 특유의 관념적 뿌리가 있다. 같은 유고문화권인데도 오늘날에 와서는 중국인에게도 없어지고 일본인에게도 없어진 그 효사상이 오직 우리 한국인에게만은 살아남아서 생동하고 있다. 그것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이미 신앙의 차원에 가 있는 관념문화이기 때문이다. 효사상은 우리가 자신을 송두리째 버리기 전에는 결코 버릴 수 없는 우리 정신의 원형질과도 같은 것이다.

■ 제사상 위의 교훈

* 조율시이(棗栗枾梨)……의 교훈

1. 조(棗) - 대추

- 대추나무의 특징은 한 나무에 열매가 수 없이 많이 달린다. 꽃 하나가 피 면 반드시 열매 하나를 맺고서야 떨어진다.

- 제상에 대추가 첫 번째 자리에 놓이는 것은 이 대추나무의 특징처럼 자손 의 번창을 상징하고 기원하는 것이다.

- 시부모에게 폐백을 드릴 때, 시부모 된 사람들이 새 며느리의 치마폭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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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를 던져 주는 것도 아들 딸 구별 말고 대추 열듯이 많이 낳아 자손을 번창케 하라는 뜻

2. 율(栗) : 밤

- 여느 식물의 경우 나무를 길러낸 최초의 씨앗은 썩어서 사라져 버리지만 밤만은 땅속에 들어갔던 최초의 씨밤이 그 위의 나무가 아름드리가 되어 도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 밤은 나와 조상의 영원한 연결을 의미한다. 자손이 몇 십, 몇 백 대를 이 어가더라도 썩지 않는 씨밤처럼 영원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상의 위패, 신주는 반드시 밤나무로 만든다.

- 작가는 그 말이 궁금하여 실제로 그 씨밤이 썩지 않고 있음을 땅을 파서 확인한 바 있음

3. 시(枾) : 감

- 콩 심은데 콩 나고 ……. 그런데 감심은 데는 감이 나지 않는다. 감을 심 어도 작고 볼품없는 고욤이 달린다.

- 고욤나무가 3~5년 쯤 되었을 때 그 줄기를 째고 기존의 감나무 가지를 거기에 접을 붙인다.

- 감나무가 상징하는 바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나무의 생가지를 째서 접을 붙이는 것처럼 아픔을 이기는 노력이 있어야 학문을 이루고 진정한 인격 체로 설 수 있다는 것이다.

4. 산소 옆에 과일나무를 심는 까닭

- ‘예출어정 정출어근’이라는 말처럼 산소 근처에 유실수를 심어서 후손들이 조상을 생각하고 열매를 따먹으러 오라는 것, 그렇게 산소에 자주 와서 조 상 얘기도 하고, 산소도 돌보라는 뜻

■ 21세기의 문화상품

문화는 마치 물이 흐르듯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나는 이것을 문화의 고유한 운동법칙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물의 흐름이 강물처럼 꼭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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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분수처럼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외부에서 동력이 가해져야만 그렇게 된다. 문화도 이처럼 문화 외적인 어떤 물리력이 가해지면 역류될 때가 있다. 광복 이후 6·25 동란을 거치면서 이 땅에 미국의 저질 군사문화와 속류(俗流) 실용주의가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어 온 것은 바로 이러한 경우라고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고급한 우리 전통문화는 그 속에서 신음해야 했으며, 그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어 우리는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나 줄기차게 물을 뿜는 분수도 한없이 치솟을 수는 없을 뿐 아니라 외부의 동력이 중단되면 일순간에 그 흐름은 아래로 향해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땅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저급한 서양문화도 머지않아 외적인 요소, 즉 정치, 경제 군사적인 힘의 소멸과 함께 순식간에 퇴조할 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게다가 이런 확신을 더욱 굳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새로운 고급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원자재로서 더 없이 훌륭한 전통문화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전통문화를 잘 빚어서 우리의 고급문화를 창출해 낸다면, 이제 저질 문화의 분수가 멈추는 것과 함께 그 고급문화는 이 땅을 적시고 넘쳐 바야흐로 세계를 향해 흘러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능성을 지닌 우리 전통문화의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효사상이다.

미국 LA에 가서 한국인 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에 들렀다. 사업은 잘 되는 것 같았는데 주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면서 하는 말이 “장사가 잘 되기는 하지요마는, 잘 되면 뭐합니까?” 였다.

사연을 듣고 보니 흑인 불량배가 문제였다. 이민사회에서 한흑(韓黑) 간의 갈등은 골이 꽤 깊었다. 한국 교포의 성공에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를 느끼는 흑인들이 공연한 화풀이 대상으로 식당에 흉기를 들이대며 약탈을 해 가곤 했다.

이런 딱한 처지를 보고 그냥 있을 수 없어서 나는 그 자리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어느 하루 날을 잡아 그날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오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원하는 만큼 무료로 제공하도록 하고 그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한국인의 아름다운 전통에 따른 것임을 널리 알려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제안을 듣는 주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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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뒤였다. 내가 다시 LA에 갔을 때 그 식당을 찾았다. 그랬더니 주인이 나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그동안에 생긴 놀라운 변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떠나고 난 뒤 그 식당 주인은 다른 방법이 없으니 시험 삼아 한 번 해 보자는 생각으로 지역 소식지에 홍보도 하고 길목마다 포스터도 붙이고 해서 행사를 벌이니 식당이 초만원을 이루었고 그래서 불고기를 원하는 대로 먹게 했는데도 워낙 고기값이 싼 곳이라 실제 돈은 얼마 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흑인들의 횡포는 사라지고 멋모르고 다른 지역에서 온 흑인들이 행패를 부리면 그 지역의 흑인들이 나타나 그들을 끌고 나가는 것이었다.

우리의 효 사상이 그 흑인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착한 본성을 일깨운 것이다.

21세기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경제대국이 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요, 군사 대국이 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 길은 무척 험난한 길이 될 것이요. 그 길을 가는 동안에 필연적으로 많은 적도 만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문화대국으로 가는 길은 그보다 훨씬 가깝고 쉬운 길이 될 것이다. 더구나 문화대국은 적을 만들지도 않는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자는 것이다. 우리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을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 아무도 한 자가 없기에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백범일지>에 있는 김구 선생의 말씀이다.

■ 21세기가 요구하는 사상

우리의 고전 심청전을 불교 소설로 이해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래서 심청의 효성도 불교적 보은사상(報恩思想)이란 관점에서 해석하곤 한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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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만약 그렇다면 심청이 공양미 3백 석을 절에 갖다 바친 그 순간에 아버지 심봉사의 눈이 떠지는 식으로 전개되었어야 옳을 것이다. 공양미 삼백석으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사기극’에 불과 했던 셈이니, <심청전>을 불교소설이라고 하면 그것은 오히려 불교를 모독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심청의 효성은 불교적이라기보다는 한국적이라고 해야 옳다.

심봉사가 눈을 뜨는 것은 맹인잔치 마지막 날에 심청이 아버지가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고 “아이고, 아버지!”하고 외쳤을 때였다. 그러자 딸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버지가 깜짝 놀라서 눈을 뜨게 되니, 그 눈을 뜨게 한 것은 불교의 힘이 아니라 심청의 지극한 효심, 한국적인 그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이 하나 있다. 그것은 심봉사가 눈을 뜨던 그 순간, 심봉사만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잔치에 참석했던 다른 모든 장님이 함께 눈을 뜬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인이 아니면 결코 접근할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모티브다.

1972년 뮌헨올림픽 문화행사로 윤이상의 가극 <심청>이 초연 되었을 때 사양 사람들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심청의 지극한 효성, 그 마음, 한국적인 그 마음으로써 장님 아버지가 마지막에 눈을 뜨는데, 그것도 아버지만이 아니라 모든 장님이 한꺼번에 떴다고 하는 것, 이것은 서양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발상이 불가능한 너무나도 놀라운 모티브였던 것이다. 그래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가장 한국적인 사상인 우리의 효사상, 그것은 그래서 가장 세계적인 사상이다.

효사상이 응축하고 있는 것을 분석해보자.

1. 효는 지극히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 효사상은 생명의 창조자인 조상을 신으로 받드는 원시종교에 뿌리를 박 고 있다.

- 국조 단군의 이념이 홍익인간이요, 민족 종교인 동학이 인내천 사상을 표 방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2. 효는 이타주의를 본질로 한다. : 나보다 나 아닌 부모를 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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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효는 인내주의를 필수로 한다.

- 부모를 섬기고 받드는 과정은 곧 나의 충동과 감정을 억누르고 자제해 나 가는 과정이다.

4. 효는 절충주의를 필수로 한다.

- 세대 간의 조화를 이루려면 반드시 절충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5. 효는 평화공존주의를 이상으로 한다.

- 부모를 모시면서 아래로 자식에 이르기까지 화평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 은 인간 생활의 근본이다.

효사상 속에는 이처럼 인본주의, 이타주의, 인내주의, 절충주의, 평화공존주의의 정신이 응축되어 있다.

효 사상이 우리 민족의 가슴에 아직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도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이 불씨가 더 이상 사그라들기 전에 다시 한 번 활활 타오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비단 지난 날 우리의 문화, 우리의 사상을 진작한다는 일개 민족문화의 차원을 넘어 장차 온 인류를 구원하는 새로운 사상운동으로 연결되는 역사적 대과업이 될 것이다.

우리의 효사상은 바로 그 길을 열어 보일 수 있는 사상이다. 인류가 상실한 빛나는 정신적 가치를 되찾는 일이 바로 효 사상의 확대, 승화로써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는 현대문명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사상으로서, 이 사상에 주목하고 있으며, 거기에 커다란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 위대한 역사학자 아놀드 조셉 토인비는 이러한 것을 내다보았던 것일까? 한국에 와서 연구한 적도 없는 그는 이런 말을 남기고 있다.

“장차 한국문화가 인류에 기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효사상일 것이다.”

<심청전>에서 ‘아이고, 아버지!’하는 부르짖음에 심봉사가 눈을 뜨던 그 순간, 그 자리의 모든 장님이 눈을 떴던 것처럼 우리의 효 사상에 온 인류가 함께 눈을 뜨는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아니, 반드시 그리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 속에서 그 숙명의 시간을 향해 걸어 나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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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와 노인복지

서구 여러 나라 중에서도 특히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 스칸디나비아 3국은 사회 복지가 잘 되어 있기로 유명한 민주 사회주의 국가들이다.

80년대 후반 내가 그곳에 가서 본 것은 ‘요람에서 무덤까지’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눈동자가 휑하니 풀어졌고,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각 개인의 노후 생활을 나라에서 모두 보장해 주는데 거기에는 엄청난 예산이 소요된다. 그걸 모두 세금을 걷어서 하게 되니, 현역 노동인구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그 세금을 견디다 못한 사업가들은 자꾸만 국외로 빠져 나간다. 봉급생활을 하는 현역들은 월급의 절반이 세금으로 나갈 지경이다. 그래서 남은 사람들도 일할 의욕을 상실하고 외국으로 달아날 궁리만 하게 된다.

거기에다 생산에 종사할 젊은 인구는 갈수록 줄어들고 복지의 혜택을 받아야 할 노령인구는 갈수록 증가하기만 한다. 더구나 노령인구를 전부 국가에서 부양해 주니까, 개인은 아예 자신의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결국 복지정책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부모를 내팽개치도록 조장하고 있으니,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어야 할 그것이 오히려 인간을 자꾸만 야만의 상태로 몰아붙이고 있는 셈이다.

‘무한복지’라는 개념은 한 민족사의 종언을 고할 수 있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안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현직에서 은퇴한 노인 인구의 증가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우리도 소위 복지선진국의 모델을 본받아 여러 가지 노인 복지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시점인데, 지금 이 상황에서 과거 무한 복지를 이상으로 삼았던 서구형 복지 정책의 시행착오를 우리가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도리로 아는 효사상, 노인을 존경하는 경로사상의 아름다운 전통이 있으니 상황이 서구와 같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마땅히 한국형 노인 복지 정책이 추진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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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문제는 단순히 그들을 경제적으로 어떻게 부양할 것인가 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노인이 겪는 정신적인 소외감, 인간적인 고독감을 어떻게 해소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서구적인 해법에는 한계가 있어서 아무리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다고 해도 노인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보지 못한다. 문제를 돈으로만 해결하자고 들면, 늘어만 가는 노인 인구를 끝내 감당할 수 없어서 국가가 파산할 지경으로 가도 모자랄 것이다.

서구 사람들이 갔다가 되돌아 나오는 길을 우리가 걸어 들어가자고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노인 복지 정책을 펴지 말자는 말은 아니다. 합리적인 부분을 취하여 그것을 그것대로 하되, 서구적 모델을 맹종하지 말고 우리는 우리답게 효 사상을 진작하는 일에 더 관심을 쏟자는 말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막대한 국가적 지원을 받아 ‘공자(孔子) 프로젝트’라는 대규모 연구활동이 진행중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나온 서양인다운 발상의 하나는 우리를 웃음짓게 만든다. 서구의 신유교 학파 일각에서 동양의 효를 법으로 제정, 시행하여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하고 나선 것이다.

효는 앞 세대가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보고 자라는 동안 저절로 몸에 베어야 되는 것이다.

최근에 반가운 소식 하나를 신문에서 보았다. 각국의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늙고 병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일본 어린이들 중 40% 이상이 ‘양로원에 보내겠다’는 대답을 했는데, 그것도 다른 나라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어린이들 중 그런 대답을 한 어린이는 2%뿐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자신이 모시겠다고 대답하고 있다.

우리에게 아직 효심의 불이 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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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제와 오늘

■ 도덕성과 생산성

‘세계화’라는 과제는 국민 의식의 세계화 선진화, 그리고 일류 의식을 갖추지 않고서는 일등 제품과 생산성 및 제도를 창출할 수 없다. 현대의 경쟁 사회에서 첨단 과학 기술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그것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바르게 서지 않고는 행동의 효율성이 산출되지 않으며, 의식의 선진화가 없는 한 그 나라는 세계 일류의 국가로 도약하지 못한다.

지난 몇 년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과 사고들은 대부분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였으며, 어쩌다 생긴 우연이 아니라 ‘예고된 필연’이었던 것이다.

대형 사고가 날 때마다 책임 소재를 놓고 시비가 분분했지만 나는 그 근본적인 원인이 ‘대충대충’과 ‘빨리빨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우리의 전 근대적인 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관계의 차원에서도 우리는 친밀함과 무례함의 경계가 쉽사리 허물어지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낯선 사람끼리는 제법 예의를 차리고 사리분별을 제대로 따지다가도 조금 친밀해지면 그 규범이 간데없이 사라지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례다. 가까울수록 언행을 삼가고 공동의 규범을 존중하는 분별은 오히려 고지식한 태도로 여기기까지 한다.

이처럼 일상적인 예절과 시민적 교양 및 질서의식이 부족한 가운데서 사회전체의 발전과 국가경쟁력의 제고를 기대할 수는 없다.

도덕성 함양이라는 단순히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다운 삶을 위한 기본 원리의 요구인 동시에, 더 높은 수준의 국가 발전을 성취하기 위한 필수적 과제인 것이다.

국가 발전을 가속화하고 세계를 향해 당당하게 나아가기 위해서도 우리는 예절과 질서 의식에 투철해야 하고 교양있는 시민을 기르기 위한 일대 혁신을 해야 한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정신을 가다듬고 오늘의 과제를 직시해야 한다. 그것은 곧 국제화, 세계화의 밑거름으로서의 인성교육이며, 국민 의식의 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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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전통예절

흔히들 ‘한국의 전통예절’이라는 말을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 사람만의 특유한 예절이란 있을 수 없다. ‘예(禮)’란 한마디로 말해서 ‘질서’의 원리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일종의 사회적 ‘규범’이다. 때문에 오늘날처럼 각종 법률이 구비되어 있지 않던 옛날에는 이 ‘예’가 곧 법의 구실을 했던 것이다. ‘예’ 자체를 보는 시각이나 가치도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말하자면 옛날에는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예가 주(主)요 법이 종(從)이었다면 오늘날엔 그 반대로 변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법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없듯이 옛날에는 예절 없는 사회란 상상할 수 없었다.

예라는 것은 질서의 원리다. 질서란 인간생활에 있어서 상하좌우를 체계짓는 규범이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예를, 사양하는 마음(辭讓之心), 또는 남을 공경하는 마음(恭敬之心)이라 했다. 남 앞에서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주는 것이 곧 예의의 원초적 심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를 ‘예속(禮俗)’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그 시대와 장소에 따라 풍속과 어울려 가변적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름의 예절, 곧 예속 여러 가지 중에서 몇 가지만 들어본다.

1. 우리는 원래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엄격히 예의를 지켜왔다.

- 부부간의 예절

서로 상대를 높이는 호칭과 언어. 남편이 아내에게 ‘해라’를 쓰지 않 고 서로가 깍듯이 존대말로 대하는 것. 일본이나 중국에는 없음

2. 언행이 같은 맥락에 있음을 인정

- 말과 행동이 일치, 존대말이 우리처럼 발달한 나라는 없음

- 벗을 하는 평교(친구)간에도 관례를 치르고 나면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지 않고 아호(雅號)나 자(字)를 불렀다.

우리의 전통 예절이 요즘에 이르러 혼란의 극치를 드러내게 된 것은 전적으로 불행했던 현대사에 그 원인이 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저들은 소위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우리의 전통예절을 비롯한 일체의 민족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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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송두리째 부정, 말살하는 정책을 교묘히 펼쳤다. 이에 놀아난 식민지 지식인들은 무분별하게도 우리 것은 모두 낡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 배척하는데 앞장섰다. 요즘 우리 사회의 젊은 부부들이 서로 이름 부르기를 예사로 하고 심지어 서로 ‘해라’를 하는 짓거리들이 모두 이러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잔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도 비록 나라는 잃었지만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 예절의 맥이 아주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태평양 전쟁을 치르는 동안 공출이란 이름으로 양식을 모두 빼앗아가서 배급제로 연명했는데 그 어려운 시절에도 행세하는 집에서는 조상제사를 지낼 때는 떡을 해 먹곤 했다. 평소 먹는 것을 아끼고 아껴서 어떻게든 그 쌀을 모아 제사 음식을 마련하고, 제사를 지내고 나면 그 떡은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어려운 중에도 내입보다 이웃의 입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인간다운 삶을 꾸려 나가려면 거기에 걸맞는 품위 있는 예절이 따라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지난날의 그 고급한 예절을 모두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다. 지난 날 우리 조상들이 그처럼 야만스럽다고 흉보던 일본인들에게 지금은 오히려 예절을 배워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생각할수록 기막힌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오늘 날 우리 사회가 혼란을 거듭하는 중대한 원인 중의 하나는 우리들 개개인이 모두 예절을 상실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집 앞 골목길에서 개구쟁이들이 서로 엉겨 싸우면 아이 엄마나 집안 식구들이 뛰어나와 우선 자기 집 아이를 먼저 나무라면서 끌고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예절이요 상식이었다. 옳고 그름은 일단 집에 데리고 들어가서 차근차근 묻고 타이르는 법이다. 그러고 나서는 자기 아이의 잘잘못에 상관없이 상대방 집 어른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그러면 그쪽에서 오히려 미안하다고 받는 것이 당연한 풍속이기도 했다.

요즘은 흔히 아이들 싸움에 젊은 엄마들이 뛰어들어 오히려 남의 아이를 먼저 꾸짖고 심하면 쥐어박기까지 하여 어른들의 싸움으로 온 동네가 떠들썩해지곤 한다.

모진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살아오면서도 이웃 간에, 가깝고 먼 친척 간에 음식을 나눠먹던 아름다운 풍속, 낯선 과객이라도 반드시 불러 정중히 음식을 권하는 논두렁의 예절, 이런 것들이 모두 살얼음판 같은 난세를 살아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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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스스로 터득한 생활의 슬기요, 지혜요, 또한 우아한 예절로까지 승화되었던 것이니 이제 단순히 옛것이라 해서 허투루 보아 넘길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 한국인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잃어버린 우리의 예절, 넓게 말하면 우리의 전통문화를 되찾는 일이다. 지금 많은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은 우리들 한국인이 지니고 있는 바로 이 마음, 부모와 조상을 끔찍이 섬기고 노인을 공경하고 있는 이 마음에서 미래 세계의 활로를 여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예의 주시하고 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같이 부러워하고 있는 이러한 마음의 뿌리는 아직도 우리들 한국인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이제 우리 앞에는 이 귀중한 뿌리를 곱게 가꾸고 키우는 일만이 남아 있다.

■ 충성. 공경. 효도

충성과 공경과 효도가 지닌 본래의 의미는 상하간의 호혜(互惠)와 공존의 논리가 담겨 있다. 결코 어느 일방을 위주로 하는 개념이 아니다.

우선 국가에 충성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후손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예로부터 ‘충(忠)’을 정의하여 ‘상사리민위충(上思利民爲忠)’이라는 말을 해왔다. 즉 윗사람으로 하여금 백성을 이롭게 할 생각을 하게 만들면 그것이 곧 충이라는 것이다.

학생 시절에 나는 ‘징비록(懲毖錄)’을 읽다가 충격을 받았다. 이 책은 잘 알다시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이 은퇴하여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의 원인과 전황을 분석하고 기록해 둔 책이다. 추호의 과장이나 거짓이 있을 까닭이 없는 그 책 속에 ‘왜적 풍신수길이 이 땅을 점령해서 학정을 폈다는 것은 우리 조정을 위해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는 놀라운 말이 나온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다. 그 말을 뒤집어 해석하면, 침략자 왜적이 만약 선정을 베풀었다면 백성들이 모두 조정을 등지고 왜적의 편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스승에 대한 공경을 생각해 보자.

예로부터 우리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할 만큼 스승에 대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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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을 강조해왔다. 이것 역시 스승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공경을 강조하는 말로만 생각하지만 거기에는 상당히 실리적이고 현실적인 논리도 함께 있다.

‘선생이란 직업은 무당과도 같다’라는 말이 있다. 일단 신명이 나면 칼날 같은 작두위에 올라서서 춤을 출 수도 있다. 하지만 신명이 오르지 않으면 천금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을 준다 해도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선생이란 직업이 꼭 이와 같다. 학생들과의 교감 속에서 신명이 나지 않으면 가르치는 일에 열심일 수가 없다.

그때의 피해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선생이 아니고 바로 학생이다. 옛사람들이 스승을 그 그림자도 밟지 않을 만큼 존경한 이유는 바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똑 같은 논리의 선상에서 부모에 대한 효도(孝道)도 생각해 보자.

<명심보감>에 이르기를 “효어친(孝於親)이면 자역효지(子亦孝之)니 신기불효(身旣不孝)하면 자하효언(子何孝焉)이리요?”하였다. 내가 내 부모에게 효도하면 내 자식이 또한 나에게 효도할 것이, 내가 이미 효도를 못했다면 내 자식이 어찌 나에게 효도를 하겠느냐는 말이다.

자식이란 그 부모의 생김새만 닮는 게 아니다. 그 부모의 일거수 일투족, 모든 행위를 다 보고 배우는 법이다. 그래서 가장 위대한 스승은 부모라는 말이 있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함으로써 나의 자식으로부터 효도를 받는다. 요즘 ‘노후보장보험’이라는 것도 있는 모양인데, 옹색하게 그런 보험을 드느니보다 지금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효도란 결국은 주고 받는 것이다. 다만 주기는 부모에게 주고, 받기는 자식에게 받는다는 점에 특색이 있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스승에 대한 공경, 부모에 대한 효도는 궁극적으로는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는 자기애(自己愛)의 발로라 하겠지만, 그 방향을 자기가 아닌 다른 대상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부모에게 주고 자식에게 받는 효에서처럼 시차를 두는 긴 안목에 의해서 차원 높은 이타주의로 승화되어 있기에 더욱 큰 아름다움이 있다.

■ 족보의 현대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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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젊은 세대가 족보 본래의 참된 뜻을 몰각한 나머지 무관심한 정도를 떠나, 조상의 위업이나 보록(譜錄)을 운위하는 사람은 시대착오요. 현실에 역행하는 자라고 비웃곤 한다. 그러한 우거(愚擧)를 볼 때면 그들의 무지를 탓하기 앞서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다.

족보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인식은 지난 시대에 한 때 족보가 드러낸 역기능적인 측면만을 본 데서 비롯한 오해이다. ‘족보(族譜)’라 하면 신분과 상관없이 한 씨족의 보록이라 해야 할 것인데 이것이 지난 날 한 때 양반이라는 특수 계층의 상징물로 인식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 그래서 시대에 따라 어느 때는 족보를 성전으로 받들어 우상처럼 모시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이를 배경삼아 오만과 방종을 일삼은 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모두 족보 제도 본래의 의의와 목적과 는 거리가 먼, 일부 시대인의 인식 착오로 인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것을 근거로 족보제도 자체를 부정한다면, 이는 지난시대 사람들의 그러한 인식착오 이상으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요, 그러한 부정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족보제도에는 시대를 초월하여 의연히 우리 문화의 전통으로서, 또는 각 씨족과 가정의 보감(寶鑑)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보존되어야 할 가치와 중요성이 있다.

인류 세계에는 세계사가 있어 인류문화의 발자취를 밝혀주고, 극가에는 국사가 있어 선민(先民)의 정신과 사상을 다음 국민으로 하여금 이어가도록 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씨족은 족보로써 그 혈통과 가풍을 전해 가고 있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주체성과 민족적 자존심이 활발히 논의되는 것을 본다. 반갑고 다행한 일이다. 우리는 개화기 이후, 서구화는 곧 근대화요, 근대화는 곧 자주독립인 줄 착각하고 서두르다가 급기야는 ‘망국(亡國)’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역사적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다. 그것은 자기 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맹종할 때 어떠한 결과가 오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이제 나는 젊은이들에게 우리 민족문화의 본질 파악의 한 과제로서 각자 자기 씨족의 족보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고자 한다. 누구나가 자기와 직접 혈통적으로 연결되는 선조의 사적과 위업을 옳게 파악하고 이해하게 되면 여기에 애착이 생기게 될 것이요. 애착이 생기면 자기가 그런 조상의 후예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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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대한 자존심과 긍지가 생길 것은 자명한 일이다. ‘자존심’은 ‘자만심’과는 다른 것이다, 이렇게 하여 확립되는 각 가문의 자존심은 다시 민족문화의 이해를 통한 민족적 자만심으로 확대 승화될 것이니, 이를 일러 어찌 현대인의 바람직한 교양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 성인의 말씀에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옛 것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 가는 진정한 의미의 전통의 계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된 통일과 평화는 서로의 특색을 살리고 이해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조화임을 생각할 때, 지금 우리가 한 씨족으로서, 나아가 한 민족으로서의 특색과 긍지를 되찾아 꿋꿋한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의 요청에 따르는 일이다.

■ 한국학의 세계화

식민지 시대와 신식민지 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형성된, 자기 것을 맹목적으로 부정하는 ‘자기부정의 논리’가 이 땅을 지배하고 있다. 자기 것을 부정하는 마당에는 새로운 창조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자기 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자기 것을 해체해 버리고 없애버린다는 말이다. 자기를 해체, 소멸시키고 어떤 제3의 문화에다가 완전히 동화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모르거니와 자기를 부정하는 위에서는 어떠한 창조도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국제화나 세계화된 21세기도 바로 주체성 있는 자기의 바탕위에서 세계적인 보편성을 추구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난 세대에 의해 부정되었던 우리의 전통 문화, 전통의 가치를 긍정적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정신 유산가운데 아름답고 훌륭한 것은 물론이고 못나고 보족한 것까지 정확히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과거, 우리의 역사, 우리의 문화, 그것은 바로 오늘의 우리 자신을 있게 한 직접적인 모티브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바탕을 부정하고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속된 말로, 어디 가서 밥을 빌어먹으려고 해도 쪽박을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외부의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바탕, 자기 자신의 틀, 자기 자신의 그릇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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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중계탑과 봉수대

흔히들 낡고 쓸모없는 것으로만 생각해 버리는 우리 전통문화의 유산이 때로 창조적 계승을 통해서 현대의 문화 창출에 너무나도 값진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아니, 흥미롭다기보다는 ‘가슴 아픈’ 일화라고 해야 더 옳을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 국영 텔레비전이 첫 전파를 탄 것은 1961년 12월의 일이다. 물론 흑백이었다.

우리는 방송 기술 자체도 마찬가지 상황이었지만 방송 중계탑 건설과 관련한 기술적 축적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중계탑 그 자체의 건설이야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해도,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디에다 세우냐는 것인데, 우선 거기서부터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방면의 전문가가 전무한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관계자들은 하는 수 없이 방송분야에서 우리보다 월등히 앞서가고 있던 일본의 기술을 빌리자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 NHK 방송의 중계망을 건설한 회사를 상대로 어마어마한 예산이 투입되는 대규모 국책사업의 하청계약을 맺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불러놓은 일본의 실무진이 김포 공항에 도착하는 날이었다.

비행기에서 일본측 실무진이 내렸을 때 마중나가 있던 우리측 관계자들은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사람은 7, 9명이나 되는데 실무와 관련된 짐이라고는 작은 서류가방 하나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다른 짐은 없느냐고 물어도 없다고 한다. 우리측에서는 당연히 측량을 위한 거대한 장비라든가 대단한 첨단 기구가 도착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들이 당시 유일한 호텔인 반도호텔에 인도하고 뒤이어 실무회의를 열게 되었다. 제일먼저 중계탑의 위치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일본의 전문가들은 그 문제는 이미 결론이 나 있다면서 예의 그 가방을 철컥 열었다. 그 순간 우리측 참석자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일본 사람들이 철저한 준비성 때문이 아니라 그 가방 속에서 나온 뜻밖의 지도 한 장 때문이었다. 그 가방 속에서 나온 것은 다름아닌 조선시대의 봉수대 지도였던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이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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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수천 년을 살아 온 우리 선조들은 우리 땅의 형세를 환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경험적으로 가장 경제적인 위치들을 선정해 놓았고 그것이 실제 봉수대의 위치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령 부산항에 왜구가 침범해 왔다고 할 때, 각 봉수대에서 불을 지피는 데 드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가히 ‘빛의 속도’로 그 소식이 조정에 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봉수대들이 이미 전국을 효율적으로 연결하는 ‘최상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지도에서 몇 군데만 고쳐 잡으면 위치 선정 작업은 간단히 끝나는 것이었다.

일본 사람은 여기에 착안하여 한국의 고지도(古地圖)에 눈을 돌린 반면, 우리는 그러지 못하였다. 그 단순한 발상 하나를 떠올리지 못함으로써 막대한 재정을 일본 사람의 손에 쥐어 주어야 하는 서글픈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더구나 그 봉수대는 특별히 희귀한 것도 아니었고 마음만 먹으면 국내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발상을 우리는 왜 할 수 없었는가?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 일본 사람만큼 재능이나 창의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전통문화와는 담을 쌓아버린 단절된 우리의 의식 때문이었다.

이러한 ‘전통문화와 단절된 의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는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가 있다. 그것은 ‘식민지 의식’ 시대와 ‘신 식민지 지식인’시대를 거치는 동안 광범위하게 진행된 ‘자기 부정’의 결과이다.

아무리 값진 보배가 눈앞에 있더라도 의식이 먼저 그쪽으로 열려 있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그 가치를 인식할 수도 없는 법이다.

아무리 최첨단을 가는 신문화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불쑥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어제와 오늘의 바탕 위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단지 전통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몰이해 하나로 인하여 아직도 얼마나 많은 곳에서 ‘중계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지를 생각하면 실로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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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통일시대의 준비

■ 통일 세대를 위한 교육

나는 건강관리를 위해 특별히 하는 운동은 없고 일요일마다 등산을 가는 것이 고작이다. 한번은 늘 다니는 등산로에서 깜짝 놀랄만한 장면을 보았다. 지난주에 지날 때만 해도 멀쩡히 서서 위용을 자랑하던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가 그날은 계곡에 턱 쓰러져 있는 것이다. 일행과 나는 “아니, 저걸 누가 쓰러뜨렸지?” 하면서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쓰러뜨린 것이 아니었다. 밑동이 터북한데 지팡이로 쑤셔보니 푹하고 반 이상이 들어간다. 그 속에는 벌레가 우글우글하다. 그동안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는데 속은 다 썩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한 집안에서 아비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 명성을 얻고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자식을 잘못 가르쳐 놓으면 그 집안은 멸문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한 국가나 사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지금 번영과 풍요를 누리고 있다지만, 자라나는 세대를 잘못 가르쳐 놓고는 밝은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서산의 해가 지고 싶어서 지는 것이 아니듯이, 세월이 흐르면 세대는 교체되기 마련이다. 누구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우리 민족의 운명은 다음 세대의 손에 맡겨지는 것이다. 우리의 운명이 어느 날 풀썩 쓰러져 버린 저 아름드리 나무와 같이 된다면 그 근본적인 책임은 우리들 기성세대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책임이 어디에 있건 그 피해의 당사자는 바로 다음 세대이다. 따라서 오늘의 교육 현실은 기성세대만의 문제도 아니고 신세대만의 문제도 아니다. 오늘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반성은 기성세대와 신세대 양측 모두에게 절박하게 요청되는 과업인 것이다.

맹자에 이르기를, “부세(富歲)에 자제다뢰(子弟多賴)하고, 흉세(凶歲)에 자제다폭(子弟多暴)이라.“ 하였다. 풍년이 들어 넉넉한 시절에는 자식들이 모두 게으르고 나약해지기 쉽고, 흉년이 들어 쪼들리는 시절에는 자식들이 거칠고 포악해지기 쉽다는 뜻이다. 마치 우리나라 남북한의 청년들을 대비시켜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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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것 같다. 이제 풍요 속에서 게을러진 세대와 빈곤 속에서 사나워질 대로 사나워진 세대가 다음 시대의 민족사를 이끌고 가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흐름 앞에서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함께 파멸의 길로 가지 않고 포악함을 다스릴 길은 없는가? 그것은 바로 고급문화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자주적인 민족문화를 창조하고 그 위에서 그들을 감싸안는다면 그때는 불가능할 것도 없는 것이다. 고급한 문화의 힘은 포악함마저도 제어하고 감화시켜 끌어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이 만약 남한 사람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돈만 아는 자본주의의 노예요, 돈이면 부모형제도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짐승 취급하는 사람들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한 통일 자체가 불가능 할 수도 있다. 저들 말대로 ‘겨우 남조선 사람 종노릇하려고 통일하느냐?’ 는 상황이 될 수도 잇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남한 사람은 물질적으로만 넉넉한 것이 아니라 예의와 도리를 알고, 우애와 동포애,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에는, 갈등이나 마찰 없이 저쪽에서 먼저 통일을 원해 올 것이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 우위에 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도덕적으로 우위에 서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통일은 그때 비로소 이룩될 수 있다. 평화통일이란 다름아닌 문화적인 통일이다.

내가 젊은 세대를 향하여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육도 거기에 지표를 맞추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남과 북이 공통분모를 찾는 출발점으로는 수천 년을 한 민족으로서 함께 누려 온 전통문화 이상의 것이 없기 때문이다.

■ 바른 교육 큰사람 만들기

개구리라는 동물은 외부의 온도에 대한 적응력이 매우 뛰어나서 적응할 수 있는 온도의 고저 교차가 40도가 넘는다고 한다. 영하로 내려가도 땅속에서 동면하며 견딜 수 있고, 사람이 뜨겁다고 느끼는 섭씨 40도의 온도에서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차가운 데 있던 개구리를 갑자기 뜨거운 물에 집어넣으면 팔딱 뛰어 나온다. 그러나 적당한 온도의 물속에 담가놓고 기분좋게 유영하며 놀 때 그 물을 알콜램프로 서서히 가열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온도가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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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씩 상승하는 동안 그 변화에 적응해 온 개구리는 그 온도가 이미 적응의 한계치를 넘어선 이후에도 뛰쳐나오지 않아 스스로 개구리탕이 되고 만다.

너무 비참한 비유가 될는지 모르지만, 나는 오늘날 우리의 사회, 우리의 대학이 바로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지난 30여 년간 물질적으로는 고도성장을 이룩했다지만 정신적으로는 황폐화의 길을 걸어 온 우리 사회는 지금 심각한 도덕적 위기에 봉착해 있다. 극에 달한 인간 가치의 실종 앞에서 우리 모두는 전율을 느끼고 있다. 사회 전반에 드러난 엄청난 도덕성의 붕괴는 지금껏 우리가 스스로 자랑해 온 물질적 성장 그 자체를 허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지금 근본적인 개혁의 기회를 찾지 못한다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말지도 모르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대학의 현실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사회 현실을 타개하는 데 앞장서서 중추적 역할을 다해야 할 대학 역시 스스로 과거의 타성 속에 머무른 채 과감히 떨쳐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사회의 혁신을 선도해야 할 책무를 지닌 대학이 먼저 스스로의 혁신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 아래 나는 내가 책임을 지고 있는 고려대학교에서만이라도 그 실천의 기치를 올려야 한다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참담한 심정과 결연한 의지로서 대국민 성명을 내고 고려대학교의 일대 혁신에 착수하게 되었다. ‘바른 교육, 큰사람 만들기 위한 교육개혁’운동은 이러한 바탕위에서 출발하였다. (1990년대 후반 고려대학교 총장 시절)

* 고려대학교는

- 국망(國亡)의 위기 앞에서 ‘교육구국(敎育救國)’의 이념을 내걸고 우리민족 역량에 의한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개교

- 1910년대 재정 위기 때 : 100만 서민이 거두어 보낸 백미(白米)로 회생

- 1930년대 대 공황기 : 전국에서 보내온 성금으로 중흥의 기틀을 마련

- 단순한 사립(私立)이 아닌 민립(民立)의 성격

지금까지 우리 대학의 현실을 말한다면 경쟁 사회를 요령껏 해쳐 나갈 수 있는 ‘인재’, 전문 지식을 갖춘 사회적 기능인을 양성하는 역할에는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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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민족사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도덕성과 국량(局量)을 갖춘 ‘인물’, 다시 말하면 ‘큰사람’이 자라나올 터전이 되어 주지는 못하였다. 대학 본래의 위상에서 오히려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지금 국민이 이 땅의 대학에 바라는 것은 통일 시대를 이끌어 나갈 ‘큰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이라는 대답을 너무도 분명히 듣고 있다. 나는 국민의 여망으로 확인된 이 새로운 교육의 지표를 명확히 설정하고 한 걸음 한 걸음 흔들림 없이 실천해 나갈 것을 오늘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 인촌(仁村)과 향나무 울타리

고려대학교 총장실에는 스팀이 들어오지 않아 겨울이면 냄새 나는 석유 난로를 피워놓고 지낸다. 그래서 외국에서 손님이 와서

총장실에 들어서면 우선 코부터 킁킁거리면서 의아해 한다. 그러면 나는 “그렇게 이상해 할 것 없다. 당신은 지금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대한민국 국보급 문화재 속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까.” 하고 농담 삼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완전히 농담인 것만은 아니다.

총장이 있는 본관은 1933년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이 지은 교사로 당시로서는 국내 최고의 건축 작품이었고 지금은 고려대 대학도서관 건물과 함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총장실에 매달린 샹들리에도 1930년대에 달린 그대로이다.

겨울이면 냄새도 나고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런 속에서 인촌의 심모원려(深謀遠慮)한 경륜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인촌의 그러한 경륜은 운동장을 조성할 때도 그대로 발휘되었다. 운동장을 만드는 데도 겉으로 볼 때는 그냥 흙마당에 불과하지만 그 속으로 2미터를 숯, 모래, 자갈을 층층이 몇 번씩 반복해 깔아 영국에서 축구장을 만들 때 이상으로 세심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무리 많은 비가 오더라도 물이 전혀 고이지 않고 그대로 빠져 내린다.

이렇게 무엇 한 가지를 하여도 영원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 ‘영원’과 관련지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바로 그 운동장 스탠드 둘레를 빙 둘러싸고 있는 향나무 울타리에 얽힌 이야기다.

운동장 주변을 향나무로 돌리기 위해서는 마차 몇 대분의 묘목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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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달된 인부를 사서 심으면 하루 이틀 만에 간단히 끝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인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1930년대의 보성전문(고려대 전신)은 학생도 많지 않았고, 학과도 법과와 상과 뿐이었다. 인촌은 “오늘은 상과 A반 나오너라.” 하는 식으로 학생들을 불러내 향나무를 심게 하였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학생은 철이 없는 법인지. 학생들의 뒷산으로 줄행랑을 치거나 했지만 인촌은 중단하지 않고 그들을 차례대로 나무를 심게 했다. 결국 이틀이면 끝날 나무심기가 보름 이상 걸렸다.

그때 심은 나무 중 더러는 없어졌지만 아직도 여러 그루가 남아서 교정을 지키고 있다. 1970년 내가 고려대 교수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1월이라 교정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는 운동장 둘레의 향나무 울타리를 따라 걸어가다가 저만치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시골에서 올라왔는지 스프링코드를 입고 있는 중년의 신사였는데 고개를 들어 멀찍이 대학원도서관 꼭대기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주저 앉아서는 향나무 밑동을 어루만져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행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 발걸음이 그 앞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 옛날 향나무 울타리를 만들던 시절의 주인공 중 한 분일 것이다. 나는 그분에게 말을 건넸다.

“저, 혹시 이 학교 졸업생 아니십니까?”

“ 그렇습니다 만….”

“그렇다면 32회나 33회 중의 한 분이시겠군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그 왜 인촌 선생님께 붙들려서 향나무를 심으셨다면서요?”

“그런데 이 학교는 어쩐 일이십니까?”

“오늘이 입학시험 치는 날 아닙니까? 아들 놈 시험치게 해 놓고 기다리는 중이지요. (당시에는 학교별로 입학시험을 치루었음)

나는 다시 한 번 인촌의 심모원려에 고개가 숙여졌다. 당신의 뜻대로 그때 향나무와 함께 심어진 이 학교에 대한 애정이 대물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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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나의 집이 바로 이 학교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이 교정의 잔디밭이 내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어느 날 해질녘에 아버지 손을 잡고 이 교정으로 산책을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본관 앞 잔디밭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잡초를 뽑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훌륭한 분이시다. 인사드려라.”

그분이 바로 인촌 김성수 선생이었다. 당시 교장이었던 인촌 선생은 교수들이 모두 퇴근한 시간이면 늘 밀짚모자를 쓰고 학교의 구석구석을 보살피거나 학교 잔디밭의 잡초를 뽑곤 했다.

인촌의 말이다.

“ 닭이 천 마리면 봉이 한 마리라는데 이놈들 이렇게 가르치지만 이중에서 장차 나라 이끌고, 민족 이끌어 갈 놈이 몇 놈은 나와 주어야 할 텐데, 이거 왜 자라라는 잔디는 안 자라고 이렇게 잡초만 자라는지…….”

일제가 침략의 손길을 뻗쳐 오던 암울한 시기에 ‘교육구국’의 이념을 걸고 민족의 힘으로 설립한 민족의 대학. 일제하에서 재정 곤란으로 폐교의 위기를 맞았을 때는 백만인의 성미(誠米)로 재건했던 민족의 대학이 장차 통일된 조국, 번영하는 민족과 함께 영원히 가야 할 터인데……. 그러자면 오늘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2018.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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