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행복(2)

2018. 5. 8. 14:38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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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행복(2)

■ 이해인 지음

4부 기다리는 행복

<기다리는 행복>

온 생애를 두고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이 모습은 순수한 옷차림의 기다림입니다. 겨울 항아리에 담긴 포도주처럼 나의 언어를 익혀 내 복된 삶의 즙을 짜겠습니다. 밀물이 오면 썰물을, 꽃이 지면 열매를, 어둠이 구워내는 빛을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나의 친구여, 당신이 잃어버린 나를 만나러 더 이상 먼 곳을 헤매지 마십시오. 내가 길들인 기다림의 일상 속에 머무는 나. 때로는 눈물 흘리며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오랜 나날 상처받고도 죽지 않는 기다림,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나의 소임입니다.

■ 책방 골목에서

1960년대 내가 여중을 다니던 시절, 서울 한복판에도 헌책방이 많았고 대여점 역할까지 해 주어 틈만 나면 책방을 드나들었다. 나는 친구들과 세상의 좋은 책은 이미 그때 다 읽은 것 같기도 하다. 우리에게 열심히 책을 빌려주던 그 책방 주인들, 함께 책방에서 놀았던 그 친구들은 다 어디에 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작가에게 직접 편지를 쓰는 일은 처음이라며 대전에 사는 어느 독자가 편지를 보냈는데 그 안에 네 잎 클로버로 만든 카드가 하나 들어 있었고 그는 그 편지 끝에 그 카드에 대한 설명을 아래와 같이 써 보냈다.

수녀님 책에서 본 <작은 기쁨>이란 시가 너무 좋아서 시집을 사고 싶어 중고 서점에 가게 되었습니다. 책이 여러 권 있었는데 <작은 위로>라는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수녀님 시는 따뜻해서 제게 위로가 될 것 같아서 골랐는데 이게 웬걸 책을 펼치니 네잎 클로버가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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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수녀님께서 내게 주시는 행운이려나?’ 하며 펼쳐 보았는데 네 잎 클로버가 두 개나 있더라고요. ‘이 시집을 판 사람이 네 잎 클로버를 일부러 넣고 판 걸까? 네 잎 클로버가 있었던 것을 몰랐던 것일까?’ 하고 신기해하며 시집을 사 왔어요. 나는 위로를 받고자 책을 사러 것이었는데 오히려 행운을 더 얻고 돌아왔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습니다. 제가 받은 이 행운이 해인 수녀님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누어 드리고 싶어요.

수녀님, 오랜만에 편지를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평안하세요.

가끔 가족 친지들이 중고 서점에서 구한 것이라며 내 책을 보내온 일도 있 었는데 그중엔 내가 작고한 어느 교수나 작가에게 서명해 보낸 것들도 있고 책 주인이 개성 있는 낙서나 밑줄 친 것들도 눈에 띄어 나는 남다른 감회를 지니고 그걸 읽어보곤 했었다. 이번에도 내가 사 온 열권의 책을 찬찬히 열어보며 책만이 기억하고 있을 경험을 제삼자로서 이것저것 상상해 보는 즐거움을 누렸다. 1983년 4쇄를 찍은 나의 두 번째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 첫 장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별 양, 너를 위해 준비하진 않았지만, 영혼이 맑은 한 분의 글귀가 너의 영혼 또한 맑아지도록 하시길. 1983. 9.’

1994년에 초판을 찍은 내 두 번째 산문집 <꽃삽>에는 산 사람의 멋진 사인과 함께 ‘추석을 보내고 가을의 문턱에서’라는 글귀가 들어 있다.

좋은 책에서는 좋은 향기가 나고 좋은 책을 읽은 사람에게도 그 향기가 스며들어 옆 사람까지도 행복하게 한다.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모두 이 향기에 취하는 특권을 누려야 하리라. 아무리 바빠도 책을 읽는 기쁨을 꾸준히 키워나가야만 우리는 속이 꽉 찬 사람이 될 수 있다. 언제나 책과 함께 떠나는 여행으로 삶이 풍요로울 수 있음을 고마워하자.

■ 모르는 이웃과의 친교

사실 본래의 내 성격은 좀 차가운 편이고 붙임성도 없이 새침한 편이어서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기 힘들다고 했다. 글에서는 사랑을 노래하면서 실제로 보면 냉정하다고 비난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힘들어도 사람들에게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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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가기로 조금씩 더 노력하고 상대방의 입장에 맞추어 말하고 행동하는 이해의 폭을 넓혀가니 요즘은 만나는 이마다 책에서 느끼는 이미지와는 다른 반전이고 파격이라며 “이렇듯 털털하고 소박한 분이신 줄 몰랐어요”라고 한다.

전교생이 삼십 명뿐인 어느 시골 중학교 교사가 국어 시간에 나의 시를 공부하는데 열한 명이 전부인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나와 통화를 하고 싶어 한다기에 기꺼이 들어 주었다. 학생들은 나에게 시는 언제 쓰느냐. 녹차를 좋아하느냐 왜 수녀가 되었느냐 편지 보내면 답을 해 주느냐 등등 물어봤고 나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이들이 너무도 좋아했노라며 교사는 몇 번이나 문자를 보내왔다. ‘오늘 정말 행복한 날이에요, 애들이 이렇게 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어요’ 라고.

부산의 어느 초등학교 내의 ‘함지박’이라는 독서 동아리 주부 등 여덟 명이 나의 글방을 방문하였다. 함께 시를 읽고 담소도 나누며 도서 사인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90분 동안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

‘씩씩하고 천진하신 웃음과 미소가 인상적이었어요.’

‘따뜻하고 평온한 시간을 선물로 받아갑니다.’

‘마음이 부자가 된 것 같아요.’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이 방명록에 써놓고 간 글들이다.

수도자라는 이유만으로 내 인간적인 부족함과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벗이 되고 애인이 되고 가족이 될 수 있는 특혜, 오랜 세월 시를 쓰는 덕분에 모르는 이웃을 많이 알게 되고 때로는 가족 못지않은 우정의 친교가 이루어지는 신비, 이 모두를 선물로 받아 안으며 나는 새삼 행복하다. 사랑받는 그만큼 더러는 오해도 받고 구설에 오르고 예기치 않은 힘든 일이 생길 때도 없진 않지만 이미 내가 받은 선물만으로도 나는 모든 어려움조차 축복으로 받아 안으리라 기쁘게 다짐해 본다.

■ 비워내고 단단해진 저 조가비처럼

나의 글방에는 내가 바닷가 산책을 할 때마다 주워 온 조가비들이 많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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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친지들이 여행 중에 얻어다 준 다양한 모양의 조가비 외에도 조가비 무늬가 들어 있는 편지지, 가방, 초, 그림책 등이 많다 보니 자그만 선물의 집을 연상케 한다. 조가비를 보면 바다에 나가지 않고서도 바닷가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되고 어머니나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주우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특히 근래에는 바다가 가까운 수녀원에서 사는 행복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새롭게 감사하고 있다. 내가 바다를 본 것은 여중 3학년 시절 겨울, 부산 가르멜 수녀원에 계신 언니를 면회 갔을 때이다.

넓고 푸른 바다는 한평생을 수도자로 살고 싶다는 꿈을 키워주었고, 삶의 기쁜 순간은 물론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찾아와 나를 힘들게 할 적에도 늘 곁에서 내 좁은 마음을 조금씩 넓혀주며 힘과 위로가 되어주곤 했다.

수도 생활에 관심을 두고 우리 집을 방문하는 고운 소녀들과 광안리 바닷가 데이트를 하면서 바다에 대한 시를 읊어주고 조가비도 주워주며 덕담을 나누는 일은 젊은 날 나의 주된 일과 중의 하나였다. 더러는 다른 길을 가기도 했으나 그 시절 함께 바닷가를 거닐었던 앳된 소녀들이 지금은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어 각자 수도공동체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은 게 나로선 신기하고도 고마울 뿐이다.

산으로 오르는 언덕길이나 층계, 베란다에서도 바다가 보이는 수녀원에서 벌써 반세기를 살았다. 오늘도 새벽에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 바다를 보러 멀리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휴가를 가는 이들도 있는데 나는 걸어서 가는 거리에 바다가 있으니 늘 휴가를 온 것 같은 느낌도 새롭다.

열여섯 살에 처음으로 / 환희의 눈물 속에 / 내가 만났던 바다 //

짜디짠 소금물로 나의 부패를 막고 / 내가 잠든 밤에도 파도로 밀려와 /

작고 좁은 내 영혼의 그릇을 / 어머니로 채워주던 바다 //

침묵으로 출렁이는 그 속 깊은 말 / 수평선으로 이어지는 기도를 /

오늘도 다시 듣네 //

낮게 누워서도 / 높은 하늘 가득 담아 / 하늘의 편지를 읽어주며 /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 내게 영원을 약속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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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사제 푸른 시인을 / 나는 죽어서도 잊을 수 없네

- 이해인 <다시 바다에서> 전문

■ 나의 ‘국수 사랑’ 이야기

삶은 하나의 축제라는 말을 / 몇 번이고 되풀이 하며 / 잔치 국수를 먹다보면 / 외로운 이웃을 불러 모아 / 큰 잔치를 하고 싶네 / 우정의 길이를 더 길게 늘려서 / 넉넉한 미소로 국수를 삶아 대접하고 싶네 //

쫄깃쫄깃 탄력 있는 / 기쁨과 희망으로 / 이웃을 반기며 /

국수의 순결한 길이만큼 / 오래오래 복을 빌어주고 싶네

- 이해인 <잔치국수> 전문

밀가루 음식은 환자에게 좋지 않으니 면이 나온 날도 밥을 먹으라고 조언하는 수녀님들에게 나는 늘 변명을 한다.

“저에겐 국수가 약이거든요. 너무 힘든 항암치료를 받을 때도 다른 음식은 먹을 수 없는데 오직 국수만 먹을 수 있었기에 그 후로는 국수가 좋아졌어요.”라고

임종하기 직전 나의 어머니도 말갛게 우려낸 멸치 국물에 끓인 콩나물국이나 소면을 찾아 드시며 흡족해 하셨기에 국수를 먹는 날은 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모락모락 함께 피어오른다.

어느 국숫집에 갔더니 하얀 광목 아래에 아래의 시를 적어 놓아 베껴왔는데 '국수 예찬‘을 제대로 표현한 것 같아 나도 자주 애송하고 있다.

사는 일은 /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 국수가 먹고 싶다 //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 길거리에 나서면 / 고향장거리 길로 / 소 팔고 돌아오듯 /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 어느 곳에선가 /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 눈물 자국 때문에 / 속이 훤히 들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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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사람들과 /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전문

■ 오늘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입니다

‘오늘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입니다’라는 이 말을 나는 요즘도 강연 중에 자주 인용한다. 독자들이 책에 사인을 요청해도 이 구절을 많이 적어주곤 한다. 아주 오래전 내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어느 선물의 집에서 책갈피 하나를 사게 되었는데 그 안에 적혀 있는 글이다.

‘Today is the first day of rest of your life.'

그 이후로 평소에 늘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 살게 하소서!”하던 기도를 “오늘이 내 남은 생애의 첫날임을 기억하며 살게 하소서”라고 바꾸어서 하게 되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왠지 슬픔을 느끼게 하지만 ’첫날‘이라는 말엔 설렘과 기쁨을 주는 생명성과 긍정적인 뜻이 담겨 있어 좋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적당히 미루고 싶거나 게으름을 부리고 싶을 적엔 나 자신에게 충고한다.

‘한 번 간 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아요. 정신을 차리고 최선을 다하세요. 성실하고 겸손하게!’

‘이 만남이 이분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으니 형식적이거나 기계적으로 대하지 말고 마음에 따뜻한 사랑을 담고, 얼굴엔 환한 웃음을 보이세요.’

‘첫 약속을 잊었군요. 어떤 일이 있어도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고 인내하며 힘을 얻기로 했잖아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만 보배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사람들의 다양한 부탁들을 선과 사랑의 구슬을 꿰는 기회라 여기고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열심히 해보세요. 짜증내거나 찡그리지 말고, 이왕이면 기쁘게 감사하게 침묵하면서 말이지요.’

‘오늘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입니다.’

이 말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이 말을 계속 되새김하다 보니 이런 기도가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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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싱싱한 희망의 첫 마음으로 내 남은 생의 첫날을 살게 하소서. 새로운 감탄과 경이로움을 향해 나의 삶이 깨어 흐르게 하소서.’

■ 언제라도 앞치마를 입으면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한복 위에 입으시던 하얀 무명 앞치마는 늘 정갈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나도 어른이 되면 결혼해 어머니가 입던 것과 비슷한 앞치마를 입으려고 했으나. 한복 대신 수도복을 입고 그 위에 앞치마를 입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규율이 엄격한 우리 수녀원에서도 앞치마만큼은 각자의 기호에 따라 다양하게 입는 편이다. 나는 요즘 반 앞치마를 즐겨 입는데 내가 앞치마를 입고 나가면 수녀님들이 “시인에겐 그 앞치마가 참 어울리네요”, “어디서 구한 거예요?” 등 등등 꼭 한 마디씩 말한다.

언제라도 치마를 입으면 즐거운 마음이 된다. 굳이 일을 많이 안 해도 무언가를 위해 준비된 마음이랄까, 좀 더 겸손한 마음이 되는 것 같다.

늘 회색, 검은색, 하얀색 옷만 입고 사는 우리에게 적당히 선택해서 입을 수 있는 앞치마의 화사한 빛깔과 무늬는 색다른 기쁨을 선사한다. 더러는 지인들에게 앞치마를 선물 받기도 하는데 차마 입을 수가 없는 사연의 앞치마들도 있다.

나의 첫 시집을 못 구해서 빌린 시집을 통째로 노트에 베껴 썼다는 오랜 독자 변정숙(쿠르넬리아)님이 만들어준 앞치마는, 파킨슨병을 앓던 그녀가 손이 떨리기 전 마지막 선물이 될지 모른다며 만들어준 것이다.

교보문고 사인회에서 잠시 인사를 나눈 뒤로 언제 한 번 따로 만나 이야기 하자 약속해놓고 거리상의 이유도 있어 계속 미루게 되었다. 계절마다 같은 솜씨로 앞치마와 주머니를 보내와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딸이라면서 내게 문자가 날아왔다.

‘암으로 투병 중이던 친정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기에 수녀님께 알려드려요. 어머님 생전에 기쁨을 주시고 좋은 벗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해 주세요!’라고 . 그가 만든 주머니 앞치마들은 아직도 몇 개 남아 있지만, 색색의 앙증스러운 짧은 모양의 앞치마들은 양로원의 어르신이나 봉사자들에게 선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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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지루하거든 / 앞치마를 입으세요 //

꽃밭에 물을 줄 땐 / 꽃무늬 앞치마를 //

부엌에서 일을 할 땐 / 줄무늬 앞치마를 //

청소하고 빨래할 땐 / 물방울무늬 앞치마를 / 입어보세요 //

흙냄새 비누 냄새 반찬 냄새 / 그대의 땀 냄새를 풍기며 /

앞치마는 속삭일 거예요 //

그대의 삶을 /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 조금 더 기쁘게 / 움직여 보라고 //

앞치마는 그대 앞에서 / 끊임없이 꿈을 꾸며 /

희망을 재촉하는 / 친구가 될 거예요 //

때로는 / 하얀 구름도 / 담아줄 거예요

- 이해인 <앞치마를 입으세요> 전문

■ 봄이 오는 길목에서

글방 앞에 나가면 햇살이 하도 좋아 한동안 서 있다 들어오곤 한다. 건강이 나빠지고 부터는 추위를 더 많이 타서인지 햇빛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게 된다. 그래서 전에는 달빛에 관한 시를 많이 썼다면 요즘은 햇빛에 관한 시를 자주 쓰게 된다.

어제는 / 먹구름 / 비바람 //

오늘은 / 흰 구름 / 밝은 햇빛 //

바삭바삭한 햇빛을 / 먹고 마셔서 / 근심 한 툴 없어진 / 내 마음의 하늘이 / 다시 열리니 / 여기가 바로 / 천국이네 - 이해인 <햇빛 일기> 전문

옆방 잔다크 수녀님의 어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을 방문했다. 아흔여섯 살의 최쾌숙 데레사 할머니는 전보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지셨는데도 내가 당신 따님이 예비 수녀일 때 잠시 담임 수녀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어찌나 반기시는지!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내 딸을 잘 부탁합니다”라는 말씀도 오래전부터 되풀이하신다. 내 시가 적힌 그림엽서 몇 장을 드리고 나서 수녀 딸이 빵을 내밀며 어서 드시라고 했더니, 지금 아름다운 시가 내 앞에 있는데 먹는 것이 문제냐며 소리 내어 천천히 시를 읽으셨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리 수녀님은 눈물마저 글썽이며 감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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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두 살 김복엽 루치아 할머니가 혼자 사시는 집을 그분과 중앙성당에서 각별한 인연을 맺은 니콜라 수녀님과 함께 방문하였다. 부신 광복동에서 이름난 미용실을 운영하기도 했던 이분은 연세가 많은 데도 어찌나 유머와 활력이 넘치시는지! 우리 앞에서 시도 읊고 노래도 부르며 즐거워하신다. 아름다운 잔에 손수 끓인 커피를 따라주시며 당신은 평소에 비록 혼자일지라도 예쁜 잔을 바꾸어 가며 기분을 내신다고 했다.

자신의 아픔은 감추고 늘 쾌활한 언어와 미소로 사람들을 대하며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던 젊은 날의 모습이 구십 대까지 이어져 온 것일 거다. 소외감에 빠지기 쉬운 노년기에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 의연함을 나도 배우고 싶다.

3월 입회자들이 기도하러 왔는데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공동체는 이들을 살레는 기쁨 속에서 기다릴 것이다. 봄은 나에게도 다시 시작하라고 한다. 다시 희망하라고 한다. 다시 사랑하라고 한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드는 따뜻한 햇볕이 되라고 한다.

■ 휴가에 대한 단상

휴가는 필경 ‘게으름의 찬양’에 맛 들이는 시기이다. 내가 좋아하는 러끌레르끄의 책 <게으름의 찬양>을 다시 읽어보니 이 구절이 마음에 들어온다.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으로 보이고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은 뛰면서 되는 일도 아니고 군중의 소란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도 아니고 번다한 일도 아니고 바쁜 일들 틈바구니에서 생기는 일도 결코 아닙니다. 고독, 정적, 한가로움이 있고서야 탄생도 있는 법입니다. 때로는 섬광 짓듯 생각이나 걸작이 피어나는 것도, 아마 오래고 한가로운 잉태기가 그에 앞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절에 상관없이 휴가 계획을 세우는 이들도 있지만, 특히 여름 한철 8월은 너도 나도 다양하게 휴가 계획을 세우는 것을 본다. 다양한 이벤트를 겸한 휴가 상품도 많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휴가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이리라. 모든 일을 다 내려놓고 자신의 내면의 뜰을 들여다보며 홀로 고요한 명상과 기도에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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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피정 휴가, 오직 자연과 벗하며 지내는 자연휴가, 친구들끼리 만나서 며칠 동안 함께 친교를 나누는 우정 휴가, 가족끼리 뜻을 모아 길을 떠나는 가족휴가, 평소에 읽고 싶었지만 일에 밀려 잠시 비켜두었던 책이나 실컷 읽으며 즐기는 독서휴가도 있을 것이다.

휴가 때는 긴장을 풀고 느슨하게 늦잠도 잘 수 있어 좋다. 한때는 불면증에 시달리던 나답지 않게 요즘은 낮에도 밤에도 잠을 자주 청하고 쉽게 잠들곤 한다. ‘언젠가는 다시 깨어나지 못할 길고 긴 잠, 영원한 잠을 잘 것이니 지상에서의 잠은 줄여도 되는 거야’라고 생각했다가도 잠이 주는 달콤함과 휴식을 떠올리노라면 쉽게 잠을 포기할 수 없어진다. 잠이 주는 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니까. 힘들 때일수록 잠은 가장 좋은 약이 되어주니까.

■ 느티나무 아래서

우리 수녀원에는 느티나무가 몇 그루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느티나무는 성당 입구에 있는데, 1991년 9월 13일 내가 수녀회 설립 60주년 일을 돕고 있을 때 기념식수로 사 온 묘목이다.

나도 심는 일에 동참하였기에 유난히 더 애착이 가고 정이 들어서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각별한 관심을 두고 바라보곤 한다. 처음엔 어리디 어렸던 나무가 이젠 제법 큰 그늘을 드리운 모습을 보면 얼마나 흐뭇한지 모른다.

나는 몸이 아플 때도 마음이 아플 때도 느티나무를 울려다보며 위로를 받는다. 우울할 땐 새를 보며 명랑해지라고, 답답할 땐 바다를 보며 시원해지라고 그는 내게 말해주었지. 어떤 고통이 있어도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고, 어떤 실수로 너무 부끄럽고 숨고 싶을 때는 ‘괜찮아 괜찮아 다음부턴 잘하면 되잖아’라고 다독여 주곤 했다. 봄에는 연두색 여린 잎으로 여름에는 초록빛잎으로 가을에는 샛노란 잎으로 그늘을 드리워주는 나의 나무. 나도 누군가에게 기쁨과 희망과 사랑의 넓은 그늘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준다.

사계절 내내 / 햇볕과 비와 바람을 맞으며 / 늘 곁에 계신 / 당신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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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 말보다 깊은 침묵으로 / 이해의 눈길을 준 / 당신이 가까이 있어 / 오늘도 행복합니다 / 신을 항한 나의 사랑이 / 조금 더 높아지고 / 이웃을 향한 나의 사랑이 / 조금 더 깊어진 기쁨! / 이 기쁨은 당신이 나에게 / 오랜 세월 가르쳐서 선물한 /초록빛 기쁨입니다 /

참을성, 넉넉한, 따듯함으로 / 긴 세월 기다릴 줄 아는 /

엄마 같고 애인 같은 당신 / 고맙습니다 / 나도 당신을 닮아 /

품이 넓은 사랑을 다시 시작하게 해 주세요, 꼭!

- 이해인 <느티나무 연가> 전문

■ 12월의 반성문

한해의 마지막 달인 12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일곱 개의 하안 문으로 잠시 들어가려 합니다.

1. 감사의 문을 열어봅니다.

매사에 감사한다고 말은 쉽게 하면서도 진정 감사하는 사람답게 사람들을 존중하고 예의바르게 대하고 따뜻한 긍정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진 못했습니다. 나 자신이 감사하기 보다는 남에게 감사하라는 주문을 더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2. 용서의 문을 열어봅니다.

순간마다 마음을 넓게 열고 신앙을 단단하게 하지 않고서는 그 무엇을, 그 누구를 용서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자신도 실천을 잘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용서하라는 말을 너무 많이 했던 경솔함을 용서하십시오.

3. 기쁨의 문을 열어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기쁘게 살겠다고 나름대로 결심은 세웠으나 마음의 여유

가 없는 탓에 웃는 일에 인색하며 우울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어 옆 사람까

지도 불편하게 만들었음을 용서 하십시오.

4. 인내의 문을 열어 봅니다.

삶의 길에서 필요한 참을성과 끈기가 부족한 나이지만 그래도 꾸준히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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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인간적으로 노엽고 화나는 상황에서도 잘 참아 낼 수 있었던 순간들도 꽤 많아서 흐뭇했습니다.

5. 사랑의 문을 열어봅니다.

이론과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이왕이면 좀 더 구체화한 사랑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함께 사는 이들에게는 때에 맞는 애덕의 행위를 찾아 하려고 애썼지요.

6. 겸손의 문을 열어봅니다.

지금껏 그리했듯이 앞으로도 진정 겸손한 사람들을 본보기로 삼고 더 열심히 내가 작아지되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는 ‘겸손실습’을 다시 해보렵니다.

7. 기도의 문을 열어봅니다.

평생을 누구보다 더 많이 더 깊게 기도할 수 있는 삶을 스스로 선택해 놓고도 실은 여태껏 제대로 기도하지 못해 고민이 많은 기도의 열등생입니다. 시간이 없어서도 아닌데 기도 시간을 충분히 떼어놓지 못한 게으름을 용서하십시오.

5부 흰구름 러브레터

<우체국 가는 길>

세상은 / 편지로 이어지는 / 길이 아닐까 // 그리운 얼굴들이 / 하나하나 / 미루나무로 줄지어 서고 / 사랑의 말들이 / 백일홍 꽃밭으로 펼쳐지는 길 //

설레임 때문에 / 봉해지지 않는/ 한 통의 편지가 되어/ 내가 뛰어 가는 길 //

세상의 모든 슬픔 / 모든 기쁨을 // 다 끌어안을 수 있을까 //

작은 말로는 갈 수가 없어 / 넓은 날개를 달고 / 사랑을 나르는 / 편지 천사가 / 되고 싶네, 나는

■ 또 다시 새해를 맞이하며 - 박완서 선생님께

새해엔 더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생각의 심연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가볍고 안일하게 지나치다보니 저의 삶도 깊이가 없어지기에 매사에 신중하게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겠습니다.

1. 새해엔 좀 더 잘 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언제 어디서나 예민한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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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제대로 잘 보는 사람이 되어야 애덕도 그만큼 잘 실천할 수 있기에 마음의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살겠습니다.

2. 새해엔 좀 더 잘 듣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때로 다른 이가 하는 말이 비위에 거슬리거나 마음에 안 들더라도 내색하지 않고 끝까지 정성껏 잘 듣는 인내심을 키우겠습니다.

3. 새해엔 좀 더 잘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자기중심적이지 않은 배려의 말, 때에 맞는 말로 주위를 환하게 밝힐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며 뒷말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겠습니다.

4. 새해엔 좀 더 잘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잘 행동하는 사람이란 결국 선한 마음을 길들이며 사랑을 선택하는 노력으로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화 할 수 있는 현명함을 지니는 것이 아닐는지요.

다시 새해를 맞이하고 새해를 걸어가는 길 위에서 늘 같은 결심을 반복하게 되더라도 새로운 옷을 입은 듯 설레는 마음으로 살 수 있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깨끗하게 도배된 방에서 새해를 맞으니 얼마나 행복한지요.

■ 그리움을 익혀서 사랑으로 만들게요

- 어머니 선종 10주기에 -

강원도 양구에 사는 어느 독자가 어느 날 내가 태어난 마을의 흙과 솔방울을 예쁜 병에 담아 글방에 두고 갔다. 출생지의 흙을 보니 더욱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가 씨앗을 보내 피워낸 분꽃 사이로 어머니의 그리운 얼굴이 떠오른다.

“늘 어디론가 가고 있는 꿈을 많이 꾸곤 해.” 선종하시기 전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시간이 가면 / 더러는 잊히는 그리움도 있다는데 /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만은 / 그렇지가 못하네 //

세월이 갈수록 / 더욱 또렷한 소리와 빛깔로 / 나를 에워싸는 그 모습 //

금방이라도 / 눈물 글썽거려지는 / 희디 흰 그리움 //

언제 어디서나 문을 열어주는 / 어머니는 나의 집, 그리운 집

- 이해인 <시간이 지나가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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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가을 어머니를 여의고 2008년에 <엄마>라는 제목의 사모곡 모음을 펴낸 일이 있지만, 독자의 독후감을 받으면서도 실상 나는 다시 읽어보지 않았다. 이번에 어머니 선종 10주기를 맞아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떤 구절들은 처음 본 듯 새롭고 어느 구절에선 문득 눈물이 나기도 했다.

이 세상에서 / 나와 가장 친한 한 사람 //

33년 연상의 / 언니 같고 친구 같은 엄마가 / 세상을 떠난 후 //

나의 매일은 / 무얼 해도 흥이 없네 //

슬프고 춥고 외로운 / 마음의 겨울이 / 더욱 깊어가네

- 이해인 <언니 같고 친구 같은> 전문

■ 이별 연습

- ‘성 바오로 가정 호스피스 센터’ 가족들께 -

이별을 연습하며 산다고 / 수 없이 말했으나 / 사실은 연습도 하기 전에 / 이별은 갑자기 찾아와서 / 나를 꼼짝 못하게 하네 / 실컷 울지도 못하고 / 슬픔에 익숙하기도 전에 / 또 다른 이별이 찾아와 / 나를 힘들게 하는 / 그것이 삶의 모습일까 / ‘만났다 헤어졌다 / 그것이 인생이야’ / 임종 전의 어머니가 / 시처럼 읊조리던 그 말을 / 되새기며 내가 나에게 일러준다 / 이별 연습 따로 한다고 애쓰지 마 / 그냥 오늘 하루 / 욕심 없이 겸손하게 살 수 있다면 / 그것이 곧 이별 연습인 거라고

- 이해인, <이별 연습> 중에서

‘성바오로 가정 호스피스’에서 사랑의 수고를 하시는 분들의 따스한 손길과 사랑의 마음이 이미 많은 환우에게 믿음과 평화를 주었고. 사별 가족들에게는 위로와 기쁨을 전해 주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 아름답게 더 지혜롭게 더 선하게 더 성실하게 소임을 다하는 희망의 천사. 위로 천사, 평화 천사가 되시길 기도드리며 설립 5주년의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잠언 두 개를 여러분의 가슴에 작은 선물로 새겨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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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어떤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내일이다.’

■ 잘 읽어야 행복한 삶의 길에서

- 장재안 수녀님 께

수련 수녀 시절부터 저의 시들을 멋진 글씨로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도 하고 제가 부탁만 하면 언제든지 글씨 심부름을 잘 해 주시던 우리 팀의 막내인 재안 수녀님, 막내라곤 하지만 저보다는 훨씬 나이도 많고 사회적인 경륜도 많아 저는 수녀님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지요. 먼저 입회했다는 이유로 수녀회 관습에 따라 저를 깍듯한 예의로 대해주실 적마다 그저 황공할 뿐이랍니다.

누가 시킨 게 아닌데도 지난 수십 년간 수녀님은 신문이나 잡지에 제 글이 실리면 어김없이 오려 보내주시고 지금처럼 서로 떨어져서 소임을 할 때는 짤막한 편지도 자주 보내오곤 해서 저는 수녀님을 해인 수녀의 ‘대서방 수녀님’, ‘문서 조교 수녀님’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요즘 새롭게 책을 읽는 재미에 빠져 있습니다. 그간 바쁜 것을 핑계로 책상위에, 침대 아래 쌓아두기만 했던 책들을 불러내서 짬짬이 읽으니 한동안 대상포진의 통증으로 힘들기만 했던 저의 건조한 삶에도 갑자기 초록빛 생기가 스며드는 느낌입니다. 다 읽고 나서 어떤 것은 도서실로 보내고 어떤 것은 보관하고 또 어떤 것은 그 책이 어울릴 만한 사람을 찾아 메모와 함께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합니다. 언제나 메모를 착실히 하는 습관은 제가 수녀님으로부터 배운 것이기도 해요.

책과 더불어 자연을 읽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하늘, 구름 바다, 나무의 빛깔, 새소리, 바람의 맛 등등 귀를 열고 눈만 뜨면 읽을거리가 주위에 너무도 많습니다. 어쩌다 자세히 읽지도 못하고 하루가 갈 때도 있지만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읽으려고 노력한 날은 기도도 잘 되고 시가 쓰이곤 합니다. 자연의 질서는 안정감을 주고 자연의 변화는 밋밋한 삶에 활기를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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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자연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함께 사는 사람들, 이렇게 저렇게 제가 만나는 주변 사람들을 잘 읽을 수 있어야만 기쁘고 행복할 수 있음을 요즘은 더욱 절감하게 됩니다. 지난번 연수에서 우리가 함께 배운 ‘깨알 습관’을 수녀님은 어떻게 실천하고 계시는지요?

수녀님이 계신 솔뫼 수녀원을 저도 방문하고 싶네요. 육체적으론 좀 힘들겠지만 넓은 들판에서 그곳 수녀님들과 함께 향기로운 허브도 따고 싶네요. 수녀님들이 만든 꽃차는 (수녀님들의 수고를 알기에) 함부로 못 마시고 늘 아껴가며 마시게 됩니다.

수녀님 아무튼 잘 읽어야 행복한 삶의 길에서 우리 오늘도 함께 노력합시다. 사랑으로 책을 읽고, 사랑으로 자연을 읽고, 사랑으로 사람을 읽어 더욱 넓어지고 깊어지는 참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나는 일생을 / 그냥 / 읽는 여자로 / 단순한 수녀로 / 살았습니다 //

끝없이 많은 / 책을 읽고 / 사랑을 읽고 //

날씨를 읽고 / 꿈을 읽으며 / 힘든 적도 / 조금 있었지만 /

더 많이 행복했습니다 //

세상을 잘 읽고 /사람을 잘 읽어 / 도(道 )에 이를 수 있는 /

지혜를 구하며 / 오늘도 길을 갑니다 //

나의 숙제는 / 아직도 끝나지 않은 / 기도입니다

- 이해인 <읽는 여자> 전문 (2016. 10)

■ 고운 말 학교의 주인공이 되세요!

- 통영 용남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어린 시절, 나는 학교에 다녀오면 책상 앞에 앉아 가방 정리부터 하고 일단 숙제 먼저 하는 습관을 쌓았기에 지금 수도 생활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는 답니다. “생각도 목소리도 그렇고 스티커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수녀님은 꼭 초등학생 같다니까?”하고 누가 말하면 “날 보고 철이 없다는 거야?”하고 서운해 하기보다는 오히려 동심을 잃지 않고 사는 것에 대한 덕담으로 생각하며 행복해 합니다. 이렇게 나이를 먹어서도 꿈길에 내가 다니던 창경초등학교가 보이고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던 ‘도시락 친구’들이 보이는 걸보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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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시절의 체험은 참 소중하고 오래 간다는 생각을 새롭게 해 봅니다.

길 위에 구르는 / 돌멩이만 돌멩이가 아니다 / 어제 내가 친구를 향해 던진 미운 말 / 성난 몸짓 / 가시 돋친 마음 /모두 다 돌멩이가 된다 / (……)

누구에게라도 함부로 / 돌멩이를 던지지 마라 / 돌멩이도 아프다 / 돌멩이도 나처럼 속으로 눈물을 흘린다

- 강원호 <돌멩이도 아프다> 중에서

■ 시를 사랑하는 선한 마음으로

- 신창원 형제에게

*신창원 : 초등생 때 모 사망, 중학교 자퇴, 15세에 소년원, 살인, 탈옥, 108 건의 강도, 9억 8천만 원의 강도 등

요즘 부쩍 시가 좋아졌다고 편지를 보내온 창원에게 나도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아름다운 <서시>가 실린 윤동주 시인의 유일한 시집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를 주문해서 받으니 1948년, 1955년 판형 그대로를 디자인한 시집과 함께 시인의 육필을 복사한 부록도 곁들여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요. 내가 2002년에 창원에게 보내는 첫 편지에 윤동주의 <서시>를 인용한 것 생각나는지요? 저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맑고 선한 마음을 찾아내라고 하였지요.

김화순 집사님을 통하여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이라는 산문집을 모낸 것을 계기로 나는 청송으로 전주로 직접 면회도 몇 번 갔고 화상 접견도 했으며 어쩌다 한 번씩은 통화도 할 수 있었지요.

언젠가의 편지에서 창원은 데미안 신부님, 마더 데레사의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찬 삶을 보고 너무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지요. 하지만 마음 안엔 여전히 불평, 불만, 증오심이 자리해 있으며 이런저런 정신적인 고통으로 몹시 괴롭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내가 아는 최고수 형제들을 만나고 편지를 주고 받고 하면서 남다른 아픔과 슬픔을 익히 보았기에 ‘때로는 삶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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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는 그 절절한 고백까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답을 했습니다.

착한 마음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 편지하겠다는 그 생각을 버리고 오히려 힘들고 갈등하고 부대끼는 괴로움을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울 적에 글을 쓰라고 나는 당부 했었지요. 자기 자신을 학대하기보다 좀 더 따뜻하게 위로하며 용기를 지니라는 걸 거듭 강조하곤 했습니다. 며칠 전에 받은 창원의 편지에서 시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다시 읽어 봅니다.

…… 요즘은 시의 매력에 흠뻑 빠졌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과 암송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더군요. 해서 어머니의 젖을 갈구하는 아기의 심정으로 암송을 하다 보니 어느 새 스무 편을 훌쩍 넘었습니다.

이런 오묘한 맛 때문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문학을 꿈꿨나 봅니다. 이모님의 시 중에선 <민들레의 영토>, <장미의 기도>, (엉겅퀴의 기도>, <사랑의 길 위에서>, <파도의 말>이 좋아서 우선적으로 가슴에 담았고 한용운 님의 <님의 침묵>과 <복종>, 박인환 님의 <목마와 숙녀>그리고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는 여러 시인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제 안에 담았습니다. 3월까지 오십편을 암송하는 게 목표예요.

시를 외우는 것에서 이젠 쓰는 것 까지도 시도해보겠다고 하니 반가운 일입니다. 내가 쓴 시들을 다른 이의 음성을 통해 듣는 것도 특별한 기쁨이던데 다음에 만나면 나의 시나 자작시를 암송해주길 바랍니다.

본인의 글은 매우 유치해서 오글거린다고 썼던데? 내게 보낸 창원의 편지글들을 보면 자연과 사물을 묘사하는 표현법이 충분히 시적이라서 습작을 거듭하면 멋진 시를 쓸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러니 자신을 비하하진 말고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솔직하게 자연스럽게 시로 표현해보세요.

단, 누구의 흉내도 내지 말고 자신만의 빛깔로 표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디 시를 통해서 좀 더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갈망하는 가운데 행복한 사람이 되길 바라며 응원할게요.

부산 광안리 솔숲길에서 오늘도 창문 너머 푸른 하늘 흰구름의 자유를 그리워할 창원의 이름을 불러보며 기도 한 톨 날릴게요. 몸과 마음의 건강도 잘 챙기세요. 안녕히. (201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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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오늘은 내가 인생의 선배로서 이 땅의 젊은이 여러분에게 몇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으니 진부한 소리라 여기지 말고 사랑의 덕담으로 들어주시면 고맙고 기쁘겠습니다.

1. 여러분의 마음을 맑고 선하게 가꾸는 노력을 하십시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정리하는 일기도 쓰고, 기도도 하고, 좋은 책을 읽으며 내면의 양식을 공급하는 것일 테지요. 이런 저런 일들로 너무 바쁘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느라 마주할 수 없던 마음을 향하여 '마음아, 지금 어디 있니?' 하고 자주 물어 보십시오. 잃었던 마음을 찾아 겸손하고 성실하게 대화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내적인 충전을 매일의 의무로 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기대 합니다.

2.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관리하는 노력을 하십시오.

가기도 하지만 오기도 하는 시간이란 선물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하고 싶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하기 싫지만 꼭 해야 할 것'들을 잘 분별하는 지혜의 덕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 아니면 언제?' 하는 태도로 '영원의 축소판'인 오늘의 시간을 날마다 새롭게 살아 뛰는 빛과 소금으로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3. 여러분의 사랑을 넓혀가는 노력을 하십시오.

사랑의 속성은 한없이 크고 넓은데 우리는 너무도 좁고 근시안 적인 사랑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적이 있습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 불법 낙태율 1위’ 이런 제목도 눈에 자주 띕니다. 이렇듯 반생명적인 분위기에 사는 우리가 날마다 사랑을 말하고 생명을 경축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암담해지곤 하는데……부디 우리의 미래이며 희망인 여러분이 생명을 존중하는 참사랑의 모범과 표지가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4. 일상의 삶에서 감사를 발견하는 노력을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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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를 많이 하면 할수록 거리가 더 많아지고 불평을 많이 하면 할수록 불평할 거리도 더 많아짐을 우리는 자주 경험 합니다.

나는 ‘남이 나에게 해주길 원하는 것을 내가 먼저 실천하다보면 삶에 탄력이 생기고 감사할 일도 그만큼 많아진다’ 는 말을 자주 해줍니다. 감사는 나의 삶이 변화될 수 있는 희망의 시작이고 행복의 시작임을 믿는 마음으로!

■ 어서 오십시오, 프린치스코 교황님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삶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실제로 보여주고 계신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가길 꺼리는 약자들을 향한 자비와 연민,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애정은 우리의 차가운 이기심과 편견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우리도 따뜻하게 열려 있는 당신의 그 보편적인 인간애를 닮고 싶습니다.

교회와 예수님의 가르침을 난해하거나 현학적(학문이나 지식을 뽐냄)으로 말하지 않고 가장 쉬운 일상의 언어로 쉽게 말하는 당신의 지혜를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우리도 뜬구름 잡는 이론가가 아니라 삶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현실을 통찰하고 예리하게 직시하는 당신의 지혜를 닮고 싶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먼저 기도를 부탁하시며 스스로를 항상 죄인으로 자처하시는 당신의 겸손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한 종교의 최고 리더로서도 권위를 내세우고 군림하는 자세보다는 인종과 종파를 넘어 누구하고나 좋은 친구가 되고자 자신의 키를 낮추는 그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위한 일이라면 체면에 매이거나 미루지 않고 결단을 내리는 당신의 자유롭고 결연한 의지와 단호함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시와 음악과 축구를 좋아하고 한 때는 우표 수집에도 열심이었던 아르헨티나의 어린 소년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가 멋지게 성장해 교황이 되어 동양의 이 작은 나라까지 오신 일이 바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불볕더위에 두꺼운 제의를 입는 긴 미사예절은 얼마나 더우실까, 방탄차를 안 타신다니 안전에 이상은 없는 걸까. 젊은이도 감당하기 어려운 닷새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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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그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병이 나시면 어쩌나 온갖 종류의 근신 걱정이 고개를 들지만 이러한 마음도 다 기도 안에 봉헌하리라 다짐하며 하늘을 봅니다.

진정한 의미의 ‘프란치스코 효과’, ‘프란치스코 특수’는 외적인 행사에 있지 아니하고 당신을 뵙는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탄생할 새로운 희망과 사랑에 있음을 당신의 그 백만 불짜리 미소가 미리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교황님, 한 손에는 성모님의 백합을 또 한 손에는 우리나라 꽃 무궁화를 들고 기도하며 기다릴게요. 감사합니다.

■ <죽음과 죽어감>을 읽고

-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박사님께

바로 오늘이 2004년 8월 24일 당신이 78세를 일기로 세상 여정을 마치신 날이군요. 한 사람의 죽음 소식에 삶과 죽음이 함께 있음을 절감하며 쓴 저의 글입니다.

매일 조금씩 /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 죽음을 잊고 살다가 //

누군가의 임종 소식에 접하면 / 그를 깊이 알지 못해도 /

가슴속엔 오래도록 / 찬바람이 분다 //

‘더 깊이 고독하여라’ / ‘더 깊이 아파하여라’ / ‘더 깊이 혼자가 되어라’ //

두렵고도 / 고마운 말 내게 전하며 / 서서히 떠날 채비를 하라 이르며 //

가을도 아닌데 / 가슴속엔 오래도록 / 찬바람이 분다

- 이해인 <죽음을 잊고 살다가> 전문

이제는 그야말로 ‘불후의 명저’로 자리매김한 책 <죽음과 죽어감>을 찬찬히 다시 읽으며 여러 가지 상황적인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수백 명의 죽어가는 환자와 진심어린 인터뷰를 감행한 당신의 그 겸손한 용기, 지극한 인내, 반대하는 이들조차 설득시키는 그 지혜로움에 새삼 감동하였습니다.

십년 가까이 암으로 투병하는 제가 평소에 느끼고 체험한 모든 이야기가 갈피마다 살아 있는 이 책이 얼마나 깊은 고마움 속에 공유하며 읽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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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제가 좋아한 시성(詩聖)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시구를 자주 인용하는 당신에게 더 깊은 애정과 친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죽음과 죽어감>은 누구나 적어도 한 번은 읽어야 할 필독서로 추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책인 동시에 삶을 이야기 하는 책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죽음이 여의사라 부른다. 삼십 년 이상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해 왔기 때문에 나를 죽음의 전문가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데 있었다.’고 당신은 말해 왔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면 당신은 죽음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바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명으로 선정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어떤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내일’이라고 제가 자주 기억하는 그 말을 당신의 책을 보며 더 오래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이라는 말 또한 여러 사례들을 통해 더욱 생생히 실감하였습니다.

시한부 환자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그들에게 스승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며 그들의 갈등과 두려움, 희망이 공존하는 삶의 마지막 시간에 갖게 되는 고통과 소망, 분노를 있는 그대로 전하고자 했다’는 당신의 책 에필로그를 읽으려니 눈물이 핑 돕니다.

오늘을 마지막인 듯이 최선을 다해 살고 싶은 새로운 의지와 열정, 일상의 삶을 더욱 충실히 살고 싶은 고운 갈망을 심어주신 당신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좀 더 따뜻하게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의 눈을 뜨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웃 가족 친지의 죽음뿐 아니라 언젠가는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잘 준비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신 것도 이 책이 저에게 준 선물입니다.

아직 살아 있을 때 잘 죽는 사랑의 겸손을 연습해서 진짜 죽을 때는 고통 중에도 환히 웃으며 떠나고 싶다는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해주신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님, 당신은 진정한 죽음과 삶의 박사로 인류 가족에게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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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직접 만난 일 없는 당신에게 존경과 사랑을 드리며 이토록 훌륭한 책 <죽음과 죽어감>을 써주신 노력의 여정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6부 기도 일기 : 처음의 마음으로

2018년 5월 23일이면 수도서원 50주년이 된다. 1968년 5월 23일 첫 서원을 하고 첫 소임을 나간 곳이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BCK) 경리부 였다. 힘들고 시간 여유도 부족해서 제대로 된 일기가 아닌 메모식 단상을 적어둔 것의 일부를 최근에 다시 정리한 것이다. (1968. 5. 23 ~ 1969. 5. 23)

현충일. 소사분원에 갔다. 기쁘게 살겠다는 내 삶의 모토를 다시 새롭게 하자. 사랑은 기쁨 중에 성장한다. 어제 미국 대통령 후보자 로버트 케네디 피격 사건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 ‘비극은 살아 있는 이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도구다. 그러나 인생의 지침서는 될 수 없다.’ 이것은 그가 한 말.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6. 6)

정릉 본가에 다녀옴. 어머니의 얼굴을 마음속 깊이 새겨둔다. 정릉의 산바람은 무척 상쾌하다. 아름다운 풀 숲, 바람의 향기, 그러나 더 아름다운 것은 마음과 마음이 주고받는 뜨거운 무엇. 그것은 사랑이겠지. 나는 영원히 안주해야 할 나의 땅을 알고 있다. 그래서 피곤해도 기쁨은 크다. 보이느냐고? 보이지 않아도 확신하는 그 마음은 보는 것보다도 위대한 게 아닐는지! (6. 16)

한 싹이 나뭇가지에서 고개를 들고 하늘 위에 있는 해에게 물었습니다. “행복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해가 말했습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행복하지. 너에게는 너만의 향기가 있으니 그것을 베풀어보라. 그것이 바로 사랑이니라.” 주님, 당신이 제 마음에 들어올 수 있는지 없는지 결정하는 사람은 저 외에 아무도 없나이다. (6. 20)

토비아 신부는 ‘고독은 기도의 보금자리’라고 말한다. 퍽 긍정하고 싶은 이야기. ‘주여, 기쁨마다 나에게 하나의 고난을, 저녁마다 나에게 하나의 죽음을 주소서. 내가 무뚝뚝하게 당신에게 고집을 피울 때면 당신 스스로 내 깊이의 추가 되어 주소서.’ - 독일 시인 루트 샤우만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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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것은 마음의 병입니다. 사소한 일에 곧잘 마음을 어둡게 갖는 나의 극히 협소한 마음이 슬퍼지는군요. 잔치에 초대받을 수 없는 사람, 그것은 우울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늘 명랑하게 한결같이 기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요. (7. 25)

마음에 이유 없이 엷은 파동이 인다. 나는 감정의 사치를 잘 수습해야 할 것이다. 온갖 자질구레한 회색빛 근심들, 나는 좀체 그것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작은 채로 만족하십시오, 그러나 이해하는 데는 가장 큰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나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다. (8. 5)

바람이 서늘한 저녁, 나의 기도는 다시 승화되기 시작한다. 하나 둘 씩 떠오르는 별을 헤아리며 나의 자매들과 시를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밤, 높고 차가운 지성으로 별은 나를 키운다. 신앙이 기초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나는 결코 노래 부르지 않겠다. 시는 나를 신께로 인도하는 음악이어야 한다. (8. 17)

8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아침엔 경솔하게 화분을 하나 깨고 오후엔 또 실수! 병환 중이신 선배 수녀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나는 보다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통해서 좀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 수도 생활에는 뜨거움과 더불어 칼에 베이는 듯 아프고 쓰라린 냉정함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겸손하지 못해서 남의 충고를 제대로 못 받아들이는 일이 없기를 기도한다. 내일은 월피정, 나는 또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미소하는 마음으로 나의 길을 가야겠다. (8. 31)

‘원인은 결과보다 크다’, ‘우리 교회에 수도는 녹슬 만큼 있지만, 수원지는 극히 적다’는 성벨라도의 말씀을 새겨본다. 먼저 자신이 풍부해 있지 않으면 타인에게 무언가를 줄 수 없다. 남에게 주고도 자신의 내면은 턴 비어 매마르고 가진 게 없다면 그건 헛일이겠지? (9. 7)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훌륭한 기도인 것 같다. ‘인생은 죽음으로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조그마한 많은 무관심한 태도 속에서 잃어버린다.’ 는 말의 뜻을 생각해 본다.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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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모처럼 오랜만에 맑은 강이 흘러내린다. 내 마음 얼마나 초조하고 번거로웠던가. 나에게 중요한 것은 생활이다. 이 생활에 장애가 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용감하고 과감하게 치워야 할 것이다. (10. 12)

달팽이 같이 자꾸 숨어들고 있는 자신이 밉다. 좀 더 긍정적으로 생을 살면서 기뻐하고 더욱 안으로 웃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나의 웃음이 늘 겉으로만 맴돌고 참된 내적 미소를 지닐 수가 없는 건 내가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10. 23 )

시의 빛깔을 생각해 본다. 어쩌면 이리도 마음이 차분하고 조용하게 신비로워지는 걸까. 나는 시를 생활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는 더욱 간절히 계속되어야 한다. 참 아름다운 시를 읽고 싶다. 너무나 쓰고 싶다. 그리고 당신 안에서만 노래를 부르며 나의 생활을 정리하는 습관을 갖고 싶다. 나는 왜 흩어지고 산만해져 있을까? 생활하면서 항상 시를 생각하고 살아야지. (10. 31)

날마다 순교자 같이……, 더 멀리 위대하고 거대한 무엇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일상생활에서도 순교의 기회는 너무나 많다. 나는 잘못된 생각을 단호히 꺾어 버리는 것, 순결하지 못한 지향들을 칼로 내리쳐야 한다. (11. 12)

기도 생활은 언제나 끝없는 갈증이며 그리움이다. 나에게는……. 오늘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새롭게 가슴을 뛰게 한다.

‘죽을 뻔했으나 보라. 살아 있으며 슬퍼하는 것 같아도 기뻐하며, 가난한 것 같아도 모든 것을 소유하는 자로서 천상의 일꾼임을 드러낼 것이다.

(11. 13)

수도자의 적당주의는 차라리 타락이 아니겠는가? 남의 허물을 보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채찍을 주자. (11. 14)

지도 신부님 말씀

첫째, 사람의 무게는 사랑의 무게다.

둘째, 잘 살고 있는 사람은 결코 환경을 나무라지 않는다.

셋째, 겸손은 기초, 사랑은 완성이다.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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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고 줄기차게 깨어 있지 못하면 나는 곧 넘어질 것이다. 오직 확실한 신앙만이 나에게 기쁨을 더해준다. 월피정의 결심을 순간마다 새롭게 하자. 원장님께 편지를 썼다. 내가 원하는 것은 유명한 문학인이나 이름 있는 수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는 것을, 생활에서 오직 나의 마음과 영혼이 문제라는 것을. (12. 3)

누가 뭐래도 빼앗을 수 없는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다. 내 안에 차츰 더 발돋움하여 나는 사랑하는 여인으로 태어나리라. 주님께선 바로 가까이 너무도 가까이서 나를 바라보고 기다리고 계신다. 나의 일들은 조금씩 기도화 하고 있음을 노력으로 느낄 수 있다. 온종일 마음을 드높이! (12. 5)

남에 대해서 좋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누가 오류를 범했더라도 함부로 죄인으로 심판해선 안 된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고 자기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미련함. 거짓 없이 밝고 참되고 진실한 수도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12. 20 )

‘가하’라는 이름의 벗님이 준 성탄시를 읊어본다.

‘당신이 마리아라면 이 밤에 예수를 낳으시렵니까? / 당신이 어두운 들에서 목동이라면 누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렵니까 / 그리고 또 한 번 당신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시인이라면 / 아무도 갈채하지 않는 시간으로만 갈바리아의 언덕을 찾아오는 그리스도의 밤을 / 그 밤처럼 맞이할 촛불에 조용하 불을 댕기지 않으시렵니까 / 정녕 당신이 마리아라면 이 밤을 위해 어떠한 기도를 준비해야겠습니까’ (12. 24)

성모님. 어머님. 흰 눈이 오는 겨울밤에 타오르는 촛불 밑에서 빨간 사과를 깨무는 싱싱한 멋으로 진정 아름다운 한 편의 시를 쓰고 싶습니다. 보다 창조적인 매일을 갖고 싶은 저의 갈망을 당신은 아십니다. 지금 쯤 저는 좀 더 성장해 있는 마음으로 하나의 좋은 시를 쓰고도 남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슴 안으로 넘치는 감사의 정. 오늘도 아멘. (1. 10)

오늘의 독서.

‘명랑한 사람은 웃고 즐거운 사람은 미소한다. 즐거운 자의 마음에는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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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감사의 마음이 가득하다. 행복하겠노라고 결심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기쁨은 어려움을 이기는 불패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쾌락은 광폭하며 번쩍이는 불과 같다. 기쁨은 고정된 별처럼 여일하다. 즐거움은 낮의 밝음처럼 은은하다. 기쁨은 입술의 미소가 아니라 눈의 미소, 마음의 미소이다. 행복은 발견하는 것이다. 유전을 파서 부자가 되는 것 같이.‘

- 풀톤 쉰 주교 (1. 14)

<어머니>

‘숨찬 세월 돌으시며 / 깊은 한숨 감추시고 / 뼈를 깎는 괴롬조차 / 기쁨으로 달래시니 / 핏빛 같은 그 고운정 / 나의 목숨 태우는 별’

<봉숭아>

‘가신 님을 기다리다 / 흐느끼는 한숨소리 / 안으로 눈 감으면 /

사무치는 서러움을 / 끝내 참기 어려워서 / 타오르는 빨간 숨결‘ (5. 17)

<시간의 얼굴>

‘너무 보고 싶어 / 내 작은 키를 발돋움 해도 / 당신은 왜 숨어 계시나요 /

참 맑고 따습게 여울지는 강물같이 / 하도 조용해서 두려운 당신의 음성 /

가까이 새기려고 귀를 모으면 / 더욱 별같이 멀어만 가시네요 /

보일 듯 말 듯 함께 계시온 님 / 그 얼굴에 피고 지는 무수한 계절 따라 / 나는 환히 등불을 밝힐까요 / 사랑합니다. 창조의 기쁨 당신을‘ (5.22)

<촛불이 되어> - 오늘이 나의 첫 서원 1주기

‘어제 잊고 오늘 사는 / 어여쁜 보람으로 / 가는 세월 오는 세월 / 기도하며 지새운 밤 / 육신 타는 아픔일랑 / 사랑땜에 잊었네.

만사에 있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 그리고 더욱 필요한 것은 자제이다.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느님과 차츰 가까워질수록 또한 인간과도 가까워진다.’ ’무릇 인간은 사랑하는 인간은 더욱 괴로워해야 한다. (5. 23)

2018. 5. 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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