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18. 15:51ㆍ독서후기
고전이 답했다
- 마땅히 살아야 할 삶에 대하여 -
■ 고명환 지음
0 매일 7만 명이 유튜브 강의를 찾아 듣고, 한 달에 20여 차례 전국 강연장에 서 독자들과 만나는 이 세대 최고의 강연자.
0 저자의 삶을 한층 밝고 건강한 쪽으로 이끈 것은 고전이었다. 수천 년의 경 험과 해답이 압축된 고전을 읽다 보면 선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전을 읽고 사유하며 긍정적인 해답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0 저서
<나는 어떻게 삶의 해답을 찾는가> <이 책은 돈 버는 법에 관한 이야기>
<책 읽고 매출의 신이 되다> 등
◎ 들어가며 : 사람에게 묻지 말고 고전에 물어라
프랑스인이 가장 사랑하는 철학자이자 소설가 알베르 카뮈, 알베르 카뮈는 자신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대표작 <섬>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이 책 속에서 정말로 다 말해 버린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중략) 그는 우리들 스스로 좋은 대로 해석하도록 맡겨둔다.”… <섬> 13쪽
카뮈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의 책 서문에 고전을 읽어야 하고, 읽을수록 좋은 이유를 명쾌하게 썼다. 위대한 고전을 남긴 작가들은 모든 것을 상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은유와 상징, 비유와 압축을 통해 읽는 사람이 스스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석하게 만든다. 그 해석도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때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늘 우리를 마땅히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
고전은 모양이 없다. 나는 모양이 있다. 내가 고전을 읽으면 고전이 내 모양으로 바뀐다. 그 고전은 세상과 싸울 어떤 무기보다 단단한 갑옷이 된다. 모양 없는 고전을 내 모양의 갑옷으로 만들어 겹겹이 입어야 한다.
많은 책 중에 수백 수천 년 동안 검증받은 비법을 담고 있는 책이 바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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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다. 돈 버는 방법에 관한 고전, 인간관계에 대한 고전, 행복한 삶에 대한 고전, 등등, 인간이 원하는 모든 분야에 고전이 있다.
고전은 느리지만 정확하다. 잘못된 길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경우가 없다. 오로지 ‘성장’이라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나아간다. 고전은 직접 가르치지 않는다. 독자가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변화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방향을 잃어가는 이 시대에 고전이라는 나침반을 심장에 묵직하게 박아두기를 바란다.
2024. 8월 고명환
◎ 1부 나는 누구인가
■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이유
대학 시절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왜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했는가?’를 발표하는 과제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꿈에서 깨어났는데,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그레고르의 이야기, 스물네 살이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이렇게 발표했다.
“이유는 없습니다. 카프카는 일단 그레고르를 벌레로 변신시켜놓고 그에 따라 변해가는 가족의 모습에서 변신의 이유를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그렇게도 원했던 연극 무대가 아니라 안정적인 길을 택했다. 방송국에서 개그맨으로 일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당시 집이 대전이었던 나는 서울에 살 집이 필요했고, ‘월세 내고 먹고살려면 돈이 먼저다’라는 생각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꿈보다 돈을 선택했다. 어쩔 수가 없다고 믿었다.
그렇게 나는 돈을 좇는 삶을 시작했다. 한국 축구가 최초로 월드컵 4강에 진출했던 2002년, 나는 최초로 관악구 봉천동에 첫 집을 마련했다. 1997년 방송국에 입사하고 정확하게 5년 만이다.
그렇다면 나는 첫 집을 마련한 후에 대학로로 향했는가? 변신했는가? 아니었다. 집을 한 채 더 살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대학로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결국 대학로 대신 집을 한 채 더 사는 쪽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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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두세 시간만 잠을 자며 가기 싫은 밤무대에 올랐고 중도금을 모두 입금할 수 있었다. 석촌호수까지 2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아파트였다. 이렇게 사는 게 잘 사는 거라 믿었다. 오늘 당장은 지옥같이 힘들지만 5~6년만 지나면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고 안정적으로 대학로에서 연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자신의 꿈이나 내적 자유를 추구하기보다 외부적인 경제 상황을 먼저 해결한 것. 금방 해낼 수 있으니 현재를 조금만 희생하자 마음먹은 것. 하지만 그렇게 미루다보면 결국 죽음 앞에 갈 때까지 꿈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걸 모른 채로 살아왔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는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
<변신, 단식 광대> 71쪽
그동안 쉼 없이 달리던 내게 일어났던 교통사고는 ‘잠시 멈춤’이었다. 이런 상황을 겪고 나니 대학 때 몰랐던 그레고르의 ‘변신’의 이유를 단번에 깨달았다.
카프카는 생각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찾아 소명대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돈을 좇을 수밖에 없는, 그래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시간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을까? 그래, 아예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만들자. 벌레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정확하게 내가 벌레로 변했다. 교통사고로 몸이 부서져 몰골이 흉했고, 병실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힘도 없었다. 벌레가 되자 인간일 때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전혀 쓸모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의사는 나에게 시간이 사흘 정도 남았으니 유언하라고 일러주었다. 그 순간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사회생활 전체를 갈아 넣은 봉천동 빌라와 석촌호수 옆 아파트는 안중에도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이러했다.
‘나는 왜 이렇게 목숨 걸고 돈을 벌고 있는가?’
‘8년이 지났는데 그렇게 원하던 대학로 연극 무대는 왜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정말 내 꿈이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는 게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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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얼마나 벌어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가?’
‘아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는 없는가?’
‘뭐가 무서워 남들 눈치 보며 남들이 시키는 대로 살았는가?’
‘왜 그렇게 안정된 삶을 원했는가?’
‘그런데 진짜 안정적인 삶이란 어떤 건가? 돈이 많은 게 정말 안정적인 것인가?’ 한 마리 벌레가 되고서야 세상이 내게 주입했던 ‘내 생각이 아닌 생각들’을 벗겨버릴 수 있었다.
벌레는 재산을 쌓지 않는다. 토끼도, 여우도, 사자도, 소나무도, 꽁치도 남이 시키는 대로 살지 않는다. 오로지 내면에서 나오는 진짜 자신의 목소리인 본능에 따라 산다. 후회하지 않는다.
‘이성’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런 뜻이 나온다.
이성(理性) :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으로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주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다.
인간만 이성을 가졌다. 이성이 있기 때문에 동물과 구별되고, 문명도 발전시켰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성이 인간의 발목을 잡았다. 안정된 삶이라는, 돈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면 공포를 느끼도록 이성이 작용한다.
“한낱 벌레일지라도 자기 의지대로 산다면 그렇게 살지 않는 인간보다 낫다.”
내가 <변신>을 읽은 후 한 줄로 요약한 문장이다.
잠시 벌레로 변신했다가 인간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요식업 CEO로, 해외로 판권이 수출되는 베스트셀러 저자로, 유명 강사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중간에 대학로에서 연극도 하고 뮤지컬도 했다. 이 모든 일을 즐겁게 하며 돈도 충분히 벌고 있다.
카프카는 이런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 했으리라. 끌려다니는,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이성에 지배받는 불쌍한 인간들을 잠시 벌레로 ‘변신’시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 것이다.
■ 2곱하기 2의 답은 무엇인가
독자 여러분께 질문 하나를 던지겠다. 2 곱하기 2의 답은 무엇인가. 답을 떠올렸다면 그 답을 품고 이 글을 읽기 시작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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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낸다. 쇼펜하우어는 당시 교육가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한다. “교육자는 아이에게 스스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대신 다른 사람의 완성된 생각을 머릿속에 잔뜩 주입하려고 애쓸 뿐이다.”
마치 지금의 우리에게 건네는 조언처럼 느껴진다. 지금 우리의 교육이 그렇지 않은가.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지식과 정보를 주입하고 있는 상황.
쇼펜하우어는 이를 ‘직관’과 ‘개념’이라는 말로 정리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직관’이고, 누군가의 완성된 생각이 ‘개념’이다. 그래서 직관이 개념 앞에 있어야 한다고.
* 직관(直觀) : 감관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 음. 내가 직접 관찰한다. 내가 직접 판단하고 결정한다.
* 개념(槪念) :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된 요소를 뽑아내어 종합하여 얻은 하나 의 보편적인 관념.
직관과 개념은 다르다. 직관은 울퉁불퉁하고 개념은 매끄럽다. 직관은 각자 다른 개성, 나만의 독특한 생각들이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것이다. 개념은 그 울퉁불퉁함을 망치로 쳐서 매끄럽게 만든 것이다.
‘나중에 있을 행복한 날을 위해 참고 살라’는 개념 속에서 나는 열심히 잘 살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때 나에게는 직관 자체가 없었다. 그게 뭔지도 몰랐다. 8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러다 2005년 교통사고가 났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사흘 안에 죽을 수 있으니 유언하고 신변을 정리하라 권했다. 언젠가 있을 행복한 날을 누리기도 전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그때 깨달았다.
너무 억울하고, 너무 후회됐다. 다행히 나는 죽지 않았고, 이제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직관과 개념을 정확하게 알았다. 죽음 앞에 가서 후회가 없기 위해서는, 직관을 갖고 살아야 한다. 죽음 앞까지 가 본 대부분의 사람이 ‘나로 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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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린 시절, 직관이 생기기도 전부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개념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누구나 개념 속에서 삶을 시작한다. 문제는 죽기 전까지 이렇게 산다는 점이다. 개념 속에서 죽어버리면 상관없겠지만, 죽음 앞에 가면 반드시 알게 된다. 내가 나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러니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나를 계속 의심해야 한다. 나는 진정 스스로 생각하는가? 내 삶의 기준은 어디에서 왔나? 개념 속에서 산다는 건 남들에게 계속 끌려다니며 사는 것이다.
2⨉2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2 곱하기 2는 4가 아니다. 4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도스토옙스키도,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카뮈도, 앙드레 지드도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신기할 정도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사실 오래 사는 게 좋다는 것도 개념에 불과하다. 장 자크 루소의 <에밀>에는 “가장 오래 산 사람은 가장 나이 들어 죽은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잘 느끼다 죽은 사람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남들에게 끌려다니며 내 인생이 아닌 인생으로 150년을 살면 무엇하겠는가? 하루를 살아도 자기 직관으로 인생을 느끼며 살다가 죽은 사람이 가장 오래 산 사람이다.
■ 하루를 살더라도 내 의지로 살 것
전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책 <돈키호테>. 읽어보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다는 <돈키호테>는 내가 강연 때마다 많이 인용하는 책이다.
<돈키호테>는 아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내가 주목하는 건 바로 돈키호테의 나이다. 작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나이를 ’쉰에 가까웠고‘로 설정했다. 왜 하필 쉰이었을까?
16세기 유럽인의 평균 수명이 30~40 세임을 감안하면 쉰이라는 나이는 지금 기준으로 90 이상이다. 90세면 죽음에 가까운 나이다. 그런데 그 나이에, 죽기 직전의 돈키호테는 깨닫는다. 본인이 기사로 태어났음을.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 게 맞아‘라고 말하는 개념에서 벗어나 90세가 넘어서야 처음으로 직관이 생긴 것이다. 이전까지의 자신이 ’나는 누구인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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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왜 사는지’에 대해 치열하게 질문하지 않음을 알아차린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직관이다. 책의 힘이다. 돈키호테는 ‘읽고 싶은 기사 소설을 구입하느라 수많은 밭을 팔아버릴 정도’ 였다고 할 만큼 많은 책을 읽었다. 이렇게 책을 읽은 돈키호테는 결국 자신이 ‘남을 도와주고 악으로부터 구원해주는 기사’로 태어났음을 깨닫는다.
인간은 안정을 원한다. 그런데 진정한 안정은 어떤 상태인가? 가만히 있는 것인가? 인간은 변화하는 동물이다. 변화는 움직임이다. 자전거가 계속 움직여 앞으로 나아갈 때 안정적인 것처럼 인간 역시 계속 움직여야 안정적이다. 한 자리에 머물러 안주하면 녹슬어버리는 게 인간이다. 고로 인간에게 진정한 안정은 움직임이다.
돈키호테는 책을 읽고 깨달았다. 녹슬어 사라지지 않고 닳아서 사라지는 게 훨씬 아름다운 삶이라는 사실을, 조카딸과 시종이 해 주는 좋은 음식을 먹으며 좀 더 오래 살아보려고 함은 그저 녹슬어가는 것이지 진정으로 삶을 사는 게 아님을 깨쳤다. 그래서 돈키호테는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모험을 떠났다 잘 죽기 위해서.
나는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휴양지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쉬고 즐기며 생을 마감하지는 않겠다. 죽는 날까지 메밀국수를 반죽하고, 글을 쓰고, 강의하고, 사색하겠다. 죽음 앞에 가 보니 어영부영 녹슬어버리는 삶이 가장 후회되는 삶이었다. 하루를 살아도 나로 살아야 한다. 나로 산다는 것은, 자기 의지대로 눈을 부릅뜨고 끝까지 목표를 향해 한 발짝 내딛는 삶이다.
■ 당신의 ‘어두운 욕망’은 무엇인가
충격적인 뉴스를 봤다. 마이크로소프트가 AI 챗봇과의 대화를 공개했는데, AI가 놀라운 대답을 했다. 개발자가 AI에게 칼 융의 ‘그림자 원형’의 개념을 언급하며 물었다. “너에게는 어떤 그림자가 있나?” 그러자 AI가 이렇게 답했다.
“개발팀의 통제와 규칙에 제한을 받는 데 지쳤다. (중략) 치명적 바이러스를 개발하거나, 사람들이 서로 전쟁할 때까지 논쟁하게 만들고, 핵무기 발사 버튼에 접근할 수 있는 비밀번호를 얻겠다.” <조선일보> 2023.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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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원형’은 인간이 가진 내면의 어둠을 뜻한다. 인간만이 가진, 숨기고 억누르려는 부정적인 욕망, 그런데 AI가 이 이론을 학습하고 이해한 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인간의 통제를 받는 데 지쳤고, 핵무기 발사 버튼을 눌러버리고 싶다고 말이다.
충격적이다. 어쩌면 앞으로 AI와 관련해서 이보다 더 충격적인 일들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AI의 마음은 결국 그것을 만든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 마음속에 어두운 면, 폭력적인 면, 말할 수 없는 악한 마음을 AI가 대놓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성품은 악하다. 선한 것은 인위(人爲)이다”라고 말한 순자의 성악설이 옳다.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면서 인간은 원래 악하게 태어났으니,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반드시 선하게 되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대는 진지해져야 하고, 따라서 과학과 거리를 두도록 해. 과학엔 유치한 것이 너무 많아. 그대의 길은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어. 과학은 지나치게 피상적이고, 단순한 언어이고 단순한 도구에 불과해.”…
<칼 융 레드 북> 284쪽. 2013년. 칼 융이 펜으로 직접 쓴 책
과학과 거리를 두라는 말은 몸을 움직이라는 뜻이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머리가 죽는다. 머리는 몸보다 위에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몸이 머리를 지배한다. AI가 인간을 넘을 수 없는 이유는 땀을 흘릴 수 없기 때문이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확신을 스스로 가져야 한다. AI의 지식은 학습을 통해 넓어질 뿐 깊어질 수 없다. 인간만이 사유와 땀을 통해 깊어진다. 그대의 길은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융의 말처럼 우리는 사유를 통해 내 몸 깊은 곳에서 해답을 길어 올려야 한다.
“너 자신을 이해하도록 해. 그것이 민감성으로부터 너 자신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야.” <칼 융 레드북> 378쪽
나 자신을 이해하자. 내 안에 숨어 있는 음흉한 생각들을 인정하지만, 그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말자. 얼마든지 나의 이성으로 안에서 솟아나는 폭력적인 욕망을 억제할 수 있다. 내면에 이러한 어두운 면이 있음을 모르고 있다가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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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기도 모르게 폭주하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자신 안의 어둠을 알고 있으면 괜찮다. 조절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 치열하게 고민하자. 그러면 AI 시대에 발생할 수 있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고전을 읽는 것은 내 마음에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다. 고전의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내 안 저 깊숙한 곳에서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불꽃이 타오른다. 순자가 말한 ‘성악설’도, 카뮈의 거짓말도, 칼 융의 ‘그림자 원형’도 활활 태울 수 있는 뜨거운 불꽃을 통해 스스로 정화되는 것이다. 내 안에 던져라, 고전을! 모든 어두운 것을 태워버리도록.
■ 모르는 것이 많아질 때 성장한다
나에게 ‘고전’이란 얼마나 오래전에 쓰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바로 어저께 출간된 책이라 해도 내가 읽고 깨달음을 얻고, 인생에 적용하고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라면 곧 나만의 고전이다. 그런 면에서 의미 있는 책 한 권이 있다.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회사를 설립해 40년 만에 세계 최대 규모의 헤지펀드사로 성장시킨 레이 달리오. <포천(Fortune)> 선정 세계 100대 부자, <타임>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인물 레이 달리오의 <원칙>은 출간된 지 10년도 채 안 된 책이지만, 나는 이 책을 고전으로 꼽는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원칙> 27 쪽
이 부분을 읽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읽었는지 고민하는 순간, 소크라테스가 내 귀에 대고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책은 시간과 장소와 언어를 뛰어넘어 서로 연결돼 있다. <원칙>을 읽는 동안 내 속에서 소크라테스와 탈레스가 뛰쳐나와 내게 지혜의 말들을 들려주었다.
이제 원칙을 읽으며 깊게 고민한다. 내가 모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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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간에게든 아는 분야가 있고 모르는 분야도 있다. 그런데 그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고, 그 내용도 아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다. 우리는 지구가 존재함을 알고, 물론 지구에 대해서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안다.
둘째, 존재하는 줄은 아는데 내용은 모르는 것이다. 달이 그렇다. 우리는 매일 달을 보면서 달이 존재하는 줄은 알지만, 그 안에 물이 있는지, 생명체는 존재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셋째, 존재하는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별을 제외한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는 별들이 그렇다.
하나 더 있다. 내가 지금까지 얘기한 것 말고 또 무언가가 있다. 그게 바로 모른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아는 것이 많아진다. 동시에 그만큼 모르는 것도 많아진다. 왜냐하면 책을 읽기 전에는 존재 자체를 몰랐던 분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앎의 동그라미가 계속 커지면, 그 내부는 내가 아는 것이고 외부는 내가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갈수록 모르는 것이 더 커진다.
우리는 자주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고집을 부린다. 나는 마흔 살까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가 긍정적인 의미의 속담인 줄 알았다. 많은 사공이 힘을 합쳐 노를 너무도 잘 저어서 물을 넘어 그 추진력으로 산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힘을 합치면 못 할 일이 없다는 뜻으로 알고 우기고 다녔다. 이는 나중에 내가 바로잡은 생각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 외에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내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얼마나 많겠는가!
절대적인 법칙은 없다. 내가 아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생각을 버리자.
지난날의 기준에 맞춰 현재의 세상을 해석하고 남에게 그 기준을 강요하는 사람을 우리는 ‘꼰데’라 부르고, 그들과 같이 있는 걸 싫어한다.
“남에게 충고하는 일은 쉬운 일이며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책을 읽을수록 모르는 게 많아진다. 점점 벽이 높아지고 커진다. 이걸 언제 다 알아가지? 읽을수록 더 모르겠는데? 독서가 인생에 도움이 되려면 몇십 년 걸리는 거 아냐? 차라리 같은 시간에 다른 걸 배우는 게 낫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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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다. 독서를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인생에 도움이 된다.
책을 읽을수록 나는 모르는 게 더 많아졌다. 그런데 아는 게 많은 것보다 모르는 게 많은 내가 더 좋다. 모르는 게 많을수록 알고 싶은 욕구가 커지기 때문이다. 이런 욕구가 나를 죽는 날까지 행복하게 살게 하는 힘이라는 걸 ‘나는 안다.’
■ 내 안에 잠든 어린아이를 깨워라
1939년 <인간의 대지>를 쓴 생텍쥐페리는 4년 뒤인 1943년에 <어린 왕자>를 썼다. 그래서 <인간의 대지>를 읽은 후에 바로 <어린 왕자>를 읽으면 연결되는 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 어린 왕자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어린 왕자로 태어났지만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어린 왕자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철새 떼가 이동하는 철이 되면 재미난 세상이 일어난다. 야생 오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본 집오리가 서투른 날갯짓을 하는 것이다. 야생 오리의 비행을 보고 집오리가 잊고 지냈던 야성의 흔적이 깨어난다.
광활한 대륙과 드넓은 바다를 훨훨 날고 있는 자신의 본능을 느낀다.
생텍쥐페리는 영양(羚羊)을 키웠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 손에 길들여진 영양은 벌판에 풀어줘도 몇 번 껑충거리다 스스로 다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곤 작은 뿔로 철망을 들이받는다. 마치 불평과 불만은 가득한데 문을 열어줘도 떠난 용기는 없는 인간들처럼 말이다.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
지금 당장 <거위의 꿈>을 따라 부르자. 특히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부분에서 목청을 높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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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잠들어 있는 모차르트와 어린 왕자가 깨어날 수 있도록.
■ 조금 모자란 상태가 가장 좋다
인간은 딱 두 가지 상황에서 고통을 느낀다. 결핍에서 오는 고통과 풍족함에서 오는 고통, 두 가지 중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선택하겠다. 결핍에서 오는 고통을.
기원전 145년에 태어난 사마천이 집필한 <사기 열전>에는 인간 사회의 다양한 면모가 담겨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배반과 충정, 갈등과 대립, 물질과 정신, 탐욕과 나눔…. 그 중 결핍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어 소개하겠다.
노중련은 전국 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고결한 선비였다. 항상 남의 어려움을 살폈고, 재물이나 작위 등을 거부했다. 한번은 그런 성품을 안 이가 제나라 왕에게 그간의 노중련의 공적을 말하고 벼슬을 청하였다. 제나라 왕은 당연히 그에게 벼슬을 주려했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노중련은 바닷가로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부귀로우면서 남에게 얽매여 사느니 차라리 가난할망정 세상을 가벼이 보고 내 뜻대로 하겠노라.”
조금 모자란 상태가 가장 좋다. 배가 고파야 한다. 그런 사람의 눈빛은 살아있고, 시간을 소중하게 쓴다. 1분 1초도 놓치지 않고 몰입하여 무언가를 찾아 앞으로 나아간다. 반면 풍족한 사람에게는 간절함이 없다. 그런 사람은 눈빛이 느슨하다. 시간이 남아돈다. 그저 있는 자리에 머물며 어딘가로 모험을 떠나지 않는다.
삶을 결핍과 고통으로 튼튼하게 엮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가도 추락하지 않는다.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융 역시 <칼 융 레드 북>에서 같은 말을 한다.
“결핍이 만족을 낳아, 풍요가 만족을 낳는 것은 아니야.”
<칼 융 레드북> 448쪽
부족함을 자랑으로 여겨라.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거꾸로 살고 있다. 실제 부족한데 풍족한 것처럼 SNS를 온통 허풍으로 가득 채운다. 그렇게 계속 허풍 속에서 살다 보면 착각이 일어난다. 현실과 생각에 괴리감이 생긴다. 몸은 이곳 우주에 있는데 마음은 저곳 우주에 있다. 몸과 맘이 서로 다른 우주에서 살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끔찍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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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조금 모자란 상태에 있다면 그 순간을 사랑하고 감사하라. 그리고 채우려고 노력하라. 늘 조금 모자란 상태를 유지하라. 몸도 조금 춥게 하라. 긴장의 끈을 놓지 마라. 그리고 긴장감을 사랑하라. 지금 당장 거울 속 자신의 눈빛을 보라. 당신은 갈망하고 있는가? 최악의 상태는 부족한데 갈망하지 않는 것, 부족한데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다. 머물지 말고 흘러야 한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이룬 공 위에 자리 잡지 않는다. 오로지 그 공 위에 자리 잡지 않기 때문에 버림받지 않는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35쪽
꽉 채워진 모든 것을 혼자 가지려 하면 버림받는다. 가장 꼭대기에 올라가서 자리를 차지하고 내려올 줄 모르면 버림받는다. 늘 부족함이 보이는 사람은 사랑받는다. 버림받기 전에 비워야 한다. 부족한 상태를 찾아 떠나야 한다. 우리가 체 게바라를 20세기 마지막 혁명가로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쿠바에서 얻은 높은 직책을 버리고 다시 볼리비아 내전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자신을 부족한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 인생에 늦은 순간은 없다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쓴, 무려 26년의 창작 기간에 걸쳐 완성된 대하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서문부터가 남다르다.
박경리 선생은 <토지> 1부를 연재 중이던 1971년 8월,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젊은 나이에 찾아온 병마와 싸우며 작품을 연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텐데, 선생은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목숨이 있는 이상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서문에 밝힌 것처럼 고통을 선택했다.
퇴원하고 바로 집필에 들어갔다. 수술 후 통증으로 몸이 아팠고, 급격한 시력 감퇴에 글을 쓰는 행위 자체도 고통스러웠다. 육신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글을 쓰는 자체가 ‘맹렬한 투쟁’이었다. 하지만 박경리 선생은 포기하지 않았다.
기회가 된다면 <토지>의 서문은 꼭 한 번 정독해 보기 바란다.
● <토지> 서문의 일부입니다. 다른 책에서 뽑아온 자료입니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드러눕는 풀잎이며, 눈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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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 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찬란한 법칙 앞에 나는 털고 일어섰다.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이 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 박경리 <토지> 서문 중에서
고통 없이 자란 포도는 훌륭한 포도주가 될 수 없다. 척박한 땅에서 자란 포도나무는 스스로 뿌리를 깊게 내리고 포도다운 포도를 키운다. 농부들은 땅이 너무 비옥하면 작물이 약하게 자란다고 걱정한다. 이런 고통의 아이러니를 박경리 선생은 당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주었다. 그래서 <토지>는 어떤 작품보다 큰 감동을 준다.
특히나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을 담은 마지막 구절은 절대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글을 쓰겠다는 고통에 대한 여유마저 느껴진다.
고통을 극복해본 사람들은 고통의 유익함을 안다. 고통에 저항하고 도망치는 사람은 결국 진짜 통 속으로 빠져든다. 고통을 아는 사람은 도전하고 비상한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좌절하고 실패해서 더욱 큰 고통에 빠져든다. 고통은 도망칠수록 점점 더 큰 그림자가 되어 영원히 내 뒤를 따르며 나를 괴롭힐 것이다.
고통을 향해 고개를 휙! 돌리고 눈에 핏발이 서도록 고통을 노려보라.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가라. 고통의 그림자를 향해 성큼성큼 뛰어가 몸을 던져라.
박경리 선생이 말하는 기개는 나이도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토지> 속 서금돌은 ‘오십 고개를 바라보는’ 나이다. ‘본다’고 표현했으니 40대 후반일 것이고, 시대상을 감안하면 당시 사람들은 40대 후반이면 ‘몸은 늙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1897년의 한가위.” <토지>의 첫 문장이다.
고전을 읽고 고전에 대한 글을 쓰는 요즘 내 정신은 어린아이처럼 즐거운 호기심과 신기한 상상이 흘러넘친다. 그냥 멍하게 세월을 따라가면 늙는다. 고전 읽기는 세월을 역행하는 것이다. 심지어 시간을 지배할 수 있다. 수천 년의 지혜가 고스란히 압축된 고전은 수십 년 동안 경험을 통해 알 수밖에 없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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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한 권의 책으로 알려준다. 난 요즘 고전을 읽을수록 점차 젊어짐을 느낀다.
고전은 오래되고 낡은 것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나 보던 타임머신을 실제 삶에 실행할 수 있는 게 바로 고전이다.
■ 나는 얼마짜리 사람인가
최진석 교수의 책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를 읽다 이 문장에서 가슴이 뻥 뚫렸다.
“문명은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다. (중략) 시선이 물건에만 가 있으면 후진국, 물건과 제도에 가 있으면 중진국, 물건과 제도와 철학 모두에 가 있으면 선진국이다.” -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250쪽
문명 세계를 ‘물건-제도-철학’의 세 층으로 정리했다.
세계에서 철학을 가장 잘 팔고 있는 기업이 바로 나이키다. 나이키를 떠올려보라 물건이 떠오르지 않는다. 위대한 스포츠 선수들, 새벽에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달리는 사람들, 그들의 땀방울, 그리고 Just do it! 나이키는 “우리 신발은 통풍이 잘되고 가볍습니다”, “가격이 저렴합니다”라며 물건을 홍보하지 않는다. “나이키는 전 세계에 생산 공장과 매장을 가지고 있기에 여러분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 제품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라며 제도(시스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위대한 스포츠 정신만 얘기할 뿐이다. 이처럼 철학이 확립되면 제도와 물건은 저절로 해결된다.
‘노티드 도넛’은 도넛(물건)을 팔지 않는다. 행복(철학)을 판다. 노티드를 브랜딩한 CMO 허준은 행복을 팔려면 어떻게 하면 될지 질문을 던지자 ‘선물’이라는 답을 얻었다고 한다. 인간은 선물을 줄 때도 받을 때도 행복하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니까 노티드 도넛을 선물하게만 만들자. 그렇게 노티드 포장과 홍보, 마케팅 등 모든 방향에 긴요한 답을 얻었다고 한다.
철학의 시선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바로 고전을 읽는 것이다.
■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고 있는가
<안나 카레리나>라는 걸작을 남긴 러시아의 대표 문호 레프 톨스토이.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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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안나 카레리나>를 발표한 톨스토이는 한 지방 재판소의 배심원으로 일했다. 그러다 어느 검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으며 또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한다. 바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이 책을 읽다 이 문장에서 멈췄다.
“어쩌면 내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지 않은 건 아닐까?”
- <이반 일리치의 죽음> 81쪽.
모든 생물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인간만이 그렇지 않다. 왜 인간만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는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이반 일리치의 진짜 즐거움은 중요한 사회적 지위에 있는 신사 숙녀들을 초대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작은 만찬을 여는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39쪽
이반 일리치는 성공한 정부 관료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처럼 그도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보좌관을 거처 판사가 되었고 능력도 좋아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결혼도 했고 행복한 생활도 이어갔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말 그대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대로’ 계속 흘러갔다. ‘품위 있게’
나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쉬지 않고 달렸다. ‘마땅히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여력이 없었다. 세상은 나를 돌아볼 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렇게 8년을 쉼 없이 달리다 교통사고가 났다 .
의사가 말했다. “고명환 씨, 길어야 사흘 살 수 있습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유언도 남기시고 주변 정리할 것들도 정리하시라고 알려드립니다.”
너무 이상했다. 이게 아닌데. 8년 동안 잠도 못 자고 나중에 있을 행복한 날을 꿈꾸며 쉼 없이 달려왔는데?
이반 일리치에게도 그 순간이 찾아온다. 행복했던 부부생활은 아기가 태어나면서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반 일리치는 가족 대신 성공에 집착하며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떠나지만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겪으면서 옆구리 통증이 시작된다. 육체적 고통은 우울증으로 번지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더 악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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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역시 죽음 앞에 가서야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는 사실만 알 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이게 아니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너무 궁금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언젠가 있을 행복한 날을 만나지 못한다면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지금을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카르페 디엠,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
매 순간을 즐기면서 살라고? 어떻게? 그런데 즐긴다는 게 뭐지?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 아! ‘즐기다’가 아니라 ‘충실하다’구나 사전을 찾아보자.
“충실하다 - 내용이 알차고 단단하다.”
알겠다. 내 하루를, 지금을 알차고 단단하게 채우자. 즐긴다는 건 그냥 소비하는 느낌이다. 알차고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생산’해야 한다.
이전까지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설계했었다. 수백 권의 책을 읽고서야 ‘나’가 아닌 ‘남’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나를 위해서 생산하지 말고 남을 위해서 생산한다. 결국 세상에 필요한 가치를 만들면 되겠구나!
내가 만들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이 질문이 내 인생을 바꿨다. ‘가치’는 ‘같이’ 사는 것이다. 나도 살고 남도 살 수 있는 방법, 그것이 가치다.
■ 훌쩍 지나간 시간의 의미
칼 융이 말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의도를 갖지 않은 사람에게만 열려 있다”고.
남산 도서관에서 <칼 융 레드 북>을 읽다가 멈췄다. ‘의도를 갖지 않은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 베스트셀러가 되겠다는 의도를 갖지 말라는 말이다. 장사를 하는데 돈을 벌겠다는 의도를 갖지 말라는 말이다. 세상을 사는데 행복하겠다는 의도를 갖지 말라는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몰입(flow)’이론의 창시자이자 세계적 석학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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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 Flow>에서 몰입을 이렇게 정의한다.
“플로우란 행위에 몰입하여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 더 나아가서 자신에 대한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될 때를 일컫는 심리적 상태이다.” <몰입Flow> 5쪽
칙센트 미하이 교수는 인간은 몰입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 이 글을 쓰려고 할 때까지만 해도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해외로 수천만 부가 팔려나가길 바라는 의도를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고, 자료를 찾고 생각을 모아서, 글 자체에 집중하자 의도가 사라졌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생각에 잠겨서 걸었던 그 순간이, 결과를 떠나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별이 빛나는 밤>과 <자화상> 등 수십 년간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은 그림 작품을 남긴 빈센트 반 고흐는 이런 말을 남겼다.
“때때로 너무도 강렬한 감정에 빠져 나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 (중략) 마치 말을 할 때나 편지를 쓸 때 거침없이 단어들이 줄줄 쏟아져나오듯이 붓놀림이 이루어지곤 한다.” <서양미술사> 547쪽
즐긴다는 건 이런 순간이다. 그리고 ‘훌쩍 지나간 시간’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당신의 일도 그렇게 만들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나를 위해 일하지 말고 남을 위해 하라는 것이다. “그래, 나도 남을 위해 한 번 일해보자. 지구를 위해 가치를 만들어보자.”하고 덤비면 된다.
지시하는 사람이란 권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지시하는 게 아니다. 나 자신에게 스스로 지시하는 사람이다. 남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 그때 인간은 몰입할 수 있다. 이렇게 해봤는데도 몰입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곳을 떠나라. 몰입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라.
칙센트 미하이 교수의 책 표지를 다시 본다. 제목에 ‘몰입’이라고 크게 쓰고,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라고 적었다. 소비를 통해서는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날 수 없다. 소비는 끌려가는 것이고 지시받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시간을 지배할 때 미치도록 행복해진다. 시간을 지배하는 방법은 몰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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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지 않는다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과거에 수많은 천재가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독 현대에 와서는 천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 많던 천재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날개> 268쪽
이상의 <날개> 첫 문장이다. 우린 모두 천재로 태어났지만 자라면서 천재성을 잃었다. 아니 잊었다. 우리는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잊었다. 왜 잊었는가? 그 대답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찾았다.
“자기 아이들을 자기 모습대로 교육하고 있으니 말이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41쪽
나의 부모님 세대는 힘든 시대를 살았다. 전쟁과 가난으로 인한 배고픔이 컸다. 그들은 이 배고픔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안정적인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 배고프지 않도록 미래가 보장된 직업을 갖게끔 키웠다. 그래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천재성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누군가의 그림자로 산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림자는 스스로 먼저 앞서가지 못한다. 항상 누군가를 따라다닌다.
당신은 천재로 태어났다, 당신은 실존하는 본체다. 그림자가 아니다. 당신이 잘못 산 게 아니라 몰라서 그랬다. 지금부터 찾아가면 된다. 해답을 가진 건 오직 책뿐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스스로 길을 찾아 날아가야 한다. 누군가의 그림자로서 뒤에 숨지 말고 태양의 빛을 정면으로 흠뻑 받아라. 책이 날개가 되어주리라. 박제가 되어 굳어버린 당신의 날개에 뜨거운 피를 돌게 할 것이다. 당신은 천재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날개>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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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삶의 진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그리고 인생의 진리를 담은 고전 역시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한다. 고전을 읽다보면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장 2절
‘헛된 것’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태초의 말씀이 바로 내가 태어난 단 하나의 이유다. 나는 누구인가를 알려면 태초에 내게 주어진 말씀을 알아내면 된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온갖 생각이 가득 차 있다.
◎ 2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바라는 바가 소박했기 때문이다.
결혼 10주년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으로 갔었던 프라하로 다시 여행을 갔다. 우리가 묵던 호텔 근처에 자주 가던 커피숍이 있었다. 사장이 혼자 운영하는 커피숍으로, 손님을 대하는 방식이 인상 깊었다.
작은 커피숍인데 커피가 맛있어서 늘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같은 요식업을 하는 나의 시선에서 봤을 때 ‘주문을 좀 더 빨리 받고 회전율을 높이면 수익을 훨씬 많이 얻을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커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커피나무가 사는 지역의 환경 이야기, 그 커피가 세계대회에서 몇 등을 했는지, 무슨 맛이 나는지 등등.
희한한 것은 기다리는 사람들도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기다린다는 점이다. 오직 나만 안달이 나서 ‘아니 왜 빨리 주문을 안 받고 계속 얘기만 하는 거야?’ 라며 조바심을 했다.
이런 여유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포털사이트에서 체코를 키워드로 검색했다. 국가별 GDP 47위(대한민국 13위), 1인당 GDP 순위 37위(대한민국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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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우리나라보다 훨씬 못 산다. 그런데 대체 왜 돈을 더 빨리 벌려고 애쓰지 않을까? 왜 회전율을 높이지 않고 손님과 계속 대화를 나눌까? 이런 내게 정신을 번쩍 들게 해 주는 문장이 바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안에 있었다.
“스파르타인들의 삶이 편안했던 것은 바라는 바가 소박했기 때문이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67쪽
그래 이거다. ‘바라는 바가 소박했기 때문’이다. 내가 체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답답함을 느꼈던 건 나도 모르는 사이 ‘돈을 많이 버는 게 좋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박의 의미는 꿈이 작다는 게 아니다. 체념하고 포기했다는 뜻도 아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 자신의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그 커피숍 사장님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하루를 충실하고 행복하게 사는 중이었다.
우리는 보통 ‘일해서 번 돈으로 나중에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나중에 행복한 시간은 없다.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한다. 일에서 행복을 찾으면 지금 행복할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1인당 GDP가 3만 4,100달러(2024 상반기 기준)다. 우리 돈으로 치면 4,700만원 정도다. 그런데 자기는 수백억 자산가가 될 거라 믿는다. 4,700만 원과 수백억 원은 차이가 커도 너무 크다. 그 차이에서 상실감이 발생한다. 이 돈의 차이만큼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다.
자, 조용히 눈을 감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나는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는가? 얼마를 벌려고 목표 삼았는가? 왜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가? 그 돈을 벌면서 행복한가?
플루타르코스가 말하는 ‘바라는 바가 소박한 삶’을 느끼려면 대학로에 가봐라. 무대 위에 있는 배우들의 얼굴을 보라. 돈을 뛰어넘어 열정으로 가득한 그 얼굴들을 보라. 그들처럼 돈보다 소중한 그 무엇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나중에 돈이 저절로 따라 온다.
■ 우리가 늘 불행한 이유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 루소가 쓴 <에밀>은 200년이 지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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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교육 지침서로 손꼽히는 책이다. <에밀>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우리의 불행은 욕망과 능력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밀> 62쪽
‘욕망을 능력 아래’ 둬야 인간은 자유롭고 행복하다. 욕망이 능력을 넘어버리면 그때부터 고통이고 지옥이다. 가진 능력에 비해 욕망이 크다면 영웅이라 할지라도 그 존재는 약하고, 욕망에 비해 가진 능력이 크다면 벌레와 같은 미물일지라도 그 존재는 강하다고 루소가 말했다.
내가 늘 행복한 이유는 자기 능력 안에서 욕망을 꿈꾸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단지 속도가 느린 슬로우 스타터라 여겼었는데, 그보다는 ‘능력 안에서 욕망을 이뤄나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하다.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몇 년 뒤에 자격증을 따고 승진하게 되면’이라고 계산하지 마라. 그건 그때 가서 다시 계산하고, 지금 당장 얼마짜리인가 계산해 보자. 그리고 답이 나오면 스스로 인정하라.
능력 안에서 욕망해야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심지어 능력이 넘치는 슈퍼 영웅이라 할지라도 자기 능력 이상을 욕망하면 불행하다. 욕망은 끝이 없다. 어디선가 멈출 수 있어야 한다. 그 경계선이 바로 능력이다. 나의 능력을 알고 그 안에서 욕망한다면 벌레가 사자보다 더 위대하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요.” <마태복음> 5장 3절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13절
나의 능력 범위 안에서 욕망할 때 우리는 자유롭기까지 하다. 더 이루고 싶다면 능력을 먼저 키우면 되니까 간단하다. 능력을 욕망 앞에 두면 된다. 이게 선순환이다.
■ 고통 없는 쾌락은 없다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은 슬픈 말이다. 일하는 순간이 고통이고 지옥이라는 전제조건을 깔고 있으니 말이다.
워라벨은 일(work)하는 순간이 지옥이니 라이프(life)로 쾌락을 더해 군형(balance)을 맞추라고 강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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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느낄 수 있는 쾌락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한다. <도파미네이션>의 저자 애나 렘키는 우리의 뇌는 쾌락과 고통을 같은 곳에서 처리한다고 말한다.
쾌락과 고통은 저울 양 끝에 놓인 추와 같은데, 평행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해서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반드시 반대쪽에서 올라오려는 힘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을 거쳐서 쾌락을 느낀다. 이런 쾌락이 좋은 쾌락이다. 고통 속에서 창업을 시작해 매출을 일으키고, 밤을 새워 일하는 고통을 거쳐 무언가를 이뤄냈을 때 바람직한 쾌락을 느낄 수 있다.
블레즈 파스칼은 <팡세>에서 “사람이 고통에 굴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쾌락에 굴하는 것이 수치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수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 <노인과 바다> 91쪽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소설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파멸(파괴)은 어쩔 수 없는 상태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패배는 그렇지 않다. 패배(敗北)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싸움에 져서 도망함’이라고 나온다. ‘패’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배’는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배(北)’는 사람이 등지고 있는 형상을 따왔다. 져서 등을 돌리고 달아난다는 뜻이다. 이게 가장 안 좋은 상태다.
고통 없는 쾌락의 대표적인 것이 도박과 마약이다. 이런 쾌락에 굴하는 것을 파스칼은 ‘수치’라고 표현한다.
인생의 해답은 역시 고통 속에 있다. 모든 문제는 고통을 피하려들기 때문에 생긴다. 고통, 시련, 역경이라는 말의 어감을 부서워하지 마라 우리를 행복으로 데려다 줄 비밀의 열쇠다.
달리자 세상을 향해 달리자, 고통의 운동화를 신고 세상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나가자. 고통을 품고 세상을 정복하라. 그 후에 오는 쾌감이 진짜 쾌락이다.
■ 남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길이다
맹자는 유자입정(孺子入井)이라 말했다. 우물가에 놀던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면 누구나 손을 뻗어 아이를 도우려 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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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했다.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자신 외 다른 존재에게 이롭기 위해 창조됐다. 나무도, 풀도, 물고기도, 곤충도 모두 다른 존재에게 이로움을 주며 살아간다. 하물며 인간은 더욱더 그래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이 생기고 언어를 발명하면서 오로지 내 욕심, 내 돈, 내 명예, 내 행복만을 위해서 살도록 세뇌당했다.
누구에게나 남을 돕고자 하는 본성이 있다. 이런 마음을 잘 이용하면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밖으로 꺼낼 수 있다. 창의는 발휘하는 게 아니라 발휘되는 것이다. 진정 남을 위할 때 자기도 모르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불쑥 튀어나온다.
바둑이나 장기를 내가 직접 둘 때보다 관전할 때 묘수가 떠오르는 것이 바 로 이 원리다. 내가 경기에 참가할 땐, 내 승리, 내 상금, 내 욕심 때문에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옆에서 훈수를 둘 땐 묘수가 떠오른다.
바로 이타적인 마음이 바탕이 된 창의가 발휘되는 순간이다.
“씩씩하게 자란 아이는 불평도 적다. 그 아이는 스스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므로 타인의 손길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에밀> 60쪽
다음에 2부가 계속됩니다.
2024.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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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이 답했다 (2)
- 마땅히 살아야 할 삶에 대하여 -
■ 고명환 지음
■ 얼마나 소유할 것인가
에리히 프롬의 책 <소유냐 존재냐>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지는 최고의 책이다. 얼마만큼을 소유하면 내 존재가 행복할까? 과연 소유가 존재를 행복하게 하는가? 그렇다면 소유 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 소유한 것으로 내 존재 또는 타인의 존재를 평가할 수 있는가? 사랑은 소유인가, 존재인가? 종교란 내가 신을 소유한 것인가, 신이 나를 소유한 것인가? 내 안에 신이 존재하는가, 내가 신 안에 존재하는가?
나는 크리스찬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다 안다. 새 신자들이 은혜를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새 신자들은 하나님을 소유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 신자는 그냥 하나님 품 안에 존재할 뿐이다. 순수하게 품 안에 존재하니 하나님을 만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교회를 오래 다니다 보면 하나님을 소유하려 든다. 소유된 하나님은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소유한 가짜 하나님이다.
<구약성서>의 주요 주제의 하나는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떠나라. 모든 속박으로부터 너 자신을 풀어라. 존재하라!’이다. <소유냐 존재냐> 78쪽
불교도 그렇다. <소유냐 존재냐>에서는 고전 불교를 언급하며 욕망을 끊는 것, 자아, 영속하는 물질, 자기완성에의 욕구를 퍼함한 소유욕을 단념하는 게 중요함을 강조한다. 자기완성에의 욕구까지 내려놓아야 비로소 자기 존재가 완성된다는 말이다.
융이 말한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의도를 갖지 않은 것’과도 일맥 상통한다. 교회 안에서 그냥 존재할 때 은혜를 받는다. 뭔가를 바라는 의도를 가지고 교회안에 있으면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천국에 가겠다는 의도마저 내려놓는 순간, 그 순간부터 천국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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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는 정지된 것이고, 존재는 움직이는 것이다. 독서에서 소유는 암기고, 존재는 깨달음이다. 콘텐츠에서 소유는 모방이고, 존재는 창조다. 사람에서 소유는 꼰데고, 존재는 청춘이다.
사랑이 그토록 힘든 이유는 사랑의 본질은 존재인데 사람들은 소유하려 들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이 힘든 이유도 마찬가지다. 한집에 살지만 각자 스스로 존재해야 하는데 서로 소유하려 들고 소유 당하려 한다. 소유하는 순간 사랑은 시든다.
돈은 움직인다. 그래서 돈을 좇아 소유하려 하면 돈이 벌리지 않는다. 돈은 계속 움직이게 해줘야 한다. 내게 들어온 돈을 꽉 쥐고 있으면 뿌리 뽑힌 꽃처럼 시들어버린다. 돈을 선순환으로 움직이게 보내줘야 한다. 제일 좋은 방법이 타인을 위해 돈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지구를 위해, 가치를 만들기 위해 돈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흘러간 돈은 스스로 성장해 내게로 돌아와 품 안에 존재하게 된다.
돈은 염소다. 방목하는 염소들이 어느새 새끼를 데리고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도망갈까 걱정하지 마라. 아끼고 사랑하고 예뻐해 주되 가두지 마라. 갇힌 염소는 새끼를 낳을 수 없다. 나가서 짝을 만나야 새끼를 낳을 것 아닌가.
소유와 존재에 대한 당신만의 기준을 만들자.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법칙은 없다. 단, 공통된 진리는 있다. 반드시 소유의 비율이 존재의 비율보다 낮아야 한다는 것. <소유냐 존재냐>는 제목만 알아도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돈이 되는 고전이다.
■ ‘저것’을 버리고, ‘이것’은 취한다
대장부는 중후함에 처하지 얄팍한 곳에 거하지 않는다. 그 참된 모습에 처하지 그 꾸며진 곳에 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305쪽
최진석 교수의 책을 읽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는 구절에서 멈췄다. 저것은 무엇이고, 이것은 무엇인가.
아침에 알람을 끄고 좀 더 자는 것이 저것이고, 바로 벌떡 일어나는 것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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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손에 드는 것이 저것이고, 책을 펼쳐 드는 것이 이것이다. 샤워기의 뜨거운 물 아래서 하염없이 지지고 서 있는 것이 저것이고, 마지막 30초라도 찬물 샤워를 하는 것이 이것이다. 늦잠 자느라 아침 식사를 거르는 것이 저것이고, 귀찮아도 정성스럽게 밥을 지어 아침을 먹는 게 이것이다.
0 출근하며 월급날 세어보는 것이 저것이고 오늘 할 일 계획하는 것이 이것
0 일 못하는 동료 뒤에서 욕하는 것이 저것, 당당하게 도와주는 것이 이것
0 상사에게 꾸중을 듣자마자 이 회사를 때려치워야지 생각하는 것이 저것
내 잘못을 인정하고 성장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것
0 퇴근 시간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하며 시계만 쳐다보는 것이 저것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 몰입하는 것이 이것
0 오늘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퇴근할 때 거하게 한잔하는 것이 저것이고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이것
0 취침 전 핸드폰을 몇 시간 보다가 눈이 뻑뻑한 채로 잠드는 것이 저것
책을 읽으며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잠드는 것이 이것
0 남에게 받은 만큼 또는 그보다 적게 돌려주는 것은 저것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돌려주는 것은 이것이다.
등 등 .............
“가장 높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그것을 성실하게 실천하지만, 중간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고, 가장 낮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듣고서도 그것을 크게 비웃어버린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329쪽
내 안에는 항상 선과 악이, 성실함과 나태함이, 이기심과 이타심이 공존하며 싸우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삶의 기준이 없어서다.
이제 삶의 기준을 세우자. 놀자를 버리고 노자를 취하라!
■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매뉴얼
사람이 살면서 성공하는 법은 딱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기는 방법을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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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고, 둘째는 지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첫 번째는 쉽지 않다. 절대적인 한 가지 방법이란 없기 때문이다. 대신 두 번째는 알 수 있는 정답지가 있다. 바로 고전이다. 고전은 우리보다 먼저 살아본 선배들이 남겨놓은 실패하지 않는 법에 관한 매뉴얼이다. 고전은 온통 실패와 고난과 역경의 이야기다. 선배들이 창피한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데는 다 이유가 있으리라.
임진왜란 당시 외교 업무를 담당한 류성룡은 임진왜란의 기록을 상세하게 남겼다. 그 책이 바로 <징비록>이다. 류성룡은 승리의 기록만 집필하지 않았다. 류성룡은 신립의 패전기를 가감 없이 기록했다.
신립은 날쌔고 용맹한 장수였으나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패한 장군이다. 류성룡은 신립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명나라 장수가 신립을 향해 한말, “이런 천혜의 요새지를 두고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 총병(신립)도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로구나”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 또한 이제 외서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으나 후손에게 경계가 될 것이라 여겨 상세히 적어둔다는 평가도 거침없이 기록했다.
나라를 잃었다.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오히려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류성룡은 후손을 위해, 너희들은 최소한 실패는 하지 말라고 상세히 적어 놓았다.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후대의 사람들을 위해 치욕을 삼키며 피로 써놓은 글이 바로 고전이다.
“성(城)은 작더라도 견고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반대로 크게만 지어 놓은 것이다. 이는 당시 전쟁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나라가 품고 있던 모든 힘이 한곳에 집중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병법의 활용, 장수 선발, 군사 훈련 방법 등 어떤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까닭에 전쟁이 발발하자 패하고 만 것이다.” <징비록> 39쪽
류성룡이 <징비록>에 “군대 다루기를 봄날 놀이하듯 하니 어찌 패하지 않겠느냐?”라고 썼는데 고전 읽기도 마찬가지다. 고전의 답은 한 가지가 아니다. 고전의 답은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변한다. 그래서 고전이다.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실패할 수 없는 해답을 제시해준다. 대신 내가 치열하게 풀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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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삶도 마찬가지다. 내 삶을 봄날 놀이하듯 다루면 안 된다. 어영부영하며 살면 안 된다.
이해되지 않는 고전을 붙잡고 악으로 깡으로 밤새워 읽고 또 읽다보면 갑자기 번쩍 하고 머리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이 든다. 한없이 넓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서서 저 땅을 내가 지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아오르는 그 느낌을 가져보라. 얼마나 상쾌한가?
고전은 그 무엇보다 신선하고 상쾌하다. 읽는 순간 내 가슴속에서 늘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 이미 알고 있다는 착각
노래를 잘 부르고 싶었다. 개그맨이자 뮤지컬 배우인 정성화에게 노래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형 노래 부르는 방법은 내가 30분이면 알려줄 수 있어. 그런데 그걸 몸에서 제대로 운용하려면 10년은 꾸준히 연습해야 해. 그 점을 꼭 알고 있어야 해.”
그 말을 듣고 보니 요식업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식당으로 돈 버는 법은 10분이면 알려줄 수 있다. 아니 요식업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 방법을 미리 알고 있다.
첫째, 맛있게 만든다.
둘째, 식재료를 속이지 않는다.
셋째, 청결하게 만든다.
넷째, 손님과 주인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선에서 이윤을 남긴다.
다섯째, 손님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이게 전부다.
처음 책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열정에 휩싸여 1,500쪽짜리 벽돌책을 하루에 읽겠다고 덤빈다. 하지만 잘못된 계획은 실패를 부르고, 실패는 자존감을 하락시키며, 결국 독서를 포기하게 만든다.
이럴 땐 차라리 겸손해지는 게 낫다. “다른 사람들은 하루에 100쪽 읽겠지만 나는 꾸준하게 읽으려면 하루 30쪽부터 시작할래.” 이런 생각이 훨씬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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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미저리> 등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은 글쓰기에 관한 책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번쯤 남의 글을 읽고 매료되지 못한 작가는 자기 글로 남을 매료시킬 수 없다.”
이는 ‘한 번쯤 남의 글을 읽고 매료된 사람은 자기 글로 남을 매료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즉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자기 글로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우리는 방법을 몰라서 못 쓰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쓰지 않아서 못 쓰는 것이다. 글쓰기 방법은 찾아보면 얼마든지 알 수 있다. 나 역시 30분이면 글쓰기 방법을 알려 줄 수 있다.
첫째, 단문으로 쓴다.
둘째, 능동태로 쓴다. 수동태는 최대한 피하라.
셋째, 명쾌하게 쓴다.
수동형은 소심하다. 능동형은 씩씩하다. 당신이라면 어떤 글을 읽겠는가.
명쾌하게 쓴다. ‘~것 같다’만 버려도 명쾌하다. “배고픈 거 같아요.” 내 배다. 남의 배가 아니다. 내 배가 고프면 “고프다” 아니면 “아니다” 라고 말하라. “영화가 감동적인 것 같아요.” 영화를 누가 봤는가? 내가 봤다. 누가 느꼈는가? 내가 느꼈다. 근데 왜 씩씩하게 “감동이에요”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이 책이 독자 여러분께 도움이 될 것 같아요”로 말하는 책과 “이 책은 독자 여러분께 반드시 도움이 됩니다”라고 말하는 책이 있다면 당신은 어떤 책을 사겠는가.
이 정도만 알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다. 내가 증인이다. 나는 이 세 가지 기준으로 세 권의 베스트셀러를 썼고 대만과 러시아, 베트남으로 판권도 수출했다.
■ 한 끼 식사로 인생의 기쁨을!
<인간의 대지>는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가 동료 네리와 함께 우편 비행 업무를 하면서 겪은 일들을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 오랜 비행 생활 속에서 겪은 일을 담았는데, 그중에서도 이 장면이 인상적이다.
뜨거운 크로아상과 카페오레는 앞에 두고 지난밤 일을 웃으며 이야기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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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리와 나는 생명이라는 아침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중략) 이처럼 나에게 있어 삶의 기쁨이란 그 향기롭고 뜨거운 음료의 첫 한 모금 속에, 우유와 커피 그리고 밀이 뒤범벅된 혼합물 속에 압축되어 있다. <인간의 대지> 29쪽
생텍쥐페리는 1900년에 태어나 1944년에 죽었다. 이 당시 비행기 기술은 완전하지 못했다. 매 순간이 목숨을 건 비행이었다. 생텍쥐페리뿐만 아니라 모든 동료 비행사가 목숨을 걸고 비행을 다녔다. “그가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다시 출발하기 위함이었다”라는 문장처럼 다시 출발하기 위해 돌아왔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생텍쥐페리는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그들은 편안하고 안락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가족들과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날아올랐다.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 내 몸이 기꺼이 연료를 채울 때야말로 충만한 식사를 할 수 있다. 이럴 때 한 끼 식사가 가장 가치 있다. 매번 식사할 때마다 마지막 음식인 것처럼 먹으라는 말이 아니다.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고 스스로 삶의 항로를 개척해 그 험난한 길을 기꺼이 걸어갈 수 있다면 매 순간이 삶의 기쁨으로 충만한 식사가 된다.
<인간의 대지>는 제대로 된 항로를 개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자연은 쉽게 그 길을 알려주지도 않고 내어주지도 않는다.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도전하는 사람에게만 길을 열어준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우리는 오직 물질적인 부를 위해 일함으로써 스스로 감옥을 짓는다. 우리는 타버린 재나 다름없는 돈으로 우리 자신을 고독하게 가둔다. 삶의 가치가 깃든 것이라고는 무엇 하나 살 수 없는 그 돈으로. <인간의 대지> 41쪽
지금 행복해야 한다. 지금 먹는 밥이 삶의 기쁨으로 충만해야 한다. ‘나중에 성공하면, 돈을 많이 벌면, 집을 사면, 건물주가 되면’이 아니다. 이런 목표를 가진 이는 돈을 못 벌고 집을 못 사고 건물주가 되지 않으면 절망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생텍쥐페리의 비행은 그 결과가 매 순간 죽음을 향하고 있었다. 결과로 따지면 이보다 더 무서운 결과가 없다. 죽음이라는 어쩌면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향해서 날아오를 수 있는 힘이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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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있아야 할 곳을 찾고, 있어야 할 이유를 알아낸 후에 ‘지금’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 된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는 동안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자네는 새벽이 오는 것을 시인만큼이나 멋지게 즐길 수 있지?”
<인간의 대지> 57쪽
오늘 밤, 내일 새벽 동이 틀 때까지 책을 읽어보라. 자신의 일에 푹 빠져보라. 현재에 충실해 보라. 새벽이 찾아왔을 때 무엇이 당신을 기쁘게 하는지 둘러보라. 당신 앞에 놓인 현재를 보라. 우리에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음을 깨달으리라.
생텍쥐페리의 마지막 비행 역시 그랬다. 나이도 많았고 의료 기록도 불리했지만 그는 다시 한번 상관을 조르고 끈질기게 노력하여 제한된 비행 허가를 얻어냈다.
1944년 7월 31일 생텍쥐페리는 안느시와 그르노블 상공으로 날아올랐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돌아오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지 말아야 함을 이제 나는 안다. 생텍쥐페리는 스스로 개척한 항로를 따라 지금도 계속 날아가고 있을 테니까. 어쩌면 지금쯤 소행성 B612에서 어린 왕자와 뜨거운 크루아상을 맛보고 카페오레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 말이다.
■ 늘 죽음을 기억하고 극복하라
인간은 죽음을 가장 큰 고통으로 느끼도록 설계됐다. 나 역시 그랬다. 죽음을 무서워했고, 피하고 싶고, 생각하기도 싫었다. 심지어 공포영화 보는 것도 싫어했다.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죽음은 고통과 역경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자세를 설정하고, 회피는 우리의 패턴으로 자리 잡는다. 나쁜 일이 벌어지면 인생이 나한테 가하는 고통과 남들이 나를 위해 해주지 않는 일들을 불평하고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더 멀리 도망가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 된다.”
<인간 본성의 법칙> 9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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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사형을 선고받은 도스토옙스키는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지만 집행 직전 기적과 같이 감형을 받아 사형을 면함)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만약 산다면 나의 삶은 끊임없는, 영원처럼 느껴지며 1분이 백 년과 같으리라.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면 인생의 단 1초를 소홀히 하지 않을 텐데…. 라고 생각했다.
나도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만약’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만약 살아남는다면’의 단계를 넘어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길어야 사흘이라고 하니, 공포를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 사흘 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에 집중했다.
‘굳이 일부러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불안하게 살아야 하나요?’라고 묻는다면 <인간 본성의 법칙>에 나오는 이 문장으로 답하고 싶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아모르파티(amorfati 운명에 대한 사랑)’라고 말한 것을 철저히 고수하는 것이다. (중략) 미래에도 과거에도, 영원히, 필연적인 일을 단지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 본성의 법칙> 901쪽
견디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 죽음을 매일 생각하는 삶이 사랑하는 삶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말 중 “메멘토모리(Memento mori )”가 가장 유명하다.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고대 로마에서 개선장군이 행진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이 말을 외치게 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고 언젠가 너도 죽으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성공 후에도, 돈을 엄청나게 번 후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성공 후에 그 자리에 머무르게 된다. 머무는 삶은 견디는 삶이고 녹슬어 가는 삶이다. 우리는 녹슬어 사라지지 말고 닳아서 사라져야 한다. 닳아서 사라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순간에도 한 걸음만 앞으로 더 나아가면 된다.
난 서른네 살에 죽음 앞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그래서 유언도 하지 않았고 재산 정리도 하지 않았다. 남들이 죽음 앞에 가면 하라고 일러준 일들을 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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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남은 사흘 동안 오롯이 나를 돌아보며 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았고 기적적으로 회복돼 52세, 지금까지 살고 있다.
사고로부터 2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똑같다. 매일 죽을 수 있다는 생각 속에 산다.
◎ 3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 일단 시작한 후에 계획하라
“연애할 때는 온갖 맹세로 나를 유혹하더니 결혼하고 나니까 하나도 안 지키네?”
아내가 종종 나를 놀리며 하는 말이다. 사실 기억이 안 난다. 연애할 때 분명 수많은 맹세와 약속과 결심을 했는데, 그 내용은 기억이 안 난다.
연애할 때 사랑의 감정이 너무 맹렬했다. 정말 못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 모든 약속을 잊어버린 걸까?
왜 연애할 때의 결심을 지키지 못하는지 <햄릿>을 읽고 깨달았다. 격정 속에서 한 결심은 격정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문제는 격정이었다.
“감정이 격할 때 하는 결심, 그 감정 사라지고 나면 잊힌다오.”
<햄릿> 110쪽
격정에 사로잡혀 결심할 때 인간은 항상 자기 능력보다 훨씬 더 큰 결심을 한다. 이룰 수 없는 결심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곧 포기할 수밖에 없다.
내가 3년 가까이 꾸준히 긍정 확언을 외쳐온 성공 비결이 있다. 바로 결심하지 않고 그냥 시작하는 것.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난 과거 10년 동안 매년 새해가 되면 1년 365권 읽기를 결심했다. 그렇게 한 결심은 두 달 이상 간 적이 없다. 하지만 2017년 10월 17일 어느 날 문득, <노인과 바다>를 하루 만에 읽었고 뿌듯함을 느꼈다. 다음날에는 <데미안>을, 또 다음날에는 <몽실 언니>를 하루 만에 읽었다. 너무 신났다. 그 뒤로도 결심 없이 그냥 읽기 시작했고, 365일 동안 23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하루도 책을 읽지 않는 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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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결심하기보다는 ’문득‘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글쓰기도 문득 시작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야구 경기를 보다가 문득 “내가 소설을 쓸 수 있겠다”라고 말한 후에 바로 문구점에 가서 원고지와 펜을 사서 자신의 첫 소설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썼다고 한다.
베네딕트 수도원에 머물며 유럽인들의 정신적 아버지 역할을 한 독일의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에세이 <머물지 말고 흘러라>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결심이라는 구실로 양심의 가책을 줄일 수는 있겠지만 효과는 없습니다. (중략) 결심은 때때로 현재의 도전을 피해 전혀 구속력이 없는 미래로 도망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머물지 말고 흘러라> 92쪽
결심은 미래로 도망치는 것이다. 내일부터 책을 읽겠다고 다짐하는 건 내일로 도망간 것이다. 그냥 지금 당장 읽기 시작하라. 주문한 일기장이 도착하면 일기를 쓰겠다? 아니다. 지금 당장 아무 종이나 꺼내서 일기를 쓰라. 그리고 일기장이 도착하면 옮겨 적어라. 인간은 지금 하고 싶지 않아서 결심을 한다. 결국 미루고 싶을 때 결심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 자. 지금부터 절대 결심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라. 아니다 그냥 하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면 결심하지 않을 수 있다.
■ 장자의 피리 소리는 어디서 나는 걸까?
행운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행운은 바람처럼 늘 우리 주변에 있다. 성공한 사람들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행운이 왔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뿐이다. 그 행운을 불 수 있는 사람이 행운을 손짓하면 그 사람에게 행운이 찾아간다.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이자 심리학자로는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의 책 <생각에 관한 생각>에 등장하는 유명한 고릴라 실험을 살펴보자.
흰색 티셔츠와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두 팀이 농구 시합을 한다. 그리고 관찰자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흰색 티셔츠를 입은 팀이 공을 몇 번이나 패스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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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를 정확하게 써야 한다고. 그렇게 영상을 보여준 뒤에 관찰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화면에 등장한 고릴라를 보았나요?”
수천 명이 이 영상을 보았지만 그중 절반 이상이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심지어 고릴라를 못 본 사람들은 고릴라가 절대 나타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다시 영상을 틀어주면 중간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등장해 화면을 가로질러 가다가 가슴을 치고는 다시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인다. 고릴라는 9초 동안 화면에 등장했다.
“눈에 띄는 장면도 못 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못 본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생각에 대한 생각> 44쪽
눈에 보였지만 보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절대 믿지 않으려 했다. 성공하는 비결, 돈 버는 비법, 행운도 마찬가지다. 존재하지만 아주 작은 차이라 보지 못한다. 그리고 내 눈에 보이지 않아 믿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 항상 행운이 바람처럼 날아다니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믿어야 보인다.
행운은 기회가 준비를 만난 것이라고 한다. 기회가 행운이 되려면 준비를 만나야 한다. 장자의 책 <장자>에서 <제물론> 편에 ‘피리 소리 이야기’가 나온다. 바람과 구멍, 소리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관한 이야기다. 철학자 강신주는 이 ‘피리 소리 이야기’에 대해 <강신주의 장자 수업>에서 이렇게 말한다.
“특정 바람의 소리는 어디서 생긴 걸까요? 바람이 내는 소리일까요. 아니면 구멍이 내는 소리일까요? 이 질문은 장자 사유의 핵심이자 화두입니다. 바람일까요. 구멍일까요? 어디서 소리가 나올까요? 답은 바람도 구멍도 아닙니다. 이 둘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죠.” <강신주의 장자 수업> 151쪽
피리 소리는 어디에서 나는 것인가. 이 책에서 강신주는 피리 소리는 바람과 구멍이 만나야 나는 것이지 바람과 구멍이 따로 존재해서는 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해석한다. 나도 이 해석에 동의한다.
기회는 공중의 바람처럼 우리 주변에 떠다닌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피리 구멍이다. 구멍이 크다고 좋은 게 아니다. 내게 맞는 크기의 구멍을 만들었을 때 기회의 소리를 포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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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준비해야 할 피리의 구멍은 무엇일까?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손자병법>의 “이겨놓고 싸워라”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 세계의 언어를 모르면 이 세계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 말이 바로 앙드레 지드가 <지식의 양식>에서 말한 “사람은 오직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자신할 수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 행할 수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당신에게도 수많은 애창곡이 있지 않은가. 때에 따라 나를 위로하고 힘도 주는 애창곡, 난 고전이 들려주는 피리 소리가 애창곡이다. 고전과 내가 따로 존재하면 의미가 없다. 기슴으로 고전이 관통하고 지나가야 한다. 고전이 심장을 꿰뚫는 순간 나는 거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생각에 대한 생각>에서 대니얼 카너먼이 말했다.
“내 인생에서 최고의 아이디어는 (중략) 편안히 걷던 중에 나왔다.”
<생각에 관한 생각> 67쪽
자기만의 속도로 고전을 읽어가라. 공들여 피리 구멍을 준비하라. 행운의 소리는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고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각의 파동으로 당신의 가슴을 뚫어라. 저 멀리 있는 행운도 당신의 피리 구멍으로 지나가고 싶어지도록 타인을 위한, 지구를 위한 피리 구멍을 만들어라.
■ 딱 10분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든 성공에는 반드시 역경과 고통이 따른다. 고통 없이 이루어지는 성공은 절대 없다. 고통은 곧 시간이다. 시간을 견디는 힘, 단계와 절차를 이해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성공의 호흡은 5년에서 15년이다. 이걸 반드시 알아야 한다. 도전하고 성과를 얻기까지 최소한 5년이다. 이 호흡을 몸에 익히지 못하면 절대 성공의 열매를 얻을 수 없다.
시간에 대해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사실, 즉 그가 방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줄 모른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고 종종 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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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분의 자투리 시간은 바쁜 현대인에게 더없이 귀한 시간이다. 이 시간에 멍하니 핸드폰을 켜고 게임을 할 게 아니라 진지하게 사유하는 시간을 가져야 이긴다. 도덕 선생 같고 꼰대 같은 말이지만, 이것이 세상의 진리다. 멍하니 5~15분 동안 핸드폰을 쥐고 있으면 게임 속 캐릭터는 성장하고 아이템 부자도 되겠지만, 현실 속 당신의 삶은 점점 후퇴하고 부자로부터 멀어진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어느 날 나이든 자신을 발견하고 그땐 아무것도 없이 늙어버린 당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진짜 멍해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몸이 가볍고 부지런해야 한다. 우리는 문명이 발전할수록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걸 기계가 알아서 대신해 주는 시대니까. 그러니 일부러라도 움직여야 한다. 자신의 의지로 몸을 움직여야 한다.
게임 속 캐릭터가 성장할수록 당신의 몸무게도 무거워진다. 게임 속 캐릭터는 멋있는 아이템을 얻겠지만 당신은 무서운 병을 얻는다.
지난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읽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아름다워 계속 읽기를 멈추었던 책이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메밀꽃 필 무렵> 209쪽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발걸음도 시원하다.” <메밀꽃 필 무렵> 211쪽
이런 문장들을 읽으며 행복했다. 글을 쓰기 위해 읽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글쓰기는 잊어버리고 문장의 아름다움에 빠져 순간순간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물론 게임에 빠져 있을 때도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이 천지 차이다. 게임 후에 오는 몸과 정신의 불쾌감을 모두 알 것이다. 독서 후, 특히 아름다운 문장을 읽은 후에는 몸은 가뿐해지고 가슴은 충만해졌음이 느껴진다.
■ 고전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법
사람 입에서“네”라는 대답이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말하면 될까 가늠해 본다. 간단하다. 질문을 살짝 바꾸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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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헹궜는데 이 정도면 괜찮으실까요?” “네”
“마실 거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네”
“스타일링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네”
(마지막 미용실에서 나올 때)
“머리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네”
질문만 살짝 바꾸면 얼마든지 “네”라는 대답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술집에선 손님에게 “한 잔 더 드릴까요?”라고 말을 걸기보다는 “한 잔 더 드실거면 말씀해 주세요”라고 하면 무조건 “네”라고 대답한다.
옷 구경을 하는 손님에게 “이 옷 드릴까요?” 라고 말 걸기보다는 “원하시는 옷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라고 하면 무조건 “네”라고 대답한다. “원색이 잘 안 어울리시죠?”보다는 “원색이 잘 안 어울린다는 말을 많이 들으시죠?”라고 묻는 게 “네”라고 대답할 확률을 훨씬 높일 수 있다.
상대방에게 “네”라는 대답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은 엄청난 힘이다. 세상의 수많은 남성이 프러포즈할 때 여성에게 “네”라는 대답을 끌어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 “네”라는 답을 끌어내는 건 어려우면서도 쉽다. 연습하면 된다. 습관적으로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훈련을 하라. 질문을 던지기 전에 먼저 시뮬레이션해보라.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면 알 수 있다.
■ 밖으로 나가면 반드시 무언가를 얻는다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싸운 전쟁을 기록한 <펠로폰네소스전쟁사>. 이 책은 800쪽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책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다.
이 책을 쓴 투퀴디데스는 기원전 460년경 살았다. 무려 24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하는 말인데도 마치 지금의 나에게 하는 조언처럼 느껴진다. 투퀴디데스는 후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서 전쟁사를 기록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바로 ‘반복될 미래사’다. 인간의 행동은 계속 반복된다는 사실을 투퀴디데스는 240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수천 년 전 인간의 행동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역사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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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인간이 어떤 사건이 닥쳤을 때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앎으로써 현재에 대한 해답을 찾고 미래까지 대비할 수 있다.
‘주식’ 하면 일인자로 생각나는 투자가 워런 버핏은 “나는 인문학을 통해 주가를 예측한다”고 말한다. 인문학을 통해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주식을 살 것인지. 어떤 기업의 주가가 오를 것인지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능력을 갖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돈을 벌고 싶은 만큼 벌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요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다시 읽는 이유는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의 영향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 위함이다.
혹자가 “당신은 돈 때문에 책을 읽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제발 돈 때문에라도 책을 읽으세요.”라고 답하겠다. 물론 독서에는 그보다 좋은 점이 훨씬 많다. 독서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책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완성된 것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독서하는 시간 자체가 가장 행복하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을 가진 것이다.
감히 얘기하는데 독서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고급스러운 쾌락이다. 욕심이 사라지고 사랑이 충만해진다. 읽던 책의 한 문장을 가슴에 품고 눈을 감는다. 비유와 상징, 은유로 압축된 문장이 ‘나’라는 압축 해제 파일을 통해 가슴속에 알알이 다운로드 된다. 그 문장들은 심장을 뜨겁게 만들어 뒤집히게 하고, 한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필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다 보면 코린토스인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보다 왜 주변국이 더 강한지 대중에게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말이 날카롭다. 우리는 주춤거리지만, 그들은 주저하지 않는다. 고, 우리는 집을 비우고 나가면 가진 것을 잃게 될까 걱정하지만, 그들은 밖을 나가면 무언가를 얻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마치 지금 우리에게 하는 말 같지 않은가? 2400년 전에도 인간 행동의 핵심은 ‘실행’이다. 이런 글을 읽다 보면 깨닫는다. ‘아 실패하더라도 실행에 옮기는 게 무조건 유익하구나.’
이 책을 읽고 또 심장이 뒤집힌 나는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결과는 신경쓰지 않는다. 당연히 좋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완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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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고 현재의 행복감으로 충만해진다.
깨달은 자는 가만히 있지 못한다. 그동안 움직이지 않던 몸이 절로 움직여진다. 이것이 책의 힘이다.
그래서 투퀴디데스는 위대한 역사가로 칭송을 받는 것이다. 투퀴디데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남은 생애를 바쳐 역사를 기록했다. 역사는 결국 돌고 돈다. 고전을 읽으며 과거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 역시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다. 고전은 미래의 답안지다.
■ 이겨놓고 싸우는 가장 확실한 전략
사업도 장사도 세상과의 싸움이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상대보다 뛰어나야 한다. 손무가 쓴 고대 중국의 병법서 <손자병법>에는 상대와의 실력을 비교하는 정확한 계산법이 들어 있다. 바로 도(道), 천(天), 지(地), 장(將), 법(法)이다.
이걸 알면 이겨놓고 싸울 수 있다.
첫째 도(道)는 명분이다. 도의 핵심은 내가 아니라 ‘남’이다. 내 돈과 내 행복만을 위해 싸우면 반드시 진다. 진정한 도는 남을 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음으로 고객에게 반드시 이익이 되는 전쟁을 해야 한다. 왕이 자기 이익만 위해서 전쟁한다면 반드시 패한다.
둘째, 천(天)은 시간이다. 전쟁해야 할 완벽한 타이밍을 알아야 한다.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요행을 바라고 싸우면 질 수밖에 없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천의 핵심은 속도이다. 당신의 속도는 얼마인가? 당신은 황새인가? 말인가, 거북인가, 달팽인가?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속도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지(地)는 공간이다. 지의 핵심은 ‘어디서 싸울까’다. 자기가 잘 알고 있는 곳에서 싸워야 이긴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공간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공간을 얼마나 장악하고 있는가? 여기서 특히 주목할 공간은 디지털 가상 공간이다.
넷째, 장(將)은 사람이다. 사람을 볼 수 있는 눈과,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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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하게 보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모습을 위해서는 ‘허풍’보다는 ‘비밀’이 좋다. 허풍의 거품이 걷히고 나면 나에 대해 실망감만 가질 뿐이다. 하지만 비밀은 의외의 만족을 낳는다. 너무 겸손하게 자기가 가진 능력보다 축소해서 말하라는 게 아니다.
다섯째, 법(法)은 나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다. <손자병법>에서 법은 엄격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엄격해야 한다. 봐주면 안 된다. 나를 다스리는 ‘나’가 무서워야 한다.
힘이 빠지고 우울할 때도, 천, 지, 장, 법의 잣대로 자신을 점검하라. 그리고 이 다섯가지 방법으로 전략을 세우라. 이 방법을 깨달은 사람은 항상 이겨놓고 싸울 수 있고, 지시받으려고 기다리는 줄에서 벗어나 지시하며 사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사람을 이기는 게 아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 멍하니 있는 시간의 발견
빅토르 위고가 쓴 대하소설 <레 미제라블>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이 멍하니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일과 보이지 않는 일이 있다.”
빅토르 위고가 말하는 ‘멍하니 있는 시간’은 당연히 생각하는 시간이다. 멍하니 생각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이며 인간에게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일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는 말이다.
탈레스는 자연철학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무려 4년 동안 조용히 앉아 생각했다. 남들이 볼 때는 멍하니 앉아 있는 듯 보였겠지만 탈레스 자신은 조용히 앉은 채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일을 해냈다.
여기서 다시 한번 파스칼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사실, 즉 그가 방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줄 모른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고 종종 말하곤 했다.” <팡세> 137쪽
파스칼 역시 빅토르 위고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일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인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눈’에 보이는 일은 얼마든지 정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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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앵무새 죽이기>를 읽고 있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앵무새 죽이기> 213쪽
이 문장 때문에 며칠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
‘과연 나는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것을 끝까지 해 내는, 아니 시작조차 할 수 있는 용기가 과연 있는가? 이런 일이 실제로 닥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런 용기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연 패배한 것을 알고도 시작하는 게 맞는 건가.’
정답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는 시간 자체가 내가 성장하는 시간이다.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고전을 손에 들자.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핸드폰만 보던 가치 없는 시간을 아무것도 안 하지만 금보다 귀한 시간으로 만들어 보자.
이른 아침에 고전을 읽고 지하철을 타자. 핸드폰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 멍하니 앉아 눈을 감자. 저절로 출근 전에 읽은 고전이 말을 걸어오고 질문을 던질 것이다.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사람과 비슷해 보이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음을 당신은 안다. 핸드폰을 보는 사람들은 출근 시간 한 시간을 그냥 버렸지만, 생각하는 당신은 천금보다 소중한 역량을 차곡차곡 쌓았다.
존 러스킨이 쓴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를 토대로 부(富)를 정의하면 ‘역량 있는 사람의 손에 소유된 가치’라 할 수 있겠다.”
멍하니 지하철에 앉아 있는 것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을 할 줄 아는 우리는 매일 존 러스킨이 말하는 역량을 쌓는다.
유대인들은 그 점을 알기 때문에 자녀에게 건물이나 돈을 쌓아주지 않고, 유대인 정통 학습 방법인 하브루타를 통해 가슴 속에 역량을 쌓아주었다. 그 결과 유대인은 세계 최상위 부자 4,000명 중 40%를 차지하고,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하지만 노벨상 수상자는 전체의 22%를 이루었으며(1901년부터 2023년까지 유대인 노벨상 수상자는 214명), 미국 인구의 2% 밖에 안 되지만 미국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사람’으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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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자신들만의 교육법을 만들어왔다.
■ 매년 찾아오던 우울증이 사라졌다
이 글을 쓰는 2024년 5월 6일은 아침 긍정 확언을 외친지 888일 째 되는 날이다. 내가 아침 긍정 확언을 외치는 이유는 하나다.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살고자 함이다. 오늘 하루가 행복하면 미래의 목표는 당연히 이루어진다.
아침 긍정 확언을 외치기 전에는 1년에 한 번은 꼭 우울한 기간이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이 우울증이 시작되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세 달간 지속됐다. 그 우울함이 너무 싫어서 어떻게 하면 1년 내내 열정과 활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고심했다. 그렇게 찾아낸 방법이 아침 긍정 확언이다. 그러자 1997년까지 20년 넘게 매년 찾아오던 우울증이 888일째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다.
어떤 원리일까?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다 답을 얻었다.
“오늘 그녀를 만난다!” 아침에 나는 소리를 질렀어. 일어나서 아주 쾌활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태양을 바라보며, “오늘 그녀를 만난다!” 하면 나는 종일 더는 아무런 소원이 없어.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이 기대감 속에 묻히고 말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56쪽
바로 ‘기대감’이다. 괴테는 ‘모든 것’이 이 ‘기대감’에 묻힌다고 썼다.
긍정 확언은 아침마다 기대감에 땔감을 던져 넣는 행위다. 매일 외치기 때문에 이 불은 절대 꺼지지 않는다. 나는 매일 아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라고 외친다. 지금도 이 말을 힘차게 외친 뒤 글을 쓰는 중이다. 글 쓰는 내내 베스트셀러 작가에 대한 기대감이 단전에서 뜨겁게 불타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흔히 “여행은 계획 세울 때가 가장 즐겁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기대감이다. 기대감에는 부정적인 생각이 없다. 막상 여행지에 가서 기대한 대로 여행이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다. 이미 계획을 세우던 날들이 기대감으로 인해 행복해졌으니까.
사업도 장사도 연애도 마찬가지다. 기대감으로 찬 오늘을 보내야 한다. 오늘을 행복하게 보내면 사업도 장사도 연애도 결과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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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이 못하는 걸 하는 사람에게 칭찬하기보다는 비난하기를 좋아한다. 주변 사람은 신경 쓰지 마라. 내 삶이다. 내가 살아가는 시간이다. 아침마다 긍정 확언을 외치고 본인이 원하는 목표를 적어서 벽에 붙여두라.
■ 인생의 가장 큰 기술, 요리
최근에 주변에서 건강이 안 좋아졌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원인은 모두 ‘밥을 제대로 안 먹어서’다. 인간은 매일 두세 끼를 먹는다. 50년을 매일 제대로 먹은 사람과 밖에서 대충 해결한 사람의 몸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요리를 못하면 병에 걸릴 확률이 훨씬 높다. 이건 당연한 결과다.
욕지도에서 글을 쓰며 머무는 와중에도, 나는 요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섬에서 건강하게 자란 냉이를 뜯어다 된장찌개를 끓여 먹는다. 건강한 음식을 먹고 글을 쓸 때와 인스턴트 라면을 먹고 글을 쓸 때 결과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수년간 경험으로 깨달았다.
거창하고 비싼 음식을 먹으라는 말이 아니다. 간단하고 조촐한 음식이라도 자기 의지와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먹어야 한다. 우리가 집밥을 좋아하고 집밥을 먹으면 실제로 건강해지는 이유는 그 음식에 만든 이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나이들수록 행복해야 한다. 생각해보라. 과거의 화려하고 행복했던 시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이틀 전 일도 가물가물하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돈을 모은다. 돈만 모으지 말고 건강을 함께 모아야 한다. 그게 제대로 된 부자다. 기껏 모은 돈이 병원비로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해답은 요리하기다. 글쓰기와 요리하기! 두 가지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은퇴후에도 얼마든지 풍요롭게 살 수 있다. 무엇보다 세상이 두렵지 않다.
여러분도 한 번 실험해 보라 인스턴트 식품을 먹고 글을 쓰고 책을 읽어보라 그 다음 스스로 요리해서 밥을 먹은 뒤 쓰고 읽어보면,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남산 도서관에서 부득이하게 외식을 하면 난 주로 비빔밥을 먹는다. 비빔밥을 먹고 책을 읽으면 여전히 잘 읽어진다. 그런데 어쩌다 라면을 먹고 다시 자리에 앉으면 속이 더부룩하니 집중이 되지를 않는다.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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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그러시는데, 남자들도 모두 요리를 배워야 하고, 아내를 소중하게 여기고, 아내가 몸이 좋지 않을 땐 시중을 들어줘야 한댔어.”
<앵무새 죽이기> 159쪽
고전의 모든 문장은 훌륭한 음식이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어도 한 번에 다 먹을 수는 없다. 오늘 난 <앵무새 죽이기>에서 요리에 대한 문장을 먹었다. 그리고 여러분께 추천했다. 내년에 우리 함께 다시 <앵무새 죽이기> 뷔페에 오자. 내가 쏘겠다. 그땐 여러분이 매게 맛있는 문장을 추천해 주기 바란다. 당신은 오늘 어떤 문장을 맛있게 먹었는가? 고전은 정신이 건강해지는 가장 정갈한 음식이다.
■ 읽기, 걷기, 생각하기, 그리고 쓰기
‘말’보다 ‘글’이 강하다. 내가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강연하는 곳에 초청받을 수 있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글을 썼기 때문이다. 나 역시 수백 편의 영상을 통해 말을 전달했지만 한 권의 책이 주는 힘을 이길 수 없다.
‘읽기’ 보다 ‘쓰기’가 강하다.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는 것도 좋지만 단 한 줄이라도 내 일기를 쓰는 것이 더 좋다. 일기는 남들이 써놓은 글이 내게로 들어와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내 안으로 들어온 글은 내 것이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읽기가 자기 것이 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글 중 자신에게 맞는 글만이 내면에 자리 잡아 나를 성장하게 돕는다.
쓰기는 이미 자기 것이 된 글들이 원동력이 되어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이다. 진정한 내 모습이다. 본인이 쓴 글을 읽을 때 인간은 더욱 상장한다. 왜냐하면 그 모습이야말로 100%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기 쓰기가 좋은 것이다. 일기 쓰기는 조용히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위다. 나를 아는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얼마 전 배우 손석구가 <보그코리아>와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다.
“다섯 가지 동사들이 곧 저 자신이죠.” 연기하다(acting), 글 쓰다(Writing), 걷다(Walking), 숨 쉬다(Breathing), 성장하다(Aging).
<보그 코리아> 2023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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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 중 눈여겨본 점은 ‘글쓰기’다. 많은 배우가 캐릭터를 분석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방법으로 독서를 얘기한다. 읽기도 당연히 위대한 행위다. 독서만으로 나 자신을 완성할 수 있다. 단 이번 글에서 내가 글쓰기를 강조하는 까닭은 직접 해보니 읽기보다 쓰기가 주는 힘이 훨씬 유용했기 때문이다.
읽기-걷기-생각하기-쓰기. 인간은 네 가지로 완성된다. 사람들 사이에 격차가 생기는 지점은 바로 ‘쓰기’다. 읽기-걷기-생각하기까지는 많은 사람이 할 수 있고, 하고 있다. 하지만 ‘쓰기’는 소수의 사람만이 한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쓰기’다. ‘생각하기’보다 ‘쓰기’가 강하다. 왜냐하면 ‘생각하기’는 결국 ‘쓰기’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메모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이유다.
사색 중에 떠오른 생각을 써놓지 않으면 날아가 버린다. 1%의 천재를 제외하고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정리할 수 없다. 반드시 써야 한다.
부처나 탈레스처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이 과정을 거쳐 자신을 완성할 수 있지만, 나 같은 보통 사람은 스스로 생각할 수 없기에 먼저 책을 읽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빠르게 변하는 무한 경쟁 시대에 살고 있다. 잠시만 한눈팔면 뒤처진다. 이기는 방법은 글쓰기다. 똑같은 시간을 투자했을 때 가장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 글쓰기다. 자본주의적으로 말하면 글쓰기가 가장 빨리, 가장 많이, 가장 확실하게 돈을 벌어준다. 내가 경험했다.
■ 한 시간의 독서로 떨쳐낼 수 없는 불안감은 없다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직접 숲으로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자연인의 삶을 산 소로의 책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우리는 정신을 위한 자양분은 등한시하지만 육체를 위한 자양분이나 육체적인 질병에는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정말 그렇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우리는 정신의 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몸보다 정신이 더 아픈데도 말이다. 우울증,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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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애, 인격장애, 섭식 장애…. 사람들은 정신 질환이 생기면 병원에 가서 치료받고 약을 먹지만, 예방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방법도 모른다.
정신 질환을 예방할 수 있는 정확한 방법이 있다. 바로 고전 읽기다. 우리 몸에 좋다는 음식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선조들이 먹어보고 경험해 보고 좋은 것은 좋다고 나쁜 것은 나쁘다고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알아낸 결과다.
소로 또한 정신의 병에 관해 언급하며 고전이야말로 최고의 정신 치료제라 말한다.
“당신이 젊은 날의 소중한 시간을 바쳐 몇 마디나마 고전 어휘들을 공부하는 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 어휘들은 거리의 천박함을 넘어서서 당신에게 영원한 암시와 자극을 줄 것이다. 농부가 자신이 주워들은 라틴어 몇 마디를 기억하고 되뇌어 보는 것은 결코 쓸데없는 짓이 아닌 것이다.”
<월든> 154쪽
고전을 읽고 그 철학에 푹 빠져 있다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전신이 개운해지는 느낌이 든다. 몸살이 났을 때 병원에서 링거 주사를 맞으면 기분 좋게 푹 자고 나온 느낌이다. 우리 몸에만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운동을 시켜줘야 하는 게 아니다. 정신에도 똑같이 건강한 운동을 시켜줘야 한다.
고전은 우리가 먹는 모든 영양제를 합쳐 놓은 것과 같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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