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2. 09:29ㆍ독서후기
왼손과 오른손
- 좌우 상징, 억압과 금기의 문화사 -
■ 주강현 (朱剛玄) 민속학자
0 경희대에서 ‘두레연구’로 문학박사(1차)
0 고려대 문화재학과에서 고고학과 민속학 합동연구로 박사과정(2차)
0 한국민속학, 민속예술론, 북한문화론 등을 가르치고 있음
0 통일문화학회 공동대표
0 문광부 남북문교류위원
0 한국역사 민속학회 이사
0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0 해양문화 및 북한문화 전문가
0 EBS 기획특강
0 저서 : 북한의 민속학, 굿의 사회사, 마을로 간 미륵,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한국의 두레, 주강현의 우리문화 기행,
21세기의 우리문화 등 다수
■ 서문
불이(不二)를 위하여
왜 인류의 문화사가 늘 ‘절반의 문화사’ 밖에 되지 못했는가를 되묻고 싶었다. 좌와 우, 전쟁과 평화, 부와 빈곤, 음과 양 같은 대립이 상존하는 사회에서 왼손과 오른손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단심(丹心)으로 삼은 저자의 화두는 불이(不二)다. 어찌 왼손과 오른손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랴. ‘천지가 나와 한 뿌리이며(天地與我同根)’, ‘만물이 나와 한몸(萬物與我同體)’이라 한 민속 전통의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 애시당초 왼쪽과 오른쪽은 둘로 나뉠 수 없다. 그러나 대립적인 ‘왼손과 오른손’같은 모순은 하루도 우리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한다.
막상 왼손과 오른손의 대립모순이라고 하였지만 실상은 오른손의 절대적인 지배권력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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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과 오른손의 제 관계를 이원론적인 대립과 모순으로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 왼손과 오른손의 대립을 뛰어 넘어 상보적인 관계 즉 ‘따로 있되 늘 함께하는’ 공동선(共同善)의 방책으로 불이를 꿈꾸지 않을 수 없다.
유사무서(有史無書)의 민속 전통을 위하여
이 책의 방법론적 기저는 일차적으로 민속 전통에 관한 저자의 일관된 천착의 산물이다. 민속 전통이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민중이 연연히 이어온 지혜의 산물인 유사무서의 전통이 아닐까. ‘역사는 있으되 기록은 없다’는 것이야말로 민속 전통의 핵심이리라. 민속학이 학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외연적 확장을 해나가는 데 필요한 무기는 단순히 민속 지식의 실증적 나열이 아니라 민속전통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통한 ‘민중 생활사’의 재구성, 나아가 온전한 복원일 것이다.
저자가 특별하게 애정을 갖고 관심을 기울인 대목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주제들이다.
고고민속학, 역사민속학, 도상학, 그리고 지리학에서 공간과 장소, 아동교육학에서의 왼손잡이 문제, 미술사의 좌우대칭, 건축공학적 공간개념, 유전학과 진화론의 연관성, 복식사에서의 패션의 양상, 언어학상의 의미, 종교학에서의 성속 구분, 철학에서의 음양오행, 한의학에서 몸에 대한 남좌여우(男左女右)의 양상, 문화적 통제와 헤게모니, 정치학적 좌우 논쟁, 좌우 도형의 문화 상징 등에 얕게나마 두루 관심을 돌렸다. 물론 불이(不二)라는 관점에서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 따위의 구분법을 벗어나려고 하였으며, 더 나아가 ‘과학과 비과학’이라는 구분도 애써 무시하고 상보적인 관계로 재설정하고자 노력했다.
◉ 서장, 왼쪽을 위한 변명
■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미륵반가사유상의 손
그대는 왼손잡이인가, 아니면 오른손잡이인가, 그대와 그대 주위를 살펴보라. 나는 완벽한 오른손잡이다. 그래서 어릴 적에는 ‘내가 너무 오른손만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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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본디 왼손잡이였던 아내는 다소 사정이 복잡하다.
아내의 할머니는 왼손잡이였으며, 어머니도 왼손잡이다. 왼손잡이라고 해서 온갖 불편함을 겪은 어머니와의 ‘대투쟁’이 시작되었다. 아내는 어머니의 주도면밀한 ‘일상의 검열작업’을 거치면서 어느 덧 오른손잡이로 변신하였다. 그러나 나처럼 과도한 오른손 편향 없이 필요에 따라 왼손도 잘 쓰는 편이다. 같은 오른손잡이인데도 나와는 분명히 ‘격’이 다르다.
딸애는 처음부터 오른손잡이다. 문제는 아들에게 생겼다. 태어나면서 슬슬 왼손에 힘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집 역시 아이에게 오른손을 권하는 노력을 ‘습관적’으로 기울였다. 아들의 왼손 집중에 대한 나 자신의 관심은 분명히 ‘습관’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강력한 ‘검열’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들이 가급적 오른손잡이로 자라나길 원했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군대 시절에 왼손잡이 병사가 총을 쏠 때 매우 불편해하던 기억 같은 경험상의 선입견 때문이다.
물론 외할머니는 크게 걱정하였고, 부모들의 ‘감독부족’을 나무랐다. 분명한 ‘지도 검열’을 촉구한 것이다. 그러나 나와 아내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물론 아이는 완벽한 왼손잡이로 자랐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연구실인 정발학연(鼎鉢學硏)은 필자가 살고 있는 집으로, 분명히 대칭적이다.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의 의도가 그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건축주 자신도 좌우 균형의 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건물의 외관은 대개 대칭적으로 보이지만 연구실과 방으로 들어가 보면 ‘엉망진창’으로 비대칭적이다. 어지렵혀진 책, 흐트러진 그릇들, 찻잔과 소소한 문방구들, 크고 작은 화분과 전화기, 돌출한 그림과 스탠드에 이르기까지 자유분방할 뿐, 완벽한 대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 시시콜콜하게 집안 이야기로부터 소개한 이유는 단순하다. 대개 일반인들이 왼쪽에 대해서 품는 통속적인 느낌은 어떤 선입견이나 관례적인 습관, 방향 및 공간감각, 균등한 대칭과 비균등한 비대칭에 대한 느낌 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정발학연 건물에서 연상되듯이 끊임없이 어떤 대칭과 균형을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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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 1호인 아스카 시대의 고류사 미륵반가사유상을 보자, 나무를 세밀하게 깎은 약지를 구부려서 동그랗게 환을 그리고 나머지 손가락들은 가볍게 세웠다. 손가락 에 혼신의 힘이 쏠린듯하다.
고대인들은 56억 7천만 년 만에 다가올 미륵보살의 손가락을 섬세한 여인의 그것으로 새겼다. 그렇다면 ‘사색하는 미륵불’인 반가사유상은 어떤 손으로 허공을 가리키고 있을까.
파리의 ‘지옥의 문’ 상단에는 독립작품이라 할 수 있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스의 비너스 상과 더불어 수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 그 ‘생각하는 사람’은 또한 어떤 손으로 턱을 괴고 있을까. 그리고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은 어떤 손으로 횃불을 들고 있을까.
우리나라의 수많은 조각품들, 위인들, 독립투사들…. 그들의 동상들은 대개 어느 손을 들고 있을까. 물론 정답은 ‘오른손’이다.
서구를 대표하는 로댕의 조각품,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고대 장인의 조각품, 양자는 공히 손의 방향을 공유한다. 그밖의 무수한 조각품들도 오른손에 힘을 준다. 조각가의 장난기 어린 우연의 결과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어떤 인류사의 비밀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로댕은 오른손잡이였음이 분명하고, 반가사유상을 제작한 고대인은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그 역시 오른손잡이가 아니었을까? 만약에 로댕이 왼손잡이였다면, 혹시나 왼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을 빚지 않았을까?
질서 정연한 좌우가르기의 암묵적 카르텔에는 어떤 비밀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 비밀의 문은 쉽게 열릴 것인가. 쉽게 열 수야 있겠지만, 막상 문을 열고 보면 온갖 혼돈으로 그득한 방일수도 있어 오히려 문을 아니 여는 것만도 못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수사학적으로 ‘왼쪽의 문화사’란 말을 허락한다면 ‘오른쪽의 문화사’도 가능하고, 더 나아가 인류의 문화사는 ’오른쪽의 문화사‘가 문화적 우성이며, ’왼쪽의 문화사‘는 문화적 열성이란 점이다.
성장기 왼손잡이를 기피하는 사회적 통념, 그 이후로도 불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왼손잡이 기피증’이 더러 있을지라도 살아가는데 큰 지장은 없다.
왜 사람들은 왼손잡이라는 말은 써도 오른손잡이라는 말은 쓰지 않을까.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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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손은 너무도 정당하기 때문이다. ‘정상적’ 성 관계나 결혼제도를 택하는 사람에게 이성 결혼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지만 동성애자에 대해서만 반드시 ‘비정상적’이란 상표를 붙이는 것과 같다. 동성애자 인권이 강화되는 추세임에도 다수 사람들은 ‘비정상’이란 느낌, 혹은 직설적인 비난도 꺼리지 않는 다. 왼손잡이는 동성애냐 이성애냐는 논란에 비하면 훨씬 단순한 문제다 더욱이 21세기는 오른손을 쓰건 왼손을 쓰건 신경을 쓰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왼손잡이는 사회통념상 여전히 ‘별종’으로 간주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 왼손잡이 여인의 절대 고독에 관하여
왼손잡이는 단순하게 육체상의 불균형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왼손잡이 지향점을 애초부터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아기는 자신이 왼손잡이이기 때문에 어떤 불이익을 당할 것인지 예견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대개의 어른들은 경험으로 사태를 예견한다. 경험으로 예견된 사태들은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하나의 사회적 통념을 형성한다. 사회적으로 왼쪽이란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강하게 준다.
아직도 여전한 오른손잡이 절대 권력의 시대에 왼손은 역시 ‘고독’을 상징할 수밖에 없다. ‘고독’이란 경험상의 관념은 역사 속에서 자리매김해온 왼손잡이를 지칭하는 가장 훌륭한 단어일 것이다.
독일 문단의 귀재 페터 한트케(Peter Handke)의 소설에 <왼손잡이 여인>이 있다.
한트케에게 왼손잡이는 ‘절대 고독’을 의미하는 상징어일 뿐이다. 평범한 도자기 수출업자인 브루노와 그의 부인의 사적인 이야기 속에서 왼손잡이 여인이 상징하는 고독이 펼쳐진다. 왼손잡이 여인은 타인들과 어울려 지하철을 타고 쇼핑을 하고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설거지를 하지만 늘 홀로 존재한다. 여인은 거실에 혼자 앉아 언제나 똑같은 음반. ‘왼손잡이 여인’을 듣는다.
왼쪽으로 돌려진 찻잔, 사과, 커튼 등은 어쩌면 현대 여성들이 마음밑바닥에 지니고 있을 이중성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중성을 숨기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일상생활을 계속해나가는 통념상의 여인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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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라 그 이중성을 솔직히 시인하고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속이지 않고 드러내는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스스로 드러냄’으로써 왼손잡이의 ‘커밍아웃’이 이루어진다. 절대 고독을 드러냄으로써 왼손잡이의 정체성을 획득해 나간다.
■ 왼손, 왼손잡이, 마이너리티 문화상징
- 마이너리티 : 불평등 대우를 받는 소수자 -
왼손잡이 우세손과 오른손잡이 우세손이 차지하는 비율의 절대적 격차는 서로 메울 수 없는 문화적 간극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양자는 평화롭게 별개의 존재로 동떨어져 있질 못하고 종종 대칭을 이루거나 대립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동쪽과 서쪽, 문인과 무인, 낮과 밤, 심지어 좌파와 우파 같은 대응관계까지 지니면서 인류의 문화사를 형성한다. 인류의 문화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비합리적이며, 그렇게 정당하지도 않다. 온갖 교언으로 인류의 문화사를 포장할 수는 있으나 인류 문화사는 생각 이상으로 편향적이다. 어쩔 수 없는 결과라는 변명이 붙기는 하지만, 늘 전쟁과 폭력이 일반화되어 있으며 가부장적 폭력으로부터 마이너리티에 대한 폭력까지 일상화되고 있다.
인류 문화사가 얼마나 마이너리티에 대하여 적대적이며 의도적으로 희생양을 만들어 왔던가! 왼손잡이에 도사린 문화의 비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몇 가지 전혀 다른 예증을 들어보기로 한다.
사례 1.
젠더(gender)입장에서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간성(間性)은 정말 비정상일까.
인도에는 중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나 생리적으로는 남성이지만 여성적인 성 정체성을 지닌 히즈라가 있다. 특이한 것은 인도인들이 그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의 매개자로서의 히즈라를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 삼는다. 간성(間性)인 인간을 바라보는 문제, 즉 자연적인 젠더 전환, 젠더 역전의 문제는 마이너리티를 인식하는 좋은 기준치이다.
인간성(人間性)이라는 그럴듯한 표현과 다르게 성적 모호성을 지니는 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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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間性)에 대해서는 심각할 정도의 노여움을 표현하는 게 일반적인 문화관이다.
간성(間性)의 아기가 태어나면 아이의 성적 모호성이 큰 문제가 디며 그 성적 모호성을 자연 질서의 일부로 간주하기보다는 변칙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모호성을 제거하는 수술을 거치면서 그 아이는 소년 또는 소녀로 확고하게 분리될 것을 요구받는다. 이 같은 문화관은 매우 보편적이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일까.
인디언 문화에서는 전혀 양상이 다르다. 어떤 사람이 ‘여자-남자’이거나 ‘남자-여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징후는 그 사람이 동성과의 성관계에 관심을 가지는가에 있지 않다. ‘다른’ 성별의 역할에 속하는 활동에 뚜렷한 관심을 가지는가가 기준이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이 징후를 재빨리 알아채고 그 사람의 젠더를 재분류한다. 하지만 여기서 재분류는 단순히 남자에서 여자 혹은 그 반대로의 젠더 역전이 아니다. 다양한 젠더의 양상이 병존한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문화뿐 아니라, 인도와 폴리네시아, 시베리아, 아프리카, 아시아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양상이다.
사례2
마약은 정말 ‘악마의 선물’일까.
왼손에 대한 막연한 통제의식은 마약에 대한 막연한 통제와 닮은꼴이다. 마약은 나쁘다. 그러나 술도 나쁘다. 아랍은 물론이고 tm웨덴 같은 일부 국가에서도 술은 엄격히 통제된다. 한국 사회는? 사람들은 마약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지만 술에 대해서는 무제한 적이며, 술꾼들은 폭탄주를 만들어 먹는 ‘가미가제 특공대’로 성장하고 있다.
아무리 금연을 홍보해도 여전히 ‘공격적 마약’인 담배는 버젓이 팔린다. 담배는 원래 북미 인디언에게는 신과 만나는 하나의 절차로 널리 사용된 ‘구름 궁전’이었다.
현대 사회는 과도한 의료 통제 사회이기 때문에 통제를 벗어난 일체의 행위는 마약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마약이 통제되는 순간에도 공식 의료기관에서의 공식적 마약 제재 주사 투입량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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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에 대한 사회 문화적 통제, 감옥에서의 국가적인 통제는 왼손잡이에 대한 통제 방식과 많이 일치한다. 조선시대의 경우, 유학에서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좌도를 나쁜 것으로 간주하였다. 최근까지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 좌익은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 집요한 국가적 통제가 일관 되게 이어져 온다. 국가적인 통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왼쪽은 나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민간 사고에서도 많이 퍼져 있다.
좌우지간(左右之間)은 글자 그대로 왼쪽과 오른쪽 사이의 간성(間性)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뜻하는 인간성만큼이나 좌와 우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회체제의 작동 방식은 결국 어느 한쪽을 선택하게 만든다. 그 결과 소수의 왼손잡이를 선택한 사람에게는 ‘희생양’ 딱지가 붙게 마련이다.
■ 애매모호한 민속 전통의 중층적 서술
민중의 삶은 때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때로는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왼쪽과 오른쪽에 대해서는 가치중립적 선택과 극단적 선택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왼쪽과 오른쪽에 관한 사람들의 입장도 매우 복합적이다. 단선적으로 왼손잡이에 대한 반감을 품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필요할 정도로 좌우 균형의 논리를 주장하기도 한다.
좌우 선택은 고정불변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그 삶을 저해하는 온갖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고, 정신적인 그물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좌우에 대한 고정관념은 일종의 ‘죽음의 그물’ 같은 것이다. 좋은 사례가 하나 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이 제시한바 있는 향벽설위(向壁設位)에서 향아설위(向我設位)로의 대전환이 그것이다.
갑오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인 1897년에 수운 최제우 선생이 이천군 맹산동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제까지의 향벽설위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향벽설위란 벽쪽에 위패를 놓고 그 위패 앞에다 밥을 떠 놓는, 즉 벽에다가 밥을 떠 놓고 그 앞에 절을 하고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다. 인간 활동의 일체를 상징하는 밥을 벽, 즉 귀신이 있는 방향, 위패가 선 방향 귀신이 활동하는 방향인 벽을 향하여 갖다 놓는 양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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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향아설위는 밥을 살아 있는 한울님인 사람, 살아 있는 생명주체, 노동주체인 인간 즉, 민중 앞으로 되돌려 놓는 전 인류사적, 전 생명사적인 큰 전환점이었다. 김지하 시인은 이를 ‘제사방식의 혁명’으로 풀이한 바 있다.
향벽설위와 향아설위의 예처럼 보는 위치를 바꾸면 왼쪽과 오른쪽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태읽기는 매우 단순하다. 북반구적 사고로 바라본 방향과 남반구적 사고로 바라본 방향의 차이는 북반구의 겨울나기 동안에 남반구는 여름 나기를 한다는 사실만큼이나 분명하다. 좌우 선택은 고정 불변의 귀결점이 아니다.
왼손잡이가 문화사적 소수인지라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면, 솔직히 말하여 오른손잡이가 문화적 다수인 것 자체가 오히려 더 큰 문제일수도 있다. 왜 오른손잡이만이 반드시 문화적 다수여야만 할까. 왼손잡이와 오른손 잡이가 동등하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왜 왼손잡이만 문제가 될까. 불필요하게 다수를 차지하는 오른손잡이부터 문제삼는 방식은 채택할 수 없을까.
김광규 시인의 ‘왼손잡이’를 천천히 읽어보자.
남들은 모두 오른손으로 / 숟가락을 잡고 / 글씨 쓰고 / 방아쇠 당기고 /
악수하는데 / 왜 너만 왼손잡이냐고 / 윽박지르지 마라 당신도 /
왼손에 전화 수화기를 들고 / 왼손을 턱에 고인 채 /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느냐 / 험한 길을 달려가는 버스 속에서 /
한 손으로 짐을 들고 / 또 한 손으로 손잡이를 붙들어야 하듯 /
당신에게도 왼손이 필요하고 / 나에게도 왼손이 필요하다
거울을 들여다 보아라 / 당신은 지금 왼손으로 / 면도를 하고 /
나는 지금 오른손으로 / 빗질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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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육체의 비밀
■ 이 엄청난 모순에 대하여
- 대칭과 비대칭을 오락가락하는 야누스 인간 -
대게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몸이 매우 대칭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착각한다. 여기서부터 모순은 비롯된다.
모순 1
자연은 필요한 때 어느 한 쪽을 선택한다. 그럼으로써 대칭적인 균형은 쉽게 깨질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선택은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연의 필요로 그렇게 할 뿐이다.
모순 2
인간은 자연이 비대칭 이면서도 대칭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대칭적인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필요시 비대칭으로 쉽사리 넘어갈 수도 있다는 엄연한 진리를 몰각한다. 자연의 선택을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모순덩어리 인간들은 할 수 없이 ‘신의 의지, 신의 뜻’이라고 정리하고 만다.
모순 3
인간 자신은 문화사적으로 대칭을 추구한다. 무언가 균형을 찾는다. 건물이 균형을 바로잡아 굳건히 서 있기를 희망하며, 육신이 균형을 이루어 건강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정작 인류 문화사는 엄청날 정도로 비대칭이다.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극단을 선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면서도 다시금 대칭을 희망한다. 모순덩어리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얼굴도 좌우 대칭이다. 고양이도 그렇고, 코끼리도 그렇고, 민물장어도 그러하다. 그러나 과연 사람의 얼굴은 진실로 좌우대칭일까. 결코 아니다. 비대칭이 오히려 진리이며, 대칭은 오히려 특수한 것일 수 있다. 대칭과 비대칭의 문제는 매우 섬세한 판단과 노력으로 접근해서 이해해야지 겉모습만 보고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마틴 가드너의 연구는 자연이 대칭이기는커녕 비대칭임을 적실하게 보여준다. 그가 제시한 논지의 몇 가지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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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평면도형들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대칭축을 가진다. 우리의 상식은 그러하다. 그러나 의외로 비대칭 평면도형이 많다. 입체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 비대칭 입체의 모양새는 꼭 같은 것이면서 ‘방향만 반대’인 거울상을 가진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똑같이 생겼으므로 대칭인 것으로 착각하나 실제로는 모양새는 같되, 방향은 반대인 거울상일 뿐이다.
자연은 대칭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결국 인간들의 강박관념, 아니면 착시 현상일 뿐이다. 비대칭인 DNA 나선 구조, 소립자 물리학의 패리티 - 좌우대칭 - 붕괴 등은 자연이 더 이상 대칭일 수 없다는 반증이다. 자연이 그렇듯이 비대칭이라며, 어느 일방을 편든다는 말인가.
자연 세계가 어느 한 쪽을 편들지 않는다는 주장은 정당하지만, 실제 인간의 세계에서는 복잡한 야누스적 양상이 연출된다. 인간세계와 자연은 많이 다르다. 문화를 창조하고 경험적으로 축적시켜 이를 제도화하려는 인간의 운명같은 속성은 늘 무언가를 자신들의 필요한 잣대로 규정짓고 필요한 목적에 따라 야누스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모순덩어리 인간들은 우왕좌왕하면서 야누스적인 삶을 살아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인간 사회는 분명히 ‘어느 한쪽’을 편든다. 온갖 계급 갈등과 신분의 차별, 남녀의 불균형, 국가와 민족 간의 차별, 인종간의 차별, 상호 다른 문화 간의 상이점 등이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인간 사회는 분명히 양쪽이 균등하게 그러면서도 인간 사회는 분명히 양쪽이 균등하게 평형을 잡아서 대칭을 이루기를 희망한다. 좌우의 대칭, 전후의 대칭, 상하의 대칭 따위가 그것이다.
거듭 자연은 비대칭이며 인간의 육체도 원칙적으로 비대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의지는 끊임없이 대칭을 추구한다. 부처를 비롯한 성인들의 말씀은 대개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을 주장하고 ‘일체 만물이 하나’라는 뜻을 펼쳐왔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 문화적 경험은 성인들의 말씀과는 무관하게 좌우를 가르는 삶을 관철해 왔다. 즉 대칭과 비대칭, 갈래 나눔과 통합하기 같은 경험들이 인류 문화에 축적되어 있다.
■ 역시 문제는 몸이다 - 좌간우폐의 비대칭에 담긴 육체의 우주관
왜 인간은 이 같은 모순을 스스로 범하고 있는 것일까. ‘우왕좌왕(右往左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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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지극한 혼란에 처해 있음을 고백하는 말이다. 우왕좌왕은 나쁘게만 받아들일 것도 없다. 우왕좌왕은 인간의 본성이다. 좌우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이 인간 본연의 모습일수도 있다.
역시 문제의 발원지는 몸이다. 몸이 문제인지라 근본적으로 몸의 문제부터 하나하나 점검해 나가야 한다. 인간의 몸뚱이 자체가 모순덩어리이기 때문이며, 인간의 몸뚱이 자체가 우왕좌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외형은 대칭처럼 보이지만 몸 자체는 비대칭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인간의 몸은 외관상으로는 분명히 좌우대칭으로 여겨지지만. 내부적으로는 다르다. 같은 장기 중에서도 폐와 신장이 좌우로 달려 있다고 하여 대칭이라고 볼 수 없다. 학자에 따라서는 오른쪽 폐와 왼쪽 폐를 대칭이 아닌, 서로 다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좌우 해부학적구조와 기능의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도 존재하지만 달리 보는 사람이 더 많다.
인간의 몸이 비대칭임을 가장 잘 예시하는 중병의 하나로 중풍(中風)을 꼽는다. 중풍이란 발병이 급작스럽고 반신불수(半身不隨), 구안와사, 혹은 언어불리(言語不利), 신지변화(身志變化)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급성 발작의 질병이다. 선인들은 중풍의 발병이 급작스럽고 변화가 신속하며 다양한 증상으로 나타나서 마치 자연계의 바람에 비유하여 중풍이라 이름 붙였다. 왜 하필이면 인간 육체에서 좌우가 나뉘어져 한 쪽만 못 쓰는 반신불수가 많이 나타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 애매모호한 진화, 애매모호한 인간의 몸
오른손과 왼손은 분명히 대칭이아니라 좌우상에 불과하지만, 어느 누구도 왼손과 오른손이 비대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오랜 관념이 만들어낸 문화적 통념인 것이다. ‘통념’은 엄밀히 따지면 ‘비과학적’이다. 그러나 경험의 소산인 통념이야말로 인류문화사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연현상’과 ‘인간의 생각’사이에 많은 간극과 오해가 생긴다.
현실적으로 대단히 차별적인 삶을 구가하면서도 늘 대칭을 꿈꾸는 것이 인류 문화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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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외모가 대칭으로 된 것은 동물 진화에 유리했기 때문에 좌우대칭의 결과가 나타났다고 굳게 믿는다.
대칭은 균형을 의미하며 안정감을 뜻한다. 균형을 잘 맞춘 상태에서는 도망치기도 쉽고 방어에도 유리하다. 실제로 양손이 대칭을 이룬 사람일수록 생식력이 높고 건강하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언청이’를 바보라 흉보는 것은 장애우를 얕보는 그릇된 사고에서 비롯되었음이 분명하지만, 그 내막에는 비대칭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동물적 본능이 은밀하게 숨어 있다.
그렇듯이 대칭을 선호하고 비대칭을 거부함이 동물의 일반 속성이라면 왜 사람들의 내장이 좌우가 다를까?
인간의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가운데 완전을 희구하는 것이 인간의 몸이다. 애매모호한 진화의 결과, 애매모호한 인간의 몸이 만들어진 것이다.
왜 인간에게는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가 별도로 태어나는 것일까? 외형은 분명히 의사비대칭을 취하고 있되, 기능은 의사 비대칭 차원을 벗어나서 완벽한 비대칭을 취한다. 모습만 유사했지 기능은 절대적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정직하게 말한다면, 인류 문화사에서 왼쪽과 오른쪽이 분화되는 과정을 ‘완벽하게’ 밝힌 연구는 아직 없다.
학자들이 합의할 수 있는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왼손과 오른손의 비밀 역시 인류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애매모호한 결론에 대개 합의하고 있다. 직립보행이 인류만의 전유물이듯이, 배란기와 무관하게 아무 때나 섹스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인류의 전유물이듯이 왼손과 오른손의 각기 다른 비밀도 인류만의 ‘독특한 진화의 산물’인 셈이다.
■ 직립보행을 하게 된 석기장이의 손
인류 조상과 침팬지가 갈라선 것은 지금부터 500만 년 전의 일이다. 500만년이란 시간은 지구상에 생명체가 존재한 38억 년의 0.2%에 불과하다. 침팬지와 인류의 유전자가 99.8%가 동일하고 겨우 1.5 퍼센트 정도만이 다르다는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인간의 DNA와 침팬지의 DNA배열을 비교할 때, 그만큼 염기쌍을 공유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작은 차이가 인류와 침팬지를 갈라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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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와 별다를 게 없던 인류 조상이 네 발로 기어다닐 때는 분명히 왼손과 오른손의 구분은커녕 발과 손, 팔다리의 역할 구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엥겔스는 도구와 의식의 관계를 이렇게 말하였다. 수천 년 간의 투쟁 끝에 손과 발의 분화, 그리고 직립보행이 마침내 확립되었을 때, 인간은 원숭이와 뚜렷이 구별되었고, 인간과 원숭이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격을 낳게 한 두뇌의 엄청난 발전과 분절언어의 발전에 기초가 놓여졌다. 손의 전문화, 이것은 ‘도구’를 의미하고 도구는 특수한 인간 활동, 자연을 변형시키는 인간의 작용, 즉 생산을 의미하였다. 손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 두뇌의 발달도 필연적이었다.
인간은 순전히 동물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노동하며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의 정상적 상태란 자신의 의식에 부응하는 상태이며, 스스로에 의해 창조되어야 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인류의 조상이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오른손잡이가 되었는지에 대한 기원 문제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연구는 제출된 바 없다. 이런 저런 가설이 난무할 뿐이다.
전쟁을 할 때, 오른손에 무기를 쥐면 무기와 상대의 심장이 최단거리에 놓여지기 때문에 오른손을 쓰기 시작했다는 가설이 있다. 그 결과 왼손으로 방패를 쥐고 오른손으로 무기를 잡게 되면서 오른쪽을 더 좋아하는 돌연변이가 생존 경쟁에서 유리하게 되자 차츰 오른손 편향이 생겼다는 설정이다. 여자 사냥꾼이 왼쪽에 아이를 안고 오른손으로 사냥을 함으로써 다른 여자보다도 더 많은 짐승을 사냥할 수 있었고, 아기들도 그만큼 더 많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는 가설도 있다.
분명한 것은 워낙 많은 가설이 난무하고 있기는 하지만 인류의 대부분이 오른손잡이가 된 내력이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는 점, 그점 하나만이 분명하다.
■ 단순한 유전의 결과물일까
인간이 걷게 되면서부터 전후 좌우는 물론이고 상하라는 관념도 분명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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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즉 인간은 비로소 방향성을 문화사적으로 감지하기 시작하였다. 직립보행의 결과물에서 인간이 똑바로 걷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부여한 전후 좌우의 방향 개념은 인간 행동 발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좌우란 개념은 인간의 육체를 둘러싼 방향성이다. 신체의 앞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좌측과 우측이 설정된다. 신체의 뒤쪽을 기준으로 좌측과 우측을 설정하지는 않는다. 걷는다는 것은 왼팔과 오른팔을 휘젓는 효과를 요구하며, 좌우의 움직임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직립보행은 인간 육체의 방향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뇌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왼쪽 뇌가 오른손의 역할을 관장하며, 반대로 오른쪽 뇌가 왼손의 역할을 관장 한다고 주장한다. 뇌는 인간의 모든 지적, 감성적 판단을 결정하는 수뇌부다. 왼쪽 뇌와 오른쪽 뇌의 능력은 차이가 난다. 사람의 90%는 좌뇌가 우수하며, 이 좌뇌는 오른손잡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뇌의 어느 쪽이 어느 손과 연관되는가 하는 문제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라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좌뇌는 언어적, 수리적, 분석적, 논리적이다. 반면에 우뇌는 비언어적, 시공간적, 직관적, 감성적이다. 좌뇌 우세자는 수학, 과학 등 주지 과목에 강하고, IQ가 높으며, 우뇌 우세자는 예체능 과목에 뛰어나고 EQ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론은 이렇다. 오른쪽 뇌는 왼손, 왼쪽 뇌는 오른손을 관장한다는 결정론은 지극히 위험할 수 있으며, 뇌 상호간의 전일적인 네트워크, 즉 모든 뇌에서 판단을 내린다고 보는 게 좀 더 설득력이 있다. 현대 의학계에서도 왼쪽 뇌와 오른쪽 뇌의 기능이 다름은 인정하고 있지만, 엄밀한 기능 분화는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왼손잡이를 둘러싼 또 다른 오해 중의 하나는 유전의 문제이다. 많은 이들은 왼손잡이가 유전된다고 생각한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이런 견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드팀전 장돌뱅이인 허생원은 왼손잡이다. 온통 메밀꽃으로 뒤덮혀서 숨이 막힐 지경인 산허리를 동이와 허생원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지나간다. 소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절묘하게 끝을 맺는다.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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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이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정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 졌다.“
동이가 왼손잡이라는 단순한 근거로 친자(親子)임을 확인하는 대목이다. 이효석의 편견일까. 그렇지는 않다. 적어도 일반인이 믿는 속신의 하나를 반영할 뿐이다.
왼손잡이의 체력과 건강을 측정하는 우리나라의 통계치도 있다.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의 남녀 체력장 성적을 비교하여 오른손 또는 왼손 편향이 체력장 성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조사한 논문이 그것이다.
서울 시내의 남녀 고교생 1, 2학년 400명을 표본 추출하여 100m 달리기, 턱걸이, 멀리뛰기, 윗몸일으키기, 던지기 5대 종목을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총체적으로 볼 때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다만 턱걸이, 멀리뛰기, 던지기에서 오른손잡이가 조금 높은 점수가 나왔고, 윗몸일으키기에서만 왼손잡이가 높게 나타났다. 왼손잡이와 운동이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메밀꽃 필 무렵>처럼 소설의 매듭을 풀어내는 절묘한 순간을 유전인자의 문제로만 간주함으로써 인류 문화사는 오른손 지배문화로 귀착되었다는 주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분명히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에 비하여 9대 1 정도로 절대적 우세 비율로 태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비율의 내막 속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인류역사의 사회 역사적인 조건과 신체의 적응과정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오른손을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왼손을 박해하던 그 사회역사적 과정을 겪으면서 서서히 오른손이 절대적 지배 권력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 아닐까.
■ 오른손의 우월성 - 에르츠에게 바치는 헌사
영국 왕실의 경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비롯해서, 그의 어머니와 아들인 찰스 황태자, 윌리엄 왕자가 모두 왼손잡이이다. 집안에 왼손잡이가 있을 경우, 왼손잡이가 태어날 확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론부터 묻는다면 왼손잡이는 유전자 때문일까 사회적 인자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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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부모 모두가 오른손잡이 일 경우, 자녀들은 92%가 오른손잡이가 되고 부모 중 한 사람이 왼손잡이일 경우에는 자녀들의 20%가 왼손잡이가 된다. 그러나 양친이 모두 왼손잡이일 경우, 자녀의 반수가 왼손잡이로 태어난다. 또 남자의 경우 여자보다 왼손잡이가 더 많다. 왼손잡이 엄마와 오른손잡이 아버지를 가진 자녀들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그 반대의 경우보다 왼손잡이 자녀를 가질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그만큼 여성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왼손잡이가 대략 25% 정도로 태어나지만, 사회적 박해 속에서 차츰 오른손잡이로 전향하면서 절대적 소수로 전락한다고 주장 한다. 나는 유전적 요인과 후천적 요인의 결합을 강조하는 이들 주장에 동의한다. 20세기 후반 이래, 특히 1990년대 이래의 변화된 조건을 되새겨 보자.
한국 사회의 경우에도 왼손잡이는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적어도 1990년대 이래로 많은 변화가 뒤따르고 있다. 여전히 왼손잡이를 박해하는 경향이 존재하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이 왼손잡이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거나 ‘무시’하거나, 때로는 ‘옹호’하기도 한다. 태생적으로 왼손잡이로 태어난 이들의 대부분이 왼손잡이로 살아 간다. ‘오른손잡이로의 전향’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적어도 100년 이내에 전 인류사 어느 시기에도 없었을 정도의 많은 수의 왼손잡이가 번성을 구가할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의 에르츠는 유명한 파리고등사범을 나와서 철학 교수 자격을 획득한 뒤 영국으로 건너가 대영박물관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 후 군에 입대하여 군부대 주둔 지역 사람들로부터 민담이나 우화를 수집하여 아내 엘리스에게 보냈다. 1915년 4월 3일, 애석하게도 마르세빌에서 전사한다.
그는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 로드니 니덤에 의해 훗날 사회인류학 분야에서 재평가를 받게 된다.
에르츠는 오른손을 존중하는 사상은 오른손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른손이 사회적으로 존중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른손의 우월성은 제재를 동반한 강제에 의해서 확보되며, 왼손은 금기시되고 마비 당한다’라고 서술했다. 유전인자의 중요성만큼이나 사회적 인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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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21세기에 이르러 지난 세기 중반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숫자로 왼손잡이가 늘어나고 있다.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왼손잡이에 대한 편견이 줄어들고 있는 것과 왼손잡이의 수적 증가가 비례한다. 만약 유전인자 덕분이라면, 어떻게 짧은 시기에 왼손잡이가 그토록 늘어날 수 있을까. ‘유동’하는 아이들에 대한 박해와 오른손 중심의 사회적 장치는 문화사적으로 중요하다. 지금까지 다룬 논의를 대개 몇 가지로 중간 정리를 해본다.
1. 인간의 신체 내부는 비대칭이다.
2. 인간의 신체 외부는 대칭이면서도 비대칭, 즉 유사대칭이다.
3. 인간의 신체는 직립보행을 하면서 전후좌우란 방향성을 얻는다.
4. 인간의 신체에서 오른쪽 우세손은 유전적인 우성이다.
5. 인간의 신체는 신체 내부의 뇌의 판단과 연계된다.
6. 인간의 신체는 오른손이 우세손이지만 왼손을 기피하는 사회적 요인의 지 배를 받는다.
7. 인간의 신체에서 왼손 기피는 왼손 자체만이 아니라 왼쪽 전반에 걸친 문 제다.
■ 오른손 강화훈련, 엄마들의 노련한 음모
논술고사에서 왼손잡이 학생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논술 고사는 어차피 사람이 채점을 한다. 글씨가 고르지 못하면 나쁜 점수를 받을 확률이 높다. 다들 잘 알고 있겠지만 대학의 이동식 1인용 책상은 모두 오른쪽에 필기를 위한 나무판이 달려 있다. 따라서 왼손잡이로서는 오른쪽에 달려 있는 나무판에 시험지를 올려놓고 팔꿈치를 치켜든 채 45도 정도를 구부리면서 필기해야 한다. 한 마디로 고역일뿐더러 글씨체가 바르게 나올 리가 없다.
컴퓨터 통신 나우누리에 실린 ‘오리지널 왼손잡이’ 라는 제목의 글을 보자.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말이지, 담임 선생님이 아주 깐깐힌 여자였는데, 왼손잡이는 병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날 항상 구박했다. 내 옆에 앉아 있는 애를 시켜 날 감시하게 만들고 내가 왼손으로 쓰면 당장 일러바치도록 했다. 그러니 수업시간에 공부가 되랴. 필기는커녕 한 자 한 자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 결국은 우리 집까지 와서 들들 볶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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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례는 다소 극단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왼손을 통제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이 정신적인 방황을 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사회 통념적으로 왼손잡이의 불편한 접은 매우 많다. 왼손잡이는 악수가 힘들다.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기가 힘들다. 왼손으로 밥을 먹다가 오른손잡이와 부딪쳐서 낭패를 본다. 등 셀 수 없이 많은 사례가 있다.
엄마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오른손잡이 훈련을 시키는 것은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수모를 당할 수 있다는 원초적 경계심에서 시작한다. 왼손이건 오른손이건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자연스럽게 놔두는 엄마들도 타인으로부터 ‘왼손잡이네!’라는 목소리를 듣고 나면 마음이 몹시 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의 엄마들은 초연한 마음으로 출발하였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어떤 ‘오른손잡이 확신범’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이는 반드시 오른쪽이었으면 좋겠다는 확신에 들뜨기 시작한다. 그 확신은 사실 ‘우상의 황혼’ 같은 것이다. 엄마의 행동은 매우 역사적인 측면이 강하고 ‘왼손을 잘 쓰면 예술가가 된다’는 식의 화두는 이 대목에서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엄마의 뇌리 속에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아편주사와도 같이 강력하게 주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왼손 바닥에 잔주름이 많으면 고생한다.
왼손으로 밥 먹으면 도둑놈 된다.
왼손잡이 며느리는 안 좋다.
왼쪽 귀가 가려우면 꾸중을 듣는다.
왼쪽 귀가 간지러우면 남이 욕을 한다.
엄마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지라도, 대개의 엄마들은 아이의 미래를 충분히 보장받게 하기 위하여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한다. 엄마는 육체의 반란을 꾀할 음모를 꾸민다. 아기는 엄마에 의해 길들여진다. 애초부터 오른손을 쓰는 아기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왼손을 쓸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면 엄마의 고민은 시작된다.
사려 깊은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쌓아온 왼손에 대한 잘못된 보고서들이 터무니없음을 고백하지만, 그러한 소수 견해가 엄마들이 귀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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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엄마는 아기와의 대투쟁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아기는 오른쪽을 쓰도록 철저하게 통제된다. 육체의 통제를 거치면서 아기는 설령 태생적으로 왼손잡이였더라도 오른손잡이로 바뀌게 된다. 100%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수가 그러하다. 일부의 엄마들은 또 다른 정치적 의도를 꿈꾼다. 왼손잡이를 그대로 둠으로써 얻어질 불편과 이득의 관계를 저울질하기 시작한다. 엄마의 계산법은 매우 치사할 정도로 면밀하게 이루어진다. 왼손잡이는 천재일 수 있다는 세간의 낭설에도 귀를 기울인다.
또 다른 엄마들은 양손잡이가 되길 희망한다. 균형론, 일거양득론, 혹은 양비론이라고 할까. 참으로 바람직한 희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양손잡이는 매우 드물다. 결국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왼손’과 ‘오른손’의 ‘운명’이라고 할까.
물론 자신의 아기가 왼손이건 오른손이건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21세기형’ 엄마들도 다수 출현하고 있다. 그러나 엄마들은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가능하다면 오른손잡이가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저버리지 않는다.
수많은 교육 및 심리학 보고서들은 왼손잡이의 양태에 대하여 많은 노력을 허비하고 있다. 왼손잡이의 언어 해득력, 교육 실태, 미술 교육 등 다양한 연구 논문들이 전 세계적으로 쏟아져 나온다. 특히 학생들의 학습 성취도와 연계된 연구, 왼손잡이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논문이 속속 간행되고 있다. 이같이 산출되는 보고서는 여전히 왼손잡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오죽하면 한국에도 왼손잡이 협회가 존재하겠는가.
‘왼손잡이 협회의 ’강령‘을 살펴보자.
1. 왼손잡이들이 가진 능력과 잠재적인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하도록 돕는 사 회적인 여건과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2. 왼손잡이들이 왼손을 아무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사용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신체적 도움과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3. 왼손잡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향상시키며 왼손잡이의 개인차가 존중되는 사회를 이룩하여 왼손잡이의 권익 신장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다.
4. 왼손잡이에 대한 편견적 시각을 바로잡아 왼손잡이에 대한 바른 이해와 긍정적 태도 및 수용적 태도를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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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른손 지배 권력의 문화적 헤게모니 - 좌우 구분의 비밀
■ 오른쪽 지배 권력 - 무한 통제의 장기 지속
동서를 막론하고 대개 오른손을 선호한다.
서구인들도 왼손을 기피한다. 서구 사회에서 왼손잡이 편견을 빚어 낸 최대의 공적은 기독교 문화이다. 선악과를 따는 이브의 모습도 대개 왼손으로 그렸다. 최후의 심판에서 의로운 자를 상징하는 어린양은 오른쪽, 악한 자를 상징하는 염소는 왼쪽에 선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오른쪽에는 선한 도둑, 왼쪽에는 악한 도둑이 세워졌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그림에서 그리스도는 오른손을 천국의 밝은 곳을 향해 올리며 , 왼손은 아래의 어두운 지옥을 향해 가리킨다. 성화(聖畵)의상당 부분이 오른손에 힘을 주며, 왼손은 악마 취급을 당한다. 따지고 보면 기독교 문명의 기반은 두말할 것 없이 이원론이니 죄우 가름은 역사적 전통에 입각해 있음이 분명하다.
인도네시아 농촌에서는 지금도 아이들의 왼손을 묶어 놓은 풍경을 목격할 수 있다. 오른손으로 식사하고, 왼손은 불결한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왼손잡이는 극도로 배척당한다. 발리 섬에서는 아이를 왼손잡이로 키우지 않기 위해서 손을 묶는다. 인도의 힌두교도들이 오른손으로 식사를 하고 왼손으로 일을 보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회교도 사회인 아랍에서도 왼손 금기는 동일하다.
‘왼손이 오른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도록 하라’는 아랍 속담이 있다. ‘수치심 보다는 죽음을!’이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바, 왼손은 절대 금기임을 암시한다.
몽골의 초원에는 동궐, 위그르, 몽골 제국 시대에 속하는 각기 다른 세 종류의 석인상이 산재한다. 이 석인상들은 한결같이 손에 잔 비슷한 식기를 들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의 석인상들이 오른손으로 잔을 받들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히 몽골 초원도 오른손잡이 천국임을 말해준다. 오늘날에는 러시아령에 속하는 알타이, 이곳에도 여러 시대에 걸친 석상들이 초원에 흩어져 있다. 1,000여 년 전 알타이에 살았던 고 투르크 사람들의 초상을 담고 있다. 투르크인들이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 자신들의 국가를 세운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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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만들어진 석상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석상도 대부분이 오른손으로 술잔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간혹 왼손잡이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오른손잡이다.
우리나라의 돌하르방을 보자. 돌하르방은 제주목과 정의현, 대정현 도합 세 개의 읍성을 지켜주던 것이다. 이들 돌하르방은 권투선수처럼 양 주먹을 쥐고 있다. 돌하르방의 경우에도 오른손이 대략 위쪽에 붙어 있어 우세손임을 알려준다.
유치원 교실에서는 아직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밥 먹는 손이 어느 손인지 들어보세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 보세요!
오른손, 그러니까 올바른 손이 어디지요?
유치원 교사들은 학부모들로부터 왼손잡이인 아이를 오른손잡이로 교정해 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는다. 왼손잡이 어린이들은 왼손잡이에 대한 조부모, 부모, 교사 간의 경해 차이나 일관성 없는 태도 때문에 심리적인 부담을 갖거나, 심지어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도 나타난다. 결국 왼손잡이는 사회적 희생양이 되고 만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왼손잡이 박해가 성문법으로 명시된 적은 없다. 일종의 불문법, 관습법으로 지탱되어 온 왼손잡이 박해가 실제로는 성문법보다 훨씬 강고하고 지속적이다. 이는 오로지 왼손을 통제 하겠다는 대중들의 자발적인 통제 속에서만 가능하다.
오른손잡이 문명 속에서 왼손잡이는 언제나 비보호 좌회전이다.
■ 원초적 통제
중세 국어에서 ‘올’는 옳다는 의미, ‘외다’는 그르다는 의미다. 즉 ‘옳다’의 반대는 ‘외다’이다. ‘외다’는 ‘물건을 좌우가 다르게 놓아서 쓰기 불편하다는 뜻도 지닌다. ’왼일‘이란 그릇된 일, 잘못된 일’을 뜻한다.
‘오른’과 ‘왼’은 원초적인 언어 해석에서 이미 바르고 그른 것으로 대별되었음이 드러난다.
인도와 유럽의 여러 언어에서도 오른쪽이라는 말은 강함, 성스러움,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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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등을 표현하는 데 반하여 왼쪽은 약함, 속됨, 불결, 무능력, 추악 등을 표현한다.
영어에서 right(오른쪽)이라는 말은 오른손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는 뜻을 암시한다,
right, that's all right 등이 ‘만사형통’이라는 관용어인 것도 오른쪽이 행운임을 잘 말해준다. 예우받는 사람, 특별한 신뢰를 받는 지위, 상석, 우위로 생각되는 경우, 믿을 만한 사람, 오른팔(심복)이라는 뜻에도 'right-handed가 쓰인다.
반면에 left(왼쪽)는 ‘무시된다’는 뜻을 암시한다. 먹다 남은 것, 시대착오적인 유풍이나 관습을 뜻하는 'left over'에 왼쪽이 매개되어 있음은 그만큼 서구사회에서 ‘왼손은 구닥다리’ 란 사고가 뿌리 깊게 존재함을 증명한다.
왼손잡이를 뜻하는 left-handed는 ‘서투른, 솜씨 없는, 의심스러운, 애매한, 성의가 없는, 신분에 맞지 않는, 불길한, 상서롭지 않은’등의 부정적인 뜻을 지닌다.
오른쪽, 왼쪽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방향을 뜻하는 동시에 ‘옳다’, ‘그르다’는 상반된 뜻을 지닌다.
사례 1 왼고개
‘왼고개’란 말은 글자 그대로 왼쪽고개라는 뜻이다. 그러나 ‘왼고개를 틀다’하면 ‘바로보지 않고 외면하다’는 뜻이 된다.
사례 2. 왼 눈
‘왼눈’은 ‘왼쪽 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왼눈도 깜짝하지 아니하다’ 하였을 때,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오른눈도 깜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음에 비하여 유독 ‘왼눈’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만큼 ‘왼눈에 어떤 비의적인 함축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왼고개를 젓다 : 반대나 부정의 뜻을 나타낸다.
왼고개를 틀다 : 바로보지 않고 외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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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발 구르고 침 뱉는다 : 무슨 일에든지 솔선해 나서지만 곧 뺑소니치다.
왼새끼를 내 던졌다 : 두 번 다시 돌아볼 생각 않고 아주 내던지다.
왼손잡이는 ‘왼손 쬐기’, ‘왼재기’, ‘까락잡이’라고도 부른다. 밥 먹을 때 왼손을 쓰는 행위는 특별히 구분하여 ‘왼손좍질’이라 부른다. 왼소리는 ‘안 죽은 사람이 죽었다’는 헛소문을 뜻한다.
벼슬길에서 밀려 났을 때 좌천(左遷)이란 말을 써서 좌에 안 좋은 뜻을 부여한다. 유교적 잣대로 재보면 사태는 보다 분명해진다. 유교에서는 정도(正道)를 우도(右道) 이단을 좌도(左道로 보고 있으니 오른쪽을 높게 친다. 명문 집안의 성은 우성(右姓)으로 간주하는 태도까지 겹쳐서 좌도로 찍힌 쪽은 형편없는 놈이 되고 만다.
■ 몸에 대한 통제 - 좌임에서 우임으로
지극히 자극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다. 아마 남성들만 답변하면 될 것이다. 남성들은 페니스를 대체 어느 쪽에 둘까. 누드 차림일 때는 물론 가운데 둘 것이다. 다비드 상의 페니스를 비롯하여 무수한 조각상은 예의 가운데 정조준을 증거 해 준다. 그러나 오른쪽 왼쪽 구분 없이 두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 어느 한 쪽으로 두게 마련이다. 몸에 달라붙는 복장이 유행하면서 바지 속에서 페니스의 자리매김은 논란의 대상이다.
특히 양복점에 갔을 때는 다소 사정이 달라진다. 비싼 맞춤집에서는 이 문제를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영국의 양복집에서는 일반화된 질문이다.
옷에 대한 좌우 통제의 백미는 역시 여밈이 아닐까?
흔히
‘옷깃을 여민다’고 한다. 이를 한자로 ‘임(袵)’이라 부른다. 袵의 훈독은 ‘옷섶 임, 솔기 임, 여밀 임, 자락 임, 요 임, 깔 임’등이 있다. 옷을 여미는 임에는 좌임과 우임이 있다. 좌임과 우임을 합한 합임도 있다.
좌임과 우임의 사전적 용례를 찾아보자
좌임 : 옷의 오른쪽 섶을 왼쪽으로 여미는 여밈법
우임 : 좌임의 반대, 웃옷의 왼쪽 섶을 오른쪽으로 여미는 여밈법
합임 : 한자 뜻 그대로 ‘마주보게 여미는 여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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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입고 있는 양복을 살펴보자 대개 왼쪽에서 단추가 달린 오른쪽을 향하여 여민다. 즉 우임이다. 조선시대의 복장도 대부분 우임이다.
애초에는 북방 계통의 좌임이 많았으나 고려 이후로는 완벽하게 우임으로 변하여 조선시대의 저고리나 두루마기는 모두 우임으로 되어 있다.
즉 한민족의 원초적인 복제는 좌임이었으나 고구려 고분 벽화가 등장하는 시점에는 이미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좌임과 우임의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삼실총, 무용총, 각저총 등 집안현 소재의 고분에는 좌임이 많고 사신총, 쌍영총, 개마총 등 평양 부근의 고분에는 우임이 많으므로, 이는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전과 이후의 복식상의 차이라 하겠다.
4세기 중엽
안악 3호 무덤(황해도) :우임 웃옷이 보이며 우임의 웃옷 위에 합임의 포를 입고 있다. 신분 구분 없이 우임 웃옷을 입고 있다.
4세기 말
씨름무덤(길림성 집안 소재) : 웃옷은 좌임형태. 신분의 구분 없음
안악1호 무덤(황해도) : 우임의 웃옷이 보이며 역시 신분 차이가 없음
4세기말 ~ 5세기초
무용총(길림성 집안) : 웃옷은 좌임
덕흥리(덕흥리 소재) : 웃옷 형태는 좌임과 우임, 합임이 모두 나타남
5세기
장천 1호 무덤(길림성 집안현) : 신분 차이 없이 모두 좌임
쌍기둥 무늬(남포시 용강군) : 신분 차이 없이 좌임 우임이 모두 나타남
여기에서 고구려 시대의 좌임과 우임의 변화가 중요하다. 고구려 초기는 분명히 좌임인데 반하여 서서히 우임으로 옮겨갔다는 주장이다.
사람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로지르면 좋은 일이 생기고, 반대면 나쁜 일이 생긴다. 이는 옷깃의 방향과 관련되는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로지르는 것은 품속으로 들어오는 격이므로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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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여밈만이 옷에 대한 좌우통제의 유일한 경우일까. 그렇지 않다. 상복 같은 특수한 의례복을 입을 때, 더 나아가서 옷의 색깔 까지도 두루 통제의 대상이다. 장례에서 상제가 두루마기를 입을 때 부친상에서는 왼팔을 빼고 모친상에서는 오른팔을 뺀다. 아버지를 상위로 보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떤 옷을 입을까. 처음에는 시신에 죽은 자가 평소에 입던 대로 우임의 습(褶)을 한다. 이는 행여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만들어진 예법이다. 그러나 습을 하고 난 다음날까지도 깨어나지 않으면 비로소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하고 좌임으로 바꾼다. 우임이 생명을 의미하고 좌임이 죽음을 의미하는 데서 좌임의 특이성과 주술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신분에 따라서도 치마 두르는 방식에 차이가 났다. 치마를 두를 때 좌로 입느냐 우로 입느냐에 따라서 그 신분을 알게 하였으니, 양반 부인네는 온치마요, 상인의 아낙네는 바른치마를 입는 게 상례였다.
지금 그대는 좌임으로 입는가, 우임으로 입는가. 유니섹스 복장을 비롯하여 다양한 스포츠웨어, 캐주얼웨어 , 그리고 사이버 시대에 걸맞는 복장의 출현으로 더 이상 좌임, 우임 가르기는 무의미하다. 특히 지퍼의 등장은 합임이라고 해야 할 만한 상황을 연출해 준다.
1893년 콜롬비아 세계박람회에서 휘트콤 저드슨이 전시한 ‘잠그는 죔쇠’이래로 1917년 기드온 선드백의 ‘고리없는 여밈 장치’가 최초 특허를 따냄으로써 실용화되기에 이른 지퍼, 21세기를 맞이하면서 뉴욕 타임스가 ‘지난 천 년간 최고의 패션 발명품’으로 꼽았다.
지퍼에 이르면 좌임과 우임 논쟁은 전면적으로 무색해진다. 지퍼에는 좌우 방향이 없으며 오로지 상하 운동에 의한 열고 닫음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정장, 정복이라고 불리는 시장에서는 여전히 좌임과 우임이 문제가 된다. 전통적인 치마저고리는 물론이고 개량된 생활한복에서도 좌임과 우임은 여전히 선명하게 나뉜다. 지퍼와 다르게 단추는 여전히 오른손잡이가 구멍을 찾아서 꿰기 쉽게 만들어져 있다. 민속 전통의 혼재가 과도기적 현상을 보여주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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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례에 대한 통제 - 제사정치의 제도화
국가 정치 제도로 눈을 돌리면 왼쪽 동네의 사정은 사뭇 달라진다. 늘 좌가 높고 우가 낮은 좌존우비(左存右卑)의 형국이다.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았으며, 좌찬성과 우찬성의 구분도 확실하였다. 문관은 좌측 무관은 우측으로 자리매김했다. 좌우는 동서를 의미했으므로 문관은 동반으로 무관은 서반으로도 불려졌다.
다산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는 조선시대의 양반을 동서이반(東西二班, 문반과 무반)이라고 풀어 놓았다.
그러나 국가 정치 제도의 확고부동한 입장이 가장 잘 반영된 것은 역시 ‘의례의 정치학’이 아닐까. 작게는 제사에서부터 크게는 국가적인 각종 의례에 까지 정치학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조선시대의 궁궐배치는 좌묘우사(左廟右社)다. 선대 조상부터 숭상하는 종묘를 왼쪽에 배치하고, 오른쪽에는 토지신과 곡신을 주관하는 사직을 배치하였다. 두 건물은 이른바 음양원리에 따라 배치한 것이다.
남녀의 대비는 왕비와 왕의 변증에서 드러난다. 궁중 풍속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변증은 이어진다. 창덕궁 대조전의 경우, 마루를 중심으로 오른쪽의 임금 방을 동온돌, 왼쪽의 왕비 방을 서온돌이라 하였다. 여성과 남성의 변증은 부부 합장에서도 드러난다. 부부를 합장할 때, 부좌(婦左)라 하여 남편의 왼쪽에 부인을 안치하였다.
정치적 의례로서 임금을 좌우에서 보필(輔弼)한다 임금의 거동에 는 반드시 좌우가 따라야 한다. 왼쪽에 보가 있고 오른쪽에는 필이 있어 임금을 보필한다는 것이니, 오른쪽에서 임금을 돋는다는 ‘필’이 주목된다. 오른쪽을 높인다는 의미에서 학문을 높이는 우문정책이 바로 조선시대 유교적 정치원리였던 셈이다. 정통의 진리를 우도라 칭하고, 이단을 좌도라 칭하였음은 왼쪽을 낮추라는 의미이다.
이른바 ‘홍동백서’식의 가장 보편화된 제사법도 당대의 사회 역사적 상황을 압축한다. 원래 집안에서 사람이 태어나는 장소와 죽는 장소가 다르다. 아기 출산은 으레 아랫목에서 하며 아랫목에 삼신을 모신다. 반면에 사람이 죽으면 북쪽 즉 윗목에 모신다. 그리고 남쪽에 무덤을 쓰는 경우에도 ‘북망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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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표현을 관행적으로 쓴다. 제사를 지낼 때도 신위는 반드시 북쪽에 모신다.
제물 진설은 사실 이설이 많다. 동조서율(東棗西栗 대추는 동쪽 밤은 서쪽), 홍동백서(紅東白西 붉은 과일은 동쪽에…), 조율시리(棗栗枾梨)가 그것이다. 조선시대 ‘확고부동’의 진리와도 같이 뿌리내려서 모든 백성들이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제사법상의 좌우 배치를 실제 민중이 얼마나 체득하고 있을까.
주자가례가 민중에게 보급되는 데는 장대한 시간이 걸렸다. 고려말에 신진 유학자들이 의하여 성리학이 새로운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제사법도 변하게 된다.
주자가례가 민중에게 분명하게 각인되기는 쉽지 않았다. 규모와 절차가 복잡하고 비합리적인 요소가 많아서 일반은 물론이고 사대부 계층에서조차 실질적으로 실행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리하여 이른바 조선전래의 토속적 음사(陰祀)를 유교적인 의례로 변화시키는 데 근 백년의 세월이 걸렸으며 그나마 완전한 것도 못 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이 교조적 성격을 띠면서 강조된 지나친 구분법은 민중 입장에서는 사실 실생활에 많은 혼란을 주었다. <예기>에서는 천자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좌측을 동쪽(양), 우측을 서쪽(음)으로 본다. 즉 태양을 항한 남면(南面)이란 측면에서의 방향성이다. 태양이 곧 하늘이니 하늘이 천자로 둔간되었으며 천자 중심의 세계관이 요구된 결과다. 따라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좌우가 반대로 되는 혼란을 ‘무식한 만중’은 늘 느껴야 했다.
제사상에서도 신주 중심에서 볼 때와 차례지내는 이 중심에서 볼 때 왼쪽과 오른쪽은 늘 반대다. 메(밥)와 객(국)을 올릴 때도 우리가 일상으로 먹는 방식과는 정 반대다. 이를 반서갱동(飯西羹東)이라고 하거니와,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가 다름을 뜻한다. 무지랭이 민중으로서는 번거롭고 만만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사상에 대한 통제 - 좌도와 우도에서 좌익과 우익으로
법원에 가면 로비에 저울을 든 디케의 여신이 서 있다. 아름답지만 매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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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 저울을 달아서 좌우 균형을 잡아 죄를 심판한다는 정의의 여신이 우리들의 법 생활을 지배한다. 디케 여신은 엄정한 무게 중심, 즉 대칭의 중심축이다. 법은 그만큼 선과 악의 대립이며, 덕과 예로 형과 벌을 행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디케 여신 자신은 정의의 여신이 되기까지 자식에 대한 사랑과 복수의 맹세가 극적으로 충돌하는 과정을 겪었다. 즉 디케 신화는 얻으면서 잃고, 잃으면서 얻는 복수의 딜레마를 반영한다. 디케 여신이 혼란을 겪었듯이 법 제도는 애초부터 혼란을 내포한다.
도대체 법이란 무엇인가.
법이란, 사회적으로 보장된 복수와 형벌의 제도적 장치이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복수가 있다. 복수는 생명체의 본능이자 생리적 반사작용이다. 그러나 복수에 감정의 무게가 실리면서 인간 사회는 더욱 살벌해졌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형벌은 순화된 복수일 뿐이며, 복수의 제도화 과정이다.
형과 벌은 음양오행의 순환 속에서 규정되며 덕과 예를 실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덕과 예는 정교의 근본이요. 형과 벌은 정교의 수단이니 황혼과 새벽 봄과 가을이 사로 번갈이 와야만 1년을 이루는 것과 같다. 바꾸어 말해 ‘덕과 예는 정교의 근본이요. 새벽이나 봄과 같고, 형과 벌은 어둠이나 가을과 같다. 덕과 예 형과 벌은 어둠과 새벽이 번갈아 들면서 하루를 이루고, 봄의 양기와 가을의 음기가 번갈아 들면서 1년을 이루는 것과 같다. 그러나 덕과 예, 형과 벌, 양자의 법리적 해석과 무관하게 정확히 대립, 대칭적인지는 많은 의문이 존재해왔다.
사실 교도소에 수감된 죄인 중에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이가 의외로 드물다. 무전유죄(無錢有罪), 혹은 ‘재수가 없어서’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교도소 내부에서는 ‘교도관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는 ’백인백법(百人百法)이 통용된다. 심하게 말하면, 법률 동네에서 먹고사는 이들의 밥벌이를 위해 늘 일정 정도의 죄인이 반드시 태어나야만 하는 다른 측면이 있다. 사회적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불안을 해결하기보다는 손쉬운 분리 감금을 선택한다.
감금율은 선고 형량의 최대화와 가석방의 최소화를 통하여 극대화시킬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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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며, 이를 조절하는 장치를 통하여 넘치는 감옥을 늘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다. 수문을 열고 닫아서 홍수댐을 조절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한국처럼 분단된 나라의 법제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분야는 역시 사상의 자유 부문이 아닐까. 서구에서 좌우익의 심각한 이원론적 세계관이 ‘도입’되면서 골육상쟁의 결과를 낳았고, 그 결과 법제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작동시키는 영역이 바로 좌우의 문제인 것이다.
■ 과학 기술의 통제 - 기차만큼은 왜 좌측 통행일까
과학기술 문명의 혜택 속에서도 왼손잡이로 살면 불편한 경우는 오히려 시시콜콜할 정도로 많다. 왼손잡이는 자동차 운전이 어렵다. 변속기가 오른쪽에 달려있기 때문에, 특히 찰나를 다투는 순간에 더욱 위험하다. 게다가 차 안에서 담배라도 피우려면 여간 힘들지 않다. 왜냐하면 재떨이가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자판부터 모니터나 본체의 스위치가 전부 오른쪽에 있다. 마우스도 오른쪽에 붙어 있다. 가위조차도 오른손잡이용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도 ‘왼손잡이 세상’같은 사이트에서는 왼손잡이 전용 물품을 선보인다. 왼손잡이 전용품은 사실 전근대 사회에도 제한적으로 존재했으니 새삼스러운 발명품은 되지 못한다. 왼손잡이 농사꾼이 쓰기 좋도록 대장간에 주문하여 날이 정반대인 왼낫, 왼호미 등이 있었다. 국궁도 왼손으로 시위를 잡아당기어 쏘는 화살인 좌궁 그 반대인 우궁이 별도로 있었다.
왼손잡이용 전문 물품 판매상이 그만큼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략 네 가지 반증이 가능하다.
1. 당연한 말이지만, 그만큼 왼손잡이들의 생활이 불편하다는 반증.
2. 전근대 사회 보다도 현대 사회에서 왼손잡이의 불편함이 증대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현대 과학 기술의 대량 생산 시스템이 획일적인 오른손잡이 문화로 넘어 갔다는 반증
3. 다행한 일은 왼손잡이들의 인권적 욕구가 그만큼 확대되고 있다는 반증.
4. 왼손잡이를 매개로 한 경제적 법칙이 강화되면서 왼손잡이 물품을 판매하 는 방향으로 점점 자본의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는 반증.
전근대적 삶과 다르게 현대 문명의 과도한 기술은 오히려 실생활에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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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과도한 기술문명에 종속시킨다. 길을 갈 때조차도 ‘마음대로’ 걸을 수 없다. 모든 자동 기계, 모든 전자 메카니즘 등이 선택을 강요한다.
모든 과학 기술 문명의 혜택은 전반적으로 오른손잡이에 부합되게 발전해왔다. 전근대 사회에 비하면 왼쪽에 대한 종교 신앙적 억압이 조금은 약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그만큼 종교 신앙적 억압을 대체할 새로운 억압 장치로서 과학 기술문화의 통제가 강해졌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연적인 대칭미조차도 이제 과학적 대칭에게 그 권위를 넘겨주게 되었다.
과학 기술에서의 좌우통제가 실생활에 가장먼저 반영된 것은 역시 시계다.
시계방향, 시계반대방향, 3시 방향, 9시 방향 같은 시계를 매개로 한 방향 감각은 인류가 새롭게 획득한 방향감각이다. 시계방향은 너무나도 실생활에 밀착되어버려 사람들은 시계의 방향을 실제 방향으로 착각하곤 한다. 사람들의 팔목에 채워진 시계는 거의 수갑과도 같다. 늘 ‘시간의 수갑’ 엄밀하게 말하자면 자연의 시간이 아닌 시계라는 과학 기술의 혜택이 가져다 준 자본의 시간, 시계의 시간을 수갑처럼 차고서 임무에 나선다.
오늘날 우리가 알게 모르게 좌우 통제를 가장 강하게 받고 있는 지점은 교통 분야이다. 현대 도시의 시민들은 저마다 좌회전, 우회전이란 명제를 놓고서 고민하고 씨름한다. 차를 몰고 나가서 한 번도 좌회전이나 우회전을 하지 않고 돌아오기란 그리 쉽지 않다. 좌측통행, 우측통행도 같은 원리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자동차의 우측 통행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된 관습이다. 그런데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 영향이 남아 있는 인도 호주 같은 나라에서는 예외이다. 일본을 방문하면 다fms 것은 대개 우리나라와 비슷한데, 자동찻길과 핸들 위치가 전부 거꾸로 되어 있어 처음에는 매우 신기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들 나라에서도 우측 통행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는 압력이 날로 거세어진다.
차량의 좌칙 통행은 ‘시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들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간다’는 일반 원칙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영국차량은 좌칙 통행이기에 영국에서 발달하여 우리나라에까지 들어온 초기의 기차는 모두 좌측통행이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원래 한말에 이르도록 서울 종로 거리에서 천민과 마소는 좌측 통행,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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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우측 통행을 했다. 이는 오른쪽이 왼쪽보다 앞선다는 관념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근현대 문화는 시계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다. 자동차가 그러하고, 야구경기장에서 주자가 홈런을 치고 돌아오는 방향이 그러하다.
좌측통행이 정설인 영국에서도 경마장만큼은 우측 통행을 하고 있으며 경륜장 도 시계반대 방향이다.
북한 사정은 어떤가. 자동차 운전대가 왼쪽 오른쪽 방향 모두 존재한다. 운전대가 오른쪽인 일본의 차를 많이 수입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이다.
글쓰기의 좌우도 중요하다.
왼쪽과 오른쪽의 방향성은 글씨 쓰기에서도 뚜렷한 문화적 통제력을 지닌다. 손으로 쓸 때는 문제가 작았는데 타자기, 컴퓨터 등이 등장하면서 사태는 고착적으로 굳어져 간다. 모두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컴퓨터 화면을 채워나가고 있을 것이다. 영어나 불어, 독어, 스페인어…. 모두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쳐 나간다.
그러나 원래 아랍어나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 나갔다. 지금은 왼쪽 편향과 오른쪽 편향이 병존한다.
우리나라의 현존 목판 인쇄술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닥종이 12장을 이어붙인 두루마리 형태다. 금속활자로는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70여년 빨랐던 <백운화상조록불조직지심체요결>, 오늘날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 보관실에 잠자고 있는 일명 직지(直指)가 최고 판본이다. 이들은 당연히 오른쪽에서 왼쪽, 그것도 위에서 아래로 써 내려갔다. 세종조에 편찬된 훈민정음도 마찬가지다. 이 같은 전통은 20세게 후반까지 이어져서 1960년대에 출간된 책들도 예의 서법을 따른다.
그리고 독립신문을 비롯한 대부분의 계몽기 시대 신문, 잡지는 여전히 세로쓰기 였고 한국 특유의 보수적인 언론들은 20세기말까지도 완강하게 세로쓰기를 고집하였다.
알파벳은 가로쓰기는 가능할지언정 세로쓰기는 불편하다. 그런 점에서 한글과 한자는 가로 세로 쓰기의 병존이 가능하다. 컴퓨터의 프린터를 켜고 세로쓰기를 누르면 당연히 세로쓰기 출력이 가능하다. 이른바 ‘가로지르기’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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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보편화되고 디자인의 혁신이 요구되는 시대에 가로쓰기와 세로쓰기를 병행할 수 있는 한글의 위력을 다양하게 살릴 방안을 모색해야지. 가로쓰기 일변도의 문화 감이 최선의 해답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또한 가로쓰기와 세로쓰기는 단순한 방향 바꾸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역대 한글 서간문으로 가장 높이 평가되는 추사의 친필 언간글씨, 서희순 상궁의 대필 언간글씨의 역동적 조형미는 오로지 종서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만약에 언간글씨의 역동성이 가로지르기였다면, 그리고 훈민정음이나 석보상절의 글씨가 가로지르기였다면 어땠을까? 가로지르기와 세로지르기의 미학은 값이 다른 게 분명하다. 단순한 방향바꾸기 이상의 뜻을 함축한다.
글쓰기의 좌우 방향성도 근대 과학 기술 문명의 무조건적 ‘도입’에 의하여 오로지 서구적 방식이 관철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활자 및 인쇄기의 방향성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편리하게끔 조작되어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 방향에서도 과학 기술의 통제가 개입되어 있다.
2018.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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