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스타일이다

2018. 3. 26. 18:23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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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스타일이다

- 책읽기에서 글쓰기 까지 나를 발견하는 시간 -

■ 장석주 지음

0 시인, 비평가, 에세이스트, 문장 노동자, 독서광

0 책, 산책, 음악, 햇빛, 바다, 댓숲, 제주도를 좋아하고 서재와 도서관을 사 랑한다.

0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되면 서 등단

0 고려원 편집장, 청하출판사 설립 13년 동안 편집자 겸 발행인

0 동덕 여대, 경희 사이버대, 명지 전문대, 등에서 강의

0 EBS 문화사랑방, 행복한 문화 진행자.

0 KBS 1TV <책을 말하다> 자문위원

0 저서

일상의 인문학, 장석주의 소설 창작 특강, 풍경의 탄생, <들뢰르, 카프카, 김훈> <이상과 모던 뽀이들> <느림과 바꿈의 미학>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등

0 시집

<붉디 붉은 호랑이>, <절벽>, <몽해 항로>, <오랫동안> 등

■ 프롤로그

“원하라 가질 수 있나니!”

젊은 날에는 뭔가를 쥐려고 간절히 열망했고 그 열정으로 여기까지 왔다.

소유하는 자는 결국 소유된다는 깨달음을 뒤늦게나마 알게 된 걸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적게 먹고 적게 소유하며 한량으로 사는 것의 자유로움 때문에 “원하지마라, 자유롭게 되리니!” 라는 금언을 자꾸 떠올리는 날이다.

나이를 먹는 데도 꿈이 있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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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쓰지 않은 작품 속 주인공처럼 사는 법을 배우라”고 얘기한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잘 산다는 건 뭐, 그런 거 아니겠나.

삶을 만드는 건 우리가 걸어온 길이다.

허나, 진짜로 우리 마음을 끌고 가는 건

가보지 못한 그 많은 길들이 아니던가.

Part 1. 밀실

◉ 글쓰기를 위한 책읽기

■ 읽기와 쓰기 그리고 자기 짓기

스무 해가 넘도록 대학교 혹은 공공도서관이나 사회교육센터에서 창작 강의를 했다. 내게 배운 사람들 중 더러는 작가로 등단하기도 했다. 그간 작가 지망생들을 가르쳐 본 경험에 비춰 말하자면, 역시나 많이 읽고 부지런히 썼던 사람들만이 여러 난관을 뚫고 기어코 작가로 우뚝 선다. 이건 지금껏 단 한 번의 예외도 없는 하나의 법칙이다.

스릴러 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Stephen King 1947~)은 이렇게 단언한다. “책을 별로 안 읽는 사람들이 글을 쓰겠다면서 남들이 자기 글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일이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은 글을 쓸 시간도(연장도) 없는 사람이다.

대개의 작가들은 작가가 되려는 의식이 생기기 전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누가 시켜서 읽는 게 아니라 스스로 좋아서 책을 읽는다. 그들 내면에 잠재된 ‘책을 읽고 싶다’라는 욕망은 본능에 가깝다. 그들은 책 읽기를 통해 본능으로서의 지식욕을 채운다. 작가가 되려고 많은 책들을 섭렵한 게 아니라 많은 책들을 섭렵했기 때문에 작가가 된 것이다.

어느 독서광은 책읽기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나 자신을 저자가 창조한 세계에 푹 담그고, 삶의 변화와 전환을 다루는 새로운 방식을 목격했고,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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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와 감정 이입과 연결의 도구를 발견했다.” 다시 말해, 날마다 책 속 인물들의 삶에 공감하며, 그들이 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시련을 넘어 왔는지 관찰하면서 자신의 삶과 그것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책 읽기는 이해와 공감의 능력을 키우는 지름길이다.

글쓰기의 동기는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을 자극하고 촉발하는 것은 다양한 책읽기이다.

◯ 맥락의 독서와 글쓰기의 지형학

읽기와 쓰기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둘은 하나이다. 혹은 왕성한 책읽기는 글쓰기의 최소 원칙이다. 독서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글쓰기의 세계로 이끈다. “작가 지망생은 대부분 책벌레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책과 도서관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작가 이전에 왕성한 책읽기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독서가로 만든 것은 독서를 통해 얻은 ”황홀한 감흥“이다. 그들을 책 읽는 사람에서 작가로 탈바꿈시킨 것도 책 읽기를 통해 얻었던 바로 그 ‘황홀한 감흥’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들이 읽은 책의 목록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일관된‘ 맥락’에 따라 책을 골라 읽는 습관을 체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맥락’은 책과 책 사이의 연결 고리로, 지식의 체계일수도 있고, 정서의 일관된 흐름일수도 있다.

맥락의 독서법은 이것과 저것,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의 상호 관련성을 깊이 이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삶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깊게 만든다. 이 독서법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상당한 수준의 지적 체계를 정립한 자로 작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한 작품을 다른 작품과의 맥락 속에서 읽을 줄 알고 텍스트의 좌표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아는 것은 글을 쓰는 데에도 상당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 내 것을 쓰고 싶다면

부지런히 읽고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바로 ‘작가가 무엇인가’에 대한 확고한 자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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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따져 묻고, 자의식에 대한 투명한 인식에 따른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다. 모든 작품을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써내고 있는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1940~)는 자신의 글쓰기가 궁극적으로 자기를 구원하는 일임을 고백한다. “난 존재들과 사물들을 대변하는 배우이자, 그것들이 존재하는 장소이며 그것들의 증인이기도 했습니다. 주어진 한 사회와 시간 속에서 그러한 존재들과 사물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구하는 것, 그래요 난 내가 글을 쓰는 가장 큰 동기가 바로 거기 있다고 느낍니다. 나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방법도 바로 그렇게 얻어진다고 생각하고요.”

■ 책읽기는 운명을 바꾼다

책과 함께 보낸 시간보다 더 충만한 시간이 있을까? 전기 작가이자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 문학계의 거장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는 책을 일컬어 괴로움과 불안을 달래주는 ‘한줌의 정적’이라고 하며, 책읽기란 그 정적을 자기 안으로 들여 내면화하는 일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책 한 권을 펼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거기에 빠져들었다.

그때는 책읽기를 방해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싫었다. 책을 읽는 중에는 밥 먹는 것마저 탐탁지 않을 정도였다. 어머니의 거듭되는 독촉에 마지못해 밥상머리에 앉아 겨우 몇 숟갈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책 읽던 자리로 달려와서 책에 빠져들곤 했다. 당시 내 머리 속은 온통 책에서 읽은 이야기들로 가득 찼다.

그 시절엔 왜 그토록 책이 재미있었을까?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책읽기가 내 뇌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꿔버렸다는 사실을, 아울러 뇌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운명도 바뀐다는 사실을…….

◯ 깨어있는 즐거움

독서를 위한 뇌 기관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의 뇌와 숙련된 독서가의 뇌는 다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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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련된 독서가의 뇌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뇌 전체에 퍼져 있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가동시키면서 지적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놀랍지 않은가? 숙련된 독서를 통해 네트워크 콜라주(신문지, 우표, 벽지 등 실물을 붙여 구성하는 화화 기법)가 된 뇌라니! 책읽기가 뇌를 바꾸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뇌는 책읽기에 더욱 잘 적응하게 되고, 마침내 책읽기에 최적화된 프로세스를 구축하게 된다.

책읽기는 영혼을 성장시키고 개성에 활기를 불어 넣으며 그것을 한껏 확장시켜 주기도 한다.

책을 읽는 능력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책을 발명해 낸 것은 길게 잡아도 3천 년 안팎의 일이다. 책이 인류의 지적 능력을 축적하는 수단이 된 것은 불과 6백년 남짓이다. 중세 때까지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문맹이었다.

중세 이후 문자를 해독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인쇄, 제지, 안경 따위와 같은 독서의 물질적 기반이 완성되면서 비로소 독서가 인류의 보편적 능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와 함께 문명의 폭발적인 발달과 도약이 이루어졌다.

책읽기는 나와는 다른 타자와의 접속, 그리고 세계와의 접속을 의미한다. 아울러 책읽기는 “자신의 무의식을, 그 욕망을 텍스트에 직접 접속하는 것인데, 마치 ”찌르듯이, 어쩌면 찔리는 듯 이루어지는 접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강렬한 경험이다.

◯‘타인의 삶’이라는 책

우리를 책읽기로 내모는 것은 남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엿보려는 왕성한 호기심과 지적 열망, 그리고 정서적 공감의 즐거움들이 한데 뭉쳐서 만든 욕구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동안 이야기들은 우리 안으로 스며들어온다. 그렇게 우리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온 이야기의 힘에 의해 망각되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여기서 기억이란 바로 삶의 다른 이름이다.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은 이 기억(이야기)을 통해 두 번째 삶과 만난다. 실제 경험으로서의 삶은 이 두 번째 기억(이야기)의 삶을 통해 더욱 생생한 것으로 거듭난다. 이것이야말로 책읽기가 만들어 낸 기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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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험에 비춰 말하자면, 세상의 하고 많은 일들 중에서 책읽기를 선택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이기보다는 본능이자 운명이다. 책읽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제 삶의 작은 틈새들과 주름들 안으로 숨어서 남들이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삶을 사는 자들이다.

책읽기에 빠져든 사람들은 고독 속에 칩거하며 저마다 하나의 ‘도서관’을 설립한 자들이다. 오직 자신에게만 속하는 짧지만 수많은 삶들로 이루어진, 이 ‘기적의 도서관’에서 그들은 ‘타인의 삶’이라는 책을 열람한다.

■ 꿈꿀 권리

더러는 한 권의 책이 진로를 결정하기도 한다. 내게는 프랑스의 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의 <꿈꿀 권리>가 그런 책이다.

바슐라르는 내 비평의 스승이다. 비록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그는 내게 이미지와 상상력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주었다. 바슐라르는 온갖 꿈, 신화, 상상들에 대해 연구한 과학자이자 시인으로 인간의 꿈과 상상들을 공기, 물, 불, 흙이라는 4원소로 분류하고 그 의미를 해독해 낸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감히 비평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 만일 천국이 있다면, 그곳은 커다란 도서관일 것이다

바슐라르는 1884년 6월 27일 프랑tm 동북부의 상파뉴 지방에 있는 바르쉬르오브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 : 구두 수선공, 제화산업의 발달로 수선공의 일이 줄어듦

- 어머니 : 담배가게 운영으로 생계 유지

- 바슐라르 : 매년 우수상을 탈 정도의 우수생, 가정형편상 대학진학 포기

- 기술직인 전신기사 자격증 취득, 레미르몽 우체국에서 2년간 전신기사로 근무, 초등학교 교사였던 잔느 로시와 결혼 후 3주 만에 1차 대전 발발, 군에 징집. 5년간 전선을 누비다 전역하여 자신의 모교인 중학교에서 물 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로 근무,

- 아내 잔느의 죽음으로 딸을 돌보며 학문에 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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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불행을 끊임없이 겪으면서도 자습으로 이뤄 낸 그의 학문적 성취는 실로 대단했다. 1930년에 그는 디종 문과 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임명되고, 1940년에는 소르본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된다. 시골의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며 독학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얻은 그는 1955년에 모든 공적 영역에서 은퇴한 후 1962년 10월 16일 운명한다.

◯ 세계의 존재 이유

<꿈꿀 권리>는 바슐라르의 미술론을 모은 책으로 예술작품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이 책은 수련(연꽃)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통지하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수련은 여름 새벽이 일으키는 기적이자 바로 미적 계시의 순간이라고.

밤이 되면 수련은 꽃잎을 오므리고 잠들 채비를 하는데, 진흙 속에 뿌리를 담그고 있다가 날이 밝으면서 다시 꽃잎을 펼친다. “물과 태양의 순결한 처녀”로서 빛과 함께 되살아나는 수련은 우리에게 “여름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꽃이기도 하다. 올 해 여름 새벽에 보았던 수련은 작년의 여름 새벽에 보았던 그 수련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수련이 지고나면 여름은 끝나고, 그 여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수련도 여름 한 번으로 족한 것이다.

모네는 특히 수련을 즐겨 그렸는데, 바슐라르는 모네의 그림을 통해 여름 새벽의 기적을 만드는 수련을 새롭게 발견했다. 그는 모네의 수련이 떠 있는 연못 풍경 앞에서 깊은 몽상에 잠겼다. 그리고 이런 글을 남겼다. “세계는 보여지기를 바라고 있다. 바라보기 위한 눈이 존재하기 이전에는, 물의 눈, 조용한 물의 커다란 눈이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있었다.”

◯ 몽상의 시학과 연금술

바슐라르에게서 배운 것은 대상들을 품으며 들여다보는, 바로 그 ‘몽상’에 대해서이다. 몽상은 사물들의 내부로 스며들어가며 - 바슐라르는 그것을 ‘투시’라고 하고 ‘침투’라고 한다. - 세계의 비밀을 탈취해 끝내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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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팽팽한 몽상이 담긴 책들을 한 권 한 권 구해 읽은 뒤부터 나는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 20대 초반, 바슐라르가 없었다면, 김현이 없었다면, 비평이란 것을 써볼 생각을 품었을까? 그들이 없었다면 비평을 쓰겠다는 무모한 용기를 내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 운명의 카펫을 완성하는 법에 관하여 <꿈꿀 권리>에서는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예술가란 빈둥거리다가 벼락같이 영감이 올 때만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아니다. 예술가란 하루도 쉬지 않고 “인내와 열광의 불가사의한 피륙”을 빈틈없이 직조해 내는 사람들이다. 예술가는, 혹은 작가는 날마다 제 일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날마다 짜는 불가사의한 피륙이란 다름 아닌 그의 창조적 운명이다. 참다운 아궁이를 발견한 이상 그가 지피는 불의 아궁이에서 불 - 상상력, 기억, 시 - 이 꺼지는 일이란 결코 없어야 한다. 즉 쉬지 않고 무언가를 배우고 깨우치다 보면, 어느 덧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는 얘기다.

■ ‘책읽기’에서 ‘글쓰기’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작가가 되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책읽기는 글쓰기에 필요한 영감의 원천이다.

지난 20년 동안 장편 소설을 스무 편이나 발표한 조디 피콜트(Jodi Picout, 1966~)란 미국 작가는 “읽어라. 독서는 앞서간 작가들처럼 당신도 쓸 수 있게 영감을 줄 것이다.”라고 말한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 역시 글쓰기에 밑거름이 된 독서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독서 속도가 느린 편인데도 일년에 책을 70~80권쯤 읽는다. 주로 소설이다. 그러나 공부를 위해 읽는 게 아니라 독서가 좋아서 읽는 것이다.”

남보다 책을 많이 읽다가 작가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는 흔하게 들을 수 있다. 작가들이란 족속은 책을 쓰는 존재이기 이전에 책을 읽는 존재이다. “닥치는 대로, 손에 걸리는 대로, 가리지 않고, 게걸스럽게, 순서와 체계도 없이 책에 빠져들었던 독서 체험을 해보지 않는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모든 작가들은 작품을 쓰기 이전에 남보다 책을 많이 읽는 다독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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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를 대표하는 작가인 오르한 파묵(Orhan Pamuk, 1952~)은 <새로운 인생>에서 작중 화자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밤마다 새벽까지 팩을 읽었다. 눈이 아파 오고 온몸의 힘이 빠질 때까지. 책을 읽다보면, 때때로 책이 내 얼굴로 뿜어내는 빛이 너무나 강렬하고 현란해서, 나의 영혼과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몸이 녹아 없어지고,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모든 것이 책이 뿜어내는 빛과 함께 없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 빛이 나를 삼키면서 점점 더 팽창해 가는 것을 상상했다.”

◯ 사람은 책을, 책은 사람을

나는 10대에 수많은 책들을 섭렵한 독서가였다. 방학 때마다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전집에 코를 박고 읽고 또 읽다 보면 어느 새 개학이 훌쩍 다가와 있었다.

20대에 접어들면서 부터는 국립도서관과 시립도서관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굶주린 짐승이 먹잇감을 정신없이 삼키듯 문학, 철학, 역사 따위의 책들을 가리지 않고 어떤 황홀경 속에서 읽고 또 읽었다.

한 때 나는 글 쓰는 것을 포기하려고 했었다. 재능에 깊은 회의를 품었고, 문학의 길에 아무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책읽기만은 멈출 수가 없었다. 여전히 나는 뭔가 읽을 만한 것을 찾아 헤매고 다녔다. 무엇보다도 나는 정치도, 장사도, 임기응변의 처세술도, 배관 기술 따위도 익히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읽고 쓰는 것밖에 없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그 길로 너무 깊이 들어와 버렸던 것이다.

나는 다시 쉬지 않고 읽었다. 작가란 쓰는 자이기 이전에 먼저 읽는 자라는 사실을 뼛속까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한 지속적인 독서를 통해 감각을 벼리고, 개성을 풍성하게 일구며, 단단한 감성의 근육을 만들지 못한다면, 작가가 되는 길은 한없이 멀어질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위대한 작가들의 책을 읽음으로서 그 속에서 마음과 정신을 키울 수가 있었다. 그들의 책을 읽는 것은 작가로 조련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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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입구

◉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 허기진 삶

작가되기의 지독한 어려움과 외로움에 대한 얘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미국의 소설가로 널리 사랑을 받고 있는 폴 오스터(Paul Auster, 1947~) 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을 다닐 무렵부터 책을 쓰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전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쓴 소설 <빵굽는 타자기>에서 폴 오스터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원기 왕성했고, 머리는 착상으로 가득차서 터질 것만 같았고, 발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서 근질 거렸다.” 그 자신은 글 쓸 준비를 모두 마쳤다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글을 쓸 수는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였기에 생계를 해결하는 일이 우선 시급했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비교적 풍족하게 보냈던 그는 배를 곯아본 적도 없었고 추위에 떨어져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먹고 자는 일을 스스로 감당해야만 했다. <빵굽는 타자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나는 손대는 일마다 실패하는 참담한 시기를 겪었다. 결혼은 이혼으로 끝났고, 글 쓰는 일은 수렁에 빠졌으며, 특히 돈 문제에 짓눌려 허덕였다.

그러나 내 꿈은 오직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열 예닐곱 살 때 이미 그것을 알았고, 글만 써서 먹고 살 수 있으리라는 허황한 생각에 빠진 적도 없었다. 의사나 정치인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 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 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갈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폴 오스터는 비바람을 막아줄 방 한 칸 없이 떠돌다가 몸을 누일 방 한 칸을 마련하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글을 쓸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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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기회를 잡으려고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손대는 일마다 실패했고, 항상 돈이 없어서 쩔쩔맸다. 막노동은 물론, 번역하는 일 일요판 산문의 ‘서평란’에 실을 기사를 작성하는 일, 몇 달러짜리 고용인을 비롯하여 사무실의 야간 교환수 일도 마다하지 않고 온갖 궂은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유조선 바닥 청소, 선원들의 침대 정리 등의 허드렛일이 끝나고 시간이 주어지면 그 시간에 제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글을 썼다.

◯ 작가는 꿈만 먹고 살아야 하나

2011년, 설 연휴를 앞둔 1월 29일, 경기도 안양의 어느 월세집에서 한 여성이 숨졌다. 경찰은 그녀가 갑상선기능항진증과 췌장염을 앓다가 며칠 동안 굶은 상태에서 치료도 못 받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사건은 한 일간지 사회면에 “‘남는 밥 좀 주오.”라는 글 남기고 무명 영화 작가 쓸쓸한 죽음“이라는 기사로 세상에 알려졌다.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였던 최고은 씨의 이야기다.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신문에 따르면 최고은은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라는 쪽지를 이웃집 문 앞에 붙여 두었다고 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에 재학 중이던 2006년 단편 영화 <격정 소나타>를 선보여 평단의 극찬을 받았던 이 여성 작가는 사망 당시 겨우32세로 작가의 꿈을 피우기도 전에 그렇게 빨리 제 생을 끝냈다.

그가 이웃집 문에 붙여 두었다는 쪽지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 누군가 자작극으로 각색하여 과장되게 알려진 것으로 드러났고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도 굶주림이 아니라 지병 때문이었음이 밝혀졌지만, 어쨌든 이 죽음은 그 충격과 반향이 커서 사회적 논쟁으로까지 번졌다. 결국 국회에서 예술인 복지법 발의를 촉발시켰고 글쓰기를 생업으로 하는 궁핍의 실상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왜 이들은 세상의 그 많은 직업들 중에서 굶주리고, 거절당하고, 자괴감에 시달릴 것이 분명한 작가라는 직업을 택하는 것일까?”

◯ 두 겹의 굶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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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가로 손꼽히는 러시아의 소설가 표도르 도스트예프스키(Pyodor Dostoevskii, 1821~1881)도 젊은 시절엔 빚과 가난에 시달렸다. <노인과 바다>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도 예술가들에게 있어 ‘굶주림은 좋은 훈련‘이라는 말을 남겼다.

“굶주림은 좋은 훈련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사람들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당신은 그들보다 앞 서 있다.”

<유혹하는 글쓰기>를 보면 스티븐 킹도 대학을 졸업한 뒤 결혼해서 아이를 둘이나 두었던 작가 초기 시절엔 시간당 1달러 60센트를 받으며 세탁소에서 일했다.

평생을 글을 쓰며 사는 일은 가난이라는 처마 끝 가장자리에 살아가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난은 작가들에게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관문과도 같다. 가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각오가 없다면 애초에 글쓰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을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만큼 작가의 길이란 지난한 길이다. 이 길 위에서 첫 번째로 마주치는 역경이 바로 가난, 그것도 꽤나 심각한 현실적인 장애라고 할 수 있는 ‘굶주림’이다.

0 김유정

- 한국 문학사에 빛나는 작가, 가난과 병고라는 이중고

- 폐결핵 중증, 치질, 잦은 각혈과 통증

- 1937년 3월 18일, 친한 벗이자 휘문고보 동기생이었던 안희남에게 도움을 구하는 편지를 보냄, 돈 100원을 빌려 달라고, 그리고 번역할 책 있으면 보내 달라고

- 이 편지를 쓸 때 김유정은 겨우 29세였다. 병마와 최후 담판을 하는 이 젊은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돈이었다. 그는 벗에게 돈을 조달할 방도까지 제안하며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썼다. 그러나 답신을 받기도 전인 3월 29일, 즉 이 편지를 쓴 지 열하루 만에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소설가 최인호는 생전에 자신이 게을러 질 때마다 이 편지를 책상 앞에 붙여 놓고 읽었다고 고백한다. 이 편지는 나태해지는 것을 막는 채찍이었던 것이다. 작가가 되려면 굶주림과 싸워야 한다. 작가가 견뎌야 하는 굶주림은 두 겹이다. 첫 번째는 물리적 굶주림이고, 두 번째는 영혼의 굶주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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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이 음식을 만드는 곳이라면 서재는 영혼을 위한 요리를 만드는 곳이다. 고즈넉한 서재에서 하는 책읽기는 영혼의 위장이 말(인식)을 집어 삼키고 포만감에 이르게 하는 향연인 셈이다.

작가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굶주림을 견뎌라. 그것을 딛고 넘어서야만 비로소 작가의 길이 열린다.

■ 불확실성

수많은 직업들 중에서도 작가라는 직업만큼 미래가 불투명하고 가망 없는 직업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을 쓰는 일 자체도 어렵지만, 작가로 성공할 가능성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일만큼이나 극히 희박하다. 시시때때로 영혼을 잠식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작가 지망생들이 견뎌야 할 또다른 고통이다.

글을 쓰는 일은 개인적인 작업이다. 글을 남과 어울려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미국의 농부이자 작가인 웬델 베리(Wendell Berry, 1934~)가 쓴 <시인이 되는 법>이라는 시의 첫 행은 “앉을 자리를 만들어라”이고 두 번째 행은 “앉아라. 침묵하라”이다. 이 내용은 시인 뿐 아니라 글을 쓰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된다. 글을 쓸 때 오롯한 고립과 고독은 필수조건이다, 떠들썩한 사교 현장에서는 단 몇 줄의 글도 쓸 수 없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골방에서 오로지 자기의 기억과 상상력에만 의지해서 먼 바다로 나아가는 항해, 그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아래의 다섯 가지는 <글을 잘 쓰는 기술>이라는 책에서 말하는 작가와 고양이의 닮은 점들이다.

1. 계속 집중한다.

2. 신비주의를 고수한다.

3. 조용히 사냥한다.(즉 기록한다)

4. 독립적이다.

5. 가만히 말없이 오랜 시간을 버틴다.

최소한 글을 쓰는 동안만이라도 세상과 차단되어야 한다. 나와 세상 사이에 진공 상태가 생기고 나면 집중하기가 훨씬 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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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의 불안함

글쓰기는 기억이나 사적경험, 감정과 상상을 세상을 향해 드러내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을 자아낸다. 글을 쓰는 자들은 이 세계 안에 머무를 이유를 찾는 체류자이자 비밀 누설자이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달아나고자 히는 이들이다.

비유를 하자면, 작가란 마치 풍랑에 흔들리는 배를 운전하는 사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풍랑 때문에 우왕좌왕하며 소동을 벌이는 배위에서도 태연하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고 전해지는 어느 설화 속 사공처럼 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삶을 뒤흔드는 풍랑 앞에 갈피를 잡기는커녕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될 것이다. 가난, 고독, 헐벗음, 쓰기 전의 불안과 압박감……. 이러한 시련과 고통은 작가가 되려는 사람이 견뎌내야 하는 또 하나의 관문이다.

◯ 한 걸음 한 걸음 다만 나아갈 뿐

바위처럼 무거운 가난과 고독, 잦은 실패, 글쓰기의 괴로움, 재능에 대한 의심, 불안정한 미래는 작가의 길로 들어선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글쓰기는 마치 마약과 같아서 한 번 들어서게 되면 발을 빼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 길이 험난한 가시밭길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꾸역꾸역 나아가 기어코 작품을 써낸다. 작가의 길로 들어선 사람은 자신이 진로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20대에 문학을 하겠다고 말했더니 아버지는 “제발 그만두어라 글만 써서는 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단다.”

돌이켜 보면 수많은 실패와 어려움을 겪고 그것을 헤쳐 나온 시간이었다. 그 힘든 세월을 순진한 낙관주의와 냉소적인 비관주의 사이에서 용케도 잘 견디고 살아남았다.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았으니, 날마다 꾸역꾸역 글을 쓸 수 있었다. 아니다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날마다 꾸역꾸역 글을 썼기 때문에 문학의 길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된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고, 어쨌든 그렇게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 실패 가능성

아무런 고통 없이 휘리릭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글쓰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글쓰기란 제가 지핀 불에 스스로 몸을 태우는 다비식(茶毘式)이다. 그만큼 고통이 따른다는 얘기이다. 그것은 맨 땅에 이마를 박는 것만큼이나 무모하다. 글쓰기는 경험의 재해석, 미지와의 조우, 창조의 지평선을 찾는 대모험이다.

몇 차례 실패했다고 글쓰기를 접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하면 낙심하고, 도전을 포기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일단 시도라도 해보고 패배하는 것이 더 좋다. 무언가를 시도하면 그만큼 어딘가에 도달할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실패는 작가가 평생 안고 가야 할 숙제이다.

출판사에 보낸 원고가 거절당해 반송이 되는 일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문제이다. 그러니 원고가 반송되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라.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바로 실패를 낳는다. 실패를 즐기고, 실패에서 배워라.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자신의 길을 단박에 찾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야심만만하게 내 놓은 작품이 혹평을 받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노골적인 혹평이란 글을 쓰는 자들이 종종 겪는 ‘내적 감옥’과도 같아서 혹평을 받으면 큰 실망감과 더불어 좌절에 빠지기도 한다.

작가에겐 작가의 길이 있고, 비평가에겐 비평가의 일이 있다. 작품을 쓰는 것이 작가의 몫이라면, 비평가란 그 작품에 달라붙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조금은 성가신 존재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할 것이다.

◯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실패 앞에 주저앉는 사람과 실패에 주눅 들지 않는 사람, 전자는 거기까지가 제 한계임을 드러내지만 후자는 실패를 넘고 더 나아가 자신의 내적 가능성을 확장한다.

인생이란 길을 걷다보면 우회하거나 옆길로 새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때론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방황은 성숙에 이르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실패해도 괜찮다. 단, 그냥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실패하도록 하라. 실패를 돌아보며 그 속에서 지혜를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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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스토리텔러라고 불리는 독일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은 말한다. “작가란 그 누구보다 글 쓰는 것을 가장 어려워하는 작자들이다.”

당신만 어려운 게 아니다. 글쓰기는 유명 작가들조차 힘겨워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실패라는 토대위에 하염없이 세우는 건축물과 같기 때문이다. 실패하고, 실패하고, 실패하는 것, 그것이 글쓰기이다. 결국 성공한 사람들은 더 많이 실패하고 그 실패에서 열정과 영감을 이끌어낸 자들이다.

■ 진짜 재능

글쓰기는 언표(言表)행위이고,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자기 안의 무의식, 지각, 기억들을 드러낸다. 숨은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자기 노출로 볼 수 있다. 즉 뭔가를 쓰고 있는 사람은 노출증 환자이다. 노출증이라는 질병에 시달리는 환자! 글쓰기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병은 점점 더 심해진다. 그 자발적인 노출 때문에 사람들은 당신을 보고 용기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은 세상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병동으로 우리 모두는 거기에 입원한 환지이다. 그런데 아무도 자기가 환자라는 사실을 모른다.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러한 통찰력과 삶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재능을 갖길 원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재능에 의심을 품고 그것을 확인 받고자 한다. 하지만 재능이란 눈에 딱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한 재능은 과연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 쉽게 포기하지 않는 능력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자면, 만약 소설가나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면 문학이라는 제단 위에 젊음을 송두리째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글을 쓰겠다는 젊은이는 그의 젊음을 가망 없는 일에 탕진 하겠다고 나선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먼저 자신에게 문학에의 재능이 있는가를 진지하게 따지고 물어야 한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나 어렵고 힘든 일이다. 어떤 사람은 그 끔찍함에 놀라 재빨리 도망가지만, 어떤 사람은 그 끔찍함을 인내심으로 견뎌낸다. 고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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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판에서 자신을 소진시킨 뒤에도 다시 일어나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는다. 마치 권투 선수가 카운터펀치를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는 것처럼. 그들은 불굴이 전사다 그들은 패배에 꺾이기는커녕 패배를 통해 더욱 강해진다.

작가의 재능이란 다름 아닌 글쓰기의 고통을 견뎌내는 것, 고통 속에서도 쓰기에 대한 열정이 고갈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쓰고, 쓰고, 또 쓴다. 사자의 심장을 갖고 도전하고 또 도전한다.

◯ 타고난 작가는 없다

글쓰기는 멜랑콜리(Melancholy, 우울한, 구슬픈, 감성적인) 한 감정의 배설이나 백일몽의 분출이 아니다. 글쓰기란 전쟁이고 전투이다. 그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피츠제럴드(Scott Fitzgerald 1896~1940)나 노벨 문학상과 퓰리쳐 상을 수상한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1897~1962), 헤밍웨이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가로 불렸던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1938~1988) 같이 재능 있는 작가들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는 것은 창작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말해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글쓰기의 고통과 압박에서 살아남으려고 알코올의 환각적 기쁨에 의존하다가 중독자가 된 것이다.

헤밍웨이 역시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그리고 어떤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쓰는 일의 중요함에 대해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1. 먼저 재능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많이.

2. 다음에는 훈련이다.

3. 변하지 않는 절대 양심과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필요.

4. 지적이고 이해관계를 초월한 공평무사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5. 무엇보다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 자신의 글을 끝내는 것이다, 그럴 려면 시간이 너무 짧다.

작가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다음의 두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 이 두 가지가 글쓰기의 가장 좋은 훈련방식이자 재능의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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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작가는 타고나는 것이라고 지만, 작가로서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작가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작가로 키워진다는 게 더 적절하다. 다시 말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침 없는 훈련과 학습이 필요하다.

201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페루의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1936~)는 <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저는 우리 인간의 운명은 모태(母胎)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우연의 장난이 아닙니다.

2. 직업도 일종의 선택입니다.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각 개인의 자유 로운 선택입니다. 운명적으로 타고난 사람은 없습니다. 훈련과 불굴의 의 지가 때로는 천재 작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쓸 수 없는 100가지 이유를 대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변명하지 않는다. 오직 묵묵히 쓸 뿐이다.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모든 것은 글을 통해 말하라. 그리고 학습과 훈련을 개을리 하지 말라.

작가는 천부적 재능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 의지에 따른 선택의 결과이다. 타고난 작가는 없다. 재능은 스스로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 독창성과 창의성

스페인 작가 마누엘 바스케스 몬탈반(Manuel Vazquez Montalban 1939~)의 문장하나를 소개 하겠다. “작가들이란 지나치게 일찍, 혹은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저주받은 동물들이다.”

간혹 글쓰기가 천형이라고 털어 놓는 작가들이 있다. 작가의 삶이란 그처럼 언제 부서지고 깨질지 모를 불안이 잠재된 삶이다 그럼에도 그 ‘저주받은’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당신에게, 나는 이제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재능 이외의 것들에 대해 말해주겠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상을 ‘순진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 사람과 사물, 자연을 낯설고 눈부신 것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익숙한 것으로 바라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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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자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1882~1950) '천재의 독창성‘은 본질적으로 '보는 방식’에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사물이건 경험이건 새롭게 보아야 새롭게 인지된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낯선 시선으로 한번 바라보라! 그럼, 안 보이던 게 보인다. ‘순진’과 ‘사랑’을 담고 바라보면 모든 게 사랑할 만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아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인 동시에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편향이나 왜곡 없이 더 많이 사랑하라.

◯ 서로 다른 사물을 조합하는 능력

글을 쓰는 사람에게 필요한 또 다른 덕목은 창의성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익숙한 현실을 낯설고 신기한 곳으로 생생하게 그려내라. 익숙한 것들을 익숙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가장 나쁜 것은 관습적 사고에 기대는 것이다.

독창성은 사물이나 대상을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벗어나 다르게 보기, 엉뚱하게 보기, 낯설게 보기에서 비롯된다.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떤 학습과 어떤 정보가 필요할까? <창의적인 글쓰기의 모든 것>에 보면 참고할 만한 유용한 조언이 나온다. “창의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에 아름다운 예술, 색깔, 음악의 양식을 베풀고,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사실, 시, 시사, 생생한 풍경, 이상하고 흥미로운 경험에 자신을 노출 시킨다.”

창의성은 무엇엔가 깊이 몰입하는 동안 커지고, 풍부한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 경험, 그 발견되고 해명된 삶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강철은 뜨겁게 달궈진 쇠를 차가운 물에 식히고 다시 망치질을 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더욱 단단한 강도를 얻게 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오랜 담금질을 거쳐야 단단한 글이 나온다. 글쓰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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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재료는 작가 자신의 경험이다. 특히 실패와 시련과 같은 경험이야말로 스스로를 담금질 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된다. 삶의 경험들이 들려주는 내밀한 목소리와 뜻밖의 직관, 찰나의 번쩍임에 주의를 기울여보라. 그것들이야말로 의지나 결심을 앞질러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쓰도록 한다.

처음으로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남긴 말들, 처음으로 밀가루 반죽을 만졌을 때의 촉감, 처음으로 이성과 키스를 했던 순간, 처음으로 겪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 처음으로 낯선 곳에서 자고 깨어났을 때의 느낌……. 이러한 구체적인 경험들이 축적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쓸 때 글은 훨씬 더 생생해진다. 글쓰기란 자기 삶에 대한 발견이고 해명이기 때문이다.

◯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누구나 살면서 많은 일들, 관계들, 사건들을 겪는다. 일반적으로 직접 겪거나 행동한 것들을 ‘경험’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경험에 대한 넓은 개념이다. 반면, 글쓰기에서 경험이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것에 관여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대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는 ‘경험이 삶이고 삶이 곧 문학’ 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해명된’ 삶, 따라서 실제로 체험된 유일하게 진정한 삶, 그것이 문학이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경험을 쓰고, 자신의 글처럼 살라고 충고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글쓰기이다. 거짓말에 현혹되지 않고 실제 삶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단순한 열정>이나 <탐닉>은 바로 그 바탕위에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삶과 글쓰기 사이에는 투쟁이 있다. 그들은 서로를 끌어당기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격렬하게 밀어내고 배제하기도 한다. 이 상호작용으로 압력과 긴장이 파생되는 것이다. 작가라면 그것에 눌리지 않고 글쓰기를 줄길 줄 알아야 한다. 글쓰기는 한마디로 ‘웃으면서 하는 전쟁’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치르는 피와 종이와의 전쟁, 그 전쟁이란 곧 작가로서의 관습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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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과 사유에서 벗어나 진정한 독창성을 얻기 위한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체적인 경험에 귀를 기울여라. 경험이 만들어 내는 삶의 이야기, 경험이 들려주는 지혜의 말들, 풍부한 독서를 통한 다양한 간접 경험 이런 것들이 글쓰기의 아주 중요한 자산이다.

◯ 이런 목소리를 어찌 외면할 수 있으랴

작가들은 단순히 멋진 말과 좋은 문장을 찾는 게 아니다. 그들은 사물, 이미지, 경험들이 자신들에게 들려주는 내밀한 목소리에 언제나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것을 옮겨 적을 뿐이다. 물론 그것들은 쉽사리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 내밀한 것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이 바로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무지와 맹목에서 나와 자기 삶의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가게 만든다. 누구나 제 삶의 경험으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세계는 이야기의 날줄과 씨줄로 짠 피륙이다. 인류는 이야기들 속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인류는 이야기 공동체이다. 이야기와 세계는 상호 반영하며, 메아리를 울리듯 상호 반향한다.

■ 백지의 공포

글을 쓰는 자들은 망망대해와 같은 ‘백지’라는 바다에 투신한다. 글은 피이자 정신이다. 그것을 백지에 내던짐으로써 쓰는 자는 매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뭔가를 쓰는 것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고, 본질적으로 죽음과도 맞물린다. 쓴다는 것은 제안의 무엇인가를 밖으로 내 보내는 행위이다. 한 몸을 존재했던 것들이 쓰는 순간 분리가 이루어진다. 제 몸에서 나온 똥, 그것이 바로 글이다. 글쓰기는 ‘배설’이라는 넓은 환유 속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내면의 배설행위 앞에서 공포를 느낀다. 작가란 결국은 그것을 극복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면류관이다. 그리고 이 공포의 실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압박감”이다.

“말 할 때는 오로지 말 속으로 들어가라. 걸을 때는 걷는 그 자체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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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죽을 때는 죽음이 되어라.”라고 얘기한 어느 작가의 표현이 생각난다.

쓰면서도 계속 멈칫거리고, 중도에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글쓰기에 대한 자기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글을 쓰면서도 계속해서, ‘내가 제대로 쓰고 있는가?’ 라고 자문한다. 그러다 온갖 회의와 자기 불신에 사로잡혀 집중력을 상실한다. 자신을 믿어라 자기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계속 적어나가라. 글이 형편없고 엉망이라고 느껴질 때조차 계속해서 써나가라. 멈추지 않고 계속 써나가기, 이게 백지의 공포를 넘어서는 방법이다.

◯ 글쓰기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방법

전 세계에 글쓰기 붐을 일으킨 나탈리 골드버그(Natalie Goldberg, 1948~)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손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당신 인생의 모든 면모를 기록하고 심장부로 뚫고 들어가도록 손을 계속 움직여야 한다.”라고 말한다. 골드버그가 제안하는 글쓰기 연습의 지침은 다음과 같다.

1. 손을 계속 움직여라.

2. 마음 닿는 대로 써라.

3. 보다 구체적으로 써라.

4.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라.

5. 구두점과 문법은 나중에 걱정하라.

6. 당신은 최악의 쓰레기라도 쓸 자유가 있다.

7. 급소를 찔러라.

백지의 공포를 넘어서는 좋은 방법은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는 것이다. 날마다 쓰는 것이 습관이 되면 백지 앞에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 쩔쩔 매는 일은 사라진다. 날마다 써라! 그러면 백지 앞에서 머뭇거리거나 공포를 느끼지 않고 바로 글쓰기로 통하는 무의식의 통로가 열릴 것이다.

글 쓰는 일에 슬럼프가 찾아오면 “한동안 글쓰기를 중단하라. 그리고 내면에 집중하라. 많이 먹고, 충분히 자고 산책하고, 자연을 접하고, 육체노동도 하라. 즉 일상으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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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과 칩거

40년 동안 시, 소설, 평론을 쓰고, 인문학적인 주제들에 대한 글을 썼다. 날마다 뭔가를 읽고 쓰는 일을 쉰 적이 없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내 경험에 비추어 말한다면, 그것은 기꺼이 고독과 칩거는 감수할 수 있는 용기이다.

일찍이 어느 시인은 말했다. “인간은 누구나 그 마음의 밑바닥에서는 고독하다. 태어날 때, 우리는 울부짖는다. 그 부르짖음은 고독의 절규다.” 인간 고독의 한 측면인 이 고독을 모른다면 그리고 고립에 처하지 않고서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쓸 수가 없다.

글을 쓰고자 한다면 고독 속에서 우주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감수성을 연마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영혼이 고독할 때만이 우주의 불가사의한 힘이 그 속을 흐를 수 있고.”그 순간에 정신적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

글쓰기에는 왕도가 없다. 뭔가를 써야 한다면, 그것을 쓰면 된다. 머릿속에서 아무리 많은 글을 썼다 지워도 글로 풀어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쓰지 않고 피해갈 길은 없다. 누가 대신할 수도 없다. 무조건 앉아서 종이를 놓고 무언가를 써야 한다.

글쓰기는 일차적으로 자기만족과 삶의 충만감을 위한 것이다. 글쓰기는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과 행복과 위안을 준다.

◯ 나는 이렇게 고독을 만들었다

프랑스 현대 문학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1914~1996)는 글쓰기가 삶을 충만하게 하고, 자신을 매혹시키는 유일한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뒤라스는 “고독을 느끼던 그 시기에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바로 글을 쓰는 것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작가의 고독은 두 겹이다. 하나는 작가 자신을 둘러싼 고독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글쓰기 자체에 내장된 고독이다. 작가란 그 두 겹의 고독에 둘러싸여 글을 쓰는 존재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말하자면 익숙한 장소, 익숙한 사람, 익숙한 사물들에게서 멀어질 때 집중이 더 잘 되는 것 같다. 그렇다 글을 쓰려면 침묵과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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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 유폐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자기 자신에게 더 잘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다. 즉 고독과 칩거는 글쓰기를 부양하는 가장 기초적인 자양분이라 할 수 있다. 밀려드는 고독을 두려워하거나 홀로 내던져진 듯한 외로움을 힘들어하는 사람은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 실재의 사막으로 가는 길

작가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사막에 가둔다. 메마른 볼모의 땅이자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고독과 유폐의 공간 말이다. “문학의 존재 근거는 글쓰기 자체에 있다”고 본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가 <도래할 책>에서 한 말이다.

한 권의 책은 메마른 고독을 견디고, 공허와 불확실함에 맞서 싸워서 얻은 전리품이다. 떠들썩한 축제 따위는 잊어라. 은둔하고 칩거하라. 고독과 마주하라. 그래야만 쓸 수 있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수도자와 같은 금욕 상태를 유지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해 사막을 건너야 한다.

좋은 작품, 좋은 책들은 거져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미친 듯이 몰입하고, 모든 시간과 땀을 다 바쳐 헌신하고 죽을 듯이 매달려야만 열리는 문이다.

미국의 조각가 앤 트루트(Ann Trud, 1921~2004)가 남긴 다음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예술가로서 평생을 사는 것의 가장 힘든 부분은 자기 자신의 가장 사적인 감수성에 의거해서 꾸준히 작업하도록 자기 자신을 채찍질해야 하는 엄격한 자제력에 있다.” 잊지 마라. 꾸준함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채찍질해야 하는 엄격한 자제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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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미로

◉ 글쓰기에서 마주치는 문제들

■ 작가의 연장통

글을 쓸 때에는 연장통이 꼭 필요하다. 이 연장통에는 명사, 동사, 부사, 형용사, 의성어, 의태어, 물음표, 느낌표, 구두점 등이 들어 있다. 그리고 사전과 종이와 펜이라는 공구도 들어 있다. 특히 사전은 글을 쓸 때 항상 곁에 두어야 하는 필수품이다. 이 연장통 안에는 세상의 온갖 신비와 비밀 수수께끼까지도 담을 수 있다. 시들어버린 꽃, 말라버린 강, 빈민의 탄식, 억울한 죽음, 패배의 씁쓸함, 낡아서 사라지는 물건들, 지평선과 수평선, 날개가 꺾여 날지 못하는 새, 노래하는 맹인, 곰팡이가 슨 빵, 멸망한 나라들 ……. 따위와 같이 갖가지 소재도 넣을 수 있다.

즉 글쓰기의 연장통에는 어휘들, 문법, 수사법, 다양한 전고(典故 : 전례와 고사를 아울러 이르는 말)들 뿐만 아니라 신화, 전설, 민담, 설화와 같이 상상 또는 직관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재료들을 담을 수 있다.

◯ 쉬운 글과 풍부한 표현 사이

스티븐 킹은 글을 잘 쓰려면 연장을 골고루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연장통 맨 위칸에 어휘를 넣으라고 강조하는 데. 이는 어휘가 글쓰기에서 기본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 흔히 직면하는 어려움 중 하나가 가용 어휘의 부족이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어휘를 일부러 골라 쓰지는 마라. 글에는 남들이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써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버려라.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쓰는 평이하고 잘 다듬어진 어휘 대신에 ‘어렵고 특별한’ 어휘를 고안하느라 머리를 싸맨다.

스티븐 킹은 쉬운 말을 두고 어려운 말을 골라 쓰는 태도를 “애완동물에게 야회복을 입히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자연스럽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짓이라는 얘기다. 꾸미지 말고 느낀대로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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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법이라는 질서

문장을 어렵게 써서는 안 된다. 꼬아서도 안 된다. 어렴풋하게 써서도 안 된다. 단도직입적으로 사실들을 투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에두르지 말고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풀어 놓아야 한다.

문장은 기본적으로 명사와 동사로 이루어진다. 이 두 요소가 조합되어 하나의 문장이 만들어 지는데, 무엇보다 각각의 낱말들이 잘 조합되어야 한다.

스티븐 킹은 수동태야말로 가장 나약하고 우회적인 수사법이니 그것을 피하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하루가 끝날 저녁 무렵에’ 따위의 관용구를 쓰는 사람은 저녁을 굶겨라.”, 지옥으로 가는 길은 부사로 뒤덮여 있다.“처럼 귀담아들을 만한 충고를 전한다. 부사나 관용구를 남발하는 것은 독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봐 덧붙이기 마련인데, 이런 쓸데없는 근심이 ”형편없는 산문의 근원“이라고 경고한다.

문장에서 형용사나 부사를 피하라! 접속사도 빼버려라! 그것들은 마음에 쓸데없는 근심과 허위의식이 있음을 드러내는 일일뿐이다. 생략해도 문장의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 것들은 굳이 없어도 그만인 잉여이다. 간결함을 헤치는 군더더기를 피하고 확실하고 간결하게 표현하라. 그것이 독자를 사로잡는 글쓰기의 제1원칙이다.

■ 언제든 졸작을 쓸 수 있는 용기

무조건 버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러다 진력이 나면 더 이상 한 줄도 못 쓰는 최악의 상황까지 끌고 갈 수 있다. 글이 잘 안 풀린다 싶으면 차라리 책상 앞에서 일어나라. 당장에 바깥으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셔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염없이 산책을 하라. 서점에 나가 새로 나온 책들을 뒤적이거나,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라. 시장에 가서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끼여 이것저것 구경해 보는 것도 좋다. 글쓰기 외의 일들에 몰두 하면서 쓰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하라. 그러다보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질뿐 아니라, 글을 쓰고 싶은 의욕도 다시 생긴다.

◯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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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듯이 문장을 만들어 쌓는 것이다. 문장을 만드는 벽돌이란 곧 생각의 조각들이다. 이 생각의 구조적 배열을 통해 하나의 문장이 탄생한다. 매혹적인 문장은 구조화가 잘된 생각이 매끄러운 언어로 표현될 때 나온다. 즉 문장을 이루는 언어의 선택과 배열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 완벽한 질서는 바로 영감과 명확한 사고에서 나온다.

글은 내면의 동기가 강력할수록 더 잘 써진다. 대개의 글쓰기는 자기 생각을 분출하는 것이다. 타율이 아니라 자율일 때, 즉 독자적이고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행위일 때 더 즐겁고 보람도 더 크다. 또 자기 생각을 그대로 분출할수록 여러 상상과 영감이 밀려들어온다. 글쓰기가 완전한 몰입에서 이루어질 때 마치 최면에 걸린 듯 몽롱해 지면서 무의식까지 활짝 열리는데, 그 순간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글쓰기를 밀고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를 백지 위에 거침없이 쏟아내는 거다.

이미 쓴 것들은 읽고 싶더라도 참아라. 쓰는 걸 멈추는 순간 집중했던 마음이 흐트러지고 글쓰기의 리듬 역시 깨져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 내 안의 상처받은 용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졸작이라도 ‘쓸 수 있는 용기’이다. 졸작은 누구나 쓸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써라. 느끼는 대로 솔직하게!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글을 쓰지는 마라. 칭찬받기 위해서도 쓰지 마라. 오직 피흘리기 위해 써라. 자신의 치부, 결점, 상처,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 자기에게 치명적인 바로 그것을 써라. 당신이 모르는 당신을 드러내도록 하라. 무의식 속에 웅크리고 있는 자아.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 숨은 ‘상처받은 용’을 바깥으로 끌어내라. 밖으로 나온 그 짐승은 용틀임하며 크게 분노해 당신을 할퀴려 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고 아플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처받은 용’은 세상 밖으로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내면을 응시할 수 있으며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

글쓰기가 좋은 첫 번째 이유는 자기 치유와 자기 정화에 있다.

문장은 간결할수록 좋아진다. 거기에 ‘힘’을 불어넣으면 문장에 생기가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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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런 문장을 만드는 ‘힘’은 진실에서 나온다. 진실은 나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감화하게 만든다. 내면에서 들리는 진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진정한 나를 찾아가도록 도와주는 글쓰기. 글쓰기의 힘은 그 진실성에 숨어 있다.

■ 말의 소리와 리듬

글쓰기의 1차 재료는 당연히 언어이다. 언어 없이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먼저 언어를 알아야 하고 잘 다룰 줄도 알아야 한다. 철자법이나 문법 따위와 더불어 다양한 어휘들을 알아야 하며, 언어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있어야 한다. 거기에 더해 좋은 언어적 감성 또한 갖춰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좋은 글을 쓰기 위한 기본적 태도가 된다.

아울러 언어가 갖고 있는 소리나 울림, 즉 청각적 요소에 민감해야 한다. 언어가 내는 소리에 리듬을 실어서 구사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좋은 문장들은 음악적인 리듬이 살아 있어서 소리 내서 읽으면 마치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이 즐겁다. 작은 문장 하나라도 리듬을 살려 표현하면 줗은 글이 된다.

SF·환상문학의 거장인 어슐러 K. 르 귄은 글쓰기 노하우를 <글쓰기의 항해술>이라는 책에 담아냈다. 그 책에서 그는 “아이와 같은 방식으로 언어의 소리를 사랑하라” 라고 말한다.

말은 의미와 함께 소리를 전달한다. 좋은 문장은 음악적이고 인상적인 말의 결합이다. 말들이 내는 “생생하고, 가지런하고, 유려하고, 강인하고 아름다운 소리들”은 문장을 훨씬 윤택하게 만든다. 더 좋은 문장, 더 매혹적이고 살아 있는 글을 쓰려면, 자신이 쓴 글을 듣는 ‘“마음의 귀”를 먼저 훈련하라 말을 잘 다루는 법은 글을 쓰기 위해 연마해야 할 중요한 기술이다. 단순히 글자를 눈으로 읽는 것에 그치지 말고 소리내어 읽어 보라.

◯ 좋은 글은 리듬을 타고 온다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문장뿐만 아니라 각 문단 간에도 리듬이 필요하

다는 사실이다. 문단은 문장들의 한 묶음으로 하나의 생각, 하나의 주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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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는 단위이다. 글의 흐름이 달라지는 곳에서는 꼭 문단을 나누어야 한다.

그렇다면 문단 나누기는 왜 필요할까? 바로 독자에게 휴식과 사유의 여백을 만들어주기 위함이다. 독자는 문단이 바뀔 때마다. 잠깐씩 쉬면서 앞의 내용들을 되새김질 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

스티븐 킹 역시 글을 쓸 때 문단이라는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는 지도를 가지고 글을 쓴다고 말한다. 형식과 문체라는 기본적인 요소들에서 더 나아가기 전에, 우리는 문단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단은 문장 다음에 오는 구성의 한 형식이다.

글쓰기란 문장의 예술이자 기술이며 제작이다. 누구나 훈련을 쌓고 연습을 하면 좋은 문장을 쓰는 법을 익힐 수 있다. 단, 그것을 배우는 데는 일생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다 할지라도 지레 포기하지 마라. 글쓰기는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공부요 그것을 배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일이다.

■ 어쩌다 전업 작가가 되어

‘작가’라는 직업은 삶의 단단한 토대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작가’라는 직업에 환상을 품고 다양한 상상을 한다. 사람들은 작가가 되는 것을 ‘비밀스러운 집단의 일원’이 되는 혹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행권을 얻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비밀스러운 집단에만 들어가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문장들이 줄줄 나온다고 상상한다. 또 글을 쓰기만 하면 부와 유명세가 뒤따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것은 상상일 뿐이다. 현실은 상상과 많이 다르다.

◯ 쓰는 것만 빼면 괜찮은 직업

글 쓰는 일은 중노동이다. 책상 앞에 앉아 종일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려 글을 쓴다고 생각해보라. 한 작가는 그 일을 이렇게 말한다.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인 채 종이나 화면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단어는 차례로 등장한다. 그 중에 몇 단어는 지우고, 때로는 이미 써 놓은 단어를 쳐다보기도 하면서 한 줄 한 줄 써 나간다. 작가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어떤 작가는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작가란 꽤 괜찮은 직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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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단, 쓰는 것만 빼 놓는다면!” 그만큼 쓴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나는 열세 살 때 처음으로 시를 썼고 열다섯 살 때 첫 소설을 완성했다. 그 나이에 글을 쓴다는 게 뭔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글을 쓴다는 것이 자신의 본성과 축적된 경험의 실을 한 가닥씩 풀어내는 일임을. 사실 풀리는 것은 실이 아니라 내 육신이라는 것을 그때는 정말 몰랐다. 내 몸 - ‘살’일뿐만 아니라 ‘피’일지도 모른다 - 에서 자아낸 실로 스웨터(다른 ‘몸’)를 짤 수 있다는 것도.

문장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호응 속에서 발효된 경험들을 쓰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자기가 살아온 만큼만 쓸 수가 있다.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글쓰기는 자기 피를 찍어 한 자 한 자 적어나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 기다림은 역시 힘이 세다

작가의 삶은 흔히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한다. 무언가를 쓰는 것에 앞서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독서와 발견의 시간을 통해 본질을 통찰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한 알의 씨앗이 발아되기 위해 기다려야 하듯이 하나의 문장, 하나의 아이디어가 착상되길 기다려야 한다. 문장은 부재의 숲에서 싹을 틔우는 어린 나무와 같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낸 자만이 ‘작가’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현실의 지옥을 벗어나 빛 속을 뚫고 나가는 일과도 같다.

내게 글을 쓰는 이유를 묻지 마라. 그것은 강물에게 왜 흐르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 날마다 글을 쓴다는 의미

글 쓰는 사람에게 책상이 반드시 필요할까? 흔히들 책상을 필기구, 노트, 컴퓨터 따위와 더불어 글쓰기의 필수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스티븐 킹은 소설가로 성공하기 전 세탁소 직원으로 일하며 그곳에 있는 아동용 책상에 앉아서 첫 작품을 썼다. 자신의 침대에 엎드려 쓰는 것을 좋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혼잡한 카페의 구석자리에서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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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좋아하는 이도 있다.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여류작가 제인 오스턴(Jane Austen, 1775~1817)은 부엌 식탁에서 작품을 썼다고 전해진다.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자신만의 책상이 있는 편이 더 좋은 것 같다. 특히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자 한다면 인체 공학적으로 잘 설계된 책상과 의자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장기간의 작업에도 무리가 없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 또 책상은 사전과 참고 도서들, 관련된 자료들을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널따란 게 좋다.

글 쓰는 사람에게 책상은 가구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책상은 글쓰기를 위해 육체와 영혼을 다 바치는 장소이다.

신기하게도 날마다 일정한 시각에 책상 앞에 앉는 것 자체만으로 글쓰기의 내적 동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시간을 정해 놓고, 그 시각 책상 앞에 앉아서 글쓰기를 시작해 보라. 하루에 얼마나 쓸 것인지, 분량을 정해 습관적으로 쓰는 거다. 작가들은 이것을 날마다 반복한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단편 <판결>에 보면 이런 주석이 달려있다. “밤에… 10시에 쓰기 시작하여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쉬지 않고 단숨에 <판결>을 써나갔다.” 규칙적인 글쓰기 습관으로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새벽에 일어나서 정해 놓은 시간 까지는 책상 앞에 앉아 대여섯 시간은 쓴다고 한다. 저명한 비평가 겸 편집자인 도러시아 브랜디는 <작가 수업>에서 이렇게 말한다. “4시에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으면 4시에 글을 꼭 써야 한다.! 4시에 대화에 깊이 빠져 있다면 양해를 구하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 작가는 글로 스스로를 증명한다.

글쓰기는 책상 앞에 앉아서 하는 노동이다. 또한 글쓰기는 삶의 거친 바다에 뛰어드는 모험이요, 육체의 수고가 동반되는 가차 없는 노동이다. 생의 핵심을 꿰뚫으며 직격(直擊)하는 노동에의 헌신과 용기 없이는 작가로서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쓸 때 머리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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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을 바로 잡아준다. 머리가 아니라 몸을 쓰라고! 글쓰기는 몸을 써서 하는 육체노동이다. 그 노동으로 비루한 문장들을 빚어내는 것이다.

글 쓰는 일에서 법적 노동 시간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애초부터 글쓰기는 법적 보호라는 울타리 바깥에 존재하는 잉여의 노동이다.

◯ 글쓰기의 출발은 규칙

책을 쓴다는 것은 꿈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작가는 여기가 아니라 저기, 현실이 아니라 꿈을 바라보고 가는 자이다. 즉 발은 현실을 내딛고 있지만 머리는 구름 속에 떠 있다.

무엇인가를 쓰는 사람은 꿈의 시간을 살며, 아직 살아보지 못한 미래 속으로 진입한다. 그들은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결코 그 일을 미루지 않는다. 만일 작가로서 살기로 결심했다면 반드시 자신과 약속한 시각에 책상 앞에 앉아라. 오늘 정한 시각에 다른 일이 생겨 글 쓰는 일을 다음 날로 미룬다면, 다음 날도 그 시각에 글을 쓴다는 보장이 없다. 다음 날로 미뤄야 할 이유가 생기면, 또 그 다음 날도 핑계가 생기기 마련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분량을 써내는 것, 그것이 현실과 이상 속에서 본인의 실체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힘이다.

■ 일기. 나와 대면하는 연습

일기는 그날 있었던 일을 서술하는 글로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으로 고정시키는 것이다. 매일 일기를 쓰다보면 마음과 욕구가 이동한 자취를 추적해 볼 수 있고 내 안의 나와 소통할 수 있다.

큰일이나 사건 위주로 쓰지 말고, 가장 하찮은 것,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일들, 찰나에 스쳐지나가 채 의미가 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써보는 거다. 솔잎 사이로 비껴들어와 땅에 떨어진 햇빛이라든가 휘리릭 떨어져 발 밑에 구르는 단풍잎, 또는 구상나무 아래에 줄지어 기어 들어가는 개미들 같은 소재 말이다. 하찮아 보이지만 모든 사물들은 그 안에 자기 얘기를 꽁꽁 숨기고 있다. 그 얘기를 물고 늘어져 풀어내보라.

◯ 세상을 바꾸는 삶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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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특별히 정해진 형식이 없는 글쓰기 이다. 그저 자유롭게 쓰기만 하면 된다. 독백의 형식으로 써도 되고, 가상의 인물과의 대화 형식으로 써도

괜찮다. 자기가 편한 형식으로 써나가면 된다.

자기 신변에 일어난 일들을 중심으로 적는 일기는 시적인 영역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공적 영역을 완전히 배제할 필요도 없다.

일기는 내면의 편력과 함께 한 개인의 의식 단면을 통해 역사를 동시에 보여준다. 일기가 하루치의 자서전이라면 나날의 일기들이 모인 일기장은 한 사람의 역사로 기억되는 어엿한 기록물이 될 테다.

일기를 씀으로써 자기가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가를 더 잘 알 수 있다. 사람은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 완결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이다. 방향 없이 내딛는 나날들 같지만 하루하루는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일기는 아무런 악압 없이 내밀한 생각을 털어놓는 의례이자 자신과 소통하는 최초의 글쓰기이다. 특히 작가에게 일기는 글쓰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자기 수련의 장이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일기를 꾸준히 써라.

■ 떠나고 싶은 날의 글쓰기

문득 여행을 떠나고 싶은 날이 있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속에서 생각을 자극하고 그 전에 보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며 영혼을 풍성하게 채우고 싶은 그런 순간. 여행은 감각의 열림이고 경이를 통해 얻는 기쁨이며, 장소에 대한 숭고한 경험이다.

프랑스가 낳은 걸출한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 1854~1891)의 시구를 빌려 말하자면, 여행자란 ‘바람구두’를 신고 세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이다. 돌아다니는 만큼 삶의 지평은 확장된다. 또 다른 프랑스 시인인 폴 발레리(Paul Valery, 1871~1945)는 이렇게 썼다.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 생겨나는 틈에 있다.

여행은 도시와 도시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를 이어주는데, 그 사이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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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가 말한 “정의되지 않는 방향 전환의 거처”라고 불렸던 곳일 게다. ‘사이’의 여행이야말로 여

행이 가진 백미이다. 사람들은 그 사이를 통과하며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을 한다. 이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나아가면서 ‘이곳’에서 ‘저곳’을 사유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라!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다. 떠나보면 알게 된다. 여행이 곧 글쓰기임을.

작가 알랭 드 보통의 말을 옮기자면. “여행은 생각의 산파이다. 이상하게도 여행을 떠나면 감았던 눈이 떠지고, 꽉 막혔던 머리가 열린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창의적인 생각들이 마구 떠오른다. 아마도 관성의 세계에서 몸과 마음이 떨어져 나온 효과일 것이다. 다른 세계, 다른 장소에서 흘러들어온 여행자는 제 앞에 놓인 현실을 의심하고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여행자는 본질적으로 이방인이다.

<길 위에서>의 작가 잭 케루악(Jack Kerouac, 1922~1969)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길이야말로 삶인 것을.”

◯ 여행을 하면 얻게 되는 것들

길을 잃고 낯선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라. 여행의 첫 번째 소득은 습관화된 삶의 양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낯섦 때문에 영감이라는 불꽃이 켜질 것이다. 더불어 익숙한 관습적 이해와 사유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사고나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러니 길 잃기를 두려워하니 마라. 길을 잃었다면 오히려 그것을 세계의 또 다른 측면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라. 현명한 여행자는 모든 사물을 마치 세상을 처음 만난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다.

현명한 여행자는 여행을 통해 인지적 지평과 감성을 한껏 넓힌다. 여행은 세계라는 책을 펼쳐 읽는 것이다. 즉 책읽기란 ‘떠나지 않고 하는 여행’이다. 세계가 한 권의 책이라는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는 “독서가 여행이고, 여행은 독서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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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책읽기, 글쓰기 모두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런 까닭에 이 모든 행위는 그 여정이 어떻든 간에 궁극적으로는 자

신의 내면과 마주치기 위한 여정이다.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면 망설이지 말고 떠나라. 이 세계에 더 깊숙이 파고들고 그 속에서 ‘나’를 찾아라. 낯선 세계의 길들이 당신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고 권태의 나락에서 건져내어 영감을 보태줄 것이니!

2018. 3. 25

- 제 1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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